어머니는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하자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좀 시원하네.”
손에 엉성하게 쥔 이발기를 들고 거울 앞에 선 어머니는 오히려 덤덤했다. 그날의 햇살이 괜스레 따뜻해서, 나는 어머니의 대머리를 보며 울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강해 보여서가 아니라 그 덤덤한 미소가 너무나 익숙한 얼굴에 걸려 있어서. 강인한 사람도 아플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느꼈다.
몇 해가 흘렀다. 어머니는 다시 머리카락이 자라나고, 다시 예전처럼 꽃무늬 스카프를 매고 시장을 누비셨다. 어느 날은 나보다 더 바삐 돌아다녔다. 삶이 어머니를 다시 일으켰고 어머니는 그 안에서 늘 그렇듯 묵묵히 견디며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엔 내 아들이 거울 앞에 섰다.
“좀 웃기지 않아?”
고개를 돌린 아들의 눈동자엔 어색한 웃음이 떠 있었다. 미용실에서 막 돌아온 아들의 머리는 말끔하게 민머리였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어머니와 겹쳐 보였다. 면도날을 따라 사라져간 머리카락들이 어딘가 아득히 먼 기억처럼 떠올랐다.
아들의 민머리를 보니 눈물이 났다. 말없이 아들을 쳐다보다가 어느새 두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들은 당황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왜 울어? 군대 가는 건 당연한 거잖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을 열면 터질 것 같은 감정이 목구멍에 차올랐다.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어머니의 삭발 앞에서는 눈물이 나지 않았는데 아들의 삭발 앞에서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살아야 하기에 했던 삭발과 살아가기 위해 떠나는 삭발. 그 무게는 다르지만 내게는 둘 다 불균형하게 무거웠다.
내가 엄마가 되고서야 어머니의 깊은 주름이 보였다. 주름 속에는 늘 눈물 한 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그 시절 삶의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목이 메어온다. 어머니는 우연히 발견한 가슴의 혹이 악성으로 나와 큰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게 되었다.
수술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항암 치료를 받은 어머니는 점점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다. 맞벌이로 바빴던 자식들은 이런 저런 핑계로 늘 어머니를 우선순위에서 밀어냈다. 방바닥에 떨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도리어 아이에게 해로울까 봐 걱정이 되었다.
당신의 손으로 당신의 머리를 밀었던 날 돌이켜 보면 어머니의 눈은 많이 부어 있었고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한 번만 더 눈을 깜빡이면 물방울이 똑 떨어질 것처럼 하루 종일 물기가 가득했다.
나는 애써 외면했다. 머리는 또 기르면 된다고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전했다. 병과의 외로운 싸움을 가족들은 알아주지 못했다.
하지만 머리를 밀고 들어온 아들의 머리를 보는 순간 나는 눈물이 샘처럼 터져 나왔다. 주위에서는 잘하고 올 아들이니 걱정 말라고 했지만 엄마인 나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아들의 빨래를 개면서도, 아들 방을 청소 하면서도, 자꾸만 눈물이 났다. 몇 년 전 어머니의 민머리가 생각났다. 누구나 겪는 아들의 삭발을 보며 이리도 마음을 못 잡으면서 어머니의 삭발 앞에서 너무나 덤덤했던 나의 무관심이 죄스러웠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손익계산서는 언제나 적자다. 몸의 구석구석 하나씩 저당 잡히면서도 엄마는 아까워하지 않았다. 세상의 많은 엄마들이 이익이 없다 해도 자식을 위해 끊임없이 몸과 마음을 지출한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엄마의 외사랑이 너무나 긴 세월이 지나고서야 자식의 눈에 들어왔고 자식의 마음에 파고들었다.
삭발은 단지 머리를 미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병과 싸운 세월이 있고, 홀로 서기 위한 의지가 있다.
누구는 그것을 담담히 이겨내고 누구는 그것 앞에서 가슴이 미어진다. 모두가 ‘사랑’이라는 말 안에 녹아 있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사랑은 때때로 머리카락보다 더 많은 것을 잃게 하지만 동시에 더 깊은 것을 얻게 한다. 그래서 그 빈자리는 아픔이 아니라 사랑이 머문 자리로 남는다. 부모가 없고서야 그 머문 자리를 깨닫는 자식은 결국 뒤늦게 사랑의 깊이를 배운다. 자신도 누군가의 머문 자리가 되어야 함을 알아가며.
/김경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