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도시에서 태어나서인지 바다를 오랫동안 보지 못하면, 바다가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습니다. 일본에 머믈면서 오랫동안 바다를 보지 못한 저는 K대학의 A선생과 함께 이즈반도에 있는 시모다 답사를 떠나기로 했는데요. 숙소 근처의 고마바도다이마에역에서 만난 우리는 열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180km 떨어진 시모다로 향했습니다. 이즈반도에 들어설 때부터, 차창 밖으로 펼쳐지기 시작한 바다가 제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었습니다.
시모다(下田)는 일본 시즈오카현의 이즈(伊豆)반도 남부에 위치한 조그만 항구도시입니다. 남북 길이 50㎞ 정도의 이즈반도는 도쿄의 남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온난하고 풍광이 좋은 데다가, 아타미나 이토 등의 온천까지 발달하여 휴양지로 유명한데요. 시모다가 일본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시모다역의 간판에도 써있는 것처럼 ‘개국(開國)의 땅’으로서입니다.
시모다는 1854년 미일 화친 조약이 조인된 곳이며, 하코다테와 함께 일본에서 최초로 개항된 곳입니다. 무려 4시간이나 열차를 타고 달려온 우리가 주로 둘러본 것도 개국과 관련한 흔적들이었는데요. 미국의 페리 제독이 행진하였다는 페리 로드, 일본의 첫 미국 영사관이 개설되었던 교쿠센지, 일본과 미국이 미일 수호 통상조약을 맺었던 료센지, 일본과 러시아가 러일 화친 조약을 맺었던 조라쿠지 등이 바로 개항의 흔적들입니다.
제가 시모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시인 백석을 통해서입니다. 백석은 아오야마 학원을 다니던 시절 도쿄에서 기선을 타고 시모다항에 도착한 후에, 근처의 작은 어촌인 가키사키에 머물기도 했는데요. 이 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 바로 시 ‘가키사키(柿崎)의 바다’(1936)와 ‘이즈노쿠니노미나토카이도(伊豆國湊街道)’(1936), 산문 ‘해빈수첩’(1934)입니다.
시모다는 요즘 어디 가나 외국인이 넘쳐 나는 일본의 다른 관광지와는 달리 한적하고 평화로운 어촌 마을이었습니다. 시모다항에는 페리 제독의 동상과 함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를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었는데요. 우리는 야스나리 하면 자동으로 ‘설국’만 떠올리지만, ‘이즈의 무희’(1926) 역시 일본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소설입니다.
‘이즈의 무희’는 제일고등학교 학생인 ‘나’가 유랑 가무단과 함께 이즈반도를 다니다가 시모다항에서 헤어지고 도쿄로 돌아오는 일종의 여로형 소설인데요. 그 여로는 ‘오늘날 ’오도리코보도(踊子歩道)’라 불리고 있으며, 길 주위에는 ‘이즈의 무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정표나 문학비 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즈의 무희’는 야스나리의 초기 작품으로서 자전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인데요. 야스나리도 제일고등학교에 다니던 1918년 이즈반도를 여행했으며, 그때 유랑 가무단과 동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작품 속의 ‘나’는 “고아 근성”과 “우울”을 견디지 못하고 이즈로 여행을 온 것이라 고백하는데요. 야스나리도 두 살과 세 살 때 연이어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열 살 때는 누나를 잃었으며, 열다섯 살에는 조부마저 잃은 고아였습니다.
‘나’는 유랑 가무단, 그중에서도 소녀(무희)와 깊은 교감을 나누는데요. 주인공이 소녀가 속한 유랑 가무단과 맺는 관계는, ‘나’의 머리에 씌어진 모자가 ‘학생 제모(制帽)’에서 ‘사냥모’로, 그리고 다시 ‘학생 제모’로 변하는 것을 통해 압축적으로 드러납니다. 이 시절 고등학교는 오늘날의 대학교에 해당하며, 주인공이 다니던 제일고등학교는 오늘날의 도쿄대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주인공이 쓰고 있는 학생 제모는 주인공이 일본 최고학부에 다니는 엘리트임을 알려주는 증표인데요. 그렇기에 한 숙소에서 만난 노파는 유랑 가무단 사람들에 대해서는 “심한 경멸”을 담아 “저런 것들이야 어디서 묵을지 알 게 뭡니까요. 아무 데서나 자면 그뿐이죠.”라고 말하면서도, 손자뻘인 ‘나’에게는 극존칭을 씁니다.
그러나 ‘내’가 소녀를 비롯한 유랑 가무단과 친밀해지자, ‘나’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가게에서 산 사냥모를 쓰고, 일고 제모는 가방 안에 쑤셔 넣어 버립니다. ‘나’는 우월의식에서 벗어나 유랑 가무단과 동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유랑 가무단은 ‘내’가 자신들이 사는 오시마에까지 함께 갈 것이라 기대하기도 하고, 소녀는 ‘나’를 가리켜, “정말로 좋은 사람이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우월감을 버리고 유랑 가무단과 하나로 연결된 그 순간, 안타깝게도 일고생으로서의 알량한 자의식은 강하게 고개를 쳐듭니다. 이즈의 곳곳에 있었지만, 그동안 한 번도 ‘나’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거지와 유랑 가무단은 마을에 들어오지 말 것.”이라는 푯말이 눈에 들어온 겁니다. 결국 ‘나’는 유랑 중 죽은 아기의 49재를 위해 출발을 하루만 미뤄달라는 유랑 가무단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도쿄행 배를 타기로 결심합니다.
배를 타기 전에, ‘나’는 사냥모를 벗어 버리고, 다시 가방 속에 넣어 두었던 일고 제모를 꺼내 쓰는데요. 아무래도 ‘나’에게 이즈반도와 유랑 가무단, 그리고 “꽃과 같이 웃는” 무희는 한때의 바람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배에 오른 ‘나’는 가방이 젖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눈물 속에서 “달콤한 상쾌함”을 느끼는데요. 이 ‘달콤한 상쾌함’이야말로 현대인이 지닌 원죄의 정체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