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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피난처, 굴항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25-06-15 18:27 게재일 2025-06-1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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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진 굴항. 

버스에 오른다. 비 오는 주말 아침 시간이어서 거리는 한적하다. 비에 젖은 가로수들이 유난히 청명하다. 봄이 무르익고 있다. 관광버스에 오르는 회원들의 얼굴에는 비에 젖은 설렘과 낯선 곳을 향한 호기심이 서려 있다.

종일 내리는 비와 벗하며 간 마지막 장소는 사천에 있는 대방진 굴항이었다. 바다 쪽에서 보면 잘 보이지 않지만 좁은 입구를 통과해 들어오면 넓고 잔잔한 항이 있다. 이곳은 고려시대 말, 남해안에 빈번하게 침입하던 왜구의 약탈을 막기 위해 설치된 ‘구라량영’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 구라량이 폐쇄된 후 순조 때 다시 둑을 쌓았고 1820년경에 완공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수군기지로도 이용해 거북선을 숨겨두었다. 병선에 굴이 달라붙지 않도록 민물로 채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굴항 주변을 찬찬히 한 바퀴 돈다. 수령 200년 이상의 팽나무와 소나무가 숲을 이루는 이곳은 당시 병사들의 활터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왜구를 피해 이곳으로 들어와 숨죽였을 당시를 그려본다. 그들에게 이 작은 항구는 아마도 든든한 피난처였을 것이다.

엄마는 깔끔하고 집안일을 잘하는 사람이었지만 칭찬에 인색했다. 또한 스킨십도 별로 없었다. 삼남매의 맏이인 내게는 더 그랬던 것 같다. 할머니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엄마는 자주 내가 할머니를 닮았다고 했다. 본인이 싫어하는 사람을 닮은 나를 좋아할 리 없다고 짐작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옆집 가족과 덕수궁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갔다. 신고 있던 운동화가 작아서 발이 너무 아팠다. 다른 사람들이 구경하고 나오는 동안 나는 전시관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도 일행이 나오지 않아 불안이 점점 커져 갔다.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아픈 발을 끌고 전시관 안으로 들어갔다. 전시관을 다 돌아보았지만 엄마도 동생도 옆집 식구들도 보이지 않았다. 나를 두고 다들 가버렸나 생각하니 울컥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무작정 덕수궁을 나왔다. 길은 모르고 가진 돈은 없고 운동화는 작아서 발이 너무 아파 서러움이 몰려왔다. 집이 있을 것이라 짐작되는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2시간은 족히 걸은 것 같았다. 집을 찾지 못할 거라는 불안은 다리의 아픔을 잊게 만들었다. 멀리 동대문이 보였다. 비로소 마음이 조금 놓이기 시작했다. 조금 돌아오긴 했지만 동대문에서 집까지는 찾아갈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빨리 가야되겠단 생각에 걸음을 재촉하는데, 버스 창문 너머로 누군가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엄마였다. 안도의 한숨도 잠깐, 슬그머니 걱정이 올라왔다. 집에 가면 얼마나 혼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 까닭이었다. 버스에서 뛰어내린 엄마는 울면서 나를 꼭 안아 주었다. 넉넉지 못한 형편이라 제때 발에 맞는 운동화를 사 주지 못함에 미안해했다. 밤늦도록 숨죽여 우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미안함을 느꼈지만 엄마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에 포근했고 그제사 안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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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숙 시조시인

73개 면의 주민들이 동원되어 둑을 쌓았다. 활처럼 굽은 만을 만들어 병선의 정박지로 사용하던 굴항은 본래의 목적은 상실하였고 주민들이 선착장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팽나무가 굽어보는 이곳은 인근에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하는 학섬과 늑도와 함께 관광명소가 되었다.

든든한 굴항이었던 엄마는 이제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투병 중이다. 심한 골다공증으로 등이 많이 굽었고 탈장으로 고생 중이지만 나이가 많아 수술도 불가하다. 큰딸인 내가 서울에서 울산으로 이사 온 후 꼭 와보고 싶다고 했는데 한 번도 오질 못하고 있다. 어린 나에게 엄마는 은신처가 되어주었듯 노쇠한 엄마에겐 내가 그 역할을 해야 하리라. 하지만 아픔을 견디며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엄마가 아직도 내겐 든든한 피난처이다. 풍파에 지치고 사는 일이 아득해질 때면 여전히 엄마를 찾아간다.

굴항은 팽나무와 함께 고요하다. 오늘도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가만가만 옛일을 들려주고 있다. 종일 내리는 비에 항구의 물결이 살랑인다. 내 마음도 촉촉이 젖어간다.

/시조시인 전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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