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시원한 바닷바람에 태극기가 대문마다 펄럭인다. 송라면 대전1리다. 업무차 왔다. 포항에 오래 살면서도 여태 이 마을을 찾지 못했다. 일이 생겨서야 왔다고 생각하니 지역 역사에 무심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3‧1운동 때, 이곳 대전리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였다는 사실은 전에 문학 모임에서 들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흘러가는 말로 들었던 나는 별 관심 두지 않았었다. 헌법 전문에 들어갈 정도로 우리 역사에 큰 이정표를 남긴, 민족의 독립운동을 먼 과거의 일로 가벼이 여기고 만 것이다.
가만히 “3‧1운동과 6월···.”이라고 되뇌어본다. 1919년 3월 1일. 경술국치 후 일제강점기 10년 차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나라를 빼앗긴 국민이 분연히 일어나 ‘대한독립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곧, 외세 지배에 대한 한민족 공동체의 자생적 항거였다. 한편, ‘6월’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민족 최대의 비극 6‧25다. 하늘은 왜 민족상잔의 6월에 내가 대전리를 찾게 하였을까.
포항시 자료에 따르면 대전리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1~12일 포항면 여천장터(현 육거리 일대) 만세운동에 이어, 3월 22일 청하장터, 3월 27일 대전리 두곡 숲으로 이어졌다. 또, 4월 1일 연일, 동해, 장기, 오천, 대송, 4월 2일 기계, 죽장, 신광, 청하, 송라, 흥해로 확산이 되었다. 참가 연인원 2,900명, 사망자 40명, 부상자 380명, 피검자 320명이나 되는 큰 만세운동이었다.
대전리에는 ‘대전 3‧1의거 기념비’와 ‘포항 만세촌 대전 3‧1의거 기념관’과 대동수(大東數)라 불리는 두곡숲이 있다. 기념관에는 ‘대전 14인 3‧1 의사’들의 넋이 숨 쉬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한 시골 마을에서 14명의 3‧1 의사가 나온 것은 투철한 독립정신, ‘대전리 3‧1정신’의 발로였을 터다.
3‧1운동은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1945년 8‧15해방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외세에 힘입은 불완전한 해방이었기에 나라가 남북으로 갈리는 비운도 맞았다. 그 와중에 남한은 1948년 7월 12일 헌법을 제정, 공포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탄생시켰다. 북한은 소련식 공산주의 체제로 되어, 민족 분단 역사를 만들고 말았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6‧25 한국 전쟁의 달이기 때문일 테다. 나무위키의 6‧25전쟁 자료에는, 한국군과 유엔군의 인명피해가 전사 17만8569명, 부상 55만5022명, 실종, 포로 4만1769명이다. 또, 북한과 중공군 인명피해 112만5000명, 남한 민간인 99만978명, 북한 민간인 150만 명, 기타 피난민 240만여 명, 미망인 20만여 명, 고아 10만여 명에 이른다. 너무 크나큰 비극이다.
집집에 태극기를 달고 이어온 ‘대전리 3‧1 정신’은, ‘6‧25의 달 6월’에다 무엇을 말해줄까. 이렇게 말하리라. “6월이여, 그대는 외세 소련 공산주의 체제를 끌어들여 민족 최대의 동족상잔 6‧25 비극을 만든 달이지 않나. 그러니, 그대 유월이여! 이제부터라도 대전리 3‧1정신을 본받아 핵무기도, 내부 체제전쟁도 바로 없애고 민족 공존공영의 길로 나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네. 꼭, 그리하기를 비네!···.”
/강길수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