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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저울

등록일 2025-09-09 19:43 게재일 2025-09-1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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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아 작가

어제 저녁, 가을 바람이 유난히 기분 좋게 불어왔다. 하루 종일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산책을 나섰다.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짐을 서둘렀고 저녁 바람은 초가을의 신선함과 여유를 가져왔다. 나는 오랜만에 뛰기도 했다. 호흡이 거칠어질수록 운동이 주는 해방감에 머리도 맑아지고 기분도 좋아졌다. 땀이 이마에 맺히자 몸 안에 쌓였던 무거움이 바람결에 흩어지는 듯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신호등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횡단보도의 초록불이 막 깜빡이고 있었지만 무리해서 건너기보다 잠시 더 기다리기로 했다. 저녁 운동을 마치고 많은 사람들이 건너고 있었다. 순간적인 조급함보다 한 박자 늦추는 선택이 나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다음 신호가 켜지자 천천히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눈끝에 무언가가 보였다. 고개를 내려다보니 접힌 지폐가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보지 못했던 지폐가 내게 온 건 행운이지 않을까.

나는 멈칫했다. 지폐를 세어보니 칠만원이었다. 오만 원권 한 장이랑 만 원권 2장이 접힌 채 바닥에 놓여 있었다. 순간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 공(空)돈으로 맛있는 것을 사 먹을 수도 있고, 그간 미뤄온 책을 살 수도 있지 않을까?’욕심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또 다른 생각이 뒤따랐다. ‘이건 누군가의 하루 일당일지도 몰라. 한 어르신이 힘겹게 모아둔 비상금일 수도 있고, 내일 병원에 가야 할 돈일 수도 있잖아.’

지폐가 내 손에 쥐어져 있는 동안, 내 마음은 양쪽으로 기울다 다시 반대편으로 기울기를 몇 차례나 반복했다. 그러나 끝내 한 가지 생각이 가장 크게 다가왔다. 나에게는 칠만원이 특별한 행운처럼 다가올지 몰라도 잃어버린 누군가에게는 삶의 무게만큼 절실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내 발걸음을 가까운 지구대로 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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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대에서 온 문자. 

 

지구대 문을 열며 스스로 조금은 부끄러웠다. 내심 ‘누군가가 찾아올까? 그냥 돌아서서 내 주머니에 넣어둘까?’하는 흔들림이 있었던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대 안의 경찰관에게 돈을 건네는 순간 마음 속에서 묘한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경찰관은 친절하게 분실물 접수 절차를 설명하며 내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 넣었다. 그 일련의 과정이 그리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돌아 나오는 내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적갈등이 일렁이던 순간을 곱씹었다. 인간은 누구나 욕심과 양심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러나 그 갈등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우리를 규정한다. 돈을 맡기며 내가 얻은 것은 단순히 ‘옳은 일을 했다’는 자기 만족이 아니었다. 그것은 욕심을 이겨낸 작은 경험이 나를 더 단단하게 해 주었다는 자각이었다.

집에 돌아와 창가에 앉았을 때 문득 바람이 커튼을 스치며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저녁의 공기에는 미묘한 신선함과 고요가 깃들어 있었고 그 속에서 나는 조금 전의 일을 되새겼다. 바닥에서 우연히 주운 돈, 그 돈을 맡기기까지의 짧은 갈등, 내 손을 떠났지만 웃음이 났다. 그것은 ‘소유하지 않음’에서 비롯된 묘한 충만감이었다.

생각해 보니 인생의 굽이마다 우리를 지탱해주는 것은 화려한 성취가 아니라 이러한 사소한 순간들인지도 모른다. 남들이 보기엔 하찮아 보일 수 있는 선택이 스스로에게는 오래도록 등불이 되어 줄 수도 있다. 누군가는 ‘굳이 왜’라고 가볍게 말할 수 있겠지만 오늘의 작은 선택이 훗날 어느 위기 앞에서 다시 내 마음을 붙들어 줄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그 확신이 가을바람처럼 오늘 밤, 조용히 스며들었다.

인생은 예기치 못한 순간들의 연속이다. 길을 걷다 주운 돈 몇 장에서도 우리는 삶의 의미와 교훈을 얻는다. 욕망은 언제나 손쉬운 유혹처럼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소유한다. 돈은 사라졌다. 가을바람처럼 스쳐간 짧은 순간이었지만 ‘옳은 선택’이란 결국 자신을 지키는 선택이라는 명제를 새겨주었다. 선택의 무게는 나를 지켜내는 울타리임을 오늘 저녁 다시 일깨웠다.

/김경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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