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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일순위

등록일 2025-09-11 14:48 게재일 2025-09-1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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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철 수필가

또 새벽에 잠을 깼다. 최근에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 소변이 마려운 것도 아니고 더워서 그런 것도 아니다. 밤에 잠 깨는 것을 이해를 못 하고 불면증이 무슨 병인지 모를 정도로 밤에 누가 안아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자는 인간이 새벽에 잠을 깬다는 것이 노인들의 잠 성향과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섬찟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럴 땐 책을 읽거나 OTT에서 영화 한 편을 보다 보면 이내 잠이 다시 몰려와 잠이 들곤 했는데, 책을 보니 눈이 자꾸 충혈되는 것 같고 영화를 보다 잠이 들면 아침까지 텔레비전이 켜져 있어 늘 잔소리 대상이 되는지라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밖에 나가서 조용한 새벽 운동을 해 볼까도 생각해 보고 고양이가 흩어놓은 모래 정리나 할까 생각하다 괜히 자는 사람에게 피해가 되겠다 싶어 포기했다. 억지로 잠을 청하다가 갑자기 뭔가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한순간에 ‘바보 도 터지는 소리’를 지른다.

언제부터인지 한번은 정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시간도 나지 않고 꼭 지금 바로 해야 하는 급한 일도 아니라 차일피일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미뤘는데 이 기회에 하기로 했다.

그 일은 다름이 아니라 휴대폰 안에 저장되어있는 오래된 전화번호 정리이다. 확인하니 놀랄 정도다. 거의 3000건의 전화번호가 비좁은 전화기 안에 쑤셔박혀 있었다. 이 정도로 내가 대인관계가 넓었나 싶을 정도로 놀랄 정도다. 하나 하나 지우기 시작했다. 011로 시작하는 번호는 생각할 것도 없이 지웠다. 심지어 016도 나왔다. 이런 전화번호는 이미 잊혀진 사람이기에 미련을 둘 필요가 없다. 거래가 끊어진 업체 사장들도 다 지워버렸다. 운동하면서 만난 친구들 전화도 지웠다. 동호회 활동을 하지 않은지 10년이 넘었는데 전화번호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당시엔 참 활발하게 활동을 하면서 친분을 쌓아왔는데 언제부터인지 소원해져 연락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얼굴이 어렴풋 기억이 나는 사람도 있고 얼굴조차 잊혀진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름만으로는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도 다 지워버렸다. 직장도 단체도 적혀있지 않고 이름만 표기되어 있다는 것은 그래도 알만한 사람이었을 텐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게 여자일 땐 더 궁금하다. 쭉 연락을 주고 받다가 몇 년간 소식은 없지만 나름 당시에는 친분이 있었던 사람은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지웠다. 생각나면 연락이 오겠지 싶어서다. 연락이 오면 휴대폰을 잊어버렸다는 궁색한 변명을 하면서 빠져나갈 궁리를 해 본다.

갑자기 알람 소리가 울린다. 새벽 2시부터 시작해서 장장 4시간 동안 휴대폰 번호 지우기를 한 것이다. 그래도 아직 지울 전화번호가 남았다. 전화번호가 1천7백 개까지 떨어졌다. 약 1500명의 사람이 나와 단절이 된 것이다. 내 삶에 한 부분을 같이 한 사람이었건만 이제 연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제 그분들 카톡에 뜬금없이 내 생일이 뜨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지조차 별로 궁금하지 않을 사람들을 내 손으로 풀어주었다. 다음엔 그동안 찍어서 보관만 하는 사진 정리를 할 차례이다. 이건 전화번호 지우는 것보다 더 머리 아플 듯하다.

/노병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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