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다. 학교의 아이들은 겨울방학을 기다리고 여러 단체에서는 그간의 성과를 돌아보며 시상식으로 한 해의 마침표를 찍는다. 평생학습에 참여하는 시민들도 종강을 맞아 작품 전시회를 열고 내년 학기를 계획하기도 한다.
지난 19일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인문학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맞아 모임에서는 강사님을 모시고 나를 돌아보는 글쓰기 시간을 갖기로 했다. 강사는 회원들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글이라는 도구로 잠시 꺼내 보는 시간이라고 말을 시작했다. 글을 잘 쓰는 것보다 자신이 말하고 싶은 만큼만, 쓰고 싶은 만큼만 해도 된다고 덧붙였다.
글쓰기 주제는 열한 가지 중 자신에게 맞는 한 개를 골라서 쓰면 됐다. 강사의 말이 끝나자 회원들은 준비한 A4용지와 연필로 자신의 이야기를 채워나갔다. 노트북 타자 소리 대신 오랜만에 듣는 연필의 사각사각 소리가 조용한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이날 함께한 여덟 명의 회원 중 한 사람도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집중하는 모습에 강사는 조용한 응원의 눈빛을 보냈다.
오십여 분의 시간이 지나자, 한 사람씩 자신이 쓴 글을 읽는 시간을 가졌다.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회원들 앞에서 읽자니 살짝 부끄럽기도 했지만, 각자가 쏟아낸 이야기에 공감을 자아냈다. 십 대를 포함해 육십 대까지의 다양한 연령대 회원들이 쓴 이야기는 한 걸음 더 서로를 이해하기에 충분했다.
먼저 시민기자 차례였다. 곧 지천명(知天命)을 앞두고 그간의 삶을 응원하고 싶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나에게 편지를 쓸 거라고 했다. 오십 대의 중년 여성 회원은 지금의 나를 만든 가장 큰 영향력은 아버지였다고 한다. 이제는 볼 수 없지만, 그럴 땐 하늘을 보며 마음속에서 불러보는 아버지에 대해 썼다. 남편으로서는 별로였지만 초등학교뿐인 학력에도 자식들에겐 더없이 다정했고 배움에 대한 가치관을 심어주셨다고 했다. 역사에 대해 늘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육십 대 남성 회원은 자신이 왜 역사에 관심이 생겼는지 이야기했다. 고등학교 시절, 세상 재미있는 게 없었다. 그중 역사 수업에 흥미를 느껴 역사학과에 진학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또 한 분의 여성 회원은 여러 나이대를 거치면서 이제는 삶이 잘 마무리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짧은 이야기를 했다. 사십 대 남성 회원은 자기관리 실패로 몸무게가 100kg 넘게 나간 때가 떠올랐다고 했다. 그 모습에 화가 난 나머지 가족들을 힘들게 한 게 미안했다고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을 끄는 건 열다섯 살 중학생이었다. 어떤 이야기일까 궁금했지만 당당하게 자신이 쓴 이야기를 펼쳤다. 지금 나이에 다시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삶의 의미에 대한 거였다. 어릴 때는 남이 해주는 선택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자신이 주도적으로 해나가는 선택이 더 의미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모두 쫑긋하며 듣다가 이야기를 마치자 큰 박수를 보냈다. 글쓰기와 발표까지 하고 나니 어느새 두 시간을 꽉 채웠다. 회원들은 자신의 지난 이야기가 살짝 부끄럽기도 했지만, 글쓰기 시간을 경험한 것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강사는 “한 번의 글쓰기로 뭐라 말할 수는 없다. 글쓰기는 바쁜 일상에서 과거의 나를 만나고 현재의 나를 이해하는 도구다. 앞으로도 내 삶을 돌아보는 글쓰기가 계속되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허명화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