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삶은 ‘3’이라는 숫자의 거대한 그물망 속에 놓여 있다. 단순한 숫자의 나열을 넘어, 3은 우리 민족에게 우주를 이해하는 틀이자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법칙이며, 나아가 삶의 고비마다 중심을 잡아주는 심리적 지지대 역할을 해왔다. 흔히 쓰이는 ‘삼세판’이라는 말 속에는 한 번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두 번의 우연에 기대지 않으며, 세 번의 과정을 통해 정당한 결과를 수용하겠다는 우리만의 독특한 철학이 담겨 있다.
우리 조상들은 우주의 근본 원리를 ‘천지인 삼재(天地人 三才)’에서 찾았다. 하늘(天)과 땅(地),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人)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세상이 온전해진다고 믿었다. 이는 단지 추상적인 관념에 머물지 않고 우리네 인생관으로 확장되었다. 인생을 전생, 금생, 후생의 ‘삼생(三生)’으로 나누어 바라본 것이 대표적이다. 이번 생이 다소 고달프더라도 다음 생이라는 희망의 여지를 남겨두는 여유, 그것은 3이라는 숫자가 주는 구원이기도 했다.
인간관계와 사회 구조 역시 3의 굴레를 벗어나지 않는다.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면 친가, 외가, 처가(혹은 시가)라는 ‘삼족(三族)’의 관계망이 형성된다. 과거 대역죄인에게 내린 ‘삼족을 멸한다’는 형벌은 3이 한 개인을 둘러싼 완결된 세계를 의미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종교와 사상 또한 마찬가지다. 유교의 도덕적 뼈대인 ‘삼강(三綱)’, 불교의 ‘삼존불’과 ‘삼매경’, 기독교의 ‘삼위일체’에 이르기까지, 3은 성스러움과 진리를 상징하는 숫자로 군림해 왔다.
아이의 탄생 순간부터 3의 서사는 시작된다. 아이를 점지하는 ‘삼신할미’의 존재와 출산 후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며 산모와 아이를 보호하는 ‘삼칠일(21일)’의 관습은 과학적 회복기와 맞물려 3이 생명의 숫자임을 증명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으로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작심삼일’이라는 인간적인 빈틈을 허용하는 것 역시 3이 가진 묘한 매력이다. 사흘을 넘기지 못하는 의지력을 탓하기보다 3이라는 마디를 통해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는 셈이다.
국가 운영과 법치에도 3의 원리는 엄격하게 적용된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정승’ 체제는 오늘날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으로 이어졌고, 사법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삼심제도’는 억울함이 없도록 세 번의 기회를 보장한다. 놀이문화에서도 단판 승부보다는 ‘삼판양승’을 선호하는 것이 우리네 정서다. 한 번의 승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세 번의 과정을 통해 진정한 승자를 가리는 문화는 공정함과 끈기를 동시에 존중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일상의 의식주와 예술적 균형에서도 3은 빛을 발한다. 하루 세 끼를 챙겨 먹는 식습관, 제사 때 술을 세 번 올리는 헌작, 빛과 색의 삼원색이 조화되어 만물의 색을 만들어내는 원리가 그러하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전 “하나, 둘, 셋!”을 외치는 짧은 순간은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찰나의 집중력을 상징한다. 솥발이 세 개일 때 지형에 상관없이 가장 완벽한 수평을 잡듯, 3은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 가장 견고한 안정을 찾아내는 마법의 숫자다.
유비가 제갈량을 영입하기 위해 세 번 찾아간 ‘삼고초려’나, “참을 인(忍) 자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는 격언은 3이 인내와 진심의 척도임을 보여준다.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된 3·1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만세삼창’의 울림 역시 우리 민족의 정기가 3이라는 숫자와 결합할 때 얼마나 큰 폭발력을 갖는지 상기시킨다.
결국 3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타인과 소통하며 스스로를 다스리는 삶의 방식 그 자체다. 하나는 외롭고 둘은 대립하기 쉽지만, 셋이 모이는 순간 비로소 안정적인 삼각형의 구조가 완성된다. 치우치지 않고, 넘치지 않으며, 흔들리되 무너지지 않는 균형점. 우리가 오늘도 회식 자리에서 “딱 세 잔만!”을 외치고(비록 그것이 삼차까지 이어질지언정), 고단한 삶 속에서도 ‘삼세판’의 기회를 꿈꾸는 것은 3이라는 숫자가 가진 무한한 포용력과 회복 탄력성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3은 한국인에게 가장 완벽한 삶의 핑계이자, 끝내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희망의 마침표다.
/방종현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