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들이 아파트 앞에 모여 햇볕을 쪼이고 있다굵은 주름 가는 주름 하나도 놓치지 않고꼼꼼하게 햇볕을 채워넣고 있다겨우내 얼었던 뼈와 관절들 다 녹도록온몸을 노곤노곤하게 지지고 있다마른버짐 사이로 아지랑이 피어오를 것 같고잘만 하면 한순간 뽀오얀 젖살도 오를 것 같다할머니들은 마음을 저수지마냥 넓게 벌려한철 폭우처럼 쏟아지는 빛을 양껏 받는다미처 몸에 스며들지 못한 빛이 흘러 넘쳐할머니들 모두 눈 부시다아침부터 끈질기게 추근대던 봄볕에 못 이겨나무마다 푸른 망울들이 터지고할머니들은 사방으로 바삐 눈을 흘긴다할머니 주름살들이 일제히 웃는다오오 얼마 만에 환해져 보는가일생에 이렇게 환한 날이 며칠이나 되겠는가…엄동을 건너온 노인들이 한가롭게 봄볕을 쬐는 정겨운 풍경을 본다. 봄 햇살은 숱한 고생의 흔적인 주름살을 펴주고 삐걱거리는 뼈와 관절도 젊어지게 해주고, 그 환한 빛 속에서 지나온 날들을 눈부시게 돌아보게 해준다. 삼라만상의 회생과 함께 노인네들을 환하게 밝혀주는 봄볕을 본다. 시인
2019-10-27
무거운 새벽을 밀어올리던 굵은 빗소리환청처럼 귀에 쟁쟁해서이른 아침 우체국에 간다는 것이 그만젖은 이마와 눈썹들이 고운자작나무 숲에 와 버렸다저 수많은 직립의 기별하늘에다 찬찬히 송신하고 있는이렇게 흐린 날은 멀리까지 잘 보인다가지 끝에서 젖은 잎새를 말리는 바람과그 바람에 떨리는 어린 자작의 눈썹은환한 길 따라 그리운 그곳에 먼저 가 닿는다지난밤 빗소리가 길을 낸 거다그러나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파랗게 힘줄 돋는 하늘 한 자락 끌어다그리운 마음 위에 우표 대신 지그시 누른다답신이 오지 않아도 넓고 깊어지는 숲우체국 소인처럼 무지개가 걸렸다우체국에 가려다 자작나무 숲에 든 시인은 자연으로부터 엄청난 위안을 받는다. 우체국에 가는 일 같은 일상의 사소한 일을 벗어나 자작나무 숲에서 여린 비에 촉촉이 젖은 나무의 물기를 바람에 말려져 하늘로 날아가는 장면을 보며 시인은 자연의 순결성, 영원성 혹은 무한성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10-24
하나의 이유만 있으면 된다흙과 돌들 사이 흐르면서모자람 없이 더 낮은 곳으로 닿기 위해내리막보다 더 가파르게 달렸다이제 약속을 지킬 때가 온 것이다웅덩이보다 더 목마르게 고이고바람보다 더 가볍게 출렁이다가제 몸을 훨씬 앞질러 달아나던 물이절벽에 이르러 이윽고 옷을 벗는다저 망설임 없는 물의 장엄한 약속을 보라물은 꼿꼿이 세운 자신의 알몸을딱 한 번 보여준다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은 그 절벽에 닿기까지 최선을 다해 달려와서 망설임 없이 뛰어내린다. ‘물은 꼿꼿이 세운 자신의 알몸을 딱 한 번 보여준다’는 인상적인 표현에서 폭포의 순수한 열정을 예찬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10-23
아내가 끓여준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다가내가 먹던 밥을 개에게 주고개가 먹던 밥을 내가 핥아 먹는다식구들의 박수를 받으며 촛불을 끄고 축하 케이크를 먹다가내가 먹던 케이크를 고양이에게 주고고양이가 먹던 생선대가리를 내가 뜯어 먹는다오늘은 내 생일이므로짐승의 마음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날이므로개밥그릇을 물고 거리로 나가 유기견들에게 내 심장을 떼어주고길고양이들에게 내 콩팥을 떼어주고물끄러미 소나기 쏟아지는 거리를 바라본다벌써 며칠째 인터넷 접속이 되지 않는다고답답해 미치겠다고 사람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한여름에 겨울 점퍼를 입은 노숙자 한 사람이 빗속에 쓰러진다나는 젖은 돌멩이로 떡을 만들어 그에게 주고흙으로 막걸리를 빚어 나눠 마시고신나게 꼬리를 흔들다가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에게 말한다부디 다시는 태어나지 말라고태어나지 않은 날이야말로 내 생일이라고천주교 신자이기도 한 시인의 통렬한 자기반성, 속죄의 목소리를 듣는다. 치욕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존재에 대한 거부와 절멸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절대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이면서 순결하고 진실한 삶에 대한 열망과 지향의 신앙고백, 결의로 여겨진다. 시인
2019-10-22
거니는 숲 속작은 섬 하나와 닿지 않고열어 보지 못한 섬푸른 숲을단단히 물고 있다외롭지 않느냐고마을로 가고 싶지 않느냐고행복을 꿈꾸고 싶지 않느냐고대답이 없다단단한 가슴이 빛나는숲 언저리에소리 없이 서 있는섬 하나푸른 숲을 단단히 물고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섬은 시인 자신의 모습이다. 몰아치는 폭풍우나 하얗게 내리는 눈발에도 흔들리지 않는 섬처럼 어떤 역경과 유혹이 그의 삶을 뒤흔들어도 강하게 자신을 지키며 단단하게 빛나는 가슴을 정결한 의식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시인 정신을 본다. 시인
2019-10-21
가장자리부터 녹이고 있는얼어붙은 호수의 중심에 그가 서 있다어떤 사랑은 제 안의 번개로저의 길 금이 가도록 쩍쩍 밟는 것마침내 산산조각나더라도빙판 위로 내디딘 발걸음돌이킬 수 없다깨진 거울 조각조각 주워들고이리저리 꿰맞추어 보아도거기 새겼던 모습 떠오르지 않아더듬거리지만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한때의 파문어느새 중심을 녹여버렸나나는 한순간도 저 얼음 호수에서시선 비끼지 않았는데얼음이 얼기 전의 호수는 그 잔잔한 수면 위로 사랑의 아름다운 시간이 비쳤지만, 얼어붙어 금이 간 얼음호수는 그 사랑이 금이 가고 위태한 사랑으로 변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얼음호수는 상실되고 잊혀져서 안타까운 사랑을 의미한다. 잔잔한 호수 면이 얼어버려서 사랑의 아름다운 모습이 비쳐질 수 없기 때문이다. 시인
2019-10-20
현관 앞에 섰는데 젖꼭지 같은 초인종을누를까 말까현관을 들어섰는데 무사히 동행한 신발을벗을까 말까거실에 쌓인 어둠을 건너야 하는데 밀항하듯갈까 말까적막의 길, 근원의 길, 신방(新房)의 길탄생한 아이들이 깔깔 웃음을 풀어낼 길걸어서 갈까, 기어서 갈까, 굴러서 갈까안방에 가면 내 영혼의 껍질과 가죽을 옷걸이에걸까 말까외출한 아내가 벗어놓은 머리카락들이 기어다니는꿈틀거림의 나라에 들어가서나도 알몸으로 기어다니는 꿈을 꿀까 말까내가 죽어 저승 갈 때안방으로 가던 이승의 발걸음이 나의 동행자가될까 말까술을 마시고 귀가한 자신의 심리를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술 취한 채 늦게 귀가한 시인은 아내의 잔소리가 두려워 조심조심 거실에 들고, 거실에 쌓인 어둠을 건너 외줄 흔들 다리를 건너 아내가 있는 안방에 드는 것은 마치 저승길을 가는 것쯤으로 전개되는 이 시에서 미소를 머금게 된다. 이 땅 남자들의 서글픈 초상을 보는 것 같다. 시인
2019-10-17
한적한 골목어귀 피아노 한 대 웅크리고 있다누가 놓아두고 갔을까그 옆 민들레꽃 서너 송이악보처럼 피어있는피아노는 날마다낡은 골목을 연주한다모서리가 해져 펄럭거리는(….)언젠가 ‘카이’*가 나타나감미로운 선율을 연주해 줄지도다음날, 그다음 날동판, 철선, 헤머가 사라진 뒤에도그 옛날 왁자했던 골목을떠올리기라도 하는지빈 집의 처마처럼갸릉갸릉 소릴내며골목을 연주하고 있다* ‘피아노의 숲’이란 에니메이션의 주인공. 숲속에 있는 고장 난 피아노를 ‘카이’가 치면 특별한 소리를 낸다.한적한 골목에 버려진 피아노 한 대, 바람에 끝없이 아름다운 선율을 풀어내고 있는 피아노를 보며 평생 피아노 건반과 함께 살아온 시인은 피아노 밖으로 활짝 열리는 우주의 하모니를 듣고 있는 것이다. 비록 버려져서 녹슬고 비루한 모습으로 지워져 갈 운명이지만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선율을 풀어내는 버려진 피아노 같이 남은 생을 그리며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다잡는 시인의 조용한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10-16
쥘 상치 두 손 받쳐한입에 우겨 넣다희뜩눈이 팔려 우긴 채 내다보니흩는 꽃 쫓이던 나비울 너머로 가더라여름날 마루나 평상에 앉아 상추 쌈을 먹으며 울 밖으로 날아가는 나비를 바라보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정경 하나를 본다. 계절의 향을 담뿍 담은 상추에 구수한 쌈장을 올려 한입 가득 쌈을 먹다 보면 세상의 근심 걱정이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을 받는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시다. 시인
2019-10-15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여름이 뜨거운 것이다매미는 아는 것이다사랑이란, 이렇게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뜨겁게 우는 것임을울지 않으면 보이지않기 때문에매미는 우는 것이다매미는 일주일 정도 밤낮으로 울다가 떨어져 죽는데 이 짧은 생을 위해 십 년 동안 어둡고 차가운 땅속에서 기다린 것이다. 한사코 곁에서 뜨겁게 우는 매미처럼 우리네 뜨거운 사랑도 그래야 한다는 시인의 묵시적 목소리를 듣는다.시인
2019-10-14
출근 지옥철 같은 저 철제 캐비닛그 속 어딘가에 숨 막히게아버지가 계시고 내가 있다이마에 수입인지 붙이고철인에 눌린 나의 일상이막 떠밀리고 있는데어, 아버지께선 또 어디로 밀려가셨나동사무소 철제 캐비닛 속에는 우리의 연대기랄까 삶의 역사랄까 갖가지 흔적들의 기록이 빼곡히 갇혀 있다. 흑표지와 철끈에 묶여 소인이나 철인을 맞고 저장되어 있다. 뭔가 쓸쓸한 비애감이 차오름을 느낀다. 철제 캐비닛 같은 지하철에 저장되어 떠밀리며 어딘가로 옮겨진다는 것을 연상하며 시인은 이런 감정을 더 심화시키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10-13
저 섬에서한 달만 살자저 섬에서한 달만뜬눈으로 살자저 섬에서한 달만그리운 것이없어질 때까지뜬눈으로 살자이 땅 해안선에 올망졸망 떠 있는 수많은 섬, 이름 없는 섬에 들어 한가함과 무료함을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살고 싶다고 고백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절절하다. 번잡하고 바빴던 일상에서 벗어나 한 달쯤 무명도에 들어 한 포기 풀꽃으로 피어나 소리 없이 그 평화로운 적요 속에 들고 싶다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10-10
왜?왜?왜?악다구니 쓰며왜 가리? 왜 가리?악다구니 써도너의 날개를 누가 기억하리왜가리!왜가리는 목이 길고 가늘며 구부러져 있는 새다. 시인은 시의 첫머리에서 왜가리의 모양이 마치 물음표(?)를 닮았음을 의도하는 시행을 배열하고 있다. 어디로 왜 가느냐고 여러 번 반복하는 시인의 목소리에서 왜가리는 삶의 방향성을 잃어버린 우리들이 분신 같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시인
2019-10-09
슈퍼마켓 냉장 식품 코너에 냉동닭들이 수북하다비닐봉지로 쌓여 있는 육체가살아 있는 영혼보다 더 오래 버티는 듯했다옷장 안에서 가끔씩 종소리가 들렸고마음의 계단은 미끄러웠다아주 오래전 그 영혼의 이름은 무엇이었더라?시인은 냉동 창고에 밀봉되어 수북이 걸려있는 냉동 닭들과 옷장 속 차곡히 걸려있는 옷들과 지하철 손잡이에 매달려 있는 현대인들을 떠올리고 있다. 밀봉된 채 영혼 없이 매달리고 얹혀 다니는 현대인들의 비애를 표현하고 있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여지없이 우리의 정신은 발가벗겨지고 냉동된 채 어딘가로 얹혀가는 냉동 닭 같은 것이 우리의 서글픈 초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시인
2019-10-07
몸이 얼어붙었다이 정적이나를 휘감아완전무결의이 녹음이나를 휘감아몸이 굳어 버린다돌멩이처럼흙덩이처럼푸르고 평화로운 지붕처럼 숲은 우리를 감싸 안아 준다. 언제든 숲에 들면 삶에 지친 우리에게 위안과 치유, 평화를 베풀어준다. 시인은 숲에 들어 느끼는 감동을 ‘자신을 휘감아 돌멩이처럼 굳어버리게 한다’라고 극대화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10-06
인사동 처마 끝에 낙숫물 듣는 소리방금 비둘기가 앉았다 날아간 자리가파르르 젖는다두어 행에 불과한 짧은 시에서 시인의 섬세한 시안을 본다.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빗물이 끌고 오는 낙숫물 소리에 금방 비둘기가 앉았던 자리가 젖고 있다고 표현하는 섬세함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잠시 머물렀던 비둘기의 기억과 추억 위로 비가 내림과 그 기억의 미세한 결과 무늬를 파르르 젖는다라고 말하며 그의 사물 인식의 눈이 얼마나 섬세한 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10-03
거기, 남보다 먼저 나서 바삐 닿아야 할고난의 세월 있으니찬이슬 속에 깜박이는 잔별빛 어깨에 받고밥 한 그릇 간다후루룩 둘러마신 물통 같은 밥통 되게 흔들며밥 한 그릇 서둘러 차운 길 간다이른 새벽 성근 밥을 챙겨 먹고 찬 이슬 속으로 서둘러 나가는 사람들을 시인은 ‘새벽밥’이라 부르며 그들에게 흐르는 고난의 세월을 생각하고 있음을 본다. 현실의 비애와 내일을 준비하는 결의가 섞인 차가운 그들의 길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10-01
수많은 별들 중의 하나인 지구지구 위의파리파리의 몽수리 공원에서겨울 햇살 비치는 어느 아침너 나에게 입 맞추고나 너에게 입 맞춘이 짧은 영원의 순간을천년만년이 걸려도다 말하지 못하리겨울 햇살 비치는 아침, 파리의 아담한 공원에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입맞춤을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짧은 입맞춤의 순간이었지만 영원의 순간이라고 표현할 만큼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가지만, 영원히 흘러가지 않고 가슴속에서 순간의 섬처럼 서 있을 잊지 못할 순간을 새기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09-30
사람들 사이에사이가 있었다 그사이에 있고 싶었다양편에서 돌아 날아왔다정신은 한번 깨지면 붙이기 어렵다사이는 양쪽의 영역과 영향으로부터 중도의 위치에 있는 것이어서 균형을 가질 수 있고, 한쪽으로 쏠리지 않아서 비교적 안정성이 유지되는 처지이지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양쪽으로부터의 결핍 상태에 놓이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위험하고 불안정한 상태이기도 하다. 시인은 흑백의 이분법에 의해 재단되는 현대사회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09-29
집에 돌아오면하루종일 발을 물고 놓아주지 않던가죽 구두를 벗고살껍질처럼 발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던검정 양말을 벗고발가락 신발숨 쉬는 살색 신발투명한 바람 신발벌거벗은 임금님 신발맨발을 신는다하루 종일 신발에 갇혀 있던 발, 집에 들어와서 신발과 양말을 벗고 나면 홀가분한 맨발이 된다는 표현을 하는 시인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음을 느낀다. 종일 자신을 옮아 매었던 삶의 굴레들을 벗고 그 막중한 무게들로부터 벗어나 홀가분하게 자유를 누리는 시인을 느낄 수 있다. 시인
2019-09-26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 때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그대를 환영하며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다시 떠날 때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알고 간다면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초록빛과 사랑, 이거우주 기적(奇績) 아녀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고운 초록색의 작은 행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별이 인간의 문명에 의해 오염되고 파괴되어 이제는 거기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만큼 혐오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것을 안타까워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09-25
지상과의 인연더 차가워져야 한다활시위처럼 몸 당겨겨울로 간다작살 같은 대오로하늘을 끌고 간다몸 비트는 하늘깃털처럼, 백설(白雪) 쏟아진다하얗게 눈 내리는 하늘을 날아 북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의 모습이 사뭇 장엄하다. 기러기들의 비행 대오는 작살 모양인데 그 맨 앞에는 가장 힘세고 연륜이 있는 기러기가 선도하고 그 뒤를 따르는 동료들이 울음소리로 그를 격려하며 편대를 이루어 그 먼 거리를 날아가는 것이다. 시인은 기러기들이 날아가는 겨울 하늘의 장엄한 그림 한 장을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09-24
돌이 울고 있었다울고 있는 돌을 먹었다돌을 먹은 나는펭귄이 되었다배가 너무 무거워바닥에 쓰러졌다뱃속에서 돌이 울고 있었다돌과 펭귄을 연결한 시인의 상상력이 재미있고 진지하다. 돌은 삶 속에서 꺾이고 고통당하며 상처 입어 쉬 지워지지 않는 슬픔을 품고 있다. 슬픔은 펭귄의 뱃속에서 울고 있는 돌처럼 우리를 그늘지게 하며 우리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 속성을 품고 있는 것이라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09-23
마음 스치고 간 칼날들이 그믐달로 뜬다일생 땅에 집을 짓지 못하는 칼새의 짧은 다리,긴 날개 허공에 알을 놓고 허공을 박차고 허공에서 낫을 갈고허공만이 그의 허파였던가파르고 높은 벼랑 끝에 집을 짓고 사는 칼새는 거의 모든 시간을 허공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다리는 짧고 날개는 긴 것이리라. 허공에 집을 짓고 허공에서 사랑하며 허공에서 잠자는 칼새는 낫 같은 날카로운 발톱을 가졌고 오랜 시간 날 수 있는 긴 날개와 튼튼한 허파를 가졌다는 얘기를 하며 자연이든 인간이든 험난하고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적응해가는 신체 구조와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는 시인의 긍정적인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09-22
빗방울 하나가창틀에 터억걸터앉는다잠시나의 집이휘청-한다끝없이 넓게 펼쳐져 있는 삼라만상, 그 무한한 여백 속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는 집 한 채만 한 크기일 수도 있고, 집을 흔들 만큼의 무게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바라보는 시인의 혜안(慧眼)이 깊고 밝다. 시인
2019-09-19
동백의 꽃말은 투신죽을 날을 알아버린 이모처럼눈 소복하게 내린 날을 골라떨어진다 멀리로도 아니고바람 없는 날, 툭뿌리께로 곤두박질한다이모부 발치에 쓰러지신이모 때문에 당신은 발등이아프셨고 동백꽃 철마다 밟혀서그 집에서 오래홀로 늙으셨다동백의 꽃말은 투신(投身)이다. 시인은 짙붉은 동백꽃이 툭툭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아픈 가족사 하나를 들려주고 있다. 자살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이모부 발치에 쓰러져 죽은 이모와 그 후 재혼을 하지 않고 오래 홀로 살아간 이모부의 깊은 사랑의 신의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09-18
그대 내 농담에 까르르 웃다그만 차를 옆질렀군요… 미안해 하지 말아요지나온 내 인생은 거의 농담에 가까웠지만여태껏 아무것도 엎지르지 못한 생이었지만이 순간, 그대 쟈스민 향기 같은 웃음에내 마음 온통 그대 쪽으로 옆질러졌으니까요고백하건대 이건 진실이에요마주 앉은 남녀가 차를 마시다 상대의 농담에 웃다 찻잔을 엎지른 재미난 장면을 보여주며 시인은 쏟아진 것은 차가 아니라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의 혜안에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다. 시인
2019-09-17
멕시코인들은 말하지우리에게 하느님은 너무 멀리 있고미국은 너무나 가까이 있다세상의 여자들은 말하네우리에게 하느님은 너무 멀리 있고남자는 너무나 가까이 있다시인이 말하는 멕시코와 여자는 약하고 피학적인 위치에 놓인 약자에 해당되고 미국이나 남자는 강하고 가학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음을 본다. 이런 남성 중심, 서구 중심의 세상을 야유하며 강요되고 폭력적인 것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음을 고발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09-16
항아리를 할머니로항아리 뚜껑을 할아버지로항아리 뚜껑 위에 쌓인 눈을 백발로항아리 옆의 감나무를 세월의 몽둥이로꺾어보는 사이에 저녁이 되었다반찬도 없는데 전신이 아프다백발과 할아버지를 젖히고할머니 속의 된장이뚝배기 안에서펄펄 끓는다시인은 저물녘 된장을 끓이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한 생을 떠올리고 있다. 한평생 항아리 뚜껑 같은 영감을 덮고, 아니 할아버지에게 덮여 살아온 할머니의 삶을 힘겹고 답답한 세월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아프고 갑갑할 때는 그 뚜껑을 젖히고 싶었을 거라는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도 하는 것을 시인의 말에 잔잔한 감동이 묻어남을 느낀다. 시인
2019-09-15
하얀 입김이나뭇가지에 걸리어,내 목이 아프다.몽텡이가 목 속에서 미끈미끈 미끄러져,내 목이 뜨끔거린다.팥죽이 뿔럭뿔럭 끊는 기인 밤,나는 생각한다동지 무렵이면 뜨끈뜨끈하게아궁지에 군불을 지피시던 어머니를몽텡이는 팥죽 속에 넣어 끓이는 수수단자를 일컫는 말이다. 시인은 감기를 그 몽텡이가 몸속에 미끄러지듯 목이 뜨끔거리는 것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뜨겁게 몸을 데워오며 몽텡이처럼 끓어오르는 감기를 앓으며 동짓날 팥죽 끓이는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지피던 그리운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다. 그립고 눈물겨운 그림 한 장을 우리에게 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