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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내 고향 동네

내 고향동네 썩 들어서면첫째 집에는큰아들은 백령도 가서 고기 잡고작은 아들은 사람 때려 징역에 들락날락더 썩을 속도 없는 유씨네가 막걸리 판다둘째 집에는고등고시한다는 큰아들 뒷바라지에 속아한 살림 말아올리고애들은 다 초등학교만 끄을러 객지로 떠나보낸문씨네 늙은 내외가 점방을 한다셋째 집은마누라 바람나서 내뺀 지 삼 년째인 홀아비네 칼판집아직 앳된 맏딸이 제 남편 데리고 들어와서술도 팔고 고기도 판다넷째 집에는일곱 동생 제금 내주랴 자식들 학비 대랴 등골이 빠져키조차 작달막한 박대목네 내외가면서기 지서 순경 하숙 쳐서 산다다섯째 집에는서른 전에 혼자된 동네 누님 하나가 애들 둘 바라보며 가게를 하고여섯째 집은데모쟁이 대학생 아들놈 덕에 십년은 땡겨 파싹 늙은 약방집 내외갖가지 인생의 고달픔과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고향동네 이웃들의 삶을 상세하게 그려내면서 그 속에 배인 아픔과 한스러움 같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시골 소읍에 가면 이런 가슴 아픈 서사는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이 시에는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어떤 아픔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은 얘기들이 소복하여 정겹기도 하고 눈물겹기도 한 아침이다.시인

2017-04-25

사랑이란 짐승

사랑은 짐승입니다사랑이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는 어둠이고 빛이고 물어뜯으면서 미쳐 날뛰는 짐승입니다사랑 앞에서는 사랑만 말해야 합니다 사랑 외에 어떤 주제나 담론이 있을 수 없습니다피골이 상접 사랑으로 연명하고 사랑으로 별을 끄고 사랑으로 환히 켭니다사랑에 빠져 곧 익사해도 지푸라기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리지도 않습니다사랑은 사랑을 위하여 기꺼이 간까지 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그대는 지금 사랑을 잃은 사랑이란 짐승입니다그대는 지금 눈물 속에 드러누운 눈물이란 짐승입니다털이 눈물에 젖었고눈물의 가뿐 숨 몰아쉬면서 눈물의 호흡을 합니다그대의 눈물로 안드로메다가 은하수가 우주가 흠뻑 젖는 것 같습니다내 곁에 없는 내 사랑마저그대 눈물에 흠뻑 젖어서 끝없이 축축 처져 내리는 밤입니다사랑을 `영혼이 맑은 짐승`이라고 규정하는 시안이 놀랍다. 사랑이라는 개념을 짐승에 비유한 것도 특별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의 상실은 엄청난 결핍과 슬픔에 이르게 하지만 그러나 절망에 젖어있지는 않고 사랑은 그 회복을 위해 자신을 투신하게 된다는 시인의 인식에서 어떤 희망을 가지게 된다. 사랑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결코 무너져 일어서지 못하는 나약한 것이 아니라는 사랑에 대한 강한 확신과 신념이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다.시인

2017-03-24

강가의 묘석(墓石)

오래 전에 지운 아버지의 얼굴이내 아이의 얼굴에 돋는다밤마다 강 건너에서 거칠게 흔들던몸짓이날 물리치려던 것이었는지, 부르려던 것이었는지어둔 꿈길을 막니처럼 아릿하게 거스르면겨울 천정에 얼어붙었던 철새들은그제야 낡고 깊은 날갯짓을 한다불온한 전생(全生)이 별자리를 밟고서녘으로 흐른 사이달이 지고 해가 뜨기 전의 지극(至極)이강물에 닿아 문득 시들어버린 내가잎 진 나무로 강가에 몸을 잠그면가지 끝에 옮아 피는 앙상한 길내 몸 빌려 검게 꽃 피는 아버지모두가 한 물결로 펄럭인다생은 몇 번씩 몸을 바꿔별이었다가 꽃이었다가 닻이었다가유곽이었다가 성당이었다가어제처럼 늙은 내 아이가 되는데새벽이 오는 변방의 강가에 기대어아버지와 아이의 멸망을 지켜볼 뿐나는 차마 묘석처럼 깜깜하지 못했다시인은 오래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자신의 아이의 얼굴에 투영되어 있음을 본다. 천년을 건너온 이 지울 수 없는 운명의 유전을 깊이 깨닫고 있다. 인생은 몇 번씩 몸을 바꿔 별이었다가 꽃이었다가 닻이었다가 유곽이었다가 성당이 된다는 시인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이렇듯 유전하는 것이 인생이다. 아버지와 나와 아이에게로 흘러오고 흘러가는 지울 수 없는 운명의 한 꼭지를 들여다본다.시인

2017-03-21

지상의 방 한칸

신림 7동, 난곡 아랫마을에 산 적이 있지. 대림동에서 내려 트럭을 타고 갔던가, 변전소 같은 버스를 타고 갔던가, 먼지 자욱한 길가에 루핑을 이고 엎드린 한칸 방, 누나와 조카 둘과 나의 보금자리였지. 여름밤이면 집 앞 실개천으로 웃마을 돈사의 돼지똥들이 향기롭게 떠가는 것을 보며 수제비를 먹었지. 찌는 듯한 더위에 못 이겨 야산에 오르면 시골처럼 캄캄하던 동네, 개천 건너 그 동물병원 같은 보건소는 잘 있는지 몰라. 눈이 커다란 간호원에게 매일 아침 붉은 엉덩이를 내리고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대씩 맞고 다녔지. 학교가 너무 멀어 오전 수업을 늘 빼먹어야 했던 집. 아니 결핵을 앓던 나를 따스히 보살펴 주던 집. 겨울이면 루핑이 심하게 울어 조카의 어린 몸을 난로처럼 안고 자던 방. 아니 봄을 기다리던 누님과 나의 지상의 좁은 방 한칸.가난하고 어려웠던 지난 시절, 이 땅 어디에선들 이러한 삶의 풍경들이 없었을까. 허물어져가는 방 한 칸, 볼품없는 생의 여건들 속에서 아이들은 해맑게 자라나고, 찌든 가난이 대물림되는 그 힘겨운 생활 속이었지만 거기엔 사람다운 따스함과 어떤 어려움에도 꺾이지 않는 힘이 스며 있었다. 불편함과 결핍 속에서도 희망과 기다림이 얽혀 있었던 것이다.시인

2017-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