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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아침 이슬

‘아침 이슬’이 수록된 음반. 몇 해 전 문예창작과 시창작 수업에서 대학생들에게 노래 하나를 알려줬다. 자꾸만 길어지고 사변적인 근래 한국시의 경향이 마뜩잖아 짧은 문장만으로 아름다움은 물론 울림과 감동까지 빚어내는 글들을 읽히면서 노랫말을 예로 들었는데, “가을이 머물다 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연기”(동요 ‘노을’)에 이어 소개한 게 김민기의 ‘아침 이슬’이다. 칠판에 가사를 적었다. 아느냐 물으니 모른다 했다. ‘이 노래를 모른다고?’ 놀랐지만 나도 아침 이슬 세대는 아니다.“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알게 된 노래, 가사를 외우지 않았는데 저절로 외워진 노래다. 유신과 신군부, 민주화운동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음에도 부르면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는 노래다. 8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소년기를 보낸 나는 앞 세대가 엄혹한 시절에 피워낸 불씨의 열기를 자연스레 감각하며 자랐다. 정치의식이라는 게 생길 즈음엔 광화문에 가 “효순이 미선이를 살려내라”고 외쳤는데, 그해 겨울엔 통기타를 치며 김민기의 ‘상록수’를 부른 대통령이 당선됐다. 투표권 없는 고3이지만 감격했다.이전 세대의 확고한 신념 뒤에도, 이후 세대의 막연한 의식 뒤에도 김민기의 노래가 흐른다. 본강의 큰 물줄기가 아닌 바위틈으로 숨어 흐르며 길을 만드는 발원지의 고요한 물처럼, 그 자신은 뒤로 남겨지고 양희은의 목소리를 앞세웠다. “작은 미소를 배운다”는 대목에서는 욕심 없는 겸양이 나타나고, “붉게 타오르고”라는 비유 대신 “붉게 떠오르고”로 덤덤히 묘사한 부분에서는 삿됨 없는 우직함이 나타난다. 노래를 직접 부른 영상이 딱 하나 있는데, 무대 뒤에서 음향기기를 만지다가 그 자리서 기타를 잡았다.스스로 ‘뒷것’을 자처하며 철저하게 뒤에서만 그림자로 살았다. 공단에서 동료 노동자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야학을 열어 달동네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공공 유아원 건립 기금을 마련하고자 권력의 감시 속에서 목숨 걸고 노래했다. 소극장 ‘학전’을 만들어 가난한 예술가들이 맘껏 연주하고 연기할 수 있는 무대를 차렸다. 뒷것인 그가 객석에 나와 있을 때는 늘 아동극이 상연될 때였다. 아이들 웃음소리를 듣는 게 참 행복했다고 한다.소외된 공단 노동자와 달동네 아이들이 배움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고, 학전을 거친 예술가들이 한국 문화예술계의 주역이 됐다. 아동극을 보며 꿈을 키운 아이들은 지금 30대가 되어 사회에 진출했다. 성숙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열정과 노력을 발휘하며 자기 삶을 가꾸고, 나아가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자리마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 기원에 김민기가 있다. 아침 이슬은 정말 발원지의 투명한 한 방울 물인 것이다.앞에서 소리치지 않고 뒤에서 읊조렸을 뿐인데 저항의 상징이 됐다. 1975년 ‘아침 이슬’은 시답잖은 이유로 금지곡이 됐고, 김민기의 삶에도 시련과 서러움이 알알이 맺혔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부정한 권력자들은 노래가 가진 힘이 민중을 고취시키는 것을 두려워한다. 스페인 내전 당시 파시스트들이 로르카를 살해한 것도 그의 시가 피눈물 밴 안달루시아의 민중정서를 노래했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100만 명의 민중이 ‘아침 이슬’을 합창했다. 노래가 만든 거대한 파도에 마침내 독재자가 물러났다. 앞에 나선 그 어떤 사상가, 운동가, 정치가, 지도자도 하지 못한 일을 뒷것의 삶을 통해, 삶을 담아낸 노래를 통해, 노래에 실은 고결한 정신을 통해 김민기는 해냈다.노래가 생소해 멀뚱거리는 학생들에게 ‘아침 이슬’을 불러줬다. 미성으로 꽤 잘 불렀다. 아무래도 나는 뒷것은 못 되는 모양이다. 그때 노래를 들은 학생들이 지금 20대 후반쯤 됐다. 자기 자리서 열심히들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노래엔 신비한 힘이 있다. 그날의 노래를 기억한다면, 각자도생의 비정한 세상에서도 타인과 나누며, 약자를 도우며, 정의로운 쪽에 서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2024년 7월 21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광야로 간 김민기는 아침 이슬로 언제나 함께 있다. 이제 산 사람들의 뒷것으로 우리 마음과 정신을 떠받치면서.

2024-07-29

여름의 책

눅눅히 마음이 무성해지는 여름, 비가 계속 내리는 날씨 탓에 좀처럼 기운이 나지 않는다면, 저자 무루의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를 꺼내게 된다. 이 책은 생의 충직함, 성실함, 유연함, 지혜로움을 말끔히 엮어 만든, 깨끗한 옷 같은 에세이다. 올곧게 객관화되어 있는 사람의 다정하고도 신비로운 이야기로, 묘하고도 신비로운 활력을 준달까.스무 살 무렵 늦은 성장통을 겪었다는 저자 무루(박서영)는 세상에 이해받지 못하는 소외감으로 그림책을 읽었다. 그림책에서 기쁨과 슬픔의 여러 이름을 발견하며 세상의 부조리와 간극, 소외되는 대상과 존재를 인지한다.비혼, 여성, 집사, 프리랜서, 채식주의자. 이토록 확고하게 자신을 나열함과 동시에 낯선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가보지 않은 길로 가기 위해 용기를 낸다. ‘몸의 고립이 마음의 고립으로 이어지지 않으려는 절박한 마음’으로 세상 밖을 걷고 머무른다. 외로운 날들이 모두 지나간 어느 때에, 그녀는 관계에 대해 ‘가끔은 한 사람의 손을 잡거나 나란히 걸을 수 있겠지만, 기왕이면 혼자서도 잘 걷고, 두 발로 씩씩하게 걷고 싶다’고 말한다.자신의 결정이 어디서도 존중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책으로 도망쳤지만, 결국 그녀는 책 안에서 보고, 듣고, 사유한 것으로 자신을 이루어 타인을 공감하고 포용한다. 세상의 틈마다 그어 놓은 안과 밖의 경계는 극명하게 나누어져 있고, 가장자리의 존재는 쉽게 배척된다. 하지만 저자는 사이에 놓인 경계를 허무는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바로 타인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우리가 믿고, 사랑하고, 그래서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할 것들은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이다.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은 것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믿는 마음이란 실체와 효용, 현실과 확신을 넘어서는 지점에 있다. 현실에서조차 세상은 언제나 한 사람의 세계를 거뜬히 넘어서기 때문이다. 유연한 사고와 타인에 대한 공감 역시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질 터다.”저자는 그림책을 읽으며 자신의 과오를 인지하며 한계를 정하기도 하고, 계획과 좋은 습관을 세우기도 한다. 이러한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자신을 쌓는 어른이라니. 어떤 직업을 삼고,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 낼지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될지 그렇게 어떤 노인이 되고 싶은지 떠올려 보게 된다. 저자는 ‘작은 기쁨을 풍요롭게 누리는 사람’,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리듬을 가진 노래 같은 삶을 사는 사람’, ‘농부의 손처럼 투박하지만 다정한 사람’ 등, 자신의 모습을 또렷하게 그려내며 먼 미래의 얼굴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앞자리가 바뀐 나이 때문일까. 나는 올해 유독 가만히 있어도 옅게 보이는 입주름이나 안으로 말린 어깨의 모양, 여유로워 보이는 걸음걸이나 손짓 등에 신경 쓰고 있다. 동시에 10년, 20년 뒤 어떤 모습일지 자주 상상해본다. 그럴 때마다 어쩐지 아득한 기분이 든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더 오랜 세월이 지나면 지금처럼 뛰어다닐 수 없을 테고, 몸은 점점 더 무거워지겠지. 몸과 같이 기분마저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없다면? 생각은 꼬리를 물어 어느새 울적해진 노년의 내가 그려지는 것이다.하지만 이 책을 다시금 꺼내어 읽다 보면 힘없이 늙은 몸을 가진 내가 아닌. 여유를 가진 채 그토록 되고 싶었던 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보게 된다. 당연히 내 옆에 자리했던 모든 것들을 한 번 씩 돌아보며 감사할 줄 아는 삶, 나와 타인의 건강한 삶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빌어주는 삶, 진실로 거짓을 가려내며 거짓 없이 사랑하는 삶 등등. 깊은 내면의 모습을 그러다보면 놀랍게도 미래를 기대하며 기다려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일렁이는 내면을 가꾸어온 섬세한 손길이 책의 마지막 부분까지 묻어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조금 더 구체적인 한 사람이 펼쳐진다. 타인의 변덕에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이 많은 사람. 요상하고 재미있는 유행어를 많이 알아 젊은이들과도 유쾌함을 나눌 수 있는 사람, 차와 주전자 색색의 실과 뜨개바늘에 둘러싸여 평온하고도 고요한 할머니의 모습. 나의 먼 미래를 웃으며 상상하는 자유로움은 이토록 신비롭고 견고하며 근사하다.세 시간 만에 단숨에 읽어버린 책은 이제 등을 내보이며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다. 이럴 때마다 무언가 듬직하게 기댈 수 있는 단단한 벽을 얻은 것만 같아 마음이 평온해진다. 괴괴한 날씨에 영향을 받아 변덕스런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방법은 이렇게 나와 전혀 다른 타인의 세계를 잠시 엿보는 것이 제일 좋다. 책은 그런 걸 늘 가능하게 한다.

2024-07-29

여름의 맛

여름은 이상하게도 뜨거운 동시에 서늘하다. /언스플래쉬 어제는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자 잘하는 일이니까. 느지막한 시간에 일어나 뉴스를 정독하다가 뉴진스의 무대 영상을 찾아보고 단체 카톡방에서 친구들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키득거렸다. 함께 사는 강아지가 불만스러운 몸짓으로 내 손등을 긁었다. 산책하러 나가자는 것이었다. 창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며칠째 이어지는 폭우였다.비 오는 날은 몸이 무겁다. 어깨도 골반도 뻐근하다. 비가 오면 강아지 산책은 나갈 수 없다. 육체의 문제가 아니다. 날씨의 문제다. 올해 장마는 유독 지난할 것이라는 기사를 보면서 ‘산책은 어떡하지’하는 염려부터 들었다. 요즘 나의 고민은 이렇게 실존적이고 얕다.본심을 고백하자면, 장마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산책 안 가고 침대에 있는 것 너무 좋으니까! 알량한 소망을 들킨 것일까. 나의 강아지는 언짢음을 감추지 않았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내가 괘씸하다는 듯 침대 시트를 맹렬하게 긁어댔고 양발로 등허리를 난타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이 성질 나쁜 동물을 납득시키기 위해선 직접 보여줘야 했다. 악천후의 무서움을 모르는 강아지를 안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생각보다 강한 비바람에 우리는 오피스텔 로비를 빠져나가지도 못했다. 공동 현관 앞에 서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볼 뿐이었다. 지우개로 문지른 듯 희뿌연 공기 중으로 비 냄새가 훅 끼쳤다. 동시에 높다란 나무의 출렁이는 잎사귀가 보였다. 거센 비를 맞으면서 유연하게 흔들리는 가지를 존경 어린 눈빛으로 응시했다. 어때? 나는 강아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게 냉혹한 바깥 세계야. 내 뜻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강아지는 집을 향해 네발로 삐걱삐걱 걸었다. 헤엄치는 법을 잊어버린 물고기처럼.집으로 돌아와 미뤄둔 빨래며 부엌 청소를 했다. 집안일을 마치고 나니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미지근한 물로 샤워하고 나와 시원한 보리차를 들이켰다.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면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선풍기에 대고 아아, 소리를 냈다. 오늘은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구나.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그런 생각이 들자 어쩐지 난처해졌다. 돌아보면 나는 무수한 여름을 이런 식으로 지나 보냈다. 너무 한가해서 혹은 그럭저럭 바빠서. 흘러갔다는 것조차 모르고 흘려보내기도 했다. 여름은 한눈팔면 썩어버리는 과일 같은 것. 나중에 먹어야지 하고 대강대강 생각하다간 입도 대지 못한 채 버려야 한다. 뭐든 알맞게 달 때가 있어서 딱 그 시기를 즐겨야 하는데. 살다 보면 그런 게 잘 안된다.여름에 더욱 맛있는 맛을 떠올려본다. 무더운 날씨에 들이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살얼음 낀 맥주,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수박이나 밍밍하면서 감칠맛 도는 냉면. 그래, 역시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정수리가 뜨거워지는 감각도 팔뚝이나 발가락을 다 내놓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도 즐겁다.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은 간질간질한 마음이나 경쾌한 음악으로 가득 채운 플레이리스트도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여름은 꽃무늬 원피스가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이 아닌가. 마음껏 화려해져도 괜찮은 날들. 동시에 한없이 가라앉아도 이상하지 않은 날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어떤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여름이었다’는 문장으로 끝나면 그럴듯해진다는 말이 있다. 그 또한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가 될 수 있겠다. 무엇이든 마지막을 맺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또 없는데, 단 한 문장으로 그것이 마법처럼 가능해진다니. 그러고 보면 여름은 참 이상하다. 뜨거운 동시에 서늘하다. 불같이 타오르는 날과 물같이 축축한 날이 공존한다. 시작부터 클라이맥스까지 모두 다 가능할 것만 같다. 여름엔 아무래도 열정적인 기세가 더 어울리지만, 잔잔하게 흐르며 대단한 일이 벌어지지 않아도 그 또한 훌륭한 서사가 될 수 있겠다. 어쨌든 여름이었으니까.오늘은 새벽부터 바람이 세게 분다. 역시나 어제처럼 침대에서 꼼지락대다가 겨우 책상 앞에 앉았다. 여름에 관해 쓰려고 했던 것뿐인데 어느덧 해가 다 졌다. 창밖을 본다. 비에 젖은 도로를 가르는 자동차 불빛이 물감처럼 번져나가는 것이 보인다.물기로 출 늘어진 여름은 곧 빳빳하게 마를 것이고 서랍장으로 들어가 다시 꺼내질 날을 기약할 것이다. 이 순간을 열렬하게 살아낼 자신이 없지만 그저 몽롱하게 바라만 보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래, 무엇이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마법의 문장이 내 손에 있으니.

2024-07-22

노래 잘 부르는 방법

첫 앨범을 낸지도 어느덧 14년. 긴 시간 동안 가수로 활동한 것치고 나는 노래를 그다지 잘 부르지는 못한다. 많은 가수들처럼 노래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피나는 연습을 하고 데뷔를 한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모른 채 데뷔하여 지금까지도 부족한 실력을 조금씩 채워나가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어떻게 하면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냐고 묻는 친구들이 많이 있다. 그래도 음악을 해온 세월이 있으니 당장 실력은 부족하더라도 나아질 수 있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보통 대충 얼버무리거나 “담배 끊으면 돼.” 정도로 성의 없게 대답을 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 적절한 대답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부족하게나마 첫 앨범을 녹음할 때보다는 나은 가창력을 가지게 된 것에는 나름의 비결이 있다. 대단히 획기적인 꿀팁을 기대한 사람에게는 실망스러울 수 있지만, 나의 비결은 고민과 반성이다.노래를 잘 하기 위해서는 노래를 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가수들의 노래를 들어봐야 한다. 끝을 알 수 없는 고음을 가진 가수, 현란한 테크닉을 구사하는 가수, 개성 넘치는 발성을 구사하는 가수 등등. 모두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만이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비유하자면 그런 것들은 피겨스케이팅의 트리플악셀이나 야구의 불같은 강속구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것을 구사하지 않고도 최고의 반열에 오른 이들을 본 적 있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기본에 충실한 선수들인지도 알고 있다. 가수의 기본은 창작자의 의도를 전달하는 것이다. 작곡가의 의도대로 정확한 음정과 박자를 구사하고, 작사가의 의도대로 감정을 표현하며 노래를 부르는 가수야말로 좋은 가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 나름 음악을 많이 듣고 분석하며 내린, 노래를 잘한다는 것에 대한 결론이다.또한 내가 어떻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에 대한 반성 없이는 절대로 실력이 늘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부른 노래를 녹음해서 들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과연 나는 고민을 통해서 알게 된,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에 대한 정의에 부합하는 노래를 불렀는가. 음정과 박자는 정확한가와 감정 표현은 어떠하였는가에 대해 평가해야 한다. 스스로 평가가 힘들다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구하고 그것을 참고해 반성을 하는 것도 방법이다. 나는 이미 세 장의 정규앨범을 냈다. 그밖에 싱글들과 EP를 합치면 50곡이 넘는 곡을 녹음한 셈이다. 녹음을 할 때마다 나는 내가 부른 노래를 마주해야 하고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서 다시 부르는 일을 몇 시간씩이고 반복해야 한다. 그야말로 형편없었던 실력을 지금만큼이라도 향상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이러한 고민과 반성의 과정 없이 많은 친구들이 노래를 잘 부르고 싶어서 코인노래방을 찾는다. 자신이 잘 부르고 싶은 노래를 몇 번이고 고래고래 불러보지만 실력은 늘지 않는 까닭은 앞서 말한 것들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민과 반성 없는 연습은 아까운 성대만 혹사시키는 일이 된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고민과 반성의 필요성은 꼭 노래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도 좋은 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하고, 나의 글이 어떠한가를 살피고 반성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종이와 전기세만 낭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화를 잘 하기 위해서도 좋은 대화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내가 했던 말들을 복기하며 반성하는 과정이 필요하다.이러한 생각의 범위를 확장하여 인생을 살아가는 것 전반에도 적용시켜볼 수 있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고 반성해야 한다.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지 고민하고, 지금 내 삶은 어떠한 것을 지향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 없이 살아간다면 좋은 사람이 아니라 실없는 사람이 될 수 있고, 풍요로운 삶이 아니라 허무한 삶을 살게 될 수 있다.세상은 빠르게 돌아가고 삶은 점점 바빠진다. 적극적이고 민첩한 행동이 미덕으로 여겨지다 보니 고민과 반성은 생략해도 좋은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나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원하고,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빠뜨려서는 안 될 과정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24-07-22

삶이라는 한 알의 구슬

요즘 비즈발 만들기에 푹 빠졌다. 최근 들어 만나는 지인들에게 새로운 비즈 만들기 취미에 대해 이야기하면 모두 비즈발이 대체 무엇이냐고 물어온다. ‘옛날 주택 현관문이나 가게 출입구에 많이 걸려 있던 것 있잖아요!’ 라고 말하면 모두가 그제야 알아챈다.비즈발은 햇빛 차단용 또는 통풍 그리고 가림막 형태로 많이 사용된다. 문이나 창문을 가릴 정도의 크기라 어느 정도 사이즈가 있지만, 요즘 내가 푹 빠진 비즈발은 창문가나 벽에 거는 손바닥 남짓한 크기의 비즈발이다.한참 유행중인 비즈발 만들기는 이렇게 작은 사이즈 크기로 원하는 그림을 도안으로 그려 만드는 캐릭터 비즈발이 트렌드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도안으로 그려, 형형색색의 구슬을 사용하여 미니 비즈발을 만드는 것이다.만드는 방법 또한 쉽다. 늘어나지 않는 실과 색색의 구슬들만 있으면 충분하다. 실 끝이 풀리지 않도록 잘 묶어준 뒤 그림을 그린 도안을 따라 구슬을 색에 맞춰 끼워주면 된다. 한 줄씩 완성된 비즈들을 모아보면 꽤 그럴듯한 비즈발이 완성된다. 실 한 줄에 구슬을 차례대로 꿰는 단순 작업 반복임에도 묘하게 중독되는 것은 손을 움직이면서 머릿속의 잡생각을 비우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특성 덕분일 것이다.포털 사이트 검색어 트렌드에 비즈발을 검색했을 경우 지난 4월 중순부터 상승세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7월인 현재에는 약 2배가량 증가된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유튜브에 비즈발 만들기 키워드를 검색했을 경우 가장 많은 콘텐츠의 조회수는 87만 회를 기록하고 있으며, 인스타그램의 경우엔 #비즈발 해시태그가 포함된 콘텐츠 수가 약 1000개 정도 노출되어 있을 정도다.가만 보면 비즈 꿰기는 참 재밌다. 구슬 하나라도 잘못 꿰게 되면 전체적인 그림에 묘하게 티가 나기 때문이다. 가까이서 집중하고 보면 어디에 구슬이 잘못 꿰어졌는지 표가 나긴 하지만 멀리서 본다면 그저 하나의 근사한 작품으로 보인다. 여기서, 지난 밤 또다시 돌려보았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스터츠, 마음을 다스리는 마스터’ 속의 스터츠 박사의 말을 떠올려 본다.삶의 고통과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이 고통 속에서 인간이 해볼 수 있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다. 이 의지를 갖기 위해서 해볼 수 있는 것은 ‘진주 목걸이 기법’이다. 여기서 진주는 행동이고 목걸이는 행동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행위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차려 먹는 행위도 진주알 하나이고, 내 삶에 깊게 각인될만한 업적 하나도 진주알 하나다. 결론은 진주알에는 더 훌륭하거나 반대로 훌륭하지 않다는 가치가 없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진주알로 대입해 그저 계속 행동하며 나아가는 것이다.진주와 비슷한 모양새의 비즈는 어떤가. 비즈알을 명주실에 꿸 때의 집중력, 하나하나 꿰어갈 때의 느릿해지는 호흡과 비즈알끼리 부딪혀 나는 귀를 자극하는 소리까지 비즈알 꿰기는 삶의 진주 목걸이를 만드는 기법과 동일한 면이 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비즈의 표면이 매끄러운 것이 있는 반면 어딘가 깨져있거나 금이 가 있거나 또는 구멍이 너무 작아 실에 잘 꿰어지지 않는 구슬도 있다. 진주알에 대입했던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루는 엉망진창 일수도, 또 다른 하루는 삶의 가장 큰 기뻤던 하루로 남아있을 수 있겠으나 ‘나의 일상’이라는 본질엔 변함이 없다. 그러니 유독 그 하루가 일이 풀리지 않는다 한들, 또는 실패의 연속인 나날이라며 주눅 들어 있든 일상은 나의 삶이므로. 멋진 비즈발이라는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삶은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지, 성공과 실패라는 결론이 중요하지 않으므로.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비즈를 실에 꿰어 하나씩 모으다 보면 어느새 멋진 비즈발이 완성되어 있다. 세상에, 이렇게나 빨리 내 손으로 이걸 만들었다고? 벽에 걸어 두었더니 여름의 토마토가 그려진 작품이 하나 완성되었다.물론 가까이서 보면 작은 티끌 하나로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부분이 있고, 본드 자국도 난무하지만 뭐 어떤가. 서툴지만 사랑스럽고 때론 너무 진지해서 픽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이 평소 나의 모습이 아니던가. 그러니 오늘도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비즈를 뒤적이며 하나의 작품을 준비해본다. 평소 같았다면 불만투성이인 여름의 초입일 테지만, 좋아하는 일을 손으로 하며 그럭저럭 여름을 잘 나볼 마음의 준비를 해본다.

2024-07-15

기억의 낚시, 망각의 낚시

“Some dance to remember, Some dance to forget” 밴드 Eagles(이글스)의 ‘Hotel California(호텔 캘리포니아)’의 한 소절이다. 어떤 춤은 기억하기 위해 추고, 또 어떤 춤은 잊기 위해 춘다니, 이렇게 시적인 노랫말이 또 있을까? 때때로 노래는 시보다 더 위대한 시가 된다. 물론 음악보다 더 위대한 음악이 되는 시도 있다. 나는 낚시할 때 가끔 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리고 저 대목에서 가사를 바꿔 부른다. “Some fishing to remember, Some fishing to forget”이라고.기억하기 위해 하는 낚시가 있고, 잊기 위해 하는 낚시가 있다. 또 한 번 장마가 오고, 단풍이 들고, 첫눈이 내리고, 다시 꽃이 피고, 매미가 울고, 얼음이 얼고, 계절이 돌아오고 돌아올수록 사랑하던 이들이 하나 둘 곁을 떠나간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을 추억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 삶이라는 지독한 경주는 뒤를 돌아보지 못하게,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게 우리를 채찍질한다. 그나마 낚시가 나로 하여금 그 각박한 트랙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낚시를 통해 나는 잠시라도 힘겨운 세상살이를 잊는다. 그게 잊기 위한 낚시다.복잡한 세상살이를 잊는 순간, 그동안 기억 구석에 방치됐던 풍경들이 하나 둘 뿌연 먼지를 털어낸다. 물론 낚시가 잘 되면 낚시에 집중하느라 다른 생각할 여유도 없다. 입질은 없는데 석양은 환장하도록 아름답게 저물고, 찌는 말뚝인데 케미라이트 불빛이 강물 위를 은하수처럼 흐를 때가 문제다. 찌 대신 온갖 추억들이 올라오기 때문이다.“이제 젊은 시절 내가 사랑했던 거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제시마저도. 하지만 여전히 난 그들과 함께 있다. 물론 이제 너무 늙어 훌륭한 낚시꾼이 될 수는 없지만 난 지금도 이 강가에서 홀로 낚시를 한다. 이렇게 날이 저물어가는 계곡에 혼자 있을 때면 모든 존재가 내 영혼과 추억 속으로 스며든다. 빅블랙풋 강의 소리와 4박자의 리듬, 그리고 송어가 뛰어오를 거란 기대감… 결국 모든 것들이 하나로 합쳐진다. 흐르는 강물처럼.”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 나오는 주인공 노먼 맥클레인의 독백이다. 팔순의 노조사는 강물에 몸을 담근 채 낚시 매듭을 묶으며 젊은 시절 자신이 사랑했던 목사 아버지, 자애로운 어머니, 일찍 세상을 떠난 동생 폴, 마을 축제에서 만나 결혼해 일생을 함께 산 아내 제시를 추억한다. 모두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제는 사라진 사람들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다 사라지고 오직 강물만 남았다. 평생의 추억이 흐르는 빅블랙풋 강에서 낚시를 할 때면 강물 소리와 바람, 무지개송어 입질, 후회, 상처,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의 음성과 눈빛이 하나로 합쳐져 영혼 속으로 스며든다. 노인은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하기 위해 낚시를 한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렇게 말했다. “죽은 사람의 육체는 부재하는 현존이며, 현존하는 부재이다. 그러나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 없어져버릴 때, 죽은 사람은 다시 죽는다”고. 내가 살아 있는 한, 살아서 기억하는 한 내가 사랑했던 이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오직 잊기 위해 하는 낚시도 있다. 그런데 이 낚시는 정말 어렵다. 오래 사랑한 연인과 헤어지고서 그녀를 잊기 위해 뙤약볕 쏟아지는 갯바위에 올랐다. 발밑으로 파도가 부서지고, 거품 되어 사라지는 하얀 포말이 마치 부질없는 인연처럼 느껴졌다. 잊어야지, 잊어야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루어를 던지고 또 던졌다. 그런데 젠장, 입질이라도 좀 있어야 잊을 게 아닌가? 깻잎만한 광어, 손바닥만 한 우럭조차 물지 않으니 빈 바늘에 딸려 오는 건 오직 그녀 얼굴뿐이었다. 잊으려 하면 할수록 더 선명해진다. 낚시를 하면 마음이 정리되기는커녕 더 심란해진다.그래서 어느 시인은 “어느 날인가는 앞강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오래 당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처럼 마음에서만 사는 아득한 것들은 또 어떻게 저 별의 시간을 건너가게 되는지”(강경보, ‘우주 물고기’)라고 묻기도 한다. “마음에서만 사는 아득한 것들”은 결코 저 별로 건너가지 못하고 이 별에 머문다. 갯바위, 좌대, 갑판, 강물 속, 방파제가 낚시꾼의 별이다.

2024-07-15

등장인물을 사랑하기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존재를 사랑하는 일은 영화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인물의 감정을 다채롭게 보여줄 수 있으며 얼마간의 사건을 만들어내기 적격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마음이 변화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동시에 삶은 우리를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두 가지 상반된 진실이 섞이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고 결말을 알면서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유쾌한 함정에 빠지게 된다.사실 누구에게나 이런 식의 경험이 존재할 것이다. 그것이 대단히 드라마틱한 일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아이들이 앙앙 우는 소리가 지구상에서 가장 괴로운 소음이라던 친구는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놀랍도록 어른스럽고도 다정한 면모를 보여준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며 싸우던 단짝 친구와 결혼식을 올린 지인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내 경우엔 반려견을 들 수 있겠다. 내가 동물과 함께 산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 없었는데, 어느 순간 내 삶에 틈입한 이 존재는 나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강아지는 사랑하기에 너무 쉬운 존재가 아닌가. 동그란 코와 부드러운 털, 무엇보다 녀석은 먼저 마음을 주는 쪽에 가깝다. 온 힘을 다해 나를 사랑한다고 외치는 존재에게 냉담하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곤히 잠든 강아지를 바라보고 있자면 이런 생각을 든다. 언젠가는 정말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 게 정말 가능한 영역일까?최근 나는 의외의 인물을 사랑하게 되는 경험을 했다. 미국 드라마 ‘오피스’를 보면서였다. 몇 번이나 보고 또 봤던 시리즈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건 아마 내가 일련의 사회생활을 경험하게 되면서 겪은 일들과 겹치는 지점이 많아서일 것이다. ‘오피스’는 던더 미플린이라는 제지회사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화를 다룬다. 마치 실제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진행되는 것이 큰 특징인데 덕분에 카메라 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나 인물의 숨겨진 감정까지도 세세하게 드러나게 된다.나는 항상 지점장인 마이클 스콧이나 지점장 보조를 자처하는 드와이트 슈르트 같은 괴짜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로맨스를 담당하는 짐과 팸 커플의 서사도 꽤 좋아했다. 어쨌든 이들은 주인공 격에 속하고 카메라에 자주 비추어졌으니까. 이번에 다시 ‘오피스’를 시청하면서 의외의 인물이 내 마음 안에 들어왔으니, 다름 아닌 영업사원인 필리스다.필리스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후덕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다. 극 내부에서 큰 역할을 하지 않기에 길게 들여다볼 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하는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질 때가 더 많았다. 일을 처리할 때 빠릿빠릿하지 못하고 성차별적인 발언을 내뱉으면서도 자기 잘못을 알지 못하는 여자. 타인의 소문에 쉽게 키득거리고 가끔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짓궂게 구는 사람. 그러나 새롭게 포착된 모습은 조금 달랐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누구보다 행복해하며 타인을 위해 손수 뜨개질을 하는 마음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술에 취해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모습마저 귀엽게 느껴졌으니.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실제로 그녀가 나의 삶에 끼어든대도 이런 애틋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필리스를 같은 동료를 직장에서 만난다면 나는 그녀의 오지랖 넓은 태도에 기가 질려버릴 것이다. 아주 괴로운 사람으로 여기면서 누군가가 그녀를 두고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하면 단박에 고개를 저을 것이 분명하다.그러나 그것은 내가 타인의 일면을 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서 있기 때문에 가지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내가 든 카메라가 찍을 수 있는 건 세상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어떤 사람이 되는지, 절친한 친구들과 나누는 농담이 얼마나 유쾌한지 나는 알지 못한다. 카메라 밖에서 짓는 눈물의 의미나 긴 시간 혼자만이 품고 있던 비밀 같은 것도 모른다. 등장인물의 뒷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엉켜있던 오해도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순간 조금씩 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래서일까. 요즘 나는 내 주변의 인물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그저 지나쳤던 이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친구에게 오랜만의 연락을 보내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식의 마음에서 사랑이 시작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반가운 일이다. 내 삶에 등장하는 인물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아주 쉽게 해피엔딩으로 가는 방법이기도 하니까.

2024-07-08

결혼은 미친 짓인가?

지난 주 경북매일에 실린 이병철 시인·평론가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글을 잘 읽었다. 그의 최측근 중 한 사람이자, 불과 몇 해 전까지 그의 의견에 동조하며 결혼 이후의 삶에 대해 상상조차 하려 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여러모로 흥미롭다는 생각을 하며 읽어 내려갔다. 또한 아직 결혼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신혼으로서 그가 모르는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이 글은 물론 결혼을 옹호하는 글이지만 결코 병철에게 결혼을 강권하는 글이 아니다. 그냥 이런 삶도 있으니 참고 정도 해 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적어보는 글이다.결혼은 미친 짓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일부 맞는 말이다. 약간은 미쳐야 가능한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며칠 전에 한 친구가 물었다. 결혼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인데, 정확히 말하면 돌이킬 수는 있지만 그러지 않기로 하는 것인데 그것을 감히 실행에 옮기는 용기는 어디서 나는 것이냐고. 나는 그냥 번지점프 같은 것이라 대답했다. 뛰어들어 보기 전에는 어떤 감각인지 알 수 없으니 눈 한 번 질끈 감고 생각하며 새로운 삶으로 뛰어드는 것이 결혼이라 생각한다고. 일시적으로 이성의 끈을 내려놓아야 이 어려운 결심을 할 수 있는 것이라 이야기 해주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상대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그런 상대를 발견한 나의 안목에 대한 믿음도 있었지만 그래도 무언가 큰마음을 먹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미치건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미치건 조금은 미쳐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그래서 그 미친 결정에 대해 나는 후회하는가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물론 총각끼리 김삿갓 계곡에 가서 물놀이를 하는 모습과 시원하게 낮술을 하는 모습을 SNS를 통해 보며 부러움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결혼을 한 이후로 가정 밖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시간 나는 나대로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집 앞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사서 입에 무는 일, 집에 와서는 보드게임을 하며 아이스커피 타오기나 설거지 내기를 하는 일,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말도 안 되는 춤을 추며 깔깔대는 일, 우리에게 못나게 구는 사람들에 대해 시원하게 흉을 보는 일처럼 별 것도 아닌 것들이 전부 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소박하지만 신나는 일들이 된다.이런 일들은 꼭 결혼을 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만 있다면 가능한 일이지만,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배우자에게는 연인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나의 나약하거나 부족하거나 못난 모습들을 얼마든지 보여주고 그에 대해 위로도 받을 수 있다는 것. 가수 이적의 노랫말처럼 힘이 들 땐 눈물 흘릴 수가 있고 되지 않는 위로라도 할 수 있다는 것. 연인이란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되는 님이지만, 배우자란 온전히 평생 내 편이 되기로 한 사람이기에.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결혼을 선택하고 나면 또 한 가지 선택지가 생긴다. 바로 출산이다. 이 글을 쓰는 현재 나의 아내는 만삭이고 며칠 내로 출산을 할 예정이다. 아직 육아전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지 않아 모르겠지만, 아이를 갖고 낳기까지의 지난 10개월간 우리 부부가 느꼈던 경이와 감동은 한두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것이었다. 자식은 아기였던 시절 잘 자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평생의 효도를 다 한다고 했던가. 우리 아기 ‘코코’는 이미 어느 정도 효도를 해낸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나는 결혼이란 그래도 해 볼만 한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망설이는 마음도 이해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미혼, 비혼 남녀가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 중 28.7%가 결혼 자금 부족이고, 14.6%가 고용 상태 불안정이다. 12.8%를 차지하는 출산 및 양육 부담 역시 경제적인 부분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였을 때 56.1%정도가 경제적인 상황 때문에 결혼을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경제적인 문제는 단지 개인의 잘못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사회의 구조를 설계하고 유지, 보수해 나가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다.그렇지만 마음 맞는 사람이 생긴다면, 이처럼 결혼하기 어려운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상황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한 번 시작해 볼 마음이 있는 사람끼리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이병철을 응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가 나의 결혼식에서 멋들어지게 축시를 읽어준 것처럼 말이다.

2024-07-08

불안을 다루는 법

디즈니·픽사의 대표작 ‘인사이드 아웃2’를 보고 왔다. 9년 만에 돌아온 2편 속 주인공 라일리는 13살이 되어 사춘기를 맞이한다. 행복을 위해 매일 바쁘게 머릿속 감정 컨트롤 본부를 운영하는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5인방에 의해 본부는 평화롭게 흘러갔으나 라일리가 사춘기를 맞이한 어느 날부터 ‘불안’, ‘당황’, ‘따분’, ‘부럽’이가 본부에 나타난다.새롭게 등장한 감정인 당황은 많은 사람들 앞에 발표를 할 때나 잘 보이고 싶은 친구들에게 이목이 집중될 때 얼굴이 빨개지며 나타난다. 따분은 어딘가 심드렁해져 스마트폰을 볼 때나 침대 위에 하루종일 누워 뒤굴 거릴 때에 등장하고, 부러움은 멋지게 꾸민 학교 선배들을 볼 때나 근사한 학교 시설을 둘러 볼때 나타난다. 2편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감정인 불안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여러 가지의 경우의 수를 세어본다. 불안은 라일리의 행동을 지나치게 제어하며 안정감을 돕고, 이를 지켜보며 불만에 휩싸인 기존 감정들은 새롭게 등장한 감정들과 싸움이 일어난다. 결국 기존 감정들이 본부에서 쫓겨나게 되고, 다시 본부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며 이야기는 진행된다.라일리의 의식의 흐름을 타고 흘러가다 보면 신념 저장소라 불리는 아주 깊은 곳에 다다른다. 의식의 끝인 신념 저장소는 경험으로 만들어진 감정 구슬이 자리하고 있으며, 여기서 중요한 감정 구슬은 신념이라는 끈이 된다. 신념의 끈은 라일리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신조가 되어 나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잠재의식을 지니게 한다.이러한 잠재의식은 결국 자아가 되고, 라일리를 움직이게 한다. 사춘기를 맞이한 라일리는 변화를 앞둔 성장기의 불안감, 그리고 정체성 혼란이 찾아온다. 타인에 의해 자신의 선호도가 바뀌고 기분 또한 타인에 의해 제어된다. 사춘기와 함께 나타난 불안이는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불안의 정도가 점점 심해져만 가고 결국 라일리의 ‘나는 좋은 사람이야’라는 신념과는 대비되게 절친이었던 친구들을 외면하고, 거짓말과 그릇된 행동을 하며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여태 자신의 신념이었던 ‘나는 좋은 사람이야’가 무너지게 되고, 내면의 모든 감정과 신념이 한꺼번에 뒤엉키고 폭발하며 자아를 잃게 된다.자아가 파괴된 라일리는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괴로워한다. 자신 스스로가 움직이는 것이 아닌 불안이라는 감정이 자신의 신념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라일리를 제어하던 불안이도 길을 잃는다. 불안이는 오로지 라일리를 나쁜 환경과 선택에서 지켜주고 싶었으나, 지나친 욕심 탓에 라일리의 자아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본부로 돌아온 기쁨이는 불안이를 안아주며 이 모든 걸 다시 돌려보자고 말한다. 때마침 패닉에 빠져 있던 라일리에게 오랜 친구들이 다가와 도움의 손길을 뻗는다. 그 순간 라일리는 자신의 혼란스러운 환경과 감정을 받아들인다. 그간 멀리 하려던 불안이란 감정이 받아들여질 때, 불안을 벗어날 수 있고 불안은 금새 기쁨과 슬픔, 우울, 소심, 부끄러움 등 여러 감점을 뒤섞인 페르소나의 형태를 보여주며 무너졌던 라일리의 자아가 회복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그 후 라일리에겐 커다란 변화가 찾아온다. 그녀의 자아는 ‘나는 선한 사람’이지만, ‘때로는 부족한 사람’일 수도 있고 ‘때로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 변한다. 또한 감정은 자아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줄 뿐, 결국 자아와 신념을 만들어가는 것은 라일리 자신임을 인정하고 깨닫고 나서야 사춘기를 넘어 어른으로 성장해 간다.신념에 의해 인간은 움직이고 살아간다.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신념 한 가지가 있다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행동을 하고 노력을 한다. 하지만 나는 어딘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신념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면 매사에 자신 없는 행동을 보이거나 금방 불안과 우울에 휩싸여 무엇이든 회피 행동을 보이고 만다. 라일리는 기쁨과 슬픔, 불안 등의 여러 감정 중 그 어떤 것 하나도 내세우지 않고, 여러 감정이 뒤섞인 신념을 가지며, 하나의 자아가 아닌 다채로운 자아를 지닌 사람으로 변하는 성장을 택한다.‘인사이드 아웃 2’에서 불안이는 라일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몰아세운다. 그 때문에 커다란 위기가 왔었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현재엔 지나치게 불안감이 들 때면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며 불안을 잠재운다. 여태껏 나를 몰아세웠던 건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섰던 불안이었다는 점과 라일리처럼 불안은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만 존재한단 점에서, 불안을 단순히 다루는 법에 대해 오래토록 생각하게 했다.

2024-07-01

결혼은 미친 짓이다

1985년생 남성 중 절반이 미혼이라고 한다. 1984년생인 나는 또래 열 명 중 아직 장가 못 간 네댓 가운데 하나니 서러울 것 없다. 주변에서 여자 좀 만나라고 한다. 그러면 대답한다. 만나고 싶어도 여자가 없다고. 말도 안 된다며 너스레 떨지 말라고들 하는데 통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여아와 남아의 자연적 성비는 100대 104~107 정도다. 한국에서는 이 성비가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심각하게 한쪽으로만 치우쳤다. 남아선호사상 때문이다.초음파로 태아의 성별을 감식할 수 있게 된 이후로는 1990년 100대 116.5까지 성비 불균형이 치솟더니 급기야 1994년에는 셋째 아이 이상 성비가 206.9에 달했다고 한다. 딸 하나 태어날 때 아들 둘이 태어난 셈이다.30년에 걸친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오늘날 한국은 합계 출산율 0.66명의 초저출생 사회가 됐다. 나 같이 훤칠한 쾌남마저 여태 짝을 못 찾은 걸 보면 과연 성비 불균형의 영향이 없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작용하는 건 경력 단절, 양육비 부담, 주거 불안, 돌봄 시설 부족 등 사회 제반의 문제다. 젊은 남녀가 결혼과 출산에 회의적인 것은 서로 싫어서가 아니라 서로 좋아 합쳤더니 “한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황인숙, ‘움찔, 아찔’)어 버리는 사회 현실 탓이다.엊그제 죽마고우와 영월 김삿갓계곡에 갔다 왔다. 1984년생 노총각 둘이서 물장구치고 백숙 삶아먹고 민물장어와 한우 갈비꽃살 구워먹고 산메기 잡아 매운탕 끓여먹고 진탕 술 마시고는 한 침대에 등 돌리고 누워 해가 중천에 걸릴 때까지 코골며 잤다. 그렇게 2박3일 잘 놀았다.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계곡물에 발 담그고 낮술 먹다가 “애인이랑 왔으면 재미없었을 것”이라는 의견 일치를 이뤘다.결혼을 생각할 때면 친구나 나나 막막해진다. 막막하고 자신 없는 걸 할 바에야 그냥 이렇게 둘이 놀러나 다니자며 낮술에 취한 채 진시몬의 ‘보약 같은 친구’를 합창했다. “자식보다 자네가 좋고 돈보다 자네가 좋아…” 통계화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라는 게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의 미혼 사유는 구체화되며 가정을 꾸리지 않겠다는 의지 또한 굳건해진다. 내가 결혼하지 않는(이라고 쓰지만 사실은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첫째, 남들처럼 살 자신이 없다. 이상과 현실에 괴리가 있다지만 주변 결혼한 이들을 보면 전부 이상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다. 화려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다들 수면 아래서는 처절한 물갈퀴질 중일까? 나는 아무리 해도 저렇게 살 수 없을 것만 같다. 발버둥 쳐봐야 안 될 것 같고, 근사하게 살자고 발버둥 치기도 싫다. 남들처럼 살 자신이 없다는 말을 “남들처럼 살고 싶지 않다”로 고쳐본다. 이 가치관이 비슷한 상대를 만나면 좋겠지만 100대 116.5다. 되겠나?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둘째, 아이에 대한 애착이 걱정된다. 교권 간섭, 음식점 추태, 차량 뒤에 붙인 ‘까칠한 아이가 타고 있어요’ 문구 따위 아이에 대한 지나친 애착과 과보호, 이른바 ‘내 새끼 지상주의’의 사례들을 보며 혀를 차다가도 ‘내가 아빠가 되면 더하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세월호에서, 이태원에서, 군대에서 자식들이 죽었다. 음주운전에 관대하고 아동 성범죄에 자비를 베풀며 밀양 여중생 성폭행 가해자들이 잘 사는 나라에서 어떻게 아이를 키울까? 고슴도치 부모가 되는 건 당연하다. 나는 아이 걱정에 밤잠 설치고 늘 어딘가 곤두선 채로 살게 될까봐, 그리고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자식에게 정작 뭐 하나 제대로 해주지 못할까봐 결혼이 생경하기만 하다.셋째, 혼자서 충분히 행복하다! 이 행복의 울타리 안에 누가 들어오면 함께 더 행복할까? 결혼한 사람들은 왜 결혼하지 말라고 하나. 왜 혼자 살라고 하나. 자기들은 결혼했으면서, 웃긴다 정말. 왜 연예인들은 방송에 나오기만 하면 결혼 생활을 푸념하며 배우자 험담을 하나. 결혼한 친구들 전부 이구동성 “네가 부럽다”고 말한다. 그럴 거면 대체 왜 했느냔 말이다. 내밀한 사정들은 모르지만 어쨌든 결혼한 사람들의 말과 글과 눈물과 한숨과 자기비하와 방황과 가출과 종교에 귀의와 이혼소송 등을 종합해보면 결혼은 고통이자 만병의 근원이며 악의 축인 동시에 생지옥이다.얼마 전 나는 꿈에 그리던 낚시용 레저보트를 장만했다. 한 선배가 말했다. “이제 보트 같이 탈 여자만 있으면 되겠다”라고. 내가 답했다. “보트를 샀다는 건 평생 독신선언 아니겠습니까?”

2024-07-01

분노의 국가, 분노의 계절

날이 덥다. 그래서 주차 문제로 시비가 있었다. 날이 더운 것과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은 것 사이에 인과관계는 성립할 수 있는가. 그것은 가능하다. 날이 더우면 불쾌지수가 올라가고 자기 안에 내재된 어떠한 화가 치밀어 오를 수 있다. 그것을 참아내는 것은 이성인데 가끔 이성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성미를 가진 사람이 지나치게 높은 기온에 놓이게 되면 이성의 만류를 뿌리치고 덜컥 화부터 내버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공동주택에 유난히 그런 사람이 한 명 살고 있는 것 같다. 며칠 전 주민 단체 대화방에서도 공개적으로 누군가에게 마구 화를 쏟아내더니, 오늘은 주차를 다시 해달라는 나의 요청에 분노를 쏟아내었다. 누가 주차를 잘했고 잘 못했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같은 말이라도 화를 내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자신의 불쾌함을 타인에게 무례하게 쏟아내는 태도이다. 장담컨대 그의 화의 원인이 전적으로 나였을 리가 없다. 일상에 내재된 어떤 화가 분명 그의 명치 언저리에서 들끓고 있었을 것이다.특정인에게 이러한 문제가 있었다고 이야기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 이러한 분노가 지나치게 짙게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이미 화가 나 있고, 누군가 자신에게 불을 붙여주기만을 기다렸다가 뻥 하고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미처 안내문을 보지 못하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의 문고리를 붙잡았다고 상상해보자. 관계자가 달려와서 정중하게 ‘거기 들어가시면 안됩니다.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라고 말하는 상황보다는 ‘어이! 거기 써놓은 것 안보여요? 출입금지라고요!’ 하며 성내는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영화관에서 누군가의 휴대폰이 빛날 때도 ‘휴대폰 사용 좀 자제 부탁합니다.’ 하면 해결 될 문제를 화로 해결하는 경우를 빈번히 볼 수 있다. 그런 명백한 실수나 실책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분노는 너무나도 쉽게 표출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던가. 실제로 옷깃이 스쳤다는 이유로 서로 눈을 흘기는 상황, 아니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뭘 보냐며 성을 내는 상황이 우리 주변에는 분명히 존재한다.인터넷 뉴스의 댓글 창을 봐도 온통 분노 투성이. 물론 화가 날 만한 기사에 분노의 댓글이 달리는 것이야 자연스런 일이겠지만 나와 생각이 다른 이를 만났을 때, 내가 좋아하지 않는 연예인이 땅을 사고 집을 샀을 때, 응원하던 스포츠 팀이 원하는 만큼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할 때,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스포츠 팀이 좋은 성적을 낼 때, 그냥 뭔가 마음에 안 들 때 사람들은 손가락 끝으로 온갖 분노를 터뜨려대곤 한다.나는 이러한 현상이 우리나라의 현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가경제, 기업경제, 가정경제 어느 하나 잘 풀리고 있는 것이 없는 나라라는 것은 이미 온 국민이 짜증거리 하나를 끌어안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이 술술 풀리고 좋은 일만 가득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분명히 조금은 더 마음의 여유를 쓸 수 있고, 너그러운 태도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적인 우환이라 할 수 있는 경기침체 속의 우리 국민들의 여건상 모두의 가슴 속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도 할 수 있고 이해도 할 수 있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노를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조금 답답하고 짜증나더라도 이성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를 줄도 아는 존재들이다. 그게 불가능한 상태를 ‘분노조절장애’라고 한다. 자신이 분노조절장애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사실은 선택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일 뿐일 것이라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면 배우 마동석 씨나 드웨인 존슨 같은 사람 앞에서도 조절되지 않는 분노여야 진정한 분노조절장애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자 앞에서는 조절되고 약자 앞에서는 조절되지 않는 분노는 분노조절장애의 증상이 아니라 단지 추태일 뿐이다.다시 날씨 이야기로 돌아와서, 참 무더운 요즘인데 앞으로는 장마와 함께 습도도 올라갈 것이라고 한다. 올 여름은 지난 어떤 여름보다 더울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우리들의 불쾌지수는 더 올라갈 것이고 더 많은 분노가 펑펑 터져 나올 것이다. 그 분노로 다치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는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꼭 그런 극단적 상황에 놓이지 않더라도 불필요한 분노가 우리의 삶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터질 것 같지만 터뜨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사실 그런 존재들이다.

2024-06-24

독서의 기쁨과 슬픔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는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는다. 일종의 안부 인사라 할 수 있겠으나 가끔은 난감하다. 뭔가 그럴듯한 대답을 내놓아야 할 것 같아서다. ‘그 작가의 작품을 읽어봤느냐’는 질문에 ‘당연하지’라는 답을 내놓고 싶다는 허영심 때문에 괴로울 때도 있다. 간단한 문제를 뭐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는가 싶지만, 이를 통해 내밀한 부분을 들키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설령 질문한 상대는 별생각 없더라도 말이다.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말하자면 요즘의 나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고 있다.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고전을 읽는 건 어쩐지 멋이 없어 보인다. 특히 톨스토이 같은 작가가 그렇다. 크롭티와 마이크로쇼츠가 유행하는 와중에 체크무늬 셔츠를 목 끝까지 잠그고 홍대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랄까.한국 사회는 트렌드에 민감하다. 동시대적 감각을 기민하게 따라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가올 유행을 분석하고 한발 앞서 가는 것을 훌륭한 역량으로 평가한다. 그것은 독서의 영역도 마찬가지라서 어떤 상을 받았다든가 화제의 인물이 적극 추천했다는 작품을 읽지 않으면 어떤 흐름에 뒤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나 역시 그러한 분위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지만, 최근엔 그다지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고전 작품을 꺼내 드는 빈도가 잦아진다.‘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 전쟁의 러시아를 무대로 삼기 때문에 기본적인 역사 지식이 필요하다. 덕분에 나는 그와 관련된 역사 서적부터 찾아 읽었다. 본 여행을 위한 준비 과정이 꽤 길었으나 지평을 넓히는 것 또한 책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이윽고 페이지를 펼치자 톨스토이다운 유려한 진행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인물의 이름이 헷갈려 스토리 라인을 놓치는 그야말로 고전적인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2024년에 사는 문명인답게 유튜브를 켜고 톨스토이를 검색했다. ‘10분 안에 톨스토이 끝내기’ 혹은 ‘톨스토이 작품 읽은 척하는 법’과 같은 영상이 우르르 쏟아졌다. 벽돌처럼 두꺼운 4권의 책을 완독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런데 유튜브에선 클릭 한 번으로 작품의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유튜브 영상을 통해서 체험을 대리하는 것에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독서의 영역까지 넘어오다니.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나는 같은 책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는 것을 좋아한다. ‘파우스트’와 ‘싯다르타’는 내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읽는다. 몇 번을 읽었는지 손가락으로 꼽지 못할 정도다. ‘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이해하고 싶거든 꺼낸다. 특히 레빈의 풀베기 장면을 자주 찾아보는데 읽을 때마다 늘 비슷한 감동이 밀려온다. 나는 왜 이런 식의 독서를 하는 것일까. 어쩌면 두뇌 회전이 느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명석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쉽고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해 에둘러 돌아가고 하나의 현상을 미련할 정도로 진득하게 바라본다.누군가에겐 굉장한 시간 낭비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러한 독서 습관을 교정할 생각이 없다. 같은 텍스트를 반복하면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불편함이 없고 좋은 문장을 찬찬히 곱씹을 수 있다. 어제는 분노로 읽혔던 것이 오늘은 슬픔으로 읽히기도 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무엇보다 작가가 자신만의 삶을 살며 구축한 생각이 내 안으로 조금씩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 몸을 직접 통과하지 않은 것들은 쉽게 휘발되기 마련이다. 어떤 슬픔을 직접 겪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말이다.독서는 대단할 필요가 없는 활동이다. 글자를 익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요즘처럼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에 텍스트를 읽는 행위는 특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독서는 쇼츠를 넘기는 것보다 지루하다. 깨알 같은 글자 안에서 인생의 답을 찾아보려 노력하지만 쉽게 되지 않는 순간이 더 많다.그런 면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독서에 접근하는 순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읽는 것을 통해 뭔가를 체화했다면, 그것은 독서 이후에 생기는 것이지 이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낯선 곳을 여행하며 생겨나는 일들을 떠올려도 좋겠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좌절과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기쁨 같은 것들. 직접 경험하면서 생기는 실감은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다. 그것은 개인의 고유한 영역이며 타인의 침입이 불가하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독서가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일 것이다.

2024-06-24

취해라 그리고 걸어라

“취해라,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게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여 당신을 땅 쪽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가증스러운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쉴 새 없이 취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무엇에 취하려는가? 포도주든, 시든, 덕이든, 그 무엇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그러니 어쨌든 취해라. (…) 이제 취할 시간이다. 시간에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쉬지 말고 취해라.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무엇이든 당신 마음대로.”(샤를 보들레르, ‘취해라’)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보들레르는 현대시의 시초로 불린다. 1830년대에 프랑스 정부는 포도주에 대한 새로운 과세법을 제정했는데, 이 과세는 도시민으로 하여금 값싼 포도주를 찾아 시외에 자리 잡은 상점으로 가게 만들었다. 그곳에서 파는 세금 없는 포도주는 노동자와 하층민,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쾌락이었다. 보들레르에게도 술은 정신을 위안할 수 있는 기쁨이었는데, 대표 시집 ‘악의 꽃’에서 그는 ‘술의 넋’, ‘넝마주이들의 술’, ‘살인자의 술’, ‘외로운 자의 술’, ‘연인들의 술’ 등 술 연작을 통해 술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보들레르는 포도주 뿐 아니라 흑맥주를 애호했다고 한다. 보들레르는 현대인들에게 “취해라”라고 말한다. 이는 무분별한 알콜릭이나 쾌락 추구, 방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19세기 파리는 전근대의 농경사회에서 근대 도시문명으로 전환한 시기다. 불문학자이자 평론가인 고 황현산 선생은 “농경사회에서 시간에 대해 얘기할 때 물처럼 흐른다고 표현하는데요. 보들레르한테 시간은 물 흐르듯, 바람 불어오듯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1분, 1초 분할된 시간, 시간 그 자체가 물체화 되어 계속해서 쫓아오고 있는, 이런 시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압박이 사라지면 마음이 편안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시간의 압박이 사라지면 권태 속에 들어가게 되죠. 바로 이게 산업사회의 시간, 자본주의 사회의 시간입니다.”라고 설명했다.보들레르가 취할 것을 권면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현대적 시간의 중력에서 벗어나라는 것!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고 초조함과 신경쇠약, 권태와 우울감으로 몰고 가는 도시적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그것이 술이든 아니면 음악이든 무엇이든 간에 몰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보들레르 문학과 근대성의 상관관계를 평생 연구한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위고가 현대 서사시의 영웅으로 대중을 예찬하는 순간, 보들레르는 영웅의 피난처를 대도시의 대중 속에서 찾고 있었다. 시민으로서 위고는 군중 속에 섞여 든다. 보들레르는 영웅으로서 거기에서 떨어져 나온다”라고.벤야민은 빅토르 위고의 작품들을 대중과 함께 호흡한 ‘민중문학’으로 읽은 반면 보들레르의 문학은 대중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홀로 솟아오르려는 영웅적 행위로 보았다. 보들레르가 대도시의 군중에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기 위해 채택한 방법은 바로 걷기다. 보들레르는 술만큼이나 걷는 걸 좋아한 ‘거리산보객(flanuer)’이었다. 산보객이란 대도시의 거리 곳곳을 정처 없이 거니는 사람을 뜻한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목적을 가지고 분주히 움직이는 군중과 완전히 대비된다. 일상은 지루하고, 현실원칙의 중력은 무겁기만 하다. 1분, 1초 단위로 등 뒤에서 달려드는 현대적 시간에 쫓기면서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만 간다. 현실에만 충실히 복종하면 강박주의자가 된다. 누군가와 교류하는 것이 피곤해지고, 타인에게 엄격해지기만 한다. 그렇게 점점 혐오와 갈등, 분리의 감각에 익숙해진다. 일상의 무게를 벗어나려면 꿈을 꿔야 한다. 꿈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현실의 속박이 없는 시간과 공간에서 마음껏 취하고 걸어야 한다.취하는 사람은, 취해서 걷는 사람은 꿈의 파랑 속에서, 환상의 리듬 속에서 생을 긍정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보며, 타인들과 넉넉히 어울리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다. 평범한 도시인으로 살 때, 시간에 쫓기며 압박당하는 군중의 한 사람으로 살 때 도시는 각박하고 권태로운 곳이지만, 무언가에 취해서 산보객으로 살 때 도시는 감동과 도취, 새로움으로 가득한 역동적 세계가 된다. 2024년을 사는 우리에게 1800년대 보들레르가 말한다. “취해라 그리고 걸어라!”

2024-06-17

새로운 시작 앞에서

오랜 기간 골치 아팠던 문제에서 드디어 벗어났다. 이럴 때 생각나는 두터운 책 한 권이 있다. 2년 만에 펼쳐들어 3번째 완독을 마친 소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다.스토너는 독서에도 시차가 있음을 알려준 책이다.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약 2년 전, 그 전에는 약 4년 전에 읽었다. 처음 읽은 스토너는 그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심심한 인간의 생애가 있는 건지? 특별한 사건 없이 밋밋하게 흘러가는 스토너의 생애 이야기를 몇 장 읽고 덮어두었다가 다시금 꺼내어 꾸역꾸역 읽어 내려갔었다. 어쩐지 심심한 그 감각이 계속 맴돌다가 2년이 지난 후, 두 번째로 꺼내 읽은 스토너는 어쩐지 새로웠다. 너무나 지루했던 그의 인생에서도 사건이라는 흐름이 보였기 때문이었다.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중략)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중략)가끔 어떤 학생이 이 이름을 우연히 발견하고 윌리엄 스토너가 누구인지 무심히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애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스토너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단순한 인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잊히는, 지극히 존재감 없는 사람.스토너는 1891년 미주리주 중부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고작 스물다섯 살, 어머니는 스무 살이었다. 스토너에게 부모는 늘 늙은 사람이었고, 고된 노동으로 삶을 버티고 인내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떠한 열망도 없이 살아가던 스토너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별 생각 없이 대학에 입학하지만 그 이후에도 어떠한 즐거움이나 괴로움도 없이, 삶은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긴 한순간이라 여기며 지낸다.얼마 지나지 않아 스토너는 이디스와의 결혼을 하지만, 곧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디스는 계속해서 아픈 몸, 무기력함, 목적 없는 생의 지루함 때문에 자신의 딸아이인 그레이스를 방치한다. 대부분의 육아와 집안일을 스토너가 맡게 되면서 예상치 못한 부성애를 가지게 된다.스토너와 그레이스간의 사이가 친밀해질수록, 이디스는 질투에 사로잡히면서 히스테릭함이 더욱 극에 달한다. 그러나 스토너는 관조와 무조건적인 이해로만 그녀를 대하고 그녀의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는 폭풍 같은 현실 속에서 세 인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슬픔의 굴레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슬픔을 부정하거나 떠미지 않고, 괴로움을 안고 버티며 모든 것을 인내 한다. 처음에는 이 세 인물이 서로 원치 않는 방향으로 향하는 결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느릿느릿 문장을 읽다보면 세 인물은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당시 어떠한 시대적 혼란이 있었는지 알 수 있게 된다.모든 것을 인내하는 스토너로 보이지만, 그는 강단에 서서 문학을 가르칠 때만큼은 열정적이었고 자신의 수업을 듣던 ‘캐서린’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부적절한 관계를 대학 내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면서 결국, 그들은 사랑을 포기하게 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스토너는 캐서린과의 이별 이후 빠른 속도로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그는 죽음 끝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본다. 원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 결혼 생활, 캐서린과의 이별을 겪고 죽음을 앞둔 스토너. 얼핏 보면 그의 삶은 실패로 보일 수 있으나 실은 그의 생은 너무나 평범하다는 걸 알 수 있다.스토너의 죽음은 인간의 삶은 ‘성공’ 또는 ‘실패’라는 결과보다는 그가 얼마나 생을 살아보려 애썼는지, 어떤 시도를 했는지가 더 중요한지를 알려준다. 그는 죽음 앞에 서서 평온하다. 삶을 인내했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하루를 마무리 하며 나의 일상을 돌아볼 때에 나의 생은 왜 이렇게 지루하고 건조해 보이는 건지 고민될 때가 있다. 하지만 이 단조로움 또한 생의 불행과 운을 온 힘으로 버텨내는 안간힘임이 내재되어 있음을 안다. 성공 또는 실패라는 결과보다는 ‘삶을 살아보려는 시도’, 스토너라는 한 사람의 진득한 생애는 내게 새로운 시도의 힘을 갖게 한다.

2024-06-17

경쾌하게 지내기

며칠 전 친구와 긴 통화를 했다. 서로의 근황을 나누다가 요즘 나를 성가시게 하는 일들에 대해 토로하게 됐다. 가만히 듣던 친구가 넌지시 물었다. 그게 너의 평화를 방해할 만큼 큰일이야?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그렇게 말하니 거추장스럽던 고민이 한순간에 사소한 것으로 변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통화를 마치면서 친구가 덧붙였다. 은강아, 괜히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가볍고 경쾌하게 지내자.그 순간 내 안에 중요한 무언가가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은 마치 더운 여름날 살얼음이 낀 맥주를 들이켜는 감각과 비슷했다.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시원하면서 따끔한 기분. 친구는 오랫동안 내가 바라던 상태를 딱 들어맞는 언어로 짚어준 것이다.사실 ‘경쾌하다’는 말은 내가 평소에도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러닝머신 위에서 경쾌하게 달려보겠다는 다짐으로 발을 구르고 학생들의 작품을 첨삭하며 조금 더 경쾌하게 진행해 보라는 조언을 내어놓는다. ‘경쾌하다’고 중얼거리면 어쩐지 꽉 막힌 것들이 시원하게 해결될 것만 같다. 그럭저럭 괜찮은 상태가 아니라 좀 더 상쾌하게 쭉 뻗어가는 느낌이랄까. 힘차게 전진하는 쾌속 열차처럼, 천진한 아이의 쾌활한 웃음처럼.‘경쾌하게 지내기’란 언뜻 들었을 때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꽤 어려운 일이다. 물속을 헤엄치는 사람과도 비슷하다. 수중에서 제대로 이동하기 위해선 몸의 정렬을 깨지 않고 올바른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적당하게 힘을 빼는 것도 중요하고 물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멀리서 보면 우아하고 민첩해 보이나 사실 상당한 체력과 노력이 요구된다. 어떤 준비도 없이 물에 뛰어드는 건 위험하다. 요동치는 감정에 휩쓸리는 순간 허우적대다 가라앉을 수도 있다.부정적인 생각은 물먹은 솜과 같다.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그때 그 사람은 내게 왜 그런 말을 했지? 난 항상 최악의 선택만 하는 것 같아. 생각은 생각을 먹고 더욱 불어난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억지로 구겨서 폐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경쾌하게 나아가기 위해선 먼저 몸과 마음이 가벼워져야 한다.최근 나는 삶을 가볍게 살아가는 방식에 관해 골몰하고 있다. ‘뭐 해 먹고살지?’보다 ‘어떤 자세가 편안하지?’라는 질문에 무게를 두고서. 물론 나는 아직 젊은 나이고 주렁주렁 매달린 고민과 불안이 당연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젊다고 해서 괜한 것을 짊어질 이유는 없다. 필요한 물건 대신 무거운 돌을 가방에 넣는 건 그야말로 무의미한 일이니까.때론 복잡하고 부조리한 세계가 나의 다짐을 방해한다.집 앞 새로 생긴 카페의 레몬 케이크, 너무 맛있어! 일상에서 즐거운 일이 생기면 호된 꾸짖음이 들려오는 것 같다. 네가 지금 케이크에 기뻐할 때니? 오늘도 혐오에 기반을 둔 끔찍한 범죄가 벌어졌고 지구 반대편에선 총성이 울려 퍼지고 있어. 그뿐이면 다행스럽게? 자본의 논리 속에 약자는 희생당하기 마련이고 환경오염으로 인한 이상 기온으로 생태계가 엉망이라고.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이것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마음을 주저앉히기에 효과적이다. 요즘처럼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다고 흐뭇해하기가 무섭게 곧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쳐올 것이라는 악담이 끼어드는 식이다. 이러한 속삭임은 타인의 언어라기보다 내 안에서 작동되는 장치에 가깝다. 그러니 해결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 나의 괴로움이 세계의 운명을 바꾸는 것도 아닐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이 가져야 할 사회적 책임을 방기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세상을 헤쳐 나가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인생이라는 바다를 헤엄쳐야만 하는 숙명을 타고난 우리 앞에 거친 파도는 다가오거나 다가오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것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경쾌하게 지내는 편이 좋지 않을까. 수면 위를 둥둥 떠다니며 햇살과 바람을 느끼고 살랑대는 보사노바에 맞춰 몸을 흔드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니까. 진한 맥주 한 잔 곁들어도 좋겠지. 그렇게 태평하게 굴다간 무시무시한 태풍에 잡아먹힐지도 몰라. 그런 목소리가 들리면 이렇게 대꾸하고 싶다. 알겠어요. 우선 여기 이 레몬 케이크를 먹어봐요. 정말 맛있다고요.

2024-06-10

서른여덟 살의 기타 유망주

서른여덟에 기타 선수를 꿈꾸는 필자. 요즘 나의 낙은 기타 레슨을 받는 것이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첫 앨범을 낸 것이 2010년. 벌써 데뷔한지 14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음악은 새로운 부분들이 많다. 블루스 기타 솔로 연주를 중점적으로 배우다보니 내가 사용하지 않는 음들을 만나게 되기도 하고, 다소 틀에 박혀 있다고 느꼈던 나의 멜로디가 자유롭게 요동치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고 있는 선생님은 우연히 알게 된 후배 뮤지션 남경운. 그는 나보다 13살이나 어리고 음악 경력도 짧지만 기타 연주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해내는 발군의 연주자이며 재능 넘치는 싱어송라이터이다. 서른여덟 살의 내가 스물다섯 살의 그에게 기타 연주를 가르쳐달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은 쑥스러웠지만 용기를 내어 부탁을 했고, 그것은 최근에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잘 한 일이 되었다.사실 음악을 더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었던 것은 형준이 형 덕분이기도 하다. 그는 같이 활동하던 뮤지션 중 한 명이었는데, 음악만큼 사랑하는 일이 바로 복싱이었다. 어느 날 그가 다니던 복싱 체육관의 관장님께서 노환으로 별세하시고, 그가 체육관을 인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복싱을 해온 터라 누군가를 가르칠 실력은 충분했으나 복싱선수로서의 타이틀이 없었던 형준이 형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프로복싱 신인왕전에 원서를 넣었고 결국 신인왕 타이틀을 거머쥐기에 이르렀다. 그 때 형의 나이가 마흔이 넘은 시점이었다. 지금까지 불혹의 복서로서 2전 2승 1KO라는 성적을 올리고 있는 그를 보며 나는 강한 자극을 받았다.사실 삼십 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나는 내가 더 이상 무언가를 배워서 늘 수 있는 가능성이 몹시 줄어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어느 정도 숙련도를 가지고 있는 음악이나 문학의 분야에서 만큼은 지금의 기량을 유지하는 정도를 목표로 해야지, 지금보다 실력이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은 닫아놓고 있었다. 그런데 형은 마흔에 신인으로 데뷔를 하였고 꾸준히 실력을 연마해 더 높은 랭킹으로 올라가고 있는 중이라니. 내겐 놀라운 일이었다.또 어느 날은 TV를 보는데 가수 이효리씨가 나왔다. 이효리씨는 요즘 들어 보컬 레슨을 받고 있다고 했다. 사실 뛰어난 보컬을 지녔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미 1990년대와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에 차트 1위를 경험한 유일무이한 가수가 된 그다. 충분히 많은 것을 이룬 그가 데뷔 26년차에 자신의 보컬에 부족함을 느끼고 일주일에 세 번씩 학원에 다니고 있다니. 그 열정과 용기가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최근에 들은 그의 라이브는 예전보다 훨씬 훌륭해져 있었다.돌아가신 작은할아버지 생각도 났다. 나의 이름을 지어주시기도 하셨던 작은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러시아문학과 인공어인 에스페란토를 공부하고 싶어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형이자 가장이었던 우리 할아버지께서 시대적인 이유로 공산권의 언어를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시는 바람에 포기하고 교사 생활을 하셨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은퇴를 하신 뒤에 60대의 나이로 노어노문학과 대학원에 석사과정으로 입학을 하셨고 기어이 학위를 받아내시고 말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지만,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공부를 하시고부터 돌아가시기까지의 그 시간이 아마 작은할아버지께서 가장 행복하셨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그것을 증명하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고 이들 말고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고작 마흔도 안 된 내가 스스로 가능성을 차단하고 이제는 더 나아질 수 없다며 징징대고 있었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최근 공연에서는 노래와 노래 사이의 간주에 다른 연주자에게 맡기곤 했던 기타 솔로 연주를 한 두 곡 정도는 내가 시도해보기도 한다. 빼어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유명한 기타리스트들처럼 지판 위를 날아다니듯 테크닉을 뽐낼 줄도 모르지만, 그럭저럭 다른 기타리스트들이 하는 솔로 플레이 비슷하게는 소리를 내는 나 자신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기도 한다.한 분야에서 배움을 얻고 성장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나니 또 다른 도전들이 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음악 영역에서도 여태껏 내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분야들에 발을 담가보고 싶어졌고, 문학적으로도 여태 해 보지 않았던 것들을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나는 더 도전적으로 이것저것 시도하며 살아보려 한다. 그래, 그런 게 없다면 남은 인생이 너무 지루하지.

2024-06-10

가난이란 무엇인가

최근 타계한 신경림 시인은 ‘가난한 사랑 노래’란 시를 남겼다. /연합뉴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서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신경림의 시 ‘가난한 사랑 노래’다. 시인은 맑고 뜨거운 눈물의 언어를 우리에게 남기고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파장’, ‘농무’, ‘목계장터’ 등 절창이 셀 수 없으나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건 위의 시다.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달렸다. 가난한 젊은이는 곧 그 자신이기도 하고,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쳐 온 민중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은 젊은 날 광부, 장사꾼, 영어강사 등으로 힘겹게 삶을 이었다.가난을 겪어본 시인이 쓴 이 시는 가난이 무엇인지 말해준다.가난이란 두려워하면서도 기계에 손을 넣거나 용광로 위를 아슬아슬 걸어가는 것이다. 가난이란 버릴 수 없는 그리움을 버리고 사랑을 알아도 몰라야만 하는 것이다. 가난은 꿈과 사랑과 그리움을 다 버려야 하는 상태, 개성이며 취향은 물론 희망과 기대까지 모든 게 끊어져버린 막막한 무저갱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에 흐르는 가난의 구정물 대신 애처롭게 빛나는 가난의 낭만만을 읽는다.신경림 시인이 하늘로 돌아간 날, 학생들과 박완서의 단편 ‘도둑맞은 가난’을 읽었다. 빈민촌에서 사는 ‘나’는 일가족이 자살해 세상에 홀로 남았다. 얼마 안 되는 봉급이지만 씩씩하게 삶을 꾸리면서 동거남인 상훈과 미래의 알뜰한 행복을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던 상훈이 말끔한 양복 차림으로 나타나 말한다. “사실 나는 부잣집 도련님이고 대학생이야. 아버지께서 방학 동안 어디 가서 고생 좀 하고, 돈 귀한 줄도 알고 오라고 해서 너랑 여기서 지낸 거야.”가난을 ‘사서 하는 고생’으로 여기는 풍조는 여전하다. 몇 해 전 쪽방촌 체험 프로그램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나’는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못 생각해 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를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며 절규한다. 사람들은 가난에 낭만을 부여하고 서사를 입히기 좋아한다. 같은 성공이라도 자수성가 스토리에 열광하고, 가난해본 적이 있다고 하면 인간적으로 느낀다. 그러니 정치인들이 선거철마다 재래시장에 가 어묵을 먹고, 겨울에 연탄 나르며 흰 얼굴에다 검댕을 처바른다. 연예인들이 빚더미에 앉았다며 생활고를 호소하고, 광고가 끊겼다며 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가난은 대개 상대적 가난이다. 하지만 진짜 가난은 절대적인 것이다. 서로의 가난을 비교하다 그래도 나는 낫구나 싶으면 가난이 아니다. 남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는 가난이 진짜 가난이다. 학생들에게 말했다. “집에서 나와 옷 입고 밥 먹고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과 나는 가난하지 않다. 결핍과 가난을 혼동하지 말자. 정말 가난한 이들을 욕보이지 말자. 가난을 낭만으로 여기지 말자. 가난을 대상화하지 말자”고.돌아보면 나는 결핍을 가난과 착각해 잘 먹고 잘 사는 생활을 애써 남루하게 만든 적이 많았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타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며 삶 자체다. “가난을 희롱하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지 않은가. 가난한 계집을 희롱하는 건 용서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가난 그 자체를 희롱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 더군다나 내 가난은 그게 어떤 가난이라고. 내 가난은 나에게 있어서 소명이다. (…) 내 방에는 이미 가난조차 없었다. 나는 상훈이가 가난을 훔쳐갔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는 소설의 마지막 대목을 읽으며 등골이 서늘하다. 나는 그리움을 알고 사랑을 알고 고기와 술을 먹고 마시며 더 즐거운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닌가.

2024-06-03

결혼 이야기

요즘 부쩍 결혼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주말이 되면 카페에 앉아 가능한 주택 대출제도를 알아보고 앞으로 우리가 살 곳이 어딜지 점찍어 보며 살고 싶은 동네를 찾아가 찬찬히 둘러본다. 그것만으로 벌써 내게 마음에 드는 집 한 채가 생기는 기분. 연인의 손을 잡고 걷는 이 동네가 벌써 우리 것이 된 것만 같아 설렌다.결혼이란 뭘까.사실 깊게 생각해보진 않았으나, 때때로 결혼이란 상대에게 얽매이는 구속 또는 희생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렇게 지레 겁을 먹다보면 현재 내 앞의 행복이 소중하고 아까워서 놓치고 싶지 않아진다,8평 짜리 원룸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찬 자유의 공간. 하지만 사정이 좋지 않아 이곳에 배우자와 함께 살게 된다면? 아주 약간 망설여질 정도로 쉽게 내 공간을 내어주기란 쉽지 않다. 이 협소한 공간 속에서 우린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양보하며 살아가야 할 거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야 근사한 결혼 생활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러던 중 며칠 전 본 영화 ‘결혼 이야기’를 보고 결혼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LA 출신 여배우 니콜은 연극 감독인 찰리와 결혼을 하기 위해 배우 커리어를 버리고 그와 결혼해 뉴욕에 산다. 니콜은 결혼 생활 중 고향인 LA로 돌아가고 싶지만 찰리와의 결혼 생활 때문에 쉽게 내려가지 못한다. 그러던 중 니콜이 LA에서 촬영이 진행되는 한 파일럿 프로그램에 들어가게 되고, LA에 생활하며 찰리에게 이혼 신청을 요구한다.그 와중 그들의 싸움은 점점 격해지며 결국 변호사를 고용해 이혼 소송까지 번지게 된다. 이혼 소송에서 일어나는 일과 인물의 감정선을 극의 절정까지 끌어올리며, 두 인물 모두 서툴고 인간적이며, 본인 스스로가 제일 중요한 이기적인 인간상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낸다.사랑은 변하기 마련이다. 남녀간의 사랑은 결혼 전과 후 분명히 결이 달라진다. 무수히 많은 상황, 환경, 사건이 있겠고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거나, 변형되거나, 비틀어지거나, 끈끈해지거나, 단단해질 수도 있다.이 영화를 통해 깨달은 건 사랑만으로 완벽한 결혼 생활의 완성을 꿈꿀 수 없다는 점이다. 나와 너는 우리로 묶이지만 어쨌든 다른 개개인의 인간이고, 더군다나 유통기한처럼 소멸하는 연인간의 뜨거운 사랑만으로는 결혼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영화 속 니콜과 찰리는 웨딩마치 속 화려함이 완벽하게 빼내진 채로 담담하고 솔직하게 마지막을 향해 달려간다. 하지만 니콜은 찰리와 헤어지는 길에서 그의 풀린 신발끈을 정성스레 묶어준다, 이혼을 고려할 정도로 그를 증오하지만 그가 가는 길에 넘어지지 않도록 신발끈을 묶어주며 끝내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 니콜에게 찰리는 ‘우리끼리의 나눈 농담도 다 기억하는 사이’, ‘확신이 없는 나랑은 정반대인, 뭘 원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를 본지 2초 만에 사랑에 빠져‘버릴 정도로 내가 깊게 빠져들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상대를 답답해하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소리를 지르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모난 말들만 던지는 싸움 속에서 그간 우리가 쌓아올린 존중과 신뢰의 태도를 굳게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싸움은 감정을 소모하는 일이고, 감정이 고조되며, 본능적으로 손해를 보기 싫어하니까. 아담과 찰리도 그렇다. 서로를 위해 고상하게 차 한 잔 나누며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고, 벽을 부수고, 욕설을 내뱉는다. 하지만 그들이 사랑으로 쌓아올린 믿음까지 부수진 못한다. 그들은 과거의 사랑을 바탕으로 각자의 길을 걸어도 서로의 길을 응원하는 사이를 택한다.파경 후 관계를 유지하는 ‘결혼 이야기’를 보며 나는 오히려 그전까진 알지 못했던 사랑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을 보았다. 내가 무서워했던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소멸된 애틋한 사랑이었고, 이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아주 단순한 겁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사랑은 자연스레 변할 테지만 함께 사랑해온 시간 속의 믿음과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언제고 연인과의 첫 만남, 우리가 나눈 눈빛, 여행지를 기억할 수 있고 이는 이미 내게 영원한 믿음으로 자리했기 때문이다.

2024-06-03

꼰대학 개론

어도어 민희진 대표의 기자회견이 한동안 이슈였다. 인터뷰의 내용부터 그가 입었던 의상까지 화제가 되었지만 단연 화제의 중심에 있었던 것들은 그가 사용한 자유분방한 어휘였다. 비어와 속어를 넘나들며 등장시킨 단어들은 하나하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지만 그 중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단어는 바로 ‘개저씨’ 였다.그것은 나의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나는 어느덧 30대 후반이 되었고, 곧 아이 아빠도 된다. 이제 형, 오빠 소리 들을 나이는 지났다는 이야기이다. 누군가 “아저씨!”하고 외치면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봐야 할 나이. 그 아저씨라는 호칭에 적응을 해야 하는 나이이기 때문에 아저씨와 연관된 단어가 더 인상깊게 남아있는 것이다.개저씨. 개와 아저씨의 합성어로 중장년층 남성 중 무례하고 꽉 막힌 이들을 속되게 칭하는 말이다. 사실 해묵은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수년 전부터 국민들 상호간에 온갖 혐오들이 난무하며 생겨난 혐오 표현 중 하나이다. 한동안 유행을 타다가 시들해진 말인데, 민희진 대표의 입을 통해 다시 화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무례하고 꽉 막힌 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하는데 그 대상을 반드시 남성만으로 한정시킬 의도가 없으며, 다소 거친 표현이기에 이 글에서는 기성세대를 지칭하는 오래된 은어인 ‘꼰대’정도로 바꾸어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꼰대란 무엇일까. 이와 같은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다. 몇 해 전,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처음 뵙는 자리에서였다. 처음 만나는 예비 사위와의 대화가 서먹할 것을 우려하신 장인어른께서는 나름 대화를 나눌 만 한 토픽을 하나 생각해 오셨다. “자네는 꼰대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나는 대답했다. “꼰대는 자신이 꼰대일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혹시 장인어른께서 ‘내가 꼰대는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면 그것은 이미 장인어른께서 꼰대가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장인어른께서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주셨다.꼰대는 이와 같이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사람이다. 이 두 가지 특성이 절묘하게 버무려져 권위의식이라는 결과물을 도출해내기도 한다. 자신이 젊은 세대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므로 젊은 세대에 대해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들이 바로 꼰대이다.꼰대들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이들 모두가 그때부터 꼰대였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꼰대는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꼰대의 기질은 사실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자기가 옳다는 아집이 있고, 때로 무례해지는 순간도 있다. 그렇지만 그 정도에 차이가 있고, 그것을 얼마나 잘 억누르고 사느냐의 차이도 있다. 젊어서는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꼰대 기질이 나이를 먹으며 자연스레 발현된다. 계기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결국은 ‘그래도 된다’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꼰대 기질 폭발의 시발점이 된다. 무조건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이야기를 쏟아냈는데, 그리고 무례한 행동을 했는데 내게 돌아오는 불이익이 없었던 경험들. 그것이 반복되며 ‘아, 나는 이래도 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이런 것들이 몸에 배며 한 사람의 꼰대가 탄생하는 것이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그렇다면 이걸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유전적으로 질병 인자를 갖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이른 나이부터 그 질병으로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앞으로 발현될 질병을 미리부터 검진을 통해 예방하려 노력하고, 또 누군가는 이 질병이 고개를 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미리 다스리며 질병이 생활을 지배하지 않도록 조치하곤 한다. 우리는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미리 스스로에게 ‘내가 혹시 꼰대는 아닐까?’ 하는 질문을 때때로 던져야 한다. 혹시 스스로의 언행을 돌이켜봤을 때, 권위적이었거나 무례했다는 것이 생각난다면 빠르게 사과하고 반성해야 한다.20대와 30대 시절에는 각기 그 시절에 가지게 되는 특성을 지니며 살아가게 된다. 사람들마다 편차는 있지만 대부분 그 특성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데 40대 이후로는 사람들의 성격이나 라이프스타일이 천차만별이 된다. 누군가는 여전히 20대 못지않게 ‘힙’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30대 못지않게 세련된 삶을 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또 누군가는 40대에 벌써 꼰대, 개저씨가 되기도 한다. 어떤 삶을 살지는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2024-05-27

좋은 어른에 대하여

스승의 날을 맞아 학생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애틋한 마음으로 함께 문학을 공부했던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문득 한 친구가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개인적인 상황 때문에 힘들었는데, 그때 내가 좋은 어른의 역할을 해주어서 고마웠다는 것이었다.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나는 오랫동안 좋은 어른을 만나기를 바라왔으나 그것이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보다 크고 본질적인 영역이었다. 연기처럼 피어나는 의문을 곱씹어보았다. 정말 나는 좋은 어른일까. 그러니까 좋은 어른이란 대체 무엇일까.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어른이다. 친구들은 각자 배우자를 찾았고 한 생명의 부모가 되었으며 자기 분야의 전문가로 거듭나는 중이다. 그러나 그건 삶의 모든 부분을 유려하게 운영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있고 내 안의 어떤 부분은 너무나 유치하고 저열해서 차마 글로 쓰지 못할 정도다. 학생들이 보았던 내 모습은 모두 꾸며낸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좋은 사람이라는 가면을 쓰고 어른의 언어를 흉내 내고 있던 것일 수도 있다.돌이켜보면 나는 꽤 요란스러운 사춘기를 보냈다. 내가 어디에 발을 디디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끊임없이 시스템에 의문을 품었다. 그런 내게 만족스러운 답을 건네주는 어른은 없었다. 부모님은 늘 바빴으며 선생님은 돌발적인 질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교실에 앉은 아이들은 모두 같은 자세로 앉아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러면 나는 비뚤어진 마음이 들어 교실을 박차고 나와 버리곤 했다. 교무실 한복판에서 벌을 받고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다. 주먹을 꾹 쥐고 생각했다. 학교를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가면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이십 대의 내가 들떠있던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당시의 나는 나를 옥죄고 있는 모든 형태의 억압에서 벗어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날이 밝도록 술을 마셨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을 흥청망청 썼다. 그런 행동이 즐겁기는커녕 우울하고 불쾌한 감정이 더 자주 찾아왔다. 둘러보면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술집에 둘러앉아 세상의 부조리함에 관해 한참 토로하다 보면 날이 밝았고 나는 패배한 장수처럼 어깨를 늘어뜨리고 집에 돌아와야 했다. 문학하는 선생님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문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날도 잦았다. 그 안에 삶의 거대한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너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어. 이곳으로 넘어오면 너도 답을 알게 될 거야.시간이 흐르며 나는 내가 제대로 질문하는 법조차 모르는 사람이었단 걸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 자신 있게 정답이라고 외쳤던 것이 그의 오만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고 억지로 움켜쥔다고 해서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이해하는 순간도 찾아왔다. 기성세대와 대화하면 경험할 수 있는 묘한 장벽 같은 것이 이런 식으로 생성되는 것일까. 정신 차려보니 나는 삶의 한복판에 놓여있었고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위치에 서 있었다. 교실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당차게 삶을 박차고 나오고 싶지만 고개를 젓고 자리에 앉게 된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이젠 내가 안다. 도망치는 게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너무 쉽게 타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요즘이다. 규칙적인 운동과 철저한 식단으로 건강을 관리하는 이들과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이들, 괴로운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위기를 기회로 만든 이들의 이야기를 클릭 한 번이면 무한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것들은 너무나 매끈하게 빚어져 있어서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들은 인생의 답을 찾은 듯하고 그를 토대로 젊은이들에게 ‘인생 조언’을 내놓기도 한다. 그토록 원하던 어른들의 이야기가 우르르 쏟아지는 데도 마음이 채워지기는커녕 헛헛하게만 느껴진다.시간은 아이를 어른으로 만든다. 모두가 어른이 되지만 모두가 좋은 어른이 되진 않는다. 어쩌면 좋은 어른이라는 건 허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좋은 어른은 꼭 필요하다. 정신적으로 기댈 곳이 없는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건 믿음이다. 믿음은 타인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어른으로 살아갈 것인지에 관해 상상하고 그것을 믿어야 한다. 거기서부터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2024-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