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적절히 화를 표출하기

분노는 거듭 분노를 낳을 뿐이다. /언스플래쉬 대중교통을 탈 때 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마주한다. 2시간 40분 거리의 열차 이동 내내 큰 소리로 통화를 주고 받는 사람, 휴대폰으로 시끄러운 음악을 크게 틀어 놓는 사람, 어린 아이가 복도를 뛰어다녀도 가만히 지켜보는 부모 등 어느 곳을 가도 온갖 소란 속에서 아주 많은 피로를 느끼고 있다.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피로를 감당해 내느라 필요 이상의 너무 많은 분노를 느끼고 있다.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쉽게 낳기 마련이라서, 결국 어딜 가도 너무 많은 화가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여기저기서 얻은 스트레스 꾸러미를 집으로 돌아와 하나씩 풀 때, 건강한 사람들은 취미를 통해 푼다지만 나는 아주 가끔 스트레스를 어떻게 표출해야 할지 몰라 난감할 때가 있다. 무작정 러닝머신에 올라가 걸어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 놓고 매운 음식을 먹으며 여유를 즐기려 하지만 스트레스 해소는 쉽지 않다. 결국 책상에 앉아 나는 무엇으로부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조금씩 생각하다보면 무언가 명확해지는 지점이 있고, 어떠한 상황에서 화가 발생했는지 알게 된다.상황을 인지해서 종이 위로 그때의 감정과 상황을 부려놓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스트레스는 조금씩 해소된다. 하지만 내가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이성적으로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하게 될 때에는 벽에 부딪힌 듯한 막막한 심정을 느낀다.때마침 ktx 열차에 앉아 수많은 소음에 둘러 쌓여 강현식, 최은혜 저자의 ‘그동안 나는 너무 많이 참아왔다’를 읽고 있다. 책은 오랜 기간 내제된 ‘화’로 인해, 마음이 병들고 아픈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집 바깥에서는 늘 친절한 사람이지만 유독 집에서만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 화를 내는 방법을 몰라 난처한 사람, 버림받는 두려움 때문에 자기 파괴를 일삼는 사람, 상대가 화를 내면 마음이 돌아서 모든 관계를 끊는 이들의 일화가 차례대로 나온다.이들의 공통점은 화를 너무 폭발적으로 내거나, 또는 화를 지나치게 억압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유년 시절부터 시작된 결핍이 있었고, 치료받을 기회나 상황을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없었기에 상처를 방치하며 자라와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유독 한국 사회에서는 개인이 가지는 불만이나 화를 표출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긴다. 무리의 분위기에 맞추기 위해, 또는 불편한 감정을 한 개인이 참고 넘어가면 모든 상황이 다 해결된다고 여기며 상황을 무마시킨다. 유년시절부터 분노는 늘 숨겨야만 하고 적절히 화를 표출하여 해소하는 방법에 대해선 학습하지 않기에 더 큰 분노가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되고 만다.화를 참고 억누를수록 분노 표출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고, 결국은 자기 자신을 해한다거나 타인에게 엉뚱한 방향으로 큰 분노를 표출하게 되어 상황을 계속해서 악화시킨다. 분노는 거듭 분노를 낳을 뿐이고 특히 타인에게 전염성이 높아 이성적으로 판단이 불가능한 분노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내가 지금 어떤 것에서 불편한 마음을 느끼는지 뚜렷하게 바라보며 상황을 인지해야 한다. 인지만으로도 화는 느닷없고, 마냥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임을 알게 되고 내가 지속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화가 났는지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책에서도 분노를 느낀다면 나의 의견을 전달한 후 해결책을 모색해야 함을 강조한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성적으로 이해해보며 무엇보다 나의 마음을 먼저 살피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책은 계속해서 말한다.오래된 상처를 꺼내어놓고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것은 아주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대개 트라우마 속에는 해소되지 못한 화가 감추어져 있고, 늘 화를 감추고 억누르며 살아왔기 때문에 화가 난 순간을 이성적으로 바라보기란 큰 어려움이 따른다.하지만 분노라는 실타래를 조금씩 풀게 되다보면 어느 순간 쉽게 풀리는 순간이 올 것이다. 화를 다스리기 위해 상담과 치료를 진행하던 이들이 점차 화를 적절히 표현하게 되는 부분을 읽다보면 나 또한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느꼈던 분노가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나뿐만 아닌 타인에게도 조금 더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

2023-08-01

자격을 결정할 자격

한 초등학교의 담임교사가 교내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벌어졌다. 참담한 일이다. 그녀는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딘 새내기 교사였다. 학부모의 전화를 수십 통 받았으며 환청이 들릴 정도로 힘겨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교사들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이 비통함을 표하고 있다. 나 역시도 얼마 전까지 교원으로 근무했었다. 교무실과 학부모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모습과 어떻게든 잘해보겠다고 애썼으나 상실로만 남은 일련의 사건이 떠올랐다. 지금도 비슷한 고통에서 허우적대는 이들이 있음을 알기에 마음이 더욱 어렵다.학교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공간이다. 인간은 자라면서 필연적으로 이곳을 거치게 된다. 집과 부모라는 안온한 세계를 떠나 낯선 세계로 들어와 타인을 만나고 관계 맺는 방식을 배운다. 세상은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내키지 않더라도 규율과 법칙에 따를 필요도 있다. 학교에 간다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의 문을 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다시 단단해지면서 한 생명은 자란다. 그렇기에 학교는 마냥 편안한 공간이 될 수 없다.나의 학창 시절도 그랬다. 학교가 흡사 감옥처럼 여겨질 때도 있었다. 교내에서의 차별과 냉대, 강압과 폭력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선생은 손목에 찬 시계를 벗으면서 학생을 향해 무차별적인 구타를 한다. 소설이나 드라마에도 학생을 향해 거리낌 없이 상처 주는 말을 내뱉는 선생이 자주 등장한다. 서사적 비약이 아니다. 그런 야만적인 시대가 우리에게 분명히 있었다. 교사로 일하게 되면서 아이들이 생각보다 훨씬 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눈이 바로 서 있지 못하고 위험한 미끼를 덥석 물어버리기도 했다. 폭력에 노출되어도 그것이 폭력인 줄 모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무조건 보호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미진함과 어리숙함으로 종종 실패로 끝나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잠이 오지 않고 괴로움에 몸서리쳤다. 출근 시간은 어김없이 돌아오고 나는 다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선생의 자리에 앉았다. 어떤 부분이 무뎌지는 기분이 들었고 진정성이라는 피상적인 단어가 무력하게 다가오기도 했다.감사한 점은 내게 사랑과 응원을 주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폭언에 가까운 전화나 문자를 받은 적도 있었는데, 그러면 마음이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행간에서 나를 상처 주고 싶다는 명백한 의지가 읽혔다. “당신은 선생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간신히 붙잡고 있던 실 하나가 툭 끊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세상을 떠난 그녀 역시 그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자격이 없다’는 말은 상대를 모멸감에 빠지게 만들기에 아주 쉬운 문장이다. 악의적인 인간에게 내뱉기도 하지만 예기치 못한 실수나 부딪침에 있는 사람에게도 자각 없이 쓰인다. 누군가의 자격을 결정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다. 원인이 어떠하든 그것은 분명히 상대의 마음을 훼손시키는 언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타인을 향한 적의는 어디서부터 오는가. 한 사람을 절대적 악인으로 상정하고 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교사가, 관리자가, 학부모가, 어떤 사람들은 학생이 나쁘다고 말한다. 태어난 것 자체가 죄라고 한다. 개인에 고통이나 슬픔에 집중하기보단 누군가에게 책임을 덮어씌운 뒤에 무자비하게 돌을 던진다. 세상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뿌리 깊은 냉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런 식의 책임 전가는 더 이상 해선 안 된다.육체만큼 다치기 쉬운 것이 영혼이다. 종이에 손이 베이는 것도 쓰라린데 보이지 않는 화살이 가슴에 박히면 회복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 일하면서 매일 같이 느꼈다. 구시대적인 통제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사회에서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살펴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존재가 한 교실에 모였다. 갈등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덧씌워선 안 된다. 모두에게 책임이 있고 모두가 그만큼 노력해야 한다.비와 무더위가 반복되는 한여름의 가운데 서서 다짐한다. 단 한 사람의 마음을 다른 무엇보다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마음처럼 상하기 쉬운 것은 없으니까. 마음 다해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학교 구성원을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는 물론이고 교육 현장에서의 지속적 성찰과 개선을 통해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2023-07-25

인터스텔라, 더스트 볼, 분노의 포도…

영화 ‘인터스텔라’의 기억에 남는 한 장면. 아이들이 야구를 하는 운동장 너머로 거대한 모래 폭풍이 다가온다. 사람들은 모래 폭풍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황급히 집으로 대피한다. 이윽고 모래 폭풍은 마을과 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사람들은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어 옥수수 밭을 바라본다.SF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한 장면에 불과해보이지만, 사실 이 장면은 20세기 미국에서 벌어진 끔찍한 대재앙을 재현한 것이다. 1930년대 초 미국의 중부 곡창지대를 덮쳤던 더스트 볼(Dust Bowl)이 그것이다. 미국 중부의 대규모 곡창지대인 콜로라도, 캔자스, 오클라호마, 뉴텍사스를 덮친 모래폭풍은 하늘을 가릴 만큼 거대했고, 마차·자동차 따위에서부터 창고·집·우물·전신주와 같은 시설물마저 날려버릴 만큼 강력했다.더스트 볼은 직접적으로 휘말린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20만 명이 넘는 이재민 또한 발생시켰다. 모래폭풍은 1937년, 미국 중부에 많은 비가 내릴 때까지 계속 근방을 떠돌며 토지를 더욱 황폐화시켜갔다. 경작도 생활도 불가능하게 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땅을 포기하고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대도시로 이주하였지만, 극단적인 가난과 주거의 불안정, ‘오키(Oki)’(뜨내기)라는 멸칭을 안은 채 살아가야만 했다.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는 바로 이 시기, 오클라호마를 비롯한 미국 중부의 서민과 노동자들이 겪은 극단적인 가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더스트 볼로 인해 황폐화된 고향을 버리고 대도시로 이주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이주할 돈이라도 마련하기 위해 자신들의 땅을 헐값에 팔아야만 하는 사람들. 그렇게 도착한 서부에서조차, 그들은 가난한 이방인이라는 멸시와 홀대에 직면한다. 모든 것을 잃고 설움에 가득 찬 그들의 모습을 존 스타인벡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굶주린 사람들의 눈 속에 점점 커져가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간다.”놀란 감독이 이와 같은 더스트 볼의 모습과 그 후의 폐허를 영화 속에 차용했을 때, 영화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현실 속 더스트 볼도, 영화 속 모래폭풍도 모두 인간에 의해 빚어진 대재앙이라는 것. 사실 1930년대 초 미국 중부에 닥친 심각한 가뭄이 더스트 볼의 직접적인 방아쇠이기는 하지만, 방아쇠는 결코 총알 없이 발사되지 않는다.식량 증산을 위해 수십 년간 계속된 난개발은 숲과 습지를 비롯한 생태 환경을 심각하게 훼손시켰으며, 미숙한 건조농법의 영향으로 경작지 또한 빠르게 황폐화되었다. 대략 20년간의 난개발과 무리한 경작이 미국 중부를 쑥대밭으로 만든 더스트 볼의 원인 가운데 하나였던 셈이다. 인간에 의해 자행된 자연 파괴가 인간에게 되돌아오는 데에는 채 반 세기도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그러한 인과를 눈치챈 것은, 이미 그것이 우리에게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게 되었을 때였다.이처럼 우리는 거듭 자연 파괴로 인한 재난을 겪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무구한 표정으로 파괴되어가는 자연을 바라보고 있다. 얼마 전 한 컨퍼런스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기후변화는 지구 단위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를 비롯한 일부 생물종에게만 치명적인 문제일 수 있다는 것. 기후 변화로 인해 상당수의 생물이 멸종하게 되겠지만, 지구에서의 생명활동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며 살아남은 생물들이 다시 번성하여 지구는 다시금 푸른 별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이야기였다.그럼에도 우리는 거듭 기후 변화를 ‘우리’의 일이 아닌 다른 희귀동물의 멸종 따위의 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이 모든 일이 나의 세대 이후에 발생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실 우린 이미 기후 변화로 인한 환란의 시대 속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올 여름에도 끔찍한 수준의 비가 내리고 있다. 기후학회에서는 ‘장마’라는 개념 대신 ‘우기’라는 개념으로 한국의 여름 기후를 바라봐야 한다는 논의가 한창이다. 올 해에도 예상된 호우에도 불구하고 인재가 겹쳐 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생각보다 더 먼 미래까지 내다보며 살고 있지만, 보이는 것을 애써 흐린 눈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2023-07-25

드라마 같은 노래

요즘 대중가요 노랫말은 비문학적 말장난 투성이다. /언스플래쉬 “몰랐었어, 나를 용서해. 요즘 네가 술에 기대어 말 못하고 아파했던 이유가 나인 줄은 몰랐어. 한동안 넌 사랑을 하고 이별한 걸 알았기에 너를 떠난 그 사람이 그리운 그 탓인 줄 알았어. (…) 날 사랑한다고 지금까지 왜 말 못 했어. 나 얼마나 그 말을 기다려왔는데. 그래 늦지 않았어. 미안하단 말은 하지 마. 이제 시작해. 우리 사랑을 위해.”며칠 전 운전하며 집에 가는데 라디오에서 녹색지대의 옛 노래 ‘그래 늦지 않았어’가 흘러 나왔다.비도 자분자분 내리고, 비에 젖은 네온사인 불빛들이 알록달록 글썽거리는 밤의 낭만에 취해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노래를 목청껏 따라 불렀다. 그러다 문득 ‘요즘은 왜 이런 노래 가사가 없지?’하는 생각이 들었다.상호 호감이 있던 남녀가 바보 같이 서로의 마음을 모른 채 친구처럼 지내다가, 뒤늦게 사랑인 걸 알고 “그래 늦지 않았어” 외치는 노래다. 4분짜리 짧은 노래를 들었는데 16부작 미니시리즈 드라마 한 편을 본 것 같다. 가사 한 마디마다 서사가 있고 장면이 있다.“술에 취한 네 목소리, 문득 생각났다던 그 말. 슬픈 예감 가누면서 네게로 달려갔던 날 그 밤. 희미한 두 눈으로 날 반기며 넌 말했지. 헤어진 그를 위해선 남아있는 네 삶도 버릴 수 있다고. 며칠 사이 야윈 널 달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지막까지도 하지 못한 말 혼자서 되뇌었었지. 사랑한다는 마음으로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있어. 나를 봐, 이렇게 곁에 있어도 널 갖지 못하잖아.”이 노래는 또 어떤가? 한국 대중가요 불후의 명곡이라고 생각하는 뱅크의 ‘가질 수 없는 너’다. 추운 겨울밤, 짝사랑의 대상인 ‘너’가 술에 취해 전화를 건다. 생각났다고, 보고 싶다고. 쿵쾅거리는 가슴 안고, 허연 입김을 뿜으며 술집으로 달려가 마주 앉았더니 그녀는 개차반인 전 남친 얘기만 한다. 우는 모습을 보자니 가슴이 찢어진다. 한 편의 멜로 영화다.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핸드폰을 가졌는데, 그때 대리점에서 뒷 번호 네 자리를 의미 있는 숫자로 하라고 해서, 자주 가서 부르던 우리 동네 만남노래방 금영코러스 ‘가질 수 없는 너’ 3668로 한 게 아직까지 내 전화번호다.“사랑한다는 마음으로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있어” 어릴 때부터 이 노래를 좋아했는데, 마흔이 되도록 이 노래대로 살줄은 몰랐다.“머리를 쓸어 올리는 너의 모습. 시간은 조금씩 우리를 갈라놓는데 어디서부턴지 무엇 때문인지 작은 너의 손을 잡기도 난 두려워. 어차피 헤어짐을 아는 나에겐 우리의 만남이 짧아도 미련은 없네.(…) 멈추고 싶던 순간들 행복한 기억,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던 너를 이젠 나의 눈물과 바꿔야 하나. 숨겨온 너의 진심을 알게 됐으니.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날 보는 너의 그 마음을 이젠 떠나리. 내 자신보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널 아끼던 내가 미워지네.”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 사이’다. ‘남녀 사이에 친구는 있다 혹은 없다’는 영원한 화두를 우리에게 늘 던져주는 노래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친구 사이지만 미묘한 긴장 관계에 있는 두 남녀가 사랑이 깊어져 연인이 되면, 언젠가 이별의 순간 친구로마저 지낼 수 없게 될 것을 두려워한다는 내용이다. 2절에 “연인도 아닌 그렇게 친구도 아닌 어색한 사이가 싫어져 나는 떠나리”를 따라 부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단 몇 줄의 노래 가사인데도 가사에 없는 수많은 장면들, 벚꽃부터 첫눈까지 두 사람이 나눴을 우정 또는 사랑의 추억들, 서로를 바라보는 애틋한 표정이 그려진다.프랑스 철학자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서사가 사라지고 파편적인 작은 이야기들만 남는다고 말했다.장편소설이 점점 자취를 감추는 문학의 풍조도 시대적 현상이다. 현대사회는 찰나의 감각적 도취, 말초적 자극, 일회성 흥미로만 가득하다.그래도 90년대까지는 노랫말도 문학이었는데, 요즘 대중가요 노랫말을 보면 뜻을 알 수 없는 의성어, 조어, 외국어, 심지어 욕설까지 온갖 비문학적 말장난 투성이다. 내용을 정서적으로 ‘전달’하는 것보다 비트와 멜로디를 직관적으로 ‘투척’한다.아아, 영화 같은, 드라마 같은 노래 어디 없을까? 노래의 주인공이 되어, 애절한 발라드풍의 연애 한 번 해보고 싶다.

2023-07-18

우울 유리병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고 고된 일상이라면 우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처음 누군가에게 우울감에 대해 토로했을 때 그는 나에게 마음이 약해지지 않기 위해선 그 누구보다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만원 버스를 타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장에 가서 그들이 일구어내는 땀과 피로 가득한 삶의 현장을 똑똑히 지켜보라고, 우울은 인생을 안일하게 대할 때 따라오는 것이고 그러니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당부를 또박또박 힘주어 내게 말했다.그 긴 이야기를 듣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잘 이해했다는 제스처를 취했으나 결국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인생의 중대한 비법을 털어 놓는 것처럼 은근히 상기되어 있는 타인의 기분을 맞춰 주느라 필요 이상으로 눈을 반짝이는 척 했던 나의 모습에 작은 분노가 일렁였다. 더는 누군가에게 이런 피곤한 질문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주먹에 힘이 실렸지만 모든 게 피로해졌고, 결국 다시 우울이라는 이불을 덮고 무력감에 빠졌다.흔히 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깊은 슬픔에 빠져 온종일 눈물을 흘린다거나, 바깥세상과의 단절을 자처하거나, 엉망인 꼴을 하며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울증은 그렇지 않다. 온 힘을 다해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도,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도, 사랑하는 이들이 곁에 있어도, 인생에 정말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있어도 우울은 자연스레 따라 붙는다. 태어날 때부터 지어 입은 오래되고 낡은 옷처럼 늘 아주 가까이 붙어 있다.그러니 별 수 있는가. 어쩔 수 없이 나는 이 옷을 입고 우울과 친하게 지내려 애쓰며 살아간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선 고생했다며 나를 씻기고, 밥을 만들어 먹고, 흥미로움을 느끼기 위해 무언가를 보거나 읽는다. 새로운 취미를 생기는 것에 대한 열망이 가득해서 보석십자수도 하고 뜨개질도 배운다.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업무 능력을 향상시키는 강의를 듣거나, 새로운 사람들과의 대화에도 끼어 본다. 어느 하루는 이 정도면 괜찮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또 다른 하루는 이 모든 애씀이 발버둥처럼 느껴질 만큼 우습고 지루해진다.우울이 없는 정상적인 삶의 압박에 시달리며 괴로워하지만, 그 괴로움 속에서 삶은 결코 단순하고 명쾌히 굴러가지 않는 다는 걸 안다. 어떤 삶이든 인생은 평범한 즐거움만을 느끼며 살 수는 없고, 이성적인 계산과 행동, 의지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인생의 굴곡은 누구나 있기 마련이라고. 그러니 우울로 지은 옷을 입는 나를 이제는 필요 이상으로 가엽게 여기지 않고, 이해 받지 못한다고 타인에게 분노를 느끼지도 않는다.최근엔 우울과 친해질 수 있을까 싶어 자괴감에 빠질 때마다 눈에 보이는 종이에 우울의 이유를 적어 유리병에 담아두고 있다. 유리병은 불투명한 유리 재질로 속이 훤히 보이지 않고, 꽤나 두께가 두터워서 묵직한 편이다. 뚜껑은 단순히 덮여 있는 게 아니라 다소 열기 힘든 까다로운 구조로 되어 있어 여닫기가 불편하다. 때문에 반쯤 열어 책상 위, 잘 보이는 곳에 뒀다. 그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든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요즘은 그래서 기분에 대해 많이 기록하고 있다. 지금 어떠한 종류의 우울을 느끼고 있는 지에 대해 골똘해지고, 종이에 쓰는 순간 우울을 더욱 자세히 파악하게 된다. 종이를 반으로 접어 유리병에 넣을 때엔 무겁고 눅눅했던 기분이 조금 덜어지곤 한다.어느 날은 유리병 속 쌓여 있는 우울을 꺼내어 본다. 종이를 열어볼 때마다 들쭉날쭉 쓰인 지난 우울이 드러나고 그것을 다 읽고 나면 생각보다 힘없는 우울의 모습에 깜짝 놀란다. 우울의 색은 어느샌가 옅어져 있고 날것으로 퍼덕이던 힘은 시들해진 채 홀쭉히 놓여 있다. 그것이 퍽 안심이 된다.기분이 조금 정리가 된다면 그제야 몸을 움직여 운동을 한다. 힘을 반복되게 실어 울적함을 밀어 넣고, 운동이 끝나면 얼음 띄운 물을 마시며 성취감을 온 감각으로 느낀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인스타그램, 유튜브, 넷플릭스를 거치는 콘텐츠 유목민 생활을 하다 잠이 든다.새로운 아침. 우울은 정해진 크기나 깊이가 없어 언제, 어떻게, 얼만큼 앓을지 쉽게 가늠할 수 없지만 그래서 삶을 더욱 겸허히 살아가게 되고, 나는 얼마만큼 작으면서 또 얼마나 거대한 사람인지를 자꾸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2023-07-18

우리는 왜?

우리 집의 구성원은 단출하다. 나, 동생 그리고 강아지 보리. 우리 셋은 서로를 의지하며 아웅다웅 살아가는 중이다. 나는 집안에 큰 어른답게 대소사, 이를테면 생활비 정산이나 집의 관리 및 수리, 청소, 요리, 빨래 그리고 보리의 산책을 맡아서 한다. 동생은 그런 나를 도와주는 역할이다. 내 눈치를 보면서 이리저리 사부작대는데 하나같이 내 성엔 차지 않는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나의 감정적인 부분을 잘 보듬어 주고 늘 최고의 조언을 내어놓는다.우리는 일곱 살 터울이 있는 자매다. 외형이나 성격적인 면에서도 완전히 다르다. 동시에 서로만 아는 약한 부분이나 공유하고 있는 많은 면면이 있다. 우리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교육자인 부모님을 두었으며 스무 살에 집을 떠나 자취를 시작했다. 나는 소설을 쓰고 동생은 그림을 그린다. 최근 동생은 전시회 준비에 여념이 없다. 매일 같이 집을 나서서 밤늦게 돌아오고 작업실에서 밤을 새우는 날도 부지기수다. 커다란 캔버스를 앞에 두고 붓을 잡는 동생을 상상해 본다. 백지 위로 깜박이는 커서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나의 마음과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동생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 하루가 훌쩍 지나가곤 한다. 최근 우리의 화두는 예술로의 진입을 알리는 인공지능의 발전에 관한 것이다. 인공지능의 작품이 공모전에서 상을 탔다든가 책을 출간하고 전시회를 연다는 소식을 들으면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결론이 난다. 인공지능은 인공지능, 인간은 인간이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발끈 소리친다. 이러다 이 집에서 고유의 정체성을 가진 생명은 강아지밖에 남지 않을 거야! 죽지도 아프지도 않는 애완 로봇이 인기를 끌 것이라는 기사는 보리의 귀여움마저 무색하게 만들었지만.인공지능이 두렵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여럿 있다. 그중 하나는 로봇은 삶의 고난에서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경제적 곤궁에서 허덕이거나 세상에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는 자괴감, 상대와의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이나 하는 것 없이 나이만 먹고 있다는 조바심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인간은 저마다의 속박에 사로잡혀 필연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현실의 문턱에 좌절하며 주저앉기는커녕 계속해서 꾸준히 엄청난 양의 작품을 생산해 내는 로봇이 어쩐지 까마득하게 보이는 것이다.처음 사진기가 발명되었을 때도 그랬다. 사진기의 발명과 더불어 회화는 본격적인 문제에 봉착했다. 그간 화가들이 그렸던 전원풍경이나 정물 사진을 짧은 시간 내에 또렷하게 찍어낸 사진은 그림보다 훨씬 정교했으며 실용적이었다. ‘이 순간부터 회화의 역사는 막을 내릴 것이다’고 주장하는 화가들도 있었다.그러나 사진의 등장은 이전보다 더욱 다양한 회화의 발전을 가지고 왔다. 그중에서도 신조형주의의 화가 몬드리안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이미지로 시각적 충격을 주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우주의 진리와 근원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때와 장소에 따라 변하는 사물의 겉모습을 떠나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했던 예술가들로 인해 회화의 또 다른 가능성이 탄생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럼에도 의문이 든다.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예술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을까? 가끔은 동생과 내가 가로등을 향해 돌진하는 나방처럼 느껴진다. 빛나는 것에 매료되어 날개가 타는 것도 모르는 존재. 그건 예술에 투신하겠다는 숭고함과는 거리가 멀다. 어떤 면에서 순진무구한 천진함에 가깝다.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향해 나아간다. 인공지능이 셰익스피어보다 훌륭한 작품을 써내든, 피카소보다 더욱 센세이셔널한 작품을 만들어 내든, 그런 것은 우리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몬드리안은 말했다. “나 역시 꽃의 겉모습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하지만 더 깊은 아름다움은 바로 그 안에 있다.” 나와 동생은 ‘더 깊은 아름다움’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그러한 해맑음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오늘도 책상 앞에 앉는다.새근새근 자는 동생과 강아지를 보면서 나는 그런 것들에 관해 생각한다. 올해 월세 계약이 끝나면 어디로 이사해야 할지, 집필 중인 소설이 완성되기 전까지 모아둔 돈으로 버틸 수 있을지.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지. 괜찮다. 어떤 미래가 찾아오더라도 서로가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지금처럼 손을 잡고 그 시간을 통과해서 가면 되는 것이니.

2023-07-11

‘집’이 ‘집’일 수 없는 시대

한국에서 집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가정’이 존재하는 공간이자 육체적·심적 휴식의 공간으로서 바깥에서의 일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는 Home의 의미. 다른 하나는 물리적 공간이자 물질적 가치를 지닌 대상으로서 거주지 외의 용도 및 가치를 지닌 공간으로서 House의 의미다. 한국어에서 ‘집’은 일상적으로 두 가지의 의미를 맥락에 따라 구분할 뿐, 별도의 구별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보니 우리의 일상에서 ‘집’이란 ‘집’이면서, ‘집’이 아닌 경우들이 왕왕 발생하곤 한다.예컨대 유아·청소년기의 한국인에게 ‘집’이 갖는 의미와 청장년기의 한국인에게 ‘집’이 갖는 의미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아·청소년기의 한국인은 실질적인 구매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 가까울 확률이 높으므로 ‘집’이란 가정을 위한 공간으로서 Home의 의미가 클 것이고, 청장년기의 한국인에게 ‘집’이 갖는 의미는 실질적 구매의 대상이자 투자의 대상으로서의 House의 의미가 혼재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평론가 이소는 이와 같은 ‘집’의 두 가지 용례를 바탕으로 한국 소설의 경향에 대한 글을 썼다. 여기에서 이소는 한국소설에서 나타나는 ‘집’의 의미를 몇 가지 범주로 분류하는데, 이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House’는 있지만 ‘Home’은 없는 상태’라는 분류다.얼마 전 학생들과 ‘집’이라는 단어를 써서 한 문단짜리 글을 쓰는 수업을 했다. 본래 목적은 짧은 문장 여러 개로 하나의 문단을 완성하고, 그 문단을 활용해 개요를 짜는 방법을 연습해보는 것이었다. 집이란 무엇인지 간단한 비유를 써서 정의를 내리고, 그와 같은 정의를 내린 까닭에 대해 3문장 정도를 서술하는 것. 내가 놀랐던 건 아이들의 정의가 대개 유사했다는 것이다. ‘집은 잠자는 곳이다’라는 정의. 비유라고 할 수 없는, 단지 기능만을 나타내고 있을 뿐인 메마르고 삭막한 정의. 그게 내 수업을 듣는 20대들이 ‘집’이라는 단어에 대해 내린 정의였다.사실 자취를 하거나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등 가정을 떠나 생활하는 학생들에게 ‘집’이란 생각만큼 편한 공간이 아니다. 나와는 다른 환경에서 성장해 온 동거인과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는 건 ‘적과의 동침’이라는 말이 떠오를 만큼 생각보다 불편한 일이다. 거실이나 화장실, 부엌 등을 공유하는 형태의 쉐어 하우스는 그나마 서로 각자의 방을 가질 수 있기에 나은 편이지만, 휴식이나 생활을 위한 공간에 남겨진 타인의 흔적은 때때로 불쾌의 경험을 선사하곤 한다. 화장실이 분리된 원룸형 형태의 고시원이라면 그나마 사정이 낫다 할 수 있겠지만, 가벽에 벽지를 발랐을 뿐인 불법 개조 형태가 대부분인 탓에 타인의 소리와 냄새는 매순간 ‘나’의 공간을 침범한다.더욱 심난해지는 건 그와 같은 공간들이 단지 대학가 혹은 직장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부조리한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평 남짓한 공간에 40만원 가까운 월세를 내야 하거나, 4평 남짓한 원룸에 60만원이 넘는 월세를 요구하기도 한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마저도 학기 중에는 학생들이 많아 구할 수 없을 지경이다. 비단 이와 같은 사례가 대학가뿐일까. 쪽방촌으로 눈을 돌리면 사태는 더욱 심각하다. 화장실을 비롯한 공용공간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거나 난방이나 수도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1평 남짓한 쪽방에, 임대업자들은 30만원 가까운 월세를 요구한다.그럼에도 이들은 이 부조리한 폭리 앞에서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다. 목돈을 구할 수 없고 학교나 직장 가까이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임대업자의 폭리 앞에서 철저하게 ‘을’일 수밖에 없다. 단지 이것을 평생의 집이 아닌, 충분한 돈을 모을 때까지 거쳐 가는 ‘주거경로’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뿐. 쪽방에 거주하는 주거 빈곤층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목돈을 구할 수 없고, 당장에 수십만 원의 돈을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빈곤 계층의 사람들에게, 월 30만원의 쪽방이란 노숙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한국 사회는 이들에게 청년이라는 이유로, 직장인이라는 이유로, 빈곤계층이라는 이유로 주거에 있어 부조리한 폭리를 방조하고 강요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와 같은 주거 빈곤 계층은 주거비용을 줄이기 위해 잠만 잘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공간을 찾아 헤맨다. ‘집’이 ‘집’일 수 없는 시대, 각각의 이유로 주거를 위한 부조리한 비용을 지불하며 인내할 수밖에 없는 시대.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일들조차도 자본주의라는 미명하에 용납돼야 할까.

2023-07-11

챗GPT, 너 미쳤어?

챗GPT에 대한 기사와 칼럼들이 이미 수없이 쏟아져 나왔는데, 좀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글을 보태보려 한다. 지난주에 강의하는 대학 두 곳의 성적 입력을 마쳤다. 400여 편의 중간, 기말고사 과제 리포트를 읽어보면서 챗GPT가 학생들의 글쓰기에도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걸 알았다.개강 첫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글쓰기 윤리를 강조할 때 표절, 중복제출, 사적 정보 무단인용 등을 경계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챗GPT도 언급했는데, 인공지능이 써주는 글을 그대로 가져올 경우엔 F학점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하지만 어느 정도 참고하거나 지식을 수집하는 데 활용하는 건 괜찮다고 했다. 챗GPT가 가진 백과사전의 기능만큼은 긍정했기 때문이다.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근대’에서 21세기의 영원성 개념은 과거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20세기 근대의 영원이 공간을 오랫동안 점유하는 ‘지속성’이었던 데 비해 오늘날 영원의 개념은 짧은 순간에 많은 정보를 처리하는 ‘찰나성’이다. 학생들에게 바우만의 주장을 예시로 들어 챗GPT 같은 인공지능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가벼움, 유동성, 속도가 지배하는 ‘액체 현대’에서 도태될 것이라는 경고도 했다.학생들의 과제를 읽어보았다. 대부분 학생들이 자기 힘으로 작문을 했지만, 챗GPT의 힘을 빌린 경우도 더러 눈에 띄었다. ‘GPT체’는 확연히 구분된다. GPT가 써준 걸 자기 문체로 바꾼 경우에도 티가 나는데, 그대로 긁어온 건 너무 심했다. D와 F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자비를 베풀었다. 채점을 하면서 생각 두 개가 떠올랐다. 먼저 인공지능 시대에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기술보다 사람의 마음을 더 신뢰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좋았다. 다음은 좀 웃긴데, ‘챗GPT 이 녀석 순 엉터리에 거짓말쟁이군’ 하는 거였다.학생들이 챗GPT를 참고해 쓴 것으로 보이는 문장들에는 사실관계에 대한 오류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주로 작가의 생몰년이나 활동시기, 작품명 등이다. 그래서 직접 챗GPT에 “백석 시인에 대해 알려줘”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백석(白石)은 대한민국의 현대 시인으로, 김수영(金壽永)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1920년에 경상북도 칠곡에서 태어났으며, 1937년에 동국대학교 문과를 졸업한 후 작문학과를 전공하였습니다. 백석은 한국 전통 시문화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시는 자연과 인간, 사랑, 삶의 고뇌 등을 다루는 내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시는 자연과 조화로운 미적 표현과 진솔한 감정 표현으로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으며, 많은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눈물’, ‘벗’, ‘소나기’, ‘고향의 봄’, ‘해바라기’, ‘밤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이 있습니다. 그의 시는 단순하고 은유적인 언어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며, 대중적인 시인으로서 폭넓은 인기를 얻었습니다.”이걸 읽고 나서 “챗GPT, 너 미쳤어?”라고 외쳤다. 백석이 누군가? 한국 현대시 100년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럼에도 본명, 생년, 학력, 출생지, 작품명까지 전부 다 틀리게 말했다. 게다가 김수영, 황순원, 이원수, 조세희 등 다른 문인들에 관한 피상적이고 파편적인 정보들을 조잡하게 취합해 늘어놓기까지 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나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리라는 두려움은 내려놔도 되겠다고 안심했다. 그런데 그 안심은 이내 불안으로 바뀌었다. 챗GPT의 구동원리는 온라인 빅데이터를 수집하고 학습하는 데 있다. 즉 인간이 이미 만들어놓은 정보들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챗GPT는 디지털 기술이 어디까지 발전됐는지 우리에게 보여주는 한편, 온라인에 부정확한 정보들, 왜곡된 내용들, 입증되지 않은 가설 등이 얼마나 많은지도 함께 말해준다.결국 인공지능은 인간의 오류를 학습한다. 그렇잖아도 가짜 뉴스와 날조, 선동이 판치는 세상이다. 챗GPT는 온라인에 떠돌아다니는 온갖 거짓들을 근사한 사실로 포장하고, 첨단 기술을 강력히 신뢰하는 현대인들은 챗GPT가 제공한 정보들을 의심 없이 믿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인류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핵전쟁이 아니라 온통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인지도 모른다.

2023-07-04

어른의 모양

새콤달콤을 맛별로 많이 사서 하나씩 까먹을 때나, 커다란 토마토를 2~3개씩 잘라 설탕을 잔뜩 뿌려 먹을 때 나는 입버릇처럼 이건 어른의 특권이라 말하곤 한다. 어릴 때 부모님에게 혼날까 싶어 쉽게 할 수 없었던 아주 사소한 몇 가지의 행동이 있는데, 예를 들자면 카레에 고기만 쏙쏙 빼먹는다거나 밥 대신 빵이나 과자로 대체하는 것 등, 작은 일탈을 벌이고 나서 이건 어른의 특권이라며 우스갯소리로 웃어 보이는 것이다.최근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며 정말 다양한 인간상이 있고, 인간이 타인을 이해하는 데에는 정말 많은 노력과 관심이 필요한 것임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매너를 갖추고 있으나 가끔 무례한 사람들 사이에서 불쾌한 일을 겪을 때,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또 성숙한 어른이란 과연 어떤 자세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보게 된다.내가 생각하는 어른은 작은 일에 마음 쓰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수용의 자세와 넉넉한 마음의 크기를 지닌 자다. 작은 것 하나에도 손해 보기 싫어하거나, 아주 사소한 말싸움이어도 절대 지기 싫어 부정적인 언어를 더 보태는 습관은 스스로 좁아지는 마음을 택하는 것이다.만약 무례를 범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해서 그들과 똑같이 무분별하게 타인을 비방하기 보단, 그들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고 옳은 방향으로 설득시키는 우아한 매너를 갖추는 사람이 근사한 어른이 생각한다.두 번 째는 이해할 수 없는 요소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스스로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헤아리는 자다. 만약 어린 날의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삶에 근거한 경험과 통계로 함부로 타인의 삶을 조언하고 참견하지 않아야 한다. 네 나이 땐 다 그래 라는 말로 상대의 힘듦을 함부로 속단하여 무책임하게 무마하려 하지 않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포용하여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사람이 충분히 멋진 어른이라 생각한다.세상은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 모두 다른 삶 속에서 불명확하고 불안정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살아가는 내내 마음가짐은 서툴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좋은 어른이 되기란 쉽지 않기에 정확히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 그러한 태도를 지니기 위해선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태도를 갖추는 데에도 많은 시간과 공을 필요로 한다.요즘 나는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 고민될 때마다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쓰기는 머릿속에서만 떠다니던 수많은 말들이 정리되고 정제되어 불필요한 말을 충분히 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방안이나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기 때문에 침착하게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여태 단 하나의 진실된 문장을 표현하는 것이 글쓰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글쓰기의 본질은 하고 싶은 말이 아닌,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덜고 덜어내어 맨 마지막에 남는 문장을 써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그간 생선을 먹기 위해 젓가락으로 생선살을 발라낼 생각만 했으나, 정작 생선살을 모두 바르고 나서 가시만 남은 상태가 진짜 쓰고 싶었던 글의 이야기였다고 해야 할까. 단단하고 날카롭게 존재를 번뜩이고 있는 가시가 글이 될 것이고, 글을 쓰는 내내 조금 더 타인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조심스레 믿어보는 것이다.최근 이사를 앞두고 있다. 4년간 살던 집에서 떠나 새로운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곳에서의 살림이 미처 정리되지 못했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새로운 방에서의 삶을 그려 본다. 하루 전 멈춘 시계의 건전지를 갈아 새로운 벽에 걸 테고 7월로 넘긴 달력도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둘 것이다.그리고선 흰 책상에 앉아 두툼한 생선살이 아닌 뾰족하게 자리한 생선의 가시를 오래토록 볼 것이다. 7월엔 더 나은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작고 하얀 방을 명쾌해진 기분으로 그려본다.

2023-07-04

말살할 것인가, 공생할 것인가

애니메이션 ‘트라이건’을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자신을 정복자라고 자신하는 어리석은 인류는 멸망하는 게 나아” 섬뜩하게 느껴질 수 있는 말이지만, 찬찬히 생각하면 어쩐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지구의 많은 것은 인간과 대립하고, 나아가는 발자국마다 세상을 망치고 있다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인류는 끊임없이 발전되어 왔다. 거기에는 생존을 향한 특유의 집념과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더 아름다운 것. 손에 넣고 싶은 것이 많을수록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파괴하는 수밖에 없다. 울창한 나무 대신 빽빽한 아파트가, 숲에 서식하는 동물 대신 명품 가방이. 여행을 위해 올라탄 비행기에선 어마어마한 양의 탄소가 배출되고 멋들어진 기념일 식사 한 끼에 과도한 양의 쓰레기가 생성된다.불과 몇 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연을 정복하겠다던 투지를 불태우던 인간은 이제 인간을 넘어선 인간을 만들겠다는 포부까지 내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지구의 다른 생명체들은 이토록 이기적인 인간과 공생하고 싶어 할까? 아니면 그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인간 존재를 말살하고 싶을까? 그러한 상상력에서부터 애니메이션은 출발한다.‘트라이건’의 세계관은 이러하다. 지구는 더 이상 인류가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 남은 인류는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불의의 사고로 우주선은 폭발하여 어떤 별에 추락하게 되고 생존한 사람들로 인해 새로운 문명이 만들어지게 된다. 황폐한 별에서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인 생태 동력 에너지였다. 이 에너지에 자아가 생겨나면서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된다.에너지는 인간 형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동시에 태어나고 함께 자랐지만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형은 에너지들이 인간에게 학대당하고 있다고 하면서 인간을 말살하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주장한다. 동생은 에너지는 인간이 없이는 살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인간과 공생하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자고 말한다.형제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인간과 공생하기를 선택한 동생은 어떤 자를 죽일지 말지 선택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형은 동생을 “입만 산 몽상가”로 치부하며 그런 순간에도 우리들의 동포가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다.‘트라이건’ 세계관에서의 인간은 놀라우리만치 잔인하다. 처음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얻는 데 급급했으나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끔찍한 고통을 받는가에 관해선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니 다른 생명체의 입장에선 ‘우리가 고통받은 만큼 너희들도 느껴보라’는 논리가 이상하지만은 않다. 어떤 면에선 이들의 인류를 말살하겠다는 계획이 타당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이렇듯 많은 영화나 만화에서 인간을 어떠한 바이러스처럼 다루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멀쩡한 지구에 갑자기 나타난 병균 취급을 하는 것이다. 인간이 모두 사라진다면 지구는 건강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렇다. 이상 기후, 전쟁, 학살, 상상도 못 한 범죄, 세상의 온갖 나쁜 일은 인간이 저지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게 보자면 인간 존재는 무자비하고 어리석은 파괴자처럼 여겨진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애니메이션을 떠나 현실에서, 인간 아닌 존재들이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지구를 망친 인간과 함께 살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회를 주고 싶다. 우리가 너희를 말살해야 하는가? 우리는 너희와 공생할 수 있는가?” 그때 우리는 어떤 대답을 내어놓아야 할까. 우리는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우리는 파괴하는 인간뿐만 아니라 살리려는 인간도 본다. 누군가가 손짓 한 번으로 수백만 명을 죽이는 폭탄을 터트릴 때, 누군가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우는 아이를 구하려 뛰어든다. 누군가가 죄책감 없이 동물을 유기할 때, 누군가는 열악한 보호소에 기꺼이 발을 디디고 한 마리라도 더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망치는 것도 인간이고, 살리는 것도 인간이다. 우리는 어떤 부류의 인간이 되기를 택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관해선 답은 완벽하게 정해져 있다. 우리 안의 선함을 믿고 행동할 때, 공생하는 세계를 꿈꿀 수 있을 것이다. ‘트라이건’의 어떤 인간이 외쳤듯이. “함께 살아가는 거야. 아니, 함께 살아줘.”

2023-06-27

불청객은 누구인가

2023년 ‘서울국제도서전(SIBF)’이 강남 코엑스에서 진행되었다. 6월 14일부터 5일간 진행된 행사는 아랍에미리트의 토후국 샤르자를 주빈국으로 하여 ‘비인간(非人間, nonhuman)’이라는 주제 하에 이루어졌다. 전시장 규모가 작년에 비해 축소된 것을 감안하자면 상당히 의미 있는 성과라 할 수 있다. 더불어, 도서출판시장이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는 세간의 평가를 고려하자면 성공적인 국제도서전 개최는 나름 의미 있는 성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출판계에 종사하고 있는 입장에서 보자면, 이번 SIBF은 여러모로 씁쓸함이 많은 행사였다. 일단 홍보 대사 위촉에서부터 좀 의아한 구석이 있었는데, 국제도서전이라는 명함이 무색하게 모든 홍보 대사가 소설가로 채워졌다는 점이다. SIBF에서 다루는 도서의 종수에 걸맞게 다양한 분야의 홍보대사가 위촉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여기까진 그나마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다. 어쨌거나 위촉된 홍보 대사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라는 측면에서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인선이었기 때문이다.가장 문제적이었던 것은 홍보 대사 가운데 한 명인 오정희였다.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오정희가 SIBF의 홍보대사로 선정된 것이다. 당연히 위촉 사실이 알려진 때부터 각계각층의 문제제기가 있었으나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는 침묵했다. 심지어 협회의 정책팀장이었던 홍태림 미술평론가에 따르면, 내부 차원에서 오정희의 홍보대사 해촉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박근혜 정부 시절 작성된 블랙리스트가 특정 분야의 인사들을 정치적 목적에 따라 정책을 통해 소외시키고 배제시키기 위해 작성된 것이라는 점을 떠올리자면, 이와 같은 리스트의 선정에 관여한 것은 국가 주도의 구조적 폭력에 가담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즉, 오정희라는 소설가는 단순히 국가 정책의 협의에 참여한 예술가인 것이 아니라, 국가가 자행하는 폭력의 실행자였던 셈이다. 그런 그를 SIBF의 홍보대사로 위촉한 것은 사실상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불어 이러한 위촉 과정에 문체부의 개입 여부가 의심되는 상황인지라, 해당 논란은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때문에 지난 14일 SIBF의 개막식에 앞서 코엑스 동문에서는 각계각층의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모여 대한출판문화협회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진행되었다. 송경동 시인을 필두로 하여 모인 이들은 블랙리스트의 실행자인 오정희 소설가가 국제도서전의 홍보대사로 위촉되는 것은 “국가 주도 폭력을 실행한” 이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며 반성을 촉구했다. 그 후 이들은 행사장 내부로 이동했다.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각계의 문화예술가들로 구성된 이들이었지만, 코엑스 내부 진입에서부터 경호원들에 의해 제지를 받아 자신들이 작가임을 해명해야 했다. 행사장에 가까워질수록 경호원들의 제지는 거세졌고, 결국 이들은 들고 있던 종이 피켓(“부패한 문학권력 앞에서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적힌)마저 보이지 않도록 말아들어야만 했다. 이들은 국제도서전에서 독자만큼이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작가들이지만, 행사의 주최측에서 보기엔 불청객이나 다름없었던 모양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이 처참한 사태는 개막식 장소에 가까워져 더욱 처참한 몰골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개막식장 앞에서 진입을 저지당한 이들은 경호원들에 의해 강제로 연행되었다. 수십여 명의 작가들의 팔 다리를 여러 명의 경호원들이 강제로 붙잡아 프레스룸으로 밀어 넣었다. 연행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작가들은 왜 연행되어야 하는지 어떠한 설명도 없이 이루어진 마구잡이식 연행이었다. 이들은 거듭 대한출판문화협회의 윤철호 회장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외쳤으나, 주최측은 이들을 서둘러 해산시키곤 개막식을 시작했을 뿐이었다.나중에 밝혀진 사실로는 영부인 김건희 여사가 서울국제도서전에 방문하여 대통령 경호법 때문에 연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중에서야 밝혀진 사실에 불과하다. 더욱 당혹스러운 사실은 김건희 여사의 방문으로 인해 심지어 각 신문사의 문학 기자들마저 출입이 제한되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이들은 문학 기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개막식 장소에 김 여사가 갈 때까지 들어갈 수 없었고, 사진조차 제대로 촬영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작가들과 기자들은 불청객에 불과했던 걸까? 과연 불청객은 대체 누구인걸까? 이것이 정부의 문학에 대한 태도라고 생각된다면 너무 과한 생각인걸까?

2023-06-27

전세 사기 전성시대

올해 초 ‘빌라왕’ 전세 사기 사건으로 세상이 뒤숭숭할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가 전세로 살고 있는 집의 등기부등본을 열람해봤다. 아연실색했다. 집은 가압류된 상태고, 임대인 앞으로 무려 48억9천만 원의 채권이 있었다. 임차인들에게 전세보증금을 반환하지 못해 주택도시보증공사에서 대신 변제한 금액이다. 전화로 자초지종을 물었다. 소유 주택이 170여 채나 된다고 했다. 전세계약이 만료되어도 보증금을 반환해줄 수가 없다고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집이 계약돼 자꾸 늘어났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명의만 빌려준 ‘바지 임대업자’인 듯했다. 뒤에 전문 사기 세력이 있는, 전형적인 전세 사기 수법이었다.계약 만료까지 1년도 더 남았지만 보증금을 다 날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대처했다. 부동산 전문 변호사인 친구에게 전세금 반환 소송을 위임했다. 소송 과정에서 임대인은 연락이 두절됐는데, 아마 구속 수감되었거나 잠적해버린 것 같다. 극단적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고 들었다. 부디 그건 아니길 바란다. 어찌 보면 그 사람도 피해자다. 적게는 수십 채, 많게는 수백 채의 빌라를 보유한 악성 임대인들 중에는 경제력이 없는 일용직 노동자나 노숙자, 무직자가 많다.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명의를 빌려줬다가 사기범이 된 것이다. 탐욕도 죄고, 무지도 죄라지만 그 사람들 처지도 참 안됐다.1월부터 진행된 소송은 다섯 달 걸려 지난주에 승소 판결이 났다. 이제 이 집을 강제경매에 넘긴 후 내가 직접 낙찰 받으려 한다. 경매 낙찰까지 또 몇 달이 걸릴 것이고, 낙찰 받은 후에는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기존의 전세대출을 갚아야 한다. 아직 복잡한 절차들이 많이 남아 있고, 모든 게 순조롭지만은 않을 테지만 ‘내 집 마련’의 희망을 가져 본다. 내 경우는 그래도 좀 낫다. 집은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많은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2년만 살 생각이었던 집을 울며 겨자 먹기로 낙찰 받는다.얼마 전 전세 사기 특별법도 시행이 돼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전세 사기 피해자로 인정되면 여러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겉으로는 활달한 척했지만 사실 이 일로 상반기 내내 골치 아팠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논문을 쓰는 것도, 시와 평론을 발표하는 것도 다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간신히 여름까지 잘 왔다. 다시금 ‘존버’(끝까지 버티는 정신을 뜻하는 신조어)의 위대함을 본다. 어떻게든 버티고 발버둥 쳤더니 살아날 구멍이 생겼다.나에겐 ‘불행 중 다행’이 작용했지만, ‘불행 중 비극’으로, 전세 사기를 당해 스스로 삶을 저버린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슬프고, 화가 난다. 손쓸 새도 없이 집이 이미 경매에 넘어가고, 낙찰자가 나와도 보증금에서 국세, 지방세, 은행 등 선순위 채권을 떼고 나면 피해자가 돌려받는 건 푼돈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건지지 못하고 신용불량자가 된 채 거리로 쫓겨나는 경우도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극단적 선택을 한 피해자들의 경우가 대개 그러하다. 그러니 전세 사기 특별법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다. 임차인들의 전세금을 보호해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진작 마련됐어야 한다. 특별법이 시행돼 이제는 임차인의 보증금이 최우선순위로 변제되고, 피해자가 원한다면 주택의 경매를 유예하거나 우선 낙찰 받을 수도 있다. 그밖에도 생계 지원이나 저금리대출 등 여러 피해 보상 대책이 마련이 되었지만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은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임대인은 돈을 받고 임차인에게 집을 빌려준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임차인은 집을 비우고 임대인은 돈을 돌려준다. 이게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 이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을 만큼 대한민국이 후진적인 나라인가? 전세 사기가 판을 치게 된 것은 제도가 미비한 탓이다. 제도에는 허점이 많고, 부동산 업자나 관련 업계 종사자가 아니면 쉽게 알 수 없을 만큼 내용이나 용어가 어려워 사기꾼들이 악용하기 좋다. 처벌도 가볍다. 타인의 재산을 갈취해 삶을 망가뜨린 자들이다. 중형에 처하는 게 마땅하다.며칠 전, 경기도 전세피해지원센터에 가 전세사기피해자 등록 신청서를 제출하고 왔다. 평일 오전인데도 상담 창구에 긴 줄이 서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이 센터를 찾는다고 한다. 온라인에서 유행하는 우스갯말이 있다. “이게 나라냐?”

2023-06-20

일상을 잘 가꾸기

5박 6일의 짧은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첫 해외여행이라 얼마나 새롭고 설레던 게 많았는지 모른다. 일본 오사카 지역은 인천 공항에서 2시간 이면 도착하는 곳이라 사실 한국과 많이 다를까? 하는 염려가 있었다. 예상대로 크게 한국과 다른 점은 없었으나 그래도 처음 가는 낯선 도시이기에 호기심으로 부푼 마음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여행을 하는 내내 스스로가 정말 작은 사람임을 느꼈다. 수많은 인파 속 다양한 인종 사이의 나는 너무나 작고 사소한 존재였고, 그 사실이 굉장한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일상을 억누르고 있던 중압감에서 내려와 낯선 도시를 유유히 걸어 다니는 관광객의 거취란 얼마나 자유롭던지. 당장 해치워야 할 업무도, 크고 작은 사소한 집안일에서부터 멀리 벗어나 마음대로 먹고 원하는 곳으로 느긋이 걷는 하루는 너무나 만족스러웠다.하루에 2만보를 넘게 걸으며 지역의 유명 관광 스팟이나 오랜 역사를 품고 있는 거리를 걸어다니며, 오랜 시간 그곳을 지켰을 터와 그곳에서 일상을 일구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이 편안해졌던 기억, 또는 깊은 숲속의 절에서 종소리를 들으며 빽빽이 들어찬 푸른 숲속을 자유로이 만끽했던 장면들은 지금까지도 너무나 좋은 기억이 되고 있다.같이 여행을 떠난 이와도 좋은 추억을 많이 남겼다. 거대한 자연 풍경 앞에서 우리는 정말 작아졌고, 그래서 서로를 놓지 않기 위해 손을 꼭 잡았다. 수많은 대화 보다 마음 깊이 자리하는 눈빛과 말들로 말을 대신했고 가장 좋은 것은 서로에게 건네며 관계에 더 많은 신뢰를 차곡차곡 쌓았다.예상했던대로, 과거의 후회에 머무르지 않는 여행이 아닌 계속해서 미래를 이야기하는 여행이었다. 평범한 일상에선 결코 쉽게 얻을 수 없는 이 귀중한 경험을, 일상에 돌아와서도 계속해서 갖고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나는 여행지에서의 좋은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을 하다가도 중간 중간 여행지에서 찍은 동영상과 사진을 들여다본다거나 여행지에서 사온 기념품을 자꾸만 열어보거나 아직도 여행지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금 꿈으로 꾸고 있다.더군다나 배달 음식을 잘못 먹고선 장염에 걸리는 바람에 일주일 내내 고생을 하고 있다. 마치 감기 기운을 앓고 있는 것처럼 일주일 내내 아픈 몸을 겨우 이끌고 있다. 그러니 더더욱 총명한 눈을 반짝이며 가볍게 걷던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는 수밖에.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여행지에서의 특별한 삶에서 다시금 보통의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꿈결 같던 여행지에서의 자유로움을 벗어나기란 참 어렵다. 내팽겨 쳤던 모든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있으니 부담감이 배로 크다. 각종 공과금 납부, 쓰레기 버리기, 밀린 빨래 등등. 자유를 외쳤던 것에서 다시 책임감을 갖고 임해야 한다는 건 피로감이 상당하다.일상은 많은 공을 필요로 한다. 평범한 일상일지라도 그 안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무수히 많은 노력이 녹아 있다. 자그마한 것 하나 놓쳐도 흐트러지기 쉬운 일상이니까, 이젠 여행의 낭만에서 빠져 나와 다시금 일상을 보살펴야 한다.수납함에 잘 개어 있는 수건들, 반듯이 정리된 각 종 생활용품들, 깨끗하게 잘 말려 있는 식기, 햇빛에 잘 말려 둔 여름 이불 까지. 아무리 고단할지라도 집안을 쓸고 닦으며 정리하다보면 어느덧 다시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고 깔끔히 정돈된다.가볍게 떠나 새로움으로 가득한 여행을 하기 전까진 나의 삶을, 하루의 일과를 방치하고 홀대해선 안 된다. 나를 먹이고 나를 잘 재우며 평범한 일상을 가꾸고 보살펴야한다. 또 훌쩍 떠날 수 있는 현실적인 소비와 준비가 필요한 법이니까.그러니 내일부턴 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원래 일하던 일을 열심히 해내고 성과를 보이고 좋은 글을 읽고 또 쓰면서 더 단단한 일상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나는 조만간 또 떠날 것이고, 다음 여행은 조금 더 현지인의 삶으로 녹아들어 그 나라와 문화를 조금 더 여유롭게 여러 방면으로 깊이 느낄 것이니까.

2023-06-20

오보(誤報)의 사회적 비용

5월 31일 아침을 한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비명 같은 위급 재난 문자 알림음과 ‘서울지역에 경계경보 발령’이라는 섬뜩한 문자 내용, 그리고 사방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 습관처럼 네이버에 접속하려는 데 접속이 되질 않자 무언가 일이 크게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마치, 재난 영화 속 한 장면에 내가 던져진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이건 현실이었고, 나는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헌데, 무엇을?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하지?’ 같은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서울특별시에서 발령한 경계경보는 오발령 사항임을 알려드림’이라는 행정안전부의 문자가 올 때까지.비록 20분의 짧은 시간이지만, 그 순간에 느낀 공포를 말로 형용하긴 어려울 것 같다. 공포라는 말도 왠지 적절하지 않은 것 같고. 아마 무력감에 더 가까웠지 싶다. ‘그래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라는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무력감 말이다. 그렇게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에 뒤엉킨 채로 아침 수업을 시작했다. 학생들에게 인사처럼 참 특별한 아침인 것 같다고, ‘수령님의 모닝콜’ 덕분에 지각생이 없는 것 같다는 비틀린 농담을 던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이 모든 감정의 폭풍이 ‘오보’로 인해 초래되었다는 건 꽤 의미심장한 일인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 문자는 허술한 점이 참 많았다. ‘대피하라’라는 술어에도 불구하고, 문자는 무엇으로 인해 대피해야 하는지,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말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저 무작정 쓰인 ‘대피하라’는 말은 꼭 영화 ‘미스트’ 같았다. 하지만 이건 현실이었고, 우리에게는 최소한의 답이나 혹은 습관이라도 있어야만 했다. 수없이 많은 참사와 재난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재난에 취약하다. 그게 전쟁이든, 혹은 자연재해든, 우리는 어떤 상황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더불어 문자에서는 어떤 상황인지조차 명확히 말해주지 않았고.사실 많은 사람들이 느낀 혼란을 더욱 가중시킨 건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단지 대피하라는 말 뿐, ‘왜’와 ‘어떻게’를 생략해버린 문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혼란을 부추길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더불어 그런 상황에서 네이버와 같은 대형 포털 사이트가 접속자 초과로 인해 먹통이 되어버린 건 의미하는 바가 큰 것 같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습관적으로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사태를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고, 그건 우리의 삶에 있어서 특정 사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문제적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정부를 불신하고, 그와 같은 불신을 사기업의 정보망을 통해 보충하려 하고 있는 건 아닐까.비슷한 일은 얼마 전에도 있었다. 4월 28일 종로에서 있었던 지진 경보 오발송이다. 그때 나는 종로3가의 한 술집에 있었는데, 그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4월 28일 21:05 지진발생/추가 지진 발생상황에 유의 바람-종로구’라는 문자를 받은 사람들은 건물 밖으로 대피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부터 찾기 시작했다. 술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나는 그 광경이 꼭 만화 ‘일본 침몰’의 한 장면 같아 소름이 돋았다. 눈앞에 닥친 위기가 현실임을 인지하지 못해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재난에 휘말리는 사람들. 그런데 그게 정말 그 사람들만의 탓일까?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오보’가 갖는 위험성이 바로 이것이다. ‘오보’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사람들의 심리에 치명적인 효과를 미친다.‘오보’는 우리가 가진 위험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실제 상황이 터졌을 때 잘못된 대처를 하도록 만든다. 그때도 그랬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는 잘못된 낙관주의가 습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잘못된 정보가 초래하는 효과가 정정문자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까닭이다.더불어 이번의 경계경보 오발령 사건은 북한과 엮여 있다는 점에서 사태가 더 복잡하다. 북한의 위성 발사실험이 사전 고지된 사항이었음에도 이것을 이례적인 것처럼 이슈화시키고, 정보를 왜곡하여 잘못된 정보를 전달해 혼란을 초래하는 것은 고전적인 북풍 공작을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이건 지레짐작에 불과할 것이다. 오보는 오보여야만 한다. 그럼에도 오보가 단지 오보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 왜일까. 어쩌면 이런 잘못된 정치적 상상도 오보에 대해 치러야 하는 사회적 비용인 것일까? 여전히 많은 의문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무엇이 문제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2023-06-13

산책하면서 보는 것

강아지와 산책하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된다. 이를테면 길거리에 버려진 담배꽁초가 얼마나 많은지. 씹다 뱉은 껌이나 음식물 쓰레기가 잔디와 얽히면 얼마만큼 끔찍한 일을 야기하는지. 죽은 새나 몸통이 훼손된 쥐 같은 것도 심심치 않게 마주할 수 있다. 나의 반려견 보리는 목적지까지 우아하게 걸어가는 법을 모르고, 흥미로운 냄새가 나는 온갖 곳을 향해 코를 킁킁댄다. 덕분에 나도 거리의 무수한 주변부를 탐색 중이다.그렇게 걷다 보면 산책하는 다른 강아지와도 자주 만나게 된다. 요즘처럼 좋은 날씨엔 더욱 그렇다. 시간과 동선이 겹쳐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만나는 강아지도 있다. 그러면 강아지의 이름이나 나이, 취향까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저 멀리서 아는 강아지가 다가오면 묘한 내적 친밀감이 든다. 강아지들이 인사할 동안 반려인들은 이런저런 정보를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면 새로운 형태의 우정이 새록새록 싹트는 것만 같다.최근 새롭게 알게 된 강아지가 있다. 이름은 초코. 갈색 털을 가진 푸들이다.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와 함께 사는 강아지였다. 초코는 너무나 순하고 사람을 잘 따랐다. 초코야, 안녕? 인사하면 벌러덩 누워 배를 보여주기도 했다. 다른 강아지와도 사이좋게 잘 지내서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고 동네 아이들도 초코야, 초코야, 부르면 쪼르르 달려가 애교를 부렸다.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보리와 산책하던 중이었다. 초코의 견주인 할머니가 혼자 벤치에 앉아 계셨다. 초코가 안 보이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차, 할머니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그리고선 초코가 죽었다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초코가요? 갑자기요?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이냐고 묻자, 차에 치였다고 했다. 아, 그때의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순식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마음이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이었다.할머니는 오프리쉬, 그러니까 강아지의 목줄을 차지 않고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최근 동물보호법이 개정되면서 강아지의 리드줄 미착용에 관한 규제가 생겨났다. 줄을 차지 않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된 것이다. 그러나 동네를 산책하면 여전히 줄을 착용하지 않고 산책하는 강아지를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할머니와 초코 역시 그랬다.초코의 죽음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에게 “그러게, 목줄을 하셨어야죠.” 하면서 쏘아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할머니의 무책임함으로 목숨을 잃은 강아지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그러나 사랑하는 반려견의 죽음 앞에서 누구보다 슬픈 것은 그녀라는 것을 알기에 어떤 말도 함부로 꺼낼 수 없었다.내게는 책임이 없는가? 나는 반려견의 리드줄 착용이 의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줄 없이 돌아다니는 강아지가 위험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다면 할머니에게 리드줄 착용의 중요성에 관해 알리고 당장 내 것이라도 건넸어야 했다.이럴 때 나는 완전히 비겁해진다. 이를테면 개집에 묶여있는 강아지들을 볼 때. 행동반경이 이미터도 되지 않는 그곳에서 먹고, 자고, 배변하는 생명과 내 품에 안긴 반려견을 번갈아보면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눈을 꾹 감는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것들도 있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상황을 회피하는 것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우리는 다른 세상을 살았다. 할머니와 나도. 초코와 보리도. 나는 다른 국가처럼 모든 반려인이 반려견에 관한 의무교육을 받기를 원하고, 개를 키울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입양할 수 있길 바란다. 그러면 동시에 할머니의 외롭고 쓸쓸한 어깨가 떠오른다. 할머니와 초코는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였을 것이다. 초코는 할머니에게 넘치도록 많은 사랑을 받았을 것이고 그 어떤 강아지 못지않게 행복했을 것이다. 할머니가 주었던 사랑과 서로의 유대감은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사실이니까.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면서도 주변부에 놓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섣부른 감정만으로 세상은 작동되지 않고 법의 잣대만으로 모든 이를 판단할 순 없다. 이것이 힘들다는 걸 알지만 한 번이라도 더 살피고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오늘도 나의 반려견 보리는 자기만의 보폭으로 산책한다. 전봇대 앞에 멈춰 냄새를 맡고 잔디밭에서 마음껏 구른다. 보리의 배변을 치우려고 하니 개똥들이 보인다. 무책임한 개 주인을 원망하다가 한숨을 쉬고 눈에 보이는 것을 치운다. 고개를 드니 다른 분이 자발적으로 공원을 청소하는 것이 보인다. 그래, 세상은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 나갈 것이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천천히, 차근차근.

2023-06-13

낯설고 새로운 곳으로

곧 일본 여행을 떠난다. 이번 여행을 위해서 한동안 잠들기 전에 유튜브 속 일본 여행 영상을 많이 찾아봤다. 도톤보리에서 꼭 먹어봐야 할 초밥집이나 타코야끼집, 우메다의 쇼핑센터나 각종 오사카 관광 스팟을 체크하며 구글 지도를 하트 마크로 점찍어 두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이자 행복이었다.처음 가는 해외 자유여행이라 더욱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늘 여행은 즉흥적으로 떠나는 타입이라 잠은 아무데서나, 먹는 것도 아무거나 먹으며 하루 온종일 정처 없이 걸어 다니곤 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다르다. 얼마나 들떠있는지 여행 일정을 스스로 난생 처음으로 계획해서 모든 일정을 문서로 정리했을 정도다.‘여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대학 졸업 이후 홀로 자유 기차여행을 떠났을 때다. 당시 만나던 연인과 헤어진 이후 이별의 헛헛함을 달래기 위해 기차에 올랐다. 당시 코레일에서 내일로 티켓을 끊으면 무궁화호에 한해서 기차를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었기에, 수중에 있던 아주 적은 금액의 돈과 배낭만 챙겨 들고선 서둘러 기차에 올랐던 여행이었다.처음으로 향한 곳은 포항이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지역이면서 푸른 바다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다 싶어 택한 곳이었다. 포항역에서 내리자마자 역에 배치된 관광지 팸플릿을 보았고 별 다른 고민 없이 호미곶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당시 불안으로 휩싸인 적막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가까웠기에, 재빨리 파도와 갈매기 그리고 밝고 활기찬 관광객의 소란스러운 목소리로 적막을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급해져선 간단히 숙소에 들려 배낭을 내려놓고 휴대폰과 카드만 챙긴 채 호미곶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분명 스마트폰이 알려주는 지도대로 따라가 버스 환승을 하려 했지만 어느 작고 외진 마을에 내리고 말았고 환승할 버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점점 해는 지고 있었고, 마을은 조용했으며 마을회관조차 인기척을 찾을 수 없어서 계속 초조한 마음이 더해졌었다. 정처 없이 걷던 와중 다행히 나와 비슷한 처지의 관광객을 만나 정신을 차리고 택시를 불러 겨우 호미곶으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겨우 도착해서 해가 지는 것을 멍하니 앉아 보고 있는데 그때 불현듯 깨닫고 말았다. 이 여행은 아무래도 도망에 가까운 것이구나. 아무리 낯선 곳으로 멀리 도망친다 한들 뜨겁고 눅눅한 후회의 감정은 떨어트릴 수 없는 거로구나, 하며 물거품이 되어버린 모든 것들을 바라만 보았던 여름날의 습한 기억이 잔잔히 남아 있었다.당시의 무력함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루 온종일 낯선 거리를 걸어 다니며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더 물 수 없도록 몸을 지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포항 다음은 부산, 그리고 경주 그 다음은 진주를 오가며 낯선 이들을 만나 새로운 주제의 이야기를 나누고 또 헤어지며, 수많은 거리를 정처 없이 쏘다녔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시큼하게 파랗던 하늘, 묵묵히 우거진 초록과 그늘을 내어주던 커다란 나무들, 깊은 골목에서 묵묵히 머무르고 있는 오래된 집과 사람의 흔적들은 쓸쓸함으로 스스로를 내던지는 와중에 자꾸만 고개를 기울여 바라보게끔 했다. 내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대상들은 이토록 묵묵하고도 견고한데, 나는 왜 작은 이유로 흔들리는 건지 알 수 없었고 아리송한 의문은 더욱 외로운 도피로 느껴지게끔 했다.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가라앉는 기억들이,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이번 여행을 위한 짐을 싸다 불쑥 그날의 기차 여행이 떠오르고 말았지만 이젠 과거의 기억 위로 새로운 짐을 챙겨 넣을 수 있게 됐다. 시간이 많이 흘렀기도 하고, 사랑과 존중의 깊이를 다시금 헤아리면서 더는 과거 어린 날의 나의 모습에서 씁쓸함을 느끼지도, 필요 이상으로 애틋해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6월의 일본은 덥고 습하므로 얇고 가벼운 옷 위주로 잘 개어 넣고 다음으론 편한 잠옷과 슬리퍼를 담는다. 기초 화장품과 약, 액세서리류는 작은 통에 소분해서 투명 파우치에 챙겨 넣는다. 그렇게 새로운 여행의 기대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이번 여행은 과거의 후회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아닌, 좋음을 가득 채워 올 여행을 할 것이다. 더없이 소중한 이와 나란히 낯선 길을 걸을 것이고, 그 지역의 유명한 음식을 먹고, 그 나라의 언어를 쓰고, 역사적인 곳도 방문하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대상을 오랫동안 누리며 가득 담아올 것이다.

2023-06-06

향기로운 봄날의 금강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정지용, ‘향수’)아까시 꽃냄새가 흐르고, 청보리밭이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면 충북 옥천 안남면 지수리, 금강 청동여울의 봄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는 금강의 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나는 봄마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가 굽이쳐 흐르는 금강에서 루어 낚시를 즐긴다. 루어 낚시인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길, 금강휴게소에서 라바댐 지나 금강4교, 보청천 합수부 원당교 앞 엘도라도 펜션, 청마교, 합금교, 가덕교 콧구멍다리 또 지나 부연 먼지를 일으키며 비포장길을 달리다 멀리 지수리 취수탑이 보이면 마음의 가속 페달을 더 세게 밟게 된다.언제 와도 고향집 같은 ‘등나무가든’에 짐을 푼다. 민박과 식당을 겸하는 집이다. 주인 어르신 내외가 반갑게 맞아주신다. 낚시에 미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이 집을 찾았는데, 그렇게 드나든 지 벌써 10년쯤 됐다.할아버지 할머니와 여기 함께 살던 손자는 자기가 키우는 햄스터를 내게 자랑하던 초등학생이었는데 어느새 대학생이 돼 타지로 나갔다고 한다.아저씨는 숙원사업이던 마당 연못을 만들어 5짜 쏘가리 두 마리, 4짜 붕어 몇 마리, 잉어, 마자 등등을 넣어두셨다.내가 마당에 주차하고 내리자마자 이것 좀 보라며 얼마나 자랑을 하시는지.아주머니는 대뜸 “더 훌륭해졌네” 하신다. 나는 뭐가 훌륭한지 모르면서, 어떡해야 훌륭해질 수 있는지 모르면서 어떻게든 훌륭해지기로 마음먹는다.낚시 준비를 해서 청마대교 밑 여울로 들어갔다. 쏘가리가 나오면 제일 좋고, 끄리 손맛만 봐도 좋다. 역시나 막무가내 우당탕탕 끄리가 루어에 달려든다.힘이 제대로 붙은 끄리들을 연신 낚아내며 손맛을 즐기고, 잡자마자 사진만 찍고 다시 놓아주는 걸 반복하는데, 저쪽 다리 건너편에 한 백발 어르신이 앉아 낡고 엉성한 낚싯대로 낚시 중이다. 물고기는 못 잡고 강물 위로 흐르는 구름과 바람과 봄볕만 빈 바늘로 건져내고 있다. 그러다 겨우 끄리 한 마리를 잡아내셨다. 하지만 그 한 마리 낚은 게 전부다.한 시간쯤 지났을까, 어르신이 낚싯대를 접더니 겨우 잡은 그 한 마리 맛없는 끄리를, 기생충 감염의 위험을 아는지 모르는지 녹슨 칼로 회 떠 초장 찍어 잡수는 게 아닌가. 나는 미간을 찌푸리다 이내 어르신이 좀 측은했다. 어르신은 내가 팔뚝만 한 끄리 수십 마리를 잡았다가 다시 놔주는 걸 다 봤을 테고, 낡고 망가진 낚싯대와 빈 그물이 꼭 자신의 나이든 처지처럼 여겨져 쓸쓸했을지도 모른다.끄리 몇 마리를 잡아 어르신께로 갔다. 도마에 묻은 핏물과 마구 썰어 뭉개진 회가 비위생적으로 보였지만 괘념치 않았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끄리회 한 점을 정말 맛있게 씹으며 소주를 들고 계신 어르신께 “끄리회 맛있죠. 회 뜨기 좋은 놈으로만 몇 마리 챙겼는데 혼자 먹기엔 많네요.” 큰놈 세 마리를 드리고는 말없이 다시 내 낚시 자리로 왔다. 보리밭에는 초록 바람이 불고, 강물냄새가 머리칼에 배여 마음까지 향기로운 봄날의 금강……오후 다섯 시, 맑은 강물과 해거름이 뒤섞여 금강이 그야말로 금빛 비단처럼 미끄러진다. 낮 동안 잠잠했던 아까시 향기가 노란 송홧가루와 함께 강물에 실려 오는데, 아아 그 달콤하고 아찔한 들숨!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나는 석양에 취해 꽃내음에 취해 그리고 여기저기서 퍽퍽 루어를 때리는 끄리의 손맛에 취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황홀하다. 아까시 향기와 노을이 강과 나를 삼킬 때, 그 오감의 충만함에 내 영혼도 삼켜진다.늦은 저녁, 등나무가든 마당 평상 위에 아주머니께서 닭도리탕 술상을 봐두셨다. 이 집은 백숙, 닭도리탕, 민물매운탕 등을 하는데, 아주머니 솜씨가 끝내준다. 매콤한 닭도리탕에 술잔을 비우는 사이 다리 밑을 흐르는 여울 물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화음을 이룬다.맑고 향기로운 평화가 감도는, “밤하늘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금강 지수리, 세월이 아무리 지난다 한들 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2023-06-06

수식에 잡아먹히지 않기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와 ‘새벽의 약속’ 등의 작품을 남긴 로맹 가리는 말했다. “나는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내 삶에 의해 살아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내가 삶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삶의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인다. “사람들이 나에 관해 쓰는 모든 것에서 매일 나를 보지만 나는 내가 끌고 다니는 그 이미지 속에서 결코 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로맹 가리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에밀 아자르를 빼어놓을 수 없다. 어느 날 혜성같이 등장한 신인 작가 에밀 아자르는 자신의 이름 이외에 어떤 것도 밝히지 않는다. 그는 ‘자기 앞의 생’이라는 작품을 발표하고 대중적인 흥행과 동시에 작품성까지 인정받게 된다. 1980년에 로맹 가리가 권총 자살을 하면서 놀라운 진실이 밝혀지게 된다. 에밀 아자르가 사실은 로맹 가리였다는 사실이다.어쩌면 예견된 일일지도 몰랐다. 에밀 아자르의 정체에 관해 추측하던 사람들은 문장과 문체의 유사성에 집중하면서 그가 로맹 가리일 것이라는 의견을 내어놓았다. 그러나 일부 평론가와 기자들은 “로맹 가리는 그런 글을 쓸 능력이 없다”고 말했고 “로맹 가리는 이미 끝난 작가. 그가 그런 글을 썼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도 단언하기도 했다.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글을 썼다. 거기에 그는 책을 어떻게 출판할 것인지에 관한 지침을 적어놓았다. “사람들이 만들어 준 얼굴”이 작가를 얼마나 구속할 수 있는지를 말하며 그를 두고 떠들어대던 사람들의 오만함을 고발한다.이것은 비단 한 작가의 일화에서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만들어 준 얼굴”은 우리에게도 존재하며 일상적인 삶에서 쉽게 엿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불량한 태도로 학교에서 모두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는 학생이 있다. 그의 이름을 말하면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러던 어느 작문 시간,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운 이야기를 과제로 내어놓은 학생이 있다. 이름을 지우고 진행된 평가이기에 그 작품이 누구의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불량 학생의 작품. 그 역시 자기 작품이 그렇게까지 좋은 평가를 받게 될지 몰랐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날 이후로 불량 학생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는 학생으로 불릴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작가의 꿈을 꾸게 될 수도 있다. 이렇듯 자기를 꾸며주는 수식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불량한 학생의 글을 마음 다해 꼼꼼하게 읽어봤을까? 더 나아가 그것이 정말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을까?그것도 나고, 저것도 나다. 타인의 평가 혹은 사회적 시선, 그것도 아니면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든 울타리에 갇혀서 우리는 진짜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리곤 한다. 우리는 평생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수식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다. 더 좋은 대학 출신이 되고 싶고, 더 좋은 직장에 다니고, 더 좋은 곳에서 살고 싶다. 그런 것들이 나를 더 대단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러다가 예기치 못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내가 만든 수식에 내가 잡아먹히게 되는 것이다. 본질이 사라지고 수식만 남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저 삼성 다니는 사람입니다”라고 외치는 사람을 보면 어쩐지 불편해진다. 그런 식으로 자신이 온전히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건 두려운 일이다.그렇다면 진정한 ‘나’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로맹 가리조차 자신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가늠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가끔은 나 자신의 시선마저 신뢰하기가 힘들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라는 건 허상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찾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찾아보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무슨 말을 들었을 때 행복한지, 어떤 작가의 책을 읽었을 때 가슴이 뛰는지. 그런 작업이 지속되면 자연스레 나만의 중심이 잡힌다.삶을 살다 보면 인생의 물살이 우리를 밀어주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물살에 휩쓸릴 순 없다. 스스로 중심을 잡고 전진해야 한다. 타인의 시선을 인지하되 거기에 매몰되지 않을 힘이 생길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조금이나마 똑바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2023-05-30

인류를 위협하는 것은 정말 AI일까?

최근 미국의 비영리단체 ‘퓨처 오브 라이프 인스티튜트’(이하 FoLI)에서 ‘거대 AI 실험 일시중지 공개서한’을 공개했다. 서한의 주된 내용은 AI 기술이 갖는 위험성이 인간의 통제 가능 범위를 벗어났다는 것. 따라서 전 세계의 AI 개발사들이 6개월 동안 ‘GPT-4’ 이상의 강력한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를 중단하고 이에 대한 윤리적, 철학적, 과학기술적 모색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FoLI의 입장이다.서한이 공개되었을 때 대중을 놀라게 했던 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일론 머스크(테슬라 CEO), 스티브 워즈니악(애플 창업자), 유발 하라리(역사학자) 등 업계의 유명인사 및 석학들이 이 서한에 참여했다는 사실. 다른 하나는 AI 기술이 갖는 위험성이 현실적 문제로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다만 SF 영화의 설정 정도로 치부되었던 AI 기술이 인류에게 핵무기, 인간복제 기술과 같은 현실적 위협으로 다가왔다는 점이다. 때문에 FoLI는 인간과 경쟁하는 AI는 사회와 인류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최소 6개월 간 AI 시스템 훈련을 중단하고, 그 기간 동안 독립적인 외부 전문가에 의한 감시, 감독을 위한 안전 프로토콜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하지만 업계는 이 서한에 대해 부정적인 분위기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AI 기술 개발 일시 중단이 궁극적인 문제 해결 방안은 아니라고 말하며, 중단을 수행할 주체는 누구이며 모든 기업과 국가에게 강제할 수 있는지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워싱턴 대학 컴퓨터공학 명예교수 페드로 도밍고스는 반세기 이상 사용된 인터넷 기술에 대한 규제 및 제한조차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AI 기술에 대한 규제 방안을 6개월 안에 만든다는 것이 가능한지 현실적인 측면을 지적한다.물론 AI 기술이 갖는 위험성은 분명 현실적인 것이다. 가령 노동 시장을 예로 들자면 최근 중국의 경우 AI 기술의 도입에 따라 약 20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하였으며, 미국의 경우 근시일 내에 전체 일자리의 1/4에 해당하는 약 3천600만 개의 일자리가 AI에 기반한 자동화 시스템으로 대체될 전망이다. 특히 인적 관리 측면에서 대다수의 플랫폼 노동자들이 AI에 기반한 알고리즘 시스템에 의한 관리 속에서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면, 노동시장은 이미 AI 기술로 인해 그 저변에서부터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하지만 대중이 느끼는 AI의 위험성을 마냥 현실적인 것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AI의 위협은 분명 현실적인 것이지만, 공포감은 SF 영화를 비롯한 창작물에서 기반한 비현실적인 것이라는 생각. 물론 새로운 기술의 발달이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발생시켜 인류에게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은 의학 분야와 군사 관련 분야에서 초래된 경험적인 것이겠으나, AI 기술의 실질적 위험성에 대한 대중의 체감에는 인간이 아닌 이종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SF적인 과장이 뒤섞여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러한 비현실적인 공포가 이미 일어난 노동시장과 컨텐츠 시장에서의 변화를 은폐한다는 사실이다. 축약해 말하자면, 상당수 노동자는 이미 AI 기술로 인해 변화한 시스템에 종속돼 있으며, 소비와 향유 역시 알고리즘에 의해 제어되고 있다. 그럼에도 AI가 근미래에 인류에게 위험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주장은 대중의 비현실적 공포를 부추기는 동시에, 대다수의 인류가 처한 실질적인 종속과 지배의 구조를 비가시화시키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더불어 지금 AI 기술에 반대하고 있는 기업가들이 실질적인 AI 기술 시장의 잠재적 참여자들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주장이 과연 인류라는 대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각 기업의 사적 이익의 추구를 위한 것인지 모호하게 만든다.물론 신기술의 개발과 발전에 따른 부작용은 인류가 늘 주의해야 하는 사안. 우리는 이미 핵무기를 통해 인류가 통제할 수 없는 기술이 인간에게 미치는 해악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AI 기술의 발전을 둘러싼 담론에는 어딘가 석연찮은 게 있다. 여기에서 충돌하고 있는 것이 과연 ‘인간’의 가치를 비롯한 정신적인 가치들 뿐인 것일까. 아니면, 새로운 시장의 개척과 형성을 둘러싼 거대 기업들의 각축인 것일까.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실질적인 위협일까, 아니면 무지에서 비롯된 비이성적인 공포일까. 공포를 부추기고, 공포를 먹고 사는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의심해야 하는 것은 AI 기술일까, 아니면 기술 담론의 참여자들일까.

2023-05-30

MBTI 덜어내기

관계란 참 어렵다. 특히 처음 만난 사람과의 관계는 더더욱 그렇다. 일을 하다 그 사람과의 마찰이 생길 때, 또는 타인을 처음 마주할 때 어떤 MBTI 유형일지 궁금해진다.MBTI란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Myers-Briggs Type Indicator)’의 약자로, 미국 심리학자 캐서린 브릭스가 그의 딸인 이사벨 마이어스을 가르치던 중 정신분석학자 칼 융의 성격유형 이론을 근거로 만든 심리검사이다.캐서린 브릭스가 구분한 성격유형은 ‘에너지 방향’, ‘인식 기능’, ‘판단 기능’, ‘생활 양식’의 네 가지 경향으로 구성되며, 4쌍(8가지)의 지표 중 검사 결과를 조합하면 총 16종류의 성격 유형이 나온다.인터넷에 MBTI를 검색해보면 ‘MBTI별 00일 때 반응 모음’, ‘MBTI 별 성격 차이’ 알아보기, ‘유형별 궁합’, ‘유형별 완벽주의 순위’ 등의 수많은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1만회, 141만 회 등 높은 조회수를 나타내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를 두어 끊임없이 소비하고 있다.MBTI 관련 콘텐츠는 늘 끊이지 않는 밈을 생산해내며 이슈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슈를 통해 무분별히 정보를 수집하여 수용해버릴 수 있다는 위험도 크다. ‘판단 기능의 F’는 무조건 공감을 잘 할 것이고, ‘생활 양식의 J’는 무조건 계획을 잘할 것이라는 오해를 하기 쉽다. 또는 나와 잘 맞는다는 이유로 특정 엠비티아이를 선호하거나, 또는 상극이라는 이유로 나와 맞지 않다고 속단해버릴 가능성도 있다. MBTI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개별의 지표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이 사람을 판단해버리는 수단으로 사용해버린 것이다.한 구인사이트에는 ‘열정적이며 혁신적’인 ENFP를 구한다는 마케터 모집 공고가 올라오기도 했고, 일부 기업은 특정 MBTI 성격 유형은 지원하지 말라거나, 혹은 특정 유형을 선호한다는 모집 공고를 올려 논란이 된 바 있다. 개인의 능력과 잠재성을 판단하는 것이 아닌, 단순 MBTI의 검사 결과지를 통해 개인의 성향을 파악하여 특정 MBTI를 우대한다거나, 선호하지 않는다고 밝히는 차별과 오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만 것이다.실은 나 또한 MBTI 과몰입러로,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처음 만날 때 MBTI를 물어보게 됐다. 그 사람이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 또 어떤 점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지에 대해 파악했고 의도적으로 행동하려 했다. 타인을 알아가려는 여러 시도와 노력, 대화가 아닌 MBTI에 맞춰 간편하게 그들을 알아가는 쉬운 속단의 방식을 택해버리게 되는 것이다.MBTI를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여길 때 오히려 타인에 대한 무시와 배제를 쉽게 선택해버리는 것이 된다. 사람을 분류하기 위한 도구로써 활용하며, 나도 모르게 특정 MBTI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며 계속해서 비좁은 시선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단순 콘텐츠로 즐기며 유머러스하게 소비하는 것은 좋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타인을 함부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아야 함을 경계해야 한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안도감, 타인을 잘 이해하고 있으니 모든 인간관계가 조금 더 간편해지고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건 실은 알량한 자존심일 뿐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낯선 타인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늘 긴장감이 맴돈다. 하지만 그 긴장감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모든 행위는 관계를 풍요롭게 만들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요소를 만든다. 여러 관점에서 타인을 바라보고 이해하려 애쓰며 탐구하려는 노력은 결국 더 다양한 세계를 포용할 수 있게 한다.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관계를 일찍 끊어버리고 단정지어 버린 몇몇 타인들이 있다. 단순히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흥미로운 관계를 놓쳐버린 것이다. 타인을 대할 때의 편견, 그리고 너무 MBTI의 틀에 맞추어 누군가를 재단하고 평하는 일은 없어야 함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나를 알아가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때문에 MBTI를 통해 획일화된 나의 모습을 정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얼마나 나를 오해하기 쉽고 넘겨짚기 쉬운 것인지 모른다. 인간은 아주 복잡한 존재이면서 다양한 내면을 가졌으므로 나를 알아가고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은 당연하게도 어렵고 복잡한 일일 것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선 MBTI에 몰입하여 구분지어 버리는 과장을 덜어내야 한다.

2023-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