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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의의 탈을 쓴 희롱과 저주

교사와 여고생이 실랑이하는 영상이 뒤늦게 화제가 됐다. 지난해 3월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일이다. 수업 시간에 매점에 가려는 학생을 제지하려 교사가 가방을 붙잡는 과정에서 머리칼이 함께 잡힌 게 발단이 됐다. 학생은 “저도 남의 집 귀한 딸”이라며 따졌다. 선생님에게 대드는 여고생의 까랑까랑한 목소리와 영상을 찍는 친구의 킥킥대는 웃음소리 속에서 교사의 훈계는 맥 빠진 듯 들렸다.난리가 났다. 댓글창엔 “교권 추락의 현주소”라며 서이초, 호원초 사건과 묶어 탄식하는 글, 학생인권조례와 촉법소년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 가정교육을 질타하는 글이 넘쳐났다. 다수 언론에서 보도했는데 거의 모든 기사에 백여 개에서 천 개 넘는 댓글이 달렸다. 그만큼 사회적 공분을 산 것이다. 특이한 건 다른 이슈들은 기사마다 ‘베댓’(공감수가 많은 댓글)이 다양한 데 비해 이 사건 기사들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댓글은 한결 같다. “꼬락서니 보니 어떤 인생을 살지 뻔하다”는 것.영상 속 학생은 짧고 타이트한 교복 치마를 입고 있다. 모범생처럼 보이진 않는다. 학생답지 않은 옷차림과 선생님에게 대드는 ‘버르장머리 없음’이 합해지면서 물어뜯기 좋은 빵이 됐다. 피라냐 떼처럼 달려든 어른들은 정의감과 도덕심에 불타올라 말했다. “룸망주”(룸살롱 유망주), “귀한 딸 밤마다 어디 출근하는지 알면 어머니 가슴 찢어질 듯”, “자퇴하고 술집 취업?”, “노래방 도우미”, “교복 보면 수준 보임. 앞으로 막 살겠군”, “탬버린 흔들고~”, “나가요”(성매매 여성을 일컫는 은어)라고.정의라는 가면을 썼지만 혐오의 민낯이 고스란히 보인다. 저열한 인상비평과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천박한 성희롱이다. 성별 및 세대별 댓글 비율을 보면 40대 남성이 압도적이다. 교복 치마 줄여 입었다고, 선생님한테 대들었다고 딸뻘 여학생더러 “나가요” 운운하는 게 과연 올바른 훈육인가?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을 하면 찔리는 데가 있을 것이다. 아니다. 이 또한 인상비평이니 관두겠다.치마가 문제인가 행실이 문제인가? 이미지와 행실이 짝을 이뤄 확증편향에 박차를 가했겠으나 하나를 보고 열을 안다면 점집을 차려라.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상황 안에서만 판단한다지만 지금 보이는 것으로 장차 보이지 않는 것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교사에게 대든 걸 나무라면 된다. 교복이 불량한 걸 지적하면 그만이다. 하나를 보면 하나만 봐라. 고작 한 순간 인상으로 어린 소녀의 남은 인생 전체를 폄하하고 저주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단정한 옷차림으로 대들었다면? 짧은 치마를 입고 예의바르게 행동했다면? 교복 치마는 상대적 조건일 뿐 절대적 근거가 아니다. 댓글을 단 이들은 “모든 룸살롱 여종업원은 짧은 치마를 입는다. 여고생은 짧은 치마를 입었다. 그러므로 여고생은 룸살롱 여종업원이 될 것이다”라는 유치한 삼단논법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솔직해지자. 훈육이 아니라 희롱하고 싶었다고, 걱정이 아니라 저주하고 싶었다고.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유행에 휩쓸리기 쉬운 나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라 에고가 강하고 별 이유 없이 기성세대에 피해의식을 가질 때다. 당신들은 안 그랬나? 1990~200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오토바이 폭주하고, 교복을 ‘쫄바지’, ‘항아리바지’로 줄여 입거나 아예 ‘똥 싼 바지’로 늘여서 “온 동네 다 쓸고 다닌다”며 등짝 맞던 세대가 지금의 40대다. 선생님한테 대드는 일이야 흔했다. 그러고 보니 근래의 교권 추락은 학부모들이 교사들을 낭떠러지로 몬 결과가 아닌가? 정작 ‘내 새끼 지상주의’에 빠져 남의 자식 귀한 걸 모르는 학부모들 대부분이 40대다.사진과 영상은 많은 걸 말하지만 파편이자 단면일 뿐이다. 이미지는 실재를 왜곡하고, 나중엔 실재와 무관하게 자립한다. 영상 하나가 한 소녀의 미래에 ‘막장 인생’ 낙인을 찍은 것처럼. 해당 학생과 영상을 촬영한 학생 모두 선생님과 오해를 풀고 잘 지내다가 개인 사정으로 자퇴했다고 한다. 온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지금 얼마나 두려울까. 잘한 건 없으니 반성해야지. 그 반성을 통해 성숙해야지. 검정고시든 취업이든 꿈을 향해 나아가야지. 한 번의 잘못으로 인생 전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과연 얼마나 바르게 사는지 모르겠다만 가치 있고 행복한 삶으로 그들이 틀렸음을 보여주렴. 너는 귀한 딸이다.

2023-11-28

삶의 진주 목걸이 꿰기

급작스레 떨어진 기온 탓에 몸을 움츠리게 되는 겨울날. 느릿느릿 산책하던 거리는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게 되었고, 캄캄한 어둠으로 잠긴 아침은 평소보다 더 눈을 뜨기 힘들게 되었다. 급작스런 계절의 변화와 함께 나의 기분도 하루에 몇 번씩 오르내리고 있다. 이런 나약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몇 날 며칠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스터츠, 마음을 다스리는 마스터’ 속의 스터츠 박사는 ‘나약함을 드러내라’며 말을 건네 왔다.영화는 미국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 필 스터츠(Phil Stutz)와 ‘머니볼’, ‘더 울프 오브 윌 스트리트’로 얼굴을 알린 배우 조나 힐(Jonah Hill)이 등장한다. 조나 힐은 스터츠 박사와 만나 습득한 심리 치료 기술을 소개하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취약성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불가능을 상징하는 목소리를 스터츠 박사는 X-파트로 명명한다. X-파트는 비판하는 자아이다. 반사화적이며 불가능을 상징한다. 스터츠는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X-파트를 없앨 수는 있지만 완전한 삭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X-파트를 제거하면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삭제가 불가능하다면 이것을 똑바로 마주할 수는 있어야 한다. 이를 마주하면서 인정하게 된다면 성장을 이끌어오기 때문이다. 삶은 고통, 불확실성, 끝없는 노력의 3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 3가지 측면을 인정하고 극복하는 과정이 비로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삶의 고통과 불확실성, 끝없는 노력을 인정하고 행하기 위해선 어떤 게 필요할까? 그럴 때 스터츠는 ‘진주 목걸이 기법’을 이용하라고 조언한다. 여기서 진주는 행동이고 목걸이는 행동을 계속 이어가는 행위다. 아침에 일어나는 행위도 진주알 하나이고, 훌륭한 일을 하는 것도 진주알 하나다. 진주알 하나하나에 일의 가치를 매기는 것이 아닌,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진주알로 대입해 계속 행동하며 나아가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어찌저찌 진주알을 실에 꿰었지만 진주알 속에 이물질이 섞여 있을 수 있다. 이물질 탓에 진주알은 매끄럽지도 못하고 거무튀튀한 탓에 유독 튀어 보인다. 하지만 이를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진주알 꿰기는 성공과 실패라는 결론이 중요하지 않다. 진주알 속엔 이물질이 섞여 있다 하더라도, 진주알은 진주알이라는 존재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니 진주알 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 계속 진주알을 꿰어 나아갈 수 있다는 의지다. 그 의지를 발판 삼아 진주알 꿰기에 의미를 찾고 스스로의 믿음만 있다면 삶이라는 진주 목걸이는 꽤 그럴 듯 해 보일 것이다.2주 전까지만 해도 나는 급격하게 변화는 환경 탓에 혼란스러웠고, 현재까지 삶의 어떤 부분에서 성공했고 실패했느냐의 초점에 맞추어 오랜 고민을 했다. 이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삶은 계속되었고 빠른 흐름에 맞추어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X-파트에 가두어 더욱 나약해지기만 했다. 다행히 이 시점에서 습득한 ‘진주알 꿰기’ 기술은 X-파트를 마주하는 데에 진취적인 태도를 지니게끔 도와주고 있다.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아가기 위해선, 외면했던 과거의 나 자신과 화해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 했다. 숨기고 싶은 과거의 나는 그림자 속에 잠겨 있다. 거의 대부분 수치스러운 기억이거나 타인은 물론 나 스스로에게도 숨기고 싶은 과거의 기억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내가 저 그림자를 꺼낼 수 있을까? 생각하다보면 다시 뒷걸음치게 된다. 스터츠 박사는 그림자는 결국 ‘나’이기에 그때의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과거의 수치가 현재까지 이어져 스스로 파괴적인 성향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스터츠 박사 또한 외면하고 싶은 나 자신과의 화해가 어렵다. 그 또한 어린 스터츠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X-파트가 있었고 그 속에선 그저 힘없이 나약한 인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스터츠 박사 또한 이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취약성을 더 세밀하게 마주한다. 그는 취약성을 마주하며 마치 기분이 하늘을 나는 것만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하며 느끼는 감정을 쉽게 가늠할 수 없지만 내가 발견한 건, 그는 그림자를 드러내어 인정하였다는 것이고 거듭 진주 목걸이를 꿰어가며 고통을 극복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 찰나의 장면에 희망이 있었다. 그 희망을 믿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용기가 생겼고 동시에 삶의 방향이 묵직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2023-11-28

Long live the King

그는 자신의 직감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잃어버린 직감을 다시 되찾을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정상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 같다고, 다른 선수들이 자신을 앞질러 가기 시작했다는 세간의 평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16년 ‘플레이어 트리뷴’에 기고한 에세이에서, 그는 자신이 가진 부담감에 대해 토로했다. 그의 이름은 이상혁, 본명보다는 페이커라는 닉네임으로 더 유명한 리그 오브 레전드의 프로게이머이다.사실 나에게 페이커는 동시대의 스타는 아니다. 삼십대 중반의 아저씨에게 이상혁은 왠지 다음 세대의 스타 같다는 느낌이다. 내가 한창 리그 오브 레전드를 보던 2013년 무렵, 페이커는 갓 데뷔한 신인이었다. 다만 좀 남다른 신인. 데뷔 첫 해에 리그와 롤드컵을 모두 재패하고 리그 MVP를 석권한 천재 신인의 등장. 하지만 페이커의 등장이 나에게 썩 달갑지만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의 등장은 세대교체의 순간과도 같았고, 이 게임의 판도는 완전히 바뀔 거라는 선언과도 같았으니까. 실제로 페이커의 등장 이후 평균 데뷔 연령이 갈수록 낮아지기 시작했고 프로게이머들의 평균 연령 역시 급속도로 낮아지기 시작했다는 통계를 보자면 그 느낌이 마냥 느낌뿐이었던 건 아닌 것 같다.이후로 나에게 페이커는 단지 어린 나이에 전성기를 맞이한 프로게이머에 불과했다. 내가 좋아했던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이십 대 중반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정말 달랐다. 평균 연령이 극도로 낮아진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프로 씬에서 이제 그는 고령에 속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세계 최고의 선수로 손꼽히며 SK T1이라는 강팀의 주장 겸 파트 오너로 활동하고 있다. 이제 그는 세계 최초의 첫 30대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를 바라보고 있다.이쯤에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가 더 이상 평범한 선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명실상부한, 리그 오브 레전드를 비롯한 모든 E스포츠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다. 진정한 프랜차이즈 스타는 종목에 국한되지도, 자신에 대한 호불호에도 국한되지 않는다. 마치 조던이 시카고 불스의 프렌차이즈 스타이면서 NBA를 대표하고, 궁극적으로는 농구라는 종목 자체를 대표하는 스타였던 것처럼, 그리고 그걸 넘어 모든 사람에게 영감을 전해준 사람이었던 것처럼.내가 그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자신의 말을 증명하고자 항상 노력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의 선수 생활이 항상 탄탄대로였던 건 아니다. 매년 그는 슬럼프 설에 시달려야 했고, 이제는 퇴물이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으며, 모든 선수가 그를 노리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가 항상 승리했던 건 아니다. 그는 때때로 패배했고, 눈물을 흘려야만 했으며, 때로는 길을 잃기도 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다시 시작했다. 자신의 직감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순간에도, 정상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던 순간에도, 다른 선수들이 자신을 앞질러 가고 있다는 평가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했다. 부담감에 시달리고 자신을 향한 부정적 평가와 의견 속에서도 그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매순간 노력할 뿐이다. 그렇기에 2016년에 그가 쓴 기고문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여전히 최선을 다하고 있다.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건 그가 단지 천재 선수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진짜 이유는 그가 여전히 최선을 다한다는 것, 우리와 똑같은 부담감과 고뇌 속에서도 최선의 선택을 하고자 번민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컴퓨터 게임에 국한된 스타가 아니다. 그는 세대를 대표하고, 시대를 대표하고, 어쩌면 지금 모든 시련에 빠진 모든 사람들조차 대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메시지이다. 우리를 둘러싼 부정적인 메시지에 결코 휘둘리지 말라고, 너는 너에게 주어진 시련을 이겨낼 수 있다고, 지금의 패배가 너를 규정짓는 게 결코 아니라고.잠시 후면 그의 통산 여섯 번째 롤드컵 결승 경기가 펼쳐진다. 아마 이 글이 게재될 무렵에는 우리 모두 결과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가 패배하더라도 혹은 승리하더라도 이것은 결코 그의 마지막이 아니니까. 그는 이미 살아있는 전설이고, 그의 행보는 계속될 것이다. Long live the king. 언제까지고 그의 삶을 응원한다.

2023-11-21

자신에게 안녕을 고할 때

요즘 아버지는 자주 마지막에 관해 말한다. 멀게만 느껴졌던 퇴직이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반평생 몸담았던 교직을 떠나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오랜 시간동안 온 힘을 다해 일궈왔던 세계에 안녕을 고하는 마음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나에게는 헤쳐 나가야 할 것들이 많다.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끼기보단 주변부를 두리번거리고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손에 쥔 것이 없기에 놓을 것도 없다. 나는 시작을, 아버지는 끝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아버지는 후련해 보이기도 아쉬워 보이기도 한다. 어떤 면에선 떠나는 것을 은근히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는 동안 최선을 다해 일했고 매시간 후회 없이 보냈다는 아버지. 그렇기에 일터를 벗어나는 것이 섭섭하지만 귀하고 기쁘다고 했다. 그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미래의 나 역시 그와 같은 마음으로 나의 세계에 안녕을 고할 수 있을까?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면서 나는 나름대로의 답을 찾았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를 번복하고 내놓은 마지막 작품으로 개봉 전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마케팅을 하지 않는 마케팅으로 관객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했다. 영화 개봉 이후에 평이 극명하게 갈리는 것도 꽤 흥미롭다. 은퇴작이라는 표제를 내어놓은 만큼 자기의 세계관을 정리하는 태도에 감명 받기도 하고, 이전 작품들만큼 난해하고 매력적이지 않다든가 전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영화라는 평도 있다.미야자키 하야오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나는 이번 작품을 무척이나 애틋하게 감상했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듯 아쉬운 점은 분명 있었지만, 이제 정말 그를 보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마지막을 준비하고 정리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전쟁 중인 일본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느리지만 분명하게 전개된다.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마히토는 아버지와 함께 도쿄를 떠나 어머니의 고향으로 오게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여동생과 재혼을 하게 된 것이다. 현실이 탐탁치 않은 마히토는 정체불명의 왜가리 한 마리를 만나고, 탑에 관한 신비로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던 중 사라진 새어머니를 찾아 탑으로 향하게 된 마히토는 새로운 세계에서 일련의 놀라운 사건을 겪는다.작품에서는 전반적으로 죽음에 관한 기조가 흐른다. 어머니의 죽음을 보여주는 도입부터 주인공인 마히토가 향하는 낯선 세계 역시 시공간이 완전히 뒤엉킨, 죽음 너머의 세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전작들에서 보여줬던 죽음의 이미지는 조금 더 거시적으로 느껴졌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개인의 실존적인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것은 마히토가 빠져나온 탑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과도 연결된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그 세계로 갈 수 없다는 전언과도 같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서서히 잊어갈 것이라는 왜가리의 말 역시 의미심장하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어떤 세계가 닫히면 또 다른 세계는 열리게 되어 있다. 탑의 이야기는 끝났고 마히토는 다시 도쿄로 돌아가게 된다. 앞으로 소년이 만나게 될 세계는 결코 이상적이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는 계속될 것이며 도처에 악의의 흔적이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마히토에겐 그 모든 것을 극복해나갈 힘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친구를 사귀는 일이라는, 소년의 외침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늘 ‘함께 있음’을 생각하게 했다. 우리는 모두 이 세계를 구성하는 구성원이며 그렇기에 모두는 특별하고 소중하다. 동시에 내 옆에 있는 누군가도 역시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다. 서로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이것은 자신의 마지막이 누군가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 마지막이 있기에 시작도 있다. 이 모든 것은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나의 아버지는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청년 시절 소진하지 못한 열망의 불씨가 조금씩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일터를 떠나는 일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아버지처럼, 또 마히토처럼 언젠간 나 역시 나의 세계에 마침표를 찍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나 역시 스스로가 어떻게 살았고 또 어떻게 마무리를 할 것인지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2023-11-21

한 번 더 질풍 같은 용기를, 싱어게인!

JTBC 예능 프로그램 ‘싱어게인 3’의 인기가 뜨겁다. 과거에 활동을 했지만 무대에서 멀어져 잊혀진 가수들,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의 주제가를 불러 목소리는 익숙한데 이름과 얼굴은 알려지지 않은 이른바 ‘얼굴 없는 가수’들, 그리고 대중의 주목과 관심이 없는 언더그라운드에서 묵묵히 자기 음악을 해온 무명 뮤지션들이 싱 어게인(sing again), 다시 노래 부를 기회를 얻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신인을 발굴하기 위한 게 아니라 재기를 위한 무대라는 점에서 일종의 패자부활전인 셈이다.화제가 된 참가자들이 있다. 우선 1회에 출연한 참가번호 5번 가수다.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깊고 묵직한 허스키 음색으로 주목을 끌더니 전설적인 블루스 아티스트 B.B.킹을 연상시키는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블루지 기타 연주로 심사위원들을 사로잡았다. 최백호의 ‘부산에 가면’을 자신만의 색채로 완벽하게 소화한 그는 경연 최초 ‘올 어게인’(모든 심사위원의 합격표)을 받으며 2라운드로 진출했다.그의 정체는 실력파 뮤지션 김마스타다. 홍대를 중심으로, 또 전국을 돌며 노래를 부르는 방랑가객이다. 무대에서 보여준 뛰어난 음악성, 가을에 어울리는 짙은 음색도 여운을 남겼지만 무대 전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은 큰 울림을 줬다.“다들 요즘 음악을 너무 목숨을 걸고 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목숨 걸고 안 합니다. 인생을 걸고 하는 거지. 목숨은 하나지만 인생은 기니까.”꿈을 위해, 성공을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하다 실패했을 때, 다시 도전할 의지를 잃은 채 꿈에서 멀어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속적 성공을 못 이루면 인생이 다 끝난 것처럼 절망하는 이들 또한 많다. 그런 세태 가운데 인생을 걸고 온전히 노래 한 곡을 부르는 게 최종 목표라는 김마스타의 말은 아름다운 잠언, “speaking words of wisdom”(비틀즈, ‘Let it be’)으로 들린다.며칠 전 방영된 3회에서는 2030세대의 애국가나 마찬가지인 만화 주제가를 부른 가수가 등장했다. 참가번호 74호. 15년 만에 다시 무대에 서는 것이라고 했다. 몹시 긴장한 그는 호흡도 제대로 못하고 몸을 떨었지만 전주와 함께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 대한민국 전체를 전율시켰다. 그가 부른 노래는 바로 응원가로 익숙한 ‘질풍가도’. 특히 2030세대는 청소년기와 사회초년생 시절 이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면서 용기와 위로를 얻었다.“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거친 파도에도 굴하지 않게. 드넓은 대지에 다시 새길 희망을 안고 달려갈 거야 너에게. 그래 이런 내 모습 게을러 보이고 우습게도 보일 거야. 하지만 내게 주어진 무거운 운명에 나는 다시 태어나 싸울 거야. 세상에 도전하는 게 외로울지라도 함께해 줄 우정을 믿고 있어.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15년 만에 다시 잡은 마이크임에도 엄청난 성량과 단단한 고음으로 완벽한 무대를 선보였다. 결과는 올 어게인. 심사위원 선미, 코드쿤스트, 규현, 사회자 이승기 등 ‘질풍가도’와 함께 성장한 세대는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유튜브에 공개된 방송 영상은 하루만에 370만 조회수가 넘고, 댓글 1만개가 달렸다. 하나 같이 “신나고 힘이 나는 노래인데 왜 눈물이 나는 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누군가에게는 자살하려는 마음을 되돌려준 노래, 또 누군가에게는 실패를 극복하게 해준 노래, 힘겨운 시절에 많은 이들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준 노래가 다시 울려 퍼졌다. 코드쿤스트는 “이 노래로 저희에게 용기를 주셨으니, 이젠 용기를 받으실 차례”라며 74호 가수를 격려했다.유정석. 애니메이션 주제가 외에 별다른 활동을 못한 무명가수다. 만화 방영 후 7년이 지나 노래가 인기를 끌면서 유명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식도암에 걸린 누나를 간병하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누나도 세상을 떠나고, 그 자신도 루게릭병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는 중 전신마비와 우울증을 앓다 겨우 회복했다. 그 슬프고 아픈 시절을 지나 15년 만에 “질풍 같은 용기”를 우리에게 외친 그의 무대야말로 ‘싱 어게인’이다. 최종 우승자를 가릴 때까지 경연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 희망의 노래를 다시 들려준 것만으로도 이 프로그램은 이미 ‘올해의 방송’이다. 오랜 어둠을 딛고 일어나 다시 노래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 질풍 같은 용기 있기를!

2023-11-14

삶의 틈 속에서

수요일 오후 반차를 쓰고 집 근처 카페에 앉아있다. 한참 마무리 지어야 하는 일이 많은 수요일 오후에 왜 한가롭게 이곳에 앉아 있느냐 하면, 오늘따라 유독 하루를 버텨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요즘 들어선 잠을 도통 잘 못자고 있다. 어떤 꿈을 꾸고 일어나는 것도 같은데 일어나면 그 꿈의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기분 나쁜 찝찝함이 남아 있을 뿐. 오후 반차를 쓴 김에 밀린 잠을 자볼까 싶었지만 그러기엔 날씨가 너무 좋기도 하고 햇빛을 좀 쐬어야 할 것도 같아 집 근처 카페에 와 있다. 이 카페는 5년 전부터 자주 찾는 곳으로, 통유리창이 있는 고층 카페에 커피도 맛있어서 꽤 좋아하는 곳이다.수많은 버스,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짧은 주기로 바뀌는 신호등과 흔들리는 나무, 형형색색 커다란 간판들을 내려다보며 나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얼마나 적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북적이는 대도시의 거리를 동경과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다가도 어느 날은 내가 얼마나 작은 인간인지 지나치게 화려하게 비춰지는 탓에 씁쓸해지기도 했었다. 과거의 일들을 생각하다보니 일순간 유리창에 스무 살 중반의 내 모습이 어른거린다. 일하느라 더러워진 흰티를 두터운 외투 속에 꽁꽁 숨겨 놓고 시집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 줄 씩 읽어 내려갔던 오기의 순간이.그리곤 지금 다시 멍하니 내가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앉아있다는 걸 깨닫고 있다. 벌써 이곳에 자리 잡은 지 5년이 흘러가고 있었고, 20대 중반이던 나는 이제 서른을 앞두고 있다. 서른을 앞둔 지금, 나는 조금 더 성숙해지고 어른스러워졌을까? 생각하다보면 잘 모르겠다. 그저 기차 탑승 시간을 자꾸만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반복적으로 나의 어떤 부분이 변화했는지, 또 어떤 게 변하지 않은 것인지 거듭 생각하며 초조해지고 있는 것이다.지금 카페 테이블 위엔 최지은 시인의 시집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가 놓여 있다. 빛 속에 잠긴 활자들은 슬프고 아름답다. 내가 감히 흉내 낼 수도 없고 들어갈 수 없는 뜨겁고 후덥지근한 세계. 몇 편 읽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딴청을 피우고 만다.어린 날 내가 꿈꾸었던 글쓰기의 열망이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당혹스럽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바뀐 건 어떠한 희열도 바람도 없이 지내고 있다는 것, 두 번째로는 무거운 뒷목과 굽은 등, 자꾸만 앞으로 말리는 어깨 등 못난 몸의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최근 5년 전 친하게 지냈던 사람에게 오랜만에 안부를 물었다. 추억을 이야기하는 동안은 잠시 반갑고 기쁘기도 했지만 결국 우리 사이의 큰 공백이 생기며 아주 많은 부분이 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사이의 변하지 않은 신뢰나 배려, 특유의 말버릇 같은 것에 대해 찾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고, 결국 머쓱하게 웃으며 시간이 참 빠르게 흐른 다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다시금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이곳도 알게 모르게 많은 곳이 바뀌어 가고 있음을 발견했다. 지인이 일하던 휴대폰 매장은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으로 바뀌었고, 눈물이 많던 친구와 맥주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 했던 호프집은 화려한 헬스장이 들어섰다. 조금씩 달라지는 이 풍경이 처음은 흥미롭다가도 과거가 지워지는 것만 같아 쓸쓸해진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앞자리가 바뀌는 나이 때문일까. 오늘은 왠지 잠이 오지 않아 벽에 기대어 멍하니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내게 다가와 잠의 안부를 물어봐주는 사람이 있다. 근래 가장 크게 변화한 건 이렇게 다정하게 물어봐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고, 덕분에 성급한 불안감을 아무렇지 않게 잠잠히 눌러 볼 수 있다는 것이다.별다른 대화 없이 그가 좋아한다는 영화 한 편을 튼다. ‘우리도 사랑일까’의 마지막 장면엔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 “Life has a gap in it, it just does. You don‘t go crazy trying to fill it.”(인생에는 빈틈이 있기 마련이야. 그걸 미친 사람처럼 일일이 다 메꿔가면서 살순 없어.) 삶의 권태를 느끼는 주인공 마고에게 언니 제럴딘은 삶은 본질적으로 결핍을 느끼기 마련이고, 허망하고 부족한 부분을 느끼면서도 감내하고 채워가는 게 인생이라는 걸 마고에게 알려 준다.지금 잠시 꿈과 이상, 그리고 열정을 잃어버렸다 한들 인생엔 틈이 있기 마련이니 더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심란해지지 않아도 된다. 삶은 완벽하지 않고 이 또한 작은 해프닝이 될 테니까.

2023-11-14

어른의 아지트, 순대국집

나의 취미는 요리다. 그렇다고 집에서 빵을 굽거나 파스타를 하는 건 아니다. 술안주를 직접 만들어먹는 게 좋달까. 코로나 시절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기 어렵다보니 집에서 혼술을 하는 취미가 생겼는데, 매번 시켜먹기가 부담스러워 간단한 요리를 해먹다 보니 생긴 취미다. 처음에는 된장찌개나 김치찌개 같은 간단한 찌개 종류부터 해먹기 시작했는데, 요즘엔 유튜브에 편리한 레시피가 많아 이것저것 해먹어보는 중이다.하지만 그런 나도 집에서 도저히 해먹기를 포기한 술안주(?)가 두 개 있는데, 감자탕과 순대국이다. 둘 다 30대 남자의 소울푸드 같은 요리인데, 집에서 하자니 손이 너무 많이 가기도 하고 냄새가 온 집안에 남다보니 집에서 해 먹는 건 아예 포기했다. 하지만 소주를 좋아하는 나에게 둘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음식인지라, 감자탕이나 순대국에 혼술이 땡기는 날이면 집 근처의 가게에서 포장을 해 먹곤 한다.그러다보니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사실 순대국밥은 집에서 먹으면 맛이 없다. 감자탕은 그래도 포장을 해서 먹어도 우거지며 고기며 참 맛있게 먹고 밥까지 뚝딱 볶아먹는데(배가 아무리 불러도 볶음밥은 못 참는다. 소주 안주로 볶음밥을 어떻게 참아) 이상하게 순대국은 집에서 먹으려면 손이 안 간다. 분명 가게에서 먹을 때랑 똑같이 해먹어도 도저히 그 맛이 나질 않는다. 희한한 일이다.사실 나에게는 좋은 순대국 집을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맛이야 당연한 것이겠지만, 술을 마시고 할 때는 맛보다 중요한 요소가 몇 가지가 있다.하나는 냄새. 자고로 순대국 집은 돼지고기와 부속고기를 오래 삶은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색. 벽지며 천장에 살짝 누런 느낌이 있어야 한다. 세 번째로 주인이 너무 친절하지 않아야 한다. 가끔 말을 걸고 필요한 거 있냐고 묻거나 반찬을 아무 말 없이 리필해주는 경우들이 있는데 나는 그걸 좋아하지 않는다. 친절이라면 친절일 테지만, 이상하게 부담스럽단 말이지. 게다가 반찬을 남기는 걸 싫어하는 나로썬, 그런 친절은 정말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어쩌면 순대국의 맛이라는 건 단지 음식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그런 부수적인 요소를 통해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적당히 허름해서 격식 차릴 필요 없는 그 느낌 속에서 평소엔 잘 보지도 않는 야구를 보며 순대국을 기다릴 때의 그 여유로움. 시게 익은 김치와 깍두기를 한 입씩 먹어보고, 양파와 고추를 쌈장에 찍어 먹으면서 소주를 한 잔 따라 미리 마실 때의 그 알싸한 느낌. 펄펄 끓는 뚝배기에 담긴 순대국에 숟가락을 미리 담궈두고, 정구지와 새우젓, 다대기와 들깨가루, 모자란 간은 소금 살짝 넣고 고추기름과 마늘 다진 게 있는 집에선 그것들을 살짝 넣고, 숟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재료들이 잘 섞이게 만들 때의 그 기분. 숟가락을 꺼내 입으로 슥 해주고, 그 맛에 소주를 한 잔 비우곤 국물을 마실 때의 그 따끈한 맛이란….그렇게 소주를 한 잔 한 잔 비우고 있으면 시간이 느려지는 기분이 든다. 세상 일 따위 어찌되든 상관없을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았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기분도 든다. 어쩌면 내가 순대국에 소주를 좋아하는 건 맛보다는 그런 일련의 느낌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 오늘 열심히 살았다, 이제 술도 한 잔 했으니까 오늘 하루는 그냥 쉬자하고, 뇌에서부터 발끝까지 늘어지는 그 기분이 너무나도 좋다. 그런 나에게 순대국집이란 지치고 힘들 때, 구석에 몰린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찾는 나만의 작은 아지트인 셈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작년 이사를 했을 때에도 나는 제일 먼저 순대국 집부터 찾아다녔다. 맛과 적당한 친절과 적당한 허름함을 갖춘, 혼자를 위로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 숨어들 수 있는 아지트 같은 곳. 신기하게 그렇게 마음에 드는 순대국 집을 하나 찾고 나면, 비로소 새로운 동네와 친해진 기분이 든다. 이곳에서도 나는 잘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도 들고. 여기서도 이런 저런 일이 많겠지만 그럴 때마다 여기 와서 순대국에 소주 한 병 뚝딱하면 또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오늘도 순대국 집에는 수많은 혼자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다.문득 그 모습들이 살아고자 힘껏 힘을 내는 모습들 같아 측은한 사랑스러움을 느낀다. 어쩌면 우리에겐 그런 장소가 하나쯤 필요한 것 아닐까?누구도 자신을 탓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따끈한 국물과 차가운 소주에 온 몸을 느슨하게 풀어줄 시간. 그래서 나는 우울할 때 순대국을 먹으러 간다. 당신에게도 그런 시간과 장소가 하나쯤 있기를 바란다.

2023-11-07

그림 밖에 있는 사람

얼마 전, 동생이 참여한 회화전이 벨기에에서 열렸다. 여러모로 기쁜 일이니만큼 나도 동행하여 행사에 참여하기로 했다. 오프닝이 끝나면 프랑스와 스페인을 여행할 계획도 세웠다. 나에게 있어 여행이란 모름지기 먹고 마시고 아무렇게나 늘어지는 시간에 가깝지만, 이번엔 달랐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고 싶은 것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었다.다른 것보다 역시 가장 기대되는 건 미술관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명작이라고 불리는 작품을 모조리 섭렵해 주겠다는 마음으로 호기롭게 배낭을 짊어졌다. 다리가 퉁퉁 붓고 온몸이 지끈거려도 다음 날 아침이면 어떠한 미적거림도 없이 벌떡 일어날 수 있었다. 오늘은 또 어떤 것들을 마주할까, 어떤 작품이 나를 놀라게 할까, 설레고 기대되는 마음 덕분이었다.참 신기하다.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작품이 그 작가 자체를 명징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무엇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지 또 무엇을 감추고자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살아가는지. 작가는 작품 내부에서 어떤 말도 하지 않지만, 사실 모든 것을 발화하고 있다. 그 당연하고도 중요한 사실을 이번 기회를 통해 또다시 느꼈다.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박물관과 미술관을 들락거리는 내내 우리는 가벼운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책에서만 봤던 작품들이 바로 앞에 놓여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었다. 그리스 조각부터 중세 회화, 르네상스를 거쳐 근현대 미술사를 빛낸 작가들의 작품을 찬찬히 살폈다. 그러다가 문득 발길을 멈췄다. 작품을 한참을 보고, 또 들여다봐도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빈센트 반 고흐,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앞에서였다.고흐의 그림을 실제로 본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의 작품에 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굉장한 감흥을 받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교과서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매체에 이르기까지 고흐의 작품을 인용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고흐의 작품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이상했다. 넘치는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작품이 슬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아름다워서, 그림 밖에 서 있는 사람의 마음이 자꾸만 그려졌기 때문이었다.‘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은 고흐가 정신병동에 입원하기 일 년 전에 그린 작품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고흐는 미래에 관한 낙관을 꿈꿨다. 부서지는 햇빛이 아름다운 프로방스 지역으로 이사를 했던 것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실패만 거듭하던 예술가에게 희망적 예감은 얼마나 소중한가. 여전히 호기롭게 캔버스 앞에 서서 붓을 쥘 수 있었던 건, 캄캄한 어둠 속 저 멀리 보이는 한 줄기 빛의 존재 덕분이었으리라. 그림의 시간적 배경은 밤이다. 강변으로 늘어진 집을 밝히는 불빛이 있다. 하늘을 수놓는 별빛도 있다. 강의 표면에 빛이 눅진하게 번져간다. 멀리서 보면 강과 하늘이, 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과 하늘의 별빛이 모두 하나인 것만 같다.고흐의 밤은 푸르다. 푸른 밤은 차갑다. 그리고 외롭다. 푸른 밤을 밝히는 무수한 빛이 있다. 그렇다고 쓸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극대화된다. 반짝이고 일렁이는 빛을 바라보는 관찰자는 밖에 있기 때문이다. 빛의 내부로 들어가지 못한 채로 차갑고 외로운 공간 속에 서 있다. 그저 물감을 덧칠하고 또 덧칠하면서. 어둠이 있기에 빛은 더욱 강렬하게 빛나고, 슬픔이 있기에 강가의 풍경은 눈물겹게 아름답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의 오랜 후원자이자 동생인 테오에게 쓴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별들은 알 수 없는 매혹으로 빛나고 있지만 저 밝음 속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숨기고 있는 건지.” 이렇듯 그는 빛을 고통이라고 말한다. 밝고 매혹적이지만 그만큼 아프고 괴로운 것이라 생각한다. “고통스러운 것들은 저마다 빛을 뿜고 있네. 심장처럼 파닥거리는 별빛.” 고흐에게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야말로 그가 해석한 빛에 가까울 것이다. 아름다우나 고통스러운 것. 고통스럽기에 아름다운 것. 마침내 그는 자신을 끈덕지게 따라다니는 하나의 질문을 꺼내놓는다. “내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거기에는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흐도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붓을 쥘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서 이렇게 덧붙인다. “나의 영혼이 물감처럼 하늘로 번져갈 수 있을까?”텅 빈 캔버스를 바라보는 한 사람의 마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낙관과 무의미로 끝날 수 있다는 불안. 어쩌면 그건 삶과도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는 작가들의 작품을 본다. 그림 밖에 서서 그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캔버스가 채워지면서 어떤 이야기가 탄생하게 될지 말이다.

2023-11-07

가을 장미와 음악 생각

가을은 음악을 깊은 사색으로 바꾸는 계절이다. 숨을 들이마시면 차가운 공기가 가슴 속에 텅 빈 공명을 만드는 계절이다.햇빛은 녹슬고, 바람은 속을 시리게 한다. 불현듯 쓸쓸해지거나 쉽게 회상에 잠기는 것을 두고 흔히 가을을 탄다고 한다. 날씨와 풍경의 변화 등으로 신체의 리듬이 변하면서 생기는 일종의 증후군인데, 감성이 풍부해지고, 골똘히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아지며, 외로움이나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그렇다면 이 텅 빈 마음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가을을 타는 이에게 음악만큼 좋은 약은 없다.가을엔 주로 사이먼 앤 가펑클을 듣는다. 폴 사이먼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선율과 노랫말이 아트 가펑클의 솜사탕 같은 하이 테너 보컬로 울려 퍼질 때, 귀에도 단풍이 든다. 아침엔 ‘Wednesday morning 3AM’이나 영화 ‘졸업’에서 밴 크로포드가 연기한 로빈슨 여사의 테마곡 ‘Mrs. Robinson’을 듣는다. 무명 시절, 폴 사이먼의 연인이었다가 그가 유명해지자 그 명성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다며 사이먼을 떠난 캐시라는 여인을 노래한 ‘Kathy’s song’, 또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을 그린 ‘April come she will’을 오후에 들으면 눈물이 맺힌다.이 계절 노을이 지는 안양천변을 걸을 때는 클라라 주미 강이 연주한 에른스트의 ‘여름의 마지막 장미’가 좋다. 타오르고 퍼붓고 맹렬하던 것들이 쇠잔해지는 풍경은 마음을 시리게 한다. 바이올린 선율에 붉은 넝쿨로 열리는 여름의 마지막 장미를 떠올리면서, 내가 가진 음악의 기억은 엘튼 존으로 비약한다.장미는 여름꽃이지만 가을에 피는 경우도 있다. 가을 장미는 여름 장미처럼 화려하지 않다. 낙화를 앞둔 쓸쓸함에 꽃잎의 빛깔은 어둡고, 차가운 서리를 머금으면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인다.엘튼 존의 ‘Candle in the wind’는 여름 장미처럼 화려하게 피었다가 가을 장미처럼 쓸쓸하게 진 두 여인에게 바치는 노래다. 한 사람은 노마진 베이커, 즉 마릴린 먼로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다이애나 스펜서, 바로 다이애나 왕세자비다.이 곡은 원래 마릴린 먼로를 애도하는 곡인데, 1997년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장례식 때 다이애나와 절친했던 엘튼 존이 자신의 원곡을 개사해서 불렀다. 원곡의 첫 소절인 Goodbye Norma Jean(노마진 베이커는 마릴린 먼로의 본명)을 Goodbye England’s Rose로 바꿔 부른 이 곡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싱글로 기록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당신은 바람 속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살았죠. 비가 내리면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지 모르면서. 당신을 알았더라면 좋았겠지만 난 아이에 불과했죠. 당신의 초는 오래전에 다 타버렸고 당신의 전설도 꺼져버렸죠”라는 원곡의 후렴구는 “당신은 바람 속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살았죠. 해가 져도 사그라지지 않고 비가 내려도 꺼지지 않는 당신의 발자취는 영국의 가장 푸른 언덕을 따라 항상 이곳에 깃들죠. 당신의 초는 오래전에 다 타버렸지만 당신의 전설은 영원할 거예요”로 개사되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엘튼 존은 공연에서 종종 원곡을 부르긴 하지만, 1997년 버전의 ‘Candle in the wind’는 부르지 않는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추모하는 곡을 상업적인 자리에서 부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가 이 곡을 라이브로 부른 건 다이애나의 장례식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마릴린 먼로와 다이애나 왕세자비 둘 다 서른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겉으로는 화려한 장미처럼 보인 삶이었지만 사실 바람 속의 촛불 같은 생이었다. 대중에 의해 섹스심벌 마릴린 먼로로 살아야 했던 노마진 베이커, 영국 왕실의 정치적 목적과 대외 선전의 도구로 살아야 했던 다이애나 스펜서. 이 둘의 삶과 죽음은 전혀 다르면서도 꼭 닮아 있다. 노마진 베이커는 20세기 할리우드의 아이콘으로, 다이애나 스펜서는 전 세계의 헐벗고 고통받는 자들에게 사랑을 전해준 봉사와 희생의 상징으로 인류에 기억되고 있다. 둘 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붉은 장미로 세상에 남은 것이다.가을은 음악을 깊은 사색으로 바꾸는 계절이다. 세피아톤으로 펼쳐진 가을 햇살 아래,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단풍 그늘 밑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듣는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삶이란 얼마나 팍팍하고 지루한 것인가.

2023-10-31

조용하고 열렬한 싸움

나를 빛내게 하는 것은 타인의 부러워하는 시선이 아니다. /언스플래쉬 지난한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왔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니 슬슬 새로운 운동을 도전해볼까 싶어 주말마다 배드민턴장에 나가고 있다. 배드민턴을 많이 쳐본 적이 없어 막상 코트 위에 서니 다소 자신감이 떨어졌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배드민턴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됐다.배드민턴을 치는 동안은 잡생각을 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 날쌔게 날아오는 공을 끈질기게 바라보다 정확한 타이밍에 공을 쳐내야만 상대의 공에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엔 잠을 깨우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 것인지 아니면 든든하게 배를 채워줄 따뜻한 라떼를 마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불현 듯 떠올라도 잽싸게 저 멀리 날려 보내야 한다. 잡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동안 날아오는 공은 어느덧 바닥에 구르고 있으니 말이다.상대에게 공을 보내는 흐름 또한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자칫하다 공을 치기 쉽게 주면 상대는 그 틈을 타서 강한 스매싱과 스트로크를 사용하여 거센 공격을 퍼붓는다. 조금이라도 집중을 놓으면 이미 승리의 흐름은 상대의 손에 쥐어져선 상대가 예측하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다 게임이 끝나고 마는 것이다.선수들의 시합 영상을 보면 숨 쉬는 법을 잊을 정도로 몰입된다. 수비를 하는 동안은 춤처럼 유연한 움직임을 보이다가도 공격할 타이밍이 되면 다이빙하듯 등을 구부리며 잽싸게 공을 보내기 위해 돌진한다. 그렇게 공이 오가는 동안은 마치 둘이 하나가 되어 추는 쌍무(雙舞)가 펼쳐지는 무대를 보는 듯한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배드민턴은 몸을 던져 수비를 함과 동시에 공격의 방향까지 생각해 내어야 한다는 것도 참 매력적이다. 방어와 공격이 빠르게 오가는 동안은 땅과 부딪히는 운동화의 마찰 소리와 라켓으로 공을 칠 때의 타구음 소리만 날 뿐. 코트라는 주어진 반경 안에서 불필요한 소음 없이 이어지는 조용하면서도 열렬한 싸움이란 점이 더욱 마음에 든다.최근 여러 모임 자리를 가게 되면서 불필요한 상황에 놓여 난처했던 적이 있었다. 본인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또는 얼마나 유능한 사람인지 증명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인다거나, 필요에 따라 타인을 낮추어 스스로 돋보이게 만드는 거친 언행을 보며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그런 부담스러운 대화에 비하면 코트 속 불필요한 소음이 제거된 채 열렬히 경기에 임하는 배드민턴 플레이는 간단하고 명료하다. 배드민턴 경기에서 욕심은 과한 공격으로 이어지기 쉬우며 공이 코트 밖으로 벗어나는 범실을 저지를 확률이 높아진다. 이기고 싶단 욕망만으로 힘을 너무 많이 주거나 공격의 흐름만 생각하다보면 오히려 돌아오는 건 실패라는 결말뿐이라는 것이다.그러니 낮게 몸을 웅크리고 계속해서 움직이며 공이 어느 방향에서 날아오든 빠르게 칠 준비를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급하면 공을 빠르게 치게 되고 불필요한 생각에 빠져 들면 타이밍을 놓쳐 공을 쳐낼 수 없게 된다. 나의 실력과 장점을 잘 아는 것과 동시에 상대가 어떤 점에 강하면서 또 어떤 약점이 있는지 파악해야만 원하는 방향으로 게임의 흐름을 이끌 수 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잠이 들기 전엔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의 안세영 선수 경기 영상을 본다. 결승 전 경기도중 심한 무릎 부상이 크게 왔음에도 그녀는 기권하지 않고 오히려 경기를 리드한다. 자신의 소신과 기량을 펼쳐 오히려 상대를 위압하는 그녀의 모습에선 오늘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주었다. 오랜 기간 고통을 감내하고 스스로 개척해나갔을 노력의 과정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나를 빛내게 하는 것은 타인의 부러워하는 시선이 아니다. 타인이 가지지 못한 것을 미리 내가 쥐었다고 해서 어깨를 으쓱이는 것이 아닌, 그 사람만이 가진 특유의 정신력 그리고 고난을 대하는 집념과 기량에서부터 오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는다.일요일 오후, 점심에 다다를 때 쯤 라켓과 셔틀콕을 챙기고서 실외 배드민턴장으로 향한다. 저 하얀 코트 안에서 나는 얼마나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수많은 고난 사이에서 어떤 집념을 가지고 저 수많은 공을 쳐낼 것인지. 금요일 아침부터 든 생각을 일요일 오후가 다되어서야 황급히 마무리 지어 본다. 고귀한 기량은 불끈 쥔 두 주먹과 튼튼한 다리에서부터 나오는 것임을, 월요일을 조금 더 가뿐하게 맞이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 힘을 주어 스매싱해본다.

2023-10-31

생존 너머

좀비물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미국 드라마 ‘워킹 데드’는 의외로 사람에 대한 드라마다. 물론 좀비가 주인공일 수는 없으니(그들은 지성이 없고, 따라서 말을 할 수도 없다) 인간이 주인공인 건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실 여타의 좀비물과 달리 ‘워킹 데드’는 시즌의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의 흐름이 달라진다. 처음으로 이야기가 달라지는 건 ‘가버너’라는 적대적 인물이 등장할 때이다. 좀비들로부터 살아남고자 사투를 벌이고, 잃어버린 생존자를 수색하고, 궁극적으로는 안전지대를 찾아가는 것이 목표였던 1~2시즌과는 달리, 3~4시즌은 서로 다른 사람의 가치관이 충돌하며 빚어지는 에피소드가 중심에 놓인다.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유형은 시즌 4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종착역의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기차의 종착역에 안전지대를 구축하고, 생존자를 포섭하기 위해 “모든 이를 위한 안식처. 모든 이를 위한 공동체”라는 문구와 함께 자신들의 위치를 새긴 홍보물을 도시 곳곳에 부착하고 다닌다. ‘가버너’와의 싸움 이후로 살 곳을 잃어버린 주인공 일행은 홍보물에 새겨진 경로를 따라 종착역을 향해가지만, 그들이 도착한 종착역이라는 곳은 사람을 위한 안전지대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먹는 식인종들의 캠프였다.작중 짤막하게 스쳐지나가듯 설명되지만, 쉽게 말해 이들은 강도들에 의해 죽을 뻔한 사람들이었고, 그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그들처럼 변해버린 사람들이다. 타인의 생존물자를 약탈하고,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생명마저 빼앗는 강도들에게서 살아남으려 싸우던 사람들이 이제는 타인의 생명을 잡아먹는 식인종이 되어버렸다는 설정은 ‘워킹 데드’ 세계관의 잔혹함을 보여주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볼 것이다”라는 니체의 격언을 떠오르게 만든다.그렇기 때문인지 인간을 잡아먹으려는 좀비들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애쓰던 주인공 일행은 이들과 조우한 이후 완전히 변해버린다. 더는 타인을 믿을 수 없게 되고, 이후엔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을 생각마저 하는 주인공 일행의 모습은 좀비들이 창궐한 세계에 맞는 현실적인 모습이기에 더욱 비참하게 느껴진다. 이제 그들에게는 ‘생존’ 외에 어떠한 가치조차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그래서 시즌 종착역 주민들이 등장하는 시즌 5~6의 이야기는 유독 비참하고 슬프게 느껴진다. 생존에 매몰되어 서로 반목하고 타인을 위협하고, 때로는 자신의 일행을 통솔하기 위해 앞선 적대적 인물의 면모를 고스란히 반복하며 전체주의적인 태도마저 보여주는 주인공의 태도는 이제 더 이상 이 세계가 좀비의 창궐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시즌이 지속됨에 따라 이들은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낸다. 어디에도 그들을 위한 안전지대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안전지대를 구축하고 지키려는 노력을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거듭 인간과 사람의 사이를 오가며 갈등하고 고뇌하며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 고민한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생존이 최고의 가치가 된 사회에서, 사람은 타인에 대한 개념을 축소시킨다. 타인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제거해야 하는 경쟁자일 뿐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사람을 오직 경쟁자로 인식한다는 건 그 사회가 생존 외에 어떠한 가치도 더는 존속할 수 없게 된 위험 상황임을 의미한다. 생존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세계에서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일 수 없다.동물의 한 종으로서의 ‘인간’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경쟁 상태. 그건 ‘워킹 데드’의 한 에피소드가 그러했듯 문명이 아닌 야만의 세계에 불과하다. 한 사회가 어떤 수준에 위치하는가는 이처럼 타인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 증상적으로 나타난다. ‘워킹 데드’라는 드라마가 현실에서 더욱 씁쓸해지는 건 이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좀비가 없는 세계임에도 오직 타인을 경쟁의 대상으로밖에는 느끼지 않는 현실이 어쩌면 좀비들로 가득한 세계보다 더 무서운 세계인 것 같아서. 그런 세계에서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증오하는 인간들을 거듭 닮아간다. 살기 위해, 인간을 잡아먹는 좀비를 닮아가듯 식인을 하게 된 인간들처럼. 지금 우리는 어떤 형상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2023-10-24

유령을 믿을 때

동생이 물었다. 언니는 유령을 믿어? 재밌는 말이었다. ‘유령’이라는 실체 없는 존재보다 ‘믿음’이라는 행위가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유령을 믿든 그렇지 않든, 그게 중요한 문제일까? 동생은 중요하다고 했다. 뭔가를 믿는 순간, 많은 것이 달라질 거라고. 스산한 기분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유령은 자기 이야기를 할 때 찾아온다고 하던데. 뒷덜미가 차가워졌다. 가을을 맞아 한껏 서늘해진 바람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럴 때 생각나는 작품이 있다.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다.호프만은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작가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주중에 나는 법률가이며 일요일 낮에는 적어도 음악가이다. 그리고 저녁부터 아주 깊은 밤까지 나는 아주 괴상한 작가로 산다.”그의 말대로다. 호프만의 낮과 밤은 완전히 달랐다. 낮에는 유능한 법관으로서 현실적인 삶을 살았지만, 밤에는 광기에 사로잡힌 예술가로 지냈다. 반듯하고 공명정대했던 낮의 모습을 밤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단골 술집에서 폭음하고 내일 따윈 찾아오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그 어떤 작가보다 밤의 세계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모래 사나이’가 수록된 소설집의 제목 역시 ‘밤의 이야기’다.낮은 밝고 가시적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많은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밤은 어둡다. 많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충동적이고 불안하다. 낯선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다. 이렇듯 밤은 우리를 완전히 낯선 세계로 이끈다.호프만의 작품은 이러한 기이함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그를 환상 문학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환상 문학은 전통적인 형식의 동화와는 다르다. 환상 문학에서의 인물들은 모두 현실적인 일상생활을 한다. 그러면서 비현실적인 요소가 일상으로 과감하게 들어온다. 이러한 뒤엉킴을 통해 기이하고 이질적인 이야기가 펼쳐지게 된다.그의 대표작인 ‘모래 사나이’는 불길하면서 충격적이다. 주인공 나타나엘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유모에게 모래 사나이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모래 사나이는 “자러 가지 않으려는 아이들에게 와서 눈에 모래를 한 줌 뿌리”는 존재다. “눈알이 피투성이가 되어 튀어나오면 모래 사나이는 그 눈알을 자루에 넣어 자기 아이들에게 먹이려고 달나라로 돌아가”고, “그의 아이들은 둥지에서 사는데 올빼미처럼 끝이 구부러진 부리로 말 안 듣는 아이들의 눈을 쪼아 먹는”다. 어린 나타나엘은 모래 사나이를 목격한다. 기억 저변에 묻어두었던 모래 사나이는 그가 어른이 되어서 다시금 등장하게 된다.나타나엘은 괴로워한다. “무언가 끔찍한 것이 내 삶에 들어왔다”다는 것이다. 그런 나타나엘에게 찾아온 청우계 장수는 ‘눈’을 판다며 안경과 망원경을 내어놓는다. 그에게 구입한 망원경은 나타나엘의 눈을 홀린다. 그리하여 인형을 진정한 영혼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으로, 자신을 믿고 도와주는 연인은 생명 없는 나무 인형으로 보게 된다. 사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필요한 망원경은 오히려 그의 판단력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드는 장치로 작동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나타나엘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아름다운 눈!”이라고 소리친 채 난간 너머로 뛴다. 머리가 완전히 부서진 주인공과 모래 사나이로 대변되는 인물이 서로 겹치면서 소설은 끝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가 겪은 일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일까? 독자들로선 알 수 없다. 작품 내에서 현실세계와 환상세계가 경계 없이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는 건 없지만, 작가는 우리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발화하고 있다. 억눌린 무의식의 발현, 한 인간을 줄기차게 따라다니는 두려움, 우리가 실제라고 믿는 것을 정말 확신할 수 있는지를.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오만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꿈과 현실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며 세계를 지탱하고 있으니까. 작품의 주인공은 환상 때문에 현실이 무너지게 된다. 그러나 환상 없는 현실은 진짜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에겐 현실과 환상, 낮과 밤이 모두 필요하다.깊어져 가는 가을밤, 나는 유령을 믿는 사람들에 관해 생각한다. 으스스하지만 왠지 모르게 즐겁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긴 밤이 지루하지 않다.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유령을 믿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2023-10-24

반타블랙, 찰나의 푸른빛

인도 예술가인 애니쉬 카푸어의 ‘BLACK’은 검은색 원형 조각품이다.카푸어는 반타블랙(VANTA Black)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다. 반타블랙은 영국의 한 기업이 나노기술을 통해 개발한 새로운 색상 소재인데, 빛의 99.965퍼센트를 흡수할 수 있는 물질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어둠’이라 할 만한 순도 높은 암흑으로 만들어진 카푸어의 작품은 보는 이를 빨아들이는 기묘한 매력을 지녔다.작품 앞에 선 감상자는 분명 무언가를 보고 있지만 실제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블랙홀처럼, ‘BLACK’은 빛 뿐만 아니라 사람의 눈빛마저 모조리 흡수해버리는 절대적이면서 매혹적인 검은색이다.그런데 이 완벽에 가까운 검은색도 완벽은 아니어서, 다르게 파악될 0.035퍼센트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얼마 전 매일경제신문 문학담당기자이기도 한 김유태 시인과 술 마시는데, 그가 대뜸 서울국제갤러리 ‘애니쉬 카푸어展’에 다녀왔다며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BLACK’을 내게 보여줬다.“이 완벽한 검은색이 옆에서는 묘하게 청색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 몇 걸음 떨어져서 보면 회색빛으로 보이기도 하더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친구의 흥분한 모습을 즐거워 하면서, 나는 스마트폰 속 카푸어의 ‘BLACK’과 김 시인이 입은 올블랙 셔츠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검은색은 오직 어둠일까?‘, ’검은색은 끝일까?’, ‘검은색은 죽음일까?’얼마 전 전남 구례 섬진강으로 쏘가리 낚시 갔다가 늦은 밤까지 강변에 있었다. 원래도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물가인데 그날따라 구름이 달을 가려 그야말로 칠흑이었다. 어둠 속에서 선명해지는 것은 물소리와 몸을 뒤채는 강의 살내음 뿐. 그런데 아주 잠깐 구름의 두께가 야위는 순간 강 전체가 은은한 푸른빛이 되는 걸 보았다. 그리고 그때 우연처럼, 쏘가리의 입질을 받았다. 그 찰나의 푸른빛이야말로 김유태 시인이 ‘애니쉬 카푸어展’에 전시된 ‘BLACK’에서 봤다던 어둠 속의 빛이 아닐까?세상에 완벽한 검은색은 없다. 2019년 MIT 연구진이 개발한 신물질은 빛 흡수율 99.995퍼센트로 반타블랙의 효율을 압도적 갱신했는데, 그 물질 역시 0.005퍼센트 빛의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세상은 점점 더 짙은 어둠이 되어 가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선 수천의 사람들이 죽어 가지만, 학폭 피해자인 20대 여성이 스스로 삶을 버렸지만, 주윤발은 전 재산 9600억 원을 기부하고,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휘영 김상우 두 청년은 장기기증으로 각각 3명, 5명의 소중한 생명을 살렸다.그렇기에 암흑 같은 절망의 심연 속에도 빛이 자라난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검은색은 어둠이 아니다. 검은색은 끝이 아니다. 태초의 빛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광채가 검은색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검은빛인 어둠 위에 다른 빛이 입혀질 때 색(色)과 상(象)이 태어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그러므로 검은색은 심연의 입구이자 출구다. 빛은 검은색에 삼켜졌다가도, 다시 검은빛에서부터 무수한 빛이 파생되고, 압도적인 덧칠색이지만 검은색은 모든 색을 돋우는 바탕색이기도 하다.우리 사회의 약자, 소수자, 아브젝트적 존재들은 빛이 들지 않는 어둠 안에 있다. 때로 빛은 너무 환해 물상을 분산시키지만, 어둠은 상과 상, 그림자와 그림자를 밀착시킨다. 순백의 빛이 설맹(雪盲)을 만드는 데 비해 암흑처럼 보여도 어둠은 늘 암중모색(暗中摸索)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렇게 어둠과 어둠이 서로 끌어안을 때, 새벽처럼 푸르스름한 빛이 부화할 때, 그 빛이야말로 빛보다 빛나는 어둠일 것이다. 타자와 연대하는 것이, 사람 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시대일지라도 우리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믿으면서, 빛보다 빛나는 어둠을 온몸으로 밀면서 나아가야 하리라.지금 어둡다면 그 암흑은 곧 나타날 찬란한 빛의 암시일 것이다. 상투적인 문장이지만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던 말을 믿는다.일찍이 검은색에 관해 오래토록 탐구한 한 시인을 빌리자면 “검은빛은 죽음이 아니다, 비애가 아니다 검은빛은 환하다”(송재학, ‘주전’).

2023-10-17

쓰임에 맞게 사는 일

최근 장염을 오랜 기간 앓았다. 평범한 식사가 어려웠고 앉아 있기도 괴로울 정도로 속이 울렁거리고 두통이 심했다. 몸이 아프다보니 퇴근 후에는 바로 집에 가서 잠들기 바빴고, 주말엔 집 밖을 거의 나가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보냈다.집은 이사 온지 세 달이 다 되어갔지만 아직도 어수선한 짐들이 마구 쌓여 있었다. 옷장 속 서랍 안, 컴퓨터 책상 아래, 신발장 구석 등 물건들이 규칙 없이 멋대로 굴러 다녔고, 특히 냉장고 안은 언제 사두었는지 각종 식재료들이 형체만 유지한 채 놓여 있었다. 장염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어수선한 집 안에 내내 있다보니, 불필요한 물건과 청소가 필요한 공간이 눈에 띄었다. 그 뒤론 조금씩 닦고 청소하며 쓸모없는 건 비우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런 나의 변화를 읽었는지 각종 청소법과 살림하는 법 영상을 추천해주기 시작했다.살림 고수들의 살림법은 대단했다. 깨끗하게 씻은 페트병을 반으로 갈라 계란 보관함으로 쓴다던가, 커피 트레이를 활용해 신발을 보기 좋게 보관한다거나 일회용 쓰레기봉지를 청소용품으로 재활용해서 화장실 벽을 닦는 등 재사용 할 수 있는 것들은 모아 한 번 더 쓸모 있게 쓰고 있었다. 수십 개의 영상을 보다보니 나 또한 재사용할 수 있는 튼튼한 것들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고, 그렇게 아끼며 필요에 맞게 정리해 나가는 생활 습관은 궁상맞기 보단, 삶을 조금 더 공들여 가꾸어 나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살림하는 법을 조금씩 알아가다 보니 스스로 여러 규칙을 정하게 되었는데, 우선 외식을 자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하루의 고단함을 자극적인 음식으로 해소하려 했으나 이젠 가능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고 있다. 꼭 살이 덜 찌고 건강한 음식만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어떻게든 직접 식재료를 손질하고 불에 구워 간단하게라도 먹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저녁 식사와 동시에 다음날 먹을 점심 도시락도 싸고 가능한 설거지도 바로바로 하려니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만 그래도 건강한 음식과 깨끗한 주방, 필요한 양념과 그릇들을 언제나 여유롭게 꺼내 쓸 수 있다는 것에 안정감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또 채소와 과일은 집 근처 마트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고른다. 예전엔 매번 먹고 싶은 음식을 때에 맞춰 반나절 만에 배송해주는 인터넷에서 주문을 했다면 이제는 일주일에 딱 한 번 금요일 퇴근길에 장을 본다. 기존 식재료는 모두 다 먹어치우고선 장을 보는 규칙을 세우고 필요한 재료는 미리 체크해서 필요한 것만 사서 집에 돌아온다.집으로 돌아와선 채소와 과일 손질을 한 후 야채 통에 넣어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쓴다. 예전에는 귀찮아서 미루고 했던 청소나 정리정돈이 이젠 조금은 익숙해져 전보다 더 빠른 시간 안에 움직이곤 한다. 스스로 규칙을 만드는 일정한 루틴을 통해 삶의 노하우는 생기고 노하우가 쌓일수록 점점 더 생활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나간다.늘 루틴대로 깨끗한 주방과 삶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일 수 있다면 참 좋지만, 실은 몸이 아픈 날이나 피곤한 날에는 어쩔 수 없이 배달 어플을 켜며 스스로 항복하고 만다. 아직 완벽한 살림 고수가 될 수 없음을 스스로 인정해 버리며 그날 꼭 먹고 싶었던 음식을 시킨다. 배달 온 음식 양이 너무 많으면 우선 용기에 소분부터 하고선 딱 먹을 만큼의 일인분만 남기고선 먹는다. 오롯이 그릇에 담긴 일인분의 몫은 오늘의 집안일을 해내지 못했다는 부채감을 줄여준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대로 집이라는 공간은 변화하고, 그럴수록 집은 나의 취향과 성격이 자연스레 드러난다. 누군가 집이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던가, 필요 이상으로 화가 많이 나는 날에는 손이 닿지 않는 깊숙한 서랍 안의 먼지를 털고 닦으며 물건을 재정돈 한다. 잘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닦아내고 나면 겉으로 드러나는 화가 줄고 불현듯 덧없게 느껴진다.청소는 짧게 해도 금방 허기를 느끼게 한다. 그렇기에 분노 대신 부엌 앞에 서서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끌어준 건강한 간식을 만들어 먹어야 한다. 이렇게 나의 삶은 조금 더 단순한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꼭 필요한 쓰임에 맞게 물건과 감정을 활용하고 소비하며 쓰는 삶, 너무 과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부족하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만족감을 느끼며 가을날을 보내고 있다.

2023-10-17

꽉 닫힌 마음

명절이 지나면 자취방의 냉장고가 풍성해진다. 엄마가 싸준 음식 때문이다. 갈비부터 시작해 김치찜, 전복장, 닭발, 육개장까지. 어느 것 하나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게 없다.내가 만들면 왜 이런 맛이 안 날까? 엄마 등 뒤를 괜스레 기웃거리고 요리 비법을 배워보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어도 내가 만든 음식은 묘하게 싱겁거나 짜다. 엄마는 그런 내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다. 김치찌개 그거 김치에 물만 넣으면 되는 건데, 뭐가 어렵다고 그래? 그런 말을 들으면 억울하다. 내 말이 그 말이니까. 똑같은 재료로 맛을 내지 못하는 내 문제가 뭔지 나도 참 궁금한 것이다.그런 고뇌가 길어지면 휴대전화를 들고 배달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게 된다. 거기엔 온갖 종류의 음식이 다 있다. 한식, 일식, 중식, 양식… 휘황찬란한 요리는 물론, 아이스커피 한 잔도 속전속결로 배달되는 시대 아니던가. 태국 여행 중 먹었던 것과 똑같은 맛을 자랑하는 똠얌꿍부터 프랑스 유학파 파티시에가 만든 마카롱, 요즘 유행하는 마라탕이나 탕후루도 클릭 한 번이면 집안에서 편안하게 먹을 수 있다.그러니 몸이 지치고 힘든 날엔 자연스레 배달을 찾게 된다. 식재료를 썰고 볶아내고 가지런히 담아서 먹고 치우는 것을 생각하면 배달 음식의 가격이 꽤 합리적이라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문제는 먹고 나서 항상 후회한다는 것. 집에서 만든 밥을 먹을 때의 느낌과는 다르다. 이상하게 속이 더부룩하다. 한두 입은 맛있는데 그 후엔 물려서 쳐다보기가 싫다. 배는 부르는데 어쩐지 헛헛한 기분도 든다. 플라스틱 용기에 음식이 담겨온다는 것도 달갑진 않다. 나의 한 끼에 너무 많은 쓰레기를 배출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들기 때문이다.저번에 주문한 동태찌개는 포장 용기가 덜 닫혔는지 국물이 흥건하게 흘러있었다. 그걸 받아들었을 때의 난감함은 배고픔마저도 잊게 했다. 가게에 항의할까 하다가 그만두지 싶었다. 일부러 뚜껑을 닫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실수한 거지. 누구나 그렇듯이.그러고 보면 엄마의 음식이 담긴 용기는 하나같이 꽉 닫혀 있었다. 아무리 힘을 줘도 도무지 열기가 힘들었다. 고무장갑을 낀 채로 낑낑대고 숟가락으로 텅텅 두드려도 요지부동이던 뚜껑을 만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신경질적으로 쏘아댔다. 왜 이렇게 세게 닫았어? 아무리 해도 못 열겠단 말이야. 그러면 수화기 너머로 엄마의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고맙다거나 잘 먹겠다는 말보다 반찬통 못 열겠다는 말이 먼저 나간 것에 후회하는 것도 잠시, 어떻게 알아서 잘 좀 해보라는 엄마의 말에 발끈해서 몇 마디 더 쏘아붙이고 마는 일이 부지기수였다.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꽉 닫힌 반찬통을 보고 있노라면 나 자신이 너무나 무력하게 여겨진다. 뚜껑 하나 못 여는 사람. 내가 먹을 음식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사람. 한 사람의 몫을 해내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걸까. 거기다 뭘 잘했다고 엄마에게 신경질을 내는 걸까. 다른 사람들의 행동은 너그럽게 넘어가면서 왜 엄마에겐 유독 박하게 구는 걸까. 탓하지 않아도 될 것까지 탓한 내 모습이 참 못났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엄마는 이제 반찬통의 뚜껑을 적당히 느슨하게 닫는다. 대신 비닐로 몇 번이고 감고 또 감는다. 뭐 이렇게까지 쌌대. 괜히 쓰레기 많이 나오게. 나는 또 그렇게 툴툴대면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담긴 용기를 열어본다. 맛깔스러운 냄새가 확 끼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역시나 맛있다. 감히 내가 흉내 낼 수 없는 맛이다. 간은 짜지도 싱겁지도 않다. 적당히 달짝지근해서 감칠맛이 돈다. 이런 반찬이면 입 짧기로 유명한 나도 공깃밥 두 그릇 뚝딱 비워낼 수 있다. 부른 배를 탕탕 두드리면 자연스레 엄마의 손이 떠오른다. 투박하리만치 길고 곧은 손. 가끔은 엄마가 미련하다고도 생각됐다. 직장 한 번 쉬지 않고 아이 셋을 키우면서 집에서 한 밥을 꼬박꼬박 먹였다. 지금도 그렇다. 명절이면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음식을 내온다. 왜 맨날 저렇게 음식을 해. 그냥 사 먹지, 하면서 혀를 내둘렀던 적도 있다.알고 있다. 온 힘을 주어 반찬통을 꽉 닫는 엄마의 마음을. 외부의 먼지가 들어갈까, 내부의 것이 흘러넘칠까, 노심초사하는 엄마의 얼굴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난 엄마 밥이 제일 맛있더라. 나의 그 한마디로 충분하다는 듯이 소녀처럼 와르르 웃는 엄마.그 웃음을 완벽히 밀봉된 용기에 꽉꽉 채워 아주 오래 간직하고 싶은 요즘이다.

2023-10-10

시달리는 마음

타인에게는 쉽게 할 수 있지만 나에게는 못하는 말. ‘원래 모든 사람은 부족한 점이 있어. 부족하다는 사실에 너무 얽매이면 안 돼. 네가 가진 것들에 귀를 기울여야지.’ 친구에게든, 같이 문학을 하는 사람이든, 혹은 학생에게든,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해준다. 그게 세상을 사는 꽤 좋은 마인드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부족한 부분만 바라보면서 사는 삶이라니, 너무 지치지 않나?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런 건 그저 타인의 질투어린 시선이나 동경어린 시선 속에서만 있는 것이고, 그 시선에서 살짝 벗어나보면 모든 사람은 잘난 점 한 두 가지와 부족하고 미진한 여러 가지 결여를 제각기 가진 ‘사람’에 불과하다. 불완전하고, 어딘가 비틀려있고, 혹은 자신이 저지를지 모를 실수에 불안해하는 사람.그러니 너무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어차피 모든 사람은 제각각 모자라고, 약간은 바보 같고, 혹은 비틀린 구석이 한 두 가지쯤은 있기 마련이라고. 단지 서로 모자란 부분이 다르고 바보 같은 구석이 달라서 네가 눈치 채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게 온전히 타인을 위한 말인가 하면, 그렇진 않다. 오히려 나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타인에게 해주며 내 모자란 마음을 채우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나는 늘 내 부족한 부분들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어느 나라든 그렇겠지만, 한국은 유독 나이에 따라 요구되는 것들이 많은데 나는 그런 것들을 잘 충족시키며 살아오진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때가 되면 대학에 진학하고, 때가 되면 면허를 따고, 때가 되면 군대를 가고, 때가 되면 취직을 하고,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한 번도 제 때에 해보거나, 잘 이뤄낸 적이 없는 것 같다. 대신 나름의 경력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적도 있지만, 그것들이 과연 등가로 비교될 수 있는 것들일까?딱히 자기 비하를 하자는 건 아니지만, 은연중에 타인에게 그런 시선을 느낄 때가 있다. 30대 중반이 된 이후로 더 크게 느끼는 것 같다. 아직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거나, 아직 결혼을 하지 못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할 때면 뭔가 결격사유를 가진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을 느끼기도 한다. 처음엔 이게 나의 자격지심이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그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면 이렇게 사람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이렇게나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이 나의 삶을 제대로 평가하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그저 필사적으로 자신이 이뤄낸 것들을 평가받고 싶은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가 해낸 결혼을 너는 못했지. 내가 이룬 정규직을 너는 못했지. 내가 해낸 것들을, 너는 해내지 못했지 하고.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삶을 과대평가하고 싶은 사람들. 예전엔 그런 사람을 만날 때면 ‘성격 참 이상하네’하고 생각하곤 넘겨버리곤 했었지만, 최근에는 그런 사람들이 세상의 절대 다수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어쩌면 그들도 자신의 결점이 두려운 건 아닐까. 그래서 자신의 결점을 바라보는 대신에 어떻게든 자신이 이뤄낸 요구들을 생각하고, 타인의 단점을 들춰내면서, 자신의 결점을 바라보기를 피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의 결점을 바라보는 건 슬프고 괴로운 일이지만, 타인의 단점을 들춰내는 건 꽤 즐겁고 나름의 쾌감을 주는 일이니까. 그리고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나 자신이 꽤 괜찮은 삶을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곤 하니까. 그 과정에서 누군가 조금 우울해지게 되더라도,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니까.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타인을 동원하는 사람은 자존감이 높은 걸까, 아니면 극심하게 자존감이 낮은 사람인걸까. 스스로든 채울 수 없는 자족감을 채우고자 타인의 삶을 멋대로 재단하는 사람이라면, 그건 적어도 건강한 마음은 아닐 것 같다. 어쩌면 그것도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에 시달리는 똑같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들도 나도, 결국엔 똑같이 자신의 부족한 부분에 시달리는 사람들인 셈이다.우리의 결여와 결점들은 누구의 시선에서 결정된 것들일까. 우리가 구태여 비슷한 수준으로 모든 일들을 잘 처리하면서, 타인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너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내면화하게 만드는 건 대체 누구에 의한 것일까. 내가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 삶도 꽤 괜찮은데. 좀 부족한 거 있어도 제법 살만한 인생인데. 고민이 많아지는 30대 중반의 하루다.

2023-10-10

어린 날의 글쓰기

최근 SNS에서 학교생활 기록부를 인증하는 열풍이 불었다. 그간 생활기록부 발급 절차가 조금 복잡했던 것에 비해, 최근부터는 정부 24 홈페이지 또는 앱을 통해 간단한 인증 절차만으로 발급 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SNS에서 주로 자신의 생활 기록부를 캡쳐해서 업로드 하는 부분은 ‘행동 특성 및 종합 의견’항목이다. 학창시절 ‘생활 태도’와 ‘장점’, ‘성장 가능성’등 담임선생님의 시각으로 바라본 개인적인 평가를 적어 놓는 문항인데, 이 부분을 통해 자신이 학창시절 어떤 사람으로 비춰졌는지 대략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다.성적은 물론 수상내역, 봉사 활동, 생활 태도 등 학교생활의 전반에 대해 디테일하게 알 수 있어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재미도 있을뿐더러 SNS에선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는 걸 인증하고 공유하기 위해 더욱 주목을 받았던 듯싶다. 그도 그럴게 생활기록부 발급 유행이 시작되었던 지난 9월엔 이용자 증가로 정부 24 홈페이지가 마비되기도 했었고, 작년 7~9월 발급 건수 대비 올해 발급 건수는 3배 이상 달했을 정도라 한다.하지만 내겐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을 다시 꺼내어 본다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소멸을 향해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들을 보면 어쩐지 낯선 객지에서 홀로 서 있는 듯한 쓸쓸한 기분이 든다. 내 과거의 기억이 아닌, 타인의 과거를 어렴풋이 훔쳐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하지만 과거의 ‘나’는 어쩐지 궁금해지는 법, 점심을 먹으며 휴대폰으로 몇 번 간단한 인증을 했더니 정말 바로 발급받아 볼 수 있었다. 조심스레 열어보니 의외로 나는 학창시절에 공부하라는 선생님의 말을 안 듣는 소심한 말썽꾸러기가 아닌, 이타적이고 논리적이며 감수성이 발달하여 글쓰기에 소질 있는 아이로 비춰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나의 학창시절 모습이라 그런지 조금은 낯설어 멋쩍은 웃음만 지었다.나의 학창시절을 잠시 되돌아본다면, 나는 다소 조용했으나 웃음소리가 크고 밝은 친구들을 좋아해서 주변엔 재미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공부엔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주로 교과서 속에 책을 숨겨 읽었고, 담임선생님이 책을 그만 읽으라고 하면 외려 더 숨어서 책을 읽곤 했다.도서관에 숨어 만났던 책들은 주로 신경숙, 박민규, 이성복, 기형도의 책들이었고 그때 처음 문장 속에서 자유로이 유영하는 법을 배웠다. 마음먹은 대로 무엇이든 쉽게 할 수 없었던 환경에서 글이 주는 자유로움과 날 것으로 드러나는 타인의 세계와 삶의 형태가 얼마나 놀랍던지. 그래서 읽기에 빠져 들었고, 자연스레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때도 쓴다는 말이 어색하게 여겨져서 늘 ‘메모 한다’, ‘일기를 쓴다’라고만 글쓰기를 표현하고 정의했다. 쓴다는 것은 어딘가 부끄럽고 멋쩍기도 하고 또, 소중해서 타인에게 들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고 해야 할까.읽고 쓰는 것 외엔 흥미도 없고 잘 하는 게 무엇인지 몰라 문예창작학과를 택했고, 글을 읽고 쓰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그러면서 어린 나는 쓰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참 많았던 듯싶다. 글쓰기로 충만감도 느꼈고, 성취감도 얻었고, 화도 났고, 무력함도 느꼈으니 말이다.꽤 열정적이었던 것에 비해 현재의 나는 어딘가 정말 중요한 중심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 과거의 열정을 부정하면 할수록 현실적인 부분에 있어 더 생산적인 역할과 몫을 해내고 있다고 스스로 여겨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눈은 퀭하고, 자주 화가 나 있으며, 복잡한 사유는 멈추고, 작은 스트레스에도 민감하며, 나쁜 식습관으로 몸은 엉망이다. 어린 날의 나에 비해, 생의 의문과 더불어 따라오는 몇 가지 질문에 점점 더 비겁해지며 미성숙한 사고를 택하기에 따라오는 씁쓸함은 부정할 수 없다.최근 이사를 하며 아직 미처 정리 하지 못한 책들이 쌓여 있다. 이사 오기 전 많은 책들을 처분한 탓에 이제 내가 가진 책들은 100여 권도 안 된다. 멋대로 쌓인 책의 형태를 바라볼 때면 허무함이 느껴져 외면하곤 했으나, 이젠 이 쓸쓸한 부채감이 아주 어린 날부터 쭉 시작되어 왔으며 쉽게 끝나지 않음을 안다. 그렇기에 슬슬 책의 자리를 찾아주려 굳게 닫힌 옷장 문을 열어 본다.

2023-10-03

사랑이라는 서투름

명절이면 아버지 계신 서산에 간다. 동문동 동부시장 가서 장 보고, 미리 해온 음식 데우고, 전 부치고, 저녁에 한 상 차려 먹는다. 갈비찜, 잡채 등에다 설에는 새조개와 굴, 추석에는 꽃게와 대하가 함께 오른다. 거창한 밥상이지만 식사는 30분 안 돼 끝난다. 상 치우고 동생네는 안방에, 엄마는 작은 방에 들어가고, 아버지는 거실에서 종편을 본다. 살가운 대화 같은 건 딱히 없다. 가족애라는 것을 다들 가지고는 있는데, 표현에 서투른 탓이다. 어색하고 민망하다. 사랑은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한지도 모른다.할아버지는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처자식을 버렸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졸업 후 공장 다니며 장애인인 할머니와 삼촌들을 먹여 살렸다. 먹고 살 만해지니까 할아버지가 돌아왔는데, 응어리가 져 평생 용서하지 못했다. 미워하면서도 모시고 살았다. 장남은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내 유년을 돌아보면, 퇴근한 아버지가 거실의 할아버지는 본체만체 안방으로 서둘러 들어가 버리던 냉랭함이 먼저 떠오른다. 아버지는 사랑 받지 못해서 사랑 주는 법을 몰랐다. 무뚝뚝하고 엄했다. 게임기 사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와도 나는 아버지가 무서워 삼켰다.바캉스를 가고 외식을 해도 행위만 있지 그 안에 다정함 같은 건 희미했다. 가장의 의무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마저도 아버지 공장이 부도를 맞고 나서는 추억이 됐다. 지방을 전전하는 아버지를 사춘기 지나 성인이 될 때까지 보기 힘들었다. 그 10년은 참 괴로운 시절이었다. 더 작은 집으로 여러 번 이사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박스를 줍고, 엄마는 새벽부터 밤까지 일했다. 어쩌다 아버지가 집에 오면 나는 컴퓨터 게임만 하고, 아버지는 내 등 뒤에서 무슨 말 하고 싶지만 못한 채 가만 서 있곤 했다. 내가 장교 임관훈련을 받던 여름 내내 아버지는 교육대 인터넷에 편지를 썼다. 10년 동안 못한 말들을 거기 열심히 적었다. 말로는 못하는, “아빠는 병철이가 자랑스럽다” 같은 문장들.이런 내력 때문에 나는 남들이 가족 여행을 가고, 동영상 속에서 함께 장난치며 웃고, 각종 기념일을 챙기는 화목함이 신기하고 낯설다. 가족은 다 우리 같은 줄 알았다. 오래전 애인의 아버지가 매년 10월 31일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연주되는 라이브카페에 가족들을 데리고 가 시월의 마지막 밤을 기념하는 걸 보면서 놀랐다.지난 설, 서산 바닷가 가서 비싸고 좋은 음식 먹자고 했다. 해가 갈수록 아들 마음은 조급해진다. 억지로라도 화목한 그림 하나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다들 내 맘 같지 않아서 그냥 동네에서 먹기로 했다. 앞장 선 아버지가 시장 좁은 골목 백반집 문을 열었다. 다 앉기도 전에 아버지는 6천원짜리 백반 여섯 개를 시켰다. 한 자리에 못 앉아 두 테이블로 나눈 것을 내가 주인아주머니께 몽니를 부려 합쳤다. 나물, 파래, 김치, 된장국에 나는 거의 손도 안 댔다. 그 사이 아버지는 밥을 다 드시고 일어났다. 혼자 빨리 걷고 빨리 먹는 아버지한테 짜증이 났다. 눈치 챘는지 아버지는 집에 가 새조개 먹겠느냐면서 5만원 지폐를 내밀었지만, 뿌리쳤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평생 미워했다. 할아버지는 늘 복덕방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할머니를 평생 부끄러워했다. 할머니는 보청기 없이는 듣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더러 “닭띠니까 곡식을 먹고 살아라” 했다. 유언이었다. “아빠가 할아버지 무덤에 갔대” 귀에 대고 소리치자 할머니는 “죽을 때가 됐나보다” 했다. 아버지는 출포리로 매일 마실을 간다. 보청기를 끼고 부동산에 가 한나절 앉아 있다 온다. 뒤란에서 닭들이 벌레를 쪼고 메주가 푹푹 삭을 동안 평생 미워한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아무것도, 아무것도 돌보지 않는다. 나는 그러면 안 되는데, 아버지가 돼선 안 되는데….나이 들수록 후회가 많아진다. 동부시장 ‘지곡밥집’에서 짜증 부렸던 일이 속상하다. 이번 추석 또 서산에 간다. 다시 그 밥집에 가 밥 두 공기 먹고 싶다. 아버지는 제철 꽃게를 잔뜩 사는 것으로 아버지 노릇을 하려 할 테고, 나는 무엇으로 아들 노릇을 할까. 가끔 하는 통화도 30초를 안 넘는데, 살가운 말 몇 마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어려운 마음도, 백반 여섯 개를 서둘러 시키는 급한 성미도, 밥 한 끼 먹으러 일 년에 두 번 모이는 수고로움도 다 사랑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2023-10-03

어떤 답은 듬뿍듬뿍

최근 나를 골치 아프게 하는 한 가지가 있다. 다름 아닌 작업실에서 돌보는 식물에 관한 것. 이 생명력 넘치는 푸릇푸릇한 존재는 작업실에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존재다. 보고만 있어도 숲에 온 것처럼 충만해지고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매일 부지런해진다. 작업실에 들르지 않는 날이면 화분들에 대한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정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무엇보다 역동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인초는 하룻밤에 거대한 잎을 피워 내고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잎이 다음 날이면 누렇게 변해 우수수 떨어지기도 한다. 너희들, 정말 묘하게 예민하고 조용히 강인하구나. 여린 잎사귀를 매만지면서 생각한다. 식물 키우기는 정말이지 어렵다고.작업실에는 꽤 많은 식물이 있다. 키가 나를 훌쩍 넘어서는 여인초부터 고무나무, 홍콩야자와 크로톤, 고려담쟁이, 선인장, 다육식물까지. 작업실을 함께 꾸려가는 시인과 의기투합하여 하나씩 들여놓은 것이다. 식물에 대해 잘 알아서 들였다기보다 앞으로 알아가기 위한 것에 가까웠다.사실 나는 뭔가를 키우는데 능한 사람은 아니다. 혼자 산 지 십 년이 넘어가지만, 여전히 나 자신을 돌보는 것에도 서투르다. 나의 반려견도 제대로 살피는 건지 알 수 없다. 식물도 내버려두면 알아서 큰다고 생각했다. 생명과 공생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관심과 관찰이 필요한지 알지 못했다. 누군가가 나를 본다면 혀를 쯧쯧 찰지도 모른다. 뭔가를 키울 자격이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다.얼마 전부터 해피트리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한쪽 구석에 놓여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자라던 녀석이라 미안한 마음이 너무나 컸다. 나는 해피트리를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햇볕이 가장 잘 드는 자리에 놓아도 보고, 통풍을 위해 창가에 두고, 비 오는 날 밖에 내어놓아도 딱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식물 고수들이 모인 인터넷 커뮤니티에 사진을 찍어서 올렸다. ‘해피트리가 갑자기 이렇게 시들시들해졌는데, 이유가 뭔지 아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댓글이 주르륵 달렸다. 대부분 비슷한 이야기였다. ‘과습인 것 같습니다.’아, 그렇다. 식물을 키우는데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물의 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동생의 작업실에서 키우는 율마가 시들시들하다고 했을 때, 나는 ‘비 오는 날 내어 놓아라’는 답을 준 적이 있었다. 나의 식물들도 그렇게 해서 몇 번 살려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조언대로 동생의 율마는 비를 흠뻑 맞았고, 다음 날 완전히 죽어버렸다고 했다. 뿌리까지 모조리 썩었다는 것이었다. 너무 신경 써서 물을 줬던 것이 문제였던 걸까. 해피트리를 다시 살리기 위해 온 마음을 쏟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녀석은 죽어버리고 말았다.그렇게 한 식물을 보내고, 나는 다른 식물들에 물을 주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기 시작했다. 흙을 만져서 완전히 마르지 않으면 절대 물을 주지 않았고 분무도 조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크로톤이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번 주 비 오는 날에 밖에 내어놓았던 게 문제였나. 작업실의 공기가 너무 습한 걸까.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운 돌 하나를 얹은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토요일 아침, 작업실 문을 여니 내가 그렇게나 고민했던 크로톤이 잎을 활짝 펴고 살아나 있었다. 함께 작업실을 쓰는 친애하는 시인이 간밤 다녀간 모양이었다. 살펴보니 작업실 모든 식물에 듬뿍듬뿍 물을 준 흔적이 있었다. 식물들은 파릇파릇해졌고 잎사귀는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답은 물이었다. 물을 아끼는 게 아니라 더 줘야 했다. 그간 엉뚱한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허무했다. 물을 넘치게 주면 죽는다. 그러나 물을 주는 것을 두려워해도 안 된다. 식물을 키우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이다.그것은 비단 식물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나를 지나쳐 간 무수한 관계들을 떠올렸다. 사랑을 아끼고 상대가 메마르지 않을 정도만 관심을 표했던 지난날의 나를 상기했다. 마음을 모두 쏟아 부으면 상대가 떠나갈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서로가 시들해진 것을 발견하면 당황했다. 두려워하지 말고 듬뿍듬뿍 물을 주는 것이 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나는 상대를 떠나보내야만 했다.여전히 나는 식물을 키우는 것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도 잘하지 못한다. 실패할까 봐 쉽게 겁을 먹고 해결 방식이랍시고 엉뚱한 대책을 내어놓는다. 어떤 순간은 일상적이지만 새삼스럽다. 식물로 인해 골치가 아프고 거기에서 뭔가를 배운다. 햇볕과 물과 바람을 듬뿍듬뿍 맞고 나도 식물들도 자라나는 중이다.

2023-09-19

‘나’의 영향력

개강이다. 시간 강사라는 특성상 한 여름을 일 없이 지내다 간만에 강의를 했더니 몸과 마음이 무척 피곤하다. 처음 보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유창한 척 말을 하자면 내가 마치 약장수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첨단 기술이 나날이 눈부시게 발전해가는 세상 속에서도 글쓰기는 여전히 필요한 역량이라고 그러니 수업에 집중해서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말을 하고 있자면, 정말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한다.아마 이 피로감에는 한동안 하지 않았던 강의를 다시 재개하면서 느끼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처음 보는 학생들과 새롭게 한 학기를 시작하려니 느끼는 피로감도 있을 것이고, 이전에 했던 강의 자료를 새로 배정받은 학과에 맞게 다듬고 고치는 과정에서 느끼는 피로감도 있을 것이다. 사실 시간 강사를 하기 전에는 선생이라는 직업이 꽤 괜찮은 직업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들을 학생들에 맞춰 설명하는 게 다라고 생각했었고, 그래서 수업이라는 게 얼마나 많은 사전 작업을 요구하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누군가 나에게 선생이라는 직업이 어떠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나는 어떤 대답을 해주면 좋을지 잘 모르겠다.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서로 서먹서먹하기만 하고, 별다른 관심도 보이지 않던 아이가 학기가 끝날 즈음 밝은 얼굴로 인사하며 자신이 노력한 결과물을 보여줄 때면 꽤 큰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학생이 그렇지는 않아서, 간혹 수업에 관심이 없거나 노력에 비해 성취도가 낮은 학생들을 마주할 때면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한다. 내가 만약에 조금만 더 재밌게 수업을 했더라면, 혹은 조금만 더 잘 설명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이 아이에게 지금 이 순간의 의미가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혹은, 이 아이의 미래가 조금은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책임감. 혹은 사명감. 아마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느낄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나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걸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나는 좋은 선생도 많이 만났지만, 나쁜 선생도 많이 만났던 것 같다. 개중에는 폭력을 가하는 사람도 있었고, 말도 안 되는 욕설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해할 수 없다. 왜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욕을 하고 폭력을 가하고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려 안달이었던 걸까.하지만 그런 사람들보다는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던 게 내 인생에는 더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 참 다행이라고 느낀다. 나에게 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하면 안 되는 일에 대해 알려주고, 귀찮은 질문들에도 꼬박꼬박 웃으며 대답해준 좋은 선생님들. 내가 지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스스로를 계속 가다듬으려 애쓰는 건 그분들의 영향이 클 것이다. 만약 그때 그 순간 그 사람들이 해준 말과 행동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나 또한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그런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면,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자꾸만 돌이켜보게 된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물론 나는 아직 완벽한 선생님은 아니다. 그냥 조금 친절하고, 조금은 유머러스한 그런 선생님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아이들이 적어도 나로 인해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거나,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게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조금은 믿을 수 있고, 때로는 기댈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실 이건 내가 선생이라서,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만 느끼는 감정은 아니다. 내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은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그게 지금의 내가 가진 소박한 꿈이 아닐까 싶다.세상엔 나쁜 사람도 있고 좋은 사람도 있다. 마찬가지로, 나쁜 선생도 있고 좋은 선생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이 경험한 소수의 사람들을 전체로 오해하곤 한다. 어떤 직업이든 직업윤리에 충실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닌 사람도 있는 것임에도,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잣대 삼아 타인에 대해 판단하길 즐긴다. 당장 인터넷 뉴스의 댓글만 보더라도,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알까. 자신들의 인식이, 말과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행동을 미치게 될지. 인간은 모두 사회적 동물이기에, 크건 적건 타인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그걸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쯤 선해질 수 있지 않을까. 삭막해진 세상에서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이야기를 적어본다.

2023-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