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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효석 정본 작업과 이상옥 선생님

△이효석 정본 작업이상옥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지난 2012년 5월께로 이효석 전집을 재출간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면서이다. 전집을 처음 출간하는 것도 아니고 재출간하는 데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은, 원문과 이본 등을 비교하고 교정하여 원문에 가장 가까운 정본(定本)을 출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검토한 내용을 가지고 매주 만나 토론하여 텍스트를 확정하는 이 지난한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은 채정 선생님, 그리고 대학원 동료 두 명,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명이 팀이 최종적으로 팀을 이끌게 되었다. 이상옥 선생님은 70대에 뵈었는데 이제 80대가 되었다. 그리고 20대의 풋풋했던 친구는 30대가 되었고, 나도 지금은 40대가 되었다.우리 팀은 연령층이 다양하고 성장 지역도 각양각색었다. 연령층과 성장지가 다르다는 것은 이 작업을 하는데 있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인간을 닮아서 나이와 출신지를 갖는다. 30대에게 생소한 단어가 50대에겐 무척 익숙한 언어일 때가 있고, 서울 사람이 모르는 말을 강원도 사람은 일상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 작업을 통해 이러한 낯섦과 낯익음의 격차를 줄이고, 한자나 영어, 아주 곤란할 때는 각주를 덧대어 말을 곧추세웠다. 때로는 손을 대지 않으면 안 되는 오식과 비문을 바로잡았다.이 작업을 하면서 기억나는 건 ‘말결’이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다. 두고 볼수록 예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결’은 ‘무늬’라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겨를’(때, 사이, 짬)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무늬라고 했으나 기실은 ‘조직이 굳고 무른 부분이 모여 일정하게 켜를 지으면서 짜인 바탕의 상태나 무늬’라고 해야 분명하다.) 무늬라는 뜻의 ‘결’과 사이라는 뜻의 ‘겨를’의 줄임말인 ‘결’은 음은 같지만 그 뜻은 현저히 다른데, 이를 동음이의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결’이 ‘잠’이나 ‘물’과 같은 명사와 결합하면, 동음이의어적 성격이 헐거워져 ‘무늬’와 ‘겨를’의 경계가 모호해지게 된다. 예컨대 물결은 물의 무늬이면서 물의 흐름과 흐름의 사이이다. 잠결은 ‘잠을 자는 사이’이기도 하겠지만, 잠과 잠 아닌 것 사이의 일렁임이다. 그리고 말결은 말의 사이이자 말의 무늬다. 이렇게 보니 ‘무늬’와 ‘겨를’은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닌 것도 같다. ‘사이’의 흐름, ‘사이’의 이어짐이 ‘무늬’이니 말이다.이효석 정본 작업은 이렇게 우리말을 더 풍성하게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2012년 가을께 ‘메밀꽃 필 무렵’의 4교를 끝냈는데 2년이 지나 다시 열어봤더니 여전히 문제가 되는 부분이 많아 몇 번의 작업을 더 거쳐야 했다. 그렇게 해서 2016년에 ‘이효석 전집’ 전 6권을 상재했다. 이 작업을 통해서 기존의 오류와 실수를 바로잡았다. 그 과정은 한글 프로그램의 ‘검토’와 ‘메모’ 기능을 활용하여 기록하였다. 품이 많이 들지만 그 빛은 미약할지 모른다.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일들과 꼭 필요한 일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이 일을 하게 되어 즐거웠고,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계속 즐거울 것이고, 그리하여 오래도록 즐거울 것을 생각하니 벌써 뻐근하다. 갈비뼈 하나 쯤 떼어낸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이상옥 선생님이 작업을 하면서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이상옥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기왕이면 정본 전집을 출간하고 싶어 하셨고, 이효석문학재단 측에서 이러한 선생님의 뜻에 선뜻 동의해주었기에 이 일은 가능했다. 우리는 이 작업을 ‘정본 작업’으로, 우리 스스로를 ‘정본 팀’이라고 불렀다. 매주 두세 번 정도 모여 작업을 진행했는데, 이상옥 선생님은 지각이나 결석을 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다. 선생님은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시는 동안에도 강의 시간에 늦은 적이 없었다고 하셨다. 이런 분이라면 으레 당신과 같지 않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선생님은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나를 책망하기보다는 격려하고 이해해주셨다.선생님은 정본 작업에 단지 참여만 하신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를 해오셨고, 원문의 어려운 한자는 물론 활자가 흐릿하여 어린 나조차 알아보기 힘든 글자까지를 읽어내셨다. 그러면서도 당신의 견해를 고집하는 법이 없으셨고, 우리가 내놓는 의견을 귀담아 들으셨다. 선생님은 아침 10시부터 때로 저녁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는 이 지난한 작업을 하면서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으셨고, 팀에 활기를 불어넣으셨다.정본 작업을 하는 동안 선생님은 재단 측으로부터 단 한 푼의 돈도 받지 않으셨다. 심지어 전집에 편자나 감수라는 명목으로 당신의 이름을 올릴 법한데 그렇게 하지도 않으셨다. 어떤 영광도, 명예도, 이익도 없이 선생님은 정본 작업에 열정을 쏟으셨고, 그 일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으셨다.선생님은, 나이로 치자면 우리보다 서른 살 이상 더 많으시고, 고작 박사학위를 막 받았거나 박사수료생인 우리와는 격이 다른 위치임에도 모든 팀원들을 동등하게 존중해주셨다. 선생님의 지식은 넓고 깊어 이야기는 끊어지는 법이 없었고, 마르는 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듣는 법을 잊지 않으셨고, 토론을 포기하는 법이 없으셨다. 심지어 나와는 정치적 견해도 달랐지만, 선생님은 설익은 내 말을 들어주셨고, 내 생각을 존중해주셨다. 지금도 그러하시다.나는 평생 이처럼 고고(高高)하며, 학학(鶴鶴)한 분을 뵌 적이 없다. 나는 원체 막돼먹어 누군가를 존경할 줄도 모르고 나 잘난 맛에 살아왔다. 이상옥 선생님은 그런 내게 사람을 존경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게 해주셨다. 이상옥 선생님에 대한 이러한 마음은 비단 나의 사견만은 아닐 것이다. 정본 출판을 마무리한 이후에도 여전히 자주 연락을 주고받으며 매년 서너 번의 모임을 이어가는 것을 보면, 우리 정본 팀 역시 이상옥 선생님의 성결에 감화된 듯하다.올해 5월, 우리 정본 팀은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3박 4일간의 짧은 여행이었다. 내내 비가 오긴 했지만, 덥지도 않아서 좋았다. 이 여행을 선생님은 일종의 시험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함께 여행을 오래 할 수 있는 ‘족속’인지 서로 알아보자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는 아무래도 이 시험에 통과하게 된듯하다. 이제 오랫동안 함께 가고자 했었던 영국으로 여행을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나는 이상옥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없고, 선생님은 나에게 가르침을 주려고 하신 적도 없다. 선생님은 내게 그저 당신의 행동만으로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셨다. 이러한 선생님을 더 자주, 더 오래 뵐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2019-07-23

시인으로 살아가기 - 최승자의 자서에 대해

시인 최승자는 1952년 충남 연기에서 태어나 고려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1979년 ‘문학과 지성’ 가을호에 다섯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활동을 했다.‘이 시대의 사랑’(1981), ‘즐거운 일기’(1984), ‘기억의 집’(1989) 등의 시집을 발표했고 이 시집들은 모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그녀는 많은 시인들에게 영감과 영향을 주었다. 진은영 시인은 언젠가 최승자를 ‘우리들의 시인’이라고 칭한 바 있다(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시인의 말’ 중).그녀는 1994년 국제작가회의(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에 참가하였다. 주최 측에서는 참가자의 시 열 편 정도의 영어 번역시를 요구했다. 최승자는 첫 시집 중 번역하기 쉬운 시들을 우선 번역했는데 그것이 열 편이 넘었다고 한다.하지만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두 번째 시집을 번역했고,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세 번째 시집을, 다시 네 번째 시집을 번역했다.결국 마흔네 편의 시를 번역했다. 그녀는 당시를 이렇게 쓰고 있다.“생각해보라, 올 여름이 얼마나 지독한가를. 방 한 칸짜리 아파트에서 완전히 발가벗다시피 한 채 머리가 뜨끈뜨끈해져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게 아닌가 싶어 30분에 한 번씩 샤워를 하면서 번역을 했는데, 그밖에 달리 무슨 일을 또 할 수가 있겠는가.”(최승자, ‘어떤 나무들은―아이오와 일기’, 세계사, 1995, 12~13면) 그리고 이렇게 번역된 시에서 다시 17편의 시를 골라냈다.그녀가 고른 시들은 하나 같이 자신을 학대하며, 자기모멸적이고 위악적이며, 비속한 언어를 거침없이 쏟아내는, 아리고 쓰린 시들이다. 이 시들을 시집별로 정리하면 ‘이 시대의 사랑’에서 네 작품, ‘즐거운 일기’에서 가장 많은 시가 뽑혔는데 여덟 작품이다.그리고 ‘기억의 집’에서 세 작품, ‘내 무덤, 푸르고’에서 두 작품을 골랐다. 시가 ‘4→8→3→2’의 순서로 줄어들고 있다.피학, 가학, 위악, 자기모멸, 비관, 절망, 허무가 최승자의 본령이라면 시집이 상재될수록 그러한 것들의 강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새로운 것들은 낡기 마련이며, 모든 강렬한 것들은 식기 마련이다. 최승자 역시 스스로 이런 사실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1993년에 출간된 ‘내 무덤, 푸르고’의 자서에 이런 위기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시집을 엮으면서 다시 읽어보자니, 이 시들이 너무도 뒤늦고 뒤처진, 그리고 너무도 낡고 늙은 시들이라는 느낌이 든다. 뒤늦게, 뒤처져 길 떠나는 이 낡고 늙은 시들이 제 힘으로 제 갈 길을 만들어낼 수 있을는지 걱정스럽다.”열 편으로 충분한 데도 마흔네 편이나 번역했던 것은, 더 강렬한 시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더운 여름을 자신의 시를 번역하면서 견뎌냈던 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은 자신의 시를 찾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을까.아이오와를 다녀온 후 최승자는 번역도 못하고 시도 못 쓰게 된다.그 이유에 대해 “언제부터인가 노장(老莊)·명리학·사상의학·점성술 등과 같은 신비주의 공부에 빠졌던 겁니다. 있는 대로 보이는 대로의 세계가 아닌, 현상을 뛰어넘는 세계로 좇아갔어요. 답이 있을 듯하면서 손에는 답을 쥐기 어려운 공부였어요. 그 공부에 빠지면서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최보식이 만난 사람: 정신분열증…. 11년 만에 시집을 낸 시인 최승자’, 조선일보, 2010.11.22.)라고 말했다. 언제부턴가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고, 서울의 친척집에 머물던 그녀는 1999년부터 고시원과 여관방을 떠돈다. 최승자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어느 해에는 여섯 달쯤 잠을 못 잤어요. 아무런 음식도 먹지 못했고. 잠을 못 자면 소주를 마시고 쓰러져 잤는데, 나중에 심해지면서 술을 마시는 것조차 생각나지 않았어요. 정신이 휑했지요.”최승자는 시에 매달려 살아갔다. 시가 “밥벌이를 할 수도 없고 이웃을 도울 수도 없고 혁명을 일으킬 수도 없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배고파 울 때에 같이 운다든가, 다른 사람들이 울지 않을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울어 버릴 수 있다는 것뿐이다.”(‘이 시대의 사랑’, 뒷면의 글)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시와 더불어 살았다. 배우가 자신의 캐릭터에 몰입하여 그 캐릭터와 같은 사람이 되어버리듯 최승자는 어느 순간부터 시를 쓰지 못하고 자신의 시속에 매몰되어 자신의 시처럼 살게 된다. 자신의 시처럼 비관적이고, 자신의 시처럼 혹독한 그런 삶을 살았던 것 같다.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다. 시인이 시가 되어버릴 때 시인의 생은 끝나고, 시인은 시인이 아니라 전설이 된다.이미 그녀가 알고 있었듯 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그녀는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시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길 바랐다.‘내 무덤, 푸르고’의 시집 뒤편에 “시 혹은 시 쓰기에 대해 이제까지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도 믿지도 않았지만, 이제 비로소 나는 바라고, 믿고 싶다. 시 혹은 시 쓰기가 내 마음을 병석에서 일으켜 세워줄 것을”이라고 썼다.그녀는 한편으로 시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시가 자신을 일으켜 세우길 바랐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겼던 것은 아닐까.그녀의 말처럼 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게 될 때 그것은 시일 수 없다. 오랜 세월을 떠돌았던 최승자는 다시 아무것도 아닌 시에게로 돌아와 있다. 이제 안도해도 좋다, 그럴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나는 지금 최승자의 시집들을 늘어놓고 그녀의 자서들을 읽고 있다. 그녀의 자서는 하나같이 짧아서 채 백 글자를 넘지 않는다. 이 짧은 자서에는, 글이 아니라 시로만 말하려고 했던 그녀의 의지가 숨겨져 있는 듯하다. 이제 나는 시를 읽는 대신 ‘이 시대의 사랑’을 펴놓고 시어들을 만지고 있다. 나의 지문이 시집 위를 지나갈 때 글자를 느낄 수 있다.그 글자들 덕분에 내 지문의 위치를 알게 되고 이런 지문을 가진 나를 실감하게 된다. 지문을 가진 나와 나를 휘감고 있는 대기와 빛과 소리, 그런 세계를 느낄 수 있다. 언젠가 나의 언어로 이 세계의 삶고, 이 세계에 없는 이들을 만질 수 있길 바란다.

2019-07-16

물건을 인쇄하다― 3D 프린터 기술에 대해

△제4차 산업혁명과 3D 프린터제3차 산업혁명은 아날로그 정보 중심의 사회를 디지털 중심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를 통해 정보를 담을 수 있는 특정한 매체나 디바이스를 여러 개 가질 필요 없이 한 곳에 담을 수 있었다. 그것이 컴퓨터다. 이런 정보를 네트워크를 통해 빠르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보자면 제3차 산업혁명의 중심에는 디지털, 컴퓨터, 인터넷이 있다. 그리고 이런 시대를 이끄는 물질적 기반은 반도체다. 반도체는 정보의 저장용량을 증대시키고 정보 처리속도를 향상시킴으로써 디지털이 일상화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그렇다면 제4차 산업혁명은 제3차 산업혁명과 다른 어떤 변별점을 가지고 있는가? 클라우스 슈밥은 제4차 산업혁명의 특징으로 “유비쿼터스 모바일 인터넷, 더 저렴하면서 작고 강력해진 센서, 인공지능과 기계학습”(25면)을 들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성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기술로 “인공지능, 로봇공학, 사물인터넷, 자율주행자동차, 3D 프린팅, 나노기술, 생명공학, 재료공학, 에너지 저장기술, 퀀텀 컴퓨팅”(11면) 등을 거론하고 있다.이러한 다양한 기술들 중에서 3D 프린터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올해 2월 중국 상하이에 3D 프린터로 만든 것들 중 가장 긴 다리가 완공되었다. 그 다리는 중국 상하이에 있으며 길이는 무려 26m에 달한다. 3D 프린터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찍다’라는 의미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책을 찍다우리나라 헌법 제2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언론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언론의 자유가 있으므로 자유롭게 생각이나 사상을 말할 수 있다. 이런 자유는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더욱 광범위하게 확장되었다. 컴퓨터가 발전하기 이전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글을 읽히게 하려면 인쇄를 해야 했다. 책을 출간한다는 말보다는 ‘책을 찍는다’라는 말을 썼다. 그런데 이 ‘찍는다’는 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인쇄를 하려면 나무나 쇠에 글자를 새겨야 한다. 다음에 그렇게 만들어진 글자에 잉크를 칠한 뒤 천이나 종이에 그 글자를 꾹 눌러 찍는다. 인쇄는 도장을 수없이 만들어 찍는 것과 같아서 ‘책을 찍는다’라고 했다.컴퓨터가 발전하면서 프린터를 사용하게 되었다.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레이저 프린터는 정전기의 원리를 이용하고 있다. 금속 원통에 레이저를 비추면 정전기로 글자 모양이 생긴다. 이 자리에 토너라고 불리는 다른 극성의 정전기를 띤 가루잉크를 뿌린다. 정전기의 원리를 이용하여 종이에 글자가 달라붙게 만든 후 열로 고정시킨다. 기본적으로 글자를 찍어낸다는 점에서 인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의 인쇄가 글자를 새기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과 노동력을 할애했다면, 레이저 프린터는 드럼에 글자를 새기는 것이 아니라 레이저로 비추기 때문에 인쇄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었다. 이런 프린터가 없었다면 1인 출판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그런데 ‘찍는다’라는 말은 인쇄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도 ‘물건을 찍는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영어로는 mold goods인데, mold란 ‘본을 뜨다, 거푸집을 만들다’이며 goods는 ‘상품’을 뜻한다. 예를 들어 종을 찍어내려면 종 모양의 거푸집이 필요하다. 여기에 쇳물을 붓고 그것이 굳으면 거푸집을 떼어내는데 이 때 거푸집 모양이 찍혀 종이 완성된다. 인쇄에 사용되는 새겨진 글자는 거푸집에 해당한다.레이저 프린터가 글자를 일일이 새기지 않으면서 비용과 시간과 노동력을 대폭 줄일 수 있었듯이, 신제품을 개발할 때 제조 과정에서 3D 프린터를 이용하여 거푸집을 만드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제조업에서 신제품 개발이 획기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물건을 찍다3D 프린터는 입체적으로 그려진 설계도를 미분의 방법을 이용하여 아주 얇은 막레이어(layer)로 잘게 잘라 분석한다. 레이어가 얇으면 얇을수록 물건이 더 정교해지는데 이 겹을 가루와 액체, 녹인 쇳물 등을 사용하여 무수히 쌓아 올려 물건을 만든다. 3차원 설계도면을 미분하여 분석하고, 이를 적분하면 물건이 된다.이러한 3D 프린터는 자동차를 비롯하여 제조업과 관련된 영역 전체로 확대되어 신제품 개발에서 모형을 만드는데 효율적으로 사용될 것이다. 오토데스크(Autodesk)가 설립한 로봇 회사 MX3D는 3D 프린터 기술과 로봇 기술을 접목해 2017년까지 암스테르담에 3D 프린터로 다리를 건설하기로 했다. 운하의 한쪽에서부터 철을 녹여 3D 프린팅할 수 있는 6축 로봇을 이용해 다리를 허공에서 바로 ‘출력’해 낸다. 이 다리의 길이는 7m 정도다. 3D 프린터를 이용하면 다양한 형태의 디자인이 가미된 다리를 만들 수 있으며, 인건비는 물론 제작기간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게 된다.3D프린터는 정교함을 필요로 하는 의료분야에서 폭넓게 응용되고 있다. 사람의 치아를 교정하거나 임플란트를 하려면 본을 떠야 한다. 예전에는 석고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인체에 무해한 알지 네이트, 폴리비닐실록산, 폴리설파이드와 같은 것을 사용한다. 이것은 액체에 가까운 물렁물렁한 고체인 졸(sol)로 되어 있다. 이것을 입에 넣고 꽉 물면 시간이 지나면서 고체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본을 바탕으로 보정치아를 만든다. 그런데 인체는 매우 미세해서 조금만 맞지 않아도 불편함을 느낀다. 3D 프린터를 사용하면 훨씬 정확하고 정교한 보정치아를 만들어 심을 수 있다. 또한 개인의 신체 규격에 딱 맞는 보청기도 만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더 세밀하고 정교한 것, 이를 테면 손상된 연골이나 뼈, 심지어 손상된 장기까지 개인 맞춤형으로 정확하게 만들 수 있다.3D 프린터를 이용하면 어떤 형태로든 디자이너의 콘셉트대로 옷을 만들 수도 있다. 이런 장점 덕분에 그동안의 기술로 불가능했던 디자인의 옷을 구현할 수 있다. 호랑이가 온몸을 감싸고 있는 듯한 옷이라든지, 천사의 날개 같은 디자인 말이다. 이 정도라면 앞에서 언급한 스프레이온 패브릭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3D 프린터의 또 다른 장점은 착용감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옷을 만들기 전에 몸의 치수를 재는 이유는 옷과 몸이 잘 맞아 맵시 있으면서 편안한 옷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래서라면 인체를 3D로 스캔하면 훨씬 정교하고 몸에 딱 맞는 맞춤형 옷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3D 프린터를 활용하면 창의적이고, 개성 넘치는 디자인을 적용한 자신만의 액세서리도 만들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단 하나밖에 없는, 고유한 명품 액세서리를 만들어 볼 수도 있다. 자기만의 취향이 강조된 디자인의 옷도 마음대로, 개성껏 만들어 입을 수 있다. 자동차의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는데 필요한 시제품 제작에 응용함으로써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고, 건설 분야에서도 독특한 디자인의 건물을 짓는데 3D 프린터로 찍어내 건설 비용과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이렇게 보면 3D 프린터는 청년들의 글로벌 감각, 도전적 모험의 식과 끼를 꽃피우는 도구가 되어 1인 창업도 활발해질 것이다. 이것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짧게는 수년 길게는 10년 안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술이 나가는 방향을 안다는 것은 변화할 미래를 예측하고 이를 준비하는 일인 것이다.

2019-07-10

너의 목소리가 들려 - 희곡 읽기에 대해

희곡이나 시나리오를 읽을 땐 배우들의 목소리를 상상적으로 떠올려 보면 좋다. 내가 연출가가 되어서 이 장면은 이렇게 연출하면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으면 훨씬 재미있다. 얼마 전엔 사람들과 모여서 이런 희곡 읽기를 했다. 사람들과 같이 책을 읽는 일은 참 좋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많은 희곡을 읽었지만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몰리에르의 ‘상상병 환자’이다.‘상상병 환자’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이 희곡을 번역한 정연복 선생님이 우리의 책 읽기를 풍문으로 듣고 우리의 독서 모임에 참여해 주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번역을 하면서 겪은 에피소드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다. 한 번 번역을 쫘악 해놓고 당신이 직접 소리 내어 대사를 읽어봤더니 도저히 공연이 불가능한 번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독성은 물론 발성까지 고려해서 싹 뜯어고쳤다고 한다. 참 훌륭한 번역가란 생각을 했다.전문가네 합시고, 이 작품의 원제가 ‘Le Malade imaginaire’이니까 제목은 ‘상상으로 앓는 환자’라고 번역해야 옳아! 라고 말하는, ‘내가 옳아병’에 걸린 전문가들도 많다. 그런데 정연복 선생님은 원제가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많이 알려준 제목을 선택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상상으로 앓는 환자’가 아무리 정확한 번역이라고 하더라도 ‘상상병 환자’보다 주인공의 의미가 더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생님의 그런 가치관도 좋았고, 번역은 유려했다.‘상상병 환자’는 1600년대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주인공은 아르강이다.아르강은 아무 병도 없지만 자신이 죽을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아르강의 주치의는 아르강의 그런 상상을 부추겨 비싼 약을 먹여 돈을 번다.이러한 아르강은 아내가 죽고 재혼하였는데, 두 번째 아내의 이름은 벨린느다. 벨린느도 의사처럼 사악해서 아르강이 죽으면 모든 유산을 자신이 독차지 하기 위해 아르강의 두 딸을 수녀로 만들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 프랑스 상속법에 따르면, 자식이 죽거나 수녀가 되면, 남편이 죽은 후 유산을 딸들에게 주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아르강의 두 딸은 모두 착한 데 첫째 딸인 안젤리끄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하지만 아르강은 자신의 주치의의 아들인 또마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고 싶어 한다. 그래야 주치의로부터 무료처방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또마는 의사가 될 예정이지만, 아주 멍청한 인물로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말하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인물이다. 몰리에르가 의사를 유독 사악하게 그린 이유는 몰리에르가 의사를 혐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시대의 프랑스의 의사들은 충분히 혐오를 받을 만한 짓을 했다. 실제로 모든 병의 원인이 치아라고 여겨 태양왕 루이 14세의 주치의는 루이의 이를 전부 뽑아버리도 했다. 또 의사들은 목욕이 해롭다는 이야기를 퍼트려 사람들은 목욕을 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프랑스 향수 발전에 많은 이바지를 했다고 한다.그리고 아주 중요한 등장인물 두 명이 더 남았다. 한 명은 아주 똑똑한 하녀인 뜨와네뜨이고 다른 한명은 아르강의 친동생인 베랄드다. 이들은 아르강이 계획한 멍청한 짓을 슬기롭게 막아낸다. 아르강의 멍청한 계획이란 안젤리끄를 또마와 결혼시키고, 벨린느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준다는 유서를 작성하려는 것이다. 뜨와네뜨와 베랄드는 아르강에게 죽은 척을 해보라고 한다. 그러자 벨린느는 아르강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 그의 유산을 모두 차지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었다 보기 좋게 아르강에게 들킨다. 하지만 안젤리끄는 아르강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는데 이를 통해 아르강은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안젤리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이 연극은 전형적인 희극으로 실제로 연극을 보면 재밌는 부분이 정말 많다. 정연복 선생님은 아주 재미난 해석을 해주셨는데, ‘상상병 환자’에서 일을 꾸미고 계획하는 사람은 아르강의 똑똑한 동생 베랄드 혹은 매우 명민한 하녀 뚜아네뜨가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을 했다. 정연복 선생님은 어쩌면 이 모든 해프닝의 중심에 아르강이 있고, 아르강이 이 모든 것을 기획하고 계획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주치의나 벨린느가 자신을 기만하고 자신의 돈을 축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아내 벨린느의 시커먼 속을 이미 모두 알고 있으면서 눈감아 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아르강은 벨린느의 악행과 악덕은 물론 안젤리끄의 선량함과 뚜아네뜨의 충성심까지 모두 뒤죽박죽으로 섞는 ‘한바탕 소동’이 되도록 조장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뒤죽박죽된 상태 이것이 삶의 진실이라는 것을 아르강이 선포하는 것이다.‘오이디푸스 왕’은 함께 책을 읽은 분들의 통찰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수업을 들으러 오시는 A는 희곡이 처음이라고,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그 독법이 치명적이었다. A는 ‘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며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자신의 잘못을 잘못으로 받아들이는 자, 오이디푸스! 그러나 그런 오이디푸스와 달리 치부를 끝끝내 거부하려고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B는 공감대장이었다. 모든 작품에 자신의 주위 분들을 대입해서 읽는 아주 독특한 독법을 보여주었다.이를 테면 오이디푸스를 읽으면 남편이 생각난다고 했다. 왜냐하면 오이디푸스는 진실을 혼자 알고, 혼자 고통스러워하면 되는데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진실을 알리고 또 자신의 고통까지 공유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A의 남편 역시 자신이 힘들면 혼자 이겨내지 못하고 꼭 주위 사람들이 자신이 힘든 걸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맨날 몸이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는 상상병 환자인 ‘아르강’은 또 A의 시어머니를 닮았다고 한다.그리고 무척 많은 비밀을 간직한, 목소리가 마치 성우 같았던 C도 있다. C는 ‘인간 본성에 대해서’(에드워드 윌슨)을 언급하면서 ‘벌의 행동의 가짓수가 인간의 범주에서 얼마 되지 않듯이 인간 행동의 가짓수도 더 큰 능력을 가진 자가 볼 땐 벌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오이디푸스 고통이라는 것도 자기 인식이 감당해야 할 정도의 크기 밖에 되지 않는다는….’나는 책 읽기를 진행하면서 특별히 한 것이 없다. 그냥 사람들과 책을 함께 읽고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그런 사람도 필요하니까 말이다.델리스파이스라는 가수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의 가사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 외에 다른 가사는 없고 이 말만 주구장창 반복한다.이 노래를 들어본 사람들은 이 무한히 반복되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말에서 ‘나’의 애절함을 떠올리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에 짜증 가득한 ‘나’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가수가 무엇을 의도하고 이 노래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작품이든 창작자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을 읽는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가를 찾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작품은 창작자가 아무리 열심히 책을 써도 그것을 읽는 독자가 없으면, 창작자가 작품을 쓰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듣는 것과 말하는 것. 나는 이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함께 독서 토론을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을 잘 들어주는 일일 것이다.왜냐하면 세상에는 좋은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이고, 정말 문제는 그 좋은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더 큰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19-07-03

미메시스와 바이오미메틱

△문학과 예술에서의 모방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과 예술의 핵심을 ‘미메시스’ 즉 모방으로 보았다. 철학자의 말이라고 해서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늘 모방하며 재현하고 있으니까.엘라 윌콕스(Ella Wheeler Wilcox ·1850~1919)의 시 ‘고독’은 “웃어라, 온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로 시작한다. 이 생소한 시인의 시는 영화 ‘올드 보이’를 통해서 널리 알려졌다. 이렇게 멋진 대사는 따라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미메시스는 곧 따라하기다.당황스럽거나 놀랄만한 사건을 경험했을 때 우리는 그 경험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려고 한다. 예컨대 버스에 두고 내린 지갑을 우여곡절 끝에 되찾았다면 친구에게 말하고 싶어한다. 어떡하다가 지갑을 버스에 두고 내렸는지, 버스에 두고 내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의 마음이 어땠는지, 그것을 어떻게 찾았는지, 지갑을 찾아준 사람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설명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게 된다.인간은 삶의 한 부분을 압축하거나 확장하여 중요한 순간을 재현하려 한다. 이것이 이야기며, 이야기는 경험을 구성하고 배치함으로써 완성된다. 이야기는 삶을 미메시스한다.미메시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닮고자 하는 마음, 흉내내고 싶다는 생각은 유전자 속에 이미 각인되어 있다. 이러한 미메시스의 욕망이 예술로 이어진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자연의 소리를 흉내 내면 음악이 되고, 자연이 만들어내는 찬란한 색과 형태를 흉내 내면 그림이 되고, 자연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기록하면 이야기가 된다.인간은 자연을 보면 따라하고 싶어하지만, 누구나 그런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자연을 흉내내려고 마음먹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재능이며 능력이다. 자연을 따라하지 않으면 결코 자연이 가진 능력을 가질 수 없다. 따라하는 것은 쉬워 보이지만 따라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잠재력과 가능성이 응축되었다. 따라할 만한 것을 찾는 것, 그것을 실제로 따라해보는 것 역시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미메시스는 인류를 가장 높은 차원으로 이끄는 최고의 원동력이다.△바이오미메틱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능력을 모방하려는 생각속에서 공학이 싹튼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바이오미메틱이 그것이다. 생명체를 모방하는 이 기술은 오래 전부터 행해져왔는데, 앞에서 말한 거미줄을 모방하는 것은 물론 비행기가 새의 날개로부터 영감을 얻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스위스의 전기기술자 조르주 드 메스트랄(George de Mestral·1907∼1990)은 엉겅퀴 열매를 모방하여 일명 ‘찍찍이’라고 불리는 벨크로(Velcro)를 만들었다. 이것은 프랑스어로 ‘벨벳’을 뜻하는 ‘벨루(velour)’와 ‘고리’를 뜻하는 ‘크로셰(crochet)’의 합성어다. 이런 벨크로는 단추나 지퍼를 대신하여 옷, 신발, 가방 등에 사용된다.벨크로는 쉽게 붙이고 뗄 수 있지만 접착력은 그렇게 강하지 않다. 이보다 강한 접착력을 가지면서도 쉽게 떼는 것도 가능한 것이 있을까? 공학자들은 게코(Gecko) 도마뱀에 주목했다. 게코 도마뱀은 긴 발톱이나 갈고리가 없이도 나뭇가지나 천장에 안정적으로 매달릴 수 있는 놀라운 흡착 능력을 가지고 있다. 게코 도마뱀이 지닌 흡착력은 수십 킬로그램을 매달아도 될 정도다. 그렇게 강하게 붙을 수 있으며 또 쉽게 뗄 수도 있다. 그러니 게코 도마뱀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것일까? 게코 도마뱀이 어떤 접착 물질도 분비되지 않는데도 놀라운 접지력을 발휘할 수 있는 비밀은 발바닥에 있다. 발바닥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나노 크기의 섬모 수십억 개가 촘촘하게 나 있다. 이렇게 미세한 나노구조의 물질은 주변의 물질과 전기적, 분자간의 인력으로 살짝 들러붙게 되는데 이것을 ‘반데르발스 힘(van der Waals force)’이라고 한다. 각각의 섬모에 작용하는 힘은 아주 작지만 그 수가 수십억 개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게코 도마뱀의 발바닥은 1c㎡당 약 1kg의 무게를 견딜 수 있다. 흡착력만 뛰어나다면 뗄 수가 없으니 아무 쓸모가 없다.하지만 섬모는 결을 이루고 있어 그 결을 이용하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뗄 수 있게 된다. 게코 도마뱀의 흡착력을 이용할 수 있다면 인간 역시 벽이나 천장을 스파이더맨처럼 땅위를 걷듯 편안하게 걸을 수 있게 될 것이다.한 시인은 토란잎에 구르는 물방울을 보며 이런 시를 썼다.“그걸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되나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대면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그 둥근 표정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토란잎이 물방울을 털어내기도 전에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되나”-‘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같이는’(복효근) 전문시인이 토란잎에 영감을 받아 물방울처럼 둥근 리듬의 시를 쓰는 동안 공학자들은 토란이나 연잎에 어떻게 물방울이 궁글 수 있는지, 또 어떻게 스스로 물방울을 털어내는지를 알고 싶어했다. 잎에 물이 묻으면 식물의 호흡기관인 기공이 닫혀 호흡을 할 수 없게 된다. 연잎은 표면에 무수한 나노 단위의 돌기들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한다. 이 미세한 돌기들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면, 물방울은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표면적을 최소화한다. 그래서 물방울은 동글동글해지고 연잎의 표면을 구를 뿐 그 좁은 돌기의 틈새로 파고들지 못한다. 자연은 이토록 치밀하며 이토록 정교하다. 나노 돌기를 이용하여 물의 흡수를 막는 방법을 사용하는 식물로는 벼의 잎사귀가 있고, 곤충으로는 모포 나비가 있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공학자들은 셀프 클리닝(Self-Cleaning) 기술을 탄생시켰다. 연잎과 같이 나노돌기를 만들어 주면 물에 젖지 않는다. 또 먼지나 세균 같은 것도 물방울처럼 나노 돌기에 떠 있는 상태가 되므로 표면이 오염되지 않는다. 비가 올 경우 물방울이 굴러내리며 먼지나 세균 등을 씻어내게 되므로 자동세척이 이뤄진다.상암 월드컵 경기장을 덮고 있는 흰 천이 몇 년이 지나도 더럽혀지지 않는 것은 이 셀프 클리닝 기술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술을 우리가 입는 일상복에 사용하면 커피, 소스와 같이 다양한 액체에 의해 옷이 더럽혀 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 외에도 자동차의 표면, 건물의 외벽이나 유리창에도 사용할 수 있다.미메시스는 문학의 전유물이 아니다. 미메시스는 일종의 본능이며, 이것은 어쩌면 문학보다 공학이 먼저인지도 모른다.

2019-06-26

댄디와 데카당스에 대해

영어의 댄디(dandy)는 ‘멋쟁이’를 뜻하며 댄디즘(dandyism)은 ‘멋쟁이 취미’를 뜻한다. 하지만 이들은 천박한 멋쟁이가 아니라 속물주의를 배격하며 정신적 귀족주의를 자칭하는 ‘진짜’ 멋쟁이를 일컫는다. 이러한 멋쟁이들은 지금도 프랑스에 많이 살고 있는데, 과거에는 조금 심했던 것 같다. 그들은 얼마나 멋쟁이였을까? 이를 위해서라면 댄디에 대한 묘사를 한 번 따라가 보는 것이 좋겠다.“귀금속 세공사 르콩트가 세공했다는 발작의 지팡이는 신화가 되었다. 끝이 금으로 된 그의 등나무 지팡이 끝에는 수많은 터키석이 박혀 있고 중앙의 작은 구멍 안에는 한스카 부인의 초상화와 그녀의 머리카락 한 움큼이 들어있다. 당시 발작은 이 지팡이 값으로 700프랑 가까이 되는 돈을 세공사에게 지불해야 했는데, 그 값어치는 파시 거리에 있던 그의 집 일 년 치 집세 만큼이었다고 한다. 댄디에게 있어 지팡이가 대변하는 소품이 단순한 과시 이상의 대상, 즉 숭배의 대상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여기서 ‘구별’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이탈리아의 초상화가 조반니 볼디니가 그린 몽테스키외의 초상을 보면 된다. 댄디 스타일의 가장 완벽한 이미지로 평가받는 그의 초상화에는 고전적인 절제미와 우아함, 19세기 후반의 현대성이 동시에 반영되어 있다. 갈색과 회색이라는 동색 계열의 양복은 모델의 섬세함을 나타내지만, 무심한 듯한 얼굴과 지팡이를 든 거만한 몸짓은 특권층의 그것에서처럼 거리감을 만든다. 한편으로는 드러내고 한편으로는 적당한 거리두기를 통해 진실을 숨기고자 하는 댄디의 욕망을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어쩌면 댄디가 그토록 원했던 구별의 욕망은 실상 숨고자 하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 몽테스키외의 초상에 영감을 받은 마르셀 프루스트는 후에 샤를뤼 남작이라는 인물을 창조하기도 했다.” (조은라, ‘댄디즘 - 이념과 형식의 철학’, 프랑스문화예술연구 41, 프랑스문화예술학회, 2012.8, 420~421).그런데 이러한 댄디는 퇴폐를 뜻하는 데카당스와 함께 연계되어 불린다. 댄디는 데카당스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데카당스란 파손, 폐허, 부패, 더 분명하게는 퇴행적 현상이다. 이렇게 서로 어울려 보이지 않는 단어들은 어쩌다 짝패가 된 것일까?이를 위해서는 근대성의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근대성은 낭만주의와의 비교를 통해 분명해진다. 낭만주의는 목가적이며 전원적이다.이와 달리 모더니티는 도시적 감수성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낭만주의는 농업중심의 경제구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면 근대성은 도시성과 자본주의적 경제구조를 근간으로 한다. 이러한 도시적 속성의 핵심에는 벤야민이 언급한 바와 같이 속도와 이러한 속도가 만들어내는 촉각적이며 즉각적인 반응이 놓여 있다.대중들은 대량생산되는 상품을 더 빨리 소비하고, 그 소비가 효력을 잃기 전에 또 다시 소비한다. 소비의 속도를 만드는 주체는 대중이 아니라 상품이다. 오히려 상품이 소비의 속도를 부추긴다. 상품은 망치로 내려치는 충격과 같은 직접성을 가지며, 대중은 그러한 상품 앞에서 이성과 합리성을 마비당한 채 계속해서 소비한다. 근대는 이성과 합리를 요구하지만, 근대적 자본이 만들어낸 상품은 비이성적이며 비합리적인 충동적 소비를 강요한다. 근대적 군중은 근대적 자본이 만들어낸 상품의 시장을 휩쓸면서 동시에 스스로 휩쓸린다.자본주의는 상품의 생산력과 제품의 질적 향상을 진보라고 부른다. 이러한 진보의 끝에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처럼 광고한다. 하지만 그 끝은 영원히 걸어도 닿을 수 없는 소실점과도 같다.‘미델하르니스의 길’에서처럼 하나로 모여지는 점 따위는 멀리서 관조할 때만 나타난다.직접 그 길에서 걸으면 소실점은 항상 소실점으로만 나타날뿐 결코 하나의 점으로 모아지는 곳은 없다. 무한함수처럼 언젠가 어떤 수로 수렴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무리 늘어놓아도 수렴되지 않는다. 유토피아는 진보의 속도가 아무리 빠르더라도 그 속도만큼 뒤로 물러날 뿐 그 윤곽조차 보이지 않는다. 늘 그만큼의 점만으로 존재한다. 그러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근대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속도며 그러한 속도를 기반으로 한 진보다.데카당스와 댄디즘은 이러한 근대적 진보에 저항한다. 데카당스를 이루고 있는 수다한 의미 중 퇴행성은 퇴폐의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말일 것이다. 퇴폐는 근대적 진보에 저항하며 그 자리에서 썩어가고자 한다. 이 퇴행은 근대의 진보적 정신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러한 정신 전체를 파괴하고 폐기시킨다.댄디즘은 이러한 데카당스와 공모한다. 댄디즘은 기본적으로 근대적 대량생산에 반대한다. 대량생산에 반대한다는 것은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수치화나 표준화를 반대한다.예컨대 로베르 드 몽테스키외 백작(Robert de Montesquiou·1855∼1921)은 슈트와 그가 낀 장갑과 오른손에 든 지팡이까지도 결코 대량생산 될 수 없는 수공예품으로 자신을 감싸고 있다.그램 질로크는 댄디로서의 산책자를 언급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이 산책자의 유일한 일”이라고 했다. 이것은 매우 적확한 지적이긴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은 수긍하기 어렵다. 그램 질로크는 댄디를 영웅주의에서 기인하는 자기과시 정도로 치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댄디를 “단지 속이 빈 저항”을 일삼는 게으름뱅이, “영웅이면서 영웅주의를 연기”하는 사기꾼 정도로 단정짓는다. 그러면서도 “불현듯 꿈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게으른 몽상가이기에 현대성의 참된 영웅”이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결론으로 논의를 마무리짓고 있다(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304∼311면).그런데 왜 댄디가 ‘영웅적 성격’의 소유자인 것일까. 벤야민은 댄디가 가진 낭만성을 완전히 제거한 자리에서 교환가치나 사용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무용의 가치’ 즉 ‘전시가치’를 발견해 내고 있다. 자본은 노동을 어떻게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방식으로 이끌어갈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러한 효율성의 결과로 성립되는 것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다.하지만 전시가치는 오로지 스스로를 과시할 뿐이다. 댄디는 아케이드를 런 어웨이처럼 오가며 자신을 과시한다. 그러한 전시는 결코 자본이나 전시로 환원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이 자본주의 스스로를 붕괴시킬 수 있는 균열지점이다. 아감벤식으로 말하면 이 장치가 포획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를 자본주의적인 목적으로부터 떼어내 헛돌게 만드는 일이며, 그리하여 새로운 가치를 열어 보이는 일이기 때문이다(세속화 예찬, 134면).댄디는 돈의 경제적 쓰임과도 무관하게 사치하며 게으름뱅이와 같은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근대적 자본이 추구하는 이윤, 축적, 소유의 관념을 무너뜨리고 오로지 돈의 사용 자체에 몰입한다. 댄디는 비효율적 생산, 이윤 없는 소비를 일삼으며 생산과 소비, 이윤과 효율이라는 자본주의의 핵심적 두 축을 무력화시킨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이것은 어떤 특정한 방향을 가진 가능성이 아닌 텅빈 공간을 만들어내는 가능성이다. 가능성은 오직 잠재태로 존재하며 그 잠재태의 가능성은 과거의 흘러간 이미지 속에 담긴 미래의 흔적을 발견하는 현재(지금-여기)의 임무다.현재는 규정될 수 없고, 관조될 수 없으므로 잠재적인 것은 늘 잠재적인 것으로 남는다. 댄디은 근대를 과거로 되돌리지 않는다. 다만 근대적 속도를 무화시켜 제자리에 머무르게 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을 느낀 근대성은 데카당스와 댄디를 인신공격하여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추방시킨다. 하지만 추방될 리 없다.왜냐하면 데카당스와 댄디는 근대성과 함께 태동한 것이지 근대성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댄디와 데카당스는 근대적 정신과 더불어 언제든 균열과 전복의 지점으로 남는다.

2019-06-19

‘쓸모없는 기계’와 방탄소년단

△쓸모없는 기계여기 디지털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기계가 있다. 이 기계를 본 공상과학소설가 아서 클라크(Arthur C. Clarke)는 이 장치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이보다 더 간단할 수 없다. 시거 상자 크기의 조그만 나무상자위에 한 개의 스위치가 달려있다. 만약 스위치를 올리면, 분노의 목적성 있는 진동이 일어난다. 뚜껑이 천천히 열리며, 바닥에서 손이 떠오른다. 그 손은 스위치를 아래로 내리고 상자 안으로 도로 들어간다. 관이 최후에 닫히듯이 뚜껑은 철컥 닫히고, 진동은 멈춘 후에 이전의 평화로움으로 돌아간다.”클라크 아서는 뭔가 굉장한 장치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이 기계는 아주 간단하게 작동한다. 상자 위의 스위치를 켜면 상자 속에 있는 로봇팔이 나와 스위치를 끄고 들어가버린다. 이것이 전부다. 사람들이 이 기계에 붙인 이름은 ‘쓸모없는 기계(Useless Machine)’다. 더 가혹하게는 ‘가장 쓸모없는 기계(The Useless Machine)’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클라우드 섀넌과 함께 이 기계를 고안한 마빈 민스키(Marvin Minsky)는 ‘궁극의 기계(ultimate machine)’라 명명했다. (마빈 민스키는 MIT의 인공지능 연구소의 공동 설립자로 인공지능(AI) 분야를 개척한 과학자다.)이 기계는 스위치를 켜(on)면 끈(off)다. ‘on’과 ‘off’이라는 정보, 인간에게는 무척 단순해 보이는 정보지만, 기계가 인간의 언어를 알 리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언어를 기계가 알 수 있는 언어로 바꿀 필요가 있다. 이렇게 전환된 정보를 디지털(Digital)이라 부른다. 그런 점에서 궁극의 기계는 디지털 기계의 장단점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기계라 할 수 있다.간단히 말해 디지털은 중간값을 가지지 않는데, 쉽게 말해 디지털은 애매모호한 것을 기록하지 않는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디지털은 애매모호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며, 그것을 표현할 방법도 없고, 따라서 표현도 할 수 없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것이 디지털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장이기도 하다.그런데 세계는 분명한 것이 아니라 애매모호한 것이 훨씬 많다. 세상에 노란색보다는 노르스름한 색이 더 많으며, 인간의 감정은 좋으면서도 좋지 않고, 슬프지만 나쁘지 않은 감정을 가질 때가 많다. 디지털은 이런 것을 표현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기계는 인문학적이지 않으며, 사람들은 이것을 디지털의 한계라 말하고, 때로는 이런 식의 디지털화에 거부감을 보이기도 한다.이것은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디지털에 대해서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런 문제는 디지털의 부분적 문제이며 개선 가능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지금의 디지털은 아날로그를 뛰어넘어서고 있다. 대상을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비판을 위해서라도 디지털이 이룩한 거대한 변화와 그것이 가져올 변화에 대해서 아는 것이 좋다.△‘지금 여기에서’의 디지털 혁명방탄소년단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빌보드 차트에 1위에 올랐다. 그 힘은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방탄소년단은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기 전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신곡인 ‘Fake Love’를 발표했다. 이것이 놀라운 이유는 히트곡이 아니라 신곡을 시상식 장에서 선보였기 때문이다. 지난 1년 사이 크게 인기를 끈 대스타 한 명의 공연을 빼고 방탄소년단의 신곡이 들어갔다는 것인데, 이런 신곡 발표는 비욘세, 레이디 가가와 같은 슈퍼스타들에게만 허용된다. 방탄소년단이 그런 대우를 받았다.이보다 흥미로운 것은 방탄소년단의 새 앨범이 공개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더욱이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 팬들은 한국식 ‘떼창’과 한글 피켓을 선보였다. 미국팬들은 SNS와 유튜브를 타고 번지는 번역된 가사와 영상물을 접하며 노래를 익히고, 어떤 지점에서 노래를 따라 불러야 하고, 어떤 부분에서 가수들의 이름을 외쳐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이를 통해 개인의 외침이 아니라 팬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외치는 ‘떼창’이 가능할 수 있었다.SNS와 유투브에 올라오는 방탄소년단의 콘텐츠는 소속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미(A.R.M.Y)’들에 의해 생산된다. 방탄소년의 팬클럽을 총칭하는 말이다. 방탄소년단이 가진 총기 이미지와 결합한 ‘아미’는 그야말로 ‘군대’를 방불케 한다. 이들은 노래가 출시되자 마자 자발적으로 노래를 영어, 일어, 중국어, 아랍어 등으로 번역하여 전 세계로 순식간에 송출한다.‘아미’들은 단순히 뮤직비디오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가사에서 다 말하지 못한 곡의 주제와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 뮤직비디오, 프롤로그, 티져 등을 분석한다. 그리고 이 파편적인 영상물 속에서 유기성을 발견하고 재해석한다. 이렇게 방탄소년단의 노래는 새롭게 분석되어 다시 송출된다. 아미는 모바일 네트워크를 통해 메시지를 재생산한다. 이들은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다. 방탄소년단과 아미의 수평적 소통과 상화작용, 이것을 ‘BTS: 예술혁명’의 저자 이지영은 ‘네트워크 이미지’라고 불렀으며, 이것이 예술을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킨다고 말했다.‘아미’들은 SNS를 통해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퍼 나르고 자신들이 재생산한 이미지를 확산시킨다. SNS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을 넘어선지 오래다. 과거에 마케팅이 신문이나 TV를 통해서 이뤄졌다면, SNS를 활용한 마케팅은 필수다. 페이스북 사용자수는 20억 명을 돌파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 자체가 거대한 시장이 된다. 이런 시장에서는 욕구가 분출한다. 더욱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광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터넷 검색 성향, 게시하는 글, 좋아요 등을 분석하여 맞춤식 광고를 보낼 수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디지털을 통해서 가능해진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전체는 전체와 엮여 있다.제4차 산업혁명 시대, 언제든 누구든 어디에서든 모바일을 통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기술을 바탕으로 더 많은 정보가 생산되고 더 많은 정보가 유통된다.그리고 늘 소비자에 있었던 소비자들이 생산자의 영역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예컨대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진기, 카메라, 편집기와 같은 생산수단은 값이 비쌌고 많은 수의 전문 인력이 다루었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은 그런 생산수단을 소비자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결국 소비자와 생산자 간의 경계가 사라졌다. 그리하여 정보를 누구나 생산하고 유통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이전보다 훨씬 더 정보량이 늘어난다. 이렇게 늘어난 정보량은 새로운 기계와 새로운 기술을 추동한다.아날로그 정보를 디지털 정보로 바꾸는 것도 공학이며, 이런 정보를 저장하고 저장속도 및 처리 속도를 높일 수 있는 반도체와 같은 물리적 기반을 만드는 것 역시 공학이다. 공학은 특정한 분야에 한정되지 않고 전체와 엮여 있다.정보기술은 통신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통신기술은 컴퓨터와 관련을 맺고 있다. 이같은 얽힘들 속에서 정보기술은 통신기술을 추동하고 통신기술은 컴퓨터 기술을 향상시키고 사회는 변화한다. 변화한 사회가 다시 기술발전에 영향을 미친다. 이 거대한 선순환의 구조를 공학이 만들어내고 있다.

2019-06-12

철지난 영화 읽기

△1980년대의 알레고리로서의 ‘살인의 추억’봉준호 감독이 칸에서 황금 종려상을 받았다. 봉준호는 그 이전부터 주목을 받았는데, 그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영화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살인의 추억’이다. 이 영화가 상영되었을 때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것은 이 소재의 특수성도 있었을 것이나 무엇보다 제목에서 오는 낯섦 혹은 불편함 때문이었다. ‘살인’이라는 말과 ‘추억’이라는 이 어울리지 않는 말의 조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비록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연쇄 살인자가 피해자 발견 장소에 다녀갔음을 암시함으로써 제목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려 한다. 그럼에도 제목에 대한 불편함은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가 이 제목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을 때 범인의 악마성이 드러나며 그로 인해 우리는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이렇게 “살인의 추억”은 제목과 그 소재의 무게감을 통해 관객에게 스스로를 각인시킨다.그러나 이 영화의 의도가 범죄자의 악마성과 범행의 잔혹함을 통해 관객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려는데 있는 것은 단연코 아니다. 도리어 이 영화는 80년대 말의 한국사회와 정치에 대한 우회적 말하기를 시도한다.이 영화의 중심 이야기는 범인을 잡느냐, 잡지 못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범인이며, 어떻게 범인을 범인으로 입증하느냐 하는가에 있다. 사건은 분명 실체로 나타났으며 심증이 가는 용의자 또한 있다. 그러나 이 용의자에 대한 물증은 없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관념은 명확하나 그 존재를 증명할 현상을 찾을 수 없는 즉 ‘실재’와 ‘실제’의 문제로 치환된다.이 실제를 확인하기 위해 박두만과 서태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수사를 벌인다. 이를테면 박두만은 직관과 통찰이라는 선험적 방법으로, 서태윤은 자료의 분석이라는 경험적 방법으로 그 본질(범인)에 다가서려 한다. 이 방법의 변증을 통해 그들은 본질에 대해 다가가고, 하마터면 그들은 ‘존재의 본질’을 확인할 뻔 한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해 온 ‘존재’는 존재가 아닌 ‘존재자’였을 뿐이다. 존재와 존재자를 확인시킬 수 있는 물리적 증거라 여겨지는 정액검사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존재와 존재자는 ‘차이’를 가지게 되고, 존재는 더 이상 ‘드러냄’을 꺼린다.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이러한 철학적 문제만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를 테면 범인을 체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경찰 동원이 이뤄지지 못하는데 그 이유가 인근 지역의 경찰 대부분이 데모 진압을 위해 동원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정, 조용구 형사의 군화가 갖는 상징성과 폭력성, 이런 것들은 그 시대에 대한 우회적이고도 간접적인 말하기 장치라 할 수 있다.1970년을 거쳐 80년으로 들어오면서 한국의 사회는 한층 더 산업화와 도시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독재는 새로운 이름으로 나타났고 민중은 여전히 그들의 군화발을 감내해야 했다.인간 존재에 대한 믿음과 이상, 이런 것들은 관념적인 어떤 것으로 분류되었다. 현실은 이런 이상사회 건설보다는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성과에 더 많은 기대를 걸었다. 즉 민중의 요구는 관념적 ‘실재’로 치부되었고, 정치가와 기득권은 ‘실제’적 성과를 얻기 위해 민중을 수탈하였다. 민중은 분노하였고 스스로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실력 행사를 하였다. 80년대 말 이 노동자 대투쟁은 대통령 직선제 선출이라는 결과물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4·19혁명이 그랬듯이 정권의 이양 방법만 달라졌을 뿐 그 구조적 질서는 변화하지 않은 실패한 혁명이었다. 그 모순의 질서를 극복하기 위해 민중은 또 다시 싸워야만 했고, 그 투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즉 80년대는 민주 사회 건설이라는 ‘실재’를 실체화하기 위한 도정의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실재적 범인을 실체화하려는 이 영화는 스릴러가 아닌 80년 말 한국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올드 미스 다이어리’와 2000년대식 사랑염상섭은 ‘삼대’라는 소설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중재할 대안적 세대로 덕기를 내세웠다. 민족문학파였던 염상섭은 KAFF의 유물론적 사관에 영향을 받기라도 한 듯 세대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진보한다. 이후 이 소설의 개작에서 그는 더욱 덕기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새 세대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정말 염상섭의 생각이었다면 그는 중요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왜냐하면 조의관과 수원댁 사이에서 난 딸아이의 삶의 문제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를 잃고 아버지 같은 조카(덕기)의 집에서 살아야 하는 이 딸아이의 삶은 그 자체로 이미 비극이다.그럼에도 1930년대 이러한 세대 모티프는 이광수, 채만식, 이태준 등의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트렌드였으며, 다른 세대에 대한 희망, 그것이 그 시대를 헤쳐갈 수 있는 하나의 탈출구로 작용하였을 것이다.그렇다면 IMF와 FTA라는 급격한 국제정세에 휘말려 있는 2000년대 세대 모티프는 어떠할까? 이러한 질문이 “올드 미스 다이어리”라는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영화는 민족도 국가도 민족의 미래에 대한 영화가 아닌 한 노처녀의 사랑 성공담이니까…. 굳이 소설 “삼대”와 이 영화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그것은 삼대(三代)를 다루고 있다는 것 하나뿐이다.염상섭의 소설과 70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조의관은 죽은 후 제삿밥을 걱정하는 구닥다리 할아버지이다. 반면 이 영화 속 세 할머니는 살아있는 지금을 후회 없이 살려고 노력한다. 꽃무늬 속옷과 연애, 조의관이 가진 관념적 사고에 비해 그 얼마나 생동감 있는가. 조의관이 현세와 내세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진 존재라면 이 영화 속 할머니들은 그것을 거부한다. 그들이 현실 속에 당당히 발을 내딛고 그 삶에 집중할 때, 그들은 더 이상 고리타분한 구세대가 아니다. 젊은 세대와 나란히 호흡할 수 있는 세대, 아니 세대적 경계나 구분 그 자체를 허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세대라는 것을 보여준다.영옥과 혜옥이 승현의 사랑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지켜 볼 때 윤아와 지영(미자의 친구들)의 목소리로 더빙되어 나오는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장면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1930년대가 새 세대를 기다렸다면, 2000년대는 우리에게 한 세대에 대한 고정관념에 대한 탈피를 원하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이 질곡의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세대가 아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이며, 그 시작은 헐리우드의 영웅들이 밥 먹듯 떠드는 국가와 민족과 인류가 아니라 바로 우리 소시민의 사소하고도 사소한 생활의 변화임을 역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이 영화에서 주목해야할 또 다른 하나는 ‘사랑=결혼’라는 공식을 거부한다는데 있다. 할머니 승현이 원하는 것은 결혼이 아니다. 서른두 살 최미자가 원하는 것은 결혼이 아니라 연애 곧 사랑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사랑담은 재기발랄하다.물론 사랑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주제였다. 그러나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 사랑의 주인공은 공주나 왕자 아니면, 권력과 부를 가진 평범하지 않은 소수의 전유물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지고지순하며, 또 운명과도 같고, 목숨이라도 버릴 수 있는 낭만적 사랑이었다.이제 사랑은 바로 우리 주변에 있으며, 사랑은 어떤 식으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존재로 변모하고 있다. 어쩌면 사랑이 그 가치를 잃어가고 있으며, 우리의 삶이 이전 보다 훨씬 타락해간다고 여길지도 모른다.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사랑은 그저 다이어트를 했을 뿐이다. 사랑 옆에 의무처럼 따라오는 결혼과 결별했을 뿐이다. 결혼과 하나인 줄 안 사랑이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확인했을 뿐이다. 이제 자유를 찾은 사랑이 우리를 찾아오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랑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바로 우리의 몫이다.

2019-05-29

바다를 추억함

△‘노킹 온 헤븐스 도어’혼자 간 영화관에서 본 기억도 게슴츠레한 ‘노킹 온 헤븐스 도어’라는 영화를 떠올린다. 뇌종양을 앓고 있는 루디와 골수암으로 죽어가는 마틴은 죽음의 언저리에서 바다를 향해 달려간다. ‘천국은 너무도 지리멸렬하여 바다이야기 밖엔 할 이야기가 없다’라는 이상한 믿음과 함께. 이것은 어쩌면 독일에서는 가능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독일에서 바다까지는 너무도 멀고, 그들은 겨우 바다에 이르고, 파도소리는 너무도 청명하여 어떤 기계음으로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을 따러 간 사이 혼자 남은 아가가 집을 보다 파도소리에 잠이 들만큼 그 소리는 감미롭다. 바다엔 파도 소리와 더불어 그들의 허름한 차와 훔쳐온 데낄라 한 병이 있다. 반병도 비우기 전에 루디는 죽어버리고 마틴은 혼자 남아, 남은 테킬라를 마시며 죽어간다.그런 와중에도 파도는 끊임없이 너울진다. 파도는 파도쳐 푸르기만 한데 영화는 그렇게, 밥 딜런의 ‘knockin’ on heaven’s door’가 천천히 흘러나오는 가운데 그렇게 끝이 난다.△산골에서 바다 생각하기신풍령을 넘으면 무주구천동이었다. 신풍령의 어느 능선에 있는 우리 동네 골터는 산동네 중에서도 산동네였다. 오죽하면 가정방문 온 선생님이 정말 하늘과 가까운 동네라며 감탄을 했을까?멀리서 다가온 구름은 신풍령을 넘지 못하고 그 고갯마루에 몰려 검게 변해갔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비 아니면 눈이 내렸다. 눈은 겨울이면 사흘이 멀다 하고 내렸지만, 내릴 때마다 신기하기만 하였다. 일곱 집 우리 동네엔 개도 짖지 않았고, 눈은 시나브로 쌓여 뒤안 대나무를 활처럼 휘어놓기도 하였고, 동네를 나가는 유일한 길목을 막아 놓기도 하였다. 그렇게 자주 눈이 내렸지만 여름보다는 겨울이 훨씬 수월하였다. 온통 나무였고, 온통 산이었고, 그 사이로 드문드문 드러나는 것은 하늘이었다. 커다란 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넓은 저수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물며 넓은 들마저도 없었다. 골짜기는 마주보는 산과 산이 가까워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런 곳이었기에 오히려 하늘과 바다가 닿아 기다란 선을 긋는다는 바다를 더욱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첫 사랑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렇다고 짝사랑은 아니었다. 그녀와 나는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쩌다 그녀의 눈과 마주치면, 남에게 들킬까봐 두방망이질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그녀의 눈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바라만 보아도 온몸은 타들어가는 것처럼 떨렸다. 연애도 아니었고 짝사랑도 아니었다. 분명 사랑이었다. 그럼에도 남의 눈을 의식하느라 그녀 옆에서 나란히 걸을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우리의 그 이상한 관계도 시간을 따라 그렇게 기억 저편으로 달아나버렸다.우연히 졸업 전시회에 갔다가 그녀를 다시 만났다. 아무나 주려고 가져갔던 백합 한 다발을 그녀에게 안겨주었다. 우연처럼 혹은 우연이 아닌 것처럼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입대영장이 날아왔다. 혼자 앓아야 했다. 입대를 채 일주일도 안 남겼을 무렵,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알 수 없다. 불쑥 그녀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했다. 그녀가 말할 틈도 없이 그리고 내일쯤엔 어느 바다에라도 가자고 했다. 따귀라도 때릴 줄 알았던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그러겠노라고 하였다.왜 하필이면 통영이었을까? 어줍지도 않게 그 때 읽고 있었던 ‘김약국의 딸들’때문이었을까? 아마 군대는 나의 젊음을 몰락으로 몰아가는 바다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을 것이다. 마치 김약국의 집안을 비운과 몰락으로 몰고 가는 그 바다처럼…. 그래서 나는 통영의 쓸쓸한 겨울 바다를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통영까지는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바다는 생각했던 것보다 아름답지도 쓸쓸하지도 않았다. 사실은 아름다운지 아닌지 느낄 겨를이 없었다. 내 옆에 있는 그녀의 흰 피부는 바다보다 더 차갑고 투명해 보였고 그래서 그녀는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우리는 500m도 되지 않는 해저터널을 지루하도록 느리게 걸었다. 그곳을 지나는 사람은 없었다. 바다가 터널로 밀려들었다면 덜 어색했을까. 우리는 컴컴한 터널의 정적 속을 말도 없이 하염없이 걸었다. 그녀의 손은 고왔고, 목도리를 벗은 그녀의 목은 희었지만, 나는 손을 잡을 생각도 못한 채 마른침을 삼키며, 자꾸 그녀와 부딪히는 내 왼팔을 원망스러워하며, 백년보다 천년보다 더 길게 걸었다.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녀는 곤히 잠에 취했다. 용기였을까? 참을 수 없음이었을까? 모으고 있던 두 손을 간신히 뻗어 그녀의 손등에 조심스럽게 얹었다. 그녀의 차가운 손이 스르르 풀리며 내 손을 다시 감싸 안던 그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차장 밖으로 멀어져가는 바다에는 밤이 내렸고, 바다 위 별들은 밤바람에 몸을 떨었다.△삼천포의 달나는 늘 삼천포로 빠지더니 결국엔 진짜 삼천포에서 군 생활을 했다. 저녁 식사 전에 남해로 지는 태양의 그늘은 바다마저 붉게 물들였다. 동해와 달리 드문드문 섬으로 이어지는 남해, 그리고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남해대교와 그 사이로 석양은 앉은 자리에서 한 갑의 담배를 태우고 남을 만큼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어느 해 겨울. 아침 점호를 기다리는 우릴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그 달을 잊을 수가 없다. 꽉찬 달은 힘겹게 산을 넘어가고 있었고, 꼭 영화 ‘이티(ET)’의 포스터에서 보았던 달 만큼이나 컸고, 그 빛은 겨울 새벽바람을 잊게 할 만큼 자애로웠다.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그 생경한 모습을 보면서 엉뚱한 상상을 했다. 저 달이 바다 저기쯤에 풍덩하고 떨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그런 상상. 그러면 그 커다란 달은 깊이도 알 수 없는 바다 저 밑으로 한 없이 떨어질 것이고, 그 커다란 달에 놀란 고등어, 갈치, 숭어, 망둥이 할 것 없이 모두 뛰어오를 것이고, 그 커다란 달에 불어난 바다는 사람들이 잠들었을 저 마을로 밀려들 것이고, 파도는 누구누구 집 가릴 것 없이 담을 넘어 마당으로 마루로 몰아칠 것이라는 상상. 그 파도가 빠져나갈 쯤엔 무슨 일인가 하고 중년의 남자가 하품을 하며 방문을 나설지도 모르지. 그러면 미처 도를 따라가지 못한 물고기가 마당에 마루에 질펀하게 늘려 퍼덕거릴 것이고, 그러면 잠이 들깬 남자는 놀란 눈을 부빌 것이고, 그러는 사이 아버지를 따라 나온 세 살 박이 아들은 아랫도리도 입지 않은 채 쭈그리고 앉아 등 푸른 생선의 옆구리를 푹푹 찌르며 까르르 까르르 웃을지도 모르지.

2019-05-22

유행에 대해

△유행은 강물처럼 흐른다산업혁명은 값싸고 질 좋은 옷을 대량으로 제공했고, 덕분에 많은 사람이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멈출 줄 모르고 흐르며 변화한다. 원시인은 입을 거리를 두고 ‘무엇을 실로 쓸 수 있을까’ 같은 가장 기본적인 것을 고민했다. 산업혁명시대에는 ‘어떻게 하면 옷을 대량생산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모두 옷을 입게 된 지금, ‘어떻게 하면 편안하고 질 좋은 옷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재화가 부족하고 소비가 많으면 물가는 상승하고 구매욕은 증가한다. 반대로 재화가 많고 소비가 적으면 물가는 내려가고 구매욕은 감소한다. 산업혁명 이전에 옷을 입는 것이 특별한 일이었다면 산업혁명 이후 옷을 입는 것은 일반화되었다.옷을 만들기만 하면 소비자가 벌떼처럼 몰리던 시대는 끝났다. 오늘날은 공급자가 상품을 팔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시대다. 서로 팔려고 경쟁을 벌이며, 소비자는 보다 싸고 질 좋고 스타일도 좋은 옷을 원한다. 옷 한 벌이면 만족했던 시대도 있었지만 이제 사람들은 외출복과 실내복을, 평상복과 연미복을 구분해서 입는다. 사계절에 따라 옷을 바꿔 입고, 나아가 계절을 더 분절하여 ‘팔계절’ 옷을 입는다. 단순히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옷을 즐기며, 옷을 통해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표출한다. 이러한 취향이 서로 접하고 영향을 받으면서 하나의 큰 흐름으로 통합된다. 그런 식으로 커다란 흐름이 생기고, 그 흐름은 새로운 취향과 만나며 변화한다. 우리는 이것을 유행이라 부른다. 유행은 누군가에 의해 주도되기도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출현하기도 한다. 다수에 의해 유행된 지배적인 스타일이 있는가 하면 소수에 의해 유행된 다양한 스타일도 있다. 유행은 지속이 아니라 변화를 모토로 삼는다. 유행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지금, 여기의 가치를 반영하고 사회의 흐름과 분위기를 반향하며 인간과 물질문화 사이의 변화를 반영한다. 유행은 강물처럼 흐른다. 이 흐름의 집합을 패션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패션은 역사, 문화, 진화와 마찬가지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전개된다. 오늘의 패션이 과거의 패션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없다. 과거의 패션이 ‘복고풍’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하곤 하는 것이 그 증거다. 따라서 유행은 강물처럼 흐르지만, 다시 발 담글 수 없는 강물처럼 흐르는 것은 아니다.△과거의 유행과 오늘날의 유행과거의 패션은 패션을 유행시키는 특정그룹이 존재했다. 상류층이나 연예인이 그들이었다. 우리나라에서의 미니스커트 유행은 이를 잘 보여준다. 1967년 가수 윤복희가 이것을 입기 시작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열풍을 일으켰다. 당시에는 무릎 위 20㎝까지 허벅지를 드러내는 미니스커트를 입으면 풍기를 문란시킨다고 경범죄로 잡혀가는 해프닝이 있었다. 1990년대에는 서태지나 HOT와 같은 아이돌 스타를 따라하는 패션이 넘쳐났다.과거의 패션은 엘리트 집단, 또는 부와 권력을 가진 집단을 중심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하향식(top-down) 방식을 따랐다. 하지만 현대의 패션은 1950년대 매스미디어의 등장과 함께 전파의 방식도 다양해졌다. 다이나믹한 대중의 욕구와 젊은이의 시대상이 반영되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상향식(bottom-up) 방식을 통하거나, 특정집단에 의해 수평적으로 전파되기도 한다.△깐깐하게 때로는 느릿하게19세기 산업혁명기에 공학이 생산속도의 증가를 핵심과제로 삼았다면, 산업이 고도화하기 시작한 20세기 공학은 소비의 속도를 증가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세기 공학이 물질을 효율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고려했다면, 20세기 공학은 새로운 물질의 발명과 발견을 요구받는다. 19세기 공학이 기술 발전을 통한 대량생산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20세기 공학은 기술보다는 인간에게 편익과 유용성을 주는 질 좋은 제품의 생산을 중시하게 되었다. 21세기 들어 공학기술은 인간과 자연이 함께 하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모색하게 되었다.현대 물질문명 사회의 생산이 소비를 초과하는 상황에서 소비자는 두 소비경향을 보인다. 제품의 특성을 요리조리 따지는 ‘깐깐한 소비족’이 있는가 하면, 소비의 속도를 즐기는 ‘스피드 소비족’도 있다.깐깐한 소비족은 상술에 현혹되지 않는다. 이들은 제품을 분석하고 비교하여 더 낮은 가격에 더 좋은 제품을 사려고 한다. 합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며, 능동적이고 전문적으로 소비하는 ‘소비주체’다. 깐깐한 소비족은 느긋하고 침착하게 소비하면서 그 제품의 질적 완성도에 만족감을 느낀다.스피드 소비족은 무수한 상품 속에서 마치 햄릿(Hamlet)처럼 ‘이것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 ‘저것을 살 것인가, 이것을 살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는다. 이들은 부담스럽지는 않은 가격이면서, 최신의 트렌드를 반영하는 개성적인 상품을 찾아 빠르게 소비한다. 싸면서 질 좋고, 자신의 취향에도 맞는 상품을 빠르게 구매하여 소비가 주는 쾌감을 즐긴다.△상품의 예술화달빛을 받으며 한적한 모래사장을 걸으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밤은 바다를 닮아 푸르스름하고, 파도소리는 하얗게 흩어진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맛보기 위해 돈을 아낌없이 지불한다. 그곳에서 돌아오더라도 파도소리며 별빛은 평생 가슴에 남는다. 하지만 그런 바닷가에 사는 사람은 어떨까? 마을 사람은 내일을 위해 이미 잠들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바닷가도 그곳에 사는 사람에겐 그저 일상일 뿐이다.새로운 것의 운명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산업혁명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고 해서, 그것에 언제까지나 취할 수는 없다. 그 풍요로움에 금세 익숙해진다. 옷을 갖고 싶던 사람에게 옷이 주어지면 당분간은 애지중지하겠지만, 그 옷이 생활이 되면 그 옷과는 다른 옷을 찾게 될 것이다. 기왕이면 디자인도 좋고, 옷감의 질감도 더 좋고 색상도 더 예쁜 옷을 찾게 될 것이다. 핸드폰이 처음 나왔을 때 디자인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핸드폰이 있다는 것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핸드폰을 누구나 갖게 되자 천차만별의 가격대를 갖게 되었고 소비자는 다양한 기술, 콘텐츠, 디자인을 원하게 되었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예술과 일상이 구분되는 시대가 있었다. 중세시대에 예술이 하느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쓰였다면 르네상스와 절대왕정 시대는 왕이나 귀족 혹은 재력가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산업혁명이 물질적 풍요를 가져오게 되자 질 좋고 보기에도 좋은 제품을 찾게 되었다. 생활수준은 그런 식으로 향상된다. 양이 문제였던 시대에서 질이 문제인 시대로, 형식이 중요했던 시대에서 내용이 중요한 시대로 바뀌게 된다. 제품의 사용 가치와 미적 가치가 동시에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사회가 풍요로워지면서 예술은 스스로의 경계를 허문다. 고귀함과 높은 지위를 버리고 일상 속으로 스며들며 도처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공학은 예술을 상품 속으로 가져온다. 상품의 예술화, 이것이 이 시대의 새로운 슬로건이 되었다.

2019-05-15

절망 속에서 살아가기 - ‘백범일지’를 읽고

△왜 우리는 억압에 저항하는가?‘인간들은 태어나자마자 기계들이 만들어낸 인공 자궁(Matrix)안에 갇혀 AI의 생명 연장을 위한 에너지로 사용된다. 인간의 즐거움, 슬픔, 분노 등 이런 것들이 AI의 에너지로 쓰인다. 그런 에너지를 얻기 위해 인간의 뇌세포에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을 입력시킨다.’이것은 1999년에 나온 ‘메트릭스(The Matrix)’라는 영화의 줄거리이다.이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은 현실과 꼭 같은데, 자신이 있는 곳이 현실이 아니라 프로그램 속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게 되면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된다.허공 위를 걸을 수도 있으며 날아오는 총알을 피할 수도 있다.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그의 믿음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은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종종 내가 꿈으로 꾸었던 일이 현실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재현될 때, 혹은 어떤 물건을 놓아 둔 장소를 분명히 아는데 그곳에서 그 물건을 찾을 수 없을 때, 또는 아침에 반갑게 인사했던 옆집 아저씨 부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세상을 의심하게 된다.그런데 정작 이 영화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의 허구성을 알게 된 몇몇의 사람들이 프로그램을 현실로 믿고 살아가는 타자들에게 그 허위성을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것이다. 그것이 억압이라고 여겨지 않는 사람에게 그것은 억압이 될 수 없다.그런데 이들은 애써 억압기제를 찾아내고, 그 억압의 부당성을 폭로한다. 그들의 말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아도 그들은 끊임없이 억압기제에 저항한다. 현실의 세계는 매트릭스의 세계보다 나은 것이 없다.그런데, 인간은 왜, 도대체 왜 억압에 저항하는가? 왜 목숨을 담보로 저항을 멈추지 않는가? 1987년 6월 항쟁, 1980년 5월 광주, 1970년 11월 전태일의 죽음, 1960년 4월 민주화 운동, 1945년 신탁통치 반대 운동, 1919년 3·1운동….일련의 사태가 있는 동안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온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그냥 그러려니 하면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 버린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그때 그들이 하는 운동은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집안 말아 먹는 짓’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그 일을 했다.△김구는 왜 독립 운동을 하였나?물론 일제치하의 독립운동가들 역시 ‘독립운동은 집안 말아 먹는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을 것이다.그런데 그들은 왜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가? ‘백범일지’를 읽으며 백범이 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치게 된 어떤 이유를 찾고 싶었다. 무엇이 일제라는 억압과 싸울 수 있게 하였는지, 온갖 고초와 수모를 겪으면서도 독립운동의 뜻을 굽히지 않을 수 있게 한 어떤 신념, 그것을 알고 싶었다.그러나 애석하게도 백범이 독립운동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런 것은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어떤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다.도리어 김구라는 인물이 건방져 보이기까지 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호를 ‘백범’으로 고친 이유를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그러니까 백범은 백정과 범부의 앞 글자를 따온 말이다.이 얼마나 건방진 말인가? 자신이 독립의 유일한 잣대인양 떠들지 않는가.독립운동에 가담하기 전 그는 17세에 과거시험의 폐단을 알았고, 18세에 동학에 가담을 하였고, 21세에 일본인 ‘쓰치다’를 죽였다.그렇게 그는 감옥을 전전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독립운동가가 되어갔던 것이다.개인적 자각, 깨달음, 성찰 그런 것들을 통해 독립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없었다.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살다보니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에게 있어서 독립운동이란 삶의 연장선일 따름이며 그가 독립운동을 한 가장 큰 이유는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은 아니었을까?△김구와 이완용다시 말하지만 ‘백범일지’에는 그가 독립운동에 매진하게 된 거창한 이유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그는 열심히 살았을 뿐이다.그런데도 ‘김구’는 추앙을 받는다. 이와 반대로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으로 국민 모두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그런데 열심히 산 것으로 따지면 이완용도 마찬가지다. 그는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全權委員)이 되어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였으며, 그 공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伯爵)의 지위를 받을 만큼 일본 정부에 충성을 다하였다. 그에게 있는 잘못이란 어쩌면 열심히 살았다는 것, 일본을 위해 열심히 살았다는 죄 밖에는 없다.누가 더 열심히 살았는가를 따져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는 어렵다. 똑같이 열심히 살았음에도 그들에 대한 평가가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둘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상반된 믿음일 것이다. 이완용은 일본이 언제까지나 건재하리라 믿었다면, 김구는 언젠가 일본은 망할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믿음이 옳은지 그릇된 것인지 그들 스스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옳고 그름에 대한 답은 오직 역사만이 답을 내려줄 수 있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그런데 김구는 어떻게 독립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목숨까지 내어 놓고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그의 믿음이 옳음을 무엇으로 확신한 것일까? 아무도 걸어본 적이 없는 그 길을, 자신의 신념만을 가지고 걸어가는 일, 짐작할 수 없는 미래를 신념을 가지고 나아가는 일, 이것이 어쩌면 삶인지도 모른다. (김구와 이완용이 열심히 살았다는 점에서 같다고 했지만 바른대로 말하자면 그것은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완용은 아무런 방해도 없는 편안한 길을 걸어갔지만, 김구가 걸어간 길의 목적지는 너무나 멀리 있었고, 그 길 또한 험난했기 때문이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어떤 믿음이든 우리는 선택할 수 있고, 그 믿음에 맞게 살아갈 수 있다.하지만, 이 믿음이 옳은가 그릇된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의 믿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이 선택을 위해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것은 ‘나’라는 개인을 넘어 사회와 역사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역사를 내다볼 수 있는 예지력이 아니라 역사적 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때 비로소 가질 수 있는 것이리라.‘백범일지’를 읽는 내내 그 시대에 내가 살았다면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며 화끈거리도록 얼굴이 달아올랐다.지금도 비굴하게 최대한 비굴하게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되돌아볼수록 씁쓸해지는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그러나 감히 나는 바란다. 가능한 한 열심히 살아갈 수 있길, 당당히 살아갈 수 있길 바란다. 더 바란다면 옳은 삶을 살길 바란다. 적어도 김구와 같은 삶을 살 수는 없더라도 삶 앞에서 떳떳해지고 싶다.삶을 진지하게 응시하며 그 속에서 진실된 믿음을 얻고 싶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살아가고 싶다.

2019-05-08

예술 작품에 대해

언젠가 황현산 선생님의 강연을 들은 일이 있다. 강의가 끝나고 질문시간이 있었다. (황현산 선생은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이다. 1945년 목포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에 입학해서 박사학위를 받고 그곳의 교수로 재직했다. 선생은 언뜻 배우 신구를 닮은 듯한 평안한 인상을 지녔고 말소리도 그윽하다. 학자로도 평론가로도 손색이 없다. 선생은 이 시대의 문장가로 그의 글을 읽으면 한 문장 한 문장이 몸속에 각인되는 느낌이다. 그의 책 ‘밤이 선생이다’를 추천한다.)그때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글을 읽다보면 사람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 이를 테면 ‘악착스럽다’, ‘해찰’, ‘몸피’와 같은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왜 이렇게 어렵게 생소한 낱말을 쓰는지 듣고 싶습니다.” 선생의 정확한 워딩이 생각나진 않지만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글은 전장터와 같습니다. 이 전장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평론가들과 구별되는 저만의 언어가 필요합니다. 다른 평론가와 구별되는 저만의 색깔을 드러내기 위해 특색 있는 어휘를 사용합니다.”언어는 그 사람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시정잡배의 언어가 있고, 그윽한 사람의 그윽한 언어가 있다.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언어를 결정하기도 하지만 때로 언어가 우리의 정신을 형성시키기도 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로 승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언어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작가가 언어를 사용하는데 있어 얼마나 신중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우리의 ‘그랑’을 소환하는 것이 좋겠다. 까뮈의 ‘페스트’에 등장했던 그 그랑 말이다.“말 탄 여인은 어떻게 됐어요?” 타루가 자주 물어보았다. 그러면 그랑은 한결같이 “달리고 있죠. 달리고 있어요.”라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느 날 저녁, 그랑은 말 탄 여인에 대해 ‘우아한’이라는 형용사를 완전히 포기하고 앞으로는 ‘날씬한’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그것이 더 구체적이거든요.” 그가 덧붙여 말했다. 한 번은 이 두 명의 청중에게 다음과 같이 수정한 첫 문장을 읽어주었다. “5월 어느 화창한 아침에, 날씬한 여인 한 명이 근사한 밤색 암말을 타고 불로뉴 숲의 꽃이 만발한 오솔길을 달리고 있었다.”“어때요?” 그랑이 말했다. “그 여인이 더 잘 보이지 않나요? 그리고 ‘5월의’ 라고 하면 문장의 속도가 좀 늘어지는 것 같거든요” 그러고는 ‘근사한’이라는 형용사 때문에 무척 고심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단어로는 생생한 느낌을 전달할 수 없엇다. 그래서 자기가 상상한 멋진 암말을 사진 찍듯 단번에 전달할 수 있는 표현을 찾고 있었다. ‘살이 오른’도 어울리지 않았다. 구체적이기는 하지만 약간 경멸적인 의미가 느껴졌다. ‘윤기가 도는’에 마음에 끌린 적도 있지만 리듬이 적당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그가 의기양양한 태도로 ‘검은 밤색 암말’이라는 표현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검은색은 은근히 우아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그랑은 “모자를 벗으시오.”라는 말을 듣기 위해 매일 매일 글을 쓴다. 하지만 여전히 같은 문장에 머물러 있다. ‘우아한’을 더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날씬한’으로 바꾸고 ‘5월의’가 문장의 속도를 느리게 한다는 이유로 ‘5월’로 바꾼다. 그렇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고, 바꾸고 나면 다시 그 단어에 균열이 생긴다. 그랑이 ‘근사한 밤색 암말’을 ‘검은 밤색 암말’로 바꾸고 의기양양해 하지만 리외가 바로 반론을 펼친다.“그건 안 돼요.” 리외가 말했다.“왜요?”“‘밤색’이라는 단어는 말의 품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색깔을 가르키니까요.”“어떤 색요?”“글쎄요, 어쨌든 검은색은 아니죠!”그랑은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감사합니다.” 그가 말했다. “선생님이 계서서 다행이에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제 선생님도 아시겠죠.”그랑은 완벽한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수년 아니 수십 년 동안 이 일에 매달려오고 있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공무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이 글을 끝없이 고치고 고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문장에 닿는 것은 요원하다. 그랑이 생각하는 완전한 문장이란 말을 타고 사뿐히 달릴 때 ‘달그락 달그락’하는 말발굽소리와 그 속도, 그리고 문장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이미지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완벽한 문장을 만들어내면 그 뒤로 이어지는 글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라고 그랑은 생각한다.그랑의 바람은 언제나 좌절되지만 그랑은 끝없이 새롭게 시작한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단어들을 다 대입해보기라도 할 듯이 말이다. 완전히 딱 맞는 단어를 찾아 문장을 완성하는 일, 이것이 작가의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작가는 끝없이 쓰고 끝없이 고치길 반복한다. 그때 작가는 작가로서 성공하게 된다.앤절라 더크워스는 그릿이라는 책을 통해 성공의 공식을 소개하고 있다. 수천, 수만 명의 성공한 사람을 만나 그들을 인터뷰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수년에 걸쳐 수없이 많은 공식과 수없이 많은 그래프를 그려낸 후 그녀가 얻은 결론은 이렇다.성공=재능×노력×노력흔히 작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아마 작가가 되기 전부터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글 좀 쓴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남보다 나은 재능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 재능을 믿고 이 재능에 만족하는 글을 쓴 사람은 그냥 친구들 사이에서 글 좀 쓰는 친구로 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재능에 만족하지 않고 노력을 한 친구는 글 쓰는 기술을 익히게 되었을 것이다. 작가들 사이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다시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노력을 퍼부으면 작가는 자기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이루게 된다. 이것을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말한다.그럼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게 노력해서 일가를 이룬 작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 답은 간단하다. 아무것도 없다. 작가가 쓴 글은 실용적이지도 않고, 윤리적이지 않고, 심지어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 작가의 작품은 주인을 따라 나온 개와도 같다. 황현산은 이러한 작품 혹은 예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아이와 어머니가 품은) 목표는 마음속에 움터 오르는 온갖 생각을 다스리고 우리를 향해 노동하며 걸어온다. 그러나 개는 큰 주인과 작은 주인을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하며, 길을 멀리 벗어났다가 돌아오기도 하며, 이 겨울 풍경 속에서 해찰한다. 개는 지금 노동하는 주인들의 휴식이다. 망치로 두더지의 머리를 때리듯이 주인들이 억눌러버리거나 한쪽에 제쳐놓은 생각들을, 아니, 그 생각들보다 더 아래에 깔려 솟아오르지도 못하는 생각들을, 그래서 생각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생각들을 개는 주인들을 대신하여 생각하며, 이 겨울의 스산한 들판을 회색 꿈의 자리로 만든다. 그리고 또 거기서 비껴 선다.”해찰이란 ‘마음에 썩 내키지 아니하여 물건을 부질없이 이것저것 집적거려 해치다.’라는 뜻이다. 예술이란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헤적거림, 쓸모없이 인간은 살 수 없다.

2019-05-01

카테리니 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물질이 사고를 결정한다우리는 흔히 역사는 발전한다고 말한다.이 말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1)로부터 왔는데, 헤겔이 쓴 정확한 단어는 ‘발전’이 아니라 ‘전개’였다.발전과 전개는 다르다. 발전이란 어떤 목표를 가지고 나아간다는 말이지만 전개한다는 말에는 그런 목표가 없다.역사가 전개된다는 의미는 더 나은 쪽이나 더 못한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펼쳐진다는 말이다.인류의 문화는 진화한다. 이때 진화라는 말도 하나의 종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방향 중 하나의 방향을 선택해 간다고 보아야 한다.오늘날 지구상 생명체의 진화도 어느 방향성을 따라 발전되거나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갈래의 무작위성의 결과다. 그 선택의 방향이 좋은지, 나쁜지 말할 수는 없다. 좋다, 나쁘다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비교 우위에 지나지 않는다. 삶은 반복될 수 없으므로 그 둘을 비교할 수는 없다. 패션의 흐름도 이와 다르지 않다.인류의 문화가 진화한다는 것은 변화하며 변화의 우열에 대해서 쉽게 말할 수 없는 방향으로 펼쳐진다. 왜 그런 변화가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이러한 변화를 불러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유물론은 물질이 이러한 변화를 불러온다고 말한다.물질은 인간의 정신과 삶의 방식을 변혁시킨다. 그렇다면 어떻게 물질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 이야기를 해보자.노벨 문학상을 받은 포르투갈의 호세 사라마고(Jos00E9 de Sousa Saramago·1922∼2010)는 기발한 상상력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폭로한 ‘눈먼 자들의 도시(Blindness)’를 썼다. 이 소설은 사람이 집단적으로 눈이 멀게 되는 전염병에 걸린다는 상상력에서 출발한다.이를 통해 인간의 법과 도덕과 윤리가 얼마나 연약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쉽게 와해될 수 있는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비겁하고 추악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모든 사람의 눈이 멀면 더럽고 깨끗하다는 개념이 사라질 것이고 더불어 잘 생겼다거나 예쁘다는 말도 사라질 것이다.TV가 무용지물이 될 것이고 백화점이나 아울렛과 같은 패션시장은 애당초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심지어 동물원까지 텅 비어 버릴 것이다. 눈이라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 속에서 예술이 만들어지고, 아름다움 에 대한 관념이 생긴다. 아무리 고결하고 고상하고 싶어도 물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사유와 정신, 영혼까지 더러운 진창길을 헤매야 한다. 물질을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카테리니 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내 기억 속에 남으리카테리니 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 역에 홀로 남았네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남긴 채 앉아만 있네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To Treno Fevgi Stis Okto)’의 가사 일부다. 조수미의 노래로 우리에게 친근한 이 곡은 음악의 거장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eodorakis·1925∼)가 작곡했다. 1960년대 그리스의 군부독재에 저항하여 싸우던 한 청년 레지스탕스와 연인이 겪은 이별의 아픔에 대해 다루고 있다.혼란한 정치적 상황에 질린 여성은 연인과 함께 지중해 연안의 아름다운 카타리니로 떠나고 싶어한다.하지만 독재 치하에서 억압받는 민중을 놔두고 혼자만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떠날 수 없었던 청년은, 그녀 앞에 나타나지도 못한 채 그녀가 떠나가는 모습만 숨어서 지켜볼 뿐이다.근대적 탈 것은 전근대적인 탈 것과 전적으로 다른 성질의 것이다. 마차는 사람의 사정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지만, 기차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기차에 탄 사람의 마음이야 어떻든 기차는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정해진 시간까지 달려가기 바쁘다.기차는 인간을 이해해주지 않는다. 인간은 떠나는 기차를 세울 수도 없으며, 기차를 따라 잡을만큼 빠른 교통수단도 없다. 연인은 떠나가고 홀로 남은 남성은 그 이별을 중지시킬 방법이 없다. 실제로 기차의 기적은 시끄럽다. 기차를 타기만 하면 이별은 자동적으로 이뤄진다. 사람과 사람을 떼어놓고 마는 기차의 속성이 그 요란한 소리를 슬프다고 느끼게 만든다. 기차의 기적이 슬픈 것이 아니라 기차의 속성으로 인해 기적은 슬픈 것으로 우리에게 인식된다.△경험의 양과 속도물질은 시대와 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사회의 변화에 보조를 맞추며 발전했다. 과거의 산업혁명은 기계의 발전에 힘입었지만 중세시대와 같이 신을 중시했다면 이런 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계가 인간을 대신한다거나, 인간이 신을 흉내낸다는 것 자체가 불경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계에 대한 인식이 점차 호의적으로 바뀌게 되었을 때 비로소 기계의 발전이 급속도로 이뤄졌다.인간은 평균 시속 10㎞로 달릴 수 있고, 걸으면 한 시간에 4㎞ 가량 갈 수 있다. 인간탄환이라 불리는 자메이카의 육상선수 우사인 볼트(Usain Bolt)가 세운 100m 세계신기록은 9.58초다. 이 속도로 사람은 10분도 달릴 수 없지만, 1시간을 달린다고 해봤자 고작 38㎞를 가는 것이 전부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하이퍼루프 프로젝트는 음속으로 달리는 열차 개발계획이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 바퀴 없는 열차가 인간의 음성보다 더 빨리 달리는 시대가 지금 우리 눈앞에 열리고 있다.1850년대 사람이 이동하는 평균속도는 시속 6km였고, 이를 토대로 계산한다면 한 사람이 평생 이동하는 거리는 11만㎞였다. 그런데 2050년이 되면 운송수단의 평균속도는 시속 337㎞에 이를 것이고, 한 인간이 평생 이동하는 거리는 1천100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운송수단의 속도가 50배 늘어나는 동안 인간의 능력은 100배 이상 상승하게 된다. 인간은 더 쉽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더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의 능력은 거기에 비례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하급수적(exponential)인 수준으로 높아진다.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평균이동속도가 빨라진 것은 경험의 폭이나 경험의 양이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 이전의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서 자라고 그곳에서 죽었다. 그들의 경험은 그 마을 이상을 넘어서지 않았고, 마을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 이상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즉 근대이전 인간의 경험과 지식이 마을과 같은 크기였다고 할 수 있다.공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탈 것의 속도는 빨라져 자신이 태어난 나라는 물론 마음만 먹으면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단시간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의 경험과 지식의 크기는 지구라는 수준을 넘어서 우주로 뻗어나가고 있다. 우주는 터무니없이 넓고 거기에는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무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사고는 이제 우주 만큼의 넓이로 확장될 것이다.정신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인간을 지배한다. 과학기술은 물질을 만듦으로써 정신을 변혁시킨다.

2019-04-24

마음만 먹으면 풀지 못할 문제는 없다

△블랙홀과학과 공학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만 먹으면 풀지 못할 문제는 없다.’ 정말 그런 걸까? 최근 블랙홀 사진을 관측했다는 뉴스가 연일 화제가 되었다.이게 뭐 대단한 뉴스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간단히 말해 블랙홀은 어마어마한 중력을 가지고 있어서 빛마저 빠져 나올 수 없는 거대한 구멍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진을 찍는다고 할 때 물체가 방출하는 빛을 찍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빛을 비롯한 모든 파동을 삼켜 버리는 블랙홀 그야말로 방출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흡수하는 것만 있는 블랙홀을 촬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포기하지 않고, 공학은 무너지는 과학을 세워 앉힌다. 하여 과학과 공학은 해결해내고야 만다.처음 블랙홀을 생각해낸 사람은 아인슈타인이었으며, 그의 유명한 논문인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이를 처음 언급했다. 아인슈타인이 생각하기에 시공간은 일종의 천으로, 네 귀퉁이에서 천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놓은 생태가 곧 시공간과 같다고 생각했다. 이 팽팽하게 당겨진 천 위에 탁구공을 올려놓으면 천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볼링공을 올려놓으면 천은 볼링공의 무게 때문에 움푹 패일 것이다. 이 둥글게 패인 자국이 중력이다.볼링공이 놓여 있는 곳 위에 구슬을 놓으면, 구슬은 움푹 패인 지점을 향해 빙글빙글 돌 것이다. 이러한 볼링공에 해당하는 것이 태양이며, 구슬에 해당하는 것이 태양계의 행성이다. 즉 중력이란 시공간의 일그러짐이고 그 일그러짐으로 인해 형성되는 것이 중력인 것이다. 그런데 볼링공보다 더 무거운 것을 천 위에 올려 놓는다면, 천이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을 정도의 무거운 물체를 올려놓으면 천은 찢어지고 말 것이다.바로 천의 찢어진 틈,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 틈, 이것을 생각해낸 아인슈타인조차 그런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부정해버린 이것, 블랙홀. 이것을 촬영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과학은 당당히 말한다. ‘마음만 먹으면 풀지 못할 문제는 없다’라고 말이다. 글쎄 그럴까? 과학도 포기해버린 것이 있다. 하나는 금을 만들어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태양이나 바람처럼 영원히 멈추지 않는 영구기관의 꿈이다.△연금술연금술은 고대 중국, 고대 그리스와 이슬람 문화권, 중세 유럽을 비롯하여 전 세계, 전 시대를 망라한 인간의 오랜 꿈이다. 이것은 납이나 구리와 같이 값이 싸고 흔한 금속을 일정한 비율로 섞어 금이나 귀금속으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이런 연금술이 성공한다면 막대한 돈을 들여 금을 캐지 않더라도 엄청난 돈 방석에 앉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 비법이 알려지면 너도 나도 금을 만들어 낼 것이 분명하니 금값이 폭락할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연금술사들은 자신의 연구내용을 숨기곤 했다.연금술사들이 중요하게 여긴 물질은 수은이었다. 왜냐하면 수은은 광석에서 금을 추출할 때 사용될 뿐만 아니라 다른 금속을 녹여서 아말감을 만들 때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수은을 이용하면 금속을 금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연금술사들은 수은의 위험성을 잘 몰랐기에 수은을 조심성 없이 다루었다. 그래서 수은 중독에 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수은 중독조차도 연금술적인 변성의 과정으로 여기는 사람조차 있었다.우리가 잘 알고 있는 뉴턴도 이런 연금술에 뛰어든 사람 중 하나였다. 뉴턴은 위대한 과학자이기도 했지만 괴팍한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뉴턴은 로버트 훅에게 잔인할 정도로 모질게 굴었다. 왜냐하면 훅은 탄성력을 연구하여 ‘훅 법칙’을 만들었으며, 태엽 시계를 발명하기도 했다. 훅은 존경받는 과학자였으며, 영국 왕립협회의 창립 회원으로 초대 실험 주임을 역임했다. 뉴턴보다 먼저 중력의 기본법칙을 발견한 것이 훅이기도 하다.이런 훅을 미워한 뉴턴은 영국 왕립협회의 회장이 된 뒤 훅의 초상화를 떼어버렸다. 뉴턴의 저명한 어록 중 하나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멀리 내다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뉴턴의 겸손함을 드러내는 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뉴턴의 것이 아니라 당대에 널리 떠돌던 말이었는데, 뉴턴이 훅에게 보낸 편지 속에 등장한다. 뉴턴은 등이 굽은 훅을 조롱하기 위해 이 말을 비유적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뉴턴은 미적분을 발명한 라이프니츠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기뻐했으며, 천문학자 플램스티드와의 논쟁에서 지자 다양한 방법으로 복수했다고 한다. 이런 뉴턴의 괴팍한 성격은 연금술에서 사용하는 수은에 중독 됐기 때문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한다.지금은 연금술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금은 원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화학 반응을 통해 만들어낼 수는 없다. 즉 금은 빅뱅과 같은 현상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물질이다. 이것은 인간의 수준이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무지해 보이고 무모했던 과학자들 덕분에 화학 지식이 축적되었다. 그리하여 황산, 왕수, 인산, 질산과 같은 물질이 발견되었으며 플라스크, 증류기, 스포이드와 같은 화학 기구가 만들어졌다. 연금술사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 꿈은 화학을 낳았고, 화학은 이 꿈을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았다.△영구기관영구기관은 외부에서 한번 에너지를 주입하면 계속 일을 하는 가상의 장치다. 쉽게 말하자면 한번 힘을 주어 바퀴를 돌리면 영원히 돌아가는 기관이다. 이런 것이 가능할까? 12세기 인도의 천문학자인 바스카라(1114∼1185)는 부메랑 모양의 바퀴를 고안했으며, 15세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역시 영구기관에 대해 깊이 고민한 바 있고, 16세기에는 아르키메데스의 나선 펌프를 응용하여 영구기관을 만들려고 했다.19세기에 줄(1818~1889), 헬름홀츠(1821~1894), 마이어(1814~1878) 등에 의해 열역학 법칙이 정립되면서 영구기관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열역학 제1법칙은 어떤 물체가 가진 에너지는 그 형태를 달리할 수 있으나, 에너지의 양은 없어지거나 생성되지 않고 그 양은 언제나 일정하게 보존된다는 법칙이다. 바꿔 말하면 에너지를 주면 준만큼의 에너지가 생긴다는 말이다.자동차의 엔진은 휘발유나 경유를 연소시켜 생긴 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꾼다. 그런데 ‘에너지의 양이 언제나 일정하다’면 왜 자동차마다 연비가 다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연소된 에너지가 전부 운동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전환과정에서 열·소리·진동 등의 형태로 바뀌면서 일부 에너지를 잃기 때문이다.현재의 공학기술로는 연소된 에너지를 모두 운동에너지로 바꿀 수 없다. 다시 말해 주입한 에너지만큼조차도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완전히 바꾸지 못하는 현실이다. 효율 100%도 달성하지 못하는 실정인데, 주입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양의 에너지를 산출하는 영구기관을 만드는 것은 어림도 없다. 열역학 법칙은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현상을 보편화한 것이다. 영구기관은 이러한 열역학법칙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그런데도 영구기관을 발명했다는 주장은 끊이지 않고 있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유럽의 특허청은 영구기관과 관련된 무수한 특허신청으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참다못한 프랑스 특허청은 1775년 영구기관과 관련한 특허신청을 아예 받지 않겠다고 못 박았고, 미국은 영구기관에 한해서 신청서뿐만 아니라 작동 가능한 발명품을 제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워낙 불가능한 일인데다 사람들을 현혹시켜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애초에 이런 특허신청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영구기관은 인간의 꿈이다. 이런 기계가 있다면 인간은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야말로 낙원이 열리게 된다. 이미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추방시킨 이력이 있는 신이 이런 기계를 인간에게 허락할 리 없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던 저 태초의 어느 날부터 신을 거역해 왔다. 그런데 과학의 역사에서 보편적이라 굳건히 믿어온 법칙이 사실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는 것을 보곤 했다. 그런 이유로 영구기관에 대한 꿈을 지금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2019-04-17

좀머 씨에 대한 물음 - ‘좀머 씨 이야기’에 대해

1. 나오래전, 그러니까 거의 20년쯤 전에 나는 ‘좀머 씨 이야기’를 처음 읽었다. 아니 읽었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것이 한 두어 페이지를 읽고는 덮어버렸다. 그 이유는 순전히 이 문장들 때문이다.“오래전, 수년, 수십 년 전의 아주 오랜 옛날, 아직 나무 타기를 좋아하던 시절에 내 키는 겨우 1미터를 빠듯하게 넘겼고, 내 신발은 28호였으며, 나는 훨훨 날아다닐 수 있을 만큼 몸이 가벼웠다. 정말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 무렵 정말로 날 수 있었다. ….중략…. 어쨌든 나는 그때 날 수 있었고, 내가 만약 외투의 단추를 풀고 그것의 양끝을 양손으로 잡아 주기만 했더라면, 바람을 타고 둥둥 떠다닐 수 있어서 학교 앞 동산에서 언덕 아래에 있던 숲 위로 거침없이 훨훨 날아다니다가, 숲을 지나 우리 집이 있던 호숫가로 날아가서, 우리 집 정원 위에서 멋지게 한 바퀴 선회하면, 날아다니기에는 이미 몸이 너무 무거운 우리 아버지, 어머니, 누나, 형들이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테고, 다시 호수의 반대편 제방까지 날아가 점심 식사 시간에 늦지 않게 집에 도착하기 위해서 마침내 우아한 몸짓으로 착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인용한 부분은 이 책의 첫 문단이다. 정확히 말해 난 딱 첫 문단만을 읽고 책을 덮어버린 셈인데, 그 이유는 이 두 문단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얇은 이 책의 딱 두 문단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벅찼고, 이 두 문단조차 감당할 수가 없었다. 너무 좋았으니까, 더 안 읽어도 될 만큼 너무 좋았으니까. 아마 더 읽었다면 내 심장은 아마 터져버리거나 멎어버렸을 것이다. 혹은 질투심에 부들부들 떨면서 오열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이토록 아름다운 글자와 문장과 문단 앞에서 나는 심한 질투심에 사로잡혔고, 그래서 더 읽을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적확할 것 같다.그 때 이 책을 그만 읽기로 한 것을 참 잘한 일이라고, 지금 다시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나는 이 책을 처음 읽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20년 전 그 때와 달리 어떤 질투심이나 열등감도 없이 이 책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할 따름이다. 그럼 어디 쉼 호흡을 하고 이 책을 다시 읽어볼까.2. ‘나’그런데 먼저, 문학 작품 특히 이 책을 읽을 때는, 이 작품의 서술자인 ‘나’에게 나의 감정을 일치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글자는 글자로만 흘러가버리고 공허만 남는다.예컨대 처음 누군가를 지독하게 사랑해 본 사람은 ‘사랑’이 단순히 말이나 글자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 사랑이라는 글자를 받아들이듯이 그렇게 이 책에 나의 감정의 주파수를 일치시켜야 한다.감정의 주파수를 맞추려면 우선 이 소설의 서술자인 ‘나’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한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인 “오래전, 수년, 수십 년 전의 아주 오랜 옛날,”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중년의 나이를 가졌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많은 것 같다. (소설 속의 ‘나’와 작가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소설을 썼을 때 작가의 나이가 40대 초반이었으니, ‘나’의 나이는 작가의 나이와 엇비슷할지도 모른다. 이런 ‘나’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부터 고등학교 4학년, 우리나라 학교 제도와는 다르니 나이로 치면 6살부터 14살 때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서술자가 그 8년 동안을 회상하는 이유는, 그 기간에 만난 좀머 씨 이야기를 하려하기 때문이다. 미리 말해두자면, 14살 이후 ‘나’는 더 이상 좀머 씨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 여하튼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서 우리는 6~14살 때의 ‘나’의 감정에 우리의 감정을 일치시켜야 한다.3. 좀머 씨그럼 이 소설의 표제이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좀머 씨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좀머 씨는 항상 걸어 다니는 사람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1년 365일 하루도 안 쉬고 매일 매일 걸어만 다니는 사람이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싸돌아 다니냐고 물으면 좀머 씨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주바빠서이제학교 뒷산을 올라갔다가…. 호수를 빨리빨리 지나서…. 오늘아직시내에도꼭가보아야하고…. 너무바빠지금당장너무바빠시간이없어….”한마디로 말해 좀머 씨는 이상한 사람이다. ‘나’는 6~14살까지 좀머 씨를 총 네 번에 걸쳐서 만나고 이 소설은 그러한 네 번에 걸친 좀머 씨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먼저 첫 번째 만남은 ‘나’가 아버지와 함께 경마장에서 돌아오는 길에서다. 그 날은 우박이 쏟아지는 몹시 험상궂은 날이었고, 그런 날에도 좀머 씨는 여전히 걷고 있었다. 아버지는 좀머 씨를 차에 태워 주려고 하지만 그는 한사코 거부한다. 아버지가 그러다 죽겠다고 말하자, 좀머 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두시오!”두 번째 만남은 ‘나’가 카롤리나 퀴켈만이라는 여자 아이에게 바람을 맞은 날이다. 퀴켈만은 방과 후 ‘나’와 함께 걸어서 집으로 가기로 했는데, 그래서 온갖 준비를 다해 뒀는데 퀴켈만은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한다.‘나’가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전히 ‘시계의 초침처럼 빠른 속도’로 걷는 좀머 씨를 만나게 된다.세 번째는 ‘나’의 피아노 선생님인 미스 풍켈로부터 모욕적인 꾸중을 들은 후다. ‘나’는 세상을 버리기 위해 오직 미스 풍켈지나친 다그침을 들은 후이다. ‘나’는 세상 전체가 ‘불공정하고 포악스럽고 비열’하게 느껴져 자살을 결심하고는 가문비나무 숲에 올라가 떨어져 죽으려고 한다. 그 때 좀머 씨가 숲에 나타나 쉬려고 한다. 좀머 씨는 사람이 없는지를 살핀 후 긴 한 숨을 내쉬는데 그 소리를 들은 ‘나’는 죽기를 포기한다. ‘나’는 좀머 씨의 한숨을 통해 그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고, 그 고뇌의 무게에 비해 자신이 죽으려는 이유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나’가 마지막으로 좀머 씨를 본 것은 어느 날 밤, 호수로 걸어 들어가는 좀머 씨를 본 후이다. ‘나’는 좀머 씨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좀머 씨의 고뇌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4. 물음이제 질문을 할 차례다. 그 질문은 왜 좀머 씨는 계속 걸어 다니는가,여서는 안 된다. 좀머 씨가 걸어다니는 이유는 이미 이 책의 초반부에 나와 있다. ‘좀머 씨는 밖에서 돌아다녀야만 하는 것이니까 밖에서 돌아다녀야만 돼….’(42면) 즉 좀머 씨는 그냥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 좀머 씨가 걷는 이유보다는 왜 우리는 좀머 씨가 걷는 이유를 자꾸 알려고 하는가,에 대해 물어야 한다. 결국 알지도 못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우리는 왜 좀머 씨를 좀머 씨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만 좀머 씨를 판단하려고 하는가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는 왜 나와 다른 누군가를 판단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2019-04-10

산다는 건

△망각의 속도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의 공안부의 간부와 배관공은 이런 대화를 한다. 배관공으로부터 대화는 시작된다.“그 거북이 분명 어디서 본 건데….”“생각 안 나나?”“분명 어디서 봤는데….”“산다는 건 생각나지 않는 게 늘어가는 걸지도 몰라.”“왜 그런 말을 하시나요.”“아니, 그냥.”“방금 뭐라고 하셨나요?”“인생이라는 건 생각나지 않는 게 늘어가는 것. 어?…. 이게 아니잖아.”망각의 속도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빠르다. 그러하다면 ‘생각나지 않는 것이 늘어가는 것’이 삶이 아니라 그러한 말조차도 잊어버리는 것이 삶일 것이다. 근사한 말의 ‘세부’가 아니라 근사한 말을 했다는 ‘느낌’만을 어루만지며 사는 것이 삶의 진짜 모습일는지도 모른다. 헌데, 그 세부를 잊어버려서 기억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그 세부가 그리 대단할 것이 없기 때문에 기억을 안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세부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그 ‘느낌’만을 부여잡고 살려는 것인지도….기실 근사한 것은 그 ‘세부’가 아니라 그 ‘느낌’일테니까. 하여 한 때 잘 나갔노라고 떠벌리는 사람들이 그 세부를 이야기하지 않는 까닭은 그 세부를 잊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세부가 별반 대단할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추억은 디테일이 아니라 그 잡히지 않는 아련한 것들을 원료로 하므로 그러하다.△증상스트레스를 받거나 신경이 날카로울 때면 턱이 민감해진다.이런 증상이 생기면 공교롭게도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일을 하기가 어렵다. 미간에 손가락이 다가올 때 느껴지는 저릿한 느낌을 턱으로 느끼는 셈이긴 하지만, 이 느낌은 훨씬 강하고 강렬하다. 마치 날카로운 칼이 턱의 살과 뼈를 베고 지나가는 듯 선뜩하다. 날카롭건 뭉툭하건, 멀리 떨어져 있건 가깝건 턱 언저리에 있다고 느껴지기만 하면, 그것들은 모두 칼로 변해서 턱을 서늘하게 노린다. 모든 감각기관이 오직 턱에만 집중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턱으로 인지하고 지각하게 된다.책을 읽을 때는 책의 하단 모서리가, 글을 쓸 때는 노트북의 모서리가 턱을 겨눈다. 이 지랄맞을 지랄지랄한 느낌 때문에 몇 번이고 턱을 손으로 쓸어내리거나 손으로 턱을 가려야 한다. 이런 지경이니 어떤 일이든 잘 될 턱이 없다.△슬픔죽음은 슬프다. 죽은 자가 다시 삶의 세계로 돌아올 수 없으므로 슬프다. 그 슬픔은 죽은 이의 것이 아니라 산 자의 슬픔이다. 죽은 자는 죽었으므로 산 자의 슬픔을 느낄 수 없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죽은 자는 다시 죽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음은 유일하며 또 유구하다. 죽음은 비록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지만, 그 죽음은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삶 속에서 완성된다. 그런 점에서 죽음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고유하다.하지만 완성되지 않은 죽음은 어떠한가? 원하지 않은 죽음들, 완성되지 않은 죽음들, 사소한 사고, 또 홀로코스트와 같은 처참한 죽음, 그리고 세월호…. 이러한 죽음은 어떻게 위로되는가? 슬픔이란 감정은 이러한 죽음에게 보내는 조사(弔辭)다. 슬픔은 당신과 나, 죽은 자와 산 자,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 차안과 피안을 향해 나아간다. 아니 죽은 이들의 넋을 위무하며 동시에 그 불완전한 죽음을 완성하기 위해 슬픔은 뻗어가고 있다.이제 다시 삶을 알겠다. 죽은 이가 다시 죽을 수 없듯이 산 자는 삶을 멈출 수 없다. 오직 쉼 없는 것만이 삶이다. 그러므로 삶의 연장선에 죽음이 있을 리 없다.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이므로 죽음과 삶은 연속적일 수 없으며 죽음과 삶은 결코 만날 수 없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죽음 속에서 죽음을 완성시키며 삶 속에서 삶을 연속시킨다. 슬픔은 삶과 죽음에 취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유일함에 취해 있고, 죽음의 고유함에 취해 있다. 하여 슬픔은 크고 높은 것들의 한 부분이다.△왜 하필 그런 일을 하시죠?혹 당신이 애매한 일을 하고 있거나 그런 유의 학과를 다니고 있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왜 하필 그 일을 하게 되었죠? 이런 질문을 던지는 상대는 십중팔구 당신의 직업이 실용적이지 안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며 실용적이지 않다는 말은 돈이 안 된다는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나의 경우, 왜 국문과를 가셨죠, 문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따위의 질문을 듣는다. 이 질문에 적절하게 답하고 싶다면, 오히려 대답의 내용보다는 질문 자체를 분석하는 편이 낫다. 우선 당황하지 말고, 그 물음이 어떤 상황에서 던져진 것인지, 그런 질문을 던진 상대방의 성향은 어떤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의 답은 늘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낸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오답은 오답이기 때문에 오답인 것이 아니라, 출제자가 요구하는 답이 아니기 때문에 오답이다.예컨대 초등학교 시험 문제에 이런 것이 출제된 일이 있다. 사슴이 손에 거울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고 있다. 그 그림 아래 “사슴이 ○○○ 봅니다”라고 적혀 있다. 빈칸을 채워야 했던 한 아이는 사슴이 ‘미쳤나’봅니다, 라고 썼다. ‘미쳤나’가 어떻게 오답일 수 있겠는가. 그 답은 출제 의도에 맞지 않을 뿐이다. 아이는 ‘봅니다’를 교육과정을 초과하는 수준에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재적이며, ‘미쳤나’는 학교교육과 시험제도의 한계를 향해 던지는 도발적 구호처럼 들린다는 점에서 전복적이기까지 하다.하지만 학교교육은 천재의 저항을 부추기기보다는 천재의 저항을 거세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배속에 숨기고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상(李箱)은 극도의 권태 속에서도 ‘동공이 내부를 향하여’ 열리는 일을 자기 자신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다. 돈 꼴레오네가 다혈질의 소니에게 머릿속의 생각을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Don‘t let anybody outside of the family know what you’re thinking), 고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니까.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그러니 왜 국문과를 가셨죠, 따위의 말을 듣는다면 “저도 당신처럼 사업을 하였더라면 당신만큼 훌륭한 사업가가 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일로 난감해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때는 치기어린 마음에 멋모르고 국문과를 들어가게 되어 후회가 막심합니다.”라고 말을 하라. 이 말을 들은 상대는 금세 우쭐해져 자신이 어떤 계기로 사업을 하게 되었고, 어떻게 돈을 벌게 되었는지 신나게 늘어놓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고 고깝게 여길 것은 없다.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그런 식으로 떠벌리는 것으니, 당신은 측은지심의 인륜을 발휘하여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면 된다.이런 유의 질문이란 늘 상대가 당신의 말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에 던지는 질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정답은 늘 질문자에게 있으니 질문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대답보다는 질문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파악하고 그가 듣고 싶은 말을 하라. 이것은 정답에 근접하는 일일 뿐 아니라, 훌륭한 처세의 전략이기도 하다.

2019-04-03

나의 결핍이 인류의 결핍이다

△미메시스: 배움의 작동 방식지금으로부터 1만2천여 년 전 인류가 수렵채집의 문명에서 농경 사회로 옮겨가는 인류문명의 시작기인 구석기시대의 원시인을 상상해 보자. 머리는 산발을 하고, 한 손에는 돌도끼나 창을 들고 있다. 그러면 그들의 스타일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바람머리를 휘날렸을 리는 만무하다.수렵생활을 했던 원시인은 나뭇잎이나 가죽으로 몸을 가리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구석기시대의 유물 중에는 뼈로 만든 바늘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구석기시대에도 옷을 만들고 깁는 의류생활을 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가죽을 연결하여 더 크고 두툼한 옷을 만들고, 해지거나 낡은 부분에 가죽을 덧대어 꿰매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죽을 꿰매는 일은 쉽지 않다.그것도 쇠가 아닌 뼈로 된 바늘이라면 열 개 중 아홉 개는 부러진다.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던 구석기인들은 가죽보다 만들기도 쉽고, 수선도 쉬운 재료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던 중 누군가 거미가 거미줄 치는 것을 보고 실을 엮으면 옷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유레카! ‘거미줄과 같은 것을 촘촘히 엮으면 옷을 만들 수 있겠구나!’하고 무릎을 쳤을 것이다. 무릎이라는 말조차 없었겠지만, 무릎을 쳤을 것이다.여기서부터 인간의 옷은 혁신적 변혁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거미가 거미줄을 뽑고 거미줄을 치듯이 인간은 거미를 따라 실을 뽑고 천을 짰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무작정 거미를 따라했을 것이다. 거미가 왜 거미줄을 뽑는지, 거미줄을 어떤 방식으로 뽑을 수 있는지, 거미줄의 성분이 무엇인지 그런 것 따위는 모른 채 무작정 따라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점차 거미를 알고, 거미줄의 특성을 파악하게 되었을 것이다.배움은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도 좋다. 인간의 배움은 단순히 자연을 따라하는 것을 통해 시작된다고 말이다.자연은 인간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 그렇긴 하지만 자연 속에는 참고할만한 구체적인 매뉴얼이 없다. 자연은 설계도도 없고 지도도 없는, 미로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을 걷어내는 일이다. 원리도 모른 채 자연을 흉내내는 것은 어둠속을 끊임없이 헤매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러한 시련 앞에 좌절하지 않는다. 부단한 시행과 간단없는 반복과 끝없는 착오! 인간은 다시 시도하고, 다시 실패한다. 이러한 불멸의 노력을 통해 동물과 다른 유일무이한 이름을 얻는다. 그 이름은 바로 ‘인간’이다.인간은 무작정 따라하고 본다. 아기가 언어의 원리나 체계를 이해하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엄마의 입모양을 흉내내듯이, 인간은 자연을 따라한다.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연에 깃든 오묘하고 숭고한 원리를 배우고 이해하게 된다. 이 원리는 지금도 빅데이터 기반 인공지능의 알고리즘 개발에 그대로 응용된다. 결핍을 절실하게 느끼면 느낄수록 실현하려는 의지도 커진다. 이제 노력하면 된다. 이러한 결핍을 채우는 과정이 곧 기술발전의 과정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문제는 그 결핍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결핍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바로 내 앞에, 아니 바로 나에게 있다.△프로메테우스와 지포 라이터‘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란 뜻의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는 이유로 제우스에게 낮에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엄한 형벌을 받는다. 이 형벌이 끔찍한 이유는 재생력이 강한 간은 밤에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기 때문인데, 프로메테우스는 그 고통을 영원히 감당해야만 한다.인간은 왜 자연을 흉내내고 그것을 따라하려고 애쓰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새처럼 날 수 없고, 거미처럼 실을 뽑을 수 없고,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헤엄칠 수 없다. 이 결핍, 이 결여가 인간을 욕망하게 하고 꿈꾸게 한다. 인간이 가지지 못한 것을 자연은 가지고 있고, 인간은 자연이 지닌 것을 갖고 싶어 한다.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열에 아홉은 실패하고 만다.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에게 받은 끔찍한 형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신은 자신의 원천기술을 인간에게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간은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살았던 태초부터 신의 말을 어기며 살아오지 않았는가.원시인간은 자연 발화가 아니면 불을 구할 수 없었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신에게 불을 훔쳐왔고 그 벌로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았다. 이 신화는 인간이 불을 얻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힘들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우여곡절 끝에 인간은 불을 직접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위해 수만 년 동안 부싯돌을 사용해왔다. ‘불씨’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희망’의 은유로 사용된다. “불씨가 있다”는 말은 희망이 있다는 뜻이지만 “불씨가 꺼졌다”는 말은 희망이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것은 부싯돌이나 그 외의 다른 것을 사용하여 ‘불씨’를 얻는 일이 그만큼 어려웠다는 것을 의미한다.휴대용 불은 1826년 영국의 화학자 존 워커(John Walker·1781~1859)가 성냥을 처음 발명하면서부터다. 성냥이 출현하기까지 수십 만 년이 걸렸지만, 더 나은 제품이 더 빠른 속도로 등장하게 된다. 줄리어스 마이스터는 1907년 임포라이터 공장을 설립하였다. 그는 1차 대전 당시 참호에 뒹구는 탄피를 이용하여 라이터를 만들었고, 1918년에는 이를 개량해서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방풍라이터를 만들어 전세계적으로 유행시켰다. 1933년에는 브래드퍼드(Blaisdell)가 임포 방풍라이터를 개량한 지포(zippo) 라이터를 만들어 새로운 유행을 만들었다. 이것은 흡연자의 필수품으로 자리잡았고, 우리나라에서는 혼수품의 목록에 끼어들 정도였다.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불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몇 백 년 전에 이런 소망을 말했다면 아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로는 전혀 불가능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찮다고 생각하는 불의 휴대는 사실 하찮은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과학과 기술의 집적물이다. 단지 이뤄지고 나니까 그것이 별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메우치와 전화기전화기는 그러한 ‘나’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발명되었다. 전화기의 발명자를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1847~1922)로 알고 있지만, 사실 전화기를 발명한 사람은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 이민자 안토니오 메우치(Antonio Meucci·1808~1889)다. 메우치의 아내는 몸이 마비되어 침실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는 집에 딸린 연구실에서 일했지만, 아내가 어떤 상태인지를 알려면 매번 침실에 가봐야 했고, 아내는 필요한 것이 있어도 남편이 올 때까지 침대에서 기다려야 했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려고 침실과 자신의 작업실을 연결하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것이 바로 전화기다.이 전화기로 1860년에 공개시연회를 열었다. 그런 후 보다 정교하게 고쳐 특허신청을 하려 했다. 하지만 메우치에게는 신청에 필요한 250달러가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1871년, 1년짜리 임시 특허를 신청했다.제품 상용화를 위한 재정적 후원자를 찾지 못했으며, 3년 뒤에는 임시 특허조차 갱신하지 못했다. 이때 메우치와 연구실을 함께 사용하던 벨은 1876년 새로이 특허를 내고 웨스턴 유니언 전신회사와 계약했다. 벨은 큰돈을 벌며 유명인사가 되었고 메우치는 가난 속에 허덕였다.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이 재판의 승리를 눈앞에 둔 메우치가 1889년 숨지면서 소송 역시 중단됐다. 미국 하원은 그가 죽은 후 113년 만인 2002년, 최초 전화기 발명가로 메우치를 공식인정했다. 역사는 기어이 진실을 꺼내놓는다. 메우치의 이야기는 슬프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모두 전화기를 사용한다. 메우치가 느꼈던 불편함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불편함이었다. 그러하다면 메우치는 그러한 전 인류적 결핍에 맞섰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불편함과 결핍은 나와 함께 있다. 나의 불편함이 곧 인류의 불편함이며, 나의 결핍이 인류의 결핍이다. 이 결핍을 메울 수 있다면 인류는 또 그만큼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인간의 결핍을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꿈을 마침내 실현시킨다. 문제는 자연은 언제나 인간에 앞서 있고, 우리는 자연에 뒤처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자연을 앞지를 수 없다.인간이 자연을 통해 만든 어떤 모방품도 자연의 정교함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침울해 할 필요는 없다. 자연이 인간보다 늘 앞서 있기 때문에 우리의 욕망은 고갈되지 않는다. 우리는 끝없이 욕망하고, 끝없이 꿈꿀 수 있다. 그러한 꿈이 우리의 사유를 추동하며, 그 속에서 우리는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자연이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인간의 발전이 영속하리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2019-03-28

스러져 가는 것들에 대해

△이력-나다이력은 신발을 뜻하는 ‘리(履)’와 역사를 의미하는 ‘역(歷)’이라는 한자를 사용한다. 그러니 이력은 말 그대로는 “신발을 끌고 다닌 내력” 정도다. 그래서 ‘이력’은 발자취 곧 ‘족적’이다. 이 단어는 흔히 ‘나다’라는 동사와 결합한다. ‘이력(이) 나다’는 버릇처럼 익숙해지는 행동을 뜻한다. 이때 이력은 ‘이골’이라는 단어와 맞바꿀 수 있다.하여, 이력은 나의 행적이자 족쇄이기도 한 셈이다. 어떤 일을 통해 이력을 쌓을 수도 있지만 어떤 일에 이력이 날 수도 있는 법이니까. 이력이라는 단어는 이런 식으로 분화하여 벌어질 수 있을 만큼 벌어진다. 이력서의 이력이 한 극점이라면 이력이 나다의 이력이 또 다른 극점이 된다. 그 극점을 지나는 원이 ‘이력’이라는 단어가 살아갈 수 있는 생존 영역이 된다. 단어는 그렇게 하나의 도시를 가진다.△도시세계적 도시란 그 지역적 특수성이 모두 소멸된 공간일 것이다. 서울은 서울만의 냄새가 없고, 서울의 음식은 독특함이 없다. 그러기에 어떤 음식이든 먹을 수 있으며, 특정한 냄새가 없기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마치 철제와 유리로 된 건물에 우리의 흔적이 스미지 않는 것처럼, 냄새 없는 음식은 우리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진다.흔적은 경험의 또 다른 이름이다.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우리의 경험이 축적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반대일 수 있다. 햇살이 내뿜는 빛줄기가 흰빛을 띠는 것은 모든 빛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도시는 그러한 빛과 같이 모든 문화와 인간을 삼켜버렸고 그런 이유로 텅 빈 공간이다.이것이 도시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모든 문화와 인간을 삼켜버린 사람이라면, 그리하여 너무 배가 불러 지쳐버린 자라면, 그 대단한 식욕으로도 포만감을 누릴 수 없는 거식증의 환자라면, 그의 존재적 양태 역시 텅 빈 공간과도 같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 안에서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을 하나도 발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다.△손나의 손이 가장 무용하게 느껴질 때는, 사랑하고 싶은 사람과 길을 걸을 때, 혹은 사랑하고 싶은 사람과 우산을 쓰고 갈 때, 사랑하고 싶은 사람과 나란히 붙어 앉을 때다. 손은 그녀의 어깨 혹은 그녀의 손을 잡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기에 나의 손은 무용하다. 그녀의 몸에 스치기라도 하고 싶어 일부러 과장된 행동을 할 때, 그 때는 특히 외롭다.아무런 소품도 주어지지 않은 배우의 팔을 볼 때 나는 자꾸 외롭다. 칠레의 피노체트가 지배할 당시 의문사를 당했거나 실종된 사람들을 다룬 ‘과부들’이라는 연극에서 대위는 지휘봉을 들거나 총을 든다. 시체를 기다리는 소피아에게 어울릴 만한 소품은 없다. 그녀는 늘 빈손이며, 그녀의 손은 손의 사용 용도에 가 닿지 않는다. 손이 사물과 결합할 때 완전해진다는 것을 조각가들은 분명히 알고 있다. 빈손의 조각상을 찾기는 그만큼 어렵다. 그러므로 연출은 배우의 손에 소품을 쥐어주어야 한다. 그들의 손이 완전해질 수 있도록….△형광테이프막과 막 사이에는 어둠이 있고, 그 어둠 속에는 형광테이프가 있다. 형광테이프의 쓸모는 극장의 발전과 관련된 것이므로 그것 역시 연극의 일부다. 저 자리에는 어떤 배우 혹은 어떤 소품이 놓이게 될 것이다. 연출은 공간의 쓸모를 고민하는 반면, 배우나 소품은 그 공간을 소진하여 자리 잡힌 공간을 빈 공간으로 되돌려 놓는다. 공간의 쓸모가 다 했을 때 비로소 다른 막으로 넘어갈 수 있다. 연출은 빈 공간을 채우려 하고 배우는 찬 공간을 비우려 한다. 이 긴장 속에서 연극은 다음 장으로 막으로 넘어갈 수 있다. 채움과 소진의 변증법, 그 사이에 형광테이프가 있다. 형광테이프는 정확히 빈 공간에 있다. 이 말은 얼마나 부정확한가? 형광테이프가 빈 공간에 있다면, 그것은 이미 빈 공간일 리 없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빈 공간 속에 놓여 있다. 공간의 일부라고도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는 그것은 연극 속에서 연극이길 거부한다.△세계세계를 창조하지 않고선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 세계 속에는 낱낱의 세계가 꼼꼼하게 박혀 있다. 세계를 창조하는 일은 그 세계 속에 자리잡은 낱낱의 세계까지를 창조하는 일이다. 그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많은 낱낱의 세계들. 낱낱의 세계는 서로에게 무관심하지만, 그 어떤 의무적이고 의식적인 관심보다 더 치밀하게 관계한다. 그러니 세계와 낱낱의 세계는 다를 뿐 거기에 위계는 없다. 크리슈나의 입속에는 우주가 있고, 더 더 들어가면 입을 벌리게 한 크리슈나의 양어머니 역시 그 입속에 있다. 시작과 끝,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는 꼬리를 삼키는 우로보로스의 뱀. 세계의 유일한 진리, 순환 논증.△순환논증가령 이런 대화를 생각해보자. 당신이 나에게 “이게 뭐지”라고 묻는다. 나는 “응, 컵이야”라고 답한다. 그렇게 말하면 당신은 ‘아, 이것은 컵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에게 답을 들은 당신은 이제 ‘이것’에 알게 되었을까? 자, 이렇게 분절해서 생각해보자. 인식 주체 즉 ‘나’는 ‘이것은 컵이다’라고 했다. 이 발화에서 ‘이것’은 인식 대상이며 ‘컵’은 인식 내용이다. 그런데 가만, 당신이 ‘컵’을 보고도 ‘나’에게 ‘이것’이 무엇인지를 당신은 ‘컵’이 뭔지도 모르는 바보인가. 당신이 바보가 아니라면,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이것’을 ‘컵’이라고 규정했을 때, ‘이것’은 컵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말일까, 아니면 컵의 모양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컵과 같은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일까? 컵은 인식 대상의 형태를 의미할 수도 있고, 그 기능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인식 주체는 인식 대상의 전체가 아닌 부분만을 규정한다. 인식 대상은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오직 인식 대상은 인식 주체의 입을 빌려서만 말 되어지기 때문에 인식 대상은 훼손된다. 인식 대상과 인식 주체 간의 간격을 어떻게 건너뛸 수 있는가. 아마 최선의 방법은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순환 논증은 오류가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명징한 언어일 것이다.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라고 한 어느 노승의 말은 온 삶을 통해 깨달은 최상의 말하기 방식이었을 것이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영원의 탕진결단이든 결심이든 단 한 순간에 이뤄진다. 숙고는 그 뒤를 메워 결단을 추진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결국 우리는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을 사후적으로 합리화한다. 우리의 결단은 순간 속에서 이뤄진다. 아무리 중요한 결단조차 순간 속에서 이뤄진다. 순간에 이뤄진 결단이 우리를 영원히 지배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원을 지배하는 것은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러한 순간을 아니 영원을 어제부터 오늘까지 주구장창 탕진 중이다. 영원히 탕진해도 탕진할 수 없는 것이 ‘영원’이라 참 다행이다.

2019-03-21

비극과 카타르시스―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대해

△순환논증의 비순환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는 곳이 적지 않다. 이를 테면, “행동자는 필연적으로 성격과 사상에 있어 일정한 성질을 가지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이 양자에 의하여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일정한 성질의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와 같은 부분이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동자가 성격과 사상을 갖는 이유를 ‘필연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51면). 성격과 사상은 일정한 성질을 갖고 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순환논증 중 가장 압권은 이것이다.그런데 전체는 시초와 중간과 종말을 가지고 있다.시초는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다른 것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존재하거나 생성되는 성질의 것이다. 반대로 종말은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또는 대개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것 다음에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중간은 그 자체가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또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56면).이 말을 정리하면, ‘시초’는 시초에 있는 것이고 ‘중간’은 중간에 있는 것이며, ‘종말’은 종말에 있는 것이다. 장난처럼 들리는 이 말을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처음-중간-끝’에 대한 간략하면서도 가장 적확한 정의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시초’란 다른 것 다음에 올 수 없는 것으로 모든 사건들이 응축되어 있는 특이점(singularity)이다. 여기에서부터 사건은 ‘분규’(스토리의 시초부터 주인공의 운명에 전환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108면)하면서 ‘급전’(사태가 반대 방향으로 변하는 것, 69면)과 ‘발견’(무지의 상태에서 지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 71면)을 포함하게 된다.‘중간’은 ‘시초’와 ‘종말’을 그럴 수밖에 없도록 연결한다. 특정한 ‘시초’를 특정한 ‘종말’로만 이끌어가게 만드는 유일무이한 매개항인 것이다. 그리하여 사건은 완전히 닫히게 된다. 그 지점이 ‘종말’이다.△인간의 급수 혹은 수용론이러한 비극의 구조는 인간의 탄생과 죽음을 모방하고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이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한다거나,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고 있다는 것을 이 책 전체에 걸쳐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31면: 49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방이라고 부른 것은 인간의 삶 전체가 아니라 ‘행동하는 인간’에게서 일어난 중차대한 사건, 혹은 ‘급전’과 ‘발견’으로 인한 급격한 변화가 이뤄지는 삶의 한 부분을 모방한다고 말하고 있다.하지만 우리는 삶의 처음과 끝을 모르며 그 진행방향에 대해서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하다면 행동하는 인간의 모방이라는 말이 가능할까.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급전이나 발견의 순간을 알 수 없다. 따라서 모방을 하려면 행동 중인 인간이 아니라 행동이 완료된 인간을 모방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진행 중인 사건이 아닌 이미 완료된 사건을 모방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완결된 행동[의] 모방”이라고 말한다.그렇다면 행동이 완결된 것들은 모두 모방 가능한가. 꼼꼼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 역시 빼놓지 않고 “완결된 행동을 모방”할 수 있는 범위까지 언급하고 있다. 모든 인간이 아닌 “큰 명망과 번영을 누리는 자들 가운데 한 사람”, “[명망 있는] 소수의 가문” 중의 한 사람이다(79: 90면). 그 중에서도 “무서운 사건이 일어난 가문”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90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종의 수용론적 입장까지 고려하고 있는 듯하다. 관객이 전혀 모르는 사람을 관람객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관객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던 것이다.△모방의 논리모방의 대상은 신화적 인물이나 영웅을 모방하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하지만 그는 대상의 삶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연성’을 중시한다.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62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개연성을 위하여 실제로 일어난 사건 중 불필요한 것은 버려도 좋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전체 중에[서] 아무런 크기를 가지지 않[는] 전체” 즉 “통일을 이룰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56면: 59면). 이러한 사건 속이 펼쳐질 때 “비극의 카타르시스”가 행해진다(49면).이렇게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모방은 대상에 대한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묘사가 아니라 실제적인 사건의 조합과 배치에 가깝다. 그러한 조합과 배치의 지향점이 ‘카타르시스’일 것이다. 결국 비극의 모방이란 조합과 배치의 기술이라 할 수 있다.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카타르시스: 정화 혹은 배설그렇다면 이 완성된 작품 속에 깃드는 ‘카타르시스’는 무엇일까.카타르시스는 ‘정화’나 ‘배설’이라는 뜻을 갖는다. 정화는 더러운 것을 씻어낸 후의 결과를 말한다면 배설은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행위를 말한다. 하지만 더러운 것을 씻어냈다고 해서 꼭 깨끗해진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배설이라는 말은 이보다는 더 의미심장하다. 배설의 논리는 이렇다. 우리의 몸은 이미 더러운 배설물을 가지고 있다. 배설물은 우리 몸이라고도 그렇다고 우리의 몸의 일부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배설물은 온전하고 완전무결한 우리를 구성하지 못하게 만드는 균열점이다. 다시 말하면 비극은 카타르시스를 통해 ‘나’라는 인식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게 만든다. 비극의 가치는 완고한 ‘나’를 주체가 아닌 비주체로 만들어내는 바로 거기에 있다.*덧: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슬픈 감정은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이 광란과 착란을 가라앉혀, 보다 이성적이고 침착하게 사유하도록 만든다. 성적인 것들이 삭제되고 금기시되며, 애도와 경건함이 축제의 중요한 형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축제에서 ‘축’을 분리하여 삭제하고 ‘제’의 기능만을 활성화시킨다. 그러한 ‘제의적’ 성격은 종교적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스 비극의 역사는 감성의 영역을 몰아내고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구축해가는 시대로 이끌어가게 만드는 장치는 아니었을까. 남성중심적 그리스 사회가 고안한 남성적 장치는 아니었을까. 그리스 비극은 오늘날 삶의 비극으로 이행하게 만든 출발점은 아니었을까.

2019-03-14

제주의 밤하늘과 고흐와 너와 나

△제주의 밤하늘제주의 밤하늘은 장막과도 같아서 바람이 불면 별빛과 함께 흔들린다. 바람이 셀 때는 별빛이 한 뼘씩 흔들려 밤하늘이 검은 장막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확신하게 된다. 나는 둥근 의자에 누워 오래도록 하늘을 올려다본다. 별은 바람에 쓸리듯 조금씩 조금씩 오른쪽으로 흐른다. 나는 간만에 찾아온 느긋한 휴가를 이 의자에서 모두 탕진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한용운은 어떤 시에서 밤을 ‘올 없는 검은 비단’이라고 했는데(“이별은 미의 창조”), 그의 이런 시를 읽으며 질투를 할 때도 있었다. 그는 을사늑약 이후의 조선을 어둠이라고 인식했던 사람이고, 그 어둠에 대항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밤을 ‘올 없는 검은 비단’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단순히 밤에 대한 수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올’이란 비단의 끝을 이르는 말일 것인데, 검은 비단에 끝이 없다면 검은 비단을 걷어낼 방법은 없다. 그런 밤에 항거할 수 있는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고흐와 사이프러스 나무고흐가 그린 ‘별이 빛나는 밤에’(1889.7)에는 바람과 별 사이로 바람이 흐른다. 별은 바람보다 더 깊은 곳에서도, 바람보다 더 얕은 곳에서도 빛나지만, 그 사이를 떠도는 바람은 별이 빛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한다. 바람이 별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왼쪽에서 저렇게 크게 불어온 바람인 데도 어쩐지 사이프러스를 흔들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다.고흐는 말년에 사이프러스를 자주 그렸다. 1888년 고갱과의 공동생활을 하던 고흐는 돌연 귀를 자르는 발작을 일으킨다. 이후 정신병 발작으로 입원과 퇴원을 번갈아 하던 고흐는 1889년 동생 테오에게 “나는 사이프러스의 매력에 푹 빠졌다. 나의 해바라기 그림처럼 지금까지 시도해 본 적 없는 새로운 방식의 그림을 창조해 낼 것 같기도 하구나.”라고 썼다. 고흐는 실제로 “별이 빛나는 밤에”를 비롯하여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밀밭”, “두 여인과 사이프러스”,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 등과 같은 제목의 작품을 수 점 그렸다.사이프러스는 우리나라에서는 찾을 수 없는데 굳이 비슷한 나무를 찾자면, 식물학적으로는 측백나무에 가까우며, 잎은 향나무에, 전체적인 모양은 노간주나무를 닮았다고 한다. 사이프러스는 지중해와 같이 따뜻한 지역에서 자라는데, 사이프러스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로는 미국의 낙우송, 일본의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있다. 하지만 고흐의 사이프러스는 가지가 옆으로 퍼지지 않고 위로 솟구치는 나무다.고흐는 이 나무를 ‘뾰족탑’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런지 고흐의 그림에서 이 나무는 교회의 첨탑보다 높고, 하늘보다 높다. 고흐의 사이프러스는 그가 그린 거의 모든 그림에서 화폭을 뚫고 자란다.고흐가 이 나무에 집착한 이유는 어쩌면 해바라기처럼 하늘을 향해 자라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늘을 향해 정열을 불태우는 해바라기처럼 사이프러스 역시 하늘을 향해 불타듯 솟구쳐 오르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고흐에게 하늘은 무엇이었을까. 해도, 달도, 별도 저렇게 둥근 빛을 회오리처럼 뿜어대는 저 하늘은 고흐에게 무엇이었을까.△나무들그러고 보니 하늘은 어디에든 있고, 하늘 아래 어디에서든 나무는 자란다. 사계리에서 서귀포의 유명한 빵집을 찾아가는 동안 빨간 열매를 단 저 나무도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저 나무는 무슨 나무지? 응, 먼나무! 저 나무는 뭔 나문데 저렇게 예뻐? 그래서 먼나무가 되었다는 설이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썰’이고. 나무껍질이나 가지가 먹처럼 검다고 해서 ‘먹낭’이라 불리다가 ‘먼나무’가 되었다는 것이 그나마 들을 만한 유래긴 하지만 글쎄?‘낭’이야 나무라는 뜻의 제주도의 방언이니 ‘먹나무’가 ‘먼나무’로 바뀌었다는 것인데, ‘먹’이 ‘먼’으로 바뀐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니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감탕나무과인 이 나무의 껍질이나 잎을 보고 검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먼나무가 무슨 일로 먼나무가 되었는지는 모르나 이 나무는 제주도 곳곳에서 자라며 꽃은 5~6월에 피고, 가을부터 겨울까지 붉은 열매가 맺힌다.지난 주엔 학생들과 함께 공원에서 숲 학교를 열었다. 전문가를 초빙해서 공원에 있는 나무들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1시간 가량 수업을 진행하면서 우리가 본 나무의 종류는 스무 가지가 넘는다. 참누릅나무, 자귀나무, 은행나무, 자작나무, 계수나무, 스트로브 잣나무, 소나무, 칠엽수(마로니에), 신나무, 산딸나무, 물푸레, 능수버들, 감나무, 잣나무, 양버즘나무, 아카시아, 박태귀나무, 백당나무, 화살나무, 회양목, 측백나무 등등.이렇게나 많은 나무들이 있다. 이름을 알기 전까지 나무는 그저 나무였으나 그 개별적 이름을 알고부터 나무는 통칭되지 않고 개별화된다. 그리하여 자작나무의 검은 수피나 화살나무의 날개와도 같은 수피를 보고 나무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하나의 눈에서 소나무 잎의 개수가 두 개인지 세 개인지에 따라 토종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으며, 계수나무의 열매 껍질을 보고 암나무라는 것을 알게 된다.그렇게 나무를 감각하게 된다.이러한 것 역시 랑시에르가 말하는 ‘감성의 분할’이라고 부르는 정치의 일종일 것이다. 이름을 알기 전엔 그냥 ‘몸짓’이었다고, 이름을 안 이후에는 ‘나에게로 와서’ 나의 ‘꽃’이 되는 것처럼(김춘수, “꽃”), 정치란 대단한 무엇이 아니라 그저 그러한 알아챔과 알아채임이며, 이를 우리의 몸으로 감각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정치인이 여론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 혹은 여론도 미치지 못한 것에까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이런 것들이 모두 ‘감성의 분할’과 궤를 같이한다.△그녀와 나와 열무이렇게 한가로운 여행은 처음이다. 여행을 할 때면 갈 곳이 많았다. 여기도 저기도 가야 했는데 이번 여행은 모든 것이 느긋했다. 렌터카 빌려 밥을 먹은 것이 오후 네 시께다. 어디로 가야할지를 망설이다 애월 해안 도로를 따라 달렸고, 숙소로 가기 전 ‘최마담네 빵다방’이라는 곳에서 커피를 마셨다. 커피보다도 빵보다도 좋았던 건 그곳에서 기르는 시베리안 허스키와 진돗개였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와 가방을 풀고 근처 ‘춘미향’이라는 곳에서 식사를 했다. 돌아와서는 “바흐 이전의 침묵”이라는 영화를 보고 잠들었다.다음 날에는 늦게 일어나 숙소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고, 올라와서 쉬었다가 오후에는 송악산엘 들렀다가 국수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서귀포시에 있는 ‘시스터즈’라는 빵집에서 크로와상을 몇 종류 샀다. 다섯 시에 숙소로 돌아와서 음악을 듣고, 늦은 저녁을 먹고, ‘이터널 선샤인’이라는 영화를 봤다.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라는 책을 읽었다. 말 그대로 길을 잃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고, 길을 잃은 사람들이 길을 잃은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는 이야기를 하는 부분까지 읽었다. 이런 책은 내가 쓰고 싶은 책이었는데, 라는 생각을 했다.책을 읽으며 사온 빵과 귤을 먹었다. 빵과 귤은 그녀가 키우는 열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내가 열무가 좋아하는 것들이 다 있는데 열무만 없다고 하자, 그녀가 웃다가 말고, 올해로 열여섯 살인 열무가 죽어 정말 그런 상황이 오면 얼마나 슬플까라고 했다. 나는 그냥 담담히 받아들이자, 라고 했고, 그녀는 그래야지, 라고 말하며 나도 죽을 텐데. 라고 덤덤하게 덧붙였다.죽음과 가까운 그녀의 말이 뼈를 때렸다. 정말 그녀가 죽는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길을 잃은 것처럼 살겠지. 여행의 끝자락에서 슬펐다. 그녀가 오래도록 살아 나와 함께 이 삶을 헤쳐나가길 바랐다.

2019-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