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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동묘 스토리 헌팅

청계천. 물들면 안 되겠다고 염려하면서도 다시 간다. 동묘시장은 이효석 소설 ‘도시와 유령’의 배경 공간, 그의 창작의 ‘시작점’은 동반자 작가였다. 나도 이 동묘를 소설적으로 ‘소유’해 보겠다고 마음 먹은 지 오래, 하지만 쓰고 싶은 것과 능력은 별개의 것. ‘스토리 헌팅’은 쉽지 않다. 어슬렁거리기, 떠돌아다니기, 힐끗거리기는 쉽지만은 않다. 뭔가 목적이 있어야 좋다. 동묘 헌팅을 여러 번 시도한 끝에 얻은 좋은 소재가 하나 있다. ‘윙컷’(wing cut)이라는 것. 앵무새 날개를 잘라주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날개를 자른다기보다 깃털을 잘라주는 것이다. 청계천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의 고사가 얽힌 영도다리(永渡橋) 옆으로 조류 시장이 있고, 여기 앵무새들이 손님들을 기다린다. 회색앵무(african grey parrot), 에메랄드 빛으로 예쁘기는 사랑앵무, 화려하기는 오색앵무, 스킨십 좋아하기는 코뉴어 앵무···. 슬프게도 윙컷을 당한 앵무는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할까? 나의 이야기 속에서 베카는 자신이 날개 잘린 앵무새 같다고 생각한다. 베카는 어쩌면 코뉴어 앵무를 닮은 것도 같다. 사람 옷에 파고드는 친화력 만점에, 애교 있고, 아, 장난기가 가득하다. 누워서 발을 흔들기도 하고, 물구나무도 서고, 공도 굴릴 줄 알고, 호기심도 많다. 이 베카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동묘 사람, 내력 있는 사람, 앵무에 홀린 사람을 만나도록 할까, 노점에서 휴대폰 파는 사람? 베카는 동묘 골목의 빈티지 가게에서 미국 서부의 ‘러그하우스’에서 들어온 옷가지들을 판다. 베일(bale)이라는 옷 묶음이 있고, 이걸 풀어놓는 걸 ‘깐다’고 한다. 탈북해서 이곳에 온 춘희가 어떻게 베카가 되고, 또 어떻게 ‘루스(ROOS)’ 같은 곳에서 일할 수 있느냐가 포인트의 하나, 그러고도 베카는 한국을 떠나고 싶다. 아, 루스는 이름을 바꿔야 한다. 요즘엔 ‘실물’을 잘못 옮기면 문제되기 일쑤다. 이 베카는 어디 살아야 하나 할 때 보이는 건물, 세창빌딩, 그 안에 세 평짜리 쪽방이 있고, 좁은 데 비해 남쪽으로 난 창문이 하나 있고, 그 3층 쪽방에서 계단을 내려와 코너를 돌 때 ‘키노 커피’ 맛있는 집이 있고, 그 건너편에 열쇠 집이 있다. 인생의 과제를 풀어야 하는 베카는 열쇠집 아저씨를 좋아한다. 뭐든 그의 손에 들어가면 없는 열쇠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 베카는 한국을 떠나고 싶다. 이 한국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 안심하고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런데, 이 베카, 춘희는 어떻게 미국으로 가버릴 수 있나? 가뜩이나 이주민을 쫓아내는 이 판국에? 윙컷 당한 것 같은 인생의 해결점을 선사해야 한다. 빛과, 어떤 옷이든 입을 수 있는 자유와, 영원히 함께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글쎄, 베카는 이 땅을 떠날 수 있을까? 떠나지 않고도 그는 삶의 안정을 누릴 수 있을까? 나는 베카의 눈으로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분석해 보고 싶다, 아니, 살갗의 실감으로 느껴 보고 싶다. 지금 이 세계는 너무 고통스러운 것 같다. 이것은 너무 ‘하이퍼’한 감각인 것일까?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6-02-09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며칠 전에는 날이 흐렸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 저녁에 약속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것만 해도 부담스러운데, 다음 날은 또 강의가 있어 낮에는 어떻게든 그 준비도 해야 했다. 어떻게 낮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게 금방 저녁 시간이었다. 불광동에서 용산까지 ‘카카오티’를 이용하려니 택시비가 부담스러웠다. 요즘 물가 같아서는 바깥 바람 쏘이는 게 무서울 정도였다. 전철은 두 번 세 번 갈아타는 수고를 해야 하고, 근 삼십 분은 족히 늦을 것 같다. 하는 수없이 택시로 서둘러 가니, 도합 넷이어야 할 자리에 한 사람이 빈다. 참, 한 사람은 갑자기 눈이 안 보여 나오지 못한다고 했었다. 자가면역 질병이라는데, 심하면 실명에까지도 이를 수 있다던가. 모임을 주관한 작가의 나오지 못한 사람 걱정이 심하다 싶을 정도다. 나는 이 작가가 생각보다도 정이 더 깊은데 ‘놀란다’. 알고 보니, 오늘의 자리는 이 작가가 내 옆의 평론가 후배에게 어느 날 술을 먹고 전화를 걸어 추천서에 도장을 찍어 달라고 요청한 것이 발단이 된 것이다. 작가는 평론가를 알고는 있었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고는 만나서 이야기해 본 적도 없었다고 했다. 후배 평론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맞아들여 서류에 도장까지 찍어 보냈고, 다음날 술이 깨서 두고두고 미안했던 작가는 벼르고 벼르던 끝에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래서 상은 받았고?” “그랬으면 좋았죠.” 우리는 모두 추천서를 들고 간 날의 진풍경을 떠올리며 가가대소를 금하지 못했다. 세월이 세월이니만큼 우리들의 대화는 이리저리 돌다 결국 시국 얘기로 흘렀다. 나는 처음에는 되도록 말을 아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본심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대실수’를 범했다. 후배들인 평론가와 작가는 나를 알 만큼 알고 교류도 잦은 까닭에 생각이 다른 것은 다른 대로, 가급적 문제를 예각화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작가가 예약한 식당은 화려하지는 않아도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맛집으로 소문나 있었다. 우리들의 ‘논쟁’은 썩 좋은 한국식 생선회 요리 메뉴들 때문에 자주 끊겼다. 그러는 사이에 나의 생각은 본도(本道)에서 벗어나 옛날 우리들의 추억들로 흘렀다. 후배 평론가와 나 사이에는, 그의 지도 교수가 내 아주 존경하는 대선배이기도 한, 깊은 인연이 있었다. 우리는 그분이 일찍 돌아가시매 같이 한없이 슬퍼했던 슬픔의 ‘동지’였다. 나는 또 이 후배의 재능과 성실함을 높이 ‘사서’ 하루 공부 끝나는 한밤에 자주 만나 새벽까지 함께 술을 퍼마신 사건들이 있었다. 우리는 셋이서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한 평론가 후배의 갑작스러운 병이 제발 어서 낫기를 기원했다. 분위기가 좋아져 나는 평소에 마시지 않는 맥주까지 마시자고 청해 차수를 변경하기도 했다. 자리가 파하고 바깥으로 나오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밤이 늦고 힘들어 또 택시를 타고 귀가해야 했다. 사람은 역시 무슨 이념이나 정견 따위로 같이 가는 게 아니요, 서로 정들고, 위해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가는 것이라고, 몸은 지쳤건만 마음은 더없이 따뜻해져 있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6-01-26

김민기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

1월 10일 토요일 아침부터 문학 공부하는 이들이 모였다. 해질 무렵까지 계속된 학술발표, 주제는 ‘1980년대 문학을 되돌아본다’였다. 뜨거운 젊음을 바쳐 이제는 연구 대상이 된 1950년대 전반기 출생의 문학인들, 그들의 성명을 열거해 본다. ‘공장의 불빛’(1979)의 김민기(1951~2024),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문학과지성사, 1983)의 황지우 (1952~), 희곡작품들과 소설 ‘잠과 늪’(실천문학사, 1987)의 최인석(1953~), ‘황색 예수전’(실천문학사, 1983)의 김정환(1954~),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1990)의 김영현(1955~2025), ‘시와 경제’와 ‘노동해방문학’의 김사인(1956~), ‘민주주의 민족문학론과 자기 비판’(연구사, 1989)의 조정환((1956~) 등. 이들은 문학이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 묻고 찾은 순례꾼들이었다. 그 1980년대에는 서로 다른 의미를 함축한 여러 ‘민중’들이 혼거하고 있었다. 류영모와 함석헌의 ‘씨알’ 민중, 장일순과 김지하의 생명적·중생적 민중, 신경림과 박태순의 대지와 공동체의 민중, 백낙청과 채광석의 계급연합 범주로서의 민중 같은 것들이다. 김민기는 이 가운데 김지하의 생명사상에 접속해 있었다. 그는 김지하의 치열함에 매료되었고, 희곡 ‘금관의 예수’에 노래를 붙였다. 1970년대 말 여공들의 처절한 싸움을 담은 ‘공장의 불빛’을 ‘노래굿’이라 한 것은 김지하가 개척한 ‘마당굿’ 양식에 통하는 것이었다. ‘공장의 불빛’이 어떤 이상이나 염원을 그린 것인가는 ‘굿’이 무엇인가로부터 해석되어야 한다. 김지하가 1970년대 초에 쓴 ‘진오귀굿’은 특히 황해도 진혼 굿의 명칭이다. 이 진오귀굿은 망자를 하늘로 보내는 천도굿이다. 무당은 망자의 혼을 불러내고 공수를 받아 망자의 삶에 어려 있던 한을 풀어준다. 망자는 이 해원이 있어서야 편히 하늘로 돌아갈 수 있다. ‘공장의 불빛’에 담긴 사연들과 민요와 김민기의 창작곡들은 ‘무당’ 김민기가 불러낸, 싸움에 패배한, 즉 죽음과도 같은 상황에 처한 여공들(노동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해원의, 씻김의 굿과도 같다. 그렇게 해서 생존의 문제를 안고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했던 그네들은 재생과 부활을 기약할 수 있다. ‘공장의 불빛’은 생명적 민중의 해원 굿이고, 이 생명의 회복을 염원한다. 김민기와 그의 선배 김지하가 지향한 생명적 민중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후반의 지식계ㆍ문학계는 계급연합적인 개념의 민중 쪽으로 급격히 경사되었다. 생명적 민중은 그 내부를 분할하고 고정시키는 계급 범주들을 첨예하게 내세우지 않는다. 반면에 민중을 계급 연합으로 보고 여기서 노동자의 전위성을 내세는 방향은 억압받는 자의 독재를 정당화 한다. 2026년의 시점에서 되돌아 보는 1980년대 문학은 오늘의 격렬한 정체성주의를 성찰해 볼 수 있는 거울과도 같다. 김민기와 김지하의 생명적 민중은 일하는 이들을 큰 하나로 포괄하는 풍요로운 개념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돌아가 의지할 수 있는 고향과도 같이 따사로워 보인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6-01-12

‘역사혁명’의 시대

역사서들을 편집한 한 책을 두고 논의가 분분했다. 논점인 즉슨 위서냐 진서냐 하는 것이었다. 비유가 좀 끔찍하지만 살인사건이 났다고 하자. 이 사건을 해결하려면 먼저 시신의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 그 책은 우리들 눈앞에 버젓이 놓여 있으므로 첫 단추는 꿰어졌다. 이제 범인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이 범인도 실명까지 그대로 제시되어 있다. 이제 그가 진범인지를 밝히려면 범행도구와 범행방법, 범행동기까지 밝혀야 한다. 이 가운데 범행동기는 강력히 추정되는 게 있다. 강렬한 민족주의적 이상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없는 역사를 지어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동기가 범행으로 어떻게 이어졌는가를 밝혀내야 한다. 가짜 책을 어디서, 무슨 수를 써서 지어냈느냐 하는 것이다. 아직까지 나는 이를 밝혀내면서 가짜라고 주장하는 이는 찾아보지 못했다. 역사학 전문가가 못 되어서 못 찾았는지 모른다. 옛날 책에 근대어가 씌어져 있다든가 하는 등의 주장이 있는데, 엊그제 어느 분의 유튜브 채널을 보니, 그 어휘들이 거의 모두, 하나만 빼고는 옛날 책들에 나온다고 책 이름들과 문장까지 밝혀주는 것이었다. 앉아서 썼느냐 서서 썼느냐를 밝히라는 것이 아니다. 어떤 책들을 근거로 짜깁기를 한 것인지, 아예 없던 것을 발명을 한 것인지 증거든 추론이든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꾸 범인이라고만 주장하면 우김성 센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논쟁적인 글들을 보며 생각한 것이 하나 있다. 문제와 관련된 역사학적 논구 방법이 좀 더 진취적이고 새로워졌으면 하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이분이 주장한 내용이 다 맞아서가 아니요, 그 패러다임과 방법론이 새로웠기에 훌륭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식민사학의 우격다짐을 밀어낼 방법론, 그때까지 고려하지 않았던 북방민족의 역사서들까지 함께 읽어내는 방법이 새로웠던 것이다. 왜 지금이 ‘역사혁명’의 시대인가? 새롭고 창안적인 방법론이 다투어 제시되고, 그로써 기존 지식의 패러다임을 깨뜨리고 있기에, 바로 ‘역사 인지’의 혁명의 것이다. 컴퓨터 천문학(박창범), 유전자학, 빅데이터를 활용한, 기록과 주장들의 엄밀한 검증, 동북아시아뿐 아니라 다른 문명권(아랍어권, 라틴어권, 산스트리트어권)의 역사서들까지 읽어내고 참조하는 방법, 이와 관련되는, 문명론적 시각으로 인류의 삶을 이동성(mobility) 속에서 포착하는 방법, 여러 언어들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적극 활용하는 방법 등이 새로운 역사 인지를 위해 지금 적극 활용되고 있다. 방법론의 창안과 혁신은 이번 세기에 들어와 가능해진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힘입은 것이다. 진위서의 판별과 고대 지리 인식 등에 이와 같은 방법들이 넓게 활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고, AI 시대는 이와 같은 변화를 더욱 빠르게 촉진할 것이다. 이런 마당에 고루한 문헌 해석과 동북아에 갇힌 시야로 뭘 해결할 수 있을까? 나는 오늘의 새로움에 한 표를 던진다. 오해는 금물, 그 내용이 다 맞다고 확신한다는 뜻이 아니다. 요점은 그 방법론에 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12-29

자유를 생각함

하나의 책이 엉성한 대로나마 마무리를 향해 간다. 얼마 전부터 아직 써야 할 게 남아 있다고 느꼈다. 시간이 가면서 그 부담감이 더 커졌다. ‘자유’라는 큰 주제가 남았던 것이다. 생각하면, 자유는 무상으로 주어진 것처럼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다.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도 같다. 꼭 짝을 지어 평등과 함께 소중한 것이라 말하고 그뿐이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옛날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이라는 책에서다. 자유는 필연의 인식이라 했다. ‘꼭두서니’에서 알리자딘이라는 염료를 얻을 수 있으면, 우리는 그에 관한 자연법칙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려니 했다. 만약 필연, 곧 자연법칙을 다 알지 못하면 우리는 자연의 ‘노예’인가? 국회도서관에서 대의제에 관한 책을 찾을 때였나? 자유민주주의는 유럽의 사민주의에서도 그 토대를 이룬다고 했다. 사민주의가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이념을 놓고 경쟁하는 근본적 사회정치적 토대가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것은 언제,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일제 강점기 때 작가 이효석은 ‘산’·'들'·'소라'의 연작을 남겼다. 이중 ‘산’에서 주인공인 머슴 중실은 자신을 핍박하는 주인집에서 나와, 다른 주인을 찾아가지도 않고, 서울 같은 도시로 가지도 않고, 산으로 올라간다. 한 계절을 산에서 보내고 나니 자신도 산의 나무들 같은 나무가 되어간다고 느낀다. 중실은 ‘나무의 자유’를 찾아 ‘사회’를 떠나 ‘자연’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 대목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떠올리게 한다. 거기서 밀은 인간은 나무처럼 자유로와야 한다고 말했다. 비유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 여기서 나무는 부자유하지 않다. 자연은 자유의 토대요, 사회는 속박의 조건이다. 만해 한용운의 시 ‘복종’은 ‘자유’를 노래한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이 당신은 도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화자는 그에 대하여 스스로 복종하는 ‘자유’를 누리고자 할까? 이 한용운의 ‘조선 독립의 서’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를 잃은 자는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이다.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는 무덤으로 바뀌는 것이며 쟁탈을 일삼는 자의 주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니, 세상의 가장 이상적인 행복의 바탕은 자유와 평화에 있는 것이다.” 도대체 자기 목숨을 터럭같이 여기게도 하는 이 ‘자유’란 무엇일까? 자유란 생명체의 본연의 자기 존속의 원리일 것 같다. 생명은 본디 생명력을 추구하고 소모하기를 근본으로 삼는 존재이고, 이 지향은 무조건적이고 원리적이다. 이러한 생명체적 본성을 인간의 언어로 옮긴 말이 바로 자유일 것이다. 자유는 자기 몸과 마음에서 말미암음이며 구속이나 복종조차도 자유일 때만 의미와 가치가 있다. 한국 작가와 시인은 이것을 어떻게 사유해 왔던가? 남은 문제가 너무 크다. 연말인데도 즐겁지가 않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12-15

단재 선생의 ‘꿈의 하늘’

다시 나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꿈하늘’로 돌아온다. 제목이 참 멋스럽다. ‘꿈의 하늘’이라. 그는 꿈속을 사는 사람, 꿈을 꾼 이야기를 꿈 깨고 나서 말하는 사람 아니요, 꿈 그 자체를 살고 바로 그 꿈을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꿈하늘’ 속을 헤매이다, 오래전에 여러 ‘단재론’이 겹쳐들 있는 곳에서 인상 깊게 읽고 잊지 못하던 문장을 찾는다. 독립기념관 데이터베이스에서 어렵사리 찾아진다. 아하, 이 글을 쓴 사람은 심훈이었다. 기미년 삼일운동 때 투옥되었다 나와 상해로 ‘탈출’한 젊은 심대섭, 곧 심훈이 단재를 만났다. 마침 그때 단재는 ‘天鼓(천고)’라는, ‘하늘의 북’이라는 뜻을 가진 잡지를 편집·간행하고 있었다. 심훈은 단재를 이렇게 그렸다. “그때 마침 ‘천고’라는 잡지를 주간하였다. 희미한 등불 밑에서 붓으로 붉은 정간을 친 원고지에다, 밤을 새워 글을 쓰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그 창간사인 듯, ‘하늘북이여, 하늘북이여, 한 번 치매 무슨 소리가 나고, 두 번 두드리매 어디가 울리는가’하는 의미의 글귀였던 듯 어렴풋하게 기억되는데, 한 구절 쓰고는 소리 높이 읊고, 몇 줄 또 써 내려가다가는 붓을 멈추고 무릎을 치며 깊이 탄식하는 것이, 마치 글에 미쳐 현실을 잃어버린 사람같이 보였다. 붓끝을 놀리는 대로 때 묻은 솜저고리의 소매가 번쩍거리는데, 생각이 막히면 연방 잎담배에 침을 묻혀 말아서는 태워 물고 뻐끔뻐끔 빤다. 그러다가 불시에 두 눈에 이상한 광채가 스쳐지나는 동시에, 손수 만든 여송연을 아무 데나 내던지는 한편으로 붓에 먹을 찍는다. 나는 그 생담배 타는 연기에 몇 번이나 기침을 하였다. 어느 날은 황혼 때에 찾아가니까 그는 캉(坑) 위에 기대어 좀이 슨 옛날 책을 펴든 채 꾸벅꾸벅 앉아서 자고 있었다. 부처님 손가락처럼 벌린 왼손에는 예의 잎담배를 말어서 피우는 것이 끼워져 있었는데, 저 홀로 타들어 간 뽀얀 재가, 한 치 길이나 됨직 하였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고, 미쳐야 미친다 했다던가? 심훈은 어쩌면 이렇게도 광인 단재 선생을 생생하게 잘도 묘사해 놓았는지, 그의 문장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 옛날 역사에 미친 ‘미치광이’ 단재 선생을 실감나게 상상이라도 해볼 수 있었겠는지? 심훈의 글을 현대적인 어법으로 바꾸어 보면서, 나는 아직 덜 미쳐도 아주 덜 미쳤다고 생각해 보면서, 그런데도 어쩌면 단재는 그렇듯 꿈속을 살면서도 그 꿈속이 현실이 되고 또 반대로 현실이 꿈속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었는지, 옛사람의 매운 향기를 더듬어 맡으며 헤아려 본다. 생각한다. 그에게 학문과 실천은 둘이 아니고 하나였고, 실천과 예술도 둘 아니라 하나였으며, 심지어는 그의 학문은 가장 아름다운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학문이었다. 정신이 하나로 옹글게, 빈틈없이 알차고 단단하게 뭉쳐진 사람에게 ‘쪽모이’, 곧 조각조각 부분들을 모은 하나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 빈틈이 없다. 그런 사람은 눈치 보고 되돌아보고 망설일 틈이 없다. 오로지 한길로 직진하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 이 추운 때, 단재 선생의 ‘꿈의 하늘’이 더할 수 없이 새파랗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12-01

'고르구드 아버지의 영웅서사시'

아제르바이잔 대사님, 그리고 아제르바이잔 디아스포라청 지원재단의 집행 이사 아크람 압둘라예프, 이만희 한-아제르바이잔 의원 친선협회장, 그리고 서울대와 연세대의 아제르바이잔 유학생들, 또 많은 분들이 오셨다. 사회자 임성희 연구소장이 묻는다. “아제르바이잔은 아직 한국에서 잘 알려진 나라가 아닙니다. 아제르바이잔 문학을 한국의 독자들과 대중에게 어떻게 소개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한국은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세계 문학의 일원으로 합류한 것처럼 느껴지게 되었지요. 그러나 오랫동안 한국 문학을 해외에 알리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현재 한국에는 시인 베흐티야르 와합자대의 퀼리스탄의 시, 또 니자미 간자비의 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 해체 이전 ‘검은 1월’ 사태 등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지닌 나라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담은 문학 작품을 통해 아제르바이잔인의 삶과 현실적 고민을 전한다면, 한국 독자들에게 큰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 “아제르바이잔과 한국 간의 학술 및 문화 교류의 미래 전망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답. “저는 아제르바이잔에 두 번 가보았습니다. 두 번 모두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국제학술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 학자분들이 다른 나라 학자들의 논문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하는 것이 아주 좋아 보였습니다. 반은 농담이지만, 제가 ‘아제르바이잔 식 토론’이라고 이름 붙인 토론 방식이었습니다. 발표자의 발표 내용에 대해서 단순히 소감을 말하거나 질문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풍부하게 개진하고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국내 도입’이 시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서 온 학자들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하고 또 흥겹게 노래 부르는 것을 보면서 아제르바이잔은 풍부한 국제적인 문화 유대를 가진 나라임을 실감했습니다. 한국도 그 유대관계 속에 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유라시아 네트워크를 통해서 새로운 문화의 미래가 열릴 수 있겠다, 생각합니다.” 마심리 레일라와 유수진 시인이 함께 번역한 서사시 책에는 우리의 ‘나뭇꾼과 선녀’ 같은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아제르바이잔은 투르크 계열의 민족. 초승달과 샛별이 국기에 그려진 나라는 우리와 오랜 연원을 같이 하는 민족이다. 그러고 보니 이 아세르바이잔 같던 때가 1년이 조금 못 되던 때다. 어수선한 나라를 뒤로 먼 나라에를 비행기를 갈아타고 갔었다. 고독은 깊을수록 좋다. 그것이 삶을 새롭게 생성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돌아왔는데 이 ‘고르구드 아버지의 영웅서사시’ 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만 아니고 지난 1년은 극심한 통증 속에서 모든 일을 정신없이 처리해야 했다. 정신을 비워두지도 못한 채 밀려오는 일들에 시달리며 고통을 건너뛰려 했다. 두 사람이 어찌나 ‘닥달질’을 하는지 삼 년쯤 감수했다고나 할까? 이제 책이 나오고 이렇게 출판기념회까지 하게 되니, 새삼 사연 많은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어려운 때는 뭔가 잘 보이지 않지만,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11-17

억울한 일, 억울한 사람

만해 한용운 쓰신 작품 가운데 장편소설 ‘박명’이 있다. 조선일보에 1938년 5월 18일부터 1939년 3월 12일까지 연재했다. ‘박명’이라 함은 팔자가 기구하다, 복이 적다, 요절할 운명이다 같은 뜻을 갖는다. 이광수 소설 ‘재생’의 주인공 이름과 이 소설 주인공 이름이 같다. 순영이다. 저 강원도 인제 가평 사람이다. 어려서 어머니 여의고 계모 슬하에서 고생하며 큰다. 은인을 만난 줄 알았더니 서울 사람 송 씨는 기생도 아니 만들고 인천 색주가에 순영을 팔아넘긴다. 옛날식 주인공이어서 순영은 아름답고 지순한 여성이다. 색주가라 해도 함부로 처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사이에 순영은 ‘꽃샘’에 걸렸다고들 한다. 이름하여 매독이다. 손바닥에 엿이 묻었다고들 한다. 손님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낸다는 것이다. 이 둘이면 벌써 순영은 사람 행세를 할 수 없다. 이 인천 색주가는 세상의 축도다. 세상은 사람들 모여 사는 곳이다. 옛날 어렸을 적에는 이 사람들이 모두 같은 마음을 가진 줄로만 알았다. 이것을 가리켜 ‘내 맘 같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가며 그렇지 않은 줄 알게 되니, 이것을 가리켜 ‘내 맘 같지 않다’고 한다. 세상에는 이 내 맘 같지 않은 사람들, 일들이 많다. 세상은 또 서로 돕고 수긍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살아보면 그렇지 않은 일이 많다. 그래서 너나없이 좋은 세상 만들자는 염원을 갖지만 정작 그것이 내 일이 되고 보면 어떻게든 자기 이익과 목숨을 위해 사생결단이라도 낸다. 살아야 하기에, 더 낫게 살려고, 편을 짓고 일을 도모하다 못해 없는 일까지 지어내는 일도 많다. 옛날부터 소설에 그렇게 억울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도 현실의 일로 깨닫지 못하고 내 일 아니라 생각을 했건만 리얼리즘을 믿으면서도 정작 소설이 현실을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었다. 여럿이 작당을 해서 있는 일을 없다 하고 없는 일을 있다 하는 일이 그렇게도 많다. 자신들이 옳다고 여겨서 그러기도 하지만 옳지 않은 줄 알고 느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일을 벌인다. 그런 때에야말로 그네들의 수법은 교묘하거나 그악스럽고 악착스럽게 된다. 소설에서 순영은 억울하게도 누명을 쓴 것이었다. 새로 들어온 순영의 생김새며 마음씀이 먼저 있던 이들의 시샘을 산 것이었다. 말은 지어내기도 쉽고, 여러 사람이 다 그렇다 하면 꼼짝없이 몰리고 마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 함이 딱 그럴 것이다. 순영은 끝내 억울함을 안고 차라리 죽어버리려 한다. 하지만 작가는 순영을 살려 그 억울함은 풀지만 또 다른 시련에 휘말리도록 한다. 어째서 만해는 이렇듯 순영으로 하여금 박명(薄命)한 삶을 살게 한 것일까? 먼 이후의 일들도 미리 짚어본 것일까?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의 일을 놓고 한쪽으로 몰아간다. 그런 ‘흉책’은 분명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을 것 같다. 일제강점기에도 살았다. 더 무서운 일들도 있었겠다. 그렇게 위안을 삼으려 해도 세상이 지금 끔찍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도 버팅키고 살아가야 하겠다. 우리 모두.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11-03

이 예감은 무엇일까? 어떤 의미일까?

사람이 언제나 옳기만 할 수는 없다. 그의 생각, 결정, 행위에는 늘 제대로 되지 못한 것들이 뒤섞여 있게 마련이다. 진리였던 것이 환상임이 밝혀지고 환영 속에 가려진 진실이 폭력의 장막을 찢고 밝은 제 모습을 나타낸다. 벌써, 시월도 넷째 주씩이나 되었다니. 그토록 고통스럽고, 억울하고, 답답한 시간이, 하루하루가 쌓이고 쌓여 벌써 12월도 한 달 몇 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니. 그는 그 세월을 다 어떻게 견뎠을까. 세상이, 진실이 거꾸로 뒤집힌, 피가 거꾸로 솟아도 시원찮을 세월을 어떻게 다 참아낼 수 있었을까. 바깥을 버젓이 돌아다니는 사람도 이렇게 고통이 폐부를 찌르는데, 그 추운 겨울과 뜨거운 여름의 거짓과 적반하장을 어떻게 다 참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가을이 깊어가자, 바야흐로 세상은 다시 바뀌고 있다. 시작인가 싶던 게 끝이 보이고, 영원히 감추어져 있을 것만 같았던 게 어느새 바닥이 드러나 보인다. 화려한 화장이 벗겨지고, 사람들은 거짓된, 추악한 ‘맨 얼굴’을 드디어 알아차리고들 있다. 그 사이에, 가담과 추종과 배신과 비겁과 움추림의 몸짓들, 표정들이, 거짓 ‘언어술사’들의 분식조차 무력화된 자리에서, 벌거벗은 제 알몸을 부끄러워들 한다. 고독은 참 좋은 친구이지만 벌써 내 곁에서 떠나갈 채비를 한다. 어느 것 하나 진짜인 게 없는 이 가짜 체제, 세상 속에서 벌써 그게 가짜임을 알아차리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반갑지 않다. 진정으로 좋은 것은, 진실에 가까운 것은, 하늘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아주 적은 것처럼, 진실을 깨닫고 믿는 사람들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 좋은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마치 아름다운 시를 한 편 써놓고 혼자서만 입안에서 공 굴리며 기뻐하다 단물이 다 빠져서야 남들 보라고 내놓는 외로운 시인처럼, 나는 더 오래, 황홀한 고독에 머물러 있고 싶다. 그 겨울에서 이 가을에까지 나는 지독한 세월을 보냈지만, 그것은 증오와 반목의 힘으로는 세상을 옳게 세울 수 없음을, 불의로는 정의를 이룰 수 없음을 말해온 것뿐이었다. 세상은 언제까지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싸움을, 폭력을, 거짓을 동원할 텐가? 어찌하여 이상이라는 이름 아래 자유가 짓밟혀야 하고, 구원이라는 목표 아래 복종이 강요되어야 하고, 진실이라는 선전 속에 거짓이 설파되어야 하는가? 그 비속한 위선이 어찌하여 수단을 얻고 조력을 받아 풍랑 속에 든 배를 가라앉히려 하는가? 어느새 미친 폭풍우 불어닥치던 바다에 많고 밝은 기운이 감돌고 있으니, 이는, 비의(秘意)의 알레고리처럼 느끼 수 있는 자만 느끼는 것인가? 나만 이 기운을 느끼는 것인가? 사람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 반대로 기대에 찬 눈빛을 주고받는 것, 태평양 넓은 바다 너머에서, 남지나 해상의 소문 너머에서 이곳을 향해 불어오는 새 바람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새벽까지 올해 작고한 김영현을 읽었다. 그의 ‘열세 번째 사도’(푸른역사, 2023)를 다시 넘겨보며 그도 무척이나 외로웠으리, 생각한다. 자신이 믿고 추구한 것들이 보물의 사상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 그는 ‘예정된 악인’ 유다의 운명을 안타깝게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다. 잠깐 눈 붙이고 새로 뜨니, 계절이 정녕 새로워지려는가. 어둡고 우울하던 하늘이, 반짝, 개어 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10-20

작가 윤흥길의 작은이모

살아간다는 것은 어렵다. 누구나 어렵다. 돈 많은 사람도, 없는 사람도 크고 작은 차이는 있어도 어렵다. 어려운 삶을 그 무게를 덜며 사는 법을 익힌 사람은 지혜롭다. 그래도 가난한 이들에게 천국이 가깝다는 말은 옳다고 생각된다. 이렇게도 생각한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들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이 성스러움이 그네들의 삶의 무게를 덜어주지는 않겠지만, 우리들의 삶 전체를 위해서는 이 생각이 없어서는 안되겠다. 소설 공부가 어찌어찌해서 윤흥길 작가 쪽으로 흐르는데, 문제작 ‘장마’며,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를, 해석을 달리해 볼 방향을 찾는다. 이 공부는 동학과 증산교와 기독교를 들락달락해야 한다. ‘장마’에서 마당에 나타난 구렁이를 죽은 삼촌의 혼령이 씌운 것으로 보고 집안일은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고 어서 “자네” 가야 할 데로 가라는 그 달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가 문제다. 소설만으로 보이지를 않아 작가가 쓴 산문집 ‘텁석부리 하나님’(1993)을 찾아 읽는다. 거기 작가의 작은이모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작은이모의 남편 되는 분은 법원에서 일했는데, ‘인공’ 치하에서 잠시 외출했다 실종되어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작은이모는 폐결핵까지 얻어 어린 작가의 집에 깃을 들여 함께 살았다 한다. 산문집을 통독하다, 작가의 정신세계가 기독교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음을 쉽게 깨닫게 된다. 단편소설 「집」을 보면 작가는 어려서 참 지지리 궁상도 그런 궁상은 없었던 것 같고, 정직하면서도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힘겨운 성장통과 씨름도 잦고 컸다. 그 시절, 작은이모의 깊은 신앙심이 작가를 인도해 주었더라고 한다. 가난하고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잔잔한 수면 같은 고요한 마음 세계 그대로였던 작은이모의 곱디고운 모습이 어린 작가를 헛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끌어주었다고 한다. 마지막 숨을 거두고도 마치 산 사람처럼 평화롭고 미소마저 어려있던 작은이모의 모습은 이 글을 쓰는 나 자신에게도 너무나 ‘처연하게’, 그러면서 아름답게 상상되는 것이었다. 이 작은이모 이야기 속에서 한 가지 얻어 깨달은 것이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어느 작은 사람도, 세속에 크게 빛나지 않는 사람도, 고통이나 슬픔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크고도 좋은 힘이 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이다. 또 사람은 애써 크고 좋은 사람이 되려 할 것도 아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충만하게 하는 일, 이 충만함으로 늘 기쁨이 어린 삶을 만들어 가는 일이야말로 누구나의 삶이 이루어내야 할 크나큰 좋은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의 일이 아니며, 또 종교만의 일도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윤흥길 작가의 작은이모는 어린 윤흥길에게 버티는 힘을 선사한 데 머무르지 않고, 작가의 작품에 살아 읽는 이들을 움직이고, 또 그 힘이 멀리 소설 공부하는 사람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다. 고요한 충만함, 내적인 충만함이 무엇인가를 다시 곱씹어보는 새벽에서 아침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9-22

평창 봉평, 이효석문학관의 가을

새벽 5시. 겨우 눈이 떠졌다. 알람을 5시부터 6시까지 대여섯 개를 설정해 놓았었다. 대충 준비하고 나서자 벌써 여섯 시에 가깝다. 동서울버스터미널까지, 지하철로 한 시간 계산, 7시 10분까지 모이기로 했다. 6호선에서 3호선으로, 다시 2호선으로 갈아탄다. 택시보다 마음 편한 지하철이다. 가면서 무념이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평화롭다. 평창까지 아침 일찍 출발하면 2시간 남짓이다. 춘원학회를 같이하시는 전순영 시인, 이자성 선생께서 와 계시다. 발표자들, 토론자들도 모두 제때 도착이다. 우등버스 같은 버스 안, 편안하다. 예산이 없어 쩔쩔매다 어렵게 후원을 얻어 준비할 수 있었다. 버스는 휴게소에도 들르지 않고 아침 길을 달린다. 모두 고단한 아침 잠에 빠져든 듯. 나는 장문석 선생을 붙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청한다. 그는 최근에 오무라 마쓰오 선생에 관한 책을 냈다. 오무라 마쓰오, 사에구사 도시카스, 김윤식, 1970년, 일본 좌파, 윤동주, 김지하···. 이야기는 멀리, 깊은 곳까지 흘러간다. 전순영 시인은 그 사이에 근 십 년 가까이 힘든 병을 치러내셨다 했다. 아제르바이잔 유학생 레일라는 새벽에 인천에서 출발했다. 목하, 고단한 잠에 빠져 있다. 진우동, 린커쉬도 모두 유학생, 이번 준비에 대단한 활약을 했다. 먼저 문학관에 가 플래카드도 걸고 줌 장비로 점검했다. 그러고 보니, 신주희, 김산아, 장제희, 작가들이 동승했다. 오늘 세미나에서 연구자들 발표에 질의를 해주기로 했다. 9시 반 넘어 버스는 이효석문학관 밑에 제대로 당도한다. 10시부터 시작이다. 이효석 아드님 이우현 선생과 이주리 재단 실장님이 반겨 주신다. 봉평의 이효석 문학 선양회 분들도 나오셨다. 지금은 이효석 문화제 축제 기간. 일요일인데도 문학관의 내방객이 많다. 실무를 총괄한 구자연 선생, 몹시 바쁘다. 올해의 학술행사 주제는 이효석의 문제작을 다시 해부하는 것. 발표자만 모두 여덟 명에, 질의자도 여덟, 토론자가 넷이다. 하루 행사치고는 많다. 다섯 시까지 강행군이다. 단편소설 ‘하얼빈’의 주석적 연구를 발표한 부용은 바다 건너에서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야 비자가 만료된 걸 았았다던가. 줌으로 발표를 해주기로 했다. 첫 창작집 ‘노령근해’(동지사, 1931)부터 ‘해바라기’(학예사, 1939)까지, 또 장편소설 ‘화분’(인문사, 1939)과 ‘벽공무한’(박문서관, 1941)까지, 또 희곡 ‘역사’('문장', 1939년 12월)까지 발표들을 했다. 특별한 것은, 평창 작가 김도연 씨가 자신이 읽은 이효석 작품들에 나타난 평창, 진부, 봉평, 대화, 월정 같은 곳들에 대해 아주 상세하고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해준 것, 그리고 정선의 시인 전윤호 씨가 와서 유머러스하고도 평온한 토론을 펼친 것. 올해 세미나 준비하면서 각별히 신경 쓴 것은 평창 분들, 내방객들까지 함께 할 수 있는 학술토론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 작가와 시인들의 역할이다. 발표자들도 빠짐없이 PPT까지 준비했다. 이제 겨우 다 마쳤다. 끝나고 저녁식사하러 내려오면서, 문학관 전망대에 섰다. 낮은 산들에 둘러싸인 봉평의 푸른 들, 녹 빛들이 한눈에 너무나 시원스럽다. 학술도 학술이지만, 이 빛을 만나려고 여기 왔던 것인가. 바로 그러했을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9-08

국가 자본주의와 국가 사회주의

한국사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이 물음 앞에서 생각해 본다. 일제 강점이 말기로 접어들어 1940년이 되자 신체제론이 대두된다. 생산과 소비를 국가주도로 행한다는 것인데, 천황을 극점으로 해서 개인이 국가의 수족이 되는 체제를 구축하려 한 것이었다. 이 일본식 통제경제가 당시의 한국인들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 작용했는가는 채만식이나 김남천의 몇몇 사소설 계열 작품에 흔적이 남아 있다. 일제는 강점기 내내 조선총독부는 사회주의자들을 가혹하게 다루었고, 그들의 조직을 무너뜨리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염상섭의 ‘무화과’나 심훈의 ‘불사조’ 같은 장편소설에 검열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 경찰서 내 고문 같은 가혹행위 장면이 나타난다. 박헌영이나 제4차 공산당수 차금봉 같은 이들이 혹독한 고문 끝에 실성 단계에까지 이르고 또 죽어버리기까지 한 것은 그 시대의 야만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도 사회주의를 적대시하고 추적하고 적발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들의 천황제 파시즘이라는 것이 사회주의자들이 추종한 레닌이즘의 좌익 전체주의와 양상이 얼마나 달랐던가는 미지수다. 생산과 유통 소비에 이르는 과정을 국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관리한다는 것, 계획통제한다는 점에서 천황제 파시즘이라는 국가자본주의는 소비에트 국가사회주의와 다를 바 없었지 않을까? 그때 천황제 파시즘 아래서 사람들은 어떤 실질적인 자유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자본주의는 그 통제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면 국가사회주의와 다를 바 없어진다. 나중에 백군을 진압한 레닌은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신경제정책을 구사했다. 그것은 전시공산주의의 철저한 통제를 풀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좌익 전체주의 정권이 시장 원리를 도입하면 적어도 외견상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와 완전히 다르다고는 말할 수 없게 된다.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라면 오늘날의 한국사회도 얼추 이에 들어맞는지도 모르겠다. 한참 이른바 변혁론이 유행할 때 그 논자들 중에는 한국사회가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도 말했었다. 한국 자본주의는 체질상 확실히 국가 주도적 성격이 강했고, 지금 그 성격이 변화되고는 있지만 대기업, 재벌기업도 아직까지 국가가 이렇게 저렇게 불러낼 수 있는 것을 보면 국가자본주의에서 크게 멀지 않다. 문제는 이 국가자본주의 한국사회의 권력 구성 방식에 지금 심대한 변화가 야기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 변화는 오래전부터 시작되었고 결코 내적, 자율적이지만은 않은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1987년의 국민주권 혁명으로 획득한 자유가 무척 컸고 세대에서 세대로 그 자유를 충분히 누려왔기 때문일까. 자유에 ‘취한’ 국민들은 어떤 기이한 선거 ‘절차’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세상이 변한 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그런 이들이 많다. 확실히 지난 6월 3일의 이상한 일까지 경험한 작금의 한국 사회는 바야흐로 ‘국가적 자본주의’를 넘어 어디로 가는지 모를 길에 접어든 느낌조차 없지 않다. 무섭고 두려운 느낌. 이것은 단지 몇몇 사람들만의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8-25

청계천 문학기행

토요일 아침 열 시. 장소는 보신각 옆 할리스커피. 스물 남짓한 ‘창작교실’ 사람들이 일찍부터 모였다. 날씨는 그 뜨거운 날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갑자기 선선하다. 가끔 비도 뿌린다는 예보다. 오늘은 청계천 문학기행 날이다. 보신각이 기행의 출발점이다. 채만식 소설 ‘냉동어’에서 주인공 대영이 보신각을 가리켜 낡은 시대가 새로운 시대와 동거를 하고 있는 궁상스럽고 초라한 꼬락서니라 했다. 그러나 오늘 보신각은 한결 늠름하다. 종로 네거리 보신각 길 건너편에는 종로타워 33층짜리 빌딩이 높이 솟아 있다. 그곳이 옛날 ‘민족자본’ 화신백화점 자리다. 또 다른 길 건너편에는 전봉준이 두 팔을 묶인 채 앉아 있다. 죄인을 가두는 전옥서가 영풍문고 자리에 있었고 여기서 전봉준이 저형당했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광교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광교 건너편에는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생가가 있었다. 다옥정 7번지, 그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지금은 청계천이 넓혀져 이 번지수는 청계천 속에 들었다. 구보는 한낮에 청계천변 다옥정 집에서 나와 광교 건너 보신각 있는 종로 네거리 쪽으로 걸어가게 된다. 광교에서 우리는 계단으로 천변 아래로 내려간다. 가는 비가 흩뿌리는 청계천은 한결 운치가 있다. 수표교 쪽에서 다시 천변 위로 올라서 다리를 건너자 오늘 순례의 주된 장소라 할 전태일 기념관이다. 청계천은 문학사적으로 세 개의 심상(이미지)을 갖는다. 먼저, 청계천은 특히 북악산 밑 백운동 계곡과 청풍계 쪽의 백운동천, 인왕산 아래 수성동 계곡에서 발원한다. 청계천이라는 이름은 이 청풍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청계천은 청풍계를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 문인들의 문학적 흐름과 관계가 깊다. 다음, 청계천은 작가 박태원이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나 장편소설 ‘천변풍경’을 통해 구축한 불결함과 가난, 그리고 이를 매개로 연결된 서민들의 ‘공동체’적 삶과 관련이 깊다. 이러한 청계천 이미지는 해방 후, 6·25 전쟁 후에까지 연결된다. 마지막 하나가 전태일의 청계천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과 대구, 부산 등에서 성장한 전태일은 청계천 평화시장에 ‘시다’로 취직하게 되면서 운명적인 길을 걷게 된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1984년은 그의 뜻을 계승하고자 한 ‘청계피복노조’가 합법성 쟁취를 위한 싸움을 가열차게 벌이던 때였다. 뜻도 제대로 모르고 시위를 나갔다 전경에 쫓겨 고가도로 밑으로 뛰어내린 기억이 선명하다. 어렵고 어지러운 때면 이 전태일이라는 존재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된다. 어째서 그의 죽음은 여전히 숭고하게 느껴지는가? 희생을 ‘내세운’ 다른 흔한 죽음들과 달리. 이것이 나의 지속적인 질문이다. 인간의 삶에서 나고 죽는 것만큼 근본적인 문제가 없다. 인간은 아직까지는 반드시 죽어야 할 존재이므로, 어떻게 죽느냐는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전태일기념관을 나와 세운상가까지 걷다가 버스를 타고 버들다리(전태일다리)로 간다. 다리 위 전태일 반신상을 ‘참배’하는 것이 마지막 코스다. 세 시간 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다시 배우고 생각한 길이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8-11

'옛날 사람'

세월이 참 빠르다. 어수선한 시국 따라 시간은 더 가파르게 흐른다. 안후이성, 난징에 갔다 온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주일 훌쩍 넘겼다. 다녀오고 나서는 한 이틀 끙끙 앓았고, 그 사이에 이효석 축제에 학술대회 지원 못 해준다는 뜻밖의 소식이 들렸다. 토요일에는 탈북작가와 함께 하는 ‘나도 작가다’ 창작교실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지난 해에 이어 두번째,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새롭게 하고자 했다. 북한에서의 삶의 문제는 나의 중요한 문학 주제 가운데 하나다. 그 사이에 어느 아침에 갑자기 혈뇨가 빨갛게 흘러 이곳저곳 병원을 알아보기도 했다. 건강하시던 부친은 돌아가실 때까지 암을 무려 네 개나 앓으셨는데, 그 중 하나가 신장암이셨다. 일요일에는 ‘길 위의 인문학’. 폭염 속에서 나와주신 분들 서른다섯 분은 될 것 같은데, 서촌 ‘이상의 집’에서 ‘윤동주 하숙집’ 지나 ‘윤동주 문학관’, ‘환기 미술관’으로 순례를 한다. 지금 서울은 폭염. 저녁에는 한증막이요, 아침부터 불볕더위다. 수화 김환기의 파란 추상화 앞에 서자 이제야 마음이 차분함을 얻은 듯한 느낌. 그러자 이제서야 중국 떠나기 직전 집에 배달되어 온 소포 하나가 생각난다. 영문 모를 큰 박스가 부쳐져 왔는데, 최근에는 ‘북아일랜드’에서 청계천 책들 주문한 것 외에는 박스가 올 일이 없다. 어렵사리 무거운 소포를 들여놓고 열어보니 금방 밭에서 따낸 것 같은 옥수수가 한가득. 이게 뮌가, 하면서도 금방 떠오르는 얼굴은 강원도 정선 사는 시인 친구, 시집 ‘사랑의 환율’을 펴낸 이다. 갓 밭에서 따낸 푸른 잎 옥수수를 보기 얼마 만이던가. 옥수수 하면 떠오르는 것은, 옛날 대전 변두리 태평동에 59평 밭을 어렵게 장만하신 아버지가 옥수수, 감자, 깨 같은 농사를 지으셨던 일. 어렸을 때 참외밭 같은 작물 가꾸던 솜씨로 어느 해 옥수수가 얼마나 탐스럽게 다닥다닥 열렸는지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고는 이상의 수필 ‘산촌여정’에 등장하는 옥수수. “옥수수밭은 일대 관병식입니다. 바람이 불면 갑주 부딪치는 소리가 우수수 납니다.” 여기서 ‘갑주’란 갑옷과 투구. 옥수수들 늘어서 있는 것 보고 군인들의 관병식, 곧 열병식을 떠올리는 작가 이상의 ‘문명스러움’이라니. 나면서부터 쭉 시골에 살아 ‘옛날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한 사람들은 얼마나 귀한가.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곳으로 이민 가 억척스럽게 새 삶을 개척해 오면서도 습속이나 가치관은 옛날 60년대나 70년대나 80년대 것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귀한가. 서울을 경험하고도 옛날 고향으로 돌아가 잃어버릴 수도 있을 ‘옛날 스러움’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귀하디 귀한가. 손수 농사 지은 것을 멀리 있는 사람 생각나 우체국을 찾아 보낼 수 있는 ‘옛날 사람’을 생각하면, 하루하루 번잡하기만 한 서울의 생활이란 얼마나 허무한 것이냐. 그러고 보니, 나는 저 논산에 내려가 농사 지으며 살아가는, 북에서 떠나온 귀한 옛날 사람 작가도, 한 분, 알고 있었다. 논산 사람의 그 묵직한 ‘옛날스러움’이 더없이 귀해 보이는 날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7-28

중도(中道)에 서는 것

‘딱지’ 붙이기가 성행하는 세상이다.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에게 가장 듣기 싫을 법한 ‘별명’을 붙여준다. 세상은 속스러워져서 정권이나 언론, 정당이나 하던 짓을 일반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프레임’ 씌우기도 ‘동물농장’의 ‘나폴레옹’처럼 ‘영특하게도’ 알아차려 잘도 활용한다. 한번 ‘프레임’을 상대방에게 씌우면, 일단 ‘프레임’을 뒤집어쓰고 갇혀 버리면 여간해서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프레임’ 정치가 횡행한 지 오래, 이제 이 ‘정치’는 역사학자들의 것이 되고 문학인의 것이 되었다. 최근에 접한 신조어 ‘프레임’ 중에 ‘틀포티’라는 말이 있다. 챗GPT에 물어보면, ‘틀니를 낀 40대’의 준말이라 한다. ‘틀’은 틀니에서 왔고, ‘포티’는 영어 ‘forty’에서 왔다. 원래 ‘뜰딱’이라는, 노년층 상대의 끔찍한 ‘프레임어’가 있었던 것을, 이제는 ‘40대’에 적용한 것이다. 구시대적 사고방식에 ‘찌들어 있다’는 뜻을 갖는다. ‘유사역사학’이라는 것도 대표적인 프레임 씌우기다. ‘pseudo-history’란 원래 ‘학문적 기준과 검증 절차를 따르지 않고 편견, 상상, 음모론 등에 기반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날조하는 주장이나 체계’다. 좋은 의미를 가질 리 없다. 그러니 이 말은 다른 사람이나 입장을 향해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일단 뒤집어 씌우면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불명예, ‘독’이 되기 때문이다. 똑같은 일을 자신이 당할 수도 있음은 생각지 않는다. 이런 말 중에 요즘 시국과 관련해서 특히 유행하는 말은 ‘극우’니 ‘극좌’니 하는 말이다. 이것은 이념상의 스펙스럼 가운데 양쪽 극단에 선 입장을 가리킨다. 이것이 우리나라 경우에 적용되면 그 효용이 단박에 드러난다. ‘부정선거’를 말하면 ‘극우’라는 ‘딱지 붙이기’에 꼼짝없이 당하기 쉽다. 학자나 문학인은 그래도 지성인이라 하는데, 남한테 그런 딱지를 붙이고 안심하고 만족해 한다? 끔찍하다. 먼 옛날 샤카족(釋迦族)의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는 오랜 고행 끝에 해탈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찾았다. 그것은 ‘중도(中道)’에 서는 것이었다. ‘중도좌파’니 ‘중도우파’니 하는 말을 하지만 ‘샤카무니(釋迦牟尼)’에게 이 말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졌다. ‘구담 실달타(瞿曇 悉達多)’는 당시 ‘사문(沙門)’들, 곧 수행자들의 ‘화두’에 대해 전혀 차원 다른 통찰을 보였다. 사문들은 ‘세상’이 본디 있다거니 없다거니, ‘자아’라는 것이 있다거니 없다거니 하고들 있었다. ‘석가’는 이 두 개의 극단적 입장을 ‘버리고자’ 했다. 그런데 그 ‘버린다’는 것은 양극단의 중간쯤에 서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양극단을 해체하고자 했다. ‘자아’라는 것, ‘나’라는 것은 본디 있다고도 없다고도, 있는 것이 아니라고도, 없는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고민한다. 과연 이 지독한 ‘딱지붙이기’의 세상에서 ‘중도’에 선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새로운 사유의 차원을 열 수 있을까? 과연 ‘나’는 프레임 붙이기에 빠지지 않고 사유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7-14

'내면성'에 대하여

‘내면성’은 독일어로는 ‘인너리히카이트(Innerlichkeit)’, 이를 영어로 옮기면, ‘인테이어리티(interiority)’, 한자로 ‘內面性’이다. 문학의 ‘내면성’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는 날들이다. 어찌 되었든 번역어처럼 느껴지건만, 그럼에도 나는 이 말에 어떤 밀착감을 느낀다. 요즘처럼 이 문제가 심각하게 생각되는 때도 없었던 것 같다. 근대문학, 곧 현대문학은 내면성의 문학이다. 이 내면성은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Die Theorie des Romans)에서 그 의미가 잘 개진되어 있다. 거기서 이 말은 단순히 심리의 안쪽 측면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 말은 “세계로부터 소외된 주체의 존재 방식, 주관적 진리, 정신적 고뇌”와 같은 의미를 띤다. 그는 말한다. 옛날, 저 그리스적 고대에 있어 사람들은 서로로부터 소외되지 않았다. 그네들의 삶은 일종의 ‘원환성(Rundheit, roundness)’을 뗬다. 원환적이라는 것은 둥그렇다는 것, 비유적으로 서로 공동체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다는 어감을 선사한다. 완결되어 있고, 조화롭게 통일되어 있다는 뜻을 갖는 ‘게쉴로센하이트(Geschlossenheit)’는 그 개념적 의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루카치는 말하는데, 공동의, 공통의 가치를 나누어 갖지 않는다. 특히 ‘문제적 개인(das problematische individiuum, problematic individual)’은 공동의 가치라 믿어지는 것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품은 자다. 현대사회에서 이 공동의 가치란 한갓 환상이거나 거짓된 믿음, 속물적·속류적 믿음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쉬운 공동의 가치를 믿지 않는 자는 이 ‘공동 환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런 질문, 일제강점기에 작가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물음을, 최근 들어 더 빈번하게 스스로에게 던져보곤 한다. 참 많이도 힘들었을 것이다. 체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일본은 전쟁에서 늘 승리하고, 그러니 조선이 해방될 날은 요원하게만 느껴진다. 권력의 힘에 떠받쳐진 잘못된 논리, ‘거짓된 진리’가 ‘백주대낮’을 지배하는 것이다. 작가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쓸 수도 없다. 직접적인 정치적 폭력이 일차적 원인이라면, 다른 하나는 대중의 압력이다. 방향성 없는, 잃은 대중의 심리는 요원한 미래를 알지 못하기에, 다른 말을 하는 자를 믿지 않는다. 미쳤다고 한다. 이름하여 채만식 소설 ‘소망(少妄)’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젊은데도 벌써 미쳐 버렸다. 그는 한여름에 겨울옷을 입고 광화문 한복판에 나가 서서 너무 춥다고 한다. 오늘날 문학의 내면성은 이 춥다는 외침조차도 잃어버린 단계에서나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은 숱한 말들을 쏟아내지만 진짜 내면성의 문학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어쩌면 지독하게 내면적인 작가들은 차라리 발표할 말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니, 감추고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아니, 이런 내면성은 차라리 축조되지 못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침묵에 가까운, 진정한 말을 생각한다. 꿈꾼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아직 덜 외로웠던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6-30

서두르지 않는다

내가 관여하는 한 학회에 아주 오랫동안 활동을 영상 기록으로 담아오는 선생님이 계시다. 봄이 무르익은 어느 날, 인사동 하고도 선천(宣川)이라, 평안북도 지명을 딴 곳에서 어려운 학회를 지원해준 원로 어른들 모시고 점심식사를 했다. 그날도 역시 이 선생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을 해주셨다. 내가 이 학회에 관여하며 일해온 십여 년 동안 한결같이 보아온 모습이셨다. 국문학계, 거기서 현대문학 쪽에는 학회들이 많다. 작가 이름을 딴 학회도 많고, 주제나 영역을 가리키는 이름을 가진 곳도 많다. 어떤 학회는 그 연구 대상 작가의 이름이 아직 높지 않아서 고생하기도 한다. 또 어떤 학회는 첨예해서 논쟁이나 논란의 대상이 되기 쉬울 수도 있다. 그런 곳에서 오랫동안 일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돈으로 보상받기도 어렵고 많은 이들의 보편적인 지지를 받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남들 안 하는 궂은일을 계속해 나가기란 극난하다. 점심 자리가 파하고 선천 대문 앞에 나가 사진들을 찍었다. 사진 찍는 어른들 모습을 보니 그 십여 년 사이에 많이도 변하셨다. 몸이 눈에 띄게 불편해지신 분들도 계시다. 이곳 인사동 골목과 선천의 연륜만큼 오래 버티고 서 오신 분들인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하기에 이 어른들의 한 가지 모습 있어, 그것은 한결같다는 것, 변하지 않고 계속해 나가신다는 것이다. 사진 찍는 일도 끝나자 이제 차담(茶談)을 나눌 차례다. 나는 이쯤에서 다른 일을 위해 떠나야 한다. 어른들이 골목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들 가시고, 이제 선천 앞 공터에는 촬영하시는 선생님과 나만 남았다. 장비를 정리하시는 선생님께 다가가 여쭈어본다. ―요즘 세상이 참 어지럽지요? 늘 고생하시는 선생님께 친밀감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었다. ―글쎄요. 세상에는 나 모르는 원리나 메커니즘이 있는 것 같아요. 오래,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래. 그걸 내가 바꿀 수는 없는 것 같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지요. 선생님은 한 번도 당신이 하시는 일에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불평을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오늘 시국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고 있던 한 분의 보석이 허가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열흘 남짓만 있으면 벌써 6개월이 흐르고 그러면 자동으로 구속 취소가 되어 나오게 된다 한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흐른 것이었다. 지난 사나흘 사이에는 저 멀리 중동에서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습해서 군 수뇌부들, 핵 과학자들이 죽고, 핵시설과 유전이 파괴되었다 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도 상황이 무척이나 뒤바뀐 듯도 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식은 ‘나비효과’도 아니어서 내일의 이곳이 변화할 것을 시사할 수도 있다. 세상을 걱정하는 선배 한 분이 전화를 하셨다. ―이제 세상은 우리 손을 떠난 것 같아. 요즘 벌어지는 일들을 보니 그래. 가만히 우리 할 일 하며 때가 어떻게 오는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해. 딴은 그렇다.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세계를 움직이는 크나큰 원리며 메커니즘의 하나로서 나타난 것이리라. 이 작은 개체의 생각과 눈으로 보이지 ‘바람’을 다 헤아리랴. 서두르지 않는다. 기다린다. 내 일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6-16

불심(佛心)은 중생심(衆生心)

세상의 논란, 소용돌이의 한 귀퉁이에 서 있어 마음 편할 수 없는 나날이다. 지난 31일, 토요일, 서울대학교 신양학술정보관에서 설악무산(雪嶽霧山) 스님을 추모하는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헤아려보니 벌써 어언 7년. 2018년 5월 26일 원적에 드셨다. 세수 87세요, 승납 60세이셨다. 그때 최동호 선생님, 권성훈 시인과 함께 마지막 누워계신 곳으로 갔을 때, 병풍 뒤 유리관 안에 계신 스님께서 눈을 반짝 뜨시고, 너 왔느냐, 하셨다. 유리관에 맺힌 이슬이 마침 스님의 감으신 눈에 맺힌 것이다. 다시 살아나셔, 한 말씀, 제대로 살라, 하시는 듯했다. 사제이신 홍사성, 김병무 선생이 엮으신 ‘무산 스님의 방할’, 생전의 스님 언행과 법문을 담은 책이 있다. 이를 보면, 무산은, 대승불교의 정신은 불심(佛心), 부처님의 마음은, “중생심(衆生心)”, 중생의 마음에 있다 하시며, 스님들이 좋은 곳에 앉아 덕담만 하면 어찌 부처님이 되겠느냐, 저자거리에 시장바닥에 나가보라 하셨다. 불경에 전하는 화두(話頭), 1700 공안(公案)에 속지 말라시며 뜰 앞에 있는 나무가 잣나무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떻겠느냐고도 하셨다. 옛날 중국 조주 스님의 문답에, 어느 스님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까닭을 물으니, 스님 답하시기를,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뜰 앞의 잣나무라 하셨다는 것이다. 불법의 이치를 묻는 스님에게 그 실상(實相)을 보라 하셨다는 것인데, 그야 내가 제대로 알 리 없다. 무산은 화두에 묻히지 않도록 안거(安居) 수행을 끝내고 산문을 나서는 스님들께 해제 법문에서 그렇게 이르셨다는 것이다. 세속 세상, 보통 사람들, 서민들 살아가는 곳에 나아가, 수행에서 얻은 것이 참 깨달음인지 아닌지, 제대로 얻은 것인지 아닌지, 제대로 한 번 자문해 보라, 하셨다는 것이다. 시비인(是非人)이 되지 말고 무사인(無事人), 일상 자체를 수행으로 여기는, 애써 구하려 하지 않는, 생각을 내려놓고 볼 줄 아는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도 경계하시기를 그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세상이 어지럽고, 그 혼탁한 가운데 불의가 정의가 되고, 권력이 저항으로 둔갑하는 마당에, 옳고 그름을 가려 그 세상이 언제까지, 어디까지 그렇겠느냐고 매서운 추위의 겨우내, 시절 좋은 봄에도, 세월 가는 줄 몰랐었다. 시비(是非)에 묻혀, 저 숲속의 마르고 구부러진 나무 되기를 꺼리고 세속 세상에 나와 싸우려 하기를 거듭했다. 사제 되신 분께 그분의 사유에서 무엇을 얻어야 하느냐 여쭈니, 수행해서, 참선해서 부처님 되신 후에, 중생을 구하려 하는 불교에서, 부처처럼 살아가야 부처가 되는 도리로, 중생 속에서 부처의 삶을 살아야 부처가 될 수 있음을, 그래서 화두 수행이 공허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수행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이루신 것이라 한다. 중생들의 삶이, 내게 제대로 비추이도록, 나 또한 중생의 하나임을 잊지 않도록 마음 거울을 닦아야 함을 잊지 않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세상 마음’이 투명해지도록.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6-02

윤후명 선생과 예술지상주의 계보

윤후명 선생이 별세하셨다. 지난 5월 8일, 온 나라가 대통령 선거 후보 문제로 뒤숭숭할 때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 윤후명 선생은 한국문학의 유미주의 계보학을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김동인·임노월에서 발흥한 현대 유미주의 계보는 이효석·이상·계용묵 등을 거쳐 해방 후 이제하 선생으로, 윤후명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다시 작가 심상대에게로 연결된다. 사적 친소 관계가 아니라 예술사적 계보학상에 그렇다는 것이다. 9일 저녁에 채만식 문학상 서성란 작가 시상식을 마치고, 바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대학로 ‘예술가의 집’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은 차로 불과 5분 거리다. 2층 5호실, 장례식장은 떠들썩하지도 않았다. 황충상 선생, 잡지 ‘문학나무’를 이끌어 가시는 작가께서 빈소를 지키고 계셨다. 황충상 선생과 윤후명 선생은 일생을 가까운 친구로 지내오셨다. 윤후명 선생 제자라 할 이평재 작가는 먼저 와서 계시다 가셨고, 이승하 선생, 구효서 작가, 윤대녕 작가 같은 분들이 뒤에 더 도착하셨다. 빈소를 떠나는데 정희성 선생이 막 조문을 마치고 계셨다. 재작년 11월 13일, 윤후명, 정희성, 강은교 세 분이 시동인지 ‘고래’를 앞에 두고 정담(鼎談)을 나누실 때 사회를 본 게 마지막이었다. 윤후명 선생을 그 후로 한두 번은 더 뵌 적이 있을 텐데 인상이 선명치 않다. 이 세 분은 저 옛날 ‘1970년대’ 동인을 함께 하셨던 사이셨고, 긴 세월 흘러 ‘살아계신’ 분들이 다시 모이신 것이었다. 이제 윤후명 선생이 세상을 떠나셨으니 정희성 선생의 심회는 무척 참혹하실 것이었다. 그날은 비가 무척 내리기도 했다. 홀로 집으로 향하는데, 빈소에서 본 윤후명 선생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몹시 안타깝고, 이 혼탁한 정치 세상에 조금만 더 버티고 계셨더라도 좋을 것 같았다. 지금 문단은 정치에 깊이 침윤되어 소란스러운 소리 그칠 새 없고 나 또한 그런 세상의 한 모퉁이에 서 있다. 소목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운명처럼 정치적인 상황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980년대 중반에 대학에 들어간 세대의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윤후명 같은 작가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윤후명 선생의 세대 또한 최인호, 황충상, 조금 더 뒤의 강석경 같은 작가까지 합쳐 생각하면 1940년 전후 출생 세대의 ‘6·25 전쟁 문학’에 대한 반작용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뭔가 다른 방향의 문학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고 절실히 느꼈을 때 비로소 시선에 들어온 작가가 바로 윤후명이라는 존재였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돈황의 사랑’, ‘누란의 사랑’ 같은 소설들은 나로 하여금 정치적 현실과는 다른 삶의 차원을 숙고할 수 있게 했다. 윤후명 선생은 스스로 엉겅퀴를 그리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술과 여행에 심취한 분이셨다. 윤후명 문학처럼 제도와 관습을 심문하고 거기서 이탈하기까지 하는 문학은 예술이 삶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진짜 문학은 정치 이전이거나 정치를 함축하면서도 정치를 초월해야 한다. 어찌 되었든, 나는 이 명제를 놓치지는 않겠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5-19

‘광인수기’를 읽은 끝에

어떤 것도 제대로 하기는 어렵다. 참으로 수백, 수천 중에 하나나 둘 있는 것이 제대로 하는 사람이리라. 갈수록 수업이 어렵게 느껴지는 까닭은 마음이 둘로, 셋으로, 다섯으로 갈라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 제대로 해보려 하면 어디서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자만할 수 없다. 기차를 타고서, 길을 가며, 그 여성 작가를 주제로 삼은 석사 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심사 때도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시간 들여 찬찬히 읽으니 그 성취가 더 남다르게 다가온다. 그때, 계속해서 공부하기 어렵다 했던 말 떠올라, 어째서 그랬던가, 대학원이 시끄러워 그랬던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가, 마음에 걸린다. 결국은 전화로 안부를 묻고, 논문 참 잘 읽었다 하고, 그때 왜 계속하지 않았던가 묻고, 사연을 듣고, 뭐라 격려라도 한 마디 전해주어야 했다. 며칠 후로, 나는 해당 수업이 끝나고도 계속해서 그 여성 작가를 읽는다. 시베리아며 청도며 훌쩍 떠나기 좋아했던 작가, 아뿔싸, 서른한 살 나이로 요절해 버린 작가, 위병을 오래 앓던 이 여성 작가를 저세상으로 데려간 것은 췌장암이라 했다. 요즘에는 시간을, 박경리 선생 말씀하신 그 ‘두루마리’로 쓰기가 너무 어렵다. 조금 나가고 다른 데 빠졌다 다시 돌아와 조금 더 나간다. ‘혼명에서’는 그 얼마나 절실한 어둠의 노래인가. 그 ‘混冥’(혼명)이란 것은 한 덩어리의 어둠이요 혼돈한 어둠이라고도 한다는데, 도대체, 어려서 독학당에서 공부를 했다는 이 작가는 절체절명의 죽음 앞에서 무슨 뜻으로 이 ‘혼명’을 말한 것인가? 이 작가, 백신애(白信愛)는 1908년 5월 19일에 나서 1939년 6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혼명에서’가 발표된 것은 잡지 ‘조광’의 1939년 5월호다. 나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느끼며 ‘최후’의 문장을 써나가는 작가의 존재를 실감치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삼엄한 죽음의 감정과 의식을 토대로 삼아 나는 이 작품을 새롭게 읽을 수 있는 독법을 찾아낸다. 수업이 있던 금요일, 저녁에 미국서 온 시인을 만나고 일찍 귀가해서, 토요일 문학 강의를 하나 하고는, 죽은 듯이 열다섯 시간을 잠에 빠져 들었다. 무슨 연유에서였는지 알 수 없다. 몸살 때문일 수도 있고, 요즘 따라 삶이 더욱 아슬아슬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일요일, 파주의 창고에 가 이것저것 꼭 필요한 책들을 챙겨오는 중에 ‘백신애 작품집’이 들어 있다. 대구 사는 문주 형이 정성 들여 엮어 놓은 선집에 ‘광인수기’가 눈에 뜨인다. ‘광인’이라. 그렇지 않아도 나는 요즘 ‘광인’에 빠져 있는 참인 것을, 이번의 ‘광인’은 일생을 참고 참으며 살아온 한 여성의, ‘광인’ 된 이야기다. 이 작가, 백신애는, 삶의 실상을, 욕망의 움직임을, 허무를 무참히도 날카로운 언어로 헤집어 보일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가둬 두고 있는 인습과 제도의 ‘사슬’로부터 한없이 자유롭고자 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문제작 ‘꺼래이’, 이 작품에 새겨진 처절한 ‘고려인’들의 사연도 그런 욕망과 ‘광기’가 빚어낸 ‘방랑’의 산물이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