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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세상

지난 1월 16일 비즈니스 호텔에서 눈을 뜬 저는 호텔 주변을 산책했습니다.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공기가 어찌나 맑고 투명한지 눈이 부실 정도였는데요. 이날은 작가 오시로 사다토시 선생님이 우리를 안내해 주셨습니다. 오시로 사다토시는 1949년 오키나와에서 태어나 시 창작으로 시작해, 이후에는 소설로 장르를 확대하며 지금까지도 맹렬하게 활동하는 오키나와의 대표적 문인입니다. ‘저승의 목소리’ ‘게라마는 보이지만’ ‘1945년 비통한 오키나와’ 등의 소설은 환상적인 기법을 통해 오키나와전의 비극을 표현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지요.그의 소설에는 늘 전쟁의 비극을 외면하지 않는 정신, 억울한 망자들의 못다한 말을 담아내는 마음, 사라져가는 오키나와 말(시마고토바)을 쓰려는 의지가 새겨져 있습니다. 오키나와 소바를 파는 식당에서, 오키나와전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는 말씀을 드리자, 선생님은 바로 제 손을 잡으며, 우리는 ‘친구’라고 뜨겁게 말씀해주시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진정한 문학에는 국경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오시로 선생은 우리 일행을 오키나와의 대표 언론사인 ‘오키나와 타임즈’로 안내했는데요. 오키나와는 인구 150만 정도의 섬이지만, ‘오키나와 타임즈’의 규모는 한국의 그 어떤 언론사와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컸습니다.이런 언론사가 나하시에 하나 더 있다는 말을 들으며, 오키나와가 차지하는 사회·역사적 위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키나와 타임즈’에서는 시로마 아리 기자가 안내를 해주었는데요, 시로마 기자는 류쿠 대학 시절 오시로 선생님의 제자였으며, 현재는 ‘오키나와 타임즈’의 출판콘텐츠부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저희에게 ‘일본 복귀’ 50주년을 기념하여 2022년에 출판한 ‘반복귀론을 다시 읽다(‘反復帰論’を再び読む)‘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 책은 ‘오키나와 타임즈’가 발행했던 잡지 ‘新沖縄文学’ 18호(1970.12)와 19호(1971.3)에 수록된 ‘반복귀론(反復帰論)’ 관련 논문 8편을 수록한 것인데요. 그 중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가 쓴 ‘오키나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沖縄の友人への手紙)’도 있었습니다. 미국의 직접 통치 아래서 여러 가지 고통을 겪던 오키나와인들은 미국의 군사지배보다 일본의 일원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1972년에 ‘복귀’를 쟁취하였으나, 몇몇 사람들의 우려처럼 ‘복귀’의 실제 모습은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미국과 일본이 약속한 복귀의 대전제는 오키나와에 존재하는 미군기지가 조금의 손상도 입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그 결과 미국의 군사기지가 그대로 남은 것은 물론이고 신기지가 건설되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일본 국토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에는 재일미군기지 전용시설의 74%가 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 기지는 섬 전체 면적의 20%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지금도 오키나와 경제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은 관광과 기지 관련 수입이라고 합니다.‘오키나와 타임즈’를 나온 우리 일행은, 오시로 선생님의 안내로 1959년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오키나와시사출판사’를 방문하였습니다. 오키나와의 사정을 일본 본토의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취지로 만들어진 이 출판사는, 오늘날 아동용 도서 출판으로 유명한데요. ‘오키나와시사출판사’ 견학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소학교(우리의 초등학교) 3,4학년용 교재였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도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소개한 것들인데요.오키나와 어린이들은 자기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학교에서 정식으로 배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키나와 아이들은 자신이 직접 발 딛고 사는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교과서로 배우며, 일본인으로 성장한다는 것인데요. 어쩌면 국가의 역사와 문화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향토에 대해서부터 배우는 것도, 올바른 세계시민이 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1월 17일에는 후텐마 기지, 헤노코 기지와 함께 오키나와의 대표 미군기지인 카데나 미 공군기지를 방문했는데요. 카데나 미 공군기지는 베트남전 당시 전략폭격기 B-52가 수시로 뜨고 내렸던 곳으로도 유명하죠. 기지 건너편에는 4층 건물의 카페나 휴게소가 있었습니다. 그곳의 전망대에서는 드넓은 기지와 3,700m에 이르는 쭉 뻗은 활주로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잠시 머무는 사이에도 미군기가 뜨고 내리기를 반복했습니다, 전망대에 설치된 소음측정기에 나타난 숫자는 무려 100데시벨을 넘어서고는 하여 우리를 놀라게 했는데요.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보통 110데시벨 정도라고 하니, 근처에 사는 오키나와인들은 경적 소리와 함께 일상을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어쩌면 평화란 대단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소곤소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거라는 소박한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2024-03-04

마타요시 에이키의 소설을 경건한 마음으로 읽는 이유

오키나와는 17세기 초부터 일본(정확히는 사쓰마번)의 침략을 받았고, 19세기에는 일본에 편입되었으며, 1945년에는 지옥과도 같았던 오키나와전을 겪었고, 이후에는 미국의 군사적 지배를 받다가, 1972년 일본에 반환된 이후에는 섬의 상당 부분을 군사기지로 내주어야 했습니다.이러한 역사를 지닌 오키나와에 대한 서사는 대부분 오키나와인의 ‘피해자 의식’을 강조하고는 했는데요. 마타요시 에이키(1947~)는 이러한 ‘피해자 의식’을 넘어 오키나와인 역시 욕망과 의지가 있는 ‘인간’이며, 가해자들 역시 양심과 선의지가 있는 ‘인간’일 수 있음을 형상화하는 문제적 작가입니다. 특히 ‘긴네무집(ギンネム屋敷)’(1980)은 오키나와에 사는 조선인 남자를 통해, 오키나와인의 ‘피해자 의식’을 성찰하는 문제적 작품입니다.마을에는 긴네무로 둘러싸인 집이 하나 있습니다.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그곳에는, 서른 전후의 조선인 남성이 혼자 살고 있는데요. 유키치는 ‘나’와 요시코의 할아버지를 꼬드겨서, 조선인 남자에게서 돈을 뜯어내려고 합니다. 실제로는 자신이 요시코를 겁탈했으면서도, 조선인 남자가 요시코를 겁탈했다고 거짓말을 하여 협박하려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할아버지나 ‘나’도 조선인을 경멸하고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그런데 미군의 엔지니어라는 직업은 조선인 남자의 위상을 애매하게 만듭니다. 조선인 남자가 미군의 엔지니어로 일하기에 ‘나’를 비롯한 유키치나 할아버지가 조선인 남자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선인 남자는 그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합니다. 남자는 다른 미군 엔지니어들이 사는 “철망 안 미군 하우징”도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현재 살고 있는 긴네무집에 대해서도 “제 것이란 느낌”은 갖지 못하니까요.‘긴네무집’에서는 조선인 남자와 그의 연인이었던 조선 여인 고샤리(コシャリ)를 통해 오키나와에 살았던 조선인의 기구한 처지가 잘 드러납니다. 본래 조선에서 남자는 고샤리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곧 징용에 끌려갑니다. 요미탄에서 비행장 건설 강제 노동을 하던 남자는, 일본군 대장(隊長)과 함께 있는 고샤리를 발견하는군요. 이후 오키나와전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남자는 미군의 포로가 되어, 연안을 따라 숨어 있는 일본군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방송을 하기도 합니다.남자는 오직 오키나와에 고샤리가 살아 있다는 확신 하나로 살아왔는데요. 종전 이후 팔 년이 더 지난 후에야 남자는 매춘소에서 고샤리와 만나게 됩니다. 성병에 걸려 미군에게도 버려진 고샤리는 거지꼴을 한 오키나와 사람들이나 찾아오는 매춘소에서 꿈틀대고 있었던 겁니다. 실로 고샤리는 “일본 병사, 미군 병사, 오키나와인”에게 능욕당한 존재였던 거네요.남자는 고샤리를 낙적시켜 긴네무집에 데려오지만, 고샤리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으며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습니다. 남자는 고샤리에게 “한마디라도 해봐!”라고 애원하지만, 샤리는 비명을 지르며 남자의 얼굴에 침을 뱉을 뿐입니다. 결국 남자는 샤리를 목졸라 살해합니다. 남자는 언제고 죽을 기회가 있었던 전쟁 중에는 고샤리를 떠올리며 살아남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죽을 염려가 없어지자 고샤리를 간단히 죽여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샤리는 일본 병사, 미군 병사, 오키나와인에게 능욕당한 것은 물론이고, 조선인 남자에게도 능욕당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오키나와에서 나고 자라 오키나와에서 평생을 살아온 마타요시 에이키는 ‘오키나와인’과 ‘외지인’을 결코 ‘선인/악인, 약자/강자. 피해자/가해자’라는 구도에 가두지 않습니다. 그 곡절 많은 역사가 만들어낸 수많은 맥락 속에서 다양하게 펼쳐진 인간군상의 천변만화를 담담히 그려낼 뿐입니다.그렇기에 오키나와인 마타요시 에이키는 조선인 남자의, “당신들은 뼈는 오키나와 주민 것이거나, 미군 것이거나, 일본 병사의 것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지요. 그럼 수백 수천 명에 이르는 조선인은 뼈마저도 썩어 버린 것일까요.”나 “경찰은 한 번도 오지 않더군요. 아마, 피해자가 조선인 매춘부라서 일겁니다. 아니면, 가해자가 미군 엔지니어 조선인이라서 일까요?”와 같은 말을 들려줄 수 있는 것이겠죠. 결국 조선인 남자는 자살하고, 그는 모든 재산을 “친구”라는 이유로 오키나와인인 ‘나’에게 남깁니다. 아마도 작가는 오키나와인에게는 갚아야 할 조선인의 유산이 남아 있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원래 인간은 자신의 피해자성과 타인의 가해자성에 민감하게 반응하고는 합니다. 그러한 경향은 개인이 아닌 국가나 민족과 같은 공동체의 경우는 더욱 강해지는데요. 만약 자신의 피해자성만 기억하게 되면, 우리는 폭력과 복수를 정당화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스스로를 영원한 타자로 전락시킬 수도 있습니다.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이 인간, 즉 피해자이기도 하면서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수많은 역사의 상흔을 온몸으로 받아낸 오키나와인이면서도, 자신의 (비)인간성을 함께 성찰하는 마타요시 에이키의 소설은 늘 집이 아닌 절이나 교회, 혹은 성당에서 읽고 싶습니다.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4-02-19

오키나와에서 만난 아리랑

평소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던 저희 일행이 오랜 준비 끝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것은 지난 1월 15일 오전이었습니다. 그날 서울의 아침 기온은 영하 7도였는데요. 2시간여의 비행을 끝내고 나하 공항에 착륙했을 때, 활주로의 곳곳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활짝 피어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서울에서 남쪽으로 1천200㎞가 떨어진 섬에 왔다는 걸 고려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풍경임에는 분명했습니다.비즈니스 호텔에 여장을 푼 일행은 오키나와의 역사를 상징하는 슈리성(首里城)으로 향했는데요. 슈리성은 1429년 오키나와 전체를 지배하는 류쿠 왕국이 탄생한 이후, 류쿠 왕국을 대표하는 최대의 성이자 왕궁이었습니다. 나하 시내 언덕 위에 위치해 전망도 빼어난 슈리성은 2019년 거의 전소된 이후, 지금도 복원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일본 2천엔 지폐에 새겨져 있을 정도로 슈리성은 매우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인데요. 하루 빨리 복원되어 한때 조선과 중국과 일본을 연결해주던 류큐 왕국의 위용이 세상에 제대로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저녁에 우리 일행은 오키나와 전통 요리점으로 이동했는데요. 그곳에서는 우미부도(바다포도)나 고야참푸르(여주, 두부, 햄 등을 함께 볶은 요리)와 같은 오키나와의 전통 요리를 맘껏 맛보았습니다. 한창 식사 자리가 무르익어 갈 무렵 오키나와 전통 의상을 입은 한 남성이 뱀가죽으로 몸통을 두른 오키나와 전통악기 산신(三線)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참고로 오늘날 일본의 전통 현악기로 첫손에 꼽히는 샤미센(三味線)은 산신(三線)이 일본 본토에 전해져 토착화한 것입니다. 처음 그 악사는 시마우따(島唄)와 같은 오키나와 전통 음악을 들려주며 분위기를 띄웠는데요.정작 놀라운 일은 마지막에 일어났습니다. 그 악사는 갑자기 아리랑 가락을 너무나도 구슬프게 연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리랑 가락이 반갑고도 신기했던 우리 일행은 오키나와 악사에게 그 노래를 어디서 배웠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리랑을 자신의 할머니에게서 배웠고, 할머니는 그것을 이웃의 조선인에게서 배웠다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악사의 할머니에게 아리랑을 가르쳐 준 조선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키나와 역사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아라사키 모리테루의 ‘오키나와를 안다, 일본을 안다(沖縄を知る 日本を知る)’(1977)는 오키나와 입문서로 유명한 책인데요. 역사학자 김정자는 2016년 이 책을 ‘오키나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하면서, 부제로 ‘일본이면서 일본이 아닌’이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늘 이 부제보다 오키나와의 특징을 정확하게 압축해 놓은 말은 아마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본래 오키나와는 류큐라는 이름으로 중개무역 등을 통해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온 독립 왕국이었죠. 그래서 류큐의 전통문화에는 중국과 조선의 흔적도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랬던 것인데, 일본은 일찍부터 류큐 왕국에 손길을 뻗쳐, 1609년에는 사쓰마번이 무력으로 침략하고, 1872년에는 류큐국을 류큐번으로 격하했으며, 1879년에는 아예 오키나와현을 설치하여 일본에 편입시켜 버립니다. 그러다 1945년에는 2차대전 중 일본에서는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지옥의 땅이 되어버리기까지 합니다.오키나와전은 참으로 끔찍한 전쟁이었는데요.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일본 군부는 오키나와(인)를 바둑판의 사석처럼 여겼습니다. ‘본토 결전’을 위해 최대한 시간을 벌고, 천황제를 지키기 위한 평화교섭의 길을 모색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결사항전을 하고자 했고, 온갖 흉악한 일들을 벌여 미군으로 하여금 본토에 상륙할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만들고자 했죠. 이경재 숭실대 교수 이런 일본군의 눈에 오키나와인의 생명이나 존엄 따위가 들어올 리는 없었습니다. 이런 광기 속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일본군의 (반)강제에 의해 집단자결하는 일이 속출했습니다. 어찌 보면 침략자일 수도 있는 일본 제국을 위해 수많은 오키나와인들이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어갔던 것입니다.그 결과 오키나와전에서는 본토 출신 군인 약 6만5천 명과 오키나와 출신 군인 약 3만 명이 희생되었고, 무려 10만 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습니다. 10만이라는 희생자 수는 당시 오키나와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이때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오키나와전에서 징용 또는 종군위안부로 한반도에서 강제연행 된 만여 명의 조선인 또한 희생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식당에서 만난 악사의 아리랑은 일제시대 오키나와에 끌려온 수많은 조선인들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그 어떤 아리랑보다도 그 악사의 아리랑이 더 슬프게 느껴졌던 이유는, 거기에 지난 시기 동아시아의 비극이 녹아 들어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4-02-05

교토(京都)의 두 얼굴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에서는 1963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년 대하역사드라마를 제작하여 방송하고 있는데요. 일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유명한 인물들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는 합니다.2023년에는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 2022년에는 가마쿠라 막부의 주역이었던 13인의 사무라이, 2021년에는 올해부터 일본 1만 엔 지폐의 주인공이 될 시부사와 에이이치, 2020년에는 전설적인 하극상의 주인공 아케치 미츠히데가 드라마의 주역이었습니다.올해는 시대를 훌쩍 건너 뛰어 헤이안 시대(794~1185)에 활동했던 여성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光る君へ’-빛나는 그대에게 혹은, 히카루(노)기미(히카루 겐지)에게라는 중의적 의미를 가짐-를 방영하고 있습니다.무라사키 시키부는 일본 고전문학의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源氏物語(겐지모노가타리)’를 쓴 여성 작가로서, 이 작품은 주인공인 히카루 겐지를 통해 사랑과 권력, 욕망과 허무 등을 200자 원고지 5000매가 넘는 분량으로 담아낸 고전입니다. 이 작품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헤이안 시대는 귀족문화가 꽃을 피웠던 시기이며, 헤이안(平安)이라는 이름처럼 일본 역사에서 드물게 평화롭고도 안정되었던 시기로 알려져 있지요.많은 역사학자들은 헤이안 시대에 일본이라는 나라의 기초가 형성되었으며, 나아가 일본인의 무의식이 형성되었다고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평화롭고 귀족적인 헤이안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 작품이 바로 ‘겐지모노가타리’이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겐지모노가타리’는 헤이안궁을 주무대로 한 그 시대 최고 권력자들의 이야기인 만큼 작품에 등장하는 교토의 모습은 세련되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교토는 간무 천황이 천도를 한 794년부터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옮겨간 1869년까지 무려 1천10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일본의 수도였습니다. 헤이안 시대 교토의 이름은 헤이안쿄(平安京)였는데요. 널리 알려져 있듯이, 헤이안쿄는 당시 세계적 대도시였던 당나라의 장안(長安)을 모델로 해서 만들어진 계획도시입니다. 북쪽 중앙에는 헤이안궁이 자리 잡았고, 헤이안궁으로부터는 폭 85m에 길이 3.8㎞의 주작대로가 도시의 남북을 가로지르고 있었지요.오늘날 과거의 헤이안쿄 지역이었던 곳에는 헤이안 시대의 건물이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바둑판 모양의 거리만은 그 시절 그대로입니다. 라쇼몽(羅生門)은 주작대로의 남쪽 끝에 위치하여 헤이안쿄의 정문 구실을 했던 곳인데요.흥미롭게도 무라사키 시키부에 버금갈 만한 근대의 천재 작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1892~1927)는 ‘라쇼몽’(1915)에서 귀족문화가 꽃 핀 통념화된 헤이안쿄와는 거리가 먼 교토의 모습을 소설로 남겼습니다.이 작품에서 라쇼몽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서 너구리나 여우, 혹은 거두는 사람이 없는 시신이나 머무는 곳입니다. 이 라쇼몽에 주인으로부터 그만두라는 말을 들어 ‘아사(餓死)할 것이냐’, ‘도둑이 될 것이냐’의 두 가지 선택지만을 남겨 놓은 한 사내가 하룻밤 머물게 됩니다. 그곳에서 사내는 시체의 머리칼을 뽑고 있는 노파를 발견하고는, 정의감에 불타올라 그 노파를 붙잡습니다. 그런데 그 노파로부터 자신이 뽑고 있는 머리칼의 주인인 여자는 살아 생전에 뱀을 생선이라 속여 팔던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노파는 가발을 만들기 위해 시체에서 머리칼을 뽑는 자신이나 뱀을 생선이라 속여 판 여인이나, 모두 살기 위해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라고 하소연하는군요. 이 말을 듣고 사내는 더 이상 “굶어 죽을 것인지 도둑이 될 것인지 망설이지 않”습니다. 방금 전의 정의감에 불타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느새 노파의 옷을 벗겨 들고서는 라쇼몽 밖으로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 아마도 사내는 굶어죽는 대신 도둑질을 해서라도 살아가기로 한 것이겠지요.‘라쇼몽’은 ‘겐지모노가타리’와는 비교도 안 되게 짧은 소설이지만, 이상과 현실, 윤리와 욕망이라는 인간의 영원한 갈등을 인상적으로 담아낸 또 하나의 명작입니다. 두 작품이 보여주는 헤이안 시대 교토의 모습은 매우 대비적인데요.이러한 차이는 ‘겐지모노가타리’가 전성기의 헤이안 시대를 다루고 있는데 반해, ‘라쇼몽’이 몰락해 가는 헤이안 시대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한때 헤이안쿄의 현관 역할을 하던 라쇼몽이 폭풍우로 붕괴된 이후, 현재에는 그 터에 과거의 흔적을 알리는 비석 하나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에 비해 헤이안궁은 사라졌지만, 교토 천도 1천100주년을 기념하며 1895년에 만들어진 헤이안 신궁이 과거 헤이안궁의 모습을 대신하고 있습니다.헤이안 신궁은 헤이안궁을 8분의5 크기로 줄여 복원한 매우 화려한 건축물로 유명하죠. 드라마 ‘光る君へ’의 많은 부분도 바로 이 헤이안 신궁에서 촬영되고 있다고 하는군요. ‘겐지모노가타리’와 ‘라쇼몽’에 그려진 헤이안쿄의 두 가지 상반된 얼굴은 오늘의 교토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4-01-22

낭만과 현실의 무대 홋카이도 <1>

일제강점기라는 지난 세기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 경제·사회·문화의 우호적 파트너로 변화한 21세기 한·일 관계. 이경재 숭실대 교수는 학술연구를 목적으로 일본을 30차례 이상 다녀온 학자다. 올봄엔 도쿄대학에 교환교수로 간다. 그간 이 교수가 면밀하게 살펴온 일본 문화·예술의 어제와 오늘을 독자들에게 들려줄 ‘이경재의 일본을 읽다’는 2024년 본지가 준비한 주요한 기획연재 중 하나다. 독자들의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주홋카이도(北海道)가 떠오른 것은 연일 영하 15도를 넘나드는 오랜만의 강추위가 계속되어서일까요? 어린 애들도 알다시피 일본은 네 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인데요. 가장 북쪽에 위치한 홋카이도는 남한 면적의 80%에 이르는 아주 큰 섬입니다. 특히 우리에게는 설원의 롱테이크 영상으로 유명한 영화 ‘러브레터’의 배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생사를 뛰어넘는 순백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무대가 바로 홋카이도였던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여주인공 나카야마 미호의 “오겡끼데스까”라는 외침이 울려퍼질 듯한, 홋카이도는 눈과 벌판과 추위와 이국적인 정서로 가득한 낭만과 꿈의 무대임에 분명합니다.홋카이도는 근대 일본의 역사적 상흔이 그 어느 곳보다 강렬하게 남겨진 곳이기도 합니다.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가 즐겨 보던 세계지도에는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대륙까지 표시돼 있지만, 오늘날의 홋카이도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메이지 이전까지 홋카이도는 일본과는 무관한 아이누의 땅이었던 것인데요.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근대 국민국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일본은, 홋카이도를 일본의 지방으로 편입시켜 버립니다. 이후 제국 일본은 오키나와를, 타이완을, 조선을, 만주를 자신의 일부로 먹어치우는 침략적 야욕을 유감없이 발휘했는데요. 그렇기에 홋카이도는 근대 일본제국주의가 시작된 곳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또한 홋카이도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혹한 노동 착취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일본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대표작인 고바야시 다키지(1903∼1933)의 ‘게공선’(1929)의 배경이 홋카이도인 것에서도 잘 드러나는 사실이지요. 고바야시 다키지는 홋카이도에서 성장하였으며, 그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도 다쿠쇼쿠은행 오타루 지점에서입니다. 그가 노동운동과 프롤레타리아문학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홋카이도에서였고, 이런 상황에서 탄생한 것이 그 유명한 ‘게공선’인 것입니다.게공선 하쿠코마루호는 홋카이도 북쪽의 거친 바다에서 게를 잡아 통조림으로 가공하는 일종의 공장선입니다. 게공선에 승선한 이들은 가난과 자본의 핍박에 몰리고 몰려 마지막 선택지로 일종의 감옥이나 마찬가지인 배에 오른 처지입니다. 이 게공선은 당시 자본주의 일본의 온갖 문제를 통조림처럼 꽉꽉 눌러 담은 공간이기도 하네요. 게공선은 일반 선박이 아닌 공장선이기에 항해법의 적용도 받지 않고, 순수한 공장이 아니기 때문에 공장법의 적용도 받지 않습니다. 일종의 무법지대인 이곳에서는 오직 성과만을 절대시하는 자본의 논리만이 힘을 발휘하는군요. 감독인 아사카와는 자본가를 대리하며 온갖 폭력을 행사합니다. 폭언이나 폭행은 애교에 가깝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서라면 고문도 서슴지 않을 정도입니다. 아사카와는 근처에 있는 게공선 자치부마루호가 침몰하는 상황에서도, 이익을 위해 400여 명의 생명을 외면하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젊은이 야마다가 죽었을 때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바다에 던져질 야마다를 새 마대 자루가 아닌 헌 마대 자루에 싸서 버리게 지시할 정도입니다.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자본의 폭력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자본가를 대리하여 게공선에서 노동자들을 쥐어짜는 아사카와 감독은 게를 잡아 통조림을 만드는 일이 “국가적인 일”이라 강조합니다. “대일본제국의 대장부”가 되기를 강요받는 노동자들도 처음에는 일본군 구축함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격하며, “일본제국을 위해서 일한다”는 자부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게공선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파업에 나섰을 때, 게공선에 오른 일본군들은 노동자들을 도와주기는커녕 그들을 폭행하고 파업의 지도부를 끌고 갈 뿐입니다. 이를 통해 게공선의 노동자들은 ‘일본제국의 해군도 결국 자본가들과 한통속’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본래 자본주의와 국민국가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분리 불가능한 근대의 핵심적인 두 기둥이기도 합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게공선’은 프로소설의 일반적인 문법에 걸맞게 낙관적인 전망으로 끝납니다. 한번 실패를 맛본 게공선의 노동자들은 더욱 강한 단결력과 투쟁력으로 기어이 파업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낙관적 전망은 특별고등경찰의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다 요절한 고바야시 다키지의 강렬한 사회의식이 반영된 결과겠지요. 지금도 시립 오타루문학관에 가면 이념과 문학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고바야시 다키지의 삶과 문학의 향훈을 느낄 수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2008년 신초사에서 문고본으로 재발행한 ‘게공선’이 무려 50만 부 이상 팔리고 2009년에는 영화로까지 만들어지는 등 21세기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입니다.이것은 아마도 현재의 일본이 100여 년 전의 홋카이도 바다를 다시 떠올리게 할 만큼 만만치 않은 것과 관련된 것이겠지요. 일본인조차 최고의 관광지로 꼽는 눈과 낭만의 홋카이도에서 한번쯤 근대 일본의 역사적 상흔을 떠올리는 것도 분명 의미 있는 일본체험이 될 것입니다.

2024-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