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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름’이라는 생애의 시

이희정 시인 자주 먼지 털고 소중히 닦아서가슴에 달고 있다가 저승 올 때 가져오라고어머닌 눈 감으시며 그렇게 당부하셨다.가끔 이름을 보면 어머니를 생각한다먼지 묻은 이름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새벽에 혼자 일어나 내 이름을 써 보곤 한다.티끌처럼 가벼운 한 생을 상징하는상처 많은, 때 묻은, 이름의 비애여천지에너는 걸려서거울처럼나를 비춘다.-‘이우걸 시조전집’(태학사, 2013) 중 ‘이름’현대시조에서 이우걸 시인(1947년~)의 위상은 각별하고 돌올하다. 이 시를 보며 오래전 초등학교 입학 사진 한 장을 떠올린다. 가슴에는 네모반듯하게 접은 하얀색 면 손수건과 이름표를 달고 입학식 운동장에 코흘리개들이 줄을 맞춰 서 있던 장면 말이다.화자는 “자주 먼지 털고 / 소중히 닦아서 // 가슴에 달고 있다가 / 저승 올 때 가져오라고” 어머니의 유언을 회고하며 이름에 부침하는 생의 의미를 환치하고 있다.어린아이의 콧물 닦기 손수건은 자라면서, 세상의 먼지를 닦듯 자기 삶의 먼지를 터는 용도로 바뀐다. 그렇게 이름을 잘 간수해서 명예롭게 가져오라는 어머니의 귀한 당부가 담겨 있다. 하나 실상은 이름에 먼지 묻히지 않고 살아내기란 쉽지 않다. “상처 많고, 때 묻기 쉬운” 이름의 비애다. 이름은 인생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리라.시간이 빚어놓은 인생, 그 안에는 고난도 있고 실패도 있다. 가족이라는 품에서 처음 사회라는 세상에 나온 아이들이 왼쪽 가슴에 손수건을 단 것은 공교롭게도 은유로 읽힌다. 이제 생필품이 된 티슈 같은 것이 없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가슴에 달린 이름표와 손수건은 완벽하게 짝패다. 삶은 어쩌면 성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실패가 만들어낸 개인의 역사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화자는 이름을 생각하면 어머니가 떠오르고 티끌 같은 한 생을 이름이란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가볍지만 무겁게 한 번 왔다 쓰고 가는 그 이름에 이름값을 한다는 것, 맨 처음 부모로부터 받은 생애 첫 시(詩)라고 불리는 이름은 어떤 뜻이 있을까.“이름 명(名)은 저녁 석(夕)에 입구(口)가 붙은 뜻과 뜻이 합쳐진 문자로 결국 저녁에 부르는 이름이 된다. 해가 떠서 날이 환할 때는 사람의 얼굴이 표식이 되어 누가 누구인지 분간이 될 터인데 날이 저물면 사정은 다르다. 그래서 만든 것이 이름이며, 이름은 나와 남을 구분하는 표식”이라고 했다. 달리 말하면 이름은 나와 타자와의 식별이고 관계 속에서 이름은 다르게 호명된다.사람은 결코 아름답지만도 추하지만도 않다. 지상의 생명체라는 독특한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어떻게 불릴까. 유년 시절 동네 아이들과 해가 지는 것도 모르고 놀고 있을 때면 골목마다 아무개의 이름을 부르던 어머니들의 긴 육성이 들리는 듯하다. 사회적 관계에서 부르는 누구 씨의 짧은 스타카토 음이 아닌 길게 메아리쳐 돌아오는 이름이 귓가를 지난다. 그렇게 어머니의 긴 호명은 더 깊은 여음으로 거울을 거느리고 되돌아오는 것이다.여명이 밝은 날 아침이면 거울을 닦듯 소중히 이름 석 자를 써 볼 일이다. ◇ 이희정 시인 약력 ·2019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내 오랜 이웃의 문장들’

2023-01-15

평화를 주문처럼

이희정 시인 하루를 살아도온 세상이 평화롭게 이틀을 살더라도사흘을 살더라도 평화롭게 그런 날들이그날들이 영원토록 평화롭게  김종삼, ‘平和롭게’ 전문 한겨울 정신이 번쩍 드는 추위 속에 새해는 온다. 첫해, 첫날의 ‘첫’이라는 외자가 새 희망을 향한 각오로 들리지 않는가. 저마다 새해엔 지난해보다 더 나아질 거란 기대로 이른 새벽 일출에 기대어 소원을 빌곤 한다.새 술을 새 부대에 담듯 새해 첫술로 김종삼 시인의 ‘평화롭게’를 올린다. 학기를 모두 마치던 날, 존경하는 은사님이 주문처럼 얹어 주신 글이다. 벽에 걸어 두고 마음이 분주할 때마다 읊조려 본다. 평화(平和)가 방 안 가득 울리는 듯하다. 언제나 끝은 출발이 예정된 길이기에 새 걸음으로 나아가라는 희망과 함께.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고 한다. 우리가 숨 쉬는 동안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는 리듬이 숨어 있다. 길가의 나무에도, 새근새근 잠든 아가의 숨소리에도, 함박눈 펑펑 쌓인 마당을 뛰어다니는 강아지의 통통 튀는 네 발에도 있다. 남다른 리듬감으로 짧은 시어를 견인하는 시인을 따라 소리 내어 노래하듯 ‘평화’를 불러내 보자.시인이 부르는 평화는 단순하고 순수한 듯하나 그를 바라보는 우리는 단순하지도 순수하지도 않다. ‘평화’는 화자의 영혼에 찾아와 끊임없이 평화롭지 못한 평화를 확인시켜주는 듯 짧은 어휘를 통해 거듭 강조하고 있으니까. 이런 의식은 길지 않은 행간을 담담하게 지난다. “하루를 살더라도”라는 간구는 평화가 없을 것이라는 절박한 의식으로도 들린다. 화자가 반복하는 평화와 평화가 마주 보는 눈은 온화하지만, 녹록지 않은 세상을 몸으로 살아낸 시인은 주문처럼 평화를 읊었는지도 모른다.김종삼(1921~1984)은 우리 시에서 ‘순도 높은 순수시’를 쓴 한국 시문학사에서도 가장 뛰어난 시인의 한 사람으로 서슴없이 손꼽히는 인물이다. 평생 단칸방 월세살이에서 벗어나 보지 못했던 그에게 현실적으로 창작의 공간 같은 것은 허락되지 않았을 터. 그에게는 종교적 신앙생활에 비견될 수 있었던 술과 음악에의 탐닉, 그 의식 아닌 의식의 시간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창작공간이자 시작의 모든 과정이었을 것이다.그는 말한다. 시는 가난과 소외 속에서도 선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과 위안이 되어야 한다고, 시가 하나의 말씀이고 복음이어야 한다고. 다시 호흡을 맞추어 가볍게 낭송해 보자. 시인이 바라 마지않은‘평화’가 평화롭기 그지없이 혀끝에서 울리지 않는가.시인이 말하는 평화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첫눈 오는 날 연인들에게도, 곁이 되는 문장의 밑줄에도, 시골 마을 굴뚝마다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에도, 새벽을 달리는 배송 기사의 바쁜 걸음에도, 완생을 꿈꾸며 사지선다를 읽는 미생의 독방에도 평화는 두루 미친다.‘평화’를 주문처럼 외다 보니 어느 경제학자의 시에 대한 한 줄 감상이 떠오른다. 시에는 경제성이 있다고. 시는 살림을 잘 살아서 짧게 축약된 몇 행 안에 넓고도 먼 보폭의 사유를 숨기듯 잘 담아낸다고.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종류의 위안으로 온기 있는 겨울을 날 수 있다고 말이다.새해에는 움츠렸던 살림이, 사람 사이 접혔던 주름이 포근하게 펴지면 좋겠다. 몸이 추우면 마음도 추워질 테니까. 가까이에서부터 저 먼 곳의 평화가 오는 것처럼 누군가 있는 먼 걸음까지 새해, 새날, 새마음의 평화가 ‘평화롭게’닿기를 주문처럼 외워본다.“하루를 살아도, 이틀을 살더라도, 사흘을 살더라도” ◇ 이희정 시인 약력 ·2019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내 오랜 이웃의 문장들’

2023-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