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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치와 막말

“과거 ‘여자는 밤에만 쓰는 것’, ‘주막집 주모’ 등 발언한 적 있느냐” “대통령 앞에서 깐죽거리고 했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나” 도대체 듣고 있기가 쉽지 않다. 대선 국면에서 쏟아지는 막말들 말이다. ‘춘향이’ 운운한 어떤 발언은 입에 담기도 어려워 여기 적을 수조차 없다. 내란 정국 때는 ‘계몽’과 ‘요원’이란 단어가 히트(?)더니, 근래엔 ‘깐족’과 ‘아부’, ‘키높이 구두’와 ‘눈썹 문신’이란 말이 유행인가보다. 기억에 남는 정책이나 국정철학은 없고 오로지 ‘비아냥’과 ‘조롱’만 남은 모 정당의 토론회를 보고 있자니, 저들에겐 과연 역사에 대한 부채 의식이나 책임감 따위는 없는 건가 싶기도 하다. 대통령 파면으로 시행되는 엄중한 대선인데, ‘비상계엄’과 ‘탄핵’마저 희화화되고 있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공론장에서의 말(Lexis)과 행위(Praxis)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 말과 행위는 전혀 다른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정치인의 발언은 그 수행적인 힘을 대의하는 자리에서 발화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언어의 생산과 교환은 일정한 언어 자본을 갖춘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상징적 권력 관계 속에 자리 잡는다고 논한 바 있다. 언어 교환의 권력 관계는 제도적이든 아니든 그들이 집단으로부터 받고 있는 인정에 따라 상이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누구든 말할 수 있고, 명령의 의미를 발화할 수 있지만, 필요한 권위가 결여되어 있는 자에게 그것은 ‘행위’가 될 수 없으며, 단지 ‘말’로만 남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인의 말은 수행적인 힘을 갖는다고 여길 수 있다. 그만큼 책임이 동반되는 행위라는 거다. 말하는 자는 자신의 발화가 ‘언어의 장’에서 어떻게 수용될지에 대해 나름의 예측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와 담론은 언제나 ‘완곡어법’이자 ‘타협’이라 할 수 있다. 언어는 ‘잘 말하려는’, ‘적절하게 말하려는’ 전략적 수정의 결과이기에 ‘완곡어법’이며, ‘말해야 하는 것’과 ‘표현되는 것’ 사이의 긴장 속에서 발화 형태가 결정되기에 일종의 ‘타협’인 것이다. 그런데 언어의 수용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예측은 의식적인 계산으로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언어적 아비투스(habitus)의 영역이라 수용가능성에 대한 감각, 혹은 자신이나 타인의 언어생산물의 잠재적 가치에 대한 감수성에서 기능한다. 이점을 비춰볼 때 막말을 해대는 정치인의 언어 감수성이 어느 레벨에서 작동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선 토론을 겨우 ‘말싸움’ 정도로 여기는 천박한 권위 의식과 경쟁심이 결합 된 언어적 결과에 불과한 것 아니겠는가. 예전의 보수는 나름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위선이라도 부렸다. 위선이란 적어도 세간의 이미지를 의식하고 남들 눈치 정도는 보기 때문에 가능한 가식이다. 그럼에도 즉물적 감정에만 휩싸여 위선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저 오만한 권력이 언제까지 연명할 수 있을까? 토론 자리를 상대 ‘망신주기’의 기회 정도로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 막말이 계속되는 한, ‘천박한 정치’에 대한 ‘고상한 대중’의 심판도 오래고 지속될 것이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06-01

정치와 막말

“과거 ‘여자는 밤에만 쓰는 것’, ‘주막집 주모’ 등 발언한 적 있느냐” “대통령 앞에서 깐죽거리고 했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나” 도대체 듣고 있기가 쉽지 않다. 대선 국면에서 쏟아지는 막말들 말이다. ‘춘향이’ 운운한 어떤 발언은 입에 담기도 어려워 여기 적을 수조차 없다. 내란 정국 때는 ‘계몽’과 ‘요원’이란 단어가 히트(?)더니, 근래엔 ‘깐족’과 ‘아부’, ‘키높이 구두’와 ‘눈썹 문신’이란 말이 유행인가보다. 기억에 남는 정책이나 국정철학은 없고 오로지 ‘비아냥’과 ‘조롱’만 남은 모 정당의 토론회를 보고 있자니, 저들에겐 과연 역사에 대한 부채 의식이나 책임감 따위는 없는 건가 싶기도 하다. 대통령 파면으로 시행되는 엄중한 대선인데, ‘비상계엄’과 ‘탄핵’마저 희화화되고 있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공론장에서의 말(Lexis)과 행위(Praxis)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 말과 행위는 전혀 다른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정치인의 발언은 그 수행적인 힘을 대의하는 자리에서 발화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언어의 생산과 교환은 일정한 언어 자본을 갖춘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상징적 권력 관계 속에 자리 잡는다고 논한 바 있다. 언어 교환의 권력 관계는 제도적이든 아니든 그들이 집단으로부터 받고 있는 인정에 따라 상이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누구든 말할 수 있고, 명령의 의미를 발화할 수 있지만, 필요한 권위가 결여되어 있는 자에게 그것은 ‘행위’가 될 수 없으며, 단지 ‘말’로만 남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인의 말은 수행적인 힘을 갖는다고 여길 수 있다. 그만큼 책임이 동반되는 행위라는 거다. 말하는 자는 자신의 발화가 ‘언어의 장’에서 어떻게 수용될지에 대해 나름의 예측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와 담론은 언제나 ‘완곡어법’이자 ‘타협’이라 할 수 있다. 언어는 ‘잘 말하려는’, ‘적절하게 말하려는’ 전략적 수정의 결과이기에 ‘완곡어법’이며, ‘말해야 하는 것’과 ‘표현되는 것’ 사이의 긴장 속에서 발화 형태가 결정되기에 일종의 ‘타협’인 것이다. 그런데 언어의 수용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예측은 의식적인 계산으로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언어적 아비투스(habitus)의 영역이라 수용가능성에 대한 감각, 혹은 자신이나 타인의 언어생산물의 잠재적 가치에 대한 감수성에서 기능한다. 이점을 비춰볼 때 막말을 해대는 정치인의 언어 감수성이 어느 레벨에서 작동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선 토론을 겨우 ‘말싸움’ 정도로 여기는 천박한 권위 의식과 경쟁심이 결합 된 언어적 결과에 불과한 것 아니겠는가. 예전의 보수는 나름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위선이라도 부렸다. 위선이란 적어도 세간의 이미지를 의식하고 남들 눈치 정도는 보기 때문에 가능한 가식이다. 그럼에도 즉물적 감정에만 휩싸여 위선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저 오만한 권력이 언제까지 연명할 수 있을까? 토론 자리를 상대 ‘망신주기’의 기회 정도로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 막말이 계속되는 한, ‘천박한 정치’에 대한 ‘고상한 대중’의 심판도 오래고 지속될 것이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05-01

문학과 법: 헌재 판결을 보고

문학의 언어와 법의 언어는 조금 다르다. 문학이 사건이나 현상, 개인의 마음 따위를 반영하거나 재현할 수 있다는 신뢰에 기초한 언어의 투명성에 의존한다면, 법은 발화되는 순간 관철되는 언어의 수행적 힘에 입각해 있다. 문학의 언어가 허구와 모방, 내면성을 특질로 한다면 법의 언어는 사실과 실현, 공공성이란 축을 통해 구성된다. 그럼에도 윤석열 대통령을 파면에 이르게 한 이번의 헌재 판결문은 나에겐 문학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가령 이런 문장들이 있다.   “한편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 해제 요구를 결의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으므로 이는 피청구인의 법 위반에 대한 중대성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권한은 어디까지나 헌법에 의하여 부여받은 것입니다.”   위헌적인 비상계엄이 해제된 건 대통령의 의지가 아니라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다. 군경이 소극적일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들이 성숙한 ‘시민다움’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헌재는 역사의 주체로 시민을 인준했으며, 부당한 권력에 저항할 권리가 헌법 정신의 기초라는 사실을 다시금 판결했다.   법질서란 사람들이 그것을 준수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거해서만 성립한다. 대통령의 권한도 헌법에 의해 부여받은 것이다. 따라서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는 단순히 대통령 권한의 남용이 아니라 법에 대한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탄핵에 찬성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집단적 의지는 법을 어긴 통치권자에 대한 처벌을 구하는 게 아니라 민주공화국 주권자의 실력 행사라 할 수 있다.   법의 언어가 아무리 수행적 힘을 발휘한다고 해도, 그러한 힘이 법의 어떠한 정신과 내면에 기초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시민들의 항구적인 심문이 필요하다. 법이 법으로 존재하거나 기능할 수 있는 내력을 살피는 작업은 분명 문학적인 관점을 요하는 일이기도 하다. 문학은 국가의 공식적인 기록보다는 역사의 심연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인용한 헌재 판결의 취지는 헌법 정신의 발현은 시민들의 저항권에 기초해있다는 사실의 확인이었다.   근래 뜯어고치자고 제안되는 87년 체제 헌법조차 시민들이 6월 항쟁을 통해 가까스로 쟁취한 결실 아니었나. 개헌을 겨우 내란 정국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처럼 운위하는 행위 그 자체야말로 헌정질서 문란에 해당한다.   우리는 법기술자들의 법리 운용만이 아니라 그들이 법의 정신을 어떻게 표상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의 이름을 팔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감시해야 한다. 법을 문학적으로 파악한다는 건 정확히 이런 의미다.

2025-04-17

파면을 기다리며

허민 문학연구자 2024년 12월 3일 밤을 기억한다.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는 그 날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묵혀뒀던 ‘흑백요리사’ 다섯 편을 몰아보고 있었다. 새벽 2시 즈음 이제 잠이나 자볼까 하고 핸드폰을 보고 나서야 계엄령이 선포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카톡창에 떠 있는 백여 개의 메시지들, 앞다퉈 발표되는 뉴스 속보, 담을 넘는 국회의원, 국회의 유리창을 깨는 군인과 이를 저지하려는 시민들. 순간 나는 내가 다른 시간대로 혹은 다른 세계관으로 ‘워프’된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공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계엄령이 선포됐다는 사실을 마주했을 때 당신들은 어떻게 행동했는가. 나는 한국근현대문학을 공부했고, 식민 지배와 군사독재에 맞서 싸운 민중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계엄령이 인지됐을 때 내 몸은 얼어붙었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야 할지, 친구들의 안위를 물어야 할지, 어딘가로 대피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쥐 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어야 할지 분명한 판단을 하지 못했다. 나름 연구자라며 그렇게 많이 읽고 쓰곤 했는데 저항에 관한 서사들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하지만 그날 나는 보았다. 총기를 무장한 채 동원된 군인들과 맞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대체 저들의 용기는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국회를 향해 어떻게 자기 몸을 이끌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일까. 장갑차를 온몸으로 막은 저 청년은 대체 누구일 수 있는 걸까. TV를 보고 마냥 놀라고만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운 만큼, 계엄군을 마주하며 인간 바리케이트를 형성하고 있는 저들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날 우리는 모두 들었다. ‘종북’과 ‘반국가세력’을 척결하여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겠다는 대통령의 목소리를. 저이가 말하는 ‘종북’과 ‘반국가세력’은 야당을 뜻했던 것일까? 그래도 대략 국민의 절반 정도가 지지하는 정당일 텐데, 설마 국군통수권자가 군사력을 동원해서 잡아들이려고 할 수 있는 건가. 여전히 믿기지가 않지만, 믿고 싶지 않은 장면과 소리를 이미 너무나 많이 보고 들어버린 것 같다. 탄핵이 기각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일단 모두가 2차 계엄을 두려워하며 살아가지 않을까? 혹자는 현실적으로 2차 계엄이 발동될 리 없다고 말한다. 군인과 경찰들이 더이상 부당한 명령에 따르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들이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은 건 옳지 않은 일에 대한 정의감과 두려움, 자기 판단에 대한 신뢰 덕분이었을거다. 하지만 헌재에서 비상계엄이 중대하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대체 군인들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항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누군가 죽지만 않는다면 이 정도는 괜찮다는 건가? 국회를 군인들이 봉쇄해도 문제없다는 건가? 계엄 정도는 그냥 넘어가지는 건가? 대통령 권한의 악의적 남용에 눈 감고 대체 어떤 미래를 모색하자는 건가?

2025-03-31

내란 정국의 역사 기술과 ‘전환기’라는 시대 의식

허민문학연구자 훗날, 오늘의 내란 정국은 어떻게 역사에 기록될까? 국회와 선관위를 급습한 12·3 비상계엄의 발동, K-극우의 준동과 유튜브 수익 경쟁, 집권 여당의 부화뇌동, ‘야당 독재’라는 가짜 프레임과 다수 언론의 기계적 중립, ‘키세스 시위대’와 남태령의 트랙터, 아이돌 응원봉과 ‘다만세’ 제창, 내란성 불면과 우울증의 사회적 확산, 개헌 논의의 필요와 반동성 등, 분명 이 연쇄된 사건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모순과 성취,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고 대립·갈등하는 정치사의 주요 국면으로 기술될 것이다. 그럼에도 미래에 남게 될 역사서술의 향방이 가장 궁금한 건 ‘내란 우두머리’ 혐의자에 대한 구속 취소와 검찰의 ‘즉시항고’ 포기에 있다. 경호처 영장 반려에서부터 예견된 이 기괴한 판결과 의도된 무력한 수용에 대해 역사의 페이지에는 어떤 방식으로 작성해야 하나? 그야말로 남들 보기에 창피한, 특별한 교훈(?)이나 철 지난 의미조차 없는 이 사태를 그 자체로 남길 수 있는 방법이 새삼 걱정된다. 물론 누가 작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언제나 중요하다. 반일종족주의나 뉴라이트 역사관을 봐도 그렇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죽은 자들도 적이 승리한다면 그 적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비유한 ‘역사의 천사’는 역사의 진보를 믿기보다는 과거의 잔해 속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다. 시간은 결코 단선적이지 않으며 파열과 중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때론 작가 한강의 말처럼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도,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도 있다. 파당 정치나 계급투쟁, 진영 대결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역사의 법정을 바로 세우는 길에 관한 과업이며, 그 문턱에서 말소되어선 안 될 진실한 기억에 대한 사수를 호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당치 않은 비상계엄의 정당성이 운위되는 작금의 사회적 대혼란이 누구에 의해 어떤 관점으로 역사에 남겨지게 될까. 그런 의미에서 탄핵 심판은 역사의 갈림길이다. 어쨌든 내란 이후의 한국 사회는 일종의 ‘전환기’를 맞이할 거란 사실만은 분명하다. 흔히 ‘이행기’나 ‘전환기’라고 불리는 특정한 역사의 국면에는 과도기적인 현상이 관찰되기 마련이다. 때문에 그 전후 시기의 단절과 연속, 상실과 회복의 교차를 비롯해 ‘과거의 잔여’와 ‘미래의 현현’이 ‘현재의 쟁점’ 속에서 충돌하거나 병행하는 복잡성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역사 인식의 방법이 필요하다. 이때 그 방법이란 역사학자들의 학문적인 고심으로부터 확보될 수도 있겠지만, 그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대로 정치적 획책으로 도모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 있기 때문이다. 과연 내란 이후의 한국 사회는 글로벌한 규모에서 횡행하는 우익 포퓰리즘의 바람에 말려 들어갈지 아니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가 아래로부터 다시 논의될 수 있는 극적 발판이 마련될지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역사의 운명이 소수의 법비들에게 달려 있는듯한 요즘의 형국이 심히 불안하고 불쾌할 따름이다. 전환이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일과 가능한 데 불가능했던 일들을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는 과정을 말한다. 세상이 일거에 바뀔 수는 없다. 조금 지쳐도 더 나은 세계와 사회를 만들어가는 고달픈 경로라 생각하고 모두 힘을 냈으면 좋겠다.

2025-03-17

계몽이란 무엇인가?

허민문학연구자 “제가 임신과 출산과 육아를 하느라 몰랐던 민주당이 저지른 패악을 일당 독재의 파쇼 행위를 확인하고 아이와 함께 하려고 비워둔 시간을 나누어 이 사건에 뛰어들게 됐습니다. 저는 계몽되었습니다.” 윤 대통령 측 변호사의 최종변론이다. 성스러운 비상계엄으로 ‘야당의 독재 파쇼 행위’라는 성립 불가능한 상황을 인지하고 계몽되었단다. ‘윤통’의 은혜에 감복한 간증처럼 들리기도 했고, 일제 말 대동아전쟁을 거룩한 ‘성전(聖戰)’으로 선전하던 ‘총독의 소리’가 연상되기도 했다. 자기의 무지에 관해 회의할 수는 있겠지만, 왜 가만있는 대중의 지성을 시험하려는지 모르겠다. 선민의식과 노예근성, 엘리트주의와 독선이 ‘짬뽕’ 된 변종의 어용적 세계관이라 하겠다. 내란 정국에서 별의별 궤변과 요설과 망언 때문에 고달팠고, 그 과정에서 소용된 말들의 오염과 오용도 참기 어려웠는데, 그 대미를 장식해준 것 같다. 이를 기리며(?) 별안간 ‘핫’해진 ‘계몽’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몇 자 적어두고자 한다. 칸트는 “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 정의한 바 있다. 이때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면서 “이 미성년 상태의 책임을 마땅히 스스로 져야 하는 것은, 이 미성년의 원인이 지성의 결핍에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도 지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의 결핍에 있을 경우”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미성숙이란 다만 지성의 부재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미성숙의 상태에서 성숙으로 상승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봤다. 물론 칸트는 자신이 속한 시대를 ‘계몽된 시대’가 아니라, ‘계몽의 시대(=프리드리히 왕의 세기)’로 파악함으로써 계몽의 주체로서 이성의 공적 사용을 보증할 수 있는 힘은 왕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인의 도움 없이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용기는 ‘계몽된 시대’의 도래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둠으로써, 인간에 고유한 지성의 능력을 미래로부터 확보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칸트에게 계몽은 누구에게나 잠재된, 보편적인 능력으로서 공정하게 열려있는 유예된 성장의 기회를 의미한 것이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랑시에르는 칸트의 계몽에 관한 바로 이 노트로부터, 인간 지성에 내재된 평등의 원리를 식별해 낸 바 있다. “무언가를 혼자 힘으로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 배워보지 못한 사람은 지구상에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반면 무능력이란 가르치려는 자의 가치관이 지어낸 허구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나는 인간이다, 고로 생각한다”라는 인식으로 뒤집은 것이다. 이런 역전이야말로 지적 능력의 본성상 평등을 의식하는 해방이라 할 수 있겠다. 12·3 비상계엄으로 계몽된 사실이 있다면, 이는 5년 단임 선출직 공무원의 몽니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한 데 있을 뿐이다. 철학의 빈곤이 야기한 허언 속에서 집단지성의 위력에 대한 대통령의 무지가 드러났다.

2025-03-03

요즘 풍경

허민문학연구자 동네 카페에서 주문한 테이크아웃 커피를 기다리는데, 근처를 지나가던 초등학생들의 대화가 들렸다. “야, 너희 계속 내 말 안 들으면 계엄 선포한다!”, “그래 맘대로 해봐라, 바로 탄핵할 테니까.” 내가 저 또래였을 때, ‘계엄’이나 ‘탄핵’이라는 단어를 알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선포’라는 말도 몰랐을 거다. 이렇게 빨리 알아야 될 말들인가 싶어서 괜히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세상의 변화는 일상의 언어로부터 감지되기 마련이다. 어른들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요즘처럼 법률용어가 친숙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인용’과 ‘기각’, ‘가처분’과 ‘적부심’, ‘공소장’과 ‘증인심문’, ‘평의’와 ‘변론 기일’, ‘피청구인’과 ‘방어권’ 등등, 전에는 알지도 못할 낱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다. 이제 대다수의 사람들이 ‘형사재판’과 ‘헌법재판’의 차이 정도는 마치 상식처럼 알고 있을 거다. 세상이 법의 언어와 사고에 지배되고 있는 형국인데, 이건 모두에게 긍정적인 현상은 아닐 거다. 법이 잊힌 상태가 가장 평화로운 법이기 때문이다. 지난주 학술대회 때 일이다. 발표를 맡은 선생들 다수가 ‘내란성 우울증’으로 글에 집중하기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나도 각종 ‘내란성 질환’으로 혼란을 겪고 있던 터였다. 아마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1차 체포영장 집행이 무산된 직후부터였을 거다. ‘2차 체포영장은 언제쯤 발부될지’, ‘이번에 발부된 영장은 대체 어떻게 집행할지’ 등, 틈만 나면 핸드폰으로 속보를 확인했던 것 같다. ‘내란성 불면증’으로 잠을 뒤척이다가도 체포 여부부터 확인했으니, 피로하지 않은 온전한 하루를 갖기가 어려웠다. 요즘은 탄핵 심판 중계로 ‘내란성 위염’이 다시 도졌다고들 했다. “계엄령이 아니라 계몽령이다”, “의원이 아니라 요원을 빼내라는 거였다”, “계엄의 형식을 갖춘 경고였다”, “탄핵공작이다” …. 언제까지 이런 궤변과 망언이 실시간으로 중계돼야 하는 걸까? “내란성” 신종 질환의 발견은 ‘비상계엄’이라는 사회적 트라우마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지시하기 위한 언어유희가 아니다. 오히려 시대의 상처를 익살스럽게 상대화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공동의 방어 전략으로 봐야 한다. “내란성○○”을 함께 앓으며 서로를 위무하고 버티는 거다. 버스가 끊겨 택시를 타던 날 기사님이 말을 걸었다. “오늘 손님이 다섯 번째네요. 찾는 사람이 없으니 알아서 셈이 됩니다. 제가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인데, 요즘은 누가 타든 하소연하게 되네요.” 그렇게 말이 없다던 기사님은 내가 내릴 때까지 말을 했다. 손님이 없을수록 말을 할 기회가 없을 테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택시 운전 20년 만에 이런 불황은 없었다는 호소를 듣다 보니 언제부턴가 한산해진 지하철의 광고판이 생각나기도 했다. 차에서 내리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은 발언은 이러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상관없으니 제발 탄핵 국면만 지나가길” 이게 요즘 풍경이다. 지난 일주일간 겪은 일을 적은 것만 해도 이렇다. 윤석열 대통령은 탄핵 심판 중 “아무일도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체포가 없었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다. 12·3 비상계엄은 아이들의 말과 우리들의 마음을 오염시켰다. 작지만 이미 커다란 일이다.

2025-02-17

정치와 어떤 감정들

허민문학연구자 설 연휴에 정치 토론 프로를 우연히 봤다. 마침 공방이 격화되는 시점이었나보다. 한 토론자가 열변을 토했는데 상대 패널은 감정적이라고 일축했다. 논리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들리진 않았는데 반론하기 어려웠나 싶었다. ‘감정적’이라는 언사는 이처럼 ‘논리’와는 반대되는 뜻으로 동원되곤 한다. 하지만 감정과 논리는 그렇게 구별되는 개념이 아니다. 정치의 영역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어떤 정책도 대중의 감정에 우선 어필하지 않으면 실정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다. 현실정치의 이권은 감정과 논리를 매개하는 설득의 기술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감정에 호소하는 정치의 확산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그러한 정치가 인간의 어떠한 마음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일본의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는 ‘악감정에 의거한 정치’의 출현을 문제 삼은 적이 있다. 인간에겐 누군가를 돕거나 아껴주고 싶은 좋은 마음이 있는 반면, 타인을 질시하거나 미워하는 나쁜 감정도 있기 마련이다. 이때 좋은 마음의 확산을 지지하고 나쁜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보통의 상식일 텐데, 이와는 반대로 흐르는 경향이 사회를 지배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서는 자기의 피폐한 처지를 납득하기 위해 원망할 상대를 찾아 나설 뿐이다. 공감하기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배타적 입장을 자명하게 수용하고, 의견이나 생각이 다른 차원의 지평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멀리하는 태도가 팽배한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꼭 그런 것 같다. 가령 여성가족부를 폐지하자는 의견이 있다. 남초 커뮤니티에서 언제든 쉽게 볼 수 있는 주장이다. 양성평등을 추구하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명목이지만 내용의 실상은 다르다. 구체적인 분석에 입각해 있기보다는 그저 청년 남성들에게 돌아가야 할 사회의 몫이 여성가족부에 의해 빼앗기고 있다는 추상적인 피해의식의 확산일 뿐이다. 물론 국가 기구나 정부 부처 등의 형평성을 따질 수는 있다. 그러나 형평에 맞지 않아 보인다고 해서, 없애버리면 된다는 식의 해결이 전부일 순 없다. 적어도 제대로 된 정치라면 무언가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처지를 객관적인 지표를 통해 파악하고, 이를 살피기 위한 정책적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란 무언가를 빼앗을 수도 무언가를 나눌 수도 있게 한다. 과연 오늘의 정치는 어떤 감정에 의거하고 있나?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계급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의 폐단을 우리는 오래도록 지켜봐 왔다. 그러다 이제는 세대로, 성별로 갈라치기 하는 정치가 다시금 부상하고 있다. 권력 쟁취와 유지를 위해 사람들의 악감정에 어디까지 편승해갈지 모르겠다. 이번 서부지법 폭동 사태도 우연이 아니다. 사법 체계와 헌정질서의 근간을 위협하는 집단적 폭력행사에 엄정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도 부족할 판에 그들의 삐뚤어진 감정을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라. 시라이 사토시는 ‘악감정에 의거한 정치’란 ‘파시즘’에 다름 아니라고 정의했다. 정확한 진단이라 생각한다. 역사의 문전 앞에 당도한 파시즘에 저항해야 한다. 부디 혼란스러운 최근의 정세를 계기로 한국의 정치가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나약한 본성’으로부터 빠져나오길 기원해 본다.

2025-02-03

오징어 게임과 민주주의의 원칙

허민 문학연구자 민주주의는 지난한 과정을 동반한다. 국정운영이나 정책 결정은 물론 사사로운 의사진행조차 그에 동조하지 않는 상대의 설득을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론 마주하기도 거북한 정치적 라이벌 혹은 적(適)을 종용해야 할 때도 있다. 그 회유의 단계가 아무리 비루하거나 지루해도 감정적으로 기피만 해서는 어떤 결실도 이뤄낼 수 없다. 현실정치에서 대화와 타협, 토론과 숙의가 필수적이라는 건 일종의 상식으로 통용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상식이 실제 수행되기 위해서는 공감할 수 없는 타인에 대한 자기의 마음을 공공의 관점에서 추스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12·3 비상계엄은 민주주의의 지난한 과정을 감당하지 못한 대통령의 무력(無力)한 무력(武力) 행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고 있는 윤석열에 대한 징벌 역시 지난해 보이는 법적 절차를 거쳐야 할 것이다. 이처럼 민주주의란 저절로 성숙되는 게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인내와 양해, 용기를 필요로 한다. 선거와 투표는 민주주의 특유의 지난한 의사결정 과정을 합리적으로 신속히 처리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선거와 투표는 민중의 의사를 대의하는데 일정한 한계가 있는 불완전한 제도이기도 하다. 선거라는 제도는 언제나 선거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산술적으로만 보더라도 유권자의 30~40%정도는 투표를 포기하며, 그중에는 아예 선거권이 박탈된 계층도 있다. 더구나 어느 선거에서든 당선자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과반 정도의 민의를 마주해야만 한다. 정치인에게 ‘겸허할 의무’가 주어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선거는 승자와 패자를 차등적으로 구분케 하는 정치 참여의 원리다. 이때 자신이 지지하지 않은 결과를 받게 된 적지 않은 민의는 어떻게 사회적으로 처리돼야 할까? 바로 이 선거제도의 난점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시즌2이다. ‘오징어 게임’은 자본주의 체제의 ‘순수한’ 생존 법칙을 아이들의 놀이 형식으로 융해하여 글로벌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시즌2에서는 참여자들의 목숨값을 대가로 한 게임의 지속 여부를 투표행위를 통해 결정하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묘사된다. 한쪽에는 타인의 생명을 담보로 가능한 많은 액수를 차지하면 된다는 자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어떻게든 게임을 멈추고 살아나가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 간의 갈등은 투표를 통해 강제로 봉합되는데, ‘51:49’의 구도 속에서 승리하지 못한 ‘49’의 의사는 사지(死地)로 내몰리게 된다. 패자에겐 다음 투표까지가 그야말로 ‘지옥의 시간’인 것이다.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승자 독식이라는 그 형식적 결과의 관철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이는 투표를 통해 대의되지 못한 사람들의 의견을 정치적·사회적으로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지를 아울러 고민케 하는 장치라는 데서 연유하는 것 아닐까? 민주주의란 나 혹은 내가 속한 세력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지난하지만 꾸준히 모색케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내란 정국에서 다시금 새겨야 할 원칙이라 하겠다.

2025-01-20

다시 일어설 기회

허민 문학연구자 실패와 실수, 후회와 불안, 후퇴와 망설임은 모두가 기피할 순 있어도 살다 보면 마주해야만 하는 단어들이다. 아니 마주한다기보단 끌어안고 지낸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저마다 성공과 행복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그런 기쁨보다는 반대의 경우가 더 일상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설을 공부하게 된 이유도 비슷했다. 내게 소설은 뒤로 물러서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앞만 보며 달리다가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때론 거대한 벽에 막혀 뒷걸음질 치곤 하는 가장 보통의 실패를 담은 양식이 소설 아닌가 싶었던 거다. 인생의 승자보다는 패자가 될 확률이 높아 보이기도 했고, 승리를 자임할 수 있는 상황보다는 패배를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소설과 문학은 슬픔과 불행을 끌어안는 장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 소설의 반의어가 있다면 자기계발서 아닐까? 자기계발이란 타인과의 경쟁을 세계의 이치로 받아들이고, 그러한 다툼 속에서 출세를 노리는 병법에 다름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나도 한때는 정말 많이 읽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읽다 보니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 자기계발서는 각자의 삶이 잘되길 바라는 당연한 마음에서 읽는다기보다는 잘 되지 못 할 수도 있다는 불안을 애써 지연하기 위해 찾게 되는 글이라는 거였다. 성공을 위한 지침대로 산다는 게 가능한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산다 해도 승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초조함이 모두를 궁지로 내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우려가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일종의 원리로서 작동하는 시대의 비참은 그렇게 반복 형성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나간 선택에 대한 후회와 그러한 감회에서 비롯되는 자기에 대한 의혹에서야말로 지성이 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는 지성이란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또 다른 철학자 아즈마 히로키는 인간이면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는 만큼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시도를 사상의 언어로 포착해야 한다며 “정정 가능성의 철학”을 논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남는 문제가 있다. 자기의 잘못을 정정할 수 있는 기회조차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의 기원은 결국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의 차별에서 비롯되는 것 아닌가 한다. 나는 모두에게 ‘플랜B’를 수행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플랜B’란 모두가 범할 수 있는 과오로부터 다만 좌절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 다음을 모색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의 이름이다. 물론 그 가능성에는 개인적인 다짐과 용기를 넘어서 제도적인 뒷받침도 필요하다.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음에도 자기 삶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여지에는 왜 사회적인 격차가 작동할까? 더구나 팬데믹 이후 장기 불황 속에서 극단적인 경제적 양극화가 야기되고 있기도 하다. 즉 누군가는 평범하게 살아가기조차 쉽지 않다는 말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차선과 대안, 보완과 처방은 사회적 동물로서 존재하는 인간의 조건을 구성하게 됐다. 한국 사회의 가장 긴급한 과제로서 ‘플랜B’의 사회적 보장이 필요하다.

2025-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