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문예비평가 아즈마 히로키는 “촉시적 평면에 대하여” 논한 바 있다. 여기서 ‘촉시적’이란 ‘촉각’과 ‘시각’이 결합된 복합적 감각을 의미하고, ‘촉시적 평면’은 터치패널을 뜻한다. 세계의 변화는 미디어의 변화로 감지되는데, 현대 사회는 바야흐로 터치패널의 시대라는 것이다. 컴퓨터 모니터와 TV, 영화와 같은 과거의 스크린은 출력 전용이라 만질 수 없고 만져도 내용이 변하지 않으나, 터치패널은 표시와 입력의 두 기능이 모두 가능하여, 접촉을 통해 대상을 조작할 수 있다.
즉 보이지만 만질 수 없는 것이 만연했던 시기를 지나, 이제 보이면서 만질 수도 있는 것에 익숙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 차이에 천착한다. 스크린에서 터치패널로의 이행은 사회의 구체적 변화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사회의 문제나 현안을 지각하는 방식이 바뀌어버렸다고 말한다.
가령 스크린의 시대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것(화면)에만 매몰될 게 아니라, 그 배후의 보이지 않는 힘(감독)을 파악하지 않으면 대상(작품)의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는 의식이 있었지만, 터치패널의 시대에는 그 관계가 변했다는 것이다. 즉 ‘표층’의 배후에 ‘심층’이 있다거나, ‘가짜’ 너머에 ‘진짜’가 있다는 식으로 사고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반대로 ‘가짜’를 ‘가짜’인 채로 만지고 조작하고 가공하여 그 조작 자체에서 쾌를 느끼는 시대이고, 심지어 ‘가짜’를 계속 만지다보면 언젠가 ‘진짜’에 도달한다고 믿는 시대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그는 트럼프 현상을 예로 든다. 지식인들은 트럼프의 ‘가짜’ 이미지에 속지 말고 그 뒤편의 추악한 ‘진짜’ 욕망을 봐야한다고 했으나 이런 호소는 반대로 ‘가짜’면 어떠냐는 저항을 불러일으켰다고 말이다.
나는 한국에서도 ‘가짜’와 ‘진짜’의 관계가 뒤틀린, 탈진실(Post-truth) 현상이라고 쉽게 단정하기도 어려운 현실로 ‘부정선거론(?)’이 있다고 생각한다. 부정선거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선관위의 설명이나 사법부의 판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작은 의혹에 매달려 부풀리고, 사회에 터무니없는 요구를 내걸면서 이를 받아주지 않는 현실을 자기 믿음의 근거로 다시 동원한다. 이들에게 진실이란 밝혀지거나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실 ‘부정선거론’의 실체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를 밑천으로 자기의 세(勢)를 키우려는 정치 모리배들과 마치 ‘부정선거론’이 사회의 중요한 의제인 양 그들의 주장을 받아써 주는 언론이 문제라 보인다. 이들은 부정선거 운운이 가짜인 것을 알지만 모른 척 계속 만지고 다루고 접촉한다. 그 가공의 결과가 미칠 사회적 악영향에 대해서는 무심한 채 정적 제거에만 혈안이다. 혹은 부정선거가 담론화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혼란으로부터 취할 정치적 이득이 있다고 믿는다.
가짜를 가짜인 채 계속 만지다 보면 거기서 일말의 진실에 도달할 거라는 사이비 소망의 출현을 어떻게 봐야 할까? 왜 이들은 사회를, 법을, 합리를, 정치를, 사람을 믿지 못하나? 이런 현상의 배후에 터치패널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짜에 내기를 거는 사람들에 관해서는 더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것 같다.
/허민 문학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