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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글로컬리제이션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이제 단순히 서로 소통하는 수준을 넘어 ‘초연결성’으로 연결될 것이라 한다. 초연결성은 사람과 사람은 물론 사람과 사물, 더 나아가 사물과 사물까지 서로 연결되어 소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4차산업혁명을 이끌고 가는 중요한 원동력이라고 한다. 그런데 초연결성으로 연결되어가는 지구촌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편하지만은 않다.하나로 연결된 세계를 생각하면, 모든 의사 소통이 쉽고 자유로워져 누구도 외로울 것 같지 않아 따뜻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알려져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는 세상이 되면 정의가 바로 세워진 세상도 앞당겨 이룩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우리 모두가 각자의 좋은 것들을 서로 활발하게 나누게 된다면 세상은 더욱 풍요롭게 될 것도 같다.하지만 하나로 연결된 우리는 우리의 좋은 점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탐욕과 문제점들도 거침없이 드러내어 우리를 큰 위험에 빠지게 할 것 같다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우리 공동체에 매일 쏟아지는 가짜 뉴스와 무책임한 댓글은 이미 우리에게 치유되기 어려운 피해와 상처를 남기고 있다. 또한 스팸과 보이스피싱으로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위협 받게 된 것도 어쩌면 우리가 서로 너무 가깝게 연결되었던 것이 화근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가 불러온 어려움도 하나로 묶여진 지구촌이 우리에게 주는 달콤함에 취해 그 이면에 숨겨진 위험을 보지 않으려 했던 우리의 안일함 때문인 것도 사실이다. 돌아보면 14세기 인류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던 흑사병도 전유럽을 휩쓸었지만 그 피해는 서구 유럽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어떤 한 지역에 닥친 재앙이 대양을 건너 다른 대륙의 구석구석까지 순식간에 번질 수 있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로 온 인류가 한 마을을 이뤄 연결되어 소통한다는 지구촌의 눈부신 영광이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아닐 수 없다.예전에도 먼 지구 반대편까지 여행도 하고 희귀한 물건은 먼 곳에서 가져다 쓰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가져온 과일을 집 앞 가게에서 아침 식사로 쉽게 사다 먹을 수 있고, 신혼 여행도 아닌 그저 그만그만한 이유로 한해에도 여러 번씩 수 백 마일을 날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현대 기술 발전과 지구촌으로 묶여진 세상이 주는 이러한 달콤함에 매혹되어 우리는 코로나19, 돼지열병, 사스, 메르스 등의 유행병 때문에 혹독하게 치르게 될 위험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세계화로 인해 지구촌에 닥치는 재난은 전염병에 국한되지 않는다.태국의 바트화에 닥친 위기가 우리나라에 IMF 구제금융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고, 미국의 부동산 관련 대출인 서브 프라임 모기지에 얽힌 금융가들의 윤리적 해이가 미국 경제를 흔들고 세계 경제를 위기에 몰아넣으며 한국과 아시아 경제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세계화를 통해 결합된 지구촌 경제를 건설하며, 그것이 주는 달콤함을 헤아리느라 혹시나 겪게 될지 모를 위험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생각해보지 못했다.글로컬리제이션은 세계화를 뜻하는 글로벌리제이션과 지역화를 의미하는 로컬리제이션을 결합하여 세계화의 유익은 누리면서 지역화에 담긴 가치도 함께 취한다는 뜻의 말이다. 그런데 세계화가 주는 유익은 획일화를 통해 이루어 내는 경제적 효율성으로 지역적 특성과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지역화의 가치와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개념이다.그러니 글로컬리제이션이라는 말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나 ‘침묵의 소리’와 같은 모순 어법의 말이다. 그렇다면 서로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세계화와 지역화가 모두 담긴 글로컬리제이션이라는 말은 전혀 현실성 없는 이상이거나 신기루 같은 착시에 기인한 허상인 것 같이 들리기도 한다.그런데 돌아보면 인류의 역사를 바꾸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낸 여러 시대적 요청들도 처음에는 말이 안되는 모순으로 우리 귀에 들려왔었다. 미국 흑인 노예의 해방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청은 당시 노예들의 노동력에 기반을 둔 미국 경제의 안정과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여성의 사회적 해방을 요구하던 시대적 요청 또한 당시 여성이 맡아 수행하던 전통적 역할과 여성에게 남성과 동일한 권리를 주는 것과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이것을 택하면 저것을 잃어 버리고 저것을 택하면 이것을 잃어 버리는 양단간의 결정으로 보였다.하지만 흑인 해방은 흑인의 노동력에 안일하게 기대어 있던 백인들의 보다 적극적인 경제 참여를 가져와 미국 경제는 더욱 탄탄한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여성 해방도 여성의 보다 활발한 사회 활동을 이끌어 내며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올바른 사회적 인식을 형성하여 보다 건강한 가정과 사회를 만들어 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기에 처음 듣기에 모순으로 들려 불가능해 보이는 사회적 요청은 어쩌면 그 안에 모순이 되어 충돌하는 듯한 두 가치 모두를 취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보라는 시대적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글러컬리제이션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도 세계화의 유익은 취하면서 지역화가 주는 가치를 성취하라는 시대적 요청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세계화를 추구하면서도 경제적 효율성만을 생각하는 편협함에 빠지지 않고, 지역화의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배타성과 지역 이기주의를 멀리하라는 것이 글로컬리제이션이라는 말에 담긴 이 시대의 도전이다. 아직은 수수께끼 같이 들리는 글로컬리제이션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어떻게 답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는 알 수 없다.그저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초연결성을 십분 활용하여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성장하기 위한 협력을 해야 한다. 서로를 돕되 어느 한쪽도 지나친 종속에 머무르지 않도록 늘 각자가 홀로 서도록 독려해야 한다. 또한 각자가 가진 기릴 만한 것들을 나누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서로에게 연결되고 취약한 이웃에게 다가가야 한다.오직 내게 소중한 것만이 가장 가치 있다 생각하는 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타인들이 소중히 생각하는 가치가 낯설어 보여도 이해해 보겠다는 겸손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결국 우리는 보다 성숙한 홀로선 인격의 개인, 사회, 공동체가 되어 서로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이번 학기는 많이 늦어져 5월 1일에 개강한다. 하지만 당분간은 온라인으로 강의해야 한다. 갑작스러운 온라인 강의준비에 매일 허둥지둥 지내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시작된 일이긴 하지만 어쩌면 온라인 교육이 원래 정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내 지식과 경험 중에 나눌만한 것이 있었다면 애당초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하여 온라인으로 널리 나누면 될 일이었다. 내 지식을 나누기 위해 꼭 오프라인의 만남이 지금처럼 많이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초연결성으로 연결되어 소통하되 만남은 최소화 하는 것이 글로컬리제이션의 정신이다. 내 가르치는 일에도 그 정신을 일찍이 따르려 했더라면 기숙사로 강의실로 학생들을 불러 모으느라 높아진 대학 교육비를 반토막으로 만들 묘책을 벌써 찾았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포스텍 교수

2020-03-25

과학기술에 대한 사랑

누구나 사랑을 경험을 할 때엔 무슨 열병이라도 걸린 듯 가슴은 두근거리고, 속은 울렁거린다. 오직 한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무슨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삶은 일상적 현실 위로 둥둥 떠올라 표류한다. 이런 때에 우리는 그런 비현실적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기만을 간절히 원한다. 하지만, 이 바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이제는 너무 나이 들어 그런 순간이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심술이 나서 하는 말이 아니라 삶을 조금 더 알게 되어 하는 말이다. 도대체 그렇게 현실감을 잃은 상태가 계속되면, 사람은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몇 날, 몇 주, 몇 달, 몇 년 그렇게 사랑에 빠진 상태를 계속 견디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도 가능할 것 같지 않고, 삶은 그 사랑으로 모두 망가지게 될 것이 뻔하다.“미국 대중은 과학기술에 대한 사랑에 빠졌다.”2003년 작고한 미국의 시사 문화 평론가인 닐 포스트만 뉴욕대학교 교수가 한 말이다. 그는 과학기술에 매혹되어 과학기술이 미국 사회에 끼치는 유의해야 할 영향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미국인들을 향해 이렇게 경고했다. 그는 “과학기술은 파우스트의 거래(Faustian bargain)와 같아서 늘 주는 것이 있으면, 가져가는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과학기술을 잘 사용하려면, 꼼꼼히 손익을 따져 거래를 하는 것처럼 깨어있어야 하는데 미국 대중은 과학기술에 대한 사랑에 빠져 눈멀고 귀먹어 현명한 거래를 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헌데, 돌아보면 오늘날 우리가 처한 사정도 그리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과학기술에 대한 현대인의 사랑은 강렬하다. 눈멀고 귀먹기에 충분히 달콤하다. 과학기술이 펼쳐 보이는 내일은 항상 희망으로 가득해 보인다. 하지만 그 희망은 결코 내 품 안에 잡혀 차분히 머물지 않는다. “한 발 다가서면, 두 발 도망간다.” 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애정 행각엔 마지막 목적지가 잘 보이지 않는다.“YOLO! 한 번 사는 인생!”,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 “Carpe diem! 이 순간을 잡아라!”, “지금 이 순간!”, “부러우면, 지는 거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첨단 과학기술 제품 광고의 끊임 없는 권고, 예능프로그램과 드라마 속 PPL 광고,이 모든 것들의 무차별 폭격 속에서, 알게 모르게 우리는, 현대 과학기술의 산물들에 대한 사랑에 빠진다. 그래서 우리는, 늘 채워지지 않은 갈망 때문에 굶주린다.사랑에 빠진 연인 간에서 “사랑을 향한 굶주림”이라는 말은, 그 허기가 채워지는 날, 그 꿈이 이루어지는 날이 있기에 아름다운 시구가 된다. 하지만 현대과학에 대한 배고픔은 과연 채워지는 날이 올까? “현대 과학기술, 이만하면 되었다”라고 인정할 수 있는 날은 과연 올까?컴퓨터 메모리에서 두 배의 집적도가 가능해진 순간, 네 배로, 다시 여덟 배로의 목표가 세워지는 것은 자동적이다. 생각해보면 기술적 혁신을 이뤄 낸 연구팀을 “이제 이만하면 되었으니, 집에 가세요”라고 연구팀을 해체할 수 없는 노릇이니, 과학기술은 제동장치가 없는 기관차처럼 끊임없이 변화, 발전한다.이런 현상을 보고, 프랑스의 사회비평가 자크 엘륄은 “기술은 자율적이다”라는 주장을 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람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과학기술이 어떻게 자율적인가? 하지만 과학기술 현상 자체를 볼 때, 그의 주장은 매우 호소력이 있다. 한번 발전이라는 방향을 향해 나선 과학기술은 멈추지 않고 그 발전 방향을 지속하려 한다는 것이다.혹자는 과학기술이 가는 길은 과학기술자의 선택으로 “구성”되어지기 때문에, 결국 과학기술은 인간의 통제 아래 있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연구할까?”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과연 과학기술인들은 자신이 하는 과학기술에 대해 얼마나 생각할까?“저는 연구실에서 연구만 했기 때문에 그런 건 잘 모릅니다”라는 말은 무지를 드러내는 말이지만, 종종 과학기술인들에겐 자신의 전문가로서의 삶을 은근히 부각시키려는 복심에서 하는 말일 때가 있다. 요컨대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에 대해 너무나 깊은 사랑에 빠져서, 삶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눈멀고, 귀먹었다는 말인데, 그러니 “제 삶이 부끄럽지 않아요, 저는 사랑에 빠졌거든요”라는 고백으로 들리는 대목이다.마하트마 간디는 우리 시대에 주의해야 할 일곱가지 치명적인 죄악들을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양심없는 쾌락, 원칙없는 정치, 윤리없는 상거래, 성품없는 지식, 인간성 없는 과학, 노동없는 부, 희생없는 종교적 숭배. 이 일곱가지 죄악 중 인간성 없는 과학(Science without humanity)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치와 과학이 분리되는 것이 커다란 오류일 수 있다는 지적으로 현대과학기술의 대세를 볼 때,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점들을 많이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돌아보면 과학기술은 한국인이 사랑의 대상으로 삼을만하기도 했다.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쓸 때, 경제를 부흥시키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낼 때, 늘 과학기술은 우리에게 더없이 고마운 친구였다. 지금도 기업의 국제 경쟁력을 위한 혁신을 통해, 또한 세계적 기술 벤처 창업을 통해 우리나라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유일한 수단이 과학기술의 추구에 있다는 생각은 아마도 우리 모두의 공감대일 것이다.그렇기에 더욱 이 모든 국가적 기대감을 현실로 만들어 갈 과학기술인들은 지금보다는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으며, 누구의 수고로 내가 누리는 행복이 가능하며, 어떤 미래가 우리, 더 나아가 모든 인류를 행복하게 할 것일지에 대해 고민하는 일에 우리는 좀더 시간을 써야 한다. 더욱더 귀 기울여 듣고, 힘써 공부하고, 더욱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어지럽게 격변하는 이 시대에 현대 과학기술을 그래도 한자락씩이라도 이해하는 과학기술인들의 어깨엔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역사적 책임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물론 과학기술인의 손에 과학기술이 잡혀 있기에 과학기술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과학기술인이 지어야 한다. 하지만 그 과학기술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그 결과물이 거래되는 시장이 결정하고 있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불편한 현실이다. 그렇기에 과학기술의 산물을 사고 소비하는 모든 소비자들의 의식이 더욱더 중요한 시절이 되었다.‘인간을 생각하는 경제’라는 부제가 붙은 E. F. 슈마허의 ‘작은 것은 아름답다’라는 책에서 저자는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중요한 미덕임을 강조한다. 이 책은 벌써 반세기가 훌쩍 넘은 오래된 책이지만, 슈마허가 강조한 이 중요한 절제의 미덕은 과학기술이 주도하는 사회가 될수록 더욱 중요해 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닐 포스트만 뉴욕대 교수.과학기술은 마술처럼 우리를 매혹한다. 과학기술이 펼쳐 보이는 과학기술의 재주는 우리의 삶, 우리의 미래를 내어 맡기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렇기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과학기술에 대한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랑이 그렇듯이 그 사랑도 우리를 눈멀고 귀먹게 하도록 내어 버려 두어서는 아니된다.과학기술이 주는 유익은 한껏 향유하면서도 그것이 주는 유익과 함께 따라올 결과에 조금 더 눈을 돌리는 일은 성숙한 시민이 가져야할 중요한 덕목이다. 우리가 속한 사회와 그 안의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가져올 결과에 관심을 가지고 혹여 소외되고 어려움에 처할지 모르는 이웃이 있을지 따뜻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 살피는 일에 조금 더 마음을 쓰는 것이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지혜롭고 성숙한 과학기술에 대한 올바른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장수영 포스텍 교수

2020-02-26

따뜻한 혁신

지난 1월 23일 크리스텐슨 하버드 경영대학원 석좌교수가 별세하였다. 미국의 CNN은 “크리스텐슨 교수는 실리콘밸리의 경전을 집필한 인물”이라 평가하며 아쉬움을 담은 부음 기사를 타전하였다.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그의 ‘파괴적 혁신’이라는 경영 혁신 이론은 한 시대를 이끌어 가는 거대 기업이 어떻게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작은 기업의 등장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처할 수 있는지를 잘 설명해준다.그가 말하는 파괴적 혁신의 가장 전형적인 예는 PC의 등장이다. 처음 PC가 등장하였을 때 PC는 컴퓨터를 잘 아는 전문가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PC를 만든 IBM의 엔지니어들 중에는“도대체 개개인 모두 각자의 컴퓨터를 가질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게 PC는 그저 장난감에 지나지 않아 보였던 것이다.결국 IBM은 스스로 독점할 수도 있었던 PC 기술을 무료로 공개하여 누구나 PC를 만들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으며, 오늘날 윈도우 운영체계로 변모한 PC의 운영체계인 도스(DOS)를 빌게이츠에게 양도하여 오늘날의 마이크로소프트를 탄생시켰다. 이후 전개된 인터넷 혁명과 PC의 놀라운 성장,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엄청난 성공을 생각하면 PC를 포기했던 것은 IBM에게 너무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이렇듯 당대의 첨단 기술을 이끌어 가던 IBM 같은 기업에게 장차 중요해질 PC와 같은 기술이 눈에 띄지 않거나, 혹 보게 되더라도 그저 무시해야 될지 말지를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을 크리스텐슨 교수는 ‘혁신가의 딜레마’라고 부른다. 이 딜레마에 빠져, 그 기술을 이용한 ‘싸구려’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의 등장을 방관하며 지나치게 되고,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후 그 기술이 크게 발전하여 당시의 첨단 기술을 이끌어 가던 기업의 기술마저 모두 앞지르는 결과를 가져오는 현상을 크리스텐슨 교수는 ‘파괴적 혁신’이라 부른다.그런데 ‘파괴적’이라 번역된 크리스텐슨 교수가 활용한 원어는 ‘Disruptive’로, 파괴한다는 개념이기 보다는 ‘단속적’이라는 뜻을 담은 표현이다. 그는 “대부분의 혁신은 한번 일어나면 마치 관성이라도 있는 것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 같은 혁신의 방향으로 지속되는 속성을 갖는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지속된다는 뜻의 ‘Sustaining’이라는 단어의 반대말로 선택된 단어가 ‘파괴적’으로 번역된 ‘Disruptive’라는 단어이다.예를 들어, 집적도가 높은 메모리 반도체가 만들어지면, 그 다음은 더욱 집적된 메모리 반도체의 개발이 목표가 되어 계속적인 집적도의 고도화가 이루어 진다. 또한, 속도, 강도, 혹은 효율 등에서 이루어진 모든 다른 혁신들도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더 높이라는 방향을 향해 혁신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데, 이런 혁신을 크리스텐슨 교수는 ‘지속적(Sustaining) 혁신’이라 부른다.이런 가운데 크리스텐슨 교수가 주목한 흥미로운 점은 진정 세상을 변화시키는 혁신은 이런 지속적 혁신과는 반대의 길을 가는 것 같아 보이는 ‘단속적(Disruptive)’인 혁신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런 단속적인 혁신은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급속히 발전하여 지속적 혁신을 따라잡기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다는 것이 크리스텐슨 교수의 주장이다.파괴적 혁신 이론은 PC 산업의 성장을 잘 설명해줄 뿐 아니라, 일본의 자동차와 전자 산업이 미국의 자동차와 전자 산업을 앞지르던 사례, 그리고 한국의 자동차와 전자 산업이 다시 일본의 전자와 자동차 산업을, 그리고 중국의 산업이 거의 모든 서구의 산업을 앞질러가게 되는 과정을 잘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이론으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그런데 바로 그 크리스텐슨 교수가 1970년대 초반 우리나라 춘천에서 수년간 선교사 생활을 한 바 있으며, 그의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한국인들을 위해 ‘구창선’이라는 한국 이름도 만들었다는 따뜻한 이야기는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한 한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인을 사랑하고, 한국에 대한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한국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지구 반대편의 나라 한국에 대해 이런 각별한 애정을 가질 만큼 따뜻한 크리스텐슨 교수의 성품과 파괴적 혁신 이론의 ‘파괴’라는 단어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이 들리는데, 사실 그의 이론을 좀더 찬찬히 살펴보면 그의 따뜻한 성품은 그의 파괴적 혁신 이론의 기반에도 잘 담겨 있음을 보게 된다.사실, 크리스텐슨 교수의 파괴적 혁신 이론의 배경에는 크리스텐슨 교수 만의 매우 독특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숨겨져 있는데, 그의 이런 시각은 섬김을 받지 못한 이를 섬기기 (Serving the unserved)가 파괴적 혁신의 출발점이라는 그의 분석에 매우 잘 나타난다.크리스텐슨 교수는 ‘섬김을 받지 못한 이를 섬기기’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광석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처음 들었던 때를 이야기 한다. “비록 소리는 작았고, 수신 상태도 좋지 않았지만, 그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음악과 노래 소리는 나에게는 신세계를 경험하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가난한 자기 처지에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주던 광석 라디오를 갖게 되었던 때를 돌아보며 “그 기술은 조잡한 기술이었지만, 내게는 어떤 첨단 통신 기구보다도 소중했다”라 회고한다.미국이 세계 자동차 산업에서 절대강자였던 시절에 미국 시장에 출현한 일본 차는 미국 자동차 기업이 보기에는 깡통 같은 저급한 제품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일본 자동차들의 출현은 그동안 가난하여 자신만의 차를 소유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자동차를 소유하여 이동의 ‘자유’를 얻게 되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이에 힘입어 크게 발전한 일본 자동차 산업은 급기야 미국의 자동차 산업을 심각한 위기에 몰아 넣었다. PC도 처음에는 초라하게 등장했지만 PC의 저렴한 가격 덕에 자신만의 컴퓨터를 소유하게 된 사람들의 정열이 PC 산업을 꾸준히 발전시켜 결국에는 IBM을 비롯한 모든 중대형 컴퓨터 기업의 종말을 가져왔으며, 오늘날의 인터넷도 PC에 의해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결국 크리스텐슨 교수는 ‘파괴적 혁신’이라는 이론을 통해 “지금 섬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어 볼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들을 섬기게 되는 것(Serving the unserved)”이 다음에 있을 ‘파괴적 혁신’의 단서가 되어 지금 온 세상을 지배하는 듯해 보이는 기업들의 종말을 가져올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 올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사실 기술의 산물을 구매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여 그 기술로부터 소외된 계층을 생각하는 기술 혁신을 모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크리스텐슨 교수가 지적했듯이 기술 혁신은 늘 가던 길을 지속하려는(Sustaining)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시장 경제 하에서 더 빠른, 더 강한, 더 고성능의 제품의 개발만이 더 큰 이익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 보이는 현실 속에서 “누가 기술의 섬김을 받고 있지 못하는가?”라 묻는 것은 우매하고 번거롭기 그지없는 질문 같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그럼에도 크리스텐슨 교수는 우리에게 좀더 참신한 질문을 던지라고 도전하고 있다. “누가 이 기술의 섬김을 받지 못하고 있을까? 그들을 위해 어떤 기술을 개발해야 할까? 어떤 제품으로 그들이 섬김을 받게 할까?” 당장의 경제적 이익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이런 질문들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단서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이색적인 주장이 그의 갑작스러운 부음을 전해들은 우리들 마음에 오랫동안 깊은 울림이 되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장수영 포스텍 교수(산업경영공학과)

2020-02-05

마술과 기술

사실 많은 혁신적인 기술들은 처음엔 마치 ‘오즈의 마법사’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초자연적 ‘마술’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우리를 매혹시키며 우리의 생사화복을 쥐고 있는듯 우리 위에 군림한다. 그러다가 점차 많은 사람들에게 그 원리가 폭로, 혹은 이해되어 모두가 알만한 모습이 되면서 그 기술의 자리가 점차 낮아지다가 결국엔 모든 이들의 손에 들어가 그들 삶의 일부가 된다.‘오즈의 마법사’라는 동화에서 주인공 도로시는 오즈의 마법사가 가진 위대한 능력이 자신을 그리운 고향 캔사스 집에 데려다 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험난한 모험을 감행하여 오즈의 마법사가 있는 성에 다다른다. 그러나 오즈의 마법사는 연약한 늙은이이며, 그의 모든 능력은 마법이 아니라는 사실에 도로시는 크게 실망한다. 하지만 오즈의 착한 마녀는 도로시에게 스스로 집에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도로시 자신 안에 언제나 있었음을 알려주게 된다. 결국,“내 집같이 좋은 곳은 없어(There’s no place like home.)”라고 스스로 주문을 외운 덕에 도로시는 그리운 집과 가족들에게 무사히 귀환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오즈의 백성들과 도로시가 거짓말쟁이 사기꾼 오즈의 마법사가 펼쳐내던 재주를 위대한 마법이라 생각했던 것은 그들만이 유난히 어리석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누구에게든 기술과 마술을 구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상과학 영화의 효시로 불리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쓴 영국의 유명한 공상과학소설 작가 아서 C. 클라크는 “극도로 앞서가는 기술은 마술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라 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의 인터넷, 고속열차, 드론, 스마트폰, 일기예보, 영상통화 등 지금은 우리 일상적인 삶의 일부가 된 기술들을 100년 전 사람들이 보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기술들을 마술이라 생각할지는 너무나 자명하다.사실 많은 혁신적인 기술들은 처음엔 마치 ‘오즈의 마법사’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초자연적 ‘마술’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우리를 매혹시키며 우리의 생사화복을 쥐고 있는듯 우리 위에 군림한다. 그러다가 점차 많은 사람들에게 그 원리가 폭로, 혹은 이해되어 모두가 알만한 모습이 되면서 그 기술의 자리가 점차 낮아지다가 결국엔 모든 이들의 손에 들어가 그들 삶의 일부가 된다. 기술의 혁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런 과정을 기술의 민주화라 부른다.대형 발전소를 건설하고 대규모 송전 시설을 갖추어야만 개개인이 전기를 사용할 수 있었기에 발전과 송전은 국가가 나서야만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의 규모까지는 소규모 수력, 풍력 혹은 태양광 발전기를 이용하여 개개인이 어렵지 않게 전기를 만들어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전기의 민주화’라고도 불리운다. 또한, 은행 같은 금융 기관이 있어야만 가능했던 금융서비스가 이젠 크라우드펀딩과 P2P 기반의 예금, 대출 및 송금 등을 통해 가능하게된 것을 ‘금융의 민주화’라 부르기도 한다.이런 민주화의 추세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형건물을 짓고 다수의 점원을 고용하지 않아도 알리바바와 같은 세계 최대의 쇼핑몰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큰 규모의 숙박시설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에어비엔비와 같은 세계 최대 규모의 숙박업을 만들어 모든 개개인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집 한 칸을 이용하여 숙박업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또한, 산간 벽지에 사는 농부가 인터넷을 통해 중간 유통업자 모두를 넘어 도시의 수요자와 직거래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국가와 조폐공사와 같은 엄청난 기반이 있어야만 가능했던 화폐 발행이 이젠 컴퓨터를 소유한 개개인들이 모여 간단한 문자나,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하여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피아 만시니라는 여성 운동가는 인터넷 정당을 만들어 아무런 정치 자금을 쓰지 않고도 전국 유권자 4%의 지지를 받아내었다. 이렇듯 개개인의 손에 들어가 개개인의 역량이 된 현대 기술은 개개인 모두를 생산과 유통, 화폐 금융 등의 경제적 분야는 물론 언론과 정치에 이르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집중된 힘과 주도권을 대중의 손에 나누어 주는 민주화를 이루어내고 있다.하지만, 민주화 자체가 우리 앞에 놓인 문제 해결의 종착역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 우리가 늘 배우는 바이다. 꽁꽁 얼어 붙어 암울하기만 했던 우리나라의 과거 정치 상황에서는 오직 민주화의 봄바람만 불어 온다면 모든 정치적 문제는 눈 녹아 내리듯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끊이지 않는 정치적 혼란과 위기의 정치 현실을 보면, 민주화의 봄바람이 불던 그때는 목적지에 도달하던 때가 아니라, 비로소 진정 의미 있는 새로운 여정의 첫 발자국을 내딛고 있었던 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민주화의 봄이 우리 앞에 열리고 있던 그 시절에 우리는, 우리 손에 잡혀진 역량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역량에 따라 요구되는 책임의 무게도 함께 커진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고 무거운 책임감으로 신중한 발걸음을 내딛어야 했었다. 스파이더맨에서 여러 번 등장했던 대사처럼 “큰 능력에는 큰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With great power, comes with great responsibility)”정치적 민주화와는 다르지만 현대 과학기술의 민주화도 우리 앞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고 있다. 소수의 전유물이기에 소수만이 구사할 수 있었던, 마술사의 마술과 같은 과학기술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뻗기만 하면 잡히는 가까운 곳에 놓여 개개인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개인의 역량이되었다. 하지만, 우리 손에 잡혀진 현대 과학기술은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만큼 혼란과 자멸의 가능성을 함께 열어 줄 수도 있기에, 기술민주화가 제공하는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은 가볍고 경박스럽지 않은 무겁고 신중한 걸음이 되어야 한다.100년전을 살았던 사람들의 눈에, 오늘날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모두, 신령한 능력을 가진 위대한 마술사와 같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손에 들린 것은 현대 기술이 만들어 낸 신통한 ‘재주’들일 뿐이다. 이런 ‘재주’들로 강화된 우리 개개인의 역량이 열어내는 민주화된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유무선 통신 기술로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어 온갖 지식과 정보를 널리 나누어 서로 배우고 가르치게 될 우리는 새로운 친구를 갖게 되고,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며, 새롭고 혁신적인 경제를 건설하고, 효율적인 정치적 의사 결정 구조를 창출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새로운 모습의 국가를 형성할 수도 있게 될지 모른다.요컨대 민주화된 현대 과학기술은 개개인의 역량을 강화시켜 우리의 보폭을 더욱 넓게 해줄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보다 빨리 그리고 멀리 달릴 수 있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가능성에 도취되어 그저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저런 일을 감행하는 경박스러움은 경계해야 한다. 민주화된 현대과학기술이 열어주는 가능성의 크기가 크고 놀라운 만큼, 우리는 “이 모든 역량을 이용하여 어떤 내일로 향해 나갈 것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고 답하려 노력하며, 신중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내일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하지만 이런 질문에 어찌 쉬운 답이 있겠는가? 그저 도로시의 소망처럼 오랫동안 잃어 버리고 잊고 있었던 것들을 그리워하는 마음, “내 집같은 곳은 없어(There is no place like home.)”라는 주문이 어쩌면 그 소중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뿐이다./장수영 포스텍 교수(산업경영공학)장수영 연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미시간대학교 산업공학 박사를 마친 뒤 귀국, 포스텍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나눔과기술 공동대표, 크리스천과학기술인포럼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2020-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