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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혁신

등록일 2020-02-05 19:57 게재일 2020-02-0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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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튼 크리스텐슨(Christensen) 하버드 경영대학원 석좌교수. /AP연합뉴스

지난 1월 23일 크리스텐슨 하버드 경영대학원 석좌교수가 별세하였다. 미국의 CNN은 “크리스텐슨 교수는 실리콘밸리의 경전을 집필한 인물”이라 평가하며 아쉬움을 담은 부음 기사를 타전하였다.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그의 ‘파괴적 혁신’이라는 경영 혁신 이론은 한 시대를 이끌어 가는 거대 기업이 어떻게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작은 기업의 등장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처할 수 있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미국이 세계 자동차 산업에서 절대

강자였던 시절에 미국 시장에 출현

한 일본 차는 미국 자동차 기업이

보기에는 깡통 같은 저급한 제품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일본 자동차들의 출현은

그동안 가난하여 자신만의 차를 소유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자동차를 소유하여 이동의

‘자유’를 얻게 되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가 말하는 파괴적 혁신의 가장 전형적인 예는 PC의 등장이다. 처음 PC가 등장하였을 때 PC는 컴퓨터를 잘 아는 전문가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PC를 만든 IBM의 엔지니어들 중에는“도대체 개개인 모두 각자의 컴퓨터를 가질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게 PC는 그저 장난감에 지나지 않아 보였던 것이다.

결국 IBM은 스스로 독점할 수도 있었던 PC 기술을 무료로 공개하여 누구나 PC를 만들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으며, 오늘날 윈도우 운영체계로 변모한 PC의 운영체계인 도스(DOS)를 빌게이츠에게 양도하여 오늘날의 마이크로소프트를 탄생시켰다. 이후 전개된 인터넷 혁명과 PC의 놀라운 성장,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엄청난 성공을 생각하면 PC를 포기했던 것은 IBM에게 너무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당대의 첨단 기술을 이끌어 가던 IBM 같은 기업에게 장차 중요해질 PC와 같은 기술이 눈에 띄지 않거나, 혹 보게 되더라도 그저 무시해야 될지 말지를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을 크리스텐슨 교수는 ‘혁신가의 딜레마’라고 부른다. 이 딜레마에 빠져, 그 기술을 이용한 ‘싸구려’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의 등장을 방관하며 지나치게 되고,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후 그 기술이 크게 발전하여 당시의 첨단 기술을 이끌어 가던 기업의 기술마저 모두 앞지르는 결과를 가져오는 현상을 크리스텐슨 교수는 ‘파괴적 혁신’이라 부른다.

그런데 ‘파괴적’이라 번역된 크리스텐슨 교수가 활용한 원어는 ‘Disruptive’로, 파괴한다는 개념이기 보다는 ‘단속적’이라는 뜻을 담은 표현이다. 그는 “대부분의 혁신은 한번 일어나면 마치 관성이라도 있는 것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 같은 혁신의 방향으로 지속되는 속성을 갖는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지속된다는 뜻의 ‘Sustaining’이라는 단어의 반대말로 선택된 단어가 ‘파괴적’으로 번역된 ‘Disruptive’라는 단어이다.

예를 들어, 집적도가 높은 메모리 반도체가 만들어지면, 그 다음은 더욱 집적된 메모리 반도체의 개발이 목표가 되어 계속적인 집적도의 고도화가 이루어 진다. 또한, 속도, 강도, 혹은 효율 등에서 이루어진 모든 다른 혁신들도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더 높이라는 방향을 향해 혁신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데, 이런 혁신을 크리스텐슨 교수는 ‘지속적(Sustaining) 혁신’이라 부른다.

이런 가운데 크리스텐슨 교수가 주목한 흥미로운 점은 진정 세상을 변화시키는 혁신은 이런 지속적 혁신과는 반대의 길을 가는 것 같아 보이는 ‘단속적(Disruptive)’인 혁신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런 단속적인 혁신은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급속히 발전하여 지속적 혁신을 따라잡기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다는 것이 크리스텐슨 교수의 주장이다.

파괴적 혁신 이론은 PC 산업의 성장을 잘 설명해줄 뿐 아니라, 일본의 자동차와 전자 산업이 미국의 자동차와 전자 산업을 앞지르던 사례, 그리고 한국의 자동차와 전자 산업이 다시 일본의 전자와 자동차 산업을, 그리고 중국의 산업이 거의 모든 서구의 산업을 앞질러가게 되는 과정을 잘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이론으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바로 그 크리스텐슨 교수가 1970년대 초반 우리나라 춘천에서 수년간 선교사 생활을 한 바 있으며, 그의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한국인들을 위해 ‘구창선’이라는 한국 이름도 만들었다는 따뜻한 이야기는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한 한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인을 사랑하고, 한국에 대한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한국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지구 반대편의 나라 한국에 대해 이런 각별한 애정을 가질 만큼 따뜻한 크리스텐슨 교수의 성품과 파괴적 혁신 이론의 ‘파괴’라는 단어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이 들리는데, 사실 그의 이론을 좀더 찬찬히 살펴보면 그의 따뜻한 성품은 그의 파괴적 혁신 이론의 기반에도 잘 담겨 있음을 보게 된다.

사실, 크리스텐슨 교수의 파괴적 혁신 이론의 배경에는 크리스텐슨 교수 만의 매우 독특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숨겨져 있는데, 그의 이런 시각은 섬김을 받지 못한 이를 섬기기 (Serving the unserved)가 파괴적 혁신의 출발점이라는 그의 분석에 매우 잘 나타난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섬김을 받지 못한 이를 섬기기’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광석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처음 들었던 때를 이야기 한다. “비록 소리는 작았고, 수신 상태도 좋지 않았지만, 그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음악과 노래 소리는 나에게는 신세계를 경험하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가난한 자기 처지에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주던 광석 라디오를 갖게 되었던 때를 돌아보며 “그 기술은 조잡한 기술이었지만, 내게는 어떤 첨단 통신 기구보다도 소중했다”라 회고한다.

미국이 세계 자동차 산업에서 절대강자였던 시절에 미국 시장에 출현한 일본 차는 미국 자동차 기업이 보기에는 깡통 같은 저급한 제품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일본 자동차들의 출현은 그동안 가난하여 자신만의 차를 소유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자동차를 소유하여 이동의 ‘자유’를 얻게 되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이에 힘입어 크게 발전한 일본 자동차 산업은 급기야 미국의 자동차 산업을 심각한 위기에 몰아 넣었다. PC도 처음에는 초라하게 등장했지만 PC의 저렴한 가격 덕에 자신만의 컴퓨터를 소유하게 된 사람들의 정열이 PC 산업을 꾸준히 발전시켜 결국에는 IBM을 비롯한 모든 중대형 컴퓨터 기업의 종말을 가져왔으며, 오늘날의 인터넷도 PC에 의해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크리스텐슨 교수는 ‘파괴적 혁신’이라는 이론을 통해 “지금 섬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어 볼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들을 섬기게 되는 것(Serving the unserved)”이 다음에 있을 ‘파괴적 혁신’의 단서가 되어 지금 온 세상을 지배하는 듯해 보이는 기업들의 종말을 가져올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 올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기술의 산물을 구매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여 그 기술로부터 소외된 계층을 생각하는 기술 혁신을 모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크리스텐슨 교수가 지적했듯이 기술 혁신은 늘 가던 길을 지속하려는(Sustaining)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시장 경제 하에서 더 빠른, 더 강한, 더 고성능의 제품의 개발만이 더 큰 이익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 보이는 현실 속에서 “누가 기술의 섬김을 받고 있지 못하는가?”라 묻는 것은 우매하고 번거롭기 그지없는 질문 같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크리스텐슨 교수는 우리에게 좀더 참신한 질문을 던지라고 도전하고 있다. “누가 이 기술의 섬김을 받지 못하고 있을까? 그들을 위해 어떤 기술을 개발해야 할까? 어떤 제품으로 그들이 섬김을 받게 할까?” 당장의 경제적 이익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이런 질문들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단서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이색적인 주장이 그의 갑작스러운 부음을 전해들은 우리들 마음에 오랫동안 깊은 울림이 되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장수영 포스텍 교수(산업경영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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