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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미술사학의 아버지 조르조 바사리

오랫동안 미술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미술작품과 미술가들의 이야기만 전해왔을 뿐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나, 개별 미술가와 작품에 대한 단편적인 평가는 고대로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역사인식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르네상스가 무르익었던 16세기 이탈리아, 그것도 르네상스의 본고장 피렌체에서였다.메디치 가문의 연출가로 활동했던 미술가 조르조 바사리는 1550년 ‘치마부에로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는 가장 탁월한 이탈리아의 건축가, 화가, 조각가 생애’라는 긴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줄여서 ‘미술가 열전’으로 불리는 책이다. 토스카나어로 쓰인 이 책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한 위대한 미술가들의 생애가 집대성되어 있다. 13세기에 활동한 치마부에(Cimabue)로부터 그의 제자였던 조토 디 본도네, 마사초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거쳐 미켈란젤로에 이르기까지, 토스카나를 중심으로 활동한 주요 미술가들의 방대한 정보가 담긴 놀라운 책이다. 이 한 권의 책으로 훗날 미술사 연구자들은 바사리에게 ‘미술사의 아버지’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선사했다. 19세기 역사학자로 미술사의 학문적 체계를 완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바사리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칭송하기도 했다. “바사리의 빛나는 저작이 없었더라면 유럽의 미술사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사리에 대한 부르크하르트의 평가는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다. 그의 저서를 통해 비소로 단편적인 기록에서 벗어나 미술이 역사의 얼개를 통해 유기적으로 작용하며 흐름을 형성해 왔다는 인식이 생겨났다.고딕이나 매너리즘 혹은 르네상스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어 리나시타 등과 같은 미술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도 바사리였지만, 그 보다 중요한 것은 ‘미술가 열전’ 서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역사관에 따른 미술 전개과정의 서술이다. 바사리는 고대에서부터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를 꽃피운 15세기 콰트로첸토(Quattrocento)에 이르는 미술의 발달과정을 특정한 역사해석의 틀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탈리아인들의 선조 고대로마인들의 찬란했던 미술을 ‘정점’으로 보았고, 야만적인 양식이 지배한 중세를 ‘몰락’ 그리고 고대를 모방해 찬란한 재건을 꿈꾼 15세기 콰트로첸토를 ‘리나시타’(Rinascita), 소생으로 해석했다. 여기서 르네상스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완전했던 고대의 미술이 중세에 이르러 죽음을 맞이했고, 15세기에 다시금 부활한 것으로 보고 있는 바사리의 이러한 사관(史觀)에는 다분히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가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바사리는 르네상스를 시기에 따라 세 단계로 세분화했다. 첫 번째 시기인 14세기 트레첸토(Trecento)를 발전 초기단계인 유아기, 두 번째 시기인 콰트로첸토를 청년기 그리고 세 번째 시기인 16세기 친퀘첸토(Cinquecento)를 성숙기로 규정했고, 그 최고의 정점에 조각가 미켈란젤로를 올려놓았다. 이렇게 짜인 틀 안에 각 시기에 속한 주요 미술가들을 위치시키고 그 생애를 서술해 나갔다. 바사리의 목적은 개별 미술가들의 방대한 정보를 수록한 백과사전이 아니었다. 자신의 시대를 고대의 부활로 규정하고,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미술가들을 저서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태평성대가 아니라 대혼란의 시대였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1517)으로 유럽은 구교와 신교로 나뉘었고, 이탈리아 반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그리고 교황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게다가 1527년 5월 신성로마제국의 용병들이 로마를 급습해 영원한 도시를 폐허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불안과 공포, 패배의식이 지배하던 절망의 시대에 바사리는 콰트로첸토 천재 미술가들의 찬란한 업적을 찬양하여 미술의 부활과 함께 시대 부활의 염원을 담았던 것이다.바사리 개인과 그가 살았던 시대의 관계성 속에서 ‘미술가 열전’의 집필 동기와 목적을 추적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미술사의 역사에서 그의 저서가 가지는 더욱 중요한 의미는 미술가 개인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에서 벗어나 미술의 흐름을 역사적 틀을 통해 서술하고 있다는데 있다. /미술사학자

2020-06-01

서양의 화가들이 성서나 신화를 많이 그린 이유?

그림은 그려진 주제에 따라 역사화,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로 나눠진다. 이러한 분류는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1648년 프랑스에서는 태양왕 루이 14세의 명에 따라 왕립미술원이 설립됐다. 미술가들을 길러내기 위해 관(官)이 주도해 체계적으로 설립한 최초의 미술교육기관이다. 그런데 왕립미술원은 교육기관의 역할만 수행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문화 예술정책에도 깊이 관여를 했다. 그렇다면 루이 14세는 왜 왕립미술원을 설립했을까?절대왕정의 루이 14세는 국가의 모든 영역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 싶어 했다. 모든 권력은 자신으로부터 나오며 정치나 경제뿐만 아니라 학문과 문화, 심지어 예술 또한 자신을 위한 것이어야 했다. 한마디로 루이 14세는 ‘인간으로 태어나 신이 되고자’했던 인물이며, 정치적 목적과 함께 그의 욕망이 응축된 곳이 바로 베르사유 궁전이다. 베르사유를 장식하는 화려한 미술작품들은 오직 한 사람, 루이 14세를 찬양하는 수단이었다.루이 14세는 스스로를 ‘태양왕’이라 칭하며 태양의 신 아폴론을 자기와 동일시했고, 미술가들은 왕의 욕망을 신화 속 인물에 투영한 그림으로 웅장한 궁전을 장식했다. 루이 14세가 지향했던 미술은 위대한 인물들의 위대한 이야기이다. 왕에게 충성하고 국가를 위해 희생하며 귀감이 될 만한 교훈적인 내용을 웅장하고 명료하게 그리는 것이 미술가들의 덕목으로 여겨졌다. 왕립미술원의 교수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미술가를 길러내기 위한 교과과정을 개발했다.몇몇 거장들의 화풍을 모범 답안으로 정해두고 기계적인 반복을 통해 기술을 습득하는 교육 방식이었다. 석고상을 기계적으로 모사하는 데생도 왕립미술원의 교육과정에서 유래한 것이다. 왕립미술원 교수들은 회화작품을 주제에 따라 나누고, 이들 간의 위계질서를 정하게 된다. 학생들이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 배우고 따라야할 그림과 그렇지 못한 저급한 수준의 그림을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위계질서에서 가장 높은 등급에 위치한 그림은 역사화이다. 역사화는 신화나 성서 혹은 역사적 사건들을 묘사한 웅장하고 기념비적인 그림으로 위대한 사람들의 위대한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두 번째 등급의 그림은 인물화이다. 인물화는 실제 인물의 모습을 담은 그림인데, 그림에 담겨진다는 것은 이미 높은 사회적 신분과 부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단계의 그림은 풍경화이다. 화가의 시선이 닿은 자연의 한 단면을 그린 것이 풍경화이다. 가장 낮은 등급으로 여겨졌던 그림은 정물화이다. 꽃이나 과일 등 곧 시들어 버리거나 섞어 버릴 일시적인 대상들을 표현한 그림으로 주로 삶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밖에 등급에 들지 조차 못할 정도로 저급한 그림으로 여겨진 것이 있는데 바로 풍속화이다. 역사화가 위대한 인물들의 위대한 이야기를 그렸다면, 풍속화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묘사한다. 시장의 약장수가 등장하고, 젊은 여인에게 연애를 걸거나 얼음을 지치는 아이들의 모습, 술 마시며 떠들어 대는 게으른 주정뱅이가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프랑스 왕립미술원을 모방해 1744년 스페인의 펠리페 5세는 마드리드에 왕립미술원을 설립했고, 1768년 조지 3세에 의해 영국의 왕립미술원이 문을 열었다. 왕립미술원의 설립은 미술교육의 경직된 제도화를 가속시켰고, 그 가운데 미술권력이 탄생했으며, 미술을 제도권 그리고 비제도권으로 양분화하는 부정적인 현상들이 발생했다. 이러한 갈등이 19세기 중반 파리를 중심으로 극심한 충돌을 일으켰고, 보수적인 미술제도에 반기를 들었던 진취적인 미술가들에 의해 현대미술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아카데미의 폐쇄성에 대항했던 현대미술 선구자들 대부분이 역사적인 장면 보다 일상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던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0-05-11

서양미술사를 통해 보는 원근법의 역사

가치는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결정하고 그 관점은 미술의 형식을 결정한다. 종교적 신념을 작품에서 표현했던 중세가 지나고 르네상스 사람들은 보고 있는 세계를 옮기는데 관심을 집중한다. ‘어떻게 하면 시각적으로 경험한 세계를 그대로 작품 속에 옮길 수 있을까?’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 원근법이다.서양미술사 최초로 수학적으로 계산된 원근법이 적용된 그림은 1427년경 화가 마사초가 그린 ‘성 삼위일체’이다.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벽면에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진 이 작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신학적 관계성이 묘사되어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회 재정에 도움이 되도록 벽면에 소예배당을 만들어 부호들에게 분양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다. 교회 안에 가족 예배당을 가진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었지만 그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벽면을 프레스코로 장식하면서 마사초는 실제 예배당의 공간감을 생생하게 전달할 목적으로 원근법을 적용했다. 화가는 착시효과를 증가 시기키 위해 실제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원통 모양의 천장을 그려 넣었다. 뿐만 아니라 그림에 실재감과 현장성을 부여하기 위해 당시 피렌체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며 흔히 볼 수 있었던 고전적인 기둥과 둥근 아치와 같은 건축적 요소를 사용하였다. ‘성 삼위일체’에 나타나는 건축물과 거의 동일한 형태를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에 지은 오스페달레 델리 인노첸티, 그리고 건축가 알베르티가 만토바에 지은 산탄드레아 성당(1472) 파사드에서 찾아 볼 수 있다.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 활동한 안드레아 만테냐는 독특한 시점으로 죽은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장면을 담아낸다. 감상자가 안치된 그리스도의 시신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도록 선택된 시점이다. 시각적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을 극도로 단축시켜 묘사했다.원근법을 통한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만테냐의 또 다른 대표작은 만토바에 위치한 팔라초 두칼레의 신혼의 방 천정에 그려져 있다. 벽면 전체가 벽화로 장식되어 있는 가운데 천정에 그려진 벽화는 하늘로 열려 있는 건축 구조를 모방하고 있으며 그곳을 통해 그림 속 인물들이 방안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연출되어 있다.르네상스가 발명한 원근법은 수백 년 동안 서양미술사가 지켜온 절대적인 원칙과 같았다. 그런데 원근법을 통해 역으로 추론해 낼 수 있는 것은 서양미술사를 움직여 온 가장 중요한 미학적 원리가 시각적으로 경험한 세계에 대한 모방과 재현이라는 사실이다. 그려진 대상이 얼마나 실재의 것에 닮아 있는가, 얼마나 완벽하게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있는가하는 것이 미술의 중요한 원칙으로 작동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원칙과 같았던 원근법의 지배가 느슨해진 것은 19세기 중반이다. 보고 있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경험 그 자체를 그리면서부터 미술은 새로운 미학적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원근법적 공간이 하나의 시점으로 대상을 보았다면 여러 시점이 동시에 존재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심지어 시점이라는 것이 무의미한 작품까지 나타나게 된다.기계적으로 세계를 완벽하게 모방해 내는 카메라의 발명은 미술가들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고, 미술은 관념화되고 개념화 되었다. 그렇다고 원근법의 역사가 그대로 끝이 난 것은 아니다. 본다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이상, 비록 고전적 원근법은 고리타분한 유물이 되어 버렸을 지라도 미술가들은 원근법과 대결하며 새롭게 보는 방식들과, 존재하지만 볼 수 없었던 세계를 작품을 통해 제시해 주고 있다./김석모 미술사학자

2020-04-13

왜 프랑스 파리의 미술가들은 도시 풍경과 사람을 그렸을까?

현대미술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학자들마다 다소 이견은 있을 수 있겠지만 대체로 19세기 중반으로 의견이 모아진다. 이러한 주장에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근거들이 있다. 우선 사회적 측면에서 프랑스혁명과 시민사회의 탄생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혁명과 현대미술, 무슨 관계가 있을까? 혁명 이전 유럽은 기독교가 지배하던 귀족사회였다. 종교권력과 세속권력이 대립과 반목 혹은 손을 잡고 민중을 지배하던 계급사회였다. 이런 사회에서 미술을 소비할 여력이 있는 사람들은 귀족이나 교회 밖에 없었다. 일반 백성들에게 문화 향유라는 개념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혁명이 해방시킨 것은 계급에 구속돼 있던 민중들만이 아니었다. 미술도 함께 해방이 됐다. 오랫동안 미술은 귀족들의 화려한 대저택 벽면을 장식했다. 화가들은 무슨 내용의 그림을 그렸을까? 겉으로나마 귀족들이 숭상하던 도덕적이고 고상한 가치를 신화의 위대한 인물들에 투영한 그림들이 그려졌다.혁명 이후 여전히 고전적 내용을 담은 그림들은 그려졌지만 예전엔 존재하지 않던 종류의 그림들이 사람들을 당혹케 했다. 고전미술에서 벗은 몸으로 그림 속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여신들뿐이었다. 그런데 몇몇 화가들이 이런 금기를 깨트려 버린다. 거리를 오가며 보았을 법한 여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서 그림으로 그려졌을 때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여신들조차도 나체로 등장할 때는 부끄러워 그런지 살짝 시선을 피하고 있건만, 이 현실의 여인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감상자와 시선을 교환했다. 에두아 마네의 ‘올랭피아’ (1863)를 떠올리면 된다. 마네의 ‘올랭피아’가 1863년 파리에서 전시돼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면,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은 같은 해 살롱전에 출품돼 전시되자마자 나폴레옹3세가 구입해 갔다. 그 시대 사람들의 취향에 적합했던 것은 논란의 여지없이 카바넬의 그림이었다. 그런데 우리 중 누가 그 유명했던 화가 카바넬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가? 반면 우리 중 누가 그렇게 형편없는 그림을 그린 마네를 기억하지 못할까? 이것이 바로 미술사의 역설이다.미술이 사회적 통념과 미술은 이래야한다는 고정된 가치로부터 해방되면서 미술가들에게 작품을 위한 주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바로크와 고전주의 미술의 중심이자 현대미술이 꽃피운 파리에서 화가들이 유독 자주 화폭에 담았던 주제가 있다. 바로 파리의 거리 풍경이다. 이 또한 시민사회의 태동과 근대적 도시의 탄생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파리의 모습은 현대미술이 태동했던 바로 그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1853년에서 1870년까지 진행된 이른바 ‘오스만 남작의 파리 재개발’(Haussmann’s renovation of Paris)이 지금의 낭만적인 도시 파리를 탄생시켰다. 그 이전의 파리는 좁은 도로에 땅은 질퍽이고 곳곳에서 악취가 풍기는 인구가 밀집된 비위생적인 도시였다. 오스만 남작은 넓은 신작로를 닦았고 도시 곳곳에 시민들이 쉴 수 있는 공원을 조성했다.그 뿐만이 아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촌 사람들이 도시로 이동을 하며 전에 없던 사회 현상이 관찰된다.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새로운 계급이 생겨났다. 새로운 교통수단이 시간관념을 바꿔 놓았고 삶의 속도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도시와 도시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보다 미술가들의 흥미를 끌만한 것이 또 무엇이 있었겠는가? 넓게 뻗은 길 위에 펼쳐진 도시풍경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미술가들은 매일 같이 이러한 사회적 변화들을 직접 경험했고 이를 작품으로 담았다. 미술사는 현대미술이 시작된 1850년 무렵의 이 새로운 미술에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2020-03-23

화가 윌리엄 터너가 남긴 마지막 유언

미술이 본격적으로 제도화된 것은 도제식으로 이루어지던 미술교육이 국가가 설립한 미술학교로 편입되면서부터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1648년 루이 14세의 명으로 세워진 프랑스 왕립미술학교를 꼽을 수 있다. 프랑스를 모범으로 삼아 유럽 각 국가에서 왕립미술학교들이 생겨나는데 1744년에는 스페인 마드리드, 그 보다 조금 늦은 1768년 영국 왕립미술학교가 세워졌다. 왕들이 미술학교를 설립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국가의 정치적 이념과 권력을 찬양하는 미술가들을 체계적으로 길러내기 위해서였다. 국가 권력이 미술교육을 주도하면서 상상력과 창작력은 정해진 규칙과 규범 내에서만 허용되었다. 그림들은 등급에 따라 나누어졌는데 그것이 지금 우리도 알고 있는 ‘역사화’,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 그리고 ‘풍속화’ 같은 개념이다. 신화나 성서 혹은 역사적인 인물들의 위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역사화는 가장 훌륭한 그림이고, 화가로 성공을 거두고 싶다면 역사화를 그려야 했다.역사화가 숭상되던 시대에 17세기 프랑스 바로크 화가 니콜라 푸생과 클로드 로랭은 한 폭의 자연을 담은 풍경화로 최고의 명성을 떨쳤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 두 사람은 역사화와 풍경화를 절묘하게 조화시킴으로써 새로운 형식의 회화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분명 화면을 지배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인데 그 안에 신화나 성서의 이야기가 눈에 띨 듯 말 듯 전개된다. 푸생과 로랭의 역사적 풍경화 전통은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로 이어졌다.터너는 1775년 런던 코벤트가든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터너는 작품 활동을 했던 60여 년 동안 쉼 없이 풍경화를 탐구했고, 추상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그 당시 이미 대상성을 배제하고 빛과 색채를 실험했다. 표현이 너무나 극단적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동시대 미술가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너 탁월함에 대해서는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열네 살의 나이로 런던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했고, 스물네 살에는 벌써 왕립미술원 준회원의 자격을 얻었으며, 역대 최연소인 스물여섯에 정회원이 되었다는 사실이 터너의 실력을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화가로 경력을 쌓아가던 초창기에 터너는 수채화를 즐겨 그렸다. 수채화 또한 유화 못지않게 완결된 구성의 대규모 작품으로 탄생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픽처레스크한 터너의 풍경화는 큰 인기를 얻게 된다. 미술학교를 졸업하던 스무 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유화작품을 그리기 시작했고, 1802년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들을 여행한 것이 터너의 작품 세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원래부터 풍경화를 즐겨 그렸던 터너는 유럽에서 가장 경관이 빼어난 알프스를 방문했다. 파리의 미술관에서 푸생, 루벤스, 티치아노를 포함한 거장들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풍경과 사건의 관계, 경험과 재현 그리고 색채에 대한 연구의 깊이를 더했다.거장들의 작품을 직접 경험한 터너는 회화에 대한 또 다른 경지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림은 평평한 화면에 색을 칠한 것이고,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빛에 의해 드러나는 실재 세계를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빛과 색채의 연구가 거듭될수록 그림은 더욱 단순해지고 추상적으로 변한다. 그렇게 그려진 터너의 그림을 두고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그림”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일평생 독신으로 지낸 터너는 자신의 정신과 열정을 오로지 그림에만 쏟았다. 1845년 왕립미술원의 원장 직에 오른 터너는 1851년 12월 죽음을 맞이해 런던 세이트 폴 대성당에 영원히 잠들었다.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미술에 대한 터너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터너는 자신이 초기에 그린 두 점의 풍경화를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클로드 로랭의 풍경화 두 점과 나란히 전시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미술사 최고의 거장들과 겨루고자 했던 것이다. 터너의 회화적 성취는 프랑스 인상주의자들을 매료시켰을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의 태동에 혁혁한 기여를 했다./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김석모

2020-03-02

도시와 역사를 기억하는 기념조형물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는 고풍스러운 건물들로 둘러싸인 베벨광장(Bebelplatz)이 있다. 이 광장이 조성된 것은 아직 독일이라는 나라가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던 18세기로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2세의 명에 따라 궁정건축가 게오르그 벤첼스라우스 폰 크노벨스도르프가 만들었다. 광장주변에 있는 왕립오페라극장, 성 헤드비히 대성당, 현재 훔볼트 대학 본관으로 이용되는 하인리히 왕자궁과 옛 왕립도서관도 이때 함께 지어졌다.그렇다면 광장의 이름 베벨은 어디서 온 것일까? 베벨은 독일 사회주의 정치인의 이름이다. 원래 이 광장은 오페라하우스 광장(Platz am Opernhaus)으로 불렸는데 1947년부터 베벨의 이름을 따 베벨광장이라 불리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베벨광장 정중앙 바닥에는 가로 세로가 120cm나 되는 꽤나 큰 규모의 유리창이 나있다. 유리창 아래로 비어 있는 공간이 나타나고 벽면에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하얀색의 책장들이 설치돼 있다. 도대체 이게 뭘까?발아래 텅 빈 공간과 비어 있는 책장들은 1933년 5월 10일 늦은 밤 이 곳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조형물이다. 나치는 정권을 장악한 이후 ‘비독일적인’ 예술과 사상에 대한 대대적인 말살정책을 폈다. 그날 밤 나치즘에 경도된 수천 명의 대학생들은 2만 권이 넘는 책들을 불태웠고, 수만 명의 시민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유대인 학자와 저자들의 책들과 나치를 비판한 지식인들의 저서들도 타오르는 불길에 던져졌다. 문화와 예술 그리고 사상과 학문의 중심지였던 베를린의 정신도 책들과 함께 잿더미로 변해버렸다.나치의 잔인한 정신 학살이 자행되자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 야만적 행위를 조롱하는 ‘분서(die Bucherverbrennung)’(1938)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했다. 어떤 시인이 태워질 도서 목록에 자신의 책이 빠진 것을 보고 분노하며 포함시키라 항변하는 역설적인 내용이다. 브레히트의 시는 실화에 근거를 둔 것으로 오스카 마리아 그라프(1894∼1967)라고 하는 작가가 실제로 분서사건이 있은 후 자기의 책들이 금서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분노하여 ‘나를 불태우라’(Verbrennt mich)는 탄원의 글을 신문에 기고한 일이 있다.책들이 화염에 싸여 잿더미로 변한, 다시 말해 인류의 정신이 광적인 이념에 유린당한 현장에 기념조형물을 설치한 사람은 유대인 미술가 미햐 울만(Micha Ullman)이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출신의 울만은 오가는 사람들이 발아래 유리창을 통해 잿더미로 변해 땅 속에 묻혀 사라져 버린 정신을 텅 빈 공간, 텅 빈 책장으로 표현했다. 작품의 제목은 ‘도서관’이다. 어둠이 깔리면 땅 속 비어 있는 ‘도서관’으로부터 하얀 불빛이 마치 나치의 그날 밤을 피어올랐던 불길처럼 흘러나온다. 책은 불에 탔고 지식인들은 추방을 당했다. 남은 것은 정적과 침묵뿐이다.울만의 ‘도서관’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기념조형물과는 사뭇 다르게 보인다. 보통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형물들은 웅장한 모습을 뽐내며 넓은 공간을 차지한다. 하지만 울만의 ‘도서관’은 그렇지 않다. 드러나기 보다는 조용히 도시 속에 침전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 상징성과 호소력은 더욱 강하다. 울만의 작품 가까이 바닥에는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쓴 비극 ‘알만조르(Almansor)’의 대사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책을 태우는 자, 사람도 불태울 것이다. (Wer Bucher verbrennt, verbrennt auch Menschen)”/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2020-02-03

서양미술사 한 눈에 들여다보기

미술이 순수하게 창작자의 미학적 관념을 담고 있다는 생각은 아주 현대적인 발상이다. 미술가의 자율성이라는 것도 역시나 마찬가지이다. ‘중세’의 천년을 두고 보자면 미술의 역할은 보이지 않는 신의 세계를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형태와 색을 통해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고 미술의 기능도 달라진다. 이제 미술은 믿고 있는 것을 그리기보다 보고 경험한 것을 묘사하기 시작한다. ‘바로크 시대’의 미술은 권력과 권위를 찬양하는 수단으로 적극 이용되었다. 바로크의 색채가 그토록 화려하고, 바로크의 형태가 그토록 왜곡되어 현란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바로크 시대에 접어들어 정부가 통제하는 미술학교가 생겨났다. 루이 14세의 명에 의해 왕립미술원(1648)이 설립되었다. 프랑스 왕립미술원은 국가의 통제 하에 국가를 위한 예술가를 길러내기 위한 최초의 제도적 교육기관이었다. 프랑스를 모범으로 스페인에 왕립미술원(1744)이 세워졌고, 얼마 후 영국 역시 왕립미술원(1768)을 설립해 미술가들을 길러냈다.미술이 권력의 통제를 받으면서 자율성 보다는 통제하는 주체의 목적에 적합한 이론적 장치들이 규정과 규칙이 되어 이른바 미술의 ‘모범’이 생겨났다. 주어진 규범과 틀을 벗어나서는 미술가로서 성공할 가능성이 지극히 낮았다. 아이러니 한 것은 가장 경직된 틀로 미술가들의 상상력을 제한했던 시대가 ‘신고전주의’였다는 것이다. 신고전주의는 혁명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유럽에 유행했던 양식이다. 절대왕정, 귀족문화, 계급주의를 대변하는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를 지나 시민사회로의 대변혁이 일어났음에도 신고전주의가 만개한 것은 아주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신고전주의 미술은 영웅들의 위대한 이야기를 거대한 화면에 서사적으로 담아낸다. 작품의 주제가 충분히 드러나도록 웅장해야 하지만, 표현에 있어서 절제와 논리성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 신고전주의 영웅들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당하더라도 개인의 감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J.J.빙켈만이 고대 ‘라오콘 군상’에서 발견했듯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을 지니도록 신고전주의의 영웅들은 그려야 했다.인간의 감정을 발견한 시대는 ‘낭만주의’이다. 낭만주의 시대에 접어들자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며 자유분방한 미적 세계를 탐구한 미술가들이 등장했다. 대체로 역사가 그렇듯 미술의 역사 또한 권력의 자기 증언과 큰 맥을 함께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현대미술에 가까워질수록 미술사의 변혁은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서 이루어진다. 고전주의자들이 안정적이고 균형 잡힌 구도와 색채를 사용했다면 급진적 낭만주의자들은 자유롭고 속도감 있게 붓을 움직였다. 작품의 주제도 그렇다. 잘 알려진 신화보다는 잊힌 북방의 신화들을 다시 불러내거나 신비로운 오리엔트의 이국적 여인들을 작품에 담아낸다. 또 어떤 낭만주의 미술가들은 숭고한 자연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내면을 성찰하게 한다.낭만주의가 발견한 인간의 감정은 미술이 그 자체만으로 미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자각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이 본다는 것과 그린다는 것에 대한 다양한 미학적 실험으로 이어지면서 현대미술의 문을 열어 주었다. 이제 그 누구도 미술에게 권력에 충성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이제 그 누구도 미술은 이래야 하는 것이라며 절대적 가치와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미술은 과연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2020-01-20

배고픈 예술가가 먹은 1.5억 짜리 ‘바나나’

1억5천만 원은 꽤나 큰돈이다. 바나나는 꽤나 맛있는 과일이다. 그런데 아무리 맛있다 손 치더라도 바나나 한 개의 가격이 1억 5천만 원은 기가 막힐 정도로 비싸다. 인플레이션이 극심해 빵 한 조각을 사기 위해 리어커 가득 돈을 싣고 가야하는 어느 나라의 웃픈 이야기도 아니고 꾸며낸 허구는 더더욱 아니다.며칠 전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열린 ‘아트 바젤 마이애미’에서 세계적인 갤러리 페로탱(Perrotin)은 덕트 테이프로 벽에 고정된 바나나 하나를 12만 달러에 판매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바나나는 그냥 바나나가 아니라 이탈리아 출신의 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의 설치작품이다. 그런데 그 바나나를 행위 예술가 데이비드 다투나가 먹어 치워버린 것이다.이유가 가관이다. 배가 고파 먹었다는 것이다. 바나나가 1억이 넘는다는 것도 코미디이고, 그것이 고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먹어 버린 것도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카텔란의 바나나에는 ‘코미디언’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행위예술가가 바나나를 먹은 행위는 ‘헝그리 아티스트 퍼포먼스’로 둔갑했다.미술가나 갤러리 혹은 작품을 구매한 소장자는 1억 5천만 원을 삼켜버린 배고픈 행위 예술가를 고발은커녕 비판하지도 않았다. 이들이 서로 짜고 이 같은 해프닝을 벌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카텔란이라는 미술가는 원래부터 괴짜로 정평이 나 있다. 작가나 갤러리 입장에서도 어차피 바나나는 썩어 버려질 것이니 누가 그것을 조금 일찍 먹어 버렸다고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한다. 카텔란의 바나나는 뒤샹의 유명한 남성용 변기 작품 ‘샘’(1917년)처럼 예술적 본질을 전달하기 위한 매개체 혹은 도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고액으로 작품을 산 구매자는 한 순간 돈을 날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개념미술에서는 이른바 ‘진품증서’가 중요하다. 전통미술과 달리 증서의 소유가 작품의 소유를 의미한다. 개념미술은 말 그대로 개념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작품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매개적 역할을 하는 물질은 큰 의미가 없다. 따라서 배고픈 행위 예술가가 바나나를 먹었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가 먹은 것은 작품이 아니라 그냥 바나나일 뿐이고, 그 바나나를 먹어 치웠다고 작품의 본질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꼭 말장난 같다.카텔란은 규칙과 규범을 깨트리는 ‘말썽꾼’으로 유명하다. 1992년 밀라노에서 개최된 그룹전에 출품할 작품이 떠오르지 않자 경찰서에 작품이 도난됐다고 신고를 하고 접수증을 액자에 넣어 전시했다.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히틀러나 운석에 맞아 쓰러진 교황의 모습 등 카텔란의 작품들은 기꺼이 상식에서 벗어난 내용을 묘사한다.2016년에는 103㎏의 진짜 황금으로 만든 변기를 만들었다. 몸통부터 손잡이까지 모두 황금이다. 사용된 금값만 47억원, 작품가는 70억 원이 넘는다. 올해 황금변기는 전시를 위해 전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생가 블레넘궁에 설치됐고, 관람객들은 3분 동안 황금변기에서 볼일을 볼 수 있도록 허락됐다. 부에 대한 탐닉과 집착을 표현한 황금변기에는 ‘아메리카’라는 제목이 붙었다. 그런데 어느 주말 새벽 누군가 저택에 침입해 황금변기를 떼어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작가의 화려한 전력 때문에 작품이 정말 도난당한 것인지 의심되지만 아직 황금 변기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하다.권력과 권위, 관습 따위를 서슴없이 하찮은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카텔란은 스스로를 “태생부터 멍청하다”고 소개한다. 멍청한 존재로 위장해 권위와 권력을 엎어버리면 폭소를 유발한다. 지극히 카텔란 다운 수사학이다. 그의 작품들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언어로 관람객들에게 유쾌하게 말을 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또 다시 관객들을 바보로 만들어 버릴지 은근히 기다려진다./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2019-12-23

분단의 상징에서 통일과 평화의 상징으로

독일의 수도 베를린. 그곳에는 20세기 유럽의 역사를 가장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브란덴부르크 문이 있다.한때 베를린을 동과 서로 나누었던 이 문은 독일 분단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이념으로 충돌했던 두 세계의 분열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런데 브란덴부르크 문의 역사적 의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동독 사람들이 자유를 찾기 위해 넘어야 했던 곳도 브란덴부르크 문이었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가슴 벅찬 역사의 현장도 다름 아닌 이곳 브란덴부르크 문이었다.브란데부르크 문의 역사는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이곳은 베를린으로 들어오는 열여덟 개의 관문들 중 하나였는데 드나드는 마차로부터 세금을 걷는 곳이었다.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2세의 명에 따라 1793년경 지금의 모습으로 브란덴부르크 문이 만들어 졌다. 건축가 카를 고트하르트 랑한스는 고대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관문 ‘프로필라이아’(Propylaia)에서 영감을 받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브란덴부르크 문을 만들었다. 아마도 건축가는 이 문으로 들어가 내딛는 베를린이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였던 고대 아테네에 버금가는 도시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브란덴부르크 문 꼭대기에는 네 마리 말이 끄는 승리의 여신 청동 조각상 ‘승리의 사두마차’가 장식으로 올라가 있어 기품 있고 위엄 있는 풍모를 자랑한다. 그런데 이 위품 있는 문을 통과한 개선장군은 프로이센의 왕이 아니라 프랑스 ‘침략자’ 나폴레옹이었다. 1805년 나폴레옹은 체코 남동부 아우스터리츠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에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듬해 10월 예나와 아우에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으로부터 승리를 거둔 나폴레옹은 군대를 이끌고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해 베를린 궁으로 입성했다. 나폴레옹은 전리품으로 브란덴부르크 문을 장식하던 청동 조각상을 끌어내려 파리로 가져가 루브르에다 전시를 했다. 프로이센에게 이보다 더 굴욕적인 일은 없었을 것이다.승리의 청동상을 약탈당한 브란덴부르크 문은 그 후 8년 동안이나 초라한 모습으로 베를린을 지키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의 침략을 피해 동쪽 끝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칼리닌그라드)로 도망했던 프로이센 왕실이 전력을 가다듬어 러시아와 연합군을 형성해 1813년 베를린을 수복하고서야 빼앗겼던 승리의 사두전차는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1933년 1월 30일 독일 공화국 총리로 임명된 히틀러는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해 독재체제를 수립했다. 2만5천명의 나치당원들은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횃불 퍼레이드를 펼치며 히틀러에 열광했다. 그리고 악마가 일으킨 잔혹한 전쟁의 결과 독일은 동서로 분열되었다. 1953년 동베를린에서는 소련의 동유럽 지배를 반대하며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소련군은 탱크를 투입해 진압했다. 1961년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쌓기 시작하자 서독 시민들이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몰려나와 항의했다. 동독 정부는 브란덴부르크 문의 국경 검문소를 폐쇄했고 28년 동안 이 문은 열리지 않았다.1963년 냉전의 불안 속에 떨고 있는 시민들을 격려하기 위해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베를린을 찾았고 1987년 레이건 대통령은 같은 장소에서 소련 서기장 고르바초프를 향해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원한다면 이 문을 열고 장벽을 허물라고 외쳤다. 1989년 11월 9일 기적처럼 장벽은 무너졌고 2년 뒤 나뉘었던 독일은 다시 하나가 되었고 분단의 문은 통일의 문이 되었다./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김석모

2019-12-02

네덜란드에 가면 유독 눈에 띄는그림들

튤립과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 산이나 낮은 구릉조차도 찾아보기 어려운 이곳에서는 땅과 바다의 높이가 거의 동일하다.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바다는 삶의 터전임과 동시에 극복해야할 불리한 자연조건이었다. 바다의 물이 넘쳐 낮은 땅들을 삼켜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에 범람한 물들을 퍼내기 위해 발달한 것이 풍차이다.땅이 낮다보니 유독 네덜란드의 하늘은 높아 보인다. 하늘에는 언제나 뭉게구름이 장관을 연출한다. 구름 사이를 비집고 부서지는 햇빛은 네덜란드만의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그래서 그런지 네덜란드의 미술관을 거닐다 보면 유독 눈에 띄는 종류의 그림들이 있다. 바로 풍경화, 인물화 그리고 풍속화이다. 사실 전통 회화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게 평가되었던 장르는 ‘역사화’이다. 성서나 신화 혹은 역사적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역사화라 부른다. ‘위대한 사람들의 위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역사화는 주로 교회나 왕실 혹은 귀족들의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다. 그런데 플랑드르로부터 독립해 세워진 네덜란드에는 왕이나 귀족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이후 칼뱅주의가 널리 전파되면서 가톨릭에 반대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성화로 교회를 장식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더욱이 네덜란드의 집들은 협소한 땅에 지어졌기 때문에 거대한 크기의 그림을 걸 만큼 충분한 공간이 없기도 했다.이러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주문을 받아 작품을 제작했던 화가들은 생계를 위협받게 된다. 종교화를 주문할 교회도 없었고, 역사화로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과시할 왕족이나 귀족도 없었기 때문이다. 미술가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미술시장을 개척해 간다. 주문 생산 방식에서 벗어나 먼저 작품을 제작해 구입할 사람을 찾기 시작한다. 어떤 미술가들은 자신들의 그림을 걸어두고 판매하는 상점을 경영하기도 했다.17세기의 네덜란드를 가리켜 ‘황금시대’(golden age)라고 부른다. 새로운 선박의 개발과 항해술의 발달로 대서양의 지배권을 차지한 네덜란드는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땅이 좁았기 때문에 네덜란드에서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투자가 튤립에 집중되면서 튤립 알뿌리 하나가 집 한 채의 가격만큼 치솟기도 했다. 이 무렵 크기는 작지만 고가였던 그림이 활발하게 거래되면서 미술시장도 빠르게 발달하게 되었다.상업이 발달했던 네덜란드에는 ‘길드’라는 동업조합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러한 길드들이 미술가들에게는 중요한 고객이었다. 길드 회원들의 모습을 담은 단체 초상화 주문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렘브란트의 그 유명한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632년)나 ‘야경’(1642년)도 길드에서 주문한 단체 초상화였다.네덜란드에서 발달한 또 다른 회화 장르는 풍경화이다. 화가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그림에 담았다.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네덜란드 풍경화의 특징은 나지막하게 뻗어 있는 지평선과 넓은 하늘 그리고 그곳에 스펙터클을 연출하는 변화무쌍한 구름이다. 바다를 끼고 살았던 네덜란드 화가들이 잘 그렸던 풍경의 모티브 중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바다풍경이다. 물 위에 유유히 떠 있는 배를 그렸는가 하면 폭풍에 곧 뒤집힐 듯한 혼동의 순간도 그림으로 남겼다.네덜란드 회화하면 섬세한 세부묘사와 해학이 넘치는 풍속화로 유명하다. 화가 피터르 브뤼헐(1525∼1569)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17세기 활동했던 요하네스 베르메르와 얀 스텐과 같은 화가가 풍속화가로 명성을 떨쳤다. 네덜란드에서 풍속화가 발달한 것에도 이유가 있다. 풍속화는 단순히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항상 근면이나 절제 혹은 도덕적 삶을 독려하는 경고나 교훈적 이야기가 숨어있다. 종교개혁 이후 ‘직업소명설’을 주장하며 근면과 성실 그리고 도덕적 삶을 강조하던 칼뱅주의가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미술은 시대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아무리 미술가들이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이 미학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하더라도 운명처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그들이 속한 시대이다. 시대와 역사라는 조건들을 통해 그 예술적 산물인 작품들을 바라보면 보이지 않았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고 모호했던 시대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다가오기도 한다./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2019-11-04

미술을 정신작용으로 상승시킨 지오토

서양미술사의 지각변동을 일으킨 가장 위대한 거장들을 꼽는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화가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1266∼1337)의 이름이 거론될 수밖에 없다. 어떤 미술사 책을 열어보더라도 이구동성으로 그의 업적을 칭송한다. 중세를 살면서 중세를 극복했기 때문이다. 지오토의 위대한 회화적 발견이 있었기 때문에 르네상스가 꽃피울 수 있었다고 말하더라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지오토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베네치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북부 이탈리아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 벽화가 그야말로 일품이다. 이 예배당을 건립한 사람은 엔리코 스크로베니인데 아버지 레지날도 스크로베니는 아주 유명한 고리대금업자였다. 얼마나 유명했으면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도 등장할 정도였다. 아들 엔리코는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불안했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지옥에 떨어졌다면 조금이라도 지은 죄가 감해지기를 기원하면서 예배당을 지었다. 그리고 최고의 화가 지오토를 초빙해 내부 전체를 프레스코화로 장식하게 했다.지오토는 서로 마주하고 있는 양 측면의 벽면을 각각 네 개의 구획으로 나눴다. 상단부에는 마리아의 일생을 중간과 그 아랫단에는 그리스도의 일생을 그리고 가장 낮은 단에는 미덕과 악덕을 상징하는 알레고리를 그려 넣었다. 가장 인상적이면서 화가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은 출입문 상단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이다. 이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미술가들이 적지 않은데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최후의 심판을 구상하면서 지오토를 인용한 사실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스크로베니 예배당 벽면을 장식하면서 화가 지오토는 ‘마리아의 일생’과 ‘그리스도의 일생’을 큰 주제로 택했다. 넓은 벽면을 구획 짓고 어떻게 화면을 채울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성서나 문헌이 전해주듯 시간적 순서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몇몇 장면들을 부각시킬 것인가? 지오토의 그림이 장식할 공간이 다른 곳이 아닌 교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화가도 그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목적성이 분명한 공간에는 분명한 목적성을 띤 작품 구성이 요구된다. 수직 4단으로 구성된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측면 벽면에 그려진 상하 그림들 간에는 흥미롭게도 주제의 병렬적 관계가 숨어 있다. 쉽게 말해 벽면에 들어갈 장면을 선택하면서 화가는 의도적으로 의미상 서로 연결되는 장면들을 위아래로 배치한 것이다. 예컨대 ‘최후의 만찬’ 바로 위에 ‘예수의 탄생’이 나타난다.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까? 예수는 말구유에서 태어났다.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고 가장 낮게 인간으로 이 땅에 왔다는 뜻이다. 예수의 이러한 탄생은 미래에 겪게 될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을 예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한 마지막 저녁 식사 이후에 그 험난한 고난이 시작된다. 두 그림 사이에는 이러한 의미적 관계성이 존재한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탄생은 신의 ‘성육화’(incarnation)를 뜻한다.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났다는 말이다. 일종의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유사한 변용이 최후의 만찬에서도 일어난다.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성찬식의 종교적 의미를 떠올려 보면 된다.지오토가 서양미술사를 움직인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로 손꼽힐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순히 자연을 모방하는 탁월한 기술력 때문은 아니다. 주어진 텍스트를 시각화하면서 서로 간에 흐르고 있는 내적 관계성을 만들 줄 알았기 때문이다. 미술이 기술이기만 했던 시대에 미술을 정신작용으로 상승시켰다는 것이 다른 미술가들과 견줄 수 없는 지오토 디 본도네의 탁월함이다./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2019-10-14

로마네스크 건축의 완성 佛 클뤼니 수도원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의 흔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프랑스 중동부에 위치한 부르고뉴 지방의 시골마을 클뤼니(Cluny)를 찾아가야만 한다. 오늘날 인구가 채 오 천명이 되지 않는 이 시골 마을이 과거 한때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 혹은 ‘제2의 로마’로 불렸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 클뤼니의 모습에서 과거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이곳이 한때 세계 기독교의 중심지였다는 것과 제2의 로마로 불렸다는 것은 모두 사실이다.때는 카롤링거 왕조가 막을 내리면서 서유럽사회의 새로운 정치적 지형이 형성되던 시기였고, 사회는 전반적으로 불안정 하였다. 이 시기 교회와 성직자의 타락상 또한 극에 달해 있었다. 성직을 돈으로 사고 파는 행위는 너무나 공공연한 일이었고, 성직자 임명권을 둘러싸고 왕과 교황은 서로 첨예하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910년 열두 명의 수도자들이 마콩강에서 멀지 않은 경건공 기욤(875∼918)의 땅 클뤼니에 들어왔다. 이들은 성인 베네딕트의 규율에 따라 살기위해 수도원을 짓기 위해 이곳으로 이주한 것이다. ‘Ora et Labora’(일하고 기도하라)는 베네딕트 수도회의 규범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부터 그 위대한 수도원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910년 처음 문을 연 클뤼니 수도원은 개혁의 여파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수요에 맞춰 수도원 교회를 증축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개축공사가 이루어졌다. 건축사에서는 원래의 교회와 훗날 개축된 부분을 구별하기 위해 클뤼니I, II 그리고 III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클뤼니I은 910년 수도원이 처음 설립되었을 때의 모습을 가리킨다. 981년 마이올루스(Maiolus) 수도원장 하에 개축된 건물을 클루니II, 위고(Hugo)가 수도원장을 지내던 1089년에 완성된 모습을 클뤼니III이라고 부른다.클뤼니 II는 상하로 긴 라틴식 십자가형의 기본 구조를 지니는 3랑식 바실리카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제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좌우로 가로지르는 익랑을 마주한다. 익랑에는 외부로 출입이 가능한 문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제단방향으로 밀폐된 느낌의 작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이곳을 통하여 제단이 있는 내진으로 접근할 수 있다.클뤼니 III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교회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는 것이다. 크기가 커짐에 따라 내부구조에도 큰 변화를 보이는데, 우선 3랑이었던 클뤼니 II에 두 개의 측랑이 더 붙으면서 5랑이 되었다. 천장의 구조에도 변화가 있다. 원래는 신랑 측랑 모두에 평평한 나무 패널이 천장을 덮고 있었는데, 이제 측랑에는 ‘교차형 궁륭’이 나타난다. 클뤼니 II는 하나의 익랑을 가졌지만 클뤼니III에서는 익랑 하나가 더 설치되어 십자가에 팔이 모두 넷으로 늘어났다. 구조적으로 가장 혁신적인 변화는 후진의 외벽에 모두 다섯 개의 소예배당이 마련되었다는 것과 내진과 후진사이를 지나다닐 수 있는 ‘주보랑’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클뤼니 수도원은 종교적 쇄신으로 유럽 곳곳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클뤼니 III이 보여주는 건축구조는 프랑스의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 그리고 더 나아가 일 드 프랑스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고딕건축의 근간을 마련해 주었다. 클뤼니 교회는 1790년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과거의 위용과 웅장하고 장엄했던 모습은 폐허로 변해버렸고 지금은 그 흔적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을 뿐이다./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2019-09-16

세계가 주목하는 전시가 포항에서!

1957년 9월 26일 목요일 저녁, 서독의 도시 뒤셀도르프(Dǖsseldorf)의 어느 공장건물에서 미술전시회가 열렸다. 작품 전시를 위한 격조 있는 공간도 아니었고, 격조를 차릴 만큼 유명한 미술가들이 참여한 것도 아니었다. 1950년대 후반, 2차 세계대전으로 초토화되다시피 한 독일에서 미술을 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사회적으로 비상식적인 일이었는지 모른다. 예술이 언제 한 번 이라도 상식적인 적이 있었느냐마는, 정말이지 그 시절에 미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더더욱 아무런 존재감도 없던 20,30대 젊은 미술가들에게는 어떠한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젊은 미술가들은 작품 활동을 이어갈 방법을 모색하던 중 조건이나 형식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전시형태를 고안해 낸다. 아무 곳이나 전시장이 될 수 있었고, 원한다면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는 그런 전시회였다. 격식을 차린 개막식 따위는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서서히 음악 소리가 커졌고, 맥주를 든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파티의 시작이 곧 전시회의 시작이었고, 파티가 끝이 나면 전시도 함께 막을 내렸다. 미술가들은 이 전시를 ‘저녁전시’(Abendausstellung)라 불렀고, 이곳에서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미술운동 ‘제로’(ZERO)가 태어났다.‘제로’는 1950년대 후반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태동한 ‘국제미술운동’이다. 주축이 되었던 것은 독일 출신의 미술가 하인츠 마크, 오토 피네, 귄터 위커이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이후 미술의 중심은 유럽에서 뉴욕으로 넘어갔다. 유럽에서 망명한 미술가들의 영향 아래 잭슨 폴록, 바넷 뉴먼, 마크 로스코 등 이른바 ‘추상표현주의’ 미술가들이 등장해 미국미술을 이끌어 갔다. 1960년대 초 미국에서는 소비문화와 상업주의적인 미술경향을 반영하는 ‘팝아트’가 유행했다. 유럽에서 문화와 역사를 상징하면서 특별한 지위를 누렸던 미술작품은 이제 대량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상품이 되었다.이 무렵 유럽 전역에 걸쳐 전통미술과 결별을 선언한 전위적인 미술가 그룹이나 미술운동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스페인에서는 ‘에키포 57’(Equipo 57)가, 파리에서는 누보 레알리즘(Nouveau Réalisme)이, 이탈리아에서는 ‘그루포 엔’(Gruppo N) 그리고 독일 뒤셀도르프에서는 ‘제로’가 태동했다. 당시 유럽의 미술가들에게는 극복해야만 했던 두 가지 시대적 과제가 있었다. ‘전쟁으로 단절되고 왜곡된 전통미술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하는 것과 ‘상업적으로 퇴색되어버린 미술의 본질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진취적인 미술가들의 다양한 미학적 시도들 중 연속성을 가지며 국제적으로 가장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 제로이다.1958년 마크와 피네는 ‘제로’라는 제목의 미술 매거진을 출판했다. 숫자 ‘영’(0)을 뜻하는 제로에는 과거에 속박되지 않는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했던 젊은 미술가들의 미학적 염원이 담겨 있다. 20세기 초 유럽은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을 경험했다. 전쟁이 보여준 반인륜적 학살과 파괴는 모든 것을 일순간 앗아가 버렸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그로 인한 상처와 공포는 쉬 잊히지 않고 집단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모든 것이 파괴된 현실, 그렇다고 전쟁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려놓을 수 도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실존적 빈사상태에서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무전제적으로 초기화(reset)하여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고자 한 미학적 태도가 바로 제로라는 말에 담겨 있다.미술가와 미술이론가들의 글이 수록된 제로 매거진은 1958년과 1961년 걸쳐 모두 세 차례 발간되었으며, 개별 호의 출판에 맞춰 국경을 뛰어넘는 미술가들로 구성된 전시회가 함께 진행되었다. 출판을 매개로 국제적인 미술가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이다. 전시와 행위예술, 관람객들이 참여하는 이벤트 등 당시로서는 너무나 진보적인 형식들이 과감하게 실험되었다. 1966년 제로의 활동이 공식적으로 종결될 때까지 유럽과 아메리카, 아시아 대륙의 10여개 나라에서 온 40여명 이상의 미술가들이 제로의 활동에 동참했다. 특히 이브 클라인, 피에로 만초니, 루치오 폰타나, 쿠사마 야요이 등과 같이 국제적인 명성을 떨쳤던 미술가들은 제로가 태동하는데 결정적인 미학적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다.제로에 참여한 미술가들에게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예술과 기술이 융합되고 빛이나 움직임 등과 같은 비물질적인 재료를 작품에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하인츠 마크는 알루미늄의 재료적 특징을 이용해 빛과 움직임이 서로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조각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는 문명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빛’(pure light)을 찾기 위해 1959년 ‘사하라 프로젝트’를 계획했던 3년 뒤 실행에 옮긴다. 우주인 복장을 갖추고 광활한 사하라 사막에서 모래와 바람 빛을 이용한 실험적 퍼포먼스를 진행했다.오토 피네는 불로 그림을 그렸다. 캔버스에 물감을 바르고 불을 가해 이미지를 만들었다. 감상자가 보는 것은 불에 녹아 흘러내리거나 검게 그을린 물감의 흔적들 뿐이지만 사실 이러한 작품을 가능하게 한 근원에는 공기가 있다. 공기가 없다면 불은 존재할 수 없다. 피네에게 있어서 공기는 무언가를 실존하게끔 해주는 정신성의 상징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미술을 가능하게 끔 해주는 창조적인 정신과 다르지 않았다.귄터 위커는 ‘못’이라는 소재로 명상적인 작품들을 선보이면서 국제적으로 크나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망치로부터 힘이 가해지면 못은 무언가를 뚫어 버리는 파괴력을 지닌다. 철이라는 차가운 재료의 속성과 뾰족하고 날카로운 형태 때문에 못은 폭력과 고통을 상징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커의 경우는 다르다. 위커에게 중요한 것은 못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하나의 못을 박는 반복된 행위이다. 그는 못을 박아 그림을 그린다. 못과 못 사이의 간격에 따라, 들어오는 빛의 방향에 따라, 감상자의 위치에 따라 새로운 형태들이 만들어 진다. 위커 역시 못이라는 물질적 재료를 작품에 사용하고 있지만 그가 본질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비물질적 정신성이었다.1950년대에서 60년대로 넘어가던 길목,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접어들던 변화의 시기에 제로는 미술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새로운 가치의 지평을 열어갈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움직이는 작품이 탄생했고, 빛과 공기가 작품이 되었고, 미술가와 감상자의 간극이 사라지는 상황 그 자체가 미술작품이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경계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림이다’, ‘조각이다’ 하던 미술 장르간의 경계가 사라졌고, 국가 간의 경계도 사라졌다. 미술작품은 반드시 물질적으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원칙조차 사라졌다. 일시적인 행위가 미술이 되거나, 보존하거나 보관할 수도 없는 거대한 자연이 작품이 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현대미술의 움직임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선구적인 미술운동이 ‘제로’이다. 제로 미술가들의 주요 작품들은 9월 3일부터 아시아 미술관으로는 처음으로 포항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2019-08-12

무너져 내린 천년의 역사,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2019년 4월 15일 오후 6시 50분.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사실이라고 믿기 힘든,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참사가 벌어졌다. 화마가 덮쳐 천년의 역사를 일순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을 따져보겠지만 이미 불타버린 역사는 영영 돌이킬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영원히 노트르담 대성당의 옛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인류가 고이 간직해온 가치라는 것이 영속은커녕 일순간 먼지로 사라져 버릴 수 있음을, 그러니 겸손해야 한다는 뼈저린 교훈을 세계인들에게 생생히 보여주었다.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중세의 고딕건축의 백미로 손꼽히는 걸작 중에 걸작이다. 사람의 손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거의 천 년 전에 말이다. ‘노트르담’(notre-dame)이라는 이름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사용되고 있지만 사실 ‘우리의 여인’(our Lady)이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를 가리킨다.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파리의 대성당이 어떤 미술사적 의미를 지녔기에 그토록 많은 세계인들을 유혹해 왔던 것일까?천년의 중세에서 처음으로 유럽 전 지역에 널리 나타난 미술양식은 로마네스크이다. 대략 1000년경에 시작되어 200여 년 유행했던 양식인데 고대 로마를 닮았다하여 ‘로마네스크’라는 이름이 붙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은 그 외형이 육중해 보인다는 특징이 있다. 벽체가 두텁고 장식이 절제되어 있기 때문에 웅장함과 함께 소박한 느낌을 준다. 로마네스크 양식에 이어 나타난 것이 고딕(gothic)양식이다.‘고딕’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트족’ 다시 말해 야만족들의 미술양식이라는 뜻으로 폄하하기 위해 붙여진 명칭이다. 로마네스크 다음에 등장한 미술 양식을 이처럼 불렀던 이들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사람들이다. 르네상스 인들은 고대의 예술 정신을 되살린 자신들의 미술에 고귀한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바로 이전 수백 년 동안 유행했던 미술양식을 야만적인 것으로 치부했던 것이다. 그런데 르네상스가 만들어 놓은 이 용어는 결코 정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고딕 양식은 고트족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었으며, 야만적인 양식은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이다.고딕은 12세기 초반에서부터 15세기까지 400년 이상 유럽 각 지역에 널리 퍼져있던 중세를 대표하는 미술양식이다. 고딕은 1120년 경 파리를 중심으로 한 일 드 프랑스(Ile-de-France) 지역에서 발달했다. 특히나 1135년 경 개축된 파리 북부에 위치한 생-드니 대성당의 주보랑은 고딕 양식의 발생지로 미술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참고로 생-드니 대성당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무덤으로 사용하던 교회이다. 12세기 초 고딕양식으로 대성당들이 지어지기 시작했고, 반세기 동안의 건축적 실험을 거쳐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지어질 1163년 무렵에는 완성도 높은 건축이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1345년 93m에 달하는 대성당이 완성되었을 때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높이감은 분명 중세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마치 신의 세계가 땅위에 펼쳐지는 듯한, 곧 종말이 도래할 것이고 높이 솟은 신의 집에서 자신들은 구원을 받으리라는 확신으로 감격의 순간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신의 세계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던 욕망은 비단 고딕양식으로 대성당을 쌓아 올렸던 중세 사람들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고딕에 앞선 로마네스크 양식 역시 그 높이와 웅장함에서 결코 고딕에 뒤지지 않았다. 로마네스크 양식을 대표하는 독일의 슈파이어 대성당이 좋은 예이다. 슈파이어 대성당은 몇 차례의 개축을 거쳐 1106년에 완공이 되었는데, 가장 높은 첨탑의 높이가 자그마치 71m에 달한다. 1345년 완공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높이가 93m이니 건축물의 높이가 20m 자라나는데 무려 240여 년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독일의 한적한 마을 슈파이어에 우뚝 솟은 대성당을 짓기 위해 건축가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벽면을 투텁게 하고 육중한 기둥을 촘촘히 세우는 것 이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듯 보인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대성당들이 무겁고 투박한 외형을 지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 고딕 시대에 접어들면서 건축 기술의 혁신이 일어났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엄청난 무게를 효율적으로 분산시키는 방법을 알아내어, 더 이상 두터운 벽면 없이도 역학적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지은 건축가들 역시 고딕의 새로운 건축술을 사용하였는데, 대성당의 외벽을 한 바퀴만 돌아 제단 쪽으로 향하기만 하면 그 증거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가 있다.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제단이 위치한 동쪽 외벽을 비롯해 남쪽과 북쪽 외벽 상단부를 유심히 관찰해 보면, 갈비뼈처럼 돌출되어 무지개다리처럼 건물 아래로 이어진 건축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한 두 개가 아니라 대성당 외벽 전체를 두르며 나타난다. 이를 가리켜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ress)라고 부르는데, 우리말로는 ‘공중부벽’으로 번역될 수 있다. 부벽이라는 것은 흔히 벽면에 일정한 넓이를 가지고 돌출되어 수직으로 뻗어 있는 부분을 가리키는데, 벽을 보강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부벽은 로마네스크양식의 건축물에도 보편적으로 사용이 되었다. 그런데 이 부벽이 고딕양식으로 넘어 오자 더욱 발달하게 되면서 플라잉 버트레스라는 구조가 나오게 된 것이다.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천장과 벽면 구조를 외벽으로부터 돌출되어 아래로 흘러내리는 공중부벽과의 관계 지어 생각해 본다면 어떻게 고딕 건축가들이 두터운 벽면과 육중한 기둥 없이 하늘로 솟아 오른 엄청난 높이의 대성당을 지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대성당의 천장은 움푹 폐인 궁륭(Vault)으로 이루어져 있다. 궁륭은 세 개의 늑재(rib)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늑재들이 벽면으로 연장되어 얇고 작은 기둥다발을 이루어 벽면을 타고 아래로 내려온다. 천정을 올려다보면 늑재들이 서로 그물처럼 단단히 얽혀 있으면서 하중을 아래로 고루 분산 시킨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리고 그 하중들이 외벽에 연결되어 있는 공중부벽을 타고 다시 한 번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이처럼 건축의 각 부분들이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위에서 내려오는 힘을 건물 전체에 고루 분산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고딕 대성당은 높이를 지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건축구조가 하중을 충분히 처리하면서 또 다른 이점이 생겼다. 벽면이 더 이상 두터울 필요가 없어졌다. 아예 벽면 전체를 없애 버리고 그 자리에 ‘색유리그림창’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하게 된다. 돌로 막혀 있던 벽면에 넓은 창이 생겼고 자연광이 창의 색채를 입고 교회 안을 형형색색 채워주니 전에 없던 환상적인 공간이 연출되었다. 이렇게 고딕의 빛의 미학은 건축적 혁신으로부터 덤으로 선물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마주할 수 있는 고딕건축의 형식적 특징은 수직 상승성이다. 하늘로 오르려는 듯 대칭되어 나타나는 정문 위 두 개의 탑들과 빈틈이라고는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들이 대성당의 외벽을 장식하고 있다. 둥근 아치보다는 끝이 날카로운 아치들이 수직으로 대성당을 장식하고 있어 시각적으로 무게감이 사라지고 위로 솟구치려는 인상을 남긴다.화재로 인해 지붕이 내려앉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언젠가 복원되어 다시 우리를 맞이하겠지만 더이상 중세 고딕의 건축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모습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못내 아쉽지만 이 또한 예술의 운명이 아닐런지. 우리가 생의 무게와 세월을 견디듯 예술작품들도 그러하다는 사실에 조금의 위안을 얻는다./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2019-07-15

현대 건축디자인의 시작 ‘바우하우스’

독일 베를린에서 남동쪽으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한적한 마을 데사우(Dessau). 이곳에는 현대건축의 선구자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가 세운 종합예술학교 ‘바우하우스’(Bauhaus)가 자리하고 있다. 바우하우스 건물의 모든 외벽은 유리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이야 전면 유리 파사드가 흔히 사용되고 있지만 1926년 바우하우스 건물이 처음 대중들에게 공개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것은 아주 혁신적인 건축언어였다.데사우 바우하우스 건물은 그 자체가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담고 있는 기념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1926년 12월 4일 바우하우스 건물의 준공식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데사우를 방문했고 이들은 현대 건축디자인의 역사적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도시에 어둠이 내려앉자 바우하우스 건물에 불이 켜지면서 장관이 펼쳐졌다. 격자 모양의 구조가 선명히 드러나고 유리 파사드가 빛을 뿜어내면서 지금까지 본적도, 존재하지도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유전자의 건축물이 탄생한 것이다.바우하우스는 독일어로 ‘짓다’는 단어 ‘Bauen’(바우엔)과 ‘집’을 뜻하는 ‘Haus’(하우스)의 합성어이다. 바우하우스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19년 독일의 바이마르(Weimar)이다. 마흔 세 살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는 기술과 예술을 하나로 엮어 새로운 산업적 미학을 창조하고자 바우하우스 운동을 일으켰다. 지금 우리가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것의 시작이 바로 그로피우스가 주창한 바우하우스이다. 바이마르의 평범한 공공건물에서 시작된 바우하우스 예술학교에서는 미술뿐만 아니라 금속가공, 목공 등 공예와 관련된 전 분야는 물론 공연과 무용에 이르는 모든 예술 교육이 통합적으로 이루어졌다.추상미술의 선구자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가 색채 교육을 책임지면서 순수 미술에서 추구했던 미학이 일상에서 사용되는 가전이나 가구에 접목되었다. 교수와 학생들에게는 창작을 위한 충분한 자유가 주어졌고 수많은 실험들이 어떠한 제도적 방해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렇게 바이마르에서 순탄하게 시작된 바우하우스는 1925년 위기를 맞이한다. 그해 바이마르 시의 정권을 잡은 극우정당은 학교를 폐교할 목적으로 재정 지원에 대한 전면 중단을 결정하였고 바우하우스는 불가피하게 이전을 계획할 수밖에 없었다.예술과 기술을 접목해 일상의 물건이나 심지어 기계마저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새로운 산업 미학을 만들어낸 바우하우스. 1919년 독일의 역사적인 도시 바이마르에서 처음 문을 열었던 바우하우스는 극우정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재정 지원이 끊겨버렸고 존폐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도시 데사우로 그 자리를 옮기게 된다. 당시 데사우는 독일 산업의 전진기지로 도시의 정체성이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정확히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재정적 지원은 물론 학교 건축을 위한 넉넉한 부지도 기꺼이 마련해 주면서 그로피우스의 종합예술학교 이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데사우 시당국이 그로피우스에게 학교 부지로 제안한 곳은 도심에서 벗어난 넓은 벌판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제약 없이 건축적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그로피우스는 새로운 터에 자리하게 될 예술학교를 설계하면서 바우하우스의 이념에 따라 각 공간들이 독립적으로 기능하지만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통합적인 건축을 소개한다. 그 시대에 유행하던 건축 양식이나 형태에 구애를 받지 않고 쓰임에 적합하지만 자유롭고 통합적인 구조로 공간들을 배치하였다. 학교는 미술학교를 위한 건물은 물론 기술학교, 사무공간, 식당과 기숙사 등의 부속 건물들로 이루어졌는데 그로피우스는 각각의 요소들이 전체적으로 통일성은 보여주되 지루하지 않도록 대칭적 구조를 피하고 크기와 높이에 변주를 가했다. 그렇다보니 바우하우스 건축물의 전체 구조는 여느 건축물들과는 달리 좀처럼 한 눈에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건축물들은 구조적으로 대개 연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외부에서 내부를, 하나의 공간에서 다음 공간을, 부분에서 전체를 읽어 낼 수 있다. 그런데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건물은 그렇지 않다. 학교를 구성하는 개별 건물들은 형태뿐만 아니라 크기나 구조 또한 모두 달랐기 때문에 외관의 피상적인 관찰을 통해 내부를 읽을 수 없고, 부분을 통해 전체를 파악할 수도 없었다. 바우하우스의 건축 구조와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직접 걸어 다니며 공간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바우하우스를 건축하면서 그로피우스의 고집이 강하게 드러난 부분은 디자인이다. 바우하우스의 기본적인 건축철학은 ‘집과 가구는 조화를 이루어야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에 따라 문고리를 비롯해 전등이나 심지어 전기 스위치와 같은 소소한 대상들까지도 건물 전체 디자인에 맞게 세심하게 제작되었다. 바우하우스에 사용될 조명들은 재학생들에 의해 직접 제작되었다. 각 층과 공간은 그 용도와 성격에 따라 다른 색으로 칠해졌다. 이렇게 기능성과 효율성을 유지하면서 미적 감각까지 더해 진 바우하우스 건물이 탄생한 것이다.1933년 나치가 데사우 시의회를 장악하면서 바우하우스는 다시 한 번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바우하우스는 베를린에서 다시 문을 열었지만 나치의 탄압에 위협을 느낀 발터 그로피우스는 이듬해인 1934년 영국으로 망명해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하버드 대학의 디자인대학원장을 역임하면서 현대건축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바우하우스가 베를린으로 이전해 버리고 데사우의 건물은 그대로 방치되고 말았다. 나치는 바우하우스 건물을 ‘역겨운 건축’이라고 폄하한다. 1945년 폭격으로 건물 일부가 파괴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데사우는 동독에 편입이 되었다. 동독 정부는 바우하우스 건물을 독일 건축의 전통을 파괴하는 흉물로 취급했지만 완전히 철거를 하지는 않았다. 20여년의 시간이 지난 후 동독 내 정치적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1976년 바우하우스는 옛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동서로 나누어진 독일이 다시 통일을 이루고 바우하우스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일부는 학교로 일부는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바우하우스의 창시자 발터 그로피우스. 그는 ‘예술은 탐구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탐구는 발견을, 발견은 창조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창조가 탐구에서 비롯된다면 그 토양이 되는 것은 ‘자유’이다. 시대를 움직이는 진정한 예술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자유, 행동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발터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를 통해 남기고 간 위대한 예술정신도 역시 자유이다./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2019-06-17

위대한 미술관의 탄생,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미국 뉴욕의 중심에는 100만평이 넘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1857년 만들어진 센트럴 파크이다. 세계 경제수도의 한 가운데 거대한 면적의 부지에 고층 빌딩들을 지었다면 경제적으로 훨씬 효용성이 높았을 텐데 휴식의 녹색공간을 마련할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도시, 사람 그리고 자연의 관계를 단순한 경제논리로 접근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토록 많은 차들이 거리를 가득 메움에도 불구하고 매연이 코끝을 크게 괴롭히지는 않는다.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밀집해 살아가는 도시는 파괴적 본능을 가질 수밖에 없다.도시의 몸집이 크면 클수록 파괴의 정도와 범위가 그에 비례해 증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뉴욕은 도심에 버티고 있는 거대한 공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시의 폭력성이 어느 정도 잘 다스려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는 도시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된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세계에서 가장 바쁘기로 소문난 뉴요커들은 아침저녁으로 넥타이와 하이힐을 벗어던지고 센트럴 파크를 걷고 달린다. 볕 좋은 주말을 즐기기에 센트럴 파크보다 좋은 곳은 없다. 그 많은 사람들을 동시에 담아내고서도 누구나 각자의 여유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은 100만평이라는 상상을 넘어선 규모 덕분이다.선진국들을 방문해 보면 자연이 있고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미술관이 있다.센트럴 파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공원을 동쪽으로 접하며 뻗어 있는 그 유명한 5번가(5th Avenue)에는 ‘뮤지엄 마일’(Museum Mile)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구태여 번역하자면 ‘미술관지구’ 정도가 된다. 이곳에는 아홉 개의 미술관들이 가까운 거리에 모여 있습니다.그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메트로폴리탄미술관(1870년)과 구겐하임 미술관(1937년)도 있고 아담한 규모에 탁월한 소장품을 자랑하는 ‘프릭 컬렉션’(1935년)과 클림트의 걸작 ‘우먼 인 골드’ 등 오스트리아 미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노이에 갈러리’(2001년)도 빠뜨릴 수 없다.파리에는 루브르가, 런던에는 내셔널갤러리가, 마드리드에는 프라도 미술관이 있다면 뉴욕에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설립된 것은 1870년인데, 믿기 어렵겠지만 처음 시작할 때는 단 한 점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지 않았다.그런데 미술관이 문을 연지 149년이 지난 지금 300만 점 넘는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루브르가 공식적으로 밝히는 소장품의 수가 약 38만 여점이니 그 보다 10배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이다.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두 개의 분관까지 함께 운영하며 로마의 바티칸 미술관을 제치고 루브르에 이어 세계에서 관람객이 가장 많이 찾는 두 번째 미술관으로 이름을 올렸다. 루브르가 프랑스 왕실의 소장품에서 출발하여 시대의 요청에 따라 공공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면, 바티칸 미술관 뒤에는 교황이라는 절대 권력의 엄청난 수집품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그 시작부터 달랐다.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역사는 1866년 7월 4일 파리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시작되었다. 그날은 미국의 독립 기념일이었는데 프랑스에 거주하던 미국인 기업가들이 조국의 독립을 기억하고 축하하기 위해 회합을 가졌다.그 자리에 존 제이(John Jay)라는 인물이 외교관 자격으로 참석해 청중들 앞에서 연설을 하게 된다. 그는 미합중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지 백 년이 다 되어가지만 제대로 된 미술관하나 가지지 못한 자신들의 현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미국인들이 미술을 향유하고 수준 높은 예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공공미술관을 지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다수의 위대한 역사가 누군가의 작은 목소리에서 시작된 것처럼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역사도 그렇게 시작되었다.수 년 간의 설득 끝에 1870년 4월 13일 뉴욕 주(州)의회는 미술관 설립을 승인했고 2년 뒤인 1872년 뉴욕 맨하튼 5번가 681번지에 문을 열었다. 임대건물에 크지 않은 규모였지만 그나마 미술관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철도회사를 운영하던 존 테일러(John Taylor)의 기증 덕분이었다. 테일러가 기증한 개인 소장품에서 시작된 미술관이 오늘날 세계가 인정하는 인류문명의 보고(寶庫)로 자라난 것은 기업인들의 헌신적인 나눔이 있었기 때문이다.예컨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동편 건물에는 ‘록펠러 윙’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이곳에는 아프리카나 태평양 섬 원주민들의 전통미술이 소개되고 있는데, 1969년 넬슨 A. 록펠러가 기증한 3천여 점의 작품이 토대가 되어 지금은 그 규모가 1만1천점 이상으로 늘어났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성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또 다른 인물이 있다. 금융회사리먼 브라더스의 최고경영자였던 로버트 리만이다. 1969년 로버트 리만은 세상을 떠날 때 자신이 평생토록 수집한 2천600여점의 걸작들을 모두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기증했다. 그리고 미술관은 리만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에서 딴 전시관 마련하여 기증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리만 컬렉션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자랑하는 최고의 하이라이트이다.리만이 남겨준 유산들은 이탈리아 거장들의 대표작에서부터 바로크 그리고 모던 클래식으로 이어지는 서양미술사 전체의 흐름을 총망라한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리만의 특별한 컬렉션을 관람객들에게 가장 현장감 있게 소개하기 위해서 실제 그의 저택과 꼭 닮은 전시실을 조성하여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은은한 자색의 비단으로 꾸며진 따듯한 분위기의 전시실.그 한 가운데는 보기에도 안락한 소파가 놓여 있어 방문객들에게 쉼터를 마련해 준다. 여기 앉는 누구라도 마치 리만에게 초대받아 그의 아주 사적인 공간에 머물며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다.그런데 사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들이 정해놓은 입장료 정책이다. 이른바 ‘pay-as-you-wish’(원하는 만큼 지불하시오)라는 정책인데 공식적인 입장료를 부과하는 대신 미술관 운영을 위해 모든 방문객들의 자발적인 기부를 끌어내겠다는 획기적인 발상이다. 누구나 원하기만 한다면 부담없이 형편에 따라 미술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은 것이다.이러한 입장료 정책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숭고한 설립정신을 고이 이어가겠다는 고집이자 미술의 공적 가치를 자본의 논리로부터 지켜가겠다는 확고한 의지처럼 보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반백년이나 이어온 이러한 전통이 재정 압박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2018년 3월 1일 미술관은 입장료를 징수하겠다는 공식발표를 했다. 다만 공공기관으로서의 성격 때문에 뉴욕에 거주하는 시민들에게는 원래의 혜택이 그대로 적용된다는 단서 조항이 붙기는 했다. 책정된 입장료가 성인이 제값을 모두 주었을 때 25달러이니 적지 않은 금액이다.발 디딜 틈 없이 세계 곳곳에서 밀려드는 관람객에도 불구하고 이익은 고사하고 적자를 면치 못했다니 미술관 운영을 위해 입장료 징수를 결정한 사정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그렇더라도 50년 동안이나 방문객들의 자발적 참여를 고집해 온 것을 고려해 보면, 유료로 전환되었다고 해서 지난 정책이 반드시 실패한 것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개장 시간은 오전 10시이지만 이른 아침부터 신전처럼 생긴 미술관의 높은 계단을 따라 입장을 기다리는 방문객들의 길고 긴 줄이 이어져 있다. 매일 같이 벌어지는 일상적인 풍경이다. 참 부러운 풍경이다. 훌륭한 소장품으로 가득 찬 보물창고 같은 미술관이 부럽고, 그런 미술관이 가능하도록 동참한 사람들의 고귀한 정신이 부럽고, 끊임없이 찾아드는 사람들의 발길이 부러울 따름이다./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2019-05-20

미술전시의 기원

미술관은 유럽인들의 발명품이다. 유럽에서는 미술관을 뜻하는 ‘뮤지엄’(Museum)이 미술관과 박물관 둘 다를 가리키는데 그 기원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흔히들 뮤지엄의 시작을 ‘분더캄머’(Wunderkammer)에서 찾는다.분더캄머라하면 독일어에서 온 말인데 개인이 지적 호기심으로 수집한 진귀한 물건들을 모아 진열해둔 방을 뜻한다.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유럽의 귀족들은 남들이 본적이 없는 식물이나 광석 혹은 미술품 등을 서로 경쟁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다.예컨대 유럽의 유명한 궁전들을 방문해 보았다면 ‘오랑주리’(Orangerie)라고 불리는 건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독특한 향과 맛을 가져 진귀한 식물로 여겨진 오렌지 나무를 키우기 위해 마련된 일종의 온실이다.진귀한 물건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학식뿐만 아니라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뽐내는데 아주 손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에 귀족들은 분더캄머의 규모를 늘리는 것에 열을 올렸다.엄밀히 말해 분더캄머가 박물관에 가깝다면 지금 식으로 미술 작품을 걸어 두고 보여주기 시작한 미술관의 기원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의 왕실이었던 루브르가 대중들에게 개방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이탈리아의 피렌체가 르네상스를 꽃피웠고, 로마의 교황이 바로크 미술을 이끌었다면, 17세기 베르사유에 궁을 지어 스스로를 태양 왕이라 불렀던 루이 14세의 절대왕정 이후로 프랑스는 유럽 미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루이 14세는 절대왕정을 위한 문화정책을 폈고 그 일환으로 예술가들을 체계적으로 육성하는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왕립예술원’이다.왕립예술원은 국가를 위해 봉사할 엘리트 예술가들을 체계적으로 길러내던 공립교육기관으로 미술에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건축과 무용 등 예술 전반을 총망라했던 국립종합예술학교의 성격을 지녔던 곳이다.미술 분야에 한정해 왕립예술원이 어떻게 미술을 정치권력 아래에서 철저히 통제했는지 살펴보자.우선 교수진과 학생 선발 방식에서부터 이미 특정한 미술의 방향성이 정해져 있었다.이른바 ‘역사화’라고 하는 그림의 특정 장르로 국한되어 있어 제 아무리 그림 솜씨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역사화를 그리지 않고서는 화가로 성공할 방법이 없었다. 쉽게 말해 역사화는 ‘위대한 사람들의 위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림이다.성서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그리스 로마의 신화 이야기나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다룰 수도 있다.누구나 본받아 마땅한 위대한 인물들의 영웅적인 행위가 거대한 크기로 그려져 벽을 장식했다.왕이나 귀족들은 자신들의 치적을 신화적 소재를 가져와 공공연히 과시하기도 한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듯 미술은 순수한 미적 동기에서 창작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분명한 목적을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왕립미술원의 교수들은 역사화를 그리던 화가들이었고, 학생들에게는 역사화가로 이름을 날리는 것이 화가로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회화의 다른 장르인 정물화나 풍경화를 그려서는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던 게 당시의 냉혹한 현실이었다.프랑스는 미술의 선진지였던 로마에 궁을 매입해 왕립미술원 로마 분교를 설립한다. 초대 원장을 지낸 인물이 프랑스 고전주의 바로크 미술을 확립한 니콜라 푸생이다.왕립미술원은 해마다 공모를 통해 가장 우수한 학생 한 명을 선발한 후 로마 분교로 유학을 보내 3년에서 5년 동안 고대 문물을 직접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로마 대상’(Prix de Rome)이라고 불렸던 이 상을 받는 것은 미술가로 성공할 수 있는 첫 번째 공식적인 관문이었기 때문에 경쟁도 치열했고 심사도 엄격했다. 물론 최우수작 선발이 항상 투명하고 공평했던 것은 아니다.로마대상이 탁월한 학생을 엘리트로 키우기 위한 교육정책이었다면 본격적으로 이름을 걸고 화가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살롱전’이라는 또 다른 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왕립미술원은 루이 14세의 명을 받아 정기적으로 대규모 전시회를 개최하게 되는데 이 전시회가 나중에 루브르의 ‘살롱 카레’에서 열리게 되면서 살롱전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2, 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개최된 대규모 전시인데 살롱전에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서 화가들은 역시나 역사화를 그려야만 했다.살롱전은 최초로 개최된 근대적 형태의 전시회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살롱전이 있기 이전에 미술작품들은 대부분 개인의 저택을 장식했었다. 혹은 종교화라면 교회 건축이나 제단을 장식하며 종교적 기능을 수행했다.그러던 미술이 순수하게 감상의 목적으로 개최된 것이 바로 살롱전에서부터이다.살롱전이 열리는 기간이면 파리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들뜨게 된다. 미술하면 귀족들의 전유물이겠거니 지래 짐작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물론 경제적 효용성이 없는 값비싼 미술작품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특정 계층에 국한되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살롱전이 열리면 왕궁이 모두에게 개방되었다.사회적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미술에 대한 조예가 있건 없건 관계없이 모두가 살롱전이 열리는 루브르를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책적으로 역사화를 장려했던 것은 왕의 업적을 찬양함과 동시에 왕과 국가를 향한 민중의 충성심을 고양할 목적이 있었던 만큼 왕궁의 문을 활짝 열었던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살롱전이 도시 전체의 축제였던 만큼 그와 얽힌 에피소드들도 적잖이 생겨났다.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몰려들었으니 소매치기들이 들끓었고, 그림보다는 어여쁜 아낙들을 감상하기 위해 눈이 바빴던 남정네들도 한 둘이 아니었다고 한다.아무래도 미술전시의 초기 형태이다 보니 기술적으로 아주 허술해 보인다. 좁지 않은 전시공간이지만 수 백 점의 작품들을 동시에 걸어야 하니 바닥에서 천정까지 온 벽면이 빼곡히 그림으로 채워졌다.요즘처럼 쾌적한 감상을 위해 작품과 작품, 작품과 감상자 간의 최소한의 거리를 확보해야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작품들을 주제나 화풍에 따라 분류하여 전시할 수 있다는 관념은 아예 존재하지를 않았다.어떻게 보면 전시라기보다는 벽의 빈 공간들을 그림으로 채운 수준에 불과하다.살롱전의 전시 방식이나 내용이 지금의 전시와는 상당한 거리를 보이지만 이를 통해 미술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현상들이 함께 발생했다는 것은 반드시 언급될 수밖에 없다.우선 전시도록이라는 것이 출현했다. 작품들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보니 누구의 어떤 작품이 어디에 걸려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혹은 벽에 걸려 있는 어떤 작품이 누구의 그림이며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살롱전으로 생겨난 또 다른 현상은 ‘미술비평’이다.살롱전 출품작들을 감상하고 자신들이 보고 느낀 것을 통해 비판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 평가를 하고 색채 사용과 인물 묘사에 대한 판단이 내려졌다. 문헌적으로 가장 처음으로 이루어진 미술비평가들 중에 백과사전을 편찬한 디드로의 이름도 등장한다.이렇게 시작된 미술관과 미술전시가 이제는 진화를 거듭해 단순히 작품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콘텐츠를 생산해 내는 창작의 장이 되었다.미술의 형식이 달라지면서 미술관의 형태도 달라졌고, 미술의 내용이 달라지면서 전시의 방식도 달라지게 된 것이다./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2019-04-29

파리가 만들면 클래스가 다르다!

지난해 1천20만 명의 사람들이 루브르 박물관을 찾았다. 전년과 비교했을 때 20%가 증가한 수다. 하루 평균 3만 명 넘게 루브르를 방문했고, 그 중 65%가 외국인이다.2018년 한국을 방문한 전체 외국인 수가 1천534만 명 정도라고 하니 루브르가 가진 브랜드 파워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박물관 하나로 벌어들인 입장료 수입이 대략 1억7천340만 유로 정도로 추산, 어림잡아 2천230억 원이 넘는다. 입장료만 계산했을 때 그 정도이고, 출판물, 레스토랑, 아트상품 등의 판매 수익까지 합하면 상상을 초월한다.그 뿐만 아니다. 프랑스는 루브르를 해외로 수출까지 했다. 루브르는 하나의 상품이 되어 아랍에미리트로 수출되었고 2017년 11월 루브르 아부다비가 문을 열었다. 루브르는 이름을 빌려주는 대가로 5억2천5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5천966억 원에 육박하는 금액을 챙겼다. 거기에 전시기획과 작품대여료, 운영 노하우 전수 명목으로 7억4천700만 달러(8천489억 원)가 추가로 지불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프랑스의 수도 파리에는 루브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루브르에서 세계 각국의 유물들과 19세기 중반까지의 미술을 감상한 방문객들은 센 강을 건너 오르세 미술관으로 향한다.오르세 미술관은 원래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를 위해 기차역사로 지어진 건물이다. 1939년까지 파리와 남서부 프랑스를 연결하는 기차역으로 사용되었다. 기차의 도착과 출발 시간을 알리기 위해 역사를 장식했던 거대한 시계가 미술관이 된 지금도 하나의 상징이 되어 벽면에 걸려있다. 프랑스인들답게 과거의 작은 흔적 하나라도 가치 없이 버리지 않고 문화로 축적시켜 역사적 상징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기차역으로의 기능을 다해 도시의 흉물로 전락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미술관으로 활용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문제는 ‘파리의 역사를 품고 있는 기차역을 어떻게 미술관으로 탄생시킬 것인가?’하는 것이었다.기차역의 건축적 원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미술관으로서 기능하는 건축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였다.뿐만 아니라 허물고 새로 짓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예산이 들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고 역사적 정당성 그리고 문화적 가치를 충족해야 하는 등 넘어야할 산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르세 역사 건물은 처음 지어졌을 당시의 최첨단 기술과 재료였던 철골과 유리가 그대로 보존되어 미술관으로 탄생하게 되었다.반구형 천장의 유리창들은 미술관에 필요한 자연광을 충분히 공급해 주었고, 기차선로와 플랫폼이 있던 공간은 대전시실과 개별 전시실로 재구성되었다.이렇게 태어난 오르세 미술관은 단순히 미술관으로서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건축역사의 생생한 현장이자 역사적 건축의 증언이 되었다. 1986년 미테랑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오르세는 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미 유수한 미술관과 박물관이 존재하는 파리에서 오르세는 미술관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은 컬렉션에 있다.미술관의 정체성은 소장품을 통해 드러난다. 루브르는 고대에서 부터 19세기 중반에 이르는 방대한 유물과 미술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오르세의 차별화 전략은 소장 작품을 특정 시기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루브르에서 고전 미술을 경험한 관람객들이 이어지는 시기의 작품을 만날 수 있도록 오르세는 모던클래식 작품들을 소개한다. 마네, 모네, 쿠르베, 르누아르 등 현대미술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미술가들의 주옥같은 걸작들을 전시하면서 오르세는 문을 열자마자 파리의 명소로 떠올랐다.프랑스인들은 허물고 새로 짓는 것보다 훨씬 많은 예산이 소요되는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옛 역의 모습이 보존된 지금의 미술관을 탄생시켰다. 가성비에 목을 매는 우리식 사고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접근방법이다.과거의 흔적이 문화가 되고, 문화가 상품이 되기까지는 그에 상응하는 시간과 노력 그리고 투자가 불가피하다. 루브르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연간 오르세 미술관을 찾는 방문객 수는 300만 명에 이른다. 이정도면 역사를 보존한 프랑스의 비효율적인 선택이 옳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루브르에서 고전미술을, 오르세 미술관에서 현대미술의 태동을 경험했다면, 자연스레 또 다른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다. 바로 퐁피두센터이다. 루브르를 현대화하고 기차역을 개조해 오르세 미술관의 문을 연 것이 미테랑 대통령의 업적이라면, 퐁피두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1969년에서 1974년까지 프랑스 대통령을 지낸 조르주 퐁피두의 공적이다. 퐁피두센터는 배수관과 통풍구의 파이프를 외장으로 드러낸 파격적인 건축으로 유명하다. 이탈리아 출신의 건축가 렌초 피아노와 영국의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의 합작품이다.퐁피두센터는 현대건축의 패러다임을 바꾼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예술 정신이 어떻게 도시의 미래를 결정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복합 예술 공간으로 구성된 퐁피두는 1977년 1월 31일 완공되었고, 1997년에서 1999년까지 2년 간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누적 관람객이 1억5천만명이 넘는다.오르세 미술관의 소장품이 고전미술의 균열을 일으키며 현대미술을 이끌어낸 거장들의 작품들에 집중되어 있다면, 퐁피두센터는 1914년 이후 나타나는 미술 현상을 담아낸다.현대미술을 혁명한 마르셀 뒤샹을 비롯해 피카소의 큐비즘, 키네틱 아트의 선구자 장 팅겔리, 우리 모두를 예술가로 선언한 독일의 거장 요셉 보이스 등 동시대 미술의 담론을 끌어내는 곳이 퐁피두센터이다. 파리에 공존하는 여러 미술관들이 서로 불필요한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분명한 특성을 가지며 도시 내에 거대한 망을 형성하여 관광객들을 끌어 들이는 거시적 안목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파리에는 지금 언급한 3개의 미술관 이외에도 130여 개가 넘는 크고 작은 미술관, 박물관이 존재한다.이들도 결코 시시한 미술관들이 아니다. 그랑팔레, 피카소미술관, 로댕미술관 그리고 2014년 문을 연 루이뷔통 미술관도 포함되어 있다.다른 나라로 옮겨 놓으면 국보급 대접을 받을 만한 미술관들이다. 국가와 도시와 지역 사회가 오랜 시간 문화와 예술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결과 나라의 격이 높아졌고, 이것이 지금의 파리라는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아름다운 작품들로 채워진 미술관들이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예술에 대한 조예가 있건 없건 파리를 찾는 모든 관광객들은 미술관을 찾는다. 아니 찾을 수밖에 없다. 관점을 달리하면 미술관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세계인들이 파리를 갈망하는 것이다.먹고 살기 바빴던 시절, 문화와 예술은 배부른 사람들의 여유로 여겨졌던 적이 있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문화와 예술이 산업이 되었다. 이제 문화를 향유하지 못하고 예술에 대한 조예가 없다는 것은 곧 사회적 고립과 소외를 뜻한다.예술 없이 굴뚝에 연기만 피어오르는 도시를 방문하고 싶은 사람은 지구상에 아무도 없다. 심지어 그런 곳에 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우리의 문화예술 정책이 제자리를 맴도는 동안 선진국들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치밀하게 탈산업사회를 준비하고 있었고, 그 결과가 지금의 차이를 만들어 놓았다. 미세먼지,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맹독성 산업분진’이 연일 우리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상황에 처하니 씁쓸함이 더할 뿐이다./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2019-04-08

자연이 미술이 되고, 미술이 자연이 되는 곳! 홈브로이히 미술관

지키는 사람도, 바리케이트도, 명제표나 전시 설명도 없는 미술관이 있다면? 친절한 듯 전혀 친절하지 않은 그런 미술관이 정말로 독일 노이스(Neuss)라는 자그마한 마을에 있다. ‘보안이 허술한 것으로 보니 그리 값나가는 작품들이 전시된 것은 아니겠지’하고 어림짐작한다면 크나큰 오산이다.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법한 폴 세잔(Paul Cezanne)이나 에두아르도 칠리다(Eduardo Chillida), 심지어 천문학적인 작품가를 자랑하는 알베르토 쟈코메티(Alberto Giacometti),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 요제프 보이스(Joeseph Beuys) 등 현대미술사를 움직였던 최고 거장들의 작품들이 아무런 감시나 보호 없이 전시되어 있다.작품 보호를 위해 감상자를 작품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수많은 물리적 장치들이 즐비한 보통의 미술관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감도는 미술관이다. ‘무제움 인젤 홈브로이히’(Museum Insel Hombroich), 네덜란드와 인접해 있는 독일 뒤셀도르프 근교 노이스에 위치한 미술관이 바로 그곳이다.그렇다면 충분히 보호되지 못한 고가의 미술작품들은 과연 안전할까? 답은 의외로 명확하다. 1987년 개관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지금껏 작품 훼손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적은 전혀 없다.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는지 추측해 본다. 작품보호를 위해 감상자를 물리적 강제력을 동원해 작품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방법은 아주 손쉽고 효과적이다. 하지만 감상자의 역할을 지나치게 제한시켜 버린다. 감상자에게 감시의 눈이 유쾌할 리 없다. 작품은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언제나 감상자와 멀리 떨어져 있다. 작품을 대하는 감상자는 수동적 관찰자나 방관자로 머무른다. 이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다. 경고문이나 바리케이드가 없는 작품은 만져도 되는 것으로 인식해 숱한 해프닝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최소한의 장치만 남겨두고 대부분의 규제들을 풀어버렸더니, 오히려 감상자들에게 작품을 함께 보호해야한다는 능동성이 작동하게 된 것이다.물론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질서와 규범, 규칙을 지키려는 사회적 합의와 실천적 태도가 전제되어 있다.홈브로이히 미술관은 어떤 이유로 작가, 제목, 연도 등과 같은 기본 정보를 담은 명제표를 벽에서 제거해 버렸을까? 명제표는 보았던 작품을 기억할 때 유용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허나 그 부작용 또한 적지 않다. 관람객들이 작품 자체보다는 명제표를 읽는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기 때문이다. 명제표를 붙이지 않았으니 작품이 시선을 끌지 못하면 감상자는 아무런 반응 없이 지나치기 쉽다. 그렇더라도 명제표를 표기하고 취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득이 있다. 작가의 유명세로부터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생각해보자, 작가의 유명세라는 프리미엄이 우리의 눈을 얼마나 흐려놓았는지를. 아름다운지 아닌지,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보거나 따질 겨를도 없이 작가의 이름에 현혹되어 위선에 가까운 존경을 표한 적이 얼마나 잦았던가? 이름표도, 설명도 없기 때문에 감상자는 홀로 맨 눈과 정신으로 작품과 대면할 수밖에 없다.홈브로이히 미술관은 ‘화이트 큐브’(White Cube)로 대변되는 20세기 미술관의 한계를 극복하고 ‘미술-자연-사람’이 본질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새로운 미술관에 대한 용감한 실험으로 볼 수 있다. 정제된 백색공간에 박제된 듯 전시된 미술작품들은 수많은 부대 장치들로 떠들썩하게 소개된다. 인공적인 공간에 인위적으로 설치된 작품들. 물리적 경계와 보이지 않는 감시 시스템들이 감상자와 작품 사이에 내밀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방해한다. 반면 홈브로이히 미술관에서 감상자는 오롯이 작품과 단독으로 대면할 수 있다.홈브로이히 미술관의 설립자 칼-하인리히 뮐러(Karl-Heinrich M00FCller)는 뒤셀도르프 출신의 부동산 개발업자로 방대한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1982년 자신의 소장품을 전시하기 위한 미술관을 짓기로 결심했다. 기존의 미술관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미술관을 짓 자는 조언을 한 사람은 미술가 고트하르트 그라우브너(Gotthard Graubner)였다. 일반적으로 미술관들이 시대별, 양식별, 장르별로 작품을 전시하는 반면 홈브로이히 미술관에서는 모든 전통적, 형식적 기준들이 파괴되었다. 아시아의 전통 공예가 유럽 현대미술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중국 골동품으로 보이는 가구들과 현대 추상미술이 지역과 시대를 넘나들며 감상자들과 소통을 한다.라인강의 지류인 에르프트(Erft)가 만들어 놓은 늪지에 자연을 닮은 미술작품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고, 숲길을 걷다보면 뜻밖의 장소에 전시 공간이 숨은 듯 펼쳐져 있다. 매표소 안내 데스크에서 챙겨온 지도 한 장을 들고 각 전시장에 매겨진 번호를 찾아가며 자연 속을 걸어야 한다. 붉은 벽돌로 군더더기 없이 자연과 어우러진 10개의 갤러리 건물들은 건축가 에르빈 헤리히(Erwin Heerich)의 작품이다. 어떤 공간은 아무런 작품도 없이 비어 있다. 오로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소리’이다.건축물의 내부 구조는 사람이 만들어 내는 소리의 파장을 청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설계되었다.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마주하는 벽면에 따라 소리는 서로 다른 울림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공간을 계획하면서 에르빈 헤리히가 의도했던 것은 작품을 보여주기 위한 수동적 전시공간이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조각적 건축’(begehbare skulpturale Architektur)이었다.무제움 인젤 홈브로이히. 그 이름에 나타나는 ‘인젤’(Insel)은 독일어로 ‘섬’을 뜻한다. 실제로 홈브로이히 미술관이 물위에 떠 있는 섬은 아니다. 일종의 은유이다. 철학자 발터 비멜(Walter Biemel)의 말을 빌자면 섬은 이런 곳이다.“섬의 존재는 경이로울 뿐이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그것에 대해 묘사를 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섬에는 다양한 생명체가 육지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생태계를 만들어 놓는다. 미술의 속성도 그렇다. 일상의 시선이 관심 없이 지나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아무도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기막힌 예술적 실험들로 세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열어주는 것이 미술이다. 그렇다면 홈브로이히 미술관은 분명히 미술의 섬이 맞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존재하는 모든 미술관은 섬이 되어야 한다.미술가의 명성도, 미술 앞에 드리워진 고상한 사회적 벽도, 감상자를 혼란으로 빠트리는 작품에 대한 정보도, 작품과 감상자를 가로막는 어떠한 장애물도, 복잡하게 꼬여 있는 미술의 역사나 이론에 대한 지식도, 심지어 작품을 그럴듯하게 비춰주는 인공조명도 이곳 홈브로이히 미술관에서는 찾을 수 없다. 자연이 미술이 되고, 미술이 자연이 되는 홈브로이히 미술관. 자연과 미술의 경계가 사라진 이곳에서 감상자들 역시 방관자가 아니라 자연이 되고 미술작품이 된다.홈브로이히 미술관은 미술이 무엇인지? 왜 우리에게 미술이 필요한지? 그리고 우리 시대는 어떠한 미술관을 요구하는지 시사해주는 바가 아주 크다. 모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글을 맺고자 한다. “우리에게도 아름다운 미술관을 누릴 권리가 있지 않은가?”/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2019-03-11

베를린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 유대인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

독일의 수도 베를린. 이곳에는 지난 세기 유럽에서 벌어진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다. 도시 곳곳에 그 역사가 녹아 있고, 역사적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 베를린은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 간다. 프랑스 파리에 샹젤리제 거리가 있다면 베를린에는 운터덴린덴 거리가 있다. 직선으로 1천480m나 뻗어 있는 대로이다. 이 길이 시작되는 곳에는 그 유명한 브란덴부르크문이 역사를 증언하듯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1791년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1744~1797)의 명으로 건축된 개선문으로 당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독일 땅에 새로운 로마제국을 건설하겠다는 프로이센의 야심이 승리의 사두마차(Quadriga)에 투영되어 지금도 베를린의 하늘을 달리고 있다. 영원한 승리에 대한 염원도 잠시, 그 아래에서 장차 인류가 재앙보다 더욱 끔찍한 잔혹의 역사를 경험할지 누가 감히 상상이라도 했을까?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짙은 회색의 직사각형 콘크리트 블록들이 펼쳐진 장소가 나온다. 모양은 동일하지만 높이가 제각각이라 위에서 내려다보면 물결치는 파도처럼 보이기도 하다. 설치된 콘크리트 블록의 수는 모두 2711개. 15㎝의 두께로 특수 제작된 블록의 속은 비어있다. 높이는 다르지만 크기와 배치된 간격은 동일하다. 블록 하나의 길이는 3.38m, 폭은 1m에 조금 못 미치는 95㎝이다. 어떤 것은 높이가 겨우 20㎝ 밖에 되지 않아 무릎보다 낮아 보이지만 가장 높은 것은 보통 사람 키의 두 배가가 훨씬 넘는 4m70㎝나 된다. 가장 무거운 블록의 무게는 무려 11t. 블록과 블록 사이의 간격은 한 사람 정도 지나갈 수 있는 95㎝에 불과하다.이곳은 나치에 의해 목숨을 잃은 유대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기념공원이다. 공식적인 명칭은 ‘유럽의 학살당한 유대인들을 위한 기념비’.역사적 비극에 대한 추모비 건립은 정서적으로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일제가 위안부 할머님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경고하고, 피해자들의 고통을 함께 기억하기 위해 ‘평화의 소녀상’을 설치할 때마다 가해국이 취하는 태도를 되짚어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일본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독일, 그것도 수도 베를린에서는 가능했던 것일까?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들의 추모비 건립에 대한 논의는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들이 이루어지면서부터 이미 시작되어왔다.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것은 1988년인데, 최일선에서 움직인 인물은 독일을 대표하는 여성 저널리스트 레아 로스( Lea Rosh)였다. 예루살렘의 홀로코스트 희생자 기념관 ‘야드바솀’(Yad Vashem)을 방문한 그녀는 독일로 돌아와 과거 역사에 대한 반성과 반인륜적인 대량 학살을 경고하는 기념비를 건립하자는 사회적 움직임을 이끌어낸다. 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와 ‘양철북’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귄터 그라스 등이 힘을 실어주면서 기념비 건립 프로젝트는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1995년 베를린 주정부는 홀로코스트 추모비 조성을 위한 공모를 진행했고, 1998년 미국 출신의 건축가 피터 아이젠먼과 미니멀리즘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조각가 리처드 세라가 공동 제안한 설계안이 최종 선택되었다. 아쉽게도 리처드 세라는 프로젝트가 진행되던 중에 손을 떠나게 되었지만, 동일한 형태의 기하학적 콘크리트 블록이 규칙적이고 반복적이면서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것은 세라의 미니멀리즘적 접근이 최종 결과물에 끼친 영향으로 읽혀진다. 공사가 시작된 것은 2003년 4월 1일, 일 년 남짓 공사가 진행되어 이듬해인 2004년 12월 15일 완성되었고 개막식 행사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60년이 되던 2005년 5월 10일에 진행되었다.홀로코스트(Holocaust)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태인 대량학살을 일컫는 개념이다. ‘전체’를 뜻하는 그리스어 ‘홀로스’(holos)와 ‘타다’는 뜻의 ‘카우스토스’(kaustos)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이유로 나치들은 유대인을 상대로 이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던 것일까? 유럽에서 ‘반유대주의’(antisemitism)는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가 분리되면서 유대인들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고(313년) 그 이후 제국의 국교로 선포(392년)하게 된다.이때부터 유대인들은 각지로 흩어져 유랑생활을 시작한다. 유럽 곳곳에 디아스포라(diaspora)로 흩어져 불안한 뿌리를 내렸던 유대인들은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한다. 전통과 교육을 중시했던 유대인들은 상업과 금융업을 통해 큰 부를 쌓아 간다.이런 유대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금전거래로 이익을 챙기는 것이 공식적으로 금지된 기독교 사회에서 이자를 통해 부를 축적한 유대인들은 인색하고 부도덕한 민족이라는 편견과 멸시를 받으며 살아왔다. 사회적 위기가 불어 닥칠 때면 언제나 비난의 화살은 유대인들을 향하게 된다. 산업화와 근대화가 진행되어 세상이 바뀌었어도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세계 경제에 힘을 가지게 되자 반감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1차 세계대전(1918년)에 패한 독일은 넓었던 영토를 대부분 잃어버렸고, 경제 파탄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자 아니나 다를까 반유대주의가 극에 달하게 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을 때 잃어버린 민족의 자존심을 끌어올리고 독일 내부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완화할 목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누명을 씌워 민중들의 시선과 관심을 돌리려했다. 반유대주의 정책이 본격화 되자 유대인들은 시민권을 박탈당했고,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된다. 급기야 나치는 유대인들을 좁은 게토(Ghetto)에 몰아넣고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다. 이렇게 희생된 유대인들이 적어도 600만 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베를린에 설치된 유대인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기념비의 높은 콘크리트 숲 사이를 걷고 있으면 유대인들이 느꼈을 공포를 조금이나마 경험할 수 있다. 좁은 통로를 걸으면 바로 눈앞에 무엇이 나타날지 예측도 할 수 없다. 순식간에 무언가 지나가는 것이 보이지만 그것이 누구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보이는 것은 끝없이 뻗어 있는 좁은 길과 높은 회색의 콘크리트 벽들 뿐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혼자가 되고, 예외 없이 불안과 공포의 감정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한치 앞의 운명도 예측할 수 없는 유대인들처럼 말이다.이곳은 무거운 역사에 대한 기억과 반성을 미학적으로 해석해 놓은 공간이다. 장소적 의미에 따른 엄숙함 그리고 희생자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존재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감시나 통제는 최소화 되어 있다. 사람들은 높이가 낮은 블록에 앉아 쉬기도 하고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블록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목격되기도 한다. 여느 공원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이미 관광 명소가 된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블록과 블록 사이를 거닐며 연신 카메라로 이미지를 담아낸다. 아마 이 곳이 어떤 장소인지 모르고 찾게 된다면 현대미술로 채워진 어느 베를린의 인상 깊은 공원정도로 기억하고 돌아갈지도 모른다./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2019-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