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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세미술 : 그림은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그려진 성서

서양의 중세하면 ‘암흑’이라는 수식어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만약 중세가 ‘암흑’이라면 인류의 역사에서 암흑이 아니었던 시대는 한 번도 없었다. 여느 시대와 마찬가지로 중세에도 명암은 있었고, 혼란과 혼동의 시기가 있었으며, 학문적 번영과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시기도 있었다.천년 동안 지속된 중세에 암흑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것은 누구인가?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사람들이다. 역사학자 하위징아가 ‘가을’이라 일컬은 중세의 끝단 14세기와 15세기,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라고 불리게 될 새로운 시대가 개막했다. 르네상스는 중세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었지만 그것이 갈망했던 것은 고대였다. 고대의 부활을 꿈꾼 르네상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업적을 부각시키기 위해 앞선 중세를 어둠의 시대로 못 박았다. 중세 후기 300년 이상 유행했던 미술양식을 야만적인 고트족의 미술 ‘고딕’이라 낮추어 부른것도 르네상스 사람들이다. 하지만 정작 고딕은 고트족의 양식이 아니었을 뿐더러 결코 야만적이지 않다.서양의 역사에서 중세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경 시작된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통합한 로마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가 서거한 395년 동과 서로 분열됐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발전한 로마제국의 동쪽 비잔틴제국은 동서로마제국 분열 이후 천년 이상 존재했지만 서로마제국은 476년 게르만족의 침략을 견디지 못하고 몰락한다. 서로마제국을 정복한 게르만의 부족들은 여러 나라를 세웠고 그 중 가장 번성한 것이 프랑크왕국이다. 동서로마제국의 분열은 서양미술사의 흐름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제국이 나누어진 이후 서양미술사 서술은 비잔틴이 아니라 지금의 서유럽에 속하는 옛 서로마제국의 땅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좇는다.중세미술은 기독교미술이다. 교회가 지어졌고 교회의 실내공간은 그림으로 장식되었다. 교회에 그려진 그림들은 감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분명한 종교적 기능과 목적이 있었다.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던 대다수 신자들에게 성서의 말씀과 성인들의 이야기를 직접적이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그림의 기능이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그림 사용을 둘러싸고 동방과 서방교회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는 모세의 계명에 따라 무엇이든 형상을 만들어 모시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한다. 기독교의 교리와 종교적 체계가 정립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교회에서의 그림 사용은 더더욱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었다.서방의 로마교회는 그림 사용을 적극 장려했던 반면 비잔틴의 동방교회는 반대 입장을 취했다. 로마교회가 그림 사용을 옹호한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가톨릭교회는 게르만족 개종에 큰 노력을 기울였고 포교를 위해 그림이 유용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신자들이 문맹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그림 보다 좋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비잔틴 교회의 입장은 달랐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 해당하는 비잔틴 제국의 주요 도시에서는 학문이 발달해 이단 사상이 출현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또한 각 도시들은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어 동방교회의 수장이 모든 지역을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런 현실적인 이유로 비잔틴 교회는 이단 사상의 발생과 확산을 막기 위해 그림 사용을 엄격히 금지했다.그림을 둘러싼 동서교회의 대립을 정리한 사람은 대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재위: 540∼604년)이다. 교황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치며 그림 사용을 옹호했다. “그림을 사용함으로써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책에서 읽지 못하는 것을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읽을 수 있다.” 교황의 주장에 따라 교회는 그림으로 장식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그림이 허용된 것은 아니다.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그림은 가능한 단순하고 명료하게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다.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림은 엄격하게 본질에만 집중했고 그 결과 로마제국의 높은 수준의 묘사와 표현이 서서히 쇠락하게 된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2022-11-21

초기 기독교미술의 앱스 모자이크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밀라노 칙령이 발효되면서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허용했다. 기독교도들은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로마의 공공건물 구조를 모방해 교회를 지었고 벽면을 그림으로 장식했다.초기기독교 시기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벽화기법은 모자이크였다. 모자이크는 아주 오래된 기법으로 작은 크기의 돌 조각이나 유리에 색을 입히고 그것을 배열해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다. 섬세한 묘사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관리가 용이하고 보존력이 탁월하며 무엇보다 빛을 받아 반짝이면 환상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교회가 지어지고 그곳을 그림으로 장식해야 했던 기술자들은 난생 처음 기독교라는 신생 종교의 가르침을 시각적으로 표현해야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이들은 아직 창작하는 미술가가 아니라 제작하는 기술자였다. 재료를 능숙하게 다루어 형상을 만드는 일은 육체노동으로 여겨졌다. 교회를 장식해야하는 임무가 떨어졌을 때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이미지에 기독교적인 내용을 입히는 것이었다. 로마의 산타 푸덴치아나(Santa Pudenziana) 교회 앱스 모자이크는 그 당시 기술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교회건축에서 앱스(apse)는 제단이 놓인 뒤쪽 공간의 끝 쪽 벽면을 가리킨다. 앱스의 상단 부분은 움푹 들어간 반구형으로 마무리되어 있으며 많은 경우 모자이크나 프레스코 장식이 들어간다. 산타 푸덴치아나의 앱스 모자이크는 420년경에 제작이 되었다. 로마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초기기독교 시기의 모자이크 작품이다.모자이크에는 옥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덥수룩한 수염의 중년으로 그려진 그리스도를 비롯해 모자이크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모두 고대 로마의 의상인 토가(Toga)를 입고 있다.황금색의 화려한 토가는 그리스도의 위엄과 고귀함 그리고 성스러움을 드러낸다.값진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황금 보좌에 앉은 그리스도는 오른팔을 넓게 펼치며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왼손으로 펼쳐 보이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라틴어 문구가 쓰여 있다. “Dominus conservator ecclesiae Pudentianae”, 번역하면 “주님이 푸덴치아나 교회의 보호자이시다”라는 뜻이다. 이 문구만 아니라면 모자이크가 묘사하는 장면을 로마의 어느 철학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장면이라 해석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모자이크의 후경에는 견고하게 세워진 건축물들이 그려져 있다.흔히 천국을 상징하는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해석된다. 짙은 구름이 가득한 하늘에 무언가 신비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위로 거대한 황금 십자가가 세속적 시공을 초월한 듯 하늘에 떠 있다. 십자가의 의미는 공공연하다. 인류의 타락, 죄와 심판,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구원이라는 기독교 핵심교리를 함축해 상징하는 것이 십자가다. 인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귀한 죽음을 상징하는 십자가 좌우로 실체를 알 수 없는 날개 달린 생명체가 보인다.십자가 주변에 떠있는 생명체들은 신약성서의 4복음서를 기록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대한 상징이다.사람은 마태를, 사자는 마가를, 황소는 누가를, 독수리는 요한을 상징한다. 이 같은 상징의 성서적 근거는 요한계시록 4장에서 찾을 수 있다. 산타 푸덴치아나 앱스 모자이크에 묘사된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와 4복음서자들의 상징은 ‘영광의 그리스도(Majestas Domini)’라고 하는 독립된 도상으로 발전해 중세미술에 나타난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2022-10-31

교회건축과 바실리카

서양미술사는 서유럽지역에서 나타난 미술을 주로 다룬다. 시기적으로는 4세기 초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서양미술사가 시작된다. 유럽문화의 뿌리가 되는 그리스와 로마시대 미술은 여러 시대에 걸쳐 서양미술의 모범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인용되기는 하지만 서양미술사의 직접적인 연구영역은 아니다.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내린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도들의 종교 활동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밀라노칙령 이전 기독교도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해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기독교도들은 박해를 피해 지하무덤이나 가정에 숨어서 몰래 예배를 드렸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인정하게 된 것과 관련해 설화처럼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후기 로마제국은 광활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네 명의 황제가 구역을 나누어 다스리는 사두정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사두정치는 오래 존속하지 못했다. 황제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312년 10월 28일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와 로마 근교 밀비우스 다리에서 결전을 벌였다. 전투 전날 밤 콘스탄티누스는 신비한 체험을 한다. 막사에서 잠을 청하던 콘스탄티누스에게 천사가 나타났다. 천사는 십자가를 보여주며 ‘이 표식 아래 승리를 얻을 것이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어찌할 바를 몰랐던 콘스탄티누스는 십자가 모양을 깃발과 방패에 새긴 후 전투에 나섰다. 그리고 승리를 거두 얻다. 십자가의 도움으로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믿은 콘스탄티누스는 이듬해인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해 기독교를 인정했고 이로써 서양미술사의 첫 단추가 끼워졌다.종교 활동이 허용된 기독교도들이 마주한 첫 번째 문제는 예배드릴 적절한 공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신전을 개조해 교회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교도들이 우상을 모신 곳이라는 종교적 거부감 외에도 신전의 내부 공간이 협소했다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다. 군중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넓은 공간이 필요했던 기독교도들의 눈에 들어 온 것이 바실리카였다. 공공건물이었던 바실리카는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건축구조를 가졌다. 장방형(長方形)의 바실리카는 넓은 공간을 갖추고 있어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사고 팔던 실내시장의 기능을 했으며 재판이 진행되기도 했다. 다수의 사람들이 동시에 군집할 수 있을 정도로 실내 공간은 충분히 넓었다. 출입구 반대편 끝 쪽에 재판장의 자리가 무대처럼 조성되어 있었던 것도 교회로 쓰기에 유리한 구조였다. 건축적으로 시선이 집중되는 그곳에 기독교도들은 예배의 중심인 제단을 모셨다.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에 교회를 짓도록 명령했다. 그렇게 건축된 것이 라테라노의 산 조반니,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이들은 모두 바실리카 형식으로 지어졌다. 콘스탄티누스 때 건축된 이 교회들 중에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지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재건축된 것이고 옛 모습은 추측해 재구성한 도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장방형의 평면도를 보이는 옛 성베드로 대성당 내부는 모두 다섯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중앙에는 넓고 높은 공간 신랑(身郞)이 위치해 있고 좌우에 각각 두 개씩 낮고 좁은 통로 측랑(側廊)이 마련되어 있다. 신랑과 측랑 사이에는 줄지어 서 있는 기둥들이 공간의 경계를 이루고 천장은 열려 있어 대들보와 지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바실리카에서 교회건축의 모범을 발견한 기독교도들은 또 다른 중요한 문제에 부딪혔다. 교회를 어떻게 장식해야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기독교가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는 우상숭배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 내에서의 성화상 사용에 대한 입장차는 이후에 벌어질 동서 교회의 분열은 물론이고 미술사 전개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2022-10-10

공립미술학교의 시작 : 프랑스 왕립미술학교

미술이 본격적으로 제도권 기관에서 교육되어진 것은 1648년 프랑스에서였다. 프랑스 보다 80여 년 앞선 1563년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1세에 의해 피렌체에 ‘아카데미아’가 설립되기는 했었지만 이곳은 미술교육기관이라기 보다는 학술적 논의가 이루어진 미술원의 성격이 강했다. 프랑스 왕립아카데미 역시 미술원의 기능을 일부분 수행하기는 했지만 일차적인 역할은 절대왕정의 통치철학에 부합하는 미술가를 길러내는 것이었다.아카데미에서는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졌고 오랫동안 미술창작의 규준으로 작용하게 될 이론들이 정립되었다. 예를 들어 역사화,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 등 주제에 따라 회화 장르를 구분한 것이 아카데미이다. 이렇게 회화를 구분한 것은 장르 간에 서열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역사화는 성서나 신화, 역사적인 사건을 주제로 다룬다. 주로 위대한 인물들의 영웅적인 행위가 묘사되어 있다. 역사화는 가장 높은 서열에 위치해 있다. 반대로 서열이 가장 낮은 회화 장르는 풍속화이다. 풍속화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역사화를 그려야 했다. 오로지 역사화를 그리는 최고 실력의 화가에게만 왕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서양미술사 최초 대규모 전시회의 시작도 아카데미에서 찾을 수 있다. 루이 14세 치하, 왕실에서 추구하는 미술취향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1667년 전시회가 기획되었다. 처음에는 아카데미 강당에 작품을 걸고 시작된 전시회가 왕실의 요청에 따라 매해 정기적으로 개최되면서 몇 차례 장소가 변경된다. 1725년부터 아카데미 전시회 개최장소가 루브르 궁전 살롱 카레(Salon Carr00E9)의 붙박이 행사로 이루어졌고 이때부터 ‘살롱전’이라 불리게 된다.아카데미의 교육과정은 체계화 되어 있었다. 신입생들은 거장들의 작품을 옮겨 놓은 판화를 모범 답안처럼 열심히 따라 그려야 했다. 거장들의 눈을 빌려 구도를 파악하고 인체와 인물 묘사를 익혔다. 그런 후 석고상으로 데생 연습을 한다. 평면을 평면에 모사하는 것과 입체인 석고상을 평면에 옮기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석고상의 입체적인 형태를 분석하고 비례와 균형 그리고 빛이 닿는 면과 그림자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어야 설득력 있는 그림이 만들어진다. 이 과정을 모두 마친 학생들은 실제 모델을 그리는 수업에 참여한다.아카데미는 해마다 ‘로마상’이라는 공모전을 열어 뛰어난 학생을 선발해 로마로 유학할 기회를 주었다. 17세기와 18세기 미술 공부를 위해 유학을 간다면 로마로 향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고대 유적을 직접 접할 수 있었던 로마에서는 아카데미가 모범으로 삼았던 르네상스 최고의 걸작들이 여전히 존재감을 뿜어냈다. 당시 미술의 최신 유행 바로크가 로마에서 발달했고, 각국의 미술가들이 활발하게 교류한 곳이 로마였다. 프랑스 왕실은 로마의 메디치궁을 매입해 그곳에 왕립미술학교 분관을 설치했고, 기량이 뛰어난 학생들을 국가 장학생으로 선발해 수년 동안 유학할 수 있게 있다.프랑스의 이 같은 미술환경 속에서 화가로 성공할 수 있는 엘리트 코스는 다음과 같다. 명망 높은 미술가의 문하생으로 기본기를 다지고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한다. 로마대상을 수상한 후 몇 년간의 유학생활 동안 수준을 한껏 끌어올린 후 파리로 돌아와 살롱전에 출품해 주목을 받고 궁정화가로 발탁된다. 궁중화가로 일하면서 아카데미 교수가 되어 영향력을 펼치면 화가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명예와 권력을 얻게 된다.유럽 여러 나라들은 프랑스를 모범삼아 왕립미술학교를 세웠다. 1713년 마드리드에 스페인 왕립미술학교가, 조금 늦은 1768년 영국 왕립미술학교가 설립되었다. 프랑스 왕립미술학교는 1791년 프랑스 혁명정부에 의해 폐쇄되었다가 1803년 미술학교 보자르(Beaux-arts)로 새롭게 문을 열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2-09-19

살아 있는 말을 작품으로… 가난한 미술 ‘아르테 포베라’

현대미술에서 1960년대는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전환이 진행되던 시기이다. 이미 20세기 초부터 회화나 조각 같은 전통 매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미술 형식들이 등장해 미술의 내연과 외연을 넓혀주었다. 어쩌면 6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이 보여준 탈경계는 반세기전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현대미술에서 이탈리아는 지금까지도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수천 년의 미술을 이탈리아가 이끌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현대미술에서 이탈리아의 영향력은 미미하다. 1909년 마리네티가 일으킨 ‘미래파(Futurismo)’가 그나마 꿈틀거렸다 평가할 수 있지만, 그마저 세계대전의 발발로 금세 꺼지고 말았다. 1960년대 후반 중북부 이탈리아 주요 도시들에서 포스트모던을 대표할 만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미술사는 이 움직임을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라고 불렀다.아르테 포베라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것은 이탈리아 출신의 미술평론가이자 큐레이터였던 제르마노 첼란트(Germano Celant)이다. 첼란트는 미술가들이 사용한 값싼 재료에서 하나의 미술 운동으로 묶을만한 공통분모를 찾았다. 아르테 포베라를 대표하는 미술가로는 야니스 쿠넬리스,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주세페 페노네, 마리오 메르츠 조반니 안셀모 등응 꼽을 수 있는데, 이들 모두 전통적으로 사용된 미술 재료 대신 주변에서 발견되는 흔하고 평범한 재료로 작품을 창작했다.아르테 포베라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쿠넬리스 1969년작 ‘무제(열두 필의 말)’이다. 쿠넬리스는 로마에 새롭게 문을 연 아티코 갤러리 지하 창고에 살아 있는 열두 마리 말을 전시했다. 쿠넬리스의 작품은 미술계 안팎으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어떤 평론가는 쿠넬리스의 작품에 대해 “동물의 물리적 현존은 저속한 냄새와 소리가 갤러리로 침투했음을 의미했다. 미술가의 개입이 없었음이 명백하고 순전히 모방일 뿐인 이 작품은 창조로서의 미술이 사멸했음을 알리는 듯했다.”살아 있는 말을 전시했다는 파격적인 발상이 평론가의 심기를 아주 불편하게 한 모양이다. 하지만 반문한다. 이미 쿠넬리스 보다 반세기 앞서 뒤샹은 남성 소변기를 작품으로 제시한 적 있고, 미국에서는 앤디 워홀이 슈퍼마켓 진열대에 놓인 깡통을 작품으로 선보이지 않았는가. 미술가의 개입 없이도 미술작품이 탄생될 수 있는 시대였고, 엄격하게 보자면 미술가의 개입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쿠넬리스가 전시를 위해 살아 있는 말을 작품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쿠넬리스는 앵무새나 선인장과 같은 살아 있는 생명체를 작품으로 전시했다.쿠넬리스는 근본적으로 스스로의 미학적 정체성을 회화에서 찾았다. 그가 선택한 말들은 일종의 ‘살아 있는 그림(Tableau Vivant)’으로 볼 수 있다. 다른 관점에서 쿠넬리스의 작품은 20세기 미술을 혁신한 뒤샹의 업적을 계승해 살아 있는 말을 새로운 개념에서의 ‘레디-메이드’로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소변기를 그것의 원래적 기능이나 목적에서 떼어내 미술이라는 새로운 문맥에 배치해 작품이 탄생될 수 있었다면 살아 있는 말을 작품으로 전시한다고 해서 전혀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인다.쿠넬리스는 작업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전통 미술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생소한 소재나 재료를 사용한다. 석탄이나 철근처럼 산업화와 공업화를 연상하는 작품이 있는가하면, 양모나 커피가루 등 문화와 현대사회의 경제구조를 암시하는 재료로 작품을 창작했다. 쿠넬리스의 작품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작품이 제작되고 설치되는 지역이나 국가의 문화적 역사적 장소적 맥락이다.특히 쿠넬리스는 작품을 통해 소비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획일화된 가치에서 벗어나 일상의 빈곤한 물건들 사이에 스며들어 있는 삶의 본질을 좇았다./김석모 미술사학자

2022-09-05

자기를 그리는, 미술가들의 자화상

자기가 자기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자화상’이라고 한다. 자화상은 회화의 여러 장르들 중 초상화에 속한다. 초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려진 인물의 ‘재확인 가능성’으로 화가는 모델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리지 않는다. 초상화는 주로 의뢰를 받아 그려졌기 때문에 주문자의 바람이 강하게 투영되어 이상화나 미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 통치자들의 모습을 그린 흉상이나 기마상을 감안한다면 서양미술사에서 자화상의 기원은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미술가가 자신의 얼굴을 독립된 주제로 그린 것은 빨라야 중세 후기이고 본격적으로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였다.미술가가 자신의 모습을 작품에 묘사한 것으로 서양미술사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작품은 프라하의 성 비투스 대성당에 설치되어 있다. 보헤미안 지역에서 건축과 조각으로 큰 명성을 날렸던 파를러(Parler) 가문 출신의 페터 파를러는 1380년쯤 자신의 모습을 조각에 담았다. 왕족이나 귀족, 고위 성직자들의 흉상들과 나란히 미술가의 자소상이 교회 벽면에 설치된 것으로 보아 그의 영향력이 대단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파를러 집안에 속한 미술가들은 자신들이 제작한 조각 작품에 가문의 문장을 새겨 넣음으로써 미술품 브랜딩에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독일 뉘른베르크의 성 로렌츠 교회에는 또 다른 조각가의 오래된 자소상이 하나 있다. 파를러의 작품처럼 독립된 자소상은 아니지만 아담 크라프트(Adam Kraft)라는 이름의 조각가가 성함 타버나클(tabernakel)을 제작하면서 자기의 모습을 집어넣었다. 1493년과 1496년 사이 화려한 장식의 고딕양식으로 만들어진 성함의 높이는 무려 20m에 달한다. 가장 아래에는 성함을 지탱하는 다리들이 있고 그 사이 사이 작은 크기의 인물상들이 몸을 숙여 등으로 무게를 견디고 있다. 조각가는 이 인물들 중 하나에 자기 모습을 새겨 넣었다. 이 조각은 미술사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가의 모습을 담은 전신조각상으로 여겨진다.미술가의 자화상은 미술가의 사회적 지위와 깊은 관계를 가진다. 르네상스에 앞선 중세시대 동안 미술가들은 수공업자에 불과했다. 육체노동으로 여겨졌던 미술가들의 창작활동이 르네상스에 이르러서야 고도의 지적 정신적 능력을 요구한다는 인식이 생겼다. 이탈리아 출신의 거장들이 르네상스의 문을 열었지만 정작 이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그림의 주제로 담지 못했다. 베노초 고촐리나 마사초, 라파엘로와 같은 화가들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거대한 그림에 등장하는 다수의 인물들 속에 자신의 얼굴을 숨기듯 슬쩍 집어넣기도 했다.서양미술사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기념비적으로 그린 화가는 독일의 르네상스 거장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이다.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뒤러의 자화상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미술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무엇보다 화가의 자화상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면 빠질 수 없이 언급될 수밖에 없는 걸작이다. 금빛 곱슬머리가 길게 흘러내린다. 영민하고 날카로운 눈빛은 세계를 꿰뚫고 유난히 밝게 빛나는 손은 무엇이든 창작해 낼 수 있는 최고의 도구처럼 보인다. 뒤러의 자화상은 화가의 모습 너머에 있는 존귀함과 고귀함까지 뿜어내고 있다.뒤러보다 한 세기 뒤에 활동한 화가로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렘브란트(1606∼1669) 또한 자화상 계보의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 렘브란트는 서양미술사 전체를 통틀어 자화상을 가장 많이 남긴 화가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유화, 드로잉, 판화를 포함해 80여점 가까이나 된다. 빈센트 반 고흐가 남긴 자화상이 36점 정도로 알려져 있으니 수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제작연도에 따라 나열하면 화가가 살아온 생의 여정을 읽을 수 있다. 비단 렘브란트만이 아니라 모든 미술가의 자화상에는 미술가 개인의 삶과 고뇌 등 그의 인간적 면모가 투영되어 있음으로 감동의 깊이가 다르게 다가온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2-08-22

라파엘로 걸작 ‘의자에 앉은 성모 마리아’

라파엘로作 ‘의자에 앉은 성모 마리아’. 1513년경, 피렌체 팔라초 피티 소장 피렌체 팔라초 피티(Palazzo Pitti)는 1458년 피렌체의 유명한 은행가 루카 피티를 위해 지어졌고 1549년 메디치 가문이 매입해 토스카나 대공의 저택으로 사용되었다. 피티 궁전은 대공 페르디난도 2세의 지시에 따라 1637년부터 1647년 사이 전시공간으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이때 메디치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 르네상스와 바로크 작품을 모아 전시하기 위한 공간이 마련되는데 이곳이 피티 궁전을 대표하는 회화 전시관 ‘팔라티나 미술관’으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루벤스 등 서양미술사 최고 거장들의 작품 500여점이 소장되어 있다.피티 궁전의 개축을 책임진 사람은 화가이면서 건축가였던 피에로 다 코르토나였다. 화려한 대리석 계단, 백색의 스투코로 장식된 천장, 장식적인 건축에 조화를 이루며 벽면에는 몇 점의 회화 작품들이 아래 위로 걸려있다. 전시된 작품들 중 그 어느 것도 미술사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전시장 벽면에 걸려있는 작품들은 결코 자신의 목소리를 지나치게 크게 내지 않는다. 어쩌면 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건축 공간을 수놓는 화려한 장식 속에서 그림들조차도 장식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걸려 있기 때문이다.감상자의 눈높이 보다 훨씬 높은 곳에 걸려 있는 작품들을 제대로 감상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작품 표면에 남아 있는 붓 자국이나 색감을 면밀하게 살피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그저 위를 쳐다보며 그림의 이미지만 겨우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모든 작품들이 불친절하게 걸려있는 것은 아니다. 몇몇 작품들은 아주 적당한 눈높이에 설치가 되어 있어 비교적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 가능한데 그 중에 라파엘로의 걸작‘의자에 앉아 있는 성모 마리아(Madonna della Seggiola)’가 특히나 시선을 사로잡는다.1513년에서 14년경에 그려진 라파엘로의 작품은 원형의 틀 안에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묘사하고 있다. 라파엘로는 원형의 틀이 가지는 형태를 인물들의 움직임 속에 투영시킴으로써 틀과 인물 간의 관계를 조화롭게 해결한다. 원형과 조화로운 회화적 공간을 연출하기 위해서 팔과 다리, 머리와 휘감긴 옷 주름 등이 서로 얽히고설킨 복잡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둥근 화면과 그림 속 인물들 간의 조화는 거의 완벽에 가깝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하지만 감상자를 응시하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시선이 어딘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경계하는 듯한, 겁을 먹은 듯한 표정 때문이다. 마치 둥근 천장을 통해서 침입자인 우리를 경계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아기 예수는 몸을 뒤로 움츠리며 어머니 마리아의 품을 파고든다. 그림 속 두 인물들은 왜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까?언제나 그렇듯 라파엘로는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성모 마리아를 표현했다. 하지만 그녀가 발산하는 아름다움은 여성의 세속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종교적 숭고미이다. 라파엘로는 인물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던 르네상스 거장이다. 그의 작품들은 후대 미술가들에게 중요한 모범이 되어 지속적으로 모사되었다.18세기 독일 출신의 미술사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은 라파엘로가 미켈란젤로를 넘어서고 티치아노나 카라바조 보다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수백 년 동안 숱한 미술가들이 라파엘로의 작품을 모방했다. 어쩌면 그러한 이유로 후대 어느 시점에 와서는 그의 작품들이 조금도 신선하지 않은 그래서 오히려 식상한 것으로 여겨졌는지 모르겠다.실제로 1848년 영국에서는 ‘라파엘로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외친 미술가 그룹이 결성되었다. 라파엘전파(Pre-Raphaelite)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젊은 미술가들은 라파엘로 이후로 미술이 틀에 박혀 기계적으로 답습되는 퇴보를 걸어왔다 믿었고 시간의 흐름을 그 이전으로 돌려놓으려고 했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2022-07-25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과 미술가의 사회적 신분

서양미술사를 지역적으로 구분할 때는 대개 알프스 산맥이 기준이 되어 이탈리아를 알프스 남쪽 독일이나 프랑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옛 이름 플랑드르 지역을 알프스 이북이라고 부른다. 종종 미술사 관련 책이나 글을 읽다보면 르네상스 미술을 설명하는 중에 북유럽이라는 명칭이 언급되곤 한다. 이때의 북유럽은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이 아니라 알프스 북쪽에 위치한 서유럽 국가를 가리키는 것이니 유의할 필요가 있다.중세의 뒤를 잇는 르네상스는 15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 중에서 르네상스의 발상지는 꽃의 도시 피렌체이다. 수많은 천재들이 이탈리아에서 미술의 역사를 새롭게 전개해 가고 있을 때 알프스 너머 북쪽 지역의 미술을 지배했던 것은 중세적 전통이었다. 알프스를 사이에 두고 같은 시기 남쪽과 북쪽 지역의 미술가들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알프스 북쪽 지역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보다 대략 100년 늦은 1천500년 전후이다.알프스 이북에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전파한 인물은 독일 뉘른베르크 출신의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이다. 회화는 물론이고 특히 탁월한 판화로 명성이 자자했던 뒤러는 1494∼1495년과 1505∼1507년 두 번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미술의 중심 도시들을 두루 다니며 현지 거장들과 친분을 쌓으며 르네상스 미술을 깊이 받아들였다. 이탈리아로의 먼 길을 떠나면서 뒤러는 그가 머물렀던 마을의 모습이나 실제 풍경을 수채화에 담기도 했다. 상상이나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본 풍경을 주제로 한 서양미술사 최초의 작품들로 풍경화라는 장르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그려져 미술사적 가치가 더욱 크다 할 수 있다.그렇다면 뒤러가 두 번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에서 배운 것은 무엇일까? 그가 경험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에게 익숙했던 그림들과 이탈리아 화가들의 그림은 어떻게 달랐을까? 중세와 르네상스 미술의 가장 큰 차이는 자연과 대상을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눈으로 보고, 과학적으로 실험하고, 논리적으로 분석한 후 작품을 제작했다. 설득력 있는 공간을 묘사하기 위해 수학적으로 계산된 원근법을 발명했고 정확한 인체 묘사를 위해 근육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분석했을 뿐만 아니라 해부학을 통해 몸의 구조를 밝혔다. 이 모든 것이 의심의 여지없이 알프스 너머에서 온 뒤러에게 경이로운 것으로 여겨졌으리라. 그런데 뒤러가 가장 놀랍게 여긴 것은 다른 것이었다. 격이 다른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사회적 신분이다.중세동안 미술가들은 수많은 걸작들을 남겼지만 대부분 이름 없이 사라졌다. 이름으로 기억될 만큼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미술가의 행위는 창작이 아니라 육체노동으로 여겨졌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들의 위대한 발견 근저에는 기필코 자신들이 남긴 작품이 보잘 것 없는 노동의 결과가 아니라 학식과 정신작용을 통한 창작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고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여전히 중세를 살았던 뒤러에게 귀족들에게 초대되어 함께 식사를 즐기며 지체 높은 학자들과 서슴없이 지적 대화를 주고받는 이탈리아의 분위기는 큰 충격을 안겨주었을 것이다.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에 소장된 뒤러의 초상화는 뒤러가 첫 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 온 후에 그려진 것이다. 어두운 배경 위로 금발의 곱슬머리를 한 뒤러의 모습이 나타난다. 굳게 다문 입술과 정면을 응시하는 두 눈은 자존감으로 충만해 있다. 흡사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탈리아나 그밖에 어떤 거장들도 뒤러에 앞서 감히 이처럼 자신에 차 있는 자화상을 남긴 적이 없다. 뒤러의 자화상이 그 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의 자화상은 한 미술가의 존재를 드러내는 기념비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에 대한 미술가의 요청으로 읽혀질 수 있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2-06-27

우리는 왜 뱅크시에게 열광하는가?

동해 번쩍 서해 번쩍 홍길동 같은 영국 미술가가 있다. 뱅크시(Banksy)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그는 브리스톨 출신으로 1974년 태어났다는 것 이외에 알려져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잠든 도시의 밤을 누비며 건물 외벽에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리고 사라지는 그를 가리켜 그래피티 아티스트 혹은 스트리트 아티스트라고 부르지만 미술가 스스로는 자신을 ‘예술 테러리스트’라고 칭한다. 그를 부르는 명칭이 어떻든 간에 분명한 것은 그가 우리시대 대중들을 가장 열광시키는 미술가라는 사실이다.무엇보다 자유에 큰 가치를 두는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은 규정되어 진 것에 대한 저항한다. 이들의 낙서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부정적이다. 공공기물을 훼손하고 도시 미관을 해치는 반달리즘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뱅크시의 작품만큼은 다르다. 상업주의 미술에 반대해 누구도 소유할 수 없도록 건물 벽면에 그렸지만 뱅크시의 바람과는 달리 그의 작품은 엄청난 가격에 거래되기 시작했다. 자신의 작품이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자 뱅크시는 엉뚱한 일을 벌였다. 2013년 어느 날 뱅크시는 센트럴 파크에 노점을 깔고 자신의 그림을 팔기 위해 내놓았다. 이것이 뱅크시의 깜짝 이벤트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시카고에 사는 한 남성이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 그림 4점을 60달러에 구입했다. 이것이 뱅크시의 원작인 것이 밝혀지자 그림 값이 순식간에 45만달러로 치솟았다. 또 이런 일을 벌이기도 했다.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아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그림을 걸었다. 영국박물관 전시실 벽면에 소를 사냥하고 쇼핑하는 원시인 그림이 그려진 돌을 전시했다. 며칠이 지났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한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현대미술관에서도 비슷한 장난을 쳤다. 이 일로 ‘뱅크시 당했다’는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뱅크시는 2017년 팔레스타인 베들레헴에 더 월드 오프(The walled off)라는 이름의 호텔을 열었다. 베들레헴은 가장 중요한 기독교 성지 중 하나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분쟁지역이기도 한 이곳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세워진 높은 장벽이 있다. 뱅크시는 장벽 바로 옆에 호텔을 세웠다. 내다보이는 유일한 풍경은 높은 장벽 뿐이고 하루 종일 해 드는 시간도 고작 25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호텔 벽면 곳곳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처한 힘든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뱅크시의 호텔 전체가 평화와 인권을 위한 기념비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지만 특히 3번 객실 벽면 장식 그림이 큰 울림을 준다.침대 머리와 맞닿은 벽면에 두 남자가 그려져 있다. 이스라엘 군인 복장의 한 남자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팔레스타인 남자가 깃털을 날리며 베개 싸움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복잡한 역사와 더 복잡한 정치적 갈등이 불러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충돌을 함축하는 뱅크시의 그림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문구처럼 가슴에 확 와 닿는다.코로나가 창궐하던 2020년 뱅크시는 영국 남부 사우샘프턴 병원에 ‘게임 체인저’라는 그림을 기증했다. 가로 세로 1미터 크기의 흑백 그림에는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배트맨이나 스파이더맨을 선택하는 대신 마스크를 착용한 간호사 피규어를 높이 들고 있다. 코로나로 모든 희생을 감내하는 의료진이 진정한 영웅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기증된 그림은 경매를 통해 1천680만 파운드, 우리 돈으로 260억원에 판매되었고 수익금은 모두 의료진과 환자를 위해 사용되었다고 한다.뱅크시의 그림은 어렵지 않다. 아무리 심각한 문제도 뱅크시를 거치면 부드러워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메시지는 약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해진다. 뱅크시의 메시지는 항상 가장 현실적이다. 뱅크시는 관념적이지 않다. 뱅크시에게 정의는 구호가 아니라 실천이다. 그리고 그런 뱅크시는 분명한 변화를 일으킨다. 미술이 이래야 하지 않는가?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2-06-06

깃발인가? 아니면 깃발을 그린 그림인가?

재스퍼 존스(Jasper Johns)의 작품 ‘깃발’은 1950년대 중반에 제작되었다. 작품에서 읽혀지는 이미지는 누가 보더라도 미국의 국기 성조기이다. 붉은 색과 흰색의 얇은 띠가 서로 교차하며 화면을 가로로 나누고 좌측 상단 짙은 파란색 배경의 사각형 위로 미국의 주를 상징하는 별들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다.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 성조기의 별들은 모두 쉰 개이지만 재스퍼 존스의 작품에는 두 개가 빠진 마흔 여덟 개의 별들이 그려져 있다. 그 이유는 그림이 제작된 1950년대 중반에는 알래스카와 하와이가 아직 독립된 주로 편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재스퍼 존스의 깃발이 그려질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미술사조는 추상표현주의이다. 추상표현주의는 1940년대 중반 이후 뉴욕을 중심으로 확산된 미국 최초의 현대미술 움직임이다.대표적인 미술가로는 재스퍼와 운동감 넘치는 액션 페인팅의 잭슨 폴록, 빌렘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 정적이며 명상적인 화면을 보여준 색면추상의 마크 로스코, 바넷 뉴먼, 애드 라인하르트 등이 있다.추상표현주의를 통해 미국 미술가들은 유럽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새로운 추상형식을 선보이며 드디어 서구 미술의 흐름을 주도했다. 추상표현주의는 외부 세계를 모방하거나 재현하지 않기 때문에 비관계적, 비대상적, 반환영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회화가 철저하게 추상이기 위해서는 회화라는 매체의 순수성을 고수해야 하고 추상표현주의를 이론적으로 정립했던 그린버그와 같은 비평가들은 회화의 매체적 순수성을 평면성에서 찾았다.재스퍼 존스의 작품 ‘깃발’은 1950년대 중반 추상표현주의가 미국 미술의 주된 흐름으로 유행하고 있을 때 제작되었다. 존스의 작품은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추상표현주의에 내재된 수많은 미학적 담론들을 동시적으로 포착하고 있기 때문에 순식간에 미국 미술계 중심 화두로 떠오르게 된다.재스퍼 존스의 ‘깃발’은 추상이면서 추상이 아닌 작품이며, 환영적이면서 동시에 비환영적인 평면 작품이다. 작품 ‘깃발’이 추상이 아닌 이유는 미국의 국기 성조기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것이 추상인 이유는 ‘깃발’을 구성하는 희고 붉은 색의 선과 별 그리고 사각형은 모두 기하학적인 도형이기 때문이다. 작품 깃발이 환영적인 까닭은 그림이 성조기를 떠올리고 성조기는 수많은 의미를 품고 있어서이다.하지만 동시에 이 그림이 비환영적인 이유는 이것이 실제 성조기가 아니라 원래부터 평면적인 성조기의 이미지를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재스퍼 존스는 자신의 작품이 하늘을 펄럭이는 실제 성조기가 아니라 성조기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그림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파라핀을 녹여 그림을 그리는 납화법이라는 번거로운 제작 방법을 선택해 화면에 거친 질감과 얼룩이 그대로 드러나게 했다. 그림을 자세히 관찰하다 보면 화면 바탕에 신문의 글자들이 읽혀진다. 이 또한 화가가 자신의 작품이 성조기를 재현하거나 모방한 것이 아니라 성조기 이미지를 통해 추상표현주의를 넘어서 새로운 추상미술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는 신호로 이해된다.재스퍼 존스의 대표작으로는 과녁이나 지도, 숫자, 알파벳 등이 있다. 미술가가 소재로 취하는 대상들은 그 자체로 평면적이거나 추상적이라는 점에서 깃발에서 논의된 맥락들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추상과 재현의 경계에 위치한 존스의 이미지들은 주로 일상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미술사는 그의 작품에서 대중적 이미지를 수용한 팝아트의 출현을 예감하기도 한다./미술사학자 김석모

2022-05-23

쉰아홉 번째 베니스 비엔날레

베니스 비엔날레 방문을 위해 짧은 일정으로 먼 길 여행을 떠났다. 팬데믹 이전의 일상을 조금씩 회복하는 듯 느껴졌다.스마트폰에 저장된 백신접종 확인서만 내밀어 보이는 절차만 추가되었을 뿐 출국장의 분산함이 사라졌다는 것 이외에 공항의 풍경도 예전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비행경로가 달라졌다는 것. 그래서 비행시간이 3시간 남짓 늘어났다는 것 이외에 하늘에서 내려다 본 땅에도 큰 변화는 없어 보였다.베니스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바포레토의 느린 움직임이 물 위에 그려진 하늘 풍경에 훼방을 놓는다. 도시 곳곳은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상상 초월하는 베니스의 인파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면 지금의 미묘한 한산함을 전혀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찾았다.올해로 벌써 쉰아홉 번째로 개최되는 비엔날레다. 베니스에서 열리는 미술 비엔날레는 역사성으로 보나, 규모로 보나, 주목성으로 보나 여전히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베니스 비엔날레의 특징은 전시구성이 장소적으로 형식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다. 공원 자르디니에는 스물여섯 개 나라의 국가관이 마련되어 있다. 한정된 공간 때문에 1995년 우여곡절 끝에 한국관이 세워진 것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새로운 국가관이 들어오지 못한다. 자르디니에 자리를 얻지 못한 나라들은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국가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심리적으로 자르디니에 포함된 국가관 그리고 그렇지 못한 국가관 간의 심리적 서열이 생겨났다. 자르디니에 국가관이 있느냐 아니냐가 공교롭게도 국가파워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비엔날레 참가국들은 각자의 기준에 따라 커미셔너와 미술가를 선정해 국가관 전시를 진행한다. 각 국가별 전시가 이루어지다 보니 국내 언론에서는 베니스 비엔날레를 ‘미술 올림픽’으로 소개하기도 한다. 이런 비유가 적절한지 잘 모르겠다. 이번 비엔날레의 한국관은 김윤철 작가의 기계생명체를 연상시키는 키네틱 설치 작품들로 채워졌지만 전시 기술적 완성도에서 사뭇 아쉬움을 보였다.국가관이 위치한 자르니디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아르스날레라는 곳이 있다. 아르스날레는 산업화되기 이전 배와 무기를 만들던 거대한 일종의 군수산업 복합단지였다. 이곳에서 베니스 비엔날레의 또 다른 중심 행사가 진행된다. 자르디니의 전시들이 국가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면 아르스날레는 총감독의 기획아래 하나의 주제로 연결된 엄청난 규모의 전시가 만들어진다.올해 총감독으로 선정된 이탈리아 큐레이터 세실리아 알레마니는 ‘꿈의 우유’를 전시 주제로 내걸었다. 초현실주의 미술가 레오노라 캐링턴의 책 제목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아르스날레의 본전시에는 총감독의 기획의도가 집결된다. 58개국 213명의 작가가 참여한 본전시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특징은 여성 작가의 비율이 90%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구성에 이미 총감독의 분명한 의지와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한국 미술가로는 정금형, 이미래 두 사람이 초대 받았다.올해 베니스 비엔날레는 여성과 흑인여성이 주목을 끌었다. 본전시 최고 작가상은 미국의 흑인 여성작가 시몬 리에게 돌아갔고, 최고 국가가관의 명예를 차지한 것은 영국관이다. 영국관에서 소개된 소냐 보이스의 작품은 음악, 비디오, 콜라주가 결합된 사운드 설치작업으로 흑인 여성 뮤지션의 음악을 다루었다.비엔날레는 세계미술의 흐름을 읽는 중요한 바로미터로 여겨졌다. 지금도 그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측면에서 한계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전 세계 미술을 아우르는 전시와 연관 행사 규모로 미루어 보았을 2년의 준비 기간은 지나치게 숨 가쁘지 않은가 싶다./김석모 미술사학자

2022-05-02

재현과 추상의 미술사적 문제

“우리들이 예술가들에게 정말 고마워해야하는 이유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 너머 세상에 존재하는 예술가 수만큼 많은 세계를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이다. 그렇다. 프루스트의 말처럼 예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하게 해 준다. 미술가들은 무엇을 창작(創作)하는가? ‘창조(創造)’라는 말을 일부러 피했다. 창조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내는 것이므로 인간의 능력이 아니다. 인간은 창작할 뿐이고, 창작은 있는 것, 다시 말해 이미 존재하는 것을 새롭게 보는 행위이다. 바우하우스 교수였던 미술가 파울 클레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미술은 보이는 것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클레의 말 역시 프루스트의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오랫동안 미술은 보이는 것을 모방해 왔다. 아니, ‘미술이 모방에서 벗어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고 하는 것이 더욱 적확하다. 미술가들이 사물이나 대상을 모방하는 것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자각을 한 것은 대략 한 세기 반 남짓, 모방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룬 미술사적 성취가 ‘추상’이다. 회화든 조각이든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이 사라진 미술작품을 추상이라 한다. 다른 말로 비구상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사실 ‘비대상’으로 칭하는 것이 가장 명료하다.줄곧 보고 있는 대상의 외형을 작품에 옮기던 미술가들이 모방과 재현을 포기하고 난 후, 더욱이 기계적으로 사물의 이미지를 완벽에 가깝게 재현하는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위기에 빠진 미술가들은 스스로에게 어떤 과제를 새롭게 부여했을까? 모방하는 미술가의 눈은 외부를 향한다. 그렇다면 모방하지 않는 미술가의 눈은 무엇을 향할까?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세상의 다른 모습을, 대상의 이면을 보게 된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미술사의 크나 큰 변혁이기 때문에 현대미술과 이전의 미술을 구분 짓는 경계가 되기도 한다.대상의 모방과 재현에서 벗어난 미술가들은 현상을 그렸다. 인상주의자들은 빛의 변화가 만들어 내는 시각현상을, 야수파 미술가들은 대상으로부터 분리된 색채의 고유한 미적현상을, 표현주의자들은 외부 세계에 대한 인간 내면의 심리현상을 화면에 담았다. 추상미술의 선구자 바실리 칸딘스키는 음악의 작동 원리를 미술에 적용했다. 각각의 소리는 저마다의 음색을 지니고 있다. 음과 음이 이어져 선율이 만들어지고, 하나의 음이 다른 음과 부딪히면 화음이나 불협화음이 생겨난다. 속도와 리듬에 따라 음이 청자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심상이 달라진다. 칸딘스키는 색을 음으로 보았다. 색의 배열에 따라 색의 화음이 달라지고, 형태의 배열에 따라 색의 속도와 리듬이 달라진다. 음악이 청각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에 작용하는 것처럼 칸딘스키의 음악적 추상은 시각이 아니라 정신에 작용한다.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신지학에 심취해 있었던 몬드리안은 수직이나 수평 같은 단순한 형태와 무채색이나 삼원색 같은 기본색을 사용해 우주의 근원과 진리를 표현하고자 했다. 절대주의 미술운동을 이끌었던 러시아 미술가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보다 파격적인 추상을 끌어냈다. 흰색 바탕에 검은 사각형 하나가 그려진 1915년 작 ‘검은 사각형’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그림으로 검은색은 모든 색의 차이를 지워버리고 사각형은 모든 형태의 차이를 무효화 시켜버린다. 1919년 발표한 작품 ‘흰 바탕 위의 흰 정사각형’은 색을 완전히 배제시킨 가장 극단적인 추상으로 여겨진다.모방과 재현을 멈춘 미술가들은 창작의 자율성을 성취했다. 동시에 미술개념의 외연이 엄청나게 넓어졌다. 미술이 대상을 모방하고 재현하는 것을 멈추었을 때 비로소 미술은 미술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 미술가들은 가장 큰 난제를 맞닥뜨렸고 이후 한 동안 현대미술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흘러갔다. 이 문제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무엇이 제거된 대상을 대신할 것인가?’/미술사학자

2022-04-11

추상미술의 기원에 대하여

알아볼 수 있는 구체적인 형상이 없는 미술작품을 가리켜 추상(抽象)이라고 한다. 원래 추상은 여러 가지 사물이나 개념에서 공통된 특징이나 성질을 추출하여 파악하는 인식작용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연원을 밝힐 수는 없지만 추상은 구상과 대비되어 비구상적인 미술을 가리키는 용어로 통용되고 있다.그렇다면 미술가들은 언제부터 추상을 그리기 시작했을까?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꼽히는 몇몇 미술가들이 있다. 러시아 출신으로 독일 뮌헨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바실리 칸딘스키, 네덜란드의 피트 몬드리안, 감각의 궁극을 탐구한 우크라이나 태생의 카지미르 말레비치가 여기에 속한다. 이들 중 칸딘스키는 자칭 추상미술의 아버지이다. 그의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미술에서의 추상은 고전적 미술 관념에 균열을 일으키며 현대미술을 태동시킨 여러 미술가들의 실험들이 종합되고 집결되어 나타난 미술현상이기 때문에 특정 미술가를 추상의 창시자로 지목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추상의 태동과 전개과정에서 칸딘스키의 역할과 미술사적 업적은 충분히 결정적이라 할 수 있다.칸딘스키가 추상의 가능성, 다시 말해 대상을 그리지 않더라도 그림이 될 수 있다고 직감한 것은 1896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프랑스 인상주의 전시에서였다. 여러 작품들 중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끌로드 모네의 작품 ‘건초더미’였다. “불현듯 나는 마침내 처음으로 한 점의 ‘그림’을 보았다. 카탈로그의 제목을 읽고서야 그것이 건초더미를 그린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림을 보아서는 알아볼 수 없었다. 대상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 조금은 창피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화가는 어떤 권리로 이런 식으로 불명확하게 그림을 그렸단 말인가. 이 그림에서 대상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먹먹하게 느껴졌다.” 모네의 작품 앞에서 칸딘스키는 지금까지 그림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여겨졌던 대상이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그림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생각으로부터 그의 추상으로의 미학적 여정이 시작되었다.칸딘스키에게 추상의 가능성을 계시한 모네는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미술가이다. 인상주의는 사실주의와 더불어 고전미술의 문법을 파괴함으로써 현대미술의 빗장을 열어준 미술사조이다. 사실주의는 저널리즘의 매서운 눈초리로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한 시민사회로부터 잉태된 여러 사회문제들을 은유적 수사 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미술에 새로운 기능과 역할을 부여했다. 반면 인상주의는 미술의 내밀한 조형원리에 집중함으로써 규범과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미술에 퇴적된 고정관념들을 하나씩 제거해 갔다. 아카데미즘으로 대변되는 전통미술이 고정된 관념을 닫힌 원리에 입각해 그림을 그렸다면 인상주의자들은 그들이 직접 ‘본 것’을 그리기 시작했다.‘무엇을 보는가’하는 문제는 곧 ‘세계와 어떻게 관계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고전미술이 배우고 익힌 것을 그려냈다면 인상주의는 본 것을 그렸다. 고전미술이 관념과 지식에 관한 것이라면 인상주의는 시각적 경험에 맞닿아 있다. 보는 것을 그리고자 하는 화가는 필연적으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어떻게 보고 있는지 등에 대한 질문과 대결할 수 밖에 없다. 칸딘스키가 보았던 모네의 ‘건초더미’는 이러한 근본적 물음에 대해 화가가 탐구해 가는 과정이다. 모네에게 건초더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저 황량한 벌판에 놓인 대상에 불과하다. 그가 정말로 그리려고 했던 것은 공간, 대상, 빛, 대기 등의 요소들이 시각적 경험에 작용하는 방식이다. 동일한 대상을 다른 조건에서 반복해 그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모네는 추상이 아니라 건초더미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화면에 담았지만 칸딘스키는 그 안에서 대상을 넘어선 추상 회화의 가능성을 보았다./미술사학자

2022-03-21

유화물감이 바꿔 놓은 르네상스 미술

화가들이 유화물감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15세기 초반이다. 흔히 ‘아놀피니의 결혼식’(1434년경)으로 유명한 플랑드르 출신의 얀 판 에이크(1390∼1441)를 유화물감 사용의 보편화와 결부시켜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유화물감이 미술가들에게 가져다준 혁신은 무엇이었을까?유화물감이 보편화되기 전 화가들은 주로 나무판에 템페라로 그림을 그렸다. 템페라는 아주 오래된 회화기법으로 광석이나 식물에서 채취해 분말로 만든 안료를 주로 계란 노른자에 개어 그린 그림이다. 템페라 기법은 건조가 빠르고, 건조된 후에는 변질되지 않아 보존성이 뛰어나며, 생생한 색채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하지만 템페라는 건조가 빠르다 보니 부드러운 붓의 움직임을 통한 세부묘사에 어려움이 있고, 명암처리나 미묘한 색채 표현에 단점을 보인다. 템페라의 가장 큰 단점은 수정이 어렵다는 점이다. 유화물감은 템페라의 이러한 단점을 보완해 주었고 유화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플랑드르 지역(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지역)의 화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훨씬 더 섬세하고 완성도 높게 그릴 수 있게 되었다.서양미술사는 지리적으로 알프스 남쪽의 이탈리아와 알프스 이북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알프스 이북 플랑드르에서 사용된 유화물감은 몇몇 미술가들을 통해 이탈리아로 전파되었다. 유럽의 15세기는 지역에 따라 중세와 르네상스가 혼재된 시기였다.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르네상스가 꽃을 피웠지만 알프스 너머 북쪽 지역에서는 여전히 중세가 지속되고 있었다. 중세와 르네상스의 가장 큰 차이는 세계에 접근하는 방식과 세계를 이해하는 관점이다. 흔히 중세를 신과 교회 중심, 르네상스를 인간중심의 인본주의와 연결시킨다. 이러한 단순한 관계 맺기에는 많은 오류가 숨어 있다. 중세와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시대의 중심에는 신이 있었다. 결정적인 차이는 신과 신이 창조한 세계와 자연의 질서를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하는가 하는 것이다. 중세시대에 신과 세계를 사유하고 해석할 수 있는 권위는 오로지 교회에만 있었다. 르네상스가 도래하면서 그 채널이 다양해졌다. 논리적 인과관계에 근거한 이성적 판단, 실험과 관찰, 논리적 분석을 통해 지식이 습득되었다.유화기법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알았던 플랑드르 미술가들은 마치 거울이 세상을 비추듯 눈에 보이는 대상을 엄청난 섬세함으로 그림에 옮겨 놓았다. 반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분석적이고 과학적이며 이성적인 탐구를 통해 세계를 파악했다. 시각적으로 경험하는 현상들 근저에 존재하는 보다 근원적인 규칙과 법칙을 발견하고자 부단히 애를 썼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수학적으로 계산된 원근법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서양미술사’의 저자 E.H. 곰브리히는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 째로 2차원인 평면에 공간표현을 가능하게 한 원근법, 두 번째로 완벽한 인체 묘사를 가능하게 한 해부학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고대건축언어의 부활을 꼽고 있다.눈으로 본 세상을 그대로 모방하고 그림 속에 재현하려던 르네상스 미술가들이 마주한 난관은 어색함과 딱딱함이었다. 아무리 섬세하게 인체의 움직임을 표현하더라도, 아무리 정확하게 원근법적 공간을 구현하더라도 충분한 생동감과 생생함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유화물감이다. 경계를 흐리게 표현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푸마토 기법이나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 마리아의 우아함이 가능했던 것은 유화물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탁월한 발상이 있더라도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기술이 마련되지 않았다면 무용한 것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 있더라도 상상력과 문제의식이 없다면 그 기술 역시나 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술 없는 미술은 존재할 수 없고 예술적 상상력 없는 기술은 쓰임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미술사학자

2022-02-21

예술과 기술에 대한 미술사적 고찰(하)

17세기 중반 프랑스 절대왕정이 설립한 왕립미술원은 서양미술사 최초의 공립미술 교육기관이었다. 이후 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이곳은 스페인과 영국을 비롯해 유럽 각국의 왕정이 미술학교를 세우는데 중요한 모범이 되었다. 아카데미의 결정적인 문제는 미술을 국가의 통치이념에 따라 통제했다는 데 있다. 아카데미는 미술의 틀과 기준을 만들었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국가에 의한 미술의 통제가 아카데미를 통해 두 세기 이상 지속되면서 미술은 권력의 미적 취향을 드러내는 선전도구로 전락했다. 불안하거나 부정한 권력은 예외 없이 문화와 예술을 엄격히 다스리려했고, 그러는 동안 무기력해진 예술의 생명력은 희미해지고 사회를 이끌었던 변화와 혁신의 힘을 잃게 된다.제도의 틀 내에서 권력화된 미술은 사변적 담론에 집착하며 세상의 변화에 충분히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미술이 미술의 협소한 우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왕정이 무너져 시민사회가 도래했다. 산업혁명으로 사회, 경제구조 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이 달라졌음에도 미술권력은 구체제의 규범을 고수하는데 급급할 뿐이었다. 아카데미가 미술에 남긴 가장 치명적인 폐해는 미술과 현실을 단절시켰다는데 있다. 현실의 변화 대부분은 기술을 통해 이루어진다. 원래 미술가들은 최고의 기술자들이었다. 돌을 쌓아 상상을 초월하는 장엄한 건축들을 실현한 것이 미술가들이었고, 해부를 통해 인체구조의 비밀을 밝혀낸 것도 미술가들이었다. 미술가들은 그 오래전 이미 하늘을 나는 기계를 고안한바 있고 불가능을 가능한 것으로 실현시켰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미술가들은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자 과학자였으며 새로움으로 세상에 놀라움을 선사했던 기술자였다. 그들은 상상했고, 상상한 것을 실험했고, 실험한 것을 기술을 통해 구현해 냈다. 그렇다면 통제된 미술의 말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19세기 중반 폐쇄적인 권위에 항거한 미술가들이 대거 출현하면서 아카데미 미술의 시대는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들 반항아들에게 미술사는 전위대라는 뜻의 아방가르드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카데미 미술이 신화나 고전문학의 허구적인 스토리를 이상화하고 영웅화하는데 몰두했다면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의 시선은 다시 현실을 향했다. 여기서 현실을 향했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우선 미술가들의 시선이 현실을 향했다는 말은 현실을 여과 없이 그대로 미술에 담았다는 뜻이다. 현실의 민낯은 언제나 생각보다 유쾌하거나 아름답지 않다. 미술이 거울처럼 현실을 그대로 비추자 대중들은 당혹감과 불쾌감, 심지어 분노를 일으켰다. 현실을 향한 미술가의 시선에 담긴 두 번째 의미는 문자 그대로 ‘본다’는 시각적 경험에 관한 것이다. 보는 것에 집중한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은 아카데미 미술이 도식적으로 규정해둔 시각적 관습과 습관이 아니라 직접 본 것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원근법의 공식을 깨트렸다. 사물과 고유색의 연결고리도 끊어버렸다. 특정한 대상에 귀속된 고유색이란 시각적 습관에 기인한 것이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화면에 세계를 모방해 허구를 그려내는 대신 이제 미술은 색 그 자체, 형태 그 자체를 그리게 된다. 이 순간 미술사는 비로소 미술의 순수한 본연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미술이 미술 본연의 미학적 가치를 탐구하면서 현대미술이 태어나기는 했지만 이미 기술은 미술보다 훨씬 앞서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예컨대 현대미술의 선구자 끌로드 모네는 산업화로 나날이 모습을 바꾸는 활기찬 파리 풍경에 매료되었다. 그중에서도 굉음과 흰 연기를 내뿜으며 육중한 몸체를 움직이는 증기기관차는 모네의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런데 화가 모네가 기관차의 스펙터클에 압도당하고 있을 때 이미 프랑스 전역 주요도시들이 철도망으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철도는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었고 삶의 속도는 물론이고 새로운 근대적 시간관념을 만들어 냈다. 기술혁신을 이끌었던 미술이 이제 기술에 감탄하며 끌려가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그 격차는 따라잡기 도저히 불가능한 정도로 벌어져버렸다./미술사학자

2022-01-24

예술과 기술에 대한 미술사적 고찰(中)

서양미술사 스테디셀러 ‘서양미술사’의 저자 곰브리치는 서문 첫 문장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곰브리치의 이 문장은 자주 하지만 잘못 인용되곤 한다. 곧이 곧대로 읽으면 속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저자의 서문은 미술의 정의(定義)에 관해 논하고 있다. ‘미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정말 미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고정된 하나의 틀로 미술을 정의할 수 없음을 말한다. 미술의 근본적 속성 중 하나는 ‘변화’이다. 시대가 변하고, 생각이 변화고,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변하기 때문에 미술도 변할 수밖에 없다. 미술은 끊임없이 시대와 관계하며 변하기 때문에 그 기능과 역할 그리고 가치가 시대마다 달라져 왔다.예술과 기술의 관계는 사람의 몸과 정신의 관계만큼이나 복잡하고 미묘하다. 기술만으로 예술이 될 수 없다. 기술은 기능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기술이 없다면 예술은 가능하지 않다. 예술행위는 정신활동이기 때문에 기술을 통해서 비로소 구현되기 때문이다. 예술과 기술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면 심지어 미술의 역사 전체가 새롭게 기술될 수 있다.중세까지만 하더라도 미술은 곧 기술이었다. 미술가들은 기능인이었고 이들의 활동은 창작(創作)이 아니라 공작(工作)으로 여겨졌다.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정신활동이자 학문적 탐구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열정을 쏟았다. 17세기 프랑스 절대왕정이 국가 주도의 미술교육기관을 설립하면서 미술가들의 기능이 회화나 조각 등과 같이 아주 협소한 특정영역으로 제한되었다. 엄격히 말해 미술가 혹은 예술가가 있을 뿐이지 화가나 조각가 판화가와 같이 기능에 따라 분류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경직된 분류가 프랑스 왕립미술학교(일명 아카데미)에서 시작되었다.프랑스 왕립미술학교의 교과과정은 대략 이렇다. 신입생으로 입학하면 아카데미가 모범으로 삼고 있는 대가들의 걸작들을 모사한 판화작품을 따라 그린다. 보지 않고도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반복에 반복을 거듭한다.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면 평면에서 벗어나 석고 조각상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고학년에 올라가면 실제 사람을 보고 묘사한다. 사람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자세와 동작을 완벽하게 그릴 수 있도록 오랜 시간에 걸쳐 기술을 연마한다. 물론 실기 교육만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림의 소재가 되는 고전의 내용을 배워야 했고 아카데미 교수들이 체계화한 미술이론도 교육되었다. 예를 들어 지금도 사용되는 역사화,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 등과 같은 그림의 종류가 프랑스 왕립미술학교에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아카데미에서 이렇게 그림의 주제에 따라 회화를 분류한 이유가 있다. 이것은 가치중립적인 구별이 아니다. 주제에 따라 그림의 가치를 구분하는 회화의 위계질서이다. 사람에게 신분이 있었던 것처럼 그림도 무엇이 그려졌느냐에 따라서 등급이 나누어졌던 것이다.프랑스에서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역사화를 그려야 했다. 역사화는 위대한 인물들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림이다. 영웅들의 위대한 행위에 상응하도록 그림의 크기도 웅장해야 했다. 절대왕정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 왕을 신격화하고 그의 업적을 신성한 것으로 번안해 스펙터클을 연출하는 능력이 곧 미술가의 실력으로 평가되었다. 이때 미술가들의 창조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나 완전히 혁신적인 표현 방법의 실험이 아니라 아카데미에서 교육되어진 대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야기를 이미 유행하고 있는 양식으로 시각화 하는 것이었다. 미술가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성공은 아카데미의 규범과 규칙에 철저히 순응해 등용문이었던 ‘살롱전’에 출품해 주목을 받고 마침내 귀족이나 왕실을 위해 역사화를 그리는 직책에 오르는 것이었다. 역사화를 그리지 않는 미술가에게는 그리고 아카데미의 규범에서 벗어난 미술가들에게는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2021-12-27

예술과 기술에 대한 미술사적 고찰(上)

예술, 기술, 주술, 마술은 역사 속에서 기묘한 관계를 맺어 왔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미술을 테크네(τ03ADχνη)라 불렀다. 테크네는 기술, 기교를 뜻하는 테크닉의 어원이기도 하다. 테크네는 인간이 기술적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 전체를 가리키며 여기에는 미술도 포함된다. 그리스어 테크네를 고대 로마인들의 라틴어로 옮긴 것이 아르스(ars)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술 혹은 미술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 아트(art)가 여기서 왔다. 예술의 어원은 예술이 기술과 떼려야 땔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음악가들은 오랜 시간의 연습과 훈련을 통해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무용수들 역시 동작을 익히고 유연성과 표현력을 높이기 위해 계속해서 몸을 단련한다. 미술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는 기법을 익히는 것은 물론이고 사용하는 재료, 필요한 도구를 만들고 다루는 기술을 마스터한 후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미술가로 활동할 수 있었다. 적어도 도제식 교육을 받던 르네상스 시대까지는 그랬다.대부분의 예술 장르에서 기술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기교나 기술적 완벽함이 음악가를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은 아니지만 탁월한 음악가에게 기술적 완성도는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다.무용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현대미술은 형편이 많이 다르다. 미술사학에서는 대체적으로 현대미술의 태동 시점을 19세기 중반으로 본다. 이전 미술이 따르고 쫓았던 규칙, 원리, 규범, 가치를 부정하면서 현대미술이 태어났다. 15세기 르네상스부터 현대미술 태동기까지 서양미술의 근간은 모방과 재현이었다. 잘 모방하고 잘 재현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다. 르네상스 이전 고대나 중세 까지만 하더라도 미술가는 기술자였다. 육체노동을 천시했기 때문에 미술가의 사회적 지위는 높지 않았다.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미술창작이 몸을 쓰는 육체노동에 그치지 않고 고대의 시인들처럼 고도의 정신작용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미술가들은 기술을 익혀야 했음은 물론이고 기술로 구현될 그림이나 조각에 정신적 가치를 담아야 했다. 그렇게 등장한 것이 르네상스의 만능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같은 거장들이다.그렇다면 마네, 모네, 세잔 등을 비롯한 이른바 현대미술의 선구자들은 무슨 이유 때문에 앞선 미술에 반기를 들고 규칙과 규범들을 깨트렸던 것일까? 이유는 분명하다. 미술이 권력화 되어 권위적이고 배타적이며 폐쇄적이고 경직되었기 때문이다. 자유로이 사유하고, 자유로이 탐구하고, 자유로이 창작하던 르네상스 미술정신이 어떻게 그토록 변질되어 버린 것일까? 이와 관련해 여러 요인들이 제시될 수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1648년 프랑스 왕립미술학교의 설립이다.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로마 가톨릭의 교세가 급격히 위축되었다. 종교개혁자들에 맞서 가톨릭교회는 반종교개혁의 움직임을 형성했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크미술이다. 장식성이 강한 바로크 미술은 화려하다. 앞선 르네상스 미술이 비례, 균형, 조화, 통일을 추구했다면 바로크에서는 비례와 균형이 무너지고 조화나 통일성 대신 스펙터클이 펼쳐졌다. 로마에서 바로크가 발달할 때 까지만 하더라도 서양미술의 중심지는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로마였다. 그런데 루이14세가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한 17세기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미술사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자신을 ‘태양 왕’으로 신격화한 절대왕정의 루이14세는 국가의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정책들을 폈다. 절대적 권력의 상징이 되는 곳이 베르사유 궁전이다. 늪지를 메워 상상을 초월하는 궁전을 세우고 35㎞ 떨어진 센 강으로부터 파이프로 물을 끌어와 화려한 분수로 장식된 어마어마한 정원을 조성했다. 미술은 오랫동안 권력의 불편한 동행자였다. 권력은 선전도구로서 미술을 활용했고, 미술은 기꺼이 그 필요를 충족시켜 주었다. 절대왕정을 위한 미술가를 양성하기 위해 1648년 서양미술사 최초로 국립미술교육기관 ‘왕립미술학교’가 설립되었다. /미술사학자

2021-12-06

메타버스와 바로크 미술의 귀환

요즘 유행하는 메타버스(metaverse)는 4차 산업혁명이 일으킨 첫 번째 거대 파도이다. 메타버스는 IT기술을 통해 사람과 세계가 관계 맺는 새로운 방식이다.‘미술과 기술’이라는 대명제 아래 선보이고 있는 뉴미디어 미술창작물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째는 디지털 환경에서 수집된 방대한 데이터에 특정 알고리즘을 부여하고 이를 시각화하는 유형이다. 다음으로는 특수 감지센서 등을 이용해 어떠한 변화에 반응하고 이를 경험하게 해 주는 작품이 있다. 세 번째로는 딥러닝이나 머신러닝과 같은 인공지능 기술을 접목한 작품이 있고, 넷째로 증강현실을 이용해 현실공간에 가상을 작품을 구현하거나, 다섯째로 가상공간에 가상의 작품을 경험하게 하는 작품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여섯 번째로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소리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거나 연출하는 작품이 있다.자연이나 대상 등을 가상세계에 모방하고 감상자는 기계장치의 도움으로 그것을 경험한다. 가상의 공간에 모방된 현실은 현실에 대한 또 다른 인식과 경험을 가능케 해 준다. 하지만 문제는 모방된 가상세계와 그 가상세계에서의 경험이 무엇을 지향하고 어떠한 가치를 지니느냐는 것이다. 단지 현실을 기술적으로 모방하는 것으로 도래할 미래의 미술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자연의 모방과 가상의 창조는 서양미술사에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르네상스의 원근법은 2D를 3D로 바꾸는 혁신적인 기술이었고, 17세기 바로크 미술에서는 어떠한 기계장치의 도움 없이 오로지 미술기법으로 실제 건축공간에 가상현실을 구현했다.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맞선 가톨릭교회의 반종교개혁으로 탄생한 양식이다. 가톨릭교회로부터 멀어진 신자들을 시각적으로 압도해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출현한 바로크 미술에서는 건축, 조각, 회화의 경계가 사라졌다. 르네상스 미술가들이 고전미술을 모범으로 삼았다면 바로크 미술은 이성적 판단과 인지능력을 무력화 시킨 초감각적 가상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 자연의 빛이 창을 통과하는 순간 강하게 응축돼 교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리고 그 빛은 금색 장식물들에 부딪혀 찬란한 광채를 뿜어낸다. 건축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그림 속 인물이 조각이 되어 눈앞에 나타나더니 어느새 다시 그림이 되어 허공을 떠다닌다.바로크를 수용한 프랑스 절대왕정의 결정체 베르사이유 궁전 곳곳에도 현실과 가상이 뒤섞여 있다. 절대왕정의 이념을 상징하는듯 기하학적이고 대칭적 형태로 가꾸어진 정원 곳곳에는 신화를 그리고 있는 조각상들이 놓여 있다. 회화가 그렇듯 조각 역시나 과거를 현재로, 가상을 현실로 불러내는 그들의 방법이었다. 거대한 정원 사이사이에 설치된 무대에서는 연극이 펼쳐졌다. 연극이야 말로 가장 오래된 메타버스의 원형 중 하나이다. 왕의 집무실과 침실에 접한 ‘거울의 방’에서도 여러 의미에서 현실과 가상이 교차한다. 한 쪽 벽면을 가득 메운 거울은 현실을 비춰주지만 사실은 가상을 불러내는 장치이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면 호수와 정원 그리고 운하가 시선을 압도한다. 여기서는 다른 방식으로 현실과 가상이 관계한다. 창밖 풍경은 사실이자 현실이지만 규모와 조성 방식이 너무나 인공적으로 완벽해 오히려 가상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음악에 맞춰 분수가 춤을 추면 베르사이유의 가상현실은 현실의 공간에서 완성된다. 메타버스에서 논의되는 가상현실, 현실과 가상의 융합, 현실의 확장이 이미 17세기에 일어났던 것이다.서양미술사는 오랫동안 현실을 과장하고 왜곡해 스펙터클을 연출한 바로크를 퇴폐, 타락, 악취미로 여겼다. 여기서 유래해 서구에서는 규범에서 벗어난 무언가를 ‘바로크적’이라 부르기도 한다. 바로크 양식은 백년 남짓 유럽 전역에서 유행하다가 로코코라는 과도기를 거쳐 신고전주의에 완전히 자리를 내줬다. 고전적 미학을 재부활시킨 신고전주의에 자리를 내어준 이후 바로크의 미술사적 의의는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다 20세기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우리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메타버스와 미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바로크의 잔향이 감지된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2021-11-08

그림 때문에 분열된 동·서방교회

서양미술사에서 13세기는 중세에 속하며 고딕양식이 서유럽 전역에 확산되던 시기이다. 13세기를 이탈리아어로는 두에첸토(Duecento)라고 부른다. 1200년대라는 뜻이다. 이탈리아의 두에첸토 시기에 활동했던 화가들은 비잔틴 미술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1054년 기독교는 정치적, 신학적 입장차 때문에 교황 중심의 로마 가톨릭과 비잔틴 제국의 동방정교로 분열되었지만 비잔틴 미술은 이탈리아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비잔틴의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 미술을 마니에라 그레카(maniera greca)라고 부른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그리스 풍’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비잔틴 양식을 가리킨다.로마 가톨릭과 비잔틴 교회는 수백 년 넘게 갈등과 반목을 이어왔다.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은 로마제국 단독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콘스탄티누스 대제 사후 그 이름에 따라 콘스탄티노플로 불림·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으로 옮겼기 때문이다.비잔티움이 군사적, 경제적 측면에서 분명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수도의 이전은 중심의 이동이자 권력의 이동이다. 그리고 그 권력에는 종교 권력도 포함된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최고의 머리는 성인 베드로의 대를 잇는 로마의 교황이다. 그런데 수도가 비잔티움으로 옮겨가면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커지면서 로마 교황과 대립하게 된다.동·서방교회 충돌의 불씨가 된 것은 성화 사용에 대한 입장차였다.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칙령으로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되기는 했지만 기독교 교리가 아직 완전히 갖춰지지 않아 여러 신학적 쟁점들이 종교회의에서 다퉈지고 있었다. 교회에서의 미술품 사용을 두고 찬반의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을 한다. 대(大)교황 그레고리우스는 그림 사용에 우호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읽지도 쓰지도 못하였기 때문에 교육적 목적으로 그림을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미술품 사용 반대파는 우상숭배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는 성서의 가르침을 이유로 내세웠다. 교황의 지침에 따라 서방교회는 적극적으로 미술품을 수용했던 반면 비잔틴의 동방교회는 교회에서의 미술품 사용을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파괴했다. 이 사건을 가리켜 ‘비잔틴 성상파괴운동’이라고 한다. 그런데 미술품 사용을 둘러싼 두 교회 간 분쟁의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476년 게르만의 침략으로 서로마제국이 몰락했다. 게르만족은 원활한 통치를 위해 토착 로마인들과의 유대 및 결속이 필요했고, 그러한 이유로 기독교를 적극 수용했다.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서 야만족들을 개종시키는데 미술품은 용이한 수단이었다. 반면 비잔틴의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하다. 비잔틴 제국은 그리스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가면서 각 지역별로 다양한 신학적 이론들이 생겨났고, 교리에서 벗어난 이단적 사상으로 비잔틴교회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숭배 문제와 직결된 그림 사용에 대해 완고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서방교회는 로마제국 황제의 정통성을 이어가던 비잔틴에 명목상 종속되어 있었다. 730년 비잔틴의 황제 레오 3세가 성상금지령을 내렸고, 이를 이유삼아 서방 교회가 콘스탄티노플에 바치던 세금 납부를 거부하면서 서로간의 골이 깊어졌다. 로마 가톨릭의 속내는 성상금지령을 빌미로 비잔틴의 정치적 간섭과 규제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것이었다. 로마 가톨릭은 비잔틴과 거리를 두는 대신 야만족들이 세워 왕성한 힘을 키운 프랑크 왕국에 손을 내밀었다. 교황 스테파누스 2세는 754년 파리 북부 생드니 대성당에서 프랑크의 왕 피핀 3세를 위한 축성식을 개최했고 그 자리에서 그에게 ‘프랑크의 왕이자 로마의 대군’이라는 직위를 내렸다. 이로써 프랑크의 왕은 교황으로부터 지배와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받았고, 교황은 프랑크 왕의 힘을 등에 업고 비잔틴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미술사학자

2021-10-18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경쟁 도시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시에나(Siena)는 지금도 중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진 시에나는 해발 320m 높이의 구릉에 위치해 있어 도시 전체가 마치 요새처럼 보인다.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시에나와 피렌체는 오랜 시간 서로 치열하게 경쟁했고 두 도시간의 자존심 다툼은 지금까지도 읽을 수 있다. 상업, 무역업, 금융업이 번성했던 피렌체가 15세기 문예부흥 르네상스의 발생지였다면 시에나는 혁신보다는 중세의 전통 계승을 선택했다.유럽의 주요 도시들 중심에는 대성당이 세워져 있다. 중세 사람들에게 대성당은 지역의 종교적 구심점이기도 했지만 대외적으로 부와 권력은 물론 지역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했다. 이런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대성당 건축은 지역 구성원 모두의 공동 과업이었다. 시에나와 피렌체의 중심에도 대성당이 우뚝 솟아 있는데 두 교회는 전혀 다른 건축 양식을 보인다. 13세기 초에 완공된 시에나 대성당(1196∼1215)은 당시 유행하던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다. 작은 첨탑 모양을 띤 건축 장식의 날카로운 형태감이 여느 고딕성당과 마찬가지로 메인 파사드의 인상을 결정짓는다.다채로운 색상이 화려한 빛을 발하고 있어 얼핏 보기에 시에나 대성당과 비슷해 보이지만 피렌체 대성당은 다른 시대 다른 양식의 건축물이다. ‘꽃의 성모’라는 이름의 피렌체 대성당 건축 공사(1296∼1436)는 시에나 보다 100여년 늦게 시작되었다. 아마도 경쟁도시 시에나가 웅장하고 화려한 대성당을 완성한 것이 피렌체 사람들에게 자극이 되었던 것 같다. 피렌체 대성당 공사는 13세기 후반 시작되었지만, 그래서 고딕양식의 특징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건축이 완성된 것은 15세기 초반으로 르네상스가 시작된 이후이다. 중세 전통에 충실했던 시에나 보다 좀 더 진취적이었던 피렌체는 고딕양식에 만족하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새로운 건축을 갈망했다. 중세 고딕과 르네상스 미술은 전혀 다른 미학적 원리를 지향했다.‘신적인 세계의 상징’이 중세미술 전반을 지배했다면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미술의 조형요소를 발견하고 새롭게 적용했다. 특히 고대건축이 강조했던 형식적 특징은 비례와 균형, 조화와 통일성이었다. 하나의 세부요소는 형태와 크기에서 전체에 상응해야 했고, 전체는 세부요소들 간의 균형과 통일된 관계로 이루어져야 했다.피렌체 대성당 완공이 계획보다 늦어진 것은 혁신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로마식 십자가 형태를 지닌 평면도에서 교회의 가로통로(익랑)와 세로통로(신랑)가 만나는 교차랑(transept) 상단에 거대한 돔을 올려 피렌체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었다. 1418년 모든 공사가 마무리되었지만 지름이 43미터나 되는 돔을 올릴 방법이 없었다. 1419년 양모상 길드인 아르테 델라 라나가 돔 설계를 위한 공모를 진행했고 조각가이자 건축가 필립포 브루넬레스키(1377∼1446)가 당선되었다. 브루넬레스키는 혁신적인 발상으로 팔각형의 이중벽 구조를 고안했고 상상조차 어려운 방식으로 400만장의 벽돌을 쌓아 올려 무게가 3만7천톤에 이르는 기념비적인 돔을 완성했다. 붉은 색의 찬란한 피렌체 대성당의 돔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르네상스의 정신을 상징한다.시에나와 피렌체 모두 선출된 시민대표가 도시를 통치하던 공화정을 택하고 있었다. 시민들에 의해 정부가 움직인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지 시청사는 광장(Piazza)에 자리하고 있다. 시청에서는 주요 정책들이 결정되었던 만큼 시청사 건물은 중요한 정치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도심에 세워진 두 도시의 시청사는 모두 요새처럼 폐쇄적인 형태를 띠고 있으며 적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해 높은 망루를 가지고 있었다. /미술사학자

2021-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