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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빙판과 설산, 뉴스 너머 동계올림픽

뉴스의 분량과 속도는 숨이 가쁠 만큼 거세고 빠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국제 정세가 뒤집히고, 경제 지표는 사람들의 마음을 휘젓는다. 대체로 불안과 분노, 피로와 공포를 전한다. 그런 가운데 이탈리아 밀라노-코르티나에서 동계올림픽이 진행되고 있다. 예년 같았으면 거리의 전광판이 바빠지고 포털의 첫 화면이 요란했을 텐데, 이번은 왠지 비교적 차분하다. 마치 세상의 소음에 묻혀 설원 위의 함성이 멀게만 들려오는 느낌이다. 스포츠가 차지하던 자리를 이제는 수많은 뉴스와 이슈들이 차지해 버렸다. 전쟁과 갈등, 정치현안과 경제불안이 일상화된 시대에 올림픽축제는 잠시 숨을 고르는 틈새 정도로 취급되는 듯하다. 그래도 화면을 조금만 멈춰 바라보면, 그 ‘틈’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장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빙판을 가르는 스케이트 날은 군더더기 없는 선으로 시간을 자르고, 설산 언덕을 질주하는 선수의 몸짓은 중력을 거부하는 하나의 곡선이 된다. 촌각을 가르는 승부 뒤에는 수년의 반복과 실패, 부상과 회복이 숨 쉬고 있다. 무명의 젊은 선수들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며 만들어 올리는 동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며 환희다. 박수는 메달 색깔이 아니라 그 과정에 먼저 가닿아야 한다는 사실을 올림픽은 조용히 숭고하게 상기시킨다. 대한민국 선수들은 아직 출발선에 서 있는 셈이다. 국가대표라는 이름을 짊어진 개인들의 시간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훈련장을 오가며 흘렸을 땀, 남들보다 한 발 일찍 빙판에 서야 했던 새벽들,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다시 장비를 고쳐 신었던 순간들. 우리는 국기를 배경으로 선 시상대 장면만을 기억하지만, 올림픽의 진짜 이야기는 대부분은 그 이전의 드라마로 채워져 있다. 동계올림픽이 던지는 또 하나의 메시지는 속도의 대비다. 일상의 뉴스는 즉각적인 판단을 요구하지만, 스포츠는 기나긴 기다림을 전제로 한다. 한 번의 도약을 위해 수백 번의 실패가 필요하고, 4년에 꼭 한 번 무대를 위해 선수들은 오랜 시간을 견디고 견딘다. 신속한 결론에 익숙해진 사회에서 우리는 시간의 느린 리듬이 낯설다. 결과를 재촉하지 않고 과정을 지켜보는 끈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잊고 지낸 필수 감각이 아닐까. 아직 열흘 일정이 남아 있다. 많은 경기와 많은 얼굴들이 등장할 것이다. 어떤 이는 환호를 받을 것이고, 어떤 이는 메달과 인연을 맺지 못한 채 돌아설 수도 있다. 설산과 빙판에서 최선을 다하는 순간만큼은 모두에게 같은 무게를 지닌다. 그런 장면들이 세상의 소음과 잡사에 묻히지 않기를 기대한다. 복잡한 시대에 올림픽은 현실을 잊게 해주는 도피처라기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비춰주는 거울이 아닐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태도, 실패를 딛고 서는 인내, 상대를 존중하는 용기. 이번 겨울, 대한민국 선수들에게 필요한 것은 과도한 기대보다 차분한 응원이다. 화면 너머로 보내는 작은 박수 하나가 긴 시간을 견뎌온 이들에게 엄청나게 큰 힘이 된다. 마지막 남은 열흘, 우리가 젊은 선수들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2-11

해오름대교, 연결 효과는 운영이 가른다

해오름대교는 개통 전부터 포항의 새로운 상징으로 기대를 모았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남북 연결축, 도시 동선을 바꿀 핵심 인프라라는 평가도 뒤따랐다. 며칠간 현장을 오가며 느낀 점은 이 다리가 가진 가능성과 함께 풀어야 할 과제가 동시에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긍정적인 변화는 분명하다. 정체만 아니라면 남단과 북단 사이 이동 시간은 과거보다 현저하게 줄어든다. 해안선을 돌아가던 동선이 단순해졌고, 일부 구간에서는 체감상 주행이 훨씬 수월해졌다는 반응도 들린다. 출퇴근과 일상 이동에서 남북 연결성이 개선됐다는 점은 이 교량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다. 하지만 개통 직후의 관찰은 동시에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 저녁 6시 30분 무렵, 남단에서 교량에 진입해 북단 교차로를 통과하기까지 대략 10분이 걸렸다. 교량 전체 길이가 400미터도 채 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평균 속도는 시속 2~3킬로미터 수준이다. 초기 혼잡으로만 치부하기에는 구조적인 요인을 떠올리게 하는 수치가 아닐까. 병목의 핵심은 북단 교차로에 있다. 좌회전이 금지되면서 차량들은 교차로를 지나 약 50미터 지점에서 유턴을 해야 한다. 유턴 차선의 대기 공간은 차량 다섯 대 정도에 불과하다. 오후 2시 40분, 러시아워가 아닌 시간에도 이미 포화 상태. 출퇴근 시간대에는 직진 차로까지 정체가 번질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퇴근 시간에는 그 영향이 교량 상판을 넘어 남단 오르막 구간까지 이어졌다. 정상부에 이르기도 전에 브레이크등 행렬이 길게 늘어섰다. 이는 교량 진입부보다 출구 쪽 처리 용량이 부족해 다리 전체가 일종의 ‘대기 공간’처럼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안전 측면에서도 점검이 필요하다. 북행 정상부에서는 하행 구간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고, 남행 하향부에서는 곡선이 이어져 전방 시야가 제한된다. 제한속도인 시속 50킬로미터로 주행하다 갑작스런 정체를 만나면 급제동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황색 신호에서 가속과 급정거가 동시에 나타나는 장면도 관찰됐다. 이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사고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해오름대교의 의미를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다. 구조적으로 남북을 직선으로 잇는 새로운 축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도시 교통망에는 큰 변화다. 운영이 안정되고 병목이 해소된다면 출퇴근길과 생활 이동에서 실질적인 시간 절감 효과를 낼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래서 지금이 더 중요하다. 개통 초기에 출퇴근 시간대 교통량과 유턴 수요를 면밀히 관찰하고, 유턴 대기 공간을 늘이거나 시간대별 좌회전 허용 같은 탄력적 운영은 가능한지, 교량 위 정체를 미리 알릴 안내 시스템이 필요한지를 검토해야 한다. 작은 조정 하나가 시민 체감도를 크게 바꾸고 사고 위험을 방지한다. 도시의 새 다리는 풍경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시민들의 하루하루에 얼마나 안전하고 편리하게 기능하느냐가 진짜 기준이다. 해오름대교가 포항의 새로운 명물이 되기 위해서 지금 드러난 성과와 과제를 함께 직시하고 분석하여 차분하고 냉정하게 보완하는 과정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2-04

AI와 로봇의 시대

스페이스엑스(SpaceX)와 테슬라(Tesla)의 창업자 일론머스크(Elon Musk)는 인류가 머지않아 ‘보편적 고소득 시대’에 들어설 것이라 전망했다. 최소한의 생활비를 국가가 보장하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넘어, 대다수 사람들이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경제 구조가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다. 논리는 단순하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면서 생산성이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그 결과 재화와 서비스가 넘쳐나는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희소성에 기초한 화폐경제는 약화되고, 돈의 가치 또한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는 전망도 뒤따른다. 공상과학 소설처럼 들리지만, 우리 주변에는 이미 변화의 조짐이 분명하다. 산업현장 곳곳에 자동화 설비가 들어서고, 사무직 업무마저 AI가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보통사람들도 AI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최근 현대자동차 노조가 생산라인에 로봇 도입을 강하게 반대한다는 소식은 전환기의 긴장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에서는 효율과 경쟁력을 이유로 자동화를 밀어붙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커지고 있다. 산업혁명의 역사에서 늘 반복되었던 장면이 또 한 번 펼쳐진다. 수년 내에 인간의 숫자와 맞먹는 로봇이 세상에 등장할 것이라 한다. AI는 특정 분야에서 이미 인간의 능력을 넘어섰고, 활약 범위는 급격하게 확장되고 있다. 흐름이 지속된다면, 인간은 더 이상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 들어설지도 모른다.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인간은 이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 노동에서 해방된 사회는 이상향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정체성의 위기를 낳을 수도 있다. 사람은 오랫동안 직업을 통해 자신을 규정해 왔다.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은 곧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 일의 상당 부분을 기계가 대신하게 된다면, 인간의 역할과 존재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생산성이 극적으로 높아진 사회에서 그 성과가 과연 공평하게 분배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기술을 소유한 소수에게 부가 집중된다면, ‘보편적 고소득’이 아니라 오히려 극단적인 불평등이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제도와 정책, 사회적 합의가 적절하게 뒤따르지 않으면 기술의 진보는 축복이 아니라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막연한 낙관도 무조건적인 공포도 아니다. 다가올 변화를 냉정하게 바라보며 교육과 복지, 경제와 노동을 어떻게 재설계할지 고민해야 한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지켜야 할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지 묻는 일도 중요하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연대, 공동체 의식과 상생의 정신, 책임과 존엄 같은 가치는 기계화되거나 자동화될 수 없는 영역이다. AI와 로봇의 시대는 피할 수 없는 흐름으로 보인다. 시대의 모습이 유토피아를 당겨올지 아니면 새로운 불안과 불안정을 불러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많은 부분,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기술과 함께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는 다시 인간에게 달려있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1-28

AI와 가장 가까운 지역이 되길

AI(Artificial Intelligence·인공지능)는 더 이상 미래기술이 아니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처럼 어느새 우리 일상으로 다가왔다. 문제는 기술의 속도가 아니라, 도시와 시민이 변화를 따라가는 속도다. AI는 이미 일하고, 쓰고, 정리하고, 판단을 돕는 도구가 되었지만, 많은 시민에게는 여전히 ‘어렵고 무서운 것’으로 남아 있다. 포항 같은 중견도시는 이 지점에서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서울이나 판교처럼 AI기업과 연구소가 밀집한 도시는 기술중심으로 흘러가지만, 포항은 다르다. 포항은 대학과 산업단지, 전통시장과 원도심, 고령인구와 청년세대가 한 공간에서 공존한다. AI를 ‘생활밀착기술’로 실험하기에 가장 적합한 도시다. 포항이 ‘AI 기술도시’ 정도가 아니라 ‘AI 친화도시’를 고민해야 할 때다. AI를 잘 만들어 내는 도시라기보다, AI를 잘 쓰는 시민이 많은 도시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시민이 AI를 이해하고, 활용하고, 필요할 때 도움을 받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도시의 기본 책무가 되어가고 있다. 그 출발점으로 ‘AI친화도시 포항’ 캠페인을 제안한다. 거창할 필요는 없다. ‘AI로 이런 것도 할 수 있습니다’라는 아주 생활밀착적인 사례들을 시민 앞에 보여주는 것이다. 자영업자는 메뉴설명과 홍보문구를 AI로 만들고, 농어민은 병충해 사진을 분석하고 작물과 어족 성장환경을 살피며, 노년층은 말과 글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기록한다. 공무원은 회의록과 보고서 초안을 AI의 도움으로 빠르게 정리한다. 중요한 것은 AI가 판단을 대신하기 보다 사람의 분석과 판단을 덜 힘들게 만드는 도구라는 점을 체감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AI 커뮤니티센터’ 같은 공간도 충분히 검토해 볼 만하다. 도서관과 주민센터의 중간쯤 되는 이 공간은 고가의 장비보다 ‘함께 써보는 경험’을 제공하는 곳이어야 한다. ‘이런 일에 AI를 써도 될까요?’라고 물으면, 누군가 옆에서 프롬프트를 함께 써 주는 곳. 세대와 직업을 가리지 않고 AI를 처음 만나는 시민들의 ‘연습장’이 되고 ‘시작점’이 되는 곳이다. 이 작은 공간에서 축적된 사례들은 곧 포항시민의 AI활용 적극자산이 된다. 도시행정 역시 조용히 변할 수 있다. 민원요약, 회의정리, 자료검색 등 반복적인 업무에 AI를 붙이는 것만으로도, 공무원들이 시민을 만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된다. AI는 행정을 대체하는 기술이 아니라, 행정을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보조수단이 될 터이다. 도시는 기술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기술을 다루는 방식으로 평가받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AI가 압도하는 도시보다, 시민이 AI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시. 포항이 그런 도시가 되어야 한다. 또 하나의 산업 유산이자 미래 세대에게 남기는 도시 자산이 될 것이다. AI가 존재하는 도시를 넘어, AI로 시민의 일상이 편해지는 도시, AI로 도시행정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 ‘AI친화도시 포항’을 제안하면서, 지역이 신생기술 AI와 함께 지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1-21

AI를 어찌하나

ChatGPT를 비롯한 생성형 AI(Artificial Intelligence·인공지능)가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면서, 인류는 새로운 편리함과 함께 오래된 불안을 다시 마주하고 있다. ‘AI가 인간의 사고를 확장하는가, 아니면 잠식하는가’라는 질문이다. 기술낙관론자들은 AI를 세탁기나 청소기에 비유한다. 손빨래와 손청소에서 해방되었듯, 인간은 이제 번거로운 사고노동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럴듯하게도 들리지만, 이 비유에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빨래와 청소는 인간의 본질이 아니지만, ‘생각하는 힘’은 다르다. 사고는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핵심 능력이 아닌가. 최근 한국 대학가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시험과 과제에서 AI를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는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이제 대학이 과연 필요한가’라는 질문까지 공공연히 제기되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 질문이 설득력을 갖는다. AI가 논문을 요약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며, 토론문까지 만들어 준다면 굳이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에 다닐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문제를 거꾸로 본 진단이다. 대학의 위기는 AI의 등장이 아니라, 대학 스스로 무엇을 평가하고 무엇을 가르칠지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대학의 존재 이유는 처음부터 정답을 제공하는 데 있지 않았다. 질문을 만드는 지혜, 생각을 전개하는 방식, 타인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수단을 훈련하는 공간이었다. 오늘의 대학강의실에서 사고의 과정이 아니라 결과물만이 평가된다면, 학생들은 생각하기보다 프롬프트를 입력하는 법을 먼저 배운다. 이는 부정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본질의 문제다. 대학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첫째, 평가방식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결과중심의 과제평가 대신에 사고의 경로와 질문의 질을 평가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AI사용 여부를 단속하기보다, AI에 어떤 질문을 던졌으며 그 답에 어떤 분석과 판단을 거쳤는지를 서술하게 해야한다. 생각의 궤적을 평가하지 않는 교육은 AI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다. 둘째, 커리큘럼은 ‘도구사용법’이 아니라 ‘판단과 분석’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AI리터러시는 버튼 설명이 아니라, 한계인식과 오류탐지 능력을 포함해야 한다. AI가 쏟아낸 답을 검증하고 반박하는 수업이 정규과정으로 편입되어야 한다. 셋째, 대학은 다시 ‘느린 공간’이 될 용기를 가져야 한다. 효율과 속도를 숭배하는 사회에서, 깊이 생각하고 천천히 되새기는 훈련은 본질적으로 비효율적이다. 비효율을 감내하지 않는 대학은 더 이상 대학이 아니다. 침묵과 명상, 토론과 성찰, 그리고 도전과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강의실에서 사고는 성장할 길이 없다. 대학이 아직도 필요한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대학은 필요 없다. 생각하고 성찰하는 법을 가르치는 대학만 살아남을 터이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선택이다. 대학은 정답 공장을 고집할 것인가, 아니면 질문 광장으로 거듭날 것인가. 대학이 오늘의 모습만으로는 쇠락의 길에 설 수 밖에 없다. 선택여부에 따라 대학은 오히려 부흥할 지도 모른다. 선택의 시간은 이미 시작되었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1-14

세상의 충격과 우리의 태도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국내법을 근거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체포해 간 사건은, 오늘의 국제질서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강대국이 자국법을 앞세워 타국의 영토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인식이 용인되는 순간, 국제법은 규범이 아니라 휴지조각이 되어버린다. 이 장면이 주는 충격은 베네수엘라에 국한되지 않는다. 러시아와 중국 같은 강대국들에게 이는 불편한 경고이면서 동시에 위험한 유혹이 된다. ‘미국이 그렇게 한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논리는 언제나 국제질서를 무너뜨린다. 우크라이나와 대만은 단지 지정학적 분쟁지가 아니라, 규칙의 기반질서가 유지되는지 시험하는 최전선이 된다. 북한 역시 예외가 아니다. 외국 정상의 신병이 다자국제적 합의가 아닌 일방의 법 해석으로 확보될 수 있다는 메시지는, 김정은 정권으로 하여금 핵무기를 체제생존의 보증수표로 더욱 굳게 인식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한반도비핵화 담론을 다시 한번 공허한 수사로 밀어낼 위험을 안고 있다. 이 시점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미중 전략경쟁이 실체화되고 구조화되는 현실 속에서, 한국의 외교는 점점 더 좁은 외줄 위를 걷게 된다. 미국은 동맹국에 ‘가치적 연대’를 요구하고 중국은 각국에 ‘전략적 자율’을 압박한다. 두 가지 선택지 가운데 어느 한쪽의 논리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하는 순간, 한국은 외교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중국 방문의 성패는 정상회담의 의전이나 공동성명 문구에 있지 않다. 핵심은 한국이 국제규범과 주권존중이라는 원칙을 분명히 견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를 미국과 중국 어느 쪽에든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미국의 일방주의에 침묵하면서 중국의 힘의 외교만 경계한다면, 우리의 외교는 설득력을 잃는다. 중국의 수사에 동의하면서 미국의 압박을 무시해도 우리의 외교는 설 자리를 놓칠 수 있다. 어느 쪽에도 휘둘리지 않고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성장해 갈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강대국이 아니다. 그렇기에 더욱 원칙과 규범이 필요하다. 법과 절차, 다자주의는 약소국의 이상이나 소망이 아니라 존재확인이자 생존전략이다. 중국을 방문한 대통령이 경제협력과 문화교류를 논의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동시에 ‘국제질서는 힘이 아니라 상생과 공영의 원칙 위에 서야 한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일관성과 상호신뢰의 출발점을 확고하게 설정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의 이해에 우호적으로 반응하면서, 동시에 다자외교가 빚어내는 상생과 협력의 틀에 주목해야 한다. 모두를 위한 원칙과 규범의 울타리가 작동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걸어야 할 길은 분명하다. 어느 편을 드느냐가 아니라, 어떤 원칙에 서느냐의 문제다. 원칙이 무너지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흔들리는 나라는 언제나 우리처럼 경계에 선 나라들이었다. 한국은 지난 수백 년 경험을 통하여 그 운명과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1-07

국민이 지킨다

2025년이 열흘 남짓 남았다. 우리는 한 해를 ‘실패한 계엄’이 남긴 상처 입은 민심과 함께 보냈다. 총과 폭력으로 민주주의를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발상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시대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안도하기에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허약하다. 무너지지 않았을 뿐, 단단해졌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흔히 밖에서 들여온 제도쯤으로 여겨왔다. 교과서 속 개념이고, 헌법 조항이며, 선진국으로부터 수입해 온 이상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시간은 분명히 확인해 주었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외부에서 이식된 장치가 아니라, 우리 국민이 일상의 자리에서 벽돌처럼 하나씩 쌓아올린 구조물이었다는 것을. 광장에서, 직장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공론장에서 국민은 스스로 민주주의의 기둥이 되었다. 민주주의를 위협한 쪽은 오히려 기득권 엘리트들이었다. 국가와 질서, 안보와 위기를 앞세우며 헌법의 근간을 주무르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언제나 거창했지만, 그 끝에는 권력의 연장이라는 낡은 목적이 놓여 있었다. 반면에 이들을 막아낸 것은 아무런 직함도, 무기도 없는 국민들이었다. 제복도 계급장도 없이, 다만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지킨 사람들이었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이 나라를 지켰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아득했던 길목마다, 악한들은 움켜쥔 자리에 남아 있었다. 민주주의의 건강한 전개를 방해하는 세력은 퇴장하지 않았다. 실패했을 뿐이다. 제도를 왜곡하고 여론을 호도하며 시민의 피로와 망각을 치밀하게 계산하는 방식으로 다시 기회를 엿보고 있다. 민주주의는 단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조금씩, 조용히, 일상 속에서 마모된다. 그래서 새해에도 우리는 신경줄을 놓을 수 없다. 민주주의는 완성 상태가 아니라 관리 대상이다. 잠시 방심하여 ‘설마’하는 사이에 균열은 벌어진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다’라는 헌법상 문장은 조문으로 남을 때 가장 위태롭다. 살아있는 규범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감시와 참여, 질문과 비판이 필요하다. 지켜냈다는 안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킨 다음에도 눈에 불을 밝히는 국민이어야 한다. 권력의 언어를 해독하고, 제도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며, 불의가 상식으로 둔갑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선의에 기대어 작동하지 않는다. 경계와 참여, 기억과 행동 위에서만 호흡을 이어간다. 2026년을 앞두고 우리가 다시 확인해야 할 사실이 있다. 민주주의는 누군가 지켜주는 제도가 아니라, 국민이 계속해서 감당해야 할 삶의 방식이라는 것. ‘불편한 책임’을 내려놓는 순간, 민주주의는 가장 먼저 우리를 떠난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언제나 되돌리기 어려운 후회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어느 틈에 경제적 선진국으로 올라섰듯이, 정치적으로도 민주주의의 기준점을 제시하는 나라가 되었다. 우리 공동체가 민주와 평화의 가치를 온전히 지켜낼 것인지를 이제는 온 세상이 주목하고 있다. 해를 넘기며 우리는 각오와 다짐을 새로이 하여 나라와 국민이 공동체적 생명력을 이어가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12-17

법관의 양심, 믿을 수 있나

대한민국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적는다. 사법독립의 원칙처럼 보이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의문이 생긴다. ‘헌법과 법률’은 공개된 객관적 기준이 맞지만, ‘양심’은 개인의 내면이 아닌가. 법적 판단에 주관적 요소가 개입할 위험성을 헌법 조문이 버젓이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사회에서 사법불신은 반복되어 왔다. 정치사건, 재벌관련 사건, 권력형 비리에서 ‘판사의 양심’이 과연 공정했는가 싶은 의심이 따라붙었다. 판사도 인간이다. 학연, 지연, 이념과 무관할 수 없다. 개인의 경험과 가치가 판단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다면, 그 주관성을 어떻게 통제하고 공개하며 객관화하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양심’ 개념에는 이를 견제할 장치가 없다. 판결에는 법리만 남고, 뒤에서 작동한 양심과 가치판단에 관한 설명은 사라진다. 양심은 기록되지 않으며 검증할 방법도 없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미국은 헌법 어디에도 ‘양심’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대신 판례(precedent)와 정당한 절차(due process)가 핵심이다. 판사의 판단이 개인의 내면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공개된 판례 체계와 충돌하지 않도록 구조적 제약을 둔다. 영국은 판사의 주관 대신 합리성(reasonableness)을 외부 기준으로 요구하고, 이해관계 신고와 회피제도를 적극적으로 운용한다. 독일 역시 판사교육과 법리체계에서 ‘양심’을 강조하지 않고, 비례성, 기본권, 법치의 원리 등 실증적 원칙을 적용한다. 개인적 도덕감정보다 공개가능한 법리기준이 중심이 된다. 주요 법치국가들은 이렇게 ‘양심’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공개된 원칙과 구체적 절차로 사법신뢰를 확보한다. 우리 헌법 제103조의 ‘양심에 따라’는 법적인 검증 또는 견제장치가 없는 불확정적인 개념이다. 양심이라는 이상을 강조하기 전에, 그 이상을 객관적으로 보증하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 사법독립을 말하면서도 국민이 법원을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은 없다. 양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주장과 강변만 남지 않을까. 헌법의 해당 문구를 다시 살펴야 한다. 법관의 독립은 객관적 기준과 실증적 절차로 보장할 일일 뿐 내면적 자의적 양심으로 보장할 일이 아니다. 판결의 공개성과 예측 가능성도 확보해야 한다. 주요 판결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시민이 열람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판사의 이해관계 공개와 시민참여 감시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판사가 공적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라면, 양심을 감시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다. AI판사 도입논의가 등장한 것도 결국 같은 문제에서 비롯된다. 양심이라는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무엇을 제거하고 일관적이며 통제 가능한 수단을 확보하자는 요구다. 인공지능이 모든 판단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최종적으로 사람의 ‘양심을 믿어달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는 시대는 마감해야 한다. 양심은 개인의 내면이고, 법은 사회적 약속이다. 사법의 신뢰는 고상한 단어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며 확인이 가능한 제도에서 나와야 한다. ‘법관의 양심’이라는 표현을 신화적 기대에서 구체적 현실로 끌어내는 작업이야말로 대한민국 사법개혁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12-10

고객정보 유출, 책임은 어디에?

쿠팡이 사고를 쳤다. 소비자 고객들의 소중한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름, 주소, 전화번호, 계좌내역, 심지어 자택입구 비밀번호까지 시중에 떠돌게 되었다. 정보유출이 퇴직자의 소행이었다지만, 책임의 소재를 단순히 개인에게만 떠넘길 수는 없다. 회사는 고객정보를 관리하고 보호할 책임을 지닌 주체로서, 이 같은 사고로 초래되는 모든 문제에 대해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미국이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쿠팡이 미국 주식시장에 상장한 기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의 규제환경을 인지하고 있었을 터이다. 상응하는 소비자 보호체계를 갖추어 높은 수준의 정보보호시스템을 보유했어야 한다. 개인정보 유출은 단순한 행정실책이 아니라 기업생존을 위협하는 중대한 사건으로 여겨져야 한다. 막대한 금액의 피해 보상은 물론 주주와 소비자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최고경영진이 직접 사태수습에 나서야 한다. 회사의 신뢰가 흔들리면 주가급락과 투자자 손실이라는 직접적 피해가 뒤따르기 때문에, 미국 기업이라면 기업의 사활을 걸고 대응했을 사건임에 틀림없다. 쿠팡의 대응은 전반적으로 미흡하다. 한국 사업장에서만 활동하는 기업이라는 이유로, 미국 본사는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소비자 정보가 유출되어 발생할 수 있는 사기, 금전적 피해, 심리적 불안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게 필요하다. 기업이 법적, 도덕적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소비자는 보호받지 못한다. 단순한 관리소홀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문화와 경영철학의 문제다. 한국에서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반복되는 이유 중 하나는, 기업에 대한 규제와 처벌이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슨하기 때문이다. 개인정보보호법이 존재하지만, 현실적 강제력과 피해보상 체계는 턱없이 부족하다. 데이터 유출 시에 금융적, 평판적 피해가 단기간에 직접적으로 가시화되어 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므로 책임있는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쿠팡이 미국 주식시장에 상장한 등록기업으로서 한국소비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글로벌수준의 개인정보 관리와 책임 있는 대응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퇴직자의 실수’라 치부하며 면죄부를 줄 수 없다. 고객의 개인정보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결국 소비자 대중이 짊어지게 된다. 제도적인 보완과 철저한 규제확보가 뒤따라야 한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한국소비자들이 기업에게 정당하게 요구해야 할 책임과 투명성, 그리고 대응수준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쿠팡은 고객정보 유출로 발생한 모든 문제에 대해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기업의 신뢰와 사회적 책임은 법적 의무를 넘어, 공공의 신뢰형성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부도 제도개선에 나서야 한다. 기업이 소비자를 가벼이 여기는 풍토를 일소해야 하며, 정부가 국민을 대신하여 기업으로 하여금 소비자 국민을 존중하고 개인정보를 소중하게 여기도록 이끌어야 한다. 경제환경이 예전과 비교할 때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소비자 환경이 나아지지 않고는 선진국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국민이 신뢰하고 소비하는 기업이 되어야 하며, 소비자 국민은 늘 깨어있어 경계해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12-03

별밤, 사라지다

도시의 밤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는다. 간판불빛과 가로조명, 고층건물의 유리벽에서 흘러내리는 빛에 별들이 밀려났다. 도시에는 별이 없는 밤하늘이 당연해져 버렸다. 지방은 어떨까. 어차피 매한가지다. 들판에 곡식도 밤엔 자야 한다는데, 소출이 예전만 못한 까닭을 사라진 캄캄한 밤하늘로 꼽는 농민들이 있다고 한다. 청명한 하늘 아래 펼쳐진 대양의 밤에도 별이 그리 찬란하지 않다고 한다. 도시를 벗어난 멀고 먼 바다에서조차 별들을 보기 어렵다는 건, 지구환경의 변화이며 인간문명의 실패임을 말해준다. ‘밤하늘의 질저하(degradation of night sky quality)’라 부른다. 기후변화로 지구대기층 구조가 변하고, 대기중 에어로졸과 미세먼지는 육지를 넘어 해상도 덮는다. 지구 평균온도가 오르면서 해수 증발량이 증가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수증기막은 별빛을 흐리게 한다. 대기는 더 이상 별빛을 반사하며 고요히 잠드는 투명한 공간이 아니다. 기후위기의 파편들이 대양의 하늘에도 쌓여가는 셈이다. 인공광량의 확산이 결정적이다. 광공해를 도시문제로만 여기지만, 위성관측 자료를 보면 바다 위 밤하늘 역시 20세기 후반부터 꾸준히 밝아졌다. 해안 대도시의 조명, 항만과 공항의 빛, 해안리조트단지에서 흘러드는 광량이 대기상층에서 산란되면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해역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구 전체가 ‘빛의 돔(light dome)’이 되었다. 별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빛의 총량이 너무 많아 자연의 빛을 덮어버린 터이다. 대양을 오가는 선박에도 예외가 아니다. 갑판의 안전등, 수영장조명 등이 밤새 하늘로 번져오른다. 인간의 눈은 주변 조도가 일정 수준 이하로 내려가야만 어둠에 적응해 영롱한 별빛을 포착할 수 있다. 배 위에서도 ‘암적응’이 충분히 작동하지 않아 하늘과 별빛을 누리려던 기대가 무너진다. 대양을 비추던 칠흑같은 어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 그 위를 건너는 별빛도 희미해져 버렸다. 문제는 별밤이 사라진 ‘풍경의 상실’에 그치지 않는다. 별이 없으면 인간의 서정성과 상상력의 기틀이 무너진다. 인류는 밤하늘을 올려보며 우주를 떠올렸고 시간과 계절을 낚았으며 신화를 그려내고 철학을 만들었다. 은하수와 북극성, 달과 별자리는 인간의 품에 광활한 공간을 펼쳐주었다. 널찍했던 상징성이 졸아들면 인간의 상상력도 ‘즉각적인 자극’ 중심으로 좁아든다. 자연이 선사하던 깊은 어둠의 여백이 사라지면서, 인간은 밝은 화면에만 의존하고 짜릿한 자극에만 끌리게 된다. ‘별이 빛나는 밤에’는 더이상 가능한 제목이 아니다. 지방에서도 별이 사라지고 대양에서마저 별이 안 보이는 오늘의 현실은 심각한 질문을 하나 던진다. ‘별을 잃어버린 시대에, 별을 바라보고 꿈꾸며 길러왔던 인간의 감수성과 상상력은 어떻게 지켜내야 하나?’ 기후변화와 인공광량의 확산은 기술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질문을 던진다. 어둠은 우리가 잃어버린 자산이며 우리가 지켜내야 할 테두리다. 별을 되찾는 일은 자연을 보호하는 일이며 우리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다. 별을 잃은 밤하늘 아래에서, 바로 그 숙제가 또렷하게 떠오른다. 지구의 밤 풍경을 덜 밝힐 방도를 찾아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11-26

수능 후기

수능이 끝났다. 해마다 이맘때면 한국 사회는 긴장과 과열의 공기를 안고 그 하루를 통째로 맞는다. 지구상 그 어느 나라도 수능 날 하루만큼 이렇게 나라 전체가 흔들리지는 않는다. 고사장의 주변을 통제하고, 항공기의 이륙과 착륙 시간을 조정하며, 심지어 증권시장도 한 시간 늦게 문을 연다. 국가 전체가 ‘입시공화국’의 구성원임을 새삼 확인한다. 대학이 인생의 모든 걸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두가 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대입 중심주의를 넘어 대입편집광적 구조에 들어섰다. 청춘의 출발선에서부터 ‘대학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암묵적 강박에 시달리고, 학부모는 ‘좋은 부모’ 자격증을 오직 입시준비를 얼마나 잘 해주느냐로 획득한다. 학교, 학원, 지역사회, 언론, 교육당국, 정책 모두가 대입 압박의 공동기획자다. 서울시의회는 사교육의 대명사인 학원의 강습시간을 자정까지 연장하는 조례안을 상정했다. 표면적으로는 ‘학습권 보장’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웠지만, 실은 사교육 시장의 영업권 확대라는 본질을 숨기지 못한다. 학교에서 배움이 충분하다면 왜 밤 12시까지 학원에 있어야 하는가. 공교육의 무력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었지만, 자정 수업 허용 논의는 공교육의 존재 이유마저 흐릿하게 만든다. 더욱 큰 문제는, 이 논의가 ‘아이들의 시간’을 누가 어떻게 사용할 권리를 갖고 있는가라는 근본 질문을 비껴간다는 데 있다. 한국의 고등학생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오래 공부하는 집단이다. 한참 성장기이지만 수면시간은 가장 짧다. 결국 아이들의 삶을 깎아내 학원의 상업적 성취를 돕겠다는 고백에 지나지 않는다. 입시전쟁은 가족의 시간도 허물어 버린다. 가족이란 함께 밥을 먹고 서로의 하루를 물으며 포근함을 나누는 공동체여야 한다. 지금 한국에서 가족의 시간은 사라진 지 오래다. 아니, 가족이 사라졌다. 부모는 끝없는 경쟁에 내몰리고 아이들은 입시압박 속에서 가정의 품을 쉬어가는 곳이 아닌 또 또 다른 긴장공간으로 여긴다. ‘가족이 가족다우려면 무엇부터 챙겨야 할까’라는 질문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수능을 마친 학생들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보다 그들은 잠을 자야 하고 걸어야 하며,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친구와 이야기해야 한다. 시험 때문에 지워졌던 일상성을 되찾고 가족을 회복하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 입시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잠시라도 자기 삶의 방향과 속도를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경험을 가져야 한다. 한국 사회가 입시 과열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내년에도 우리는 같은 긴장 속에서 수능을 맞을 것이다. 하지만 변화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학원 강습 시간을 자정까지 늘일 게 아니라, 아이들이 집으로 더 일찍 돌아가 가족과 함께 머무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 공교육이 역할을 다하는 구조를 세우고, 입시의 비중을 낮추는 방향으로 사회적 합의를 모아야 한다. 수능은 하루로 지나갔지만, 일상은 그 이후에도 이어진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어떤 대학에 가는가’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이다.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공부가 아니라, 더 많은 삶이다. 수능 지나간 자리에, 사회가 그동안 잊었던 ‘정상성’을 되찾도록 돌아보아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11-19

학습권인가 영업권인가

서울시의회가 고등학생 대상 학원 교습시간을 자정까지 연장하는 조례안을 상정했다. 표면적으로는 ‘학생의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이다. ‘학습권’이란 말은 허울뿐이다. 실제로 보호하려는 것은 학생이 아니라 학원이다. 아이들의 권리가 아니라, 사교육 시장의 ‘영업권’을 지키려는 시도다.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공부하는 집단이다. 한국 청소년의 하루 평균 학습시간은 10시간이 넘는다. OECD 평균(6.5시간)을 훌쩍 웃돈다. 수면시간은 반대로 가장 짧다. 2023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고등학생의 주중 평균 수면시간은 5시간 29분이었다. ‘자정학원’이 허용되면 이는 더 줄어들 것이다. 아이들은 자정에 귀가해 다음 날 새벽 다시 학교로 향해야 한다. 삶의 리듬은 무너진 지 오래다. 조례안은 ‘공부하고 싶은 학생의 자유를 막지말자’고 주장한다. 이것이 자유인가. 실제로는 학원 경쟁이 치열해지고 학생과 학부모가 경쟁의 수요자로 내몰릴 뿐이다. 어느 학원이 문을 열면 옆집 학원도 열 수밖에 없다. 모두 자정을 향해 달리게 된다.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강요된 참여이며, ‘학습권’이라는 미명 아래 시장의 논리가 아이들의 시간을 빼앗는 구조다. 가정은 설 자리를 잃었다. 늦은 퇴근길, 아버지는 아이의 잠든 얼굴을 본다. 어머니는 학원 일정표를 붙들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밥상은 공허하고 대화는 짧아졌다. ‘가족 단위의 시간’은 기억과 기대로만 남았다. 주말마다 아이들은 모의고사를 보고, 부모는 피곤에 지쳐 침묵한다. 어느새 ‘함께 저녁을 먹는 가족’은 어디에도 없는 사치스러운 표현이 되었다. 정치권은 이런 현실을 바꾸기보다 제도적으로 굳히려 한다. ‘더 공부할 수 있게 하자’는 구호는 듣기엔 그럴듯하지만, 실상은 학원업계의 이익을 보장하는 결정이다. 학원은 매출을 늘리고, 정치인은 ‘교육기회 확대’를 자화자찬할 것이다. 그런 대가로 사라지는 것은 청소년의 수면과 가족의 저녁, 사회의 휴식과 공동체의 건강이다. 교육은 인간을 지키고 키우는 일이어야 한다. 지금 교육정책은 아이들을 끝없는 경쟁의 도구로만 기르려 한다. 학교도, 학원도, 정치도 ‘더 오래, 더 많이’만 외친다. 아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더 오래 공부할 권리’가 아니라 ‘편안하게 쉴 권리’다. 생각할 틈과 멈출 여유, 가족과 함께 즐길 시간이다. 다른 나라들은 반대로 움직인다. 일본은 ‘야간학원학습’를 엄격하게 규제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도시의 치안과 청소년의 수면권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미국이나 핀란드 등 나라에는 사교육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공교육을 충분히 신뢰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오후 3시 이전에 학교를 마치고,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온 저녁을 보낸다. 그런 결과, 학력 격차는 오히려 줄고 청소년 우울증 등 부정적인 통계수치는 OECD 평균의 절반에 못 미친다. 자정까지 불을 밝히는 도시에서 아이들은 언제나 꿈을 꿀 수 있을까. 상생과 경쟁 가운데,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는 어느 켠일까. 교육의 본질이 살아나려면, 학원의 문이 아니라 가정의 품이 열려야 한다. 나라의 품위가 올라가려면, 가정에서 쌓이는 교육적 가치에 꽃이 피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건강해 지는 첫 걸음이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11-12

공존인가 공멸인가

MAD(Mutual Assured Destruction·상호확증파괴), GPU(Graphics Processing Unit·그래픽처리장치), AV(Auronomous Vehicles·자율주행자동차). 서로 다른 표현이지만, 이들 셋은 오늘 인류가 서 있는 좌표를 가리킨다. 상호확증파괴는 냉전이 자칫 서로 확실히 멸망시킬 수 있음을 뜻했고, 그래픽처리장치는 인공지능 혁명의 심장을 움직이는 반도체를 지칭하며, 자율주행은 인공지능이 물리적 이동 세계에 스스로 개입하는 첫 신호다. 셋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인간 문명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실행하고 움직이는 기계’와 공존해야 하는 시대를 맞고 있다. 인공지능 AI의 시대가 열렸다. NVIDIA 창립자 젠슨황은 최근 ‘대한민국이 AI시대를 열어갈 나라’라고 치켜세웠다. 그 시선에는 두 가지 시사점이 있다. 첫째, 한국은 초고속 네트워크와 반도체 인프라, 그리고 교육열이 결합된 기술기반 성장생태계를 갖고 있다. 둘째, AI를 둘러싼 사회적 흥미와 논쟁, 관심 수준과 유발 동기가 활발하다는 점이다. 과학과 기술뿐 아니라 철학과 윤리의 언어로 AI를 적극적으로 논하는 토양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한국을 ‘AI 사용자’를 넘어 ‘AI문명의 설계자’로 여긴다는 의미다. 기술의 지평은 늘 그림자를 동반한다. 계산하고 사고하는 속도는 인간의 능력을 수천수만 배 앞지르겠지만, 빠름이 곧 출중한 지혜와 궁극의 효과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AI는 논리적이고 효율적이며 냉정하다. 효율의 논리는 인간의 감정과 공감적 배려를 배제한다. 전쟁터에서 효율은 곧 ‘선제 공격’의 합리성이다. 냉전의 상호확증파괴가 핵무기 억제를 통한 공포의 균형을 유지했다면, AI시대의 MAD는 알고리즘이 서로를 감시하며 자동보복할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전 세계 군사 강국들은 인공지능이 탑재된 방어시스템을 실전배치 중이다. 레이더 감지, 목표식별, 요격경로 계산까지 대부분이 자율적 루틴으로 돌아간다. 그런 과정에서 인간의 사고와 판단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입력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곧 존재 이유인 AI에게 ‘멈춤’이라는 개념은 없다. 두 AI 체계들이 서로를 위협으로 인식하면서 반응한다면, 인간의 의도나 공존의지와는 무관한 ‘기계 간 상호확증파괴’로 번질 수 밖에 없다. 기술은 ‘결정의 속도’를 다툰다. 자율주행자동차가 신호등의 오작동을 0.01초만 늦게 인식해도 참사가 벌어지듯, AI의 순간적 오판은 핵 버튼보다 빠르게 인류의 안전망을 무너뜨릴 터이다. AI의 자율성은 편리함의 상징이지만, 자율이 윤리성을 대체하고 나면 모두는 ‘공포의 균형’ 속으로 빠져든다. 젠슨황이 기대한 ‘AI 여명의 국가’라는 표현은 한국이 기술적 능력뿐 아니라 인류적 성찰의 책임과 윤리성을 함께 짊어져야 함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AI는 현대인간이 만든 거울이다. 거울 속에 탐욕과 경쟁을 투사하면, AI는 냉정한 방식으로 이들을 증폭시킬 것이다. 공존과 평화의 알고리즘을 심는다면, AI는 인류의 새로운 동반자가 되지 않겠나. 인류는 이미 MAD의 공포를 이겨낸 기억이 있다. 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윤리의 진화를 장착해야 한다. 인류는 AI가 공멸이 아닌 공존을 가져오도록 기대해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11-05

조공인가 협력인가

‘조공(朝貢)’은 먼 옛날 이야기로만 들린다. 그럼에도 강대국과 약소국 간 힘의 비대칭이 존재하는 한, 조공의 논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중국 황제가 주변국의 충성을 공물로 확인하던 질서는 형식과 이름만 달라졌을 뿐이다. 트럼프 대통령 1기 동안 한국에 방위비를 내라던 장면은 현대적 변주였다. 동맹을 거래로 바꾸었고 안보를 상품으로 정산하려 했다. ‘우리가 지켜주니 대가를 내라’는 언사는 동맹의 언어라기보다 제국의 언어가 아닌가. 냉전 이후 미국이 구축해온 자유주의적 질서 속에서 ‘동맹’은 신뢰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트럼프의 세계관에서 동맹은 ‘보호받는 고객’일 뿐이다. 그에게는 한국이 내는 돈이 조공과 다르지 않았다. 분담의 협력 대신 복종의 표시가 외교의 기준이 되었다. 조공의 본질은 금액이 아니라 위계의 상징이다. 방위비 협상을 통해 한국의 충성을 시험하고, 그 시험을 통과할 때만 ‘공정한 거래’라 부르려 한다. 오늘의 한미관계를 옛적의 조공체제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한국은 독립된 민주국가이고, 미군주둔은 상호 방위조약에 근거한다. 그래도 관계의 심층바닥에는 여전히 힘의 불균형이 놓여 있다. 한국은 ‘기여금’이라 부르고 싶지만 미국은 이를 ‘분담금’이라 부른다. 단어의 해석과 무게의 차이에는 외교질서의 위계가 살아있다. 그들의 요구는 금전협상이 아니라 권력시험인 셈이다. 한국사회가 ‘동맹은 동등하다’고 외치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미·중 사이에서 균형을 말할수록 조공체제의 줄타기처럼 보였다. 한쪽에는 새로운 중화가 있고 다른 켠에는 구미제국이 있다. 우리는 지금도 어느 쪽에 먼저 절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같은 형태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오늘의 조공은 조공이 아닌 듯 포장된다. 외교문서는 ‘동맹강화’와 ‘상호이해’가 가득하다. 돈이 언어를 대신하고 힘이 정의를 가리면 관계는 본질적으로 예속이다. 진정한 자주는 군사적 독립 그 이상이다. 사고의 독립이며 스스로 가치를 지키는 정신의 독립이다. 구시대 조선은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도 문화의 자존을 잃지 않았다. 오늘 한국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것도 정신과 가치임에 틀림없다. 힘의 비대칭은 어쩔 수 없더라도 존엄한 가치의 비대칭은 피해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내세워야 할 공물은 돈이 아니라 스스로 지키는 품격이어야 한다. 마침 31~11월 1일 신라의 왕경 경주에서 APEC 정상회담이 열린다. 트럼프가 오고 시진핑이 온다. APEC 역내 이슈들이 다루어지고 정상들 간 현안들에 귀추가 주목된다. 미국과 중국 사이 통상현안과 한국과 미국 간의 관세 줄다리기가 관심을 모은다. 북한의 김정은이 트럼프를 만날 것인지도 세간의 흥밋거리다. 복잡다기한 이익을 조정하기 위한 정상들 간 대화를 세상이 지켜본다. 신라의 자존이 살아있는 땅에서 열리는 의미를 살려야 한다. 중국도 미국도 대한민국을 가볍게 여길 수 없음을 확인해야 한다. 그들의 나라 안 사정이 어렵다고 우리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압박은 부적절하다. 부당한 압력에 당당한 대한민국을 세워야 한다. 조공체제를 당당하게 거부하고 공정한 협력관계를 이룩해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10-29

다문화는 다른 문화일까

‘선생님, 제 이름은 세라예요. 근데 집에서는 ‘사라’라고 불러요.‘ 지역의 한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한 아이가 자기소개를 한다. 엄마는 필리핀 출신, 아빠는 한국인이다. 한국어는 제법 유창하지만, 교과서 속 단어 몇 개는 여전히 낯설다. 점심시간이 되자 친구들은 자연스레 무리를 지어 놀지만, 세라는 머뭇거리게 된다. 언어보다 더 높은 벽은 ‘섞이지 못하는 낯선 분위기’다. 이런 장면은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초·중·고교에 재학 중인 이주배경 아동은 2006년 5천 명 수준에서 지난해 18만 명을 넘어섰다. 20년 사이에 30배 이상 늘어났다. 전국 학생 100명 중 3명은 다문화 가정 출신이며, 특히 농어촌과 지방 중소도시에서는 그 비율이 훨씬 높다. 한국 사회가 ‘단일민족’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 ‘다인종·다민족 사회’로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다. 경북의 교실도 예외가 아니다. 포항, 구미, 영천 등지의 초등학교에는 베트남·캄보디아·우즈베키스탄 출신 어머니를 둔 아이들이 한 반에 서너 명씩 있다. 한 교사는 ‘아이들이 처음 입학했을 때는 한국말을 거의 못해 교실에서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며 ‘같이 놀고 싶지만 말이 안 통해 답답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경상북도교육청은 이런 학생들을 위해 ‘다문화학생 지원센터’를 운영하고, 포항교육지원청은 언어지도 강사를 파견한다. 하지만 현실은 턱없이 부족하다. 포항의 한 언어지도사는 ‘5개 학교를 돌며 하루 한 시간씩만 수업한다’며 ‘담임교사와의 협력이 이뤄지지 않아 개별 맞춤지도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지역 간 편차도 심하다. 대도시인 대구나 수도권에는 다문화 예비학교가 여럿 있지만, 경북 농촌지역에서는 찾기 어렵다. 문제는 정책의 시각이 ‘적응지원’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다문화 교육을 ‘결손을 보완하는 복지사업’으로 본다. 필요한 것은 ‘통합 교육’이다. 이주배경 학생이 한국 사회의 주변부가 아니라, 뉴노멀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제도적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 프랑스, 캐나다, 호주 등은 언어교육과 문화이해 교육, 교사 집중연수, 학부모 지원을 통합적으로 운영한다. 한국은 부처별 사업이 따로 놀고, 현장 교사는 행정보고에 쫓긴다. 교사 양성과정에서 다문화 이해교육을 의무화하고, 전문 상담교사와 통역인력을 상시 배치하는 국가 차원의 통합적 시스템이 절실하다. 이주배경 아동의 교육권은 복지의 일부가 아니라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다. 미등록 체류아동은 여전히 입학조차 어려운 경우도 있다. 출입국관리법상 부모신분 노출을 꺼리는 탓에 학교 문턱에서 돌아서는 아이들이 생긴다. ‘교육은 인간의 권리’라는 원칙이 서류 한 장에 막히는 현실은 부끄럽다. 교실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이주배경 아동이 차별없이 배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교실이 ‘침묵의 공간’으로 남는다면 한국사회의 미래가 그만큼 닫혀버리지 않을까. 다문화는 더 이상 다른 문화가 아니다. 다문화를 우리 문화로 적극 포용하는 교육을 실천해야 한다. 선진국의 힘은 배려와 공감에서 나온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10-22

캄보디아로 간 청년들

캄보디아에서 우리 청년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 최근 구출된 피해자들 대부분은 20대 초중반으로 국내 취업이 막혀 해외에서 기회를 찾아 나섰던 이들이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폭행과 감금, 협박, 불법행위의 강요였다. 이른바 ‘해외고수익 알바’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불법조직의 덫이었다. 피해자들은 브로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캄보디아로 향했다. ‘월 천만원을 벌 수 있다’, ‘간단한 컴퓨터 업무만 하면 된다’는 말은 사실상 인신매매에 가까운 사기였다.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여권을 빼앗기고 불법 온라인 도박이나 보이스피싱 업무에 동원되었다. 저항하면 폭행당하고, 탈출하면 살해협박에 노출되었다. 일부는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문제를 ‘해외범죄’나 ‘취업 사기’로만 볼 수는 없다. 배경에는 청년 노동시장의 구조적 왜곡이 자리 잡고 있다. 통계상 실업률은 낮지만 청년층의 상당수는 불안정한 플랫폼노동과 단기계약직에 내몰려 있다. 안정된 일자리는 찾기 힘들고, 주거와 교육, 생계비용은 끝없이 오른다. 악순환 속에서 청년들은 국내 노동시장에서의 기회를 잃고, 해외의 불확실한 제안에 기대게 된다. 정부가 신속하게 피해자 구출에 나선 것은 다행이지만, 대증적 반응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외교부와 고용노동부, 경찰청과 정보기관이 공조하여 해외취업과 알선의 전 과정을 전면적으로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자율등록제’로는 불법 브로커와 인신매매 조직을 걸러내기 어렵다. 해외 구인 구직 알선업체에 대한 사전인증제 도입, 피해 발생 시 즉각적인 외교 보호 절차 가동, 현지공관 내 긴급 보호센터 상시 운영이 시급하게 필요하다. 정부의 해외 취업 정책도 재검토해야 한다. ‘청년 해외 진출’을 장려하는 것을 넘어, 안전한 일자리 보증제도와 사후 관리시스템을 장착해야 한다. 청년들이 현지 기업과 계약을 맺을 때 근로조건과 체류비자 상태를 공증받도록 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즉시 본국 정부와 연결되는 디지털 연락망을 구축해야 한다. 무엇보다 청년들이 위험한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될 ‘사회적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공정한 노동시장, 안정된 일자리, 실질적 주거와 생계지원 정책이 없으면, 해외 취업 사기와 범죄행태 유입이 계속 반복될 것이다. 청년층의 절망을 걷어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들이 국내에서 ‘괜찮은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번 사건을 불운한 피해자의 불행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기회의 실종’과 ‘정책의 부재’가 맞물려 만들어 낸 구조적 사고다. 우리는 청년실업 문제를 개인의 노력 부족이나 일시적 실수로 치부해 왔다. 그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 청년의 기본적 생존은 개인의 과제를 넘어 ‘국가의 책임’이 되어야 한다. 구출 작전과 함께 해외에서 실종, 감금된 한국인 피해자 전수조사에 나서야 한다. 피해자 지원예산을 별도로 편성하고 귀국 후 심리적, 경제적 회복을 돕는 통합 프로그램을 가동해야 한다. 어둠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미래 그 자체다. 단기적 위기관리가 아니라 긴 호흡으로 보아야 한다. 청년이 안전하게 일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10-15

미국의 진짜 어려움은 어디에 있는가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관세와 투자 압박을 연일 가하고 있다. 3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요구하더니 이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나서 ‘선불’로 내놓으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겉으로는 안보 동맹을 흔들고 방위비 분담을 무기로 흔드는듯 하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재정상황이 심각하다는 사실이 발언의 배경에 자리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짊어진 국가부채 규모는 이미 천문학적 수준에 이르렀고 해마다 갚아야 하는 이자만 1조달러를 넘어선다. 이자를 감당하기에도 버거운 미국 정부가 동맹국을 상대로 현금확보를 노린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미국이 직면한 어려움은 재정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첫째, 미국은 한국에 주둔 중인 미군을 쉽게 철수할 수 없다. 겉으로는 철수 가능성을 흘리며 압박 수단으로 삼지만, 동북아의 전략적 거점을 포기하는 일은 말처럼 간단치 않다. 중국과 러시아를 동시에 견제해야 하는 미국의 입장에서 한반도의 미군 주둔은 협상카드가 아니라 안보 필수 조건이다. 둘째, 미국의 산업기반은 소위 ‘공업공동화’현상을 겪어왔다. 제조업의 해외 이전과 탈산업화 흐름 속에서 미국이 생산능력을 회복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조지아주에서 최근 벌어진 비자 사태는 그 단면을 보여준다. 전기차, 배터리, 조선, 반도체 등 미래산업의 전략적 주도권을 쥐려는 미국 입장에서, 기술력과 생산망을 확보한 한국기업과의 협력이 불가피하다. 협력의 언어가 아니라 압박의 언사를 구사한다면, 내부의 정치적, 재정적 곤경을 외부로 전가하려는 태도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대한민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거절’과 ‘수용’ 가운데 양자택일로 접근하기에는 상황이 복잡하다. 한국도 안보적으로 미국에 크게 의존해왔고, 수출시장과 금융질서 또한 미국 중심의 구조 속에 들어있다. 동시에 이번 사태는 한국이 스스로의 전략적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무조건적인 추종이 아니라, 필요할 때는 분명한 원칙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 트럼프의 ‘선불 요구’ 발언이 나온 지도 여러 날이 흘렀다. 미국 내부에서조차 뚜렷한 후속 조치나 해결방안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미국의 압박이 전략적 구상보다는 즉흥적이며 단기적인 재정압박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었임을 방증한다. 미국의 진짜 어려움은 한국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 있다. 한국은 동맹의 가치를 인정하되 일방적 요구에는 단호히 선을 그어야 한다. 동시에 산업과 기술, 금융질서를 다변화하여 ‘미국 없이는 설 수 없다’는 구조적 취약함을 줄여가야 한다. 그래야만 미국의 압박이 반복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대응할 수 있을 터이다. 트럼프식 협상술은 익숙한 패턴이다. 큰 소리를 치며 상대를 위협하면서 일부라도 얻어내는 방식이었다. 이번만큼은 한국이 조급할 이유가 없다. 미국은 한국이 필요하다. 한국은 미국에게 전략적 자산이자 파트너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과 위치를 자각할 때, 비로소 선불 요구에 휘둘리지 않고 주권적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10-01

트럼프의 압박과 대한민국의 선택

트럼프 대통령의 통상정책은 언제나 강압과 거래의 언어로 특징지어져 왔다. 미국산업을 살린다는 명분이지만 실제로는 동맹국들에게 일방적인 금전적 요구를 던지며 ‘수용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식의 협상방식을 고수한다. 미국이 한국에게 3500억 달러를 현금으로 내놓으라며 압박한다는 보도는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으로 읽힌다. 일본이 미국의 요구를 수락했으나, 한국은 일단 ’협상의 가치조차 없다‘며 거부했다. 그런 결과, 굵직한 한국 대기업들이 미국 내 공장건설을 중단하고 투자계획을 철회했으며 기술자와 전문인력을 본국으로 철수시키는 초강수를 두었다. 문제는 트럼프식 통상정책이 오히려 미국 산업을 취약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대량실업의 지속과 인력공백의 연장, 생산기반의 붕괴 등 미국 산업계는 다면적인 충격을 만나고 있다. 한국 기업의 철수는 첨단기술과 숙련된 노동력이 빠져나가는 구조적 공백을 의미한다. 한국이 스스로 과대평가하거나 섣부른 승리감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 자본과 기술을 국경을 넘어 이동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신뢰, 노동환경 협조와 국제적 연대 없이는 ‘기술강국’의 지위도 한순간에 취약해질 수 있다. 이번 사태는 두 가지를 드러낸다. 첫째, 트럼프식 일방주의가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준다. 초강대국이라도 동맹을 협력 파트너가 아닌 ‘강탈 대상’으로 대하면 서로 간에 신뢰를 잃고 표류할 수밖에 없다. 둘째, 한국 기업들이 보여준 ‘NO’는 단순한 거부가 아니라 글로벌 경제질서가 일방적 압력에 쉽게 흔들리지 않음을 상징한다. 이에 더해 유엔을 방문 중인 이 대통령은 공개석상에서 ‘한국은 일방적 압력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내며 동맹도 대등한 파트너십 위에 서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국제무대에서의 이러한 태도는 기업의 결정과 맞물려, 한국이 더 이상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는 인식을 국제적으로 드러내며 강화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우려스러운 부분은 미국 스스로 ‘신뢰 자산’을 잃어가고 있는 점이다. 초강대국의 힘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국제 사회가 미국을 믿고 따를 수 있다는 신뢰, 그 무형자산이야말로 패권의 핵심이었다. 동맹을 압박하고 거래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방식이 이어진다면, 미국의 리더십은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미국의 위상이 흔들리고, 나아가 세계질서 자체가 불안정해지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 이번 상황의 의미는 승리가 아니라 강압적 산업정책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자존심에 있다. 새로운 국제 질서를 향해 어떤 가치와 원칙을 세워나갈 것인가에 달려 있다. 트럼프의 무리한 일방적 요구를 거부하는 장면은 역사적 기록으로 남겠지만, 앞으로 대한민국과 세계가 함께 만들어 갈 신뢰와 연대의 체계야말로 국제 사회가 주목해야 할 진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유엔 무대에서 드러나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태도 또한 그 출발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나라의 이익을 위한 국가의 결정에는 국민의 평온한 일상을 지키려는 정부의 노력이 배어있어야 한다. 느닷없는 경제위기를 불러올지도 모를 미국의 부당한 압박에는 지혜롭게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게 맞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09-24

일본의 선택과 한국의 대안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라는 무기를 들고 세계 각국을 압박한다. 예외는 없다. 동맹국조차 ‘안보를 이유로’ 관세부과 대상에 올리며 협상을 강요한다. 일본은 협상에 응해 농산물과 자동차 분야에서 일정한 양보를 포함한 합의문에 서명했다. 표면적으로 일본은 ‘최악의 충돌’을 피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농축산물 시장을 열어주되 자동차 부문에서는 부분적 유예를 얻어냈다는 식이다. 일본 내부에서는 회의적인 시선도 있다. 막대한 관세 압박 앞에 사실상 ‘방어적 후퇴’를 선택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번 합의로 일본경제에 돌아올 실질적 이익은 제한적인 반면, 미국이 얻는 정치, 경제적 성과는 확연하다. 일본언론과 경제계 일각에서 ‘미국의 요구를 선제적으로 수용했을 뿐’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한국은 어찌해야 할까. 한국 역시 미국의 관세공세에서 시달린다. 철강과 자동차는 물론, 반도체와 배터리 같은 전략산업까지 협상테이블에 올라올 가능성이 짙다. 일본처럼 조급하게 협상하는 것은 단기적 충돌을 피하는 방편일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한국 산업의 자율성과 교섭력을 훼손할 위험이 크다. 한국이 지혜롭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선택이 필요하다. 첫째, 다자무역체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WTO나 FTA 협정을 근거로 미국의 조치가 ‘차별적이며 위법적’임을 분명히 하면서 국제공조를 강화해야 한다. 일본이 미국과 양자 협상에 매몰되어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감수한 것과 달리, 한국은 다자적 협상의 틀을 조성하여 협상력을 높여야 한다. 둘째, 산업다변화와 내수강화다. 미국시장 의존도를 낮추고 유럽, 동남아, 중동 등 대체시장을 적극 공략하여 대미협상에서 ‘대체 가능성’을 확보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다소 불편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우리 산업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길이다. 셋째, 최근 발생한 미국의 이민 단속 실수를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조지아주 배터리공장에서 일하던 한국인 기술자들이 이민당국의 과잉 단속으로 불법 구금되었던 사태가 있었다. 동맹국 기업과 인력의 정당한 활동을 침해한 명백한 행정 실패다. 외교적 항의를 너머 무역과 관세 협상에서 레버리지로 삼아야 한다. ‘동맹과 투자 파트너를 존중하지 않는 한, 협력의 지속은 어렵고 상생의 의미는 없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하여 상대의 압박을 견제할 수 있다. 한국의 선택은 ‘단기적 양보 또는 장기적 자율성을 확보하는’ 기로에 섰다. 일본은 양보를 택했지만 이는 한국의 해법이 아니다. 국제공조와 전략적 옵션을 활용해 냉정하고 차분하게 대응해야 한다. 미국의 관세압박은 피할 수 없겠지만 대응방식에 따라 한국 경제의 미래 지형은 크게 달라진다. 급박해 보이는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오늘의 위기는 내일의 기회로 바뀔 가능성마저 제공할 터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에서 예외나 면제는 없다’면서 무차별적 재촉에 나서지만, 이는 미국의 단견과 조급함을 드러낼 뿐이다. 대한민국은 정돈된 전략적 선택을 통해 국익을 착실하게 확보하는 길로 들어서야 한다. 정권교체를 앞두고 경솔하게 결정하여 체면을 크게 깎인 일본의 선택과는 달라야 한다. 국민의 일상을 지키고 나라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09-17

우리 정부의 당당한 대응을 기대한다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이 미국에 대규모로 투자하며 조지아주에 건설 중인 배터리공장에서 충격적인 사태가 벌어졌다. 건설 현장에서 근무하던 300여 한국인 전문기술자들이 미 이민당국에 의해 불법체류자로 분류되어 체포 구금되었다. 중범자 체포 작전을 방불케 하며 거칠고 폭력적으로 진행되었고 전 장면이 전 세계 미디어를 통해 여과 없이 노출되었다. 우리 국민들의 안전과 존엄이 매우 부적절하게 무참히 짓밟힌 순간이었다. 사건의 본질은 분명하다. 워낙 대규모 첨단 프로젝트여서 한국에서 축적된 유사 건설 경험을 가진 인력이 필요했다. 미국 현장에 수백 명의 숙련고도 기술자들이 파견되어 성실하게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까다로운 미국이민제도가 이런 상황을 배려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민 당국은 이들을 불법체류자라 규정하고 일괄 구금하고 무자비하게 다루었다. 이것이 단순한 행정적 착오였는가, 아니면 정치적 배경을 가진 노골적인 과잉단속이었는가. 트럼프 대통령은 벌어진 사태를 두고 ‘공장 건설에 필요한 전문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둘러대었다. 이번 사건에 미국 정부 내부에 일부 책임이 있었음을 우회적으로 인정한 발언으로 여겨진다. 그런 정도 언급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단순한 실수였다고 치부하고 넘어갈 문제가 절대로 아니다. 미국 이민당국의 성급한 결정과 폭력적인 집행은 명백히 한국 시민들의 정당한 권익을 침해했다. 한국 정부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 외교채널을 통해 구속된 기술자들이 조속히 풀려나 귀국길에 오르게 된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 정부로부터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내야 하며 향후 유사한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적 완비와 안전장치를 요구해야 한다. 이는 동맹국 국민의 권익과 안전을 담보하는 최소한의 책무가 아닌가. 가장 큰 상처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던 우리 기술자들이 입었다. 이들은 미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기초를 놓으며 땀을 흘리던 중이었다. 하루아침에 불법체류자로 낙인찍혀 수갑과 쇠사슬을 차고 끌려갔다. 구금과정에서 겪었을 모욕감과 심리적 트라우마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이들이 미국을 다시 방문할 때 불이익이 없도록 정부가 전방위적으로 세심하게 지원해야 한다. 한국 사회 일반에도 깊은 상흔이 남았다. 자국민이 해외에서 폭력적으로 체포되는 모습을 생생히 목격했다. 자존감의 손상이 깊고 대미감정의 흔들림도 만만치 않다. 한미관계가 긴요하지만, 동맹국의 국민을 이토록 무리하게 대하는 일은 용인하기 어렵다. 미국이 진정한 우호적 파트너십을 원한다면, 상처 입은 한국의 국격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우리 정부도 미국에게 주저하거나 미온적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 신속한 봉합을 넘어 원칙과 신뢰에 기초한 단호한 외교가 있어야 한다. 국민이 해외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정부가 당당하게 나서서 안전하게 보호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비로소 국격은 지켜진다. 동맹이란 이름으로 불평등을 감내하는 시대는 끝났다. 한미관계는 대등한 파트너십이어야 한다. 주권 국가다운 면모를 지켜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