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교육이 녹아내린다

장규열한동대 교수국격이 높아졌다. 경제규모가 세계 10위에 올랐다 하고 문화강국으로 위상도 한결 날아오른다. K-Pop은 지구촌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글로벌 영화계에는 우리 감독과 배우들로 넘실거린다. 지구 위 어디를 가도 한국인들이 없는 곳이 없으며 가는 곳 어디에서도 이제는 소외되지 않는다.필자가 미국대학에서 가르쳤던 1990년대에만 해도 나라의 위상이 오늘같지 않아 안타까웠던 기억이 언제였나 싶다. 이제는 어깨 펴고 다닐 만하다. 코로나19의 광풍이 걷히고 나면 그런 변화를 확인하러 나가봐야겠다. 그랬던 시절에도 우리 마음에 비수처럼 번득였던 자랑거리가 하나 있었다. 교육.잘살아보려는 다짐 덕이었는지, 부모들의 높은 교육열이 배경이 되고 아이들도 잘 따라줬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가 회원국들의 교육상태를 비교하는 국제학생평가프로그램 PISA에서 한국 학생들이 수학과 과학 실력은 늘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그랬던 실력이 이제는 조금씩 꾸준히 내려간다고 한다. 학력과 인성이 균형있게 자라야 하는데, 학력의 평균적인 하향추세는 아무래도 개운치 않다. 그 와중에 코로나19가 불러온 비대면교육을 비롯한 교육환경의 출렁거림 가운데 학력격차의 심화와 학력수준의 하향세는 더욱 시름을 깊게 만든다. 방역이 중요한 만큼 경제도 살려야 하지만, 미래를 담보할 교육의 기틀은 지켜야 한다.최근 한 시민단체의 조사발표에 따르면, 코로나19 상황을 전후로 중학교에서는 학력중위권이 상하위권으로 분산되는 ‘학력 양극화’현상이 나타났으며 고등학교에서는 중위권과 상위권이 줄고 하위권이 증가하는 ‘학력저하’ 현상이 드러났다고 한다. 이미 진행 중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일반적인 학력저하 현상에 코로나19의 영향이 더해진 결과로 보인다. 온라인과 비대면수업이 전면적으로 시행되는 가운데, 경제력을 배경으로 한 사교육이 세차게 작동하여 학력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은 아닌가도 싶다. 교육당국은 ‘내려가는 비탈’에 선 학력저하 현상을 면밀히 분석해 장기적인 회복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국민건강을 위한 방역에 성공하더라도 교육의 뿌리가 흔들린다면 그보다 큰 실패도 없지 않을까.초중등학교 교육의 성패는 대학에서도 감지된다. 교수들이 평가하는 대학신입생들의 기초학력도 해가 갈수록 내려간다고 한다. 학문적 성과는 하루아침에 초인이 가져오지 않는다. 산적한 과제들에 해결책을 제시하고 실질적인 연구결과를 내기 위해서도 함께 공부하고 실력을 쌓아갈 후학들이 계속 튼실하게 자라나야 한다. 성장과 발전의 바탕에는 든든한 공교육이 있어야 한다. 건강한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도 학력저하는 위험하다. 밝은 내일을 열어내기 위해서도 실력있는 집단지성이 살아있어야 한다. 교육이 백년대계인 까닭은 의외로 간단하다. 배워서 익히고 다듬어 숙성한 사람들이 많아야 하기 때문이다. 의미있는 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서도 서로서로 아는 게 많아야 한다. 실력은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갈고 닦아야 쌓이는 게 실력이 아닌가. 실력있는 국민이 나라를 세운다.

2021-04-28

무시험, 탈경쟁, 비대면

장규열 한동대 교수코로나19가 여러 가닥에서 사람을 잡는다. 방역은 물론 경제는 기초부터 흔들린다. 어울려 살아야 하는 사회적 기반이 도태되는가 하면 풍성해야 할 문화적 토양도 척박해졌다. 나라 간 교류가 뒷걸음치고 다니면서 배우는 관광과 여행의 그루터기가 사라져간다. 세상이 변하여 뉴노멀이 들어선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역동성과 재미는 희미해진 세상이 기다리는게 아닐까 싶다. 그런 가운데 모두의 미래가 달렸을 교육의 모습은 애처롭다. 대학에서 만나는 신입생들에게서 대학생활을 위한 기초학력과 기본소양 저하가 확연하게 보인다. 무엇이 문제이며 어디서부터 바꿔야 할까.진보적 교육을 실현하기 위하여 초등학교에서 시험이 사라졌다. 즐거운 학교생활이 주어진 반면, 기초학력은 내려가게 마련이다. 학생은 즐기면서 배워야 한다. 구시대적 교육모델이 지나친 경쟁과 시험으로 압박하였다면 오늘 초등학생들은 넘치는 자유로움에만 빠진 게 아닐까. 배우는 길에는 적절한 긴장과 훈련이 있어야 하며, 격려와 채찍도 있어야 한다. 교육에 있어 무시험정책을 이제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무시험은 탈경쟁을 지향점으로 삼았다. 과도한 경쟁은 사회적 부작용을 초래하지만, 적절한 경쟁의식은 동기를 부여하고 사회적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교육이 조장하는 극도의 경쟁적 환경을 없애가면서도 학생들 간에 적당하게 겨루는 분위기를 만드는 일은 사회적 소양개발에도 기여할 터이다. 무시험과 탈경쟁이 학력저하를 초래했다면, 코로나19가 가져온 비대면은 사회적 역량을 퇴보시킬 게 아닐까 걱정스럽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어울리고 부대끼며 위로와 상처를 주고받으며 성장하고 발전한다. 대학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수업을 동시에 열면, 학생들은 이미 오프라인수업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교수와 만나서 일어나는 교감과 동료 학생들과 어울리며 발생하는 소통이 실종되고 있다. 코로나19가 만들어준 비대면 온라인의 편이성에 몰입하느라 함께 어우러지며 벌어지는 시너지를 망각해 간다.무시험은 정당한 평가를 잃어버리게 했고 탈경쟁은 건강한 비교를 삭제했으며 비대면은 사회적 교감을 몰각할 기세다. OECD 국제학생평가(PISA)에서 한국학생들의 성적이 조금씩 내려간다고 한다. 기초학력저하가 실증적으로 나타난다. 코로나19 전후로 학생들 성적에 중위권이 줄어들고 특히 하위권이 늘어나면서 학력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비대면교육이 가져오는 부정적 영향이 보이는 것이다. 공동체적 생활보다 개인주의적 지향성이 대세라지만, 사회적 역량을 키워야 하는 다음 세대에겐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세상을 바꾸기 위하여 도입한 무시험과 탈경쟁 기조의 교육환경을 새롭게 살필 필요가 보인다. 코로나19가 던져준 비대면 환경에서 교육적 효과를 어떻게 살려낼 것인지도 신중하게 살펴야 할 생각거리다. 유초중등교육과 대학교육 사이에도 함께 소통하며 고민하는 틀이 마련되어야 한다. 교육은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1-04-21

20·30, 열쇠가 되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말 속에는 그늘도 있다. 영화 ‘미나리’에서 할머니역을 해낸 배우 윤여정 선생. 할리우드 오스카상 시상식에 참석할 터에, 그의 아들이 미국사회에 만연한 ‘아시안 혐오분위기’를 떠올리며 걱정을 하더란다. 미국이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사람들 사이에 골이 패이고 벽이 생기면 대화와 소통이 사라지고 화합과 상생은 꿈도 꾸지 못한다. 흑인과 백인들 사이에서 있었던 갈등과 차별이 어느새 아시안들에게도 옮겨온 듯하다. 닮은 걸 보고 서로 보듬기보다 다른 걸 굳이 드러내 미워하려 드는 건 혹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우리는 어떤가. 뿌리깊은 영남과 호남의 갈등, 최근에 드러난 성별 간 논란, 선거 때마다 주목되는 세대간 차이.영화 ‘미나리’가 미국 내 아시안이 겪는 좌절과 극복을 그렸다면, 영화 ‘기생충’은 우리 사회 안에 숨어있는 계급과 구조를 다뤘다. 두 영화 모두 세계영화계의 주목을 받는 걸 보면, 스토리텔링의 힘과 성공이 느껴지면서도 사회적 구조가 모두에게 던지는 그늘을 확인하면서 한편 씁쓸하지 않은가. 미움과 반목이 남들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었다니! 미국 인종갈등에 아시안혐오가 더해졌듯이 우리 사회엔 20대와 30대가 던지는 경고등이 눈이 부시게 들어왔다.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시점에 모두를 놀라게 하는 청년들의 분노. 그를 통해 패배를 삼킨 여권은 물론, 승리를 거머쥔 야권도 경악한 나머지 그리 호쾌한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 자, 이제 새롭게 등장한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갈 참인가.이념이 달라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현실에 밝고 실용에 뿌리를 둔 그들의 시선을 찬찬히 따라가 보아야 한다. 가르치려 하기보다 배워야 하고, 말하려 하기보다 들어야 한다. 젊은이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갈등구조로 여기기보다 한 세대의 성난 몸부림으로 해석해야 한다. 진보도 보수만큼이나 기득권력이 되어버린 지금, 참신하게 등장한 경보등이 아닐까.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라는 경고장이며 그래도 혹 남아있다면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거부권이다. 진보가 들어선 미국에 생각거리가 많아진 만큼, 보수가 이겨버린 한국에도 걱정거리가 태산처럼 높다. 인종 간 갈등이야 경계선이 눈에 보이지만, 세대 사이에 들어선 가림막은 구분선이 모호하다. 투표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몰랐으니까. 소통과 화합은 이제 더 멀어진 것일까.통찰과 혜안은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드러나는 법이다. 지혜와 명철도 위기를 만날 때 번득인다. 이념을 고집하기보다 실용으로 나서야 한다. 이론보다 현실에 도움이 되도록 결정해야 한다. 젊은 세대들이 일상으로부터 용기를 회복하도록 지지해야 한다. 꿈과 용기만 있어도 성공에 이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어야 한다. 세상만 바뀐 게 아니었다. 사람이 더 많이 바뀌었다. 그들이 당신을 지지하려면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생각해야 한다. 미움과 갈등으로 가득한 세상에 ‘청년’이 열쇠로 등장하였다. 누가 젊은이의 마음을 획득할 터인가. 청년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1-04-14

청춘으로 빛나게 하라

장규열한동대 교수산고 끝에 시장이 선출되었다. 선거과정에서 세대와 성별, 직업을 씨줄과 날줄로 살피며 투표성향을 예측하곤 하였다. 특별히 주목을 받는 연령층이 두드러졌다. 20대와 30대. 청춘과 낭만의 한 가운데를 달릴 것이라 여겨져서 늘 꿈틀거림과 변화의 소용돌이를 경험하는 인생의 계절을 지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정치적으로 통상 미래를 내다보는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며 문화적으로도 사회의 변화를 이끌며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아도 창창한 미래를 내다보며 사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세대라 생각하였다. 그런 그들이 바뀌었다고 한다. 진보에서 출발했던 그들의 현주소가 중도마저 냉큼 건너 보수를 향하고 있다는 게 아닌가.그들에게 이념은 죽은 물건이다. 21세기 디지털과 나노, 광속과 초연결의 세계에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은 낡아빠진 쓰레기더미와 같다. 어떻게 사람이 한 가지 통념에 주소를 정하고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좌표를 가질 수가 있다는 말이냐. 시시때때로 바뀌며 헤아릴 수 없는 부침을 거듭하는 시대의 역동성을 구세대는 도대체 알기나 하는지. 보아하니 당신들이 쌓아 올린 기득권적 가치에 매몰되어 구시대적 경쟁과 허무맹랑한 말싸움이나 거듭하는 건 이쪽도 저쪽도 마찬가지인 걸! 지난 시절에 겪은 역사나 되뇌이며 ‘너희들은 모르는’ 엄청난 이념과 가치라도 가진 듯 휘두르는 건 그냥 허세와 허구였음이 거의 판명되고 있는 걸. 오늘 20대와 30대는 목이 마르다. 이념과 사상에 굶주린 게 아니라 꿈과 희망에 목이 마르다.민태원이 ‘청춘예찬’에서 젊은이의 특권이라 노래했던 이상(理想)은 생각도 해 보기 전에 불편과 궁핍이 떠오른다면 그 어느 이념과 가치가 그들을 붙들어 맬 것인가. 오늘 이 나라의 젊은이들에겐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는 이생망이며 헬조선이었는데 이제는 ‘영끌’과 ‘빚투’가 목을 조인다. 그러니 앞에 선 누구도 맘에 들 까닭이 없으며 청년을 위한 정책에는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 잠시 목을 축이는 몇십만원이 문제가 아니라 기대하며 달려갈 미래를 보여달라는 아우성이 들리지 않는가. 그들이 보수로 돌아선 듯 보이는 저 움직임은 이념을 거부하겠다는 최후통첩이 아닐까. 실용과 즉답으로 가득한 세상에 에둘러 표현하는 불편함도 거추장스러운 게 아닌가. 정치와 문화, 경제와 사회는 이 땅의 젊은이들을 생각이나 하는가.용감하게 선거에 나서 시장에 선출된 이들에게 축하하기에 앞서, 오늘 도시의 젊은이들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려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이 다음 선거에나 관심이 있었다거나 시장직은 징검다리였다는 조짐이 보인다면, 우리는 어김없이 당신을 저주할 것임을 분명히 한다. 뽑아준 유권자들의 목소리에 충실한 공복이 되어, 도시민 모두를 위한 맨 아랫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주시라. 당신에게 표를 모아준 젊은이들을 꿈에도 잊지 않는 시장이 되어 약속대로 멋진 도시를 만들어 주시라. 20대와 30대가 세우는 도시를 기대한다. 젊은이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1-04-07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장규열한동대 교수일 년 365일 가운데 그래도 해학과 위트가 느껴지는 하루가 있다. 바로 오늘 만우절.악의와 술수를 품은 기만이 아니라 재치와 웃음을 담은 거짓말로 유쾌하게 주고받는 한 날. 만우절이 있어 그나마 숨통을 틔우고 한순간이지만 파안대소로 통쾌하다. 나이와 격식도 잠시 잊고 시름과 걱정을 날려 보내는 상쾌함이 있다. 영어로 April Fool’s Day라니 바보가 되어 오히려 신선하다. 꽉 조여서 여유라고는 한 치도 없는 현대인의 일상 가운데 그래도 이 한 날이 있어 긴장과 경계를 풀어놓는다. 만우절이 지나면 다시 싸움터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모두의 운명이지만, 이 하루를 지어낸 사람들의 지혜가 가상하고 고맙다. 오늘 당신은 어떤 신박한 거짓말로 웃을 것인가.거짓말은 나쁘다. 특히 정치인과 공직자의 거짓말은 그 폐해의 공적인 범위가 상상을 넘기도 하여 심각하기 일쑤이다. 선거에 나선 후보들의 공약과 선언에 신뢰로 다가서는 시민이 얼마나 될까. 늘상 당하면서도 순박하게 표를 던지는 국민이 결국 그들의 대표를 그렇게 선출하고 만다. 믿지 못하면서도 뽑아 세우는 시민은 책임이 없을까. 믿지 못하겠으니 아예 투표에도 나서지 않는 국민은 또 누구인가. 누가 해도 ‘그 밥에 그 나물’이라는 자조는 정당한가 아닌가. 거짓과 기만을 워낙 거듭 경험한 국민은 지칠대로 지쳤다. 법과 제도, 윤리와 도덕은 후보들의 술수과 거짓을 막아내지 못하는 게 아닌가. 미디어로 둘러쌓인 오늘의 선거전에서 후보들의 면면을 세세히 살필 기회는 이전보다 늘어났다. 시민 각자가 팩트와 거짓을 구분해야 한다.정치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나의 삶을 위하여 공정하게 판단하는 일도 유권자의 몫이 아닌가. 가짜뉴스와 편향보도의 숲에서도 옥석을 가리는 당신의 표심과 혜안은 살아있어야 한다.여론조사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표심의 향배를 들먹이지만 마지막 결정은 나의 손끝에 달렸음을 기억해야 한다. 정작 이번 선거가 우리 지역에는 없다. 그럼에도 이토록 신경이 쓰이는 일은 삶이 그만큼 힘들고 지쳐있음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다가올 나라의 모습과 다음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아닐까. 나라가 잘 되었으면 하고 하루하루가 나아졌으면 하는 민심은 오늘도 정치의 현실을 주목하고 있다. 정치인 당신들의 언사와 약속에 진정성이 얼마나 실렸는지 국민은 주시하고 있다. 얕은 거짓과 약은 술수가 이제는 통하지 않을 것임을 명심하기 바란다.만우절이 선사하는 유쾌함이 정치의 거짓과 기만에 덮이지 않아야 한다.시민이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올바른 판단을 하려면 언론이 바로 서야 한다. 언론이 공적인 책무를 적절하게 수행하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더도 덜도 말고 확인된 팩트에 근거한 기사와 평론으로 승부해야 한다. 공연히 바람을 일으키는 데 몰두하는 언론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 정치도구일 뿐이다. 잠시 즐기자는 하얀 거짓말을 넘어 정치술수에 물든 거짓말 잔치는 사라져야 한다.진실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1-03-31

대학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장규열한동대 교수‘벚꽃피는 순서대로 문을 닫는다.’ 인구감소를 바라보면서 예견하였던 위기가 실제로 눈 앞에 펼쳐진다. 대학들, 특히 지방대학들은 신입생을 채우지 못하여 존폐의 기로에 선다. 모든 대학들이 그렇지는 않다고 해도, 학령인구 격감이 가져다줄 대학캠퍼스의 내일에는 그늘이 드리웠다. 교수들 사이에는 이미 ‘대학에 미래가 있는가’를 고심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대학이 스스로 정체성을 다시 생각하고 앞으로 펼쳐질 고등교육의 나아갈 바를 새롭게 살피고 정돈해야 한다. 겉으로 보기엔 학생숫자가 당장 문제이겠으나, 미증유의 코로나19 상황을 지나면서 나타나는 또 다른 변화도 대학의 고심을 더욱 깊게 한다. 지난 한 해 동안, 모든 교육기관들은 온라인 비대면 강의로 팬데믹에 대처하였다.봄학기를 맞아 백신접종과 치료제개발 소식을 접하면서 대면강의를 폭넓게 시도하지만, 어느 틈에 온라인 강의에 익숙해진 학생들은 이전처럼 강의실로 돌아오지 않는다. 팬데믹이 지나간 다음 다가올 ‘대학의 뉴노멀’은 온라인강의와 사이버대학을 보다 넓게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의 습관과 태도에 온라인접촉은 대학경험의 한 축으로 자리잡은 느낌이다. 교수와의 교감과 교류, 사제지간의 소통과 협력이 물론 소중하지만, 그마저도 온라인과 비대면으로 진행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이미 깊게 자리잡은 듯하다. 학생들이 대학과 대학생활에 거는 기대 가운데 ‘강의’에 대한 인식과 태도는 이전과 사뭇 달라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대학이 학생들을 위하여 제공하는 서비스를 디자인하는 데에도 이전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게 되었다.사회 일반이 대학을 바라보는 관점도 변화해 간다. 대학은 더이상 지성인을 기르는 상아탑이 아니라, 안정된 직업을 목표로 하는 취업준비의 현장처럼 변모하고 말았다. 졸업생 취업률이 대학의 성공을 가늠하는 지표가 되었고 대학마다 차별화와 특성화를 시도하기에는 우리 대학은 너무나 서로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대학교육에 정부가 관심을 가지고 대학들을 도와온 끝에, 이제는 대학들이 정부에 의존하는 현상이 깊어져서 돌이키기 어려운 관례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재정적인 자립을 온전히 이룬 대학이 드물 정도가 아닌가. 정부의 지원사업에 의존하며 생명을 이어가는 우리 대학의 모습은 처연하기 짝이 없다. 대학과 정부는 고등교육의 본질을 뿌리부터 다시 살펴 대학다운 모습을 회복하도록 결연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대학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대학 지성을 기르는 자긍심으로 수십 년을 지내왔다면 ‘보편적 지식인’을 기르는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해야 한다. 대학에서 낭만과 교감을 기대하던 대학생의 모습은 이제 온라인소통과 비대면교류로 변화된 환경을 경험하며 바뀌어 간다. 학생을 만나며 지적 대화에 익숙했던 교수의 모습도 디지털시대가 제공하는 신박한 교감을 받아들여야 한다. 대학은 적극적으로 변모해 가야 한다. 대학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1-03-24

기술의 진보, 인성의 퇴보

장규열한동대 교수세상은 앞으로 나아간다. 그저 변하는 게 아니라 좋은 세상이 되어가는 모습이 뚜렷하다. 기술의 진보와 문명의 발달은 세월과 함께 가히 눈부시다 하리만큼 더 나은 방향으로 재촉하듯 움직여 간다. 디지털환경과 인공지능은 그 적용 범위를 날로 넓히며 인간의 삶을 더욱 편리하게 만들어낸다. 세상을 두고 떠나기가 아까울 만큼 앞으로 만나게 될 내일 세상이 궁금해진다. 분명한 것은 어제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물이 희귀할 정도로 많은 것들이 빠르게 바뀌어 간다. 사람은 어떤가.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긍정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만큼 사람도 보다 선하고 좋은 모습을 가지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게도 우리가 목격하는 인간의 모습은 그리 좋아지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우리가 발견하는 사람의 모습은 날이 갈수록 향기가 나기보다 오히려 부정적인 모습을 가지기 일쑤가 아닌가. 날마다 들려오는 정치권 뉴스는 나은 세상을 당겨오는 방법과 정책을 다루기보다 서로 흠집을 내고 헐뜯기에만 골몰하고 있다. 그 어느 가닥에도 시민을 위한 배려와 공감어린 고뇌는 보이지 않는다. 상대 후보의 약점에만 집중하고 끌어내리기에 혈안이 되어 시민의 삶을 숙고하고 도시의 내일을 신중하게 설계한 흔적이 도무지 없다. 도대체 무엇으로 세상을 바꾸고 어떻게 시민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뿐이다. 후보단일화와 세력대결에 마음을 쏟은 나머지 시민의 삶은 후보들의 관심 밖으로 한참 멀어져 있다. 선거를 거듭해도 나아지지 않는 정치풍토는 과연 시민의 투표로 바꿀 수 있을까.학교폭력과 아동학대는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어 그리 새로운 뉴스거리도 되지 못한다. 혐오범죄와 성범죄도 이 땅에서 사라질 줄 모른다. 기술은 나날이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움직여 가는데 인성은 어찌하여 좀처럼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문명과 인성이 함께 발전해 갈 방법은 없는 것일까. 세상이 제아무리 발전하여 좋아진다 해도 사람들 간에 갈등과 반목, 폭력과 범죄가 끊이지 않는다면, 그 모든 긍정의 에너지는 부정의 늪을 헤매고 말 것이 아닌가. 하드웨어가 발전하는 만큼 소프트파워가 균형있게 자리를 잡도록 사회적 관심과 배려를 기울여야 한다. 날이 갈수록 교육의 책임이 무겁고 인문학적 소양이 맡아야 할 자리가 넓지 않은가.기술과 문명의 발달만으로는 세상이 좋아지지 않는다. 겉으로만 그럴듯할 뿐 자칫 인간의 속성과 세상의 모습을 오히려 그르칠 확률마저 보인다. 기술에 대한 이해와 이웃을 생각하고 함께 호흡하는 공동체성을 길러야 한다. 나만 행복한 멋진 세상이 아니라 함께 누리는 즐거운 마을을 만들어야 한다. 부유한 선진국을 향해 달려왔다면, 이제는 ‘착한 나라’를 만들 욕심도 부려야 한다. 예전의 어른들은 어째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을까. 오늘 우리는 ‘돈 잘 버는 사람이 되라’고만 가르치지 않는가. 인성도 기술과 함께 균형있게 길러야 한다. 사람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

2021-03-17

바보 아버지

장규열한동대 교수탐관오리(貪官汚吏). 탐욕스러운 관리와 더러운 벼슬아치. 옛날이야기에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보통사람들만 멍이 드는 느낌이 아닌가. 국민이 모아준 세금으로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할 터에, 일터에서 얻은 정보를 가로채 자신들만 배를 불렸다. 국민을 대신해서 일하라 했더니, 국민을 속이면서 얼마나 고소했을까. 도둑이 들끓는다 듣기는 했지만, 이처럼 당하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이게 만약 공직사회에 만연한 평균적 조류라면, 국민은 누굴 믿고 일상을 이어갈 것인가. 나라의 내일은 어떻게 보전할 것인가. 다음세대에게 우리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선진국이 된다한들 무너질 질서를 어찌할 것인가.70년대와 80년대를 가로지르며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가 이어질 무렵에 기초조사와 기본설계의 맨 앞에서 일했던 토목기술자가 있었다. 필자의 선친이었던 그는 사업가였던 선대의 핏줄을 따라, 나라의 동맥을 연결하는 일이 부동산에 미칠 영향을 잘 알고 있었다. 장차 고속도로가 완성되면 주변의 땅값은 폭등할 것이며 한 덩어리라도 구입하면 큰 이득이 생길 것도 알고 있었다. 공직자로서 그는 그리 하지 않았다. 손수 설계하고 모든 정황을 다 꿰뚫고 있었지만, 아내에게마저 한 톨도 발설하지 않았다. 나라의 운명을 가를 대역사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모친은 지금도 당시 일을 회상하며 안타깝다 하신다. 한 자락만 알려줬어도 아쉽지 않은 세월을 보냈을 터인데. 하지만, 어머니도 아버지의 어깨에 걸렸던 성실함과 정직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신다. 아들은 직장생활 몇 년 만에 모은 돈만 가지고 떠난 유학길에서 동네 신문도 배달했었다.아버지는 바보였을까. 나라가 맡겨준 일을 통해 획득한 정보가 본인에게는 나름 기특할 것이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 공유하게 된 정보를 사사로이 유용하면 챙길 이득이 분명히 있다. 거대한 부와 걱정없는 내일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여, 어지러워질 세상과 복잡해질 속내는 어찌해야 하는지 생각하기 싫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국가와 국민에 대한 신의와 성실을 지키며 밤낮을 뛰는 공직자들이 수두룩하다. 그들 덕에 나라가 굴러가고 사회가 평안하다.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당신같은 관리들이 있었기에 이 나라가 이만큼 자라왔다는 믿음이 있다. 바보같이 욕심없이 섬겨온 덕에 나라의 길들이 무사히 이어졌을 터이다.‘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시인 윤동주가 적어내린 심정에 우리는 어떻게 답하여야 하는가. 공직을 사익에 이용한 당신은 그래도 잘못이 없다고 우길 참인가. 공직사회의 청렴함을 회복하기 위해서 정부는 특단의 결단을 하여야 한다. 다음세대에게 부끄럽지 않은 나라를 물려주기 위하여 사회가 맑아져야 한다. 그의 삶이 일을 잘하기 위한 욕심으로 가득했었지만, 어느 한 자락도 자신을 위해서는 쓰지 않았던 ‘바보 아버지’가 오늘 새삼 그립다.

2021-03-10

문제는 숫자보다 본질에 있다

장규열한동대 교수올 것이 왔다. 오래전부터 예견하였던 인구절벽이 이제는 손에 잡힌다. 새 학기 신입생을 채워야 하는 대학들은 이미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하였다. 전국에서 무려 175개 대학들이 정원을 채우지 못하여 신입생 유치에 비상등이 켜졌다. 추가모집에도 미달이 속출한다는 게 아닌가. 비수도권 지방소재 대학들에게는 위기가 절벽으로 느껴질 만큼 가파르다. 정원을 채우는 일이 다급하지만 그보다 본질적으로 살펴야 할 문제는 혹 없을까. 우리 대학들은 거의 같지 않은가. 이름만 달랐을 뿐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트렌드와 유행을 좇아 서로 흉내만 내고 있지는 않았을까. 교육부의 지원에 기대고 지침을 따르느라 저마다 특별함을 혹 잊은 것은 아닐까. 대학뿐일까.지역이 아예 사라질지도 모른다. 균형발전은 말뿐인지 온 나라는 수도권 소식에만 집중하고 있다. 인구위기를 가늠하는 인구소멸지수가 있다. 20세에서 39세 사이 여성인구를 65세 이상 인구로 나눈 비율을 의미한다. 지수가 0.5 이하면 소멸위험, 0.2 이하면 소멸고위험으로 읽는다. 경북에는 23개 시군 가운데 군위, 의성, 청송, 영양, 봉화, 청도, 영덕 등 7개 지역이 소멸고위험, 그 밖에 12개 지역이 소멸위험으로 구분되었다. 포항도 0.63으로 주의단계에 처하여, 현재 진행중인 ‘포항시인구 51만회복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수도권집중 현상과 인구감소 상황이 가져온 전국적인 문제이겠지만, 지역은 스스로 문제의 근원을 살펴야 한다. 중앙정부 정책을 수동적으로 따라오느라 지역의 특색을 살리지 못한 부분도 혹 있지 않을까.대학도 지역도 본질을 회복하여야 한다. 대학은 대학마다 특성을 찾아내어 다른 대학들과는 분명하게 다른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전공영역에서 남들과 다른 특화된 부분을 찾아야 하며, 교육철학과 교과과정 등에서도 분명히 다른 지향점과 접근방법을 모색하여야 한다. 아무리 멀어도 독특한 무엇을 가진 대학에는 학생들이 찾아오게 된다. 구미 각국의 대학들이 모두 다른 특성을 가지고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우수한 학생들을 끌어들이는 모습에서 배워야 한다. 전공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두 담아 백화점식 운영을 하는 특색없는 비차별적 대학경영은 인구감소와 함께 그 운명을 다하였다.지역은 어떨까. 인구숫자도 급하지만, 우리 지역이 매력을 가지지 못하는 까닭부터 찾아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떠나는 이유를 물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며 삶을 영위하게 할 것인지 궁리하여야 한다.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색있는 문화가 보이고 꿈을 실어 매진할 수 있는 독특하고 일자리가 있어야 한다. 떠나지 말라고 애원할 게 아니라 떠나지 않을 까닭을 만들어야 한다. 이미 지역을 벗어나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친지들이 고향을 찾아 돌아올 이유를 제공해야 한다. 남들에게 다 있는 무엇으로 할 게 아니라, 다른 곳에는 없는 매력을 구사해야 한다. 숫자보다 본질을 돌아보아야 한다. 지역이 살아야 나라도 산다.

2021-03-03

불가능한 꿈

장규열한동대 교수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특히 미국은 힘든 상황을 지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수가 오십만을 넘었다. 백신접종과 치료제개발이 희망을 준다지만, 일 년 넘게 경제, 사회, 문화의 틀을 바꿔 놓은 감염병의 여파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인류를 힘들게 할 터이다. 나라 간 경제적 질서와 힘의 균형에도 영향을 미치며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도 미항공우주국(NASA)가 우주탐사선 퍼시비어런스(Perseverance)호를 성공적으로 화성에 착륙시켰다. 미국인들은 코로나19의 역경을 잠시 잊고 열광하였으며 이를 새로운 개척의 역사로 바라보는 듯하다. 땅 위에서 겪는 난관의 틈바구니에서 신선한 희망을 찾으려는 미국인들의 노력이 아닌가.화성. 태양계에서 지구 다음 네 번째 행성. 지름이 지구의 절반 정도 되는 작은 행성으로 희박한 대기는 거의 이산화탄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의 존재는 확인되었지만 생명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평균 대기온도가 영하 23도라 사계절은 있으되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은 아니다. 그럼에도, 미국은 인간의 다음 체류지로 화성을 주목한다. 테슬라(Tesla)의 일란머스크(Elon Musk)는 우주개발을 위한 사기업 스페이스엑스(SpaceX)를 설립하여 수년 내에 인간을 화성에 보내고 인간의 생존이 가능한 환경으로 바꾸어 낼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화성에서 인간이 편안하게 살 수 있기까지 줄잡아 ‘천 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는 강연을 태연하게 들으며 미국인들은 기대를 한층 높이 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개척정신. 도전정신. 탐험정신. 불굴의 의지. 오늘 그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역경을 헤쳐가면서 동시에 미래를 향한 구상과 기획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이 아닐까. 코로나19의 혼란 속에서도 탐사선이 보내오는 화성의 찬란한 밤하늘 사진과 화성의 바람소리 한 자락에 흥분하는 그들에게 개척정신이 보이지 않는가. ‘코스모스(Cosmos)’와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을 저술한 칼세이건(Carl Sagan)은 우주사진에서 작은 점 지구를 주목하면서 ‘정착할 수 있는 행성이 아직은 없다. 좋든 싫든 인류는 당분간 지구에서 버텨야 한다’고 적었지만, 미국인들은 그 ‘당분간’을 또다시 앞당기려 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코로나19의 와중에. 쿠바의 혁명가 체게바라(Che Guevara)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고 하였다.불가능한 무엇에 도전하지 않고는 의미있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가능한 일만 반복해서는 뛰어난 도약을 거둘 수 없다. 지난 세월, 대한민국은 수많은 불가능을 뚫고 오늘에 도달하였다. 오늘에 만족하며 멈추는 일은 없어야 한다. 벌어지는 일에만 주목하면 새로운 내일을 기약하지 못한다. 현재 문제를 해결하면서, 미래(未來)를 준비해야만 나라다운 나라가 선다. 보이지 않는 승부처가 어디인지 끊임없이 모색하는 오늘이어야 한다. 오늘에 붙들리지 않고 내일을 바라보는 세대를 길러야 한다.

2021-02-24

일그러진 기억과 무너진 신사도

장규열 한동대 교수학교는 무엇일까. 아침마다 나서는 등굣길은 어떤 느낌인가. 믿고 보내는 부모의 마음이 있고 반갑게 만나는 선생님이 있다. 밤새도 그리웠던 친구들이 있고 떠난 후에도 그리운 교정이 있다. 가르치고 배운 기억이 한 가득이며 나누고 함께 했던 시간으로 늘 돌아가고 싶다. 그러니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했던’ 마지막 날을 기억하면서, ‘우리들도 이다음에 다시 만나세’라 노래하지 않았던가. 그런 학교의 모습이 일그러졌을까. 모든 비겁함들 가운데 가장 천박하고 저열한 것이 ‘폭력’이 아닐까. 학교폭력, 그것도 오래전에 벌어진 일이 문제가 되어 어른이 된 운동선수가 여론의 도마에 오른다. 사라져야 하는 학교폭력, 그것도 가장 신사도를 발휘해야 할 스포츠를 물들인 폭력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유네스코(UNESCO)는 학교폭력을 수많은 아동과 학생들의 기본적인 학습권을 부정하는 범죄로 규정하며 그 퇴치를 강력하게 권고한다. 폭력으로 물든 학교 환경에서 어느 학생이 긍정적인 배움과 배려를 경험할 수 있겠는가. 누구에게든 두려움을 가진 사람은 자발적이며 적극적인 의사표시도 하기 어려우며 능동적인 학습을 기대할 수가 없게 된다. 하물며 그것이 날마다 겪어야 하는 일상이라면 그가 가지게 될 학교에 대한 기억은 어떠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보다 적극적인 학교폭력 근절에 나서야 한다. 사건이 불거지고 언론에 보도되면 그제야 사후약방문격의 관심을 보이면 괴물같은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숨을 죽일 뿐 사방에서 또아리를 틀고 다시 설치게 마련인 게 아닌가. 학교폭력에 대처하기 위한 위원회 등이 설치되어 있지만, 혹 사후 처리에만 그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살펴야 한다.스포츠폭력은 또 무엇인가. 공정하고 건강해야 할 운동정신이 저열하고 비겁한 폭력행태와 만난 일이 아닌가. 경기력 향상을 핑계로 삼는다지만 두려움 앞에 발휘되는 그 무엇도 자랑삼을 바가 되지 못한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스포츠와 관련된 그 어떤 폭력도 있어서는 안 되며 모든 국가는 폭력의 존재와 퇴치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하나, 폭력의 그늘은 오래가기 마련이다. 얻어맞고 억눌렸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피해당사자가 겪는 아픔과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해자의 진정성있는 사과와 주변의 공감어린 배려가 있어야 조금씩 치유와 회복을 경험할 터이다. 폭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때에만 실질적인 기량향상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세상이 변해간다. 과학과 기술만 변화를 이끄는 게 아니다. 남을 향한 인식과 이해가 함께 바뀌어야 한다. 강할수록 약한 이를 배려하고, 누구든 서로 격려하며 함께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야 한다. 무시하고 배격하며 폭력으로 처단하며 무엇인가 이루려던 어제는 잊어야 한다. 벌어진 폭력에나 반응하던 태도를 바꾸어, 절대로 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준비하고 행동하여야 한다. 폭력은 관심거리가 아니다. 폭력은 범죄일 뿐이다.

2021-02-17

문과도 이과도 거짓말이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문송이라던가. ‘문과여서 죄송합니다’라는 자조적 표현 속에는 문과는 이과와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숨어 있다. 이과적 성향과 문과적 성향이 생각처럼 그렇게 다른 것일까.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여 사람을 생각하는 게 바람직한가. 고등학교 중반부터 우리는 사람을 구분하여 바라본다. 아니 그런 성향을 어릴 적부터 찾아내려 애쓰기도 한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서조차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며 관심을 쏟는 과목이 다르고 깊이가 다르다. 문과는 수학과 과학을 멀리하고 이과는 문학과 역사를 가벼이 본다. 문과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계산과 분석에 약하고 이과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정서와 감흥에 뒤떨어져도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문제는 유형별로 생기지 않는다. 기업경영은 문과인가 이과인가. 가정살림은 문과인가 이과인가. 상황은 언제나 복합적으로 발생한다. 균형잡힌 통합적 사고가 날마다 필요하다. 사람을 읽어야 하고 상황을 분석해야 한다. 느낌을 짚어야 하고 비용에도 밝아야 한다. 배경지식도 필요하고 미래예측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가. 사람들 사이에 칸을 치고 벽을 만들어 서로 오가는 일마저 막는다. 문과와 이과는 함께 나눌 이야기거리마저 궁핍해져서, 사회는 또 다른 양극화를 겪는다. 넘나들기 어려운 섬들이 생긴다. 문과적 소양과 이과적 능력을 따로따로 구분해서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이제 접어야 한다. 공교육을 받는 우리 학생들이 균형잡힌 인성을 형성해가도록 도와야 한다. 문학과 역사, 수학과 과학을 넘나들며 폭넓게 배우도록 도와야 한다.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유네스코(UNESCO)는 21세기에 가르쳐야 할 네 가지 필수영역들로 분석적 사고 (Critical Thinking), 창의(Creativity), 협력(Collaboration), 소통(Communication)을 들었다. 놀랍게도 문과나 이과의 구분이 보이지 않는다. 개별 과목의 이름도 적지 않았다. 전통에 따라 구분된 과목의 이해를 넘어 통합적으로 균형잡힌 교육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에서마저 지나친 세부 전공영역의 구분을 경계한다. 전문지식 심화의 필요를 인정하더라도 인성의 널푼수는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마침,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은 문·이과 통합형으로 치른다고 한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교육이 바뀌어 가는 신호로 보인다. 다음세대가 창의와 혁신으로 가득한 내일을 만나려면 다르게 배우고 새롭게 가르쳐야 한다. 문과와 이과 구분에 길들여진 습관을 벗어야 한다. 과학자가 문학에 능하고 역사가가 과학에 밝은 날들이 와야 한다. 새로운 상품개발에 인문학적 경험과 불편함이 스며들고 철학자의 논변에 과학의 발자취가 녹아들 때 비로소 학문 간 균형과 인성 간 조화도 가능할 터이다. 문과와 이과 성향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폭도 넓어지지 않을까.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따뜻해지고 함께 살아야 하는 사회에는 배려와 상생의 기운이 돌지 않을까. 포용과 협력이 시대의 기운이라면, 문과와 이과의 구분부터 사라져야 한다.

2021-02-03

모이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1억이 넘었다고 한다. 지구상에 코로나19 양성판정을 받은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게 아닌가. 사계절을 건너오며 오르내렸던 감염의 기세가 이제는 꺾이는가 싶었다. 조금씩 내려가던 숫자에 또 다시 충격을 주는 듯 집단감염이 드러나고 있다. 하필이면 교회를 비롯한 종교집단발 무더기 감염이 연일 방역을 힘들게 한다. 코로나19가 사상초유라지만, 14세기 흑사병의 그늘에도 교회가 있었다. 역병의 원인을 인간의 죄로 규정하였던 교회들 탓에 오히려 확산세가 불어났다고 한다. 21세기 첨단의료와 방역의 현장에서 팬데믹 현상에 종교적 원인을 끌어오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 겪는 바이러스의 창궐이 하필 교회 언저리에 들끓어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신천지, 인터콥, IEM, TCS. 코로나19의 확산세에 기름을 끼얹은 이들이 하나같이 기독교 관련 단체들이다. 일부 교단들도 방역수칙을 권하는 정부의 노력을 ‘교회탄압’으로 규정하며 거부하는 태도마저 드러내고 있다. 신앙인들에게 믿음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신앙을 바르게 지키며 믿음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은 값진 일이다. 모두가 인정하며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코로나바이러스의 특성상 집단으로 모이는 일이 방역에 치명적임을 이제는 삼척동자도 안다. 평소에 이웃사랑을 강조하며 배려와 섬김을 기준으로 삼던 교회는 어디로 갔는가. 의료과학의 눈으로 밝혀지고 방역의 수단으로 설정된 ‘거리두기’를 억압의 방책으로 오해하다니! 신앙을 교육과 버무려 어린 청소년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히면, 이는 이웃을 섬기는 일인가 해치는 일인가. 사회 일반은 방역에 집중하는데 교회는 어디를 바라보는가.‘교회도 바뀌어야 한다’ 프란시스코 교황이 방역기조를 거부하는 교회들을 향하여 일침을 놓았다.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싸움에 모두가 동참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영국성공회교단과 미국장로교단도 매우 세부적인 권고사항까지 적시하면서 팬데믹을 극복하는 데 협조해야 한다고 정리하였다. 미국 기독인의료협회들도 교회들을 향하여 ‘이웃을 위하여 집에 머물러 줄 것’을 강권하는 호소문을 내었다. 다른 목소리들이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사회적인 동의가 눈에 뜨인다. 이웃을 배려하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취할 태도는 분명한 게 아닌가. 생명처럼 귀한 예배는 존재와 살아가는 모습으로 올려야 하는 게 아닐까. 모여는 있어도 이웃을 해할지도 모르는 ‘회칠한 무덤’같은 섬김을 누가 기뻐할 것인가.‘네 이웃을 사랑하라.’ 믿음이 높은 곳을 향할수록 주변을 돌아보아야 한다. 혼자만 구원에 이르기보다 남들과 함께 이웃을 만들어야 한다. 죽어서 올라가는 게 천국이 아니라 여기서 당겨오는 게 하늘나라가 아닌가. 팬데믹이 얼른 지나가고 함께 교회에 모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 날이 얼른 오도록 오늘은 이웃과 함께해야 한다. 탄압이 아닌 방역이 역병을 극복하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모이지 않고도 믿음의 공동체가 든든해지는 기억을 만들어야 한다.

2021-01-27

미국은 어디로 가는가

장규열 한동대 교수미국 대통령이 바뀌었다. 바이든 새 대통령은 ‘회복과 포용을 지표로 삼아 모든 미국인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선거는 지난 11월에 있었지만 지나온 길이 순탄하지 않았다. 공화당을 지지하는 군중이 의사 진행 중이었던 의회 건물 안으로 들이닥쳐 소동과 폭력을 휘두른 일은 미국 민주주의 역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 전임 트럼프 대통령의 선동 여부가 문제가 되어 그는 하원에서 탄핵까지 당하였다. 민주주의의 모범이라 여겼던 미국의 부끄러운 모습을 전 세계가 보고 말았다. 미국은 이대로 가라앉을 것인가. 아니면 실수를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회복하려면 미국은 무엇을 고쳐야 하는가.혼돈의 과정에서 미국을 흔들었던 구호들을 살펴보자. ‘다시 위대한 미국으로 돌아가자’는 그들의 외침에는 백인우월주의가 숨어 들었다. 건국으로부터 다양한 출신 사람들을 품기로 했던 미국인들이었지만 ‘피부색’에는 약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들어서자 레비츠키(S. Levitsky)와 지블라트(D. Ziblatt)는 미래를 걱정하며 ‘민주주의는 어떻게 죽는가(How Democracies Die)’를 저술했다. 트럼프의 리더십이 백인 중심으로만 진행되면 참된 민주주의의 실현이 어려울 것이라 했다. 우려는 현실이 되어, 급기야 선거의 결과도 부정하지 않았는가. 책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된 적이 거의 없었음을 지적하면서 미국이 그런 전통을 세워가기를 기대하였다.미국이 보여줘야 한다. 미국이 먼저 인종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킹 목사(Martin Luther King, Jr.)가 외쳤던 ‘꿈’이 실현되는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함께 어우러지는 사회를 부정한 끝에 폭력과 탄핵에 이르는 경험까지 하지 않았는가. 민주주의의 모범은 ‘많은 사람의 생각’을 담는 데서 드러난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다른 생각, 다른 문화, 다른 배경.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규정하며 배격하고 공격하기 시작하면 민주주의는 이내 막을 내린다.우리는 어떤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나름 성공적으로 달성하며 달려가는 길목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끌어안는가 아니면 배척하는가. 편을 가르고 진영을 나누는 주장들로 가득하지 않은가. 하트만(Michael Hartmann)은 그의 책 ‘엘리트제국의 몰락’에서 ‘소수의 세력이 지배하는 닫힌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 포괄적이면서 환대하는 열린 엘리트사회를 지향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사회적 불평등과 구조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엘리트구조로는 민주적 공존을 기할 수가 없다. 모든 구성원이 존중받고 차별없이 참여하는 사회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 때 진정한 민주주의는 구현된다.‘우리는 늘 반대편에 서 있지만, 한 번도 적이었던 때는 없었다.’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의 말이다. 반대는 더 나은 무엇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을까. 수많은 다른 생각과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힘으로 하여 미국과 한국의 민주주의는 발전해 가야 한다. 새 미국에 높은 기대를 건다.

2021-01-20

대학은 이십대만 가르친다고?

장규열 한동대 교수코로나19가 모두 삼켜버렸다. 3차 대유행이 약간 고개를 숙이고 백신과 치료제가 떠오르면서 조금씩 저무는가 한다. 하지만 글로벌세상이 펼쳐지면서 아직 안심하기는 이른가도 싶다. 해마다 이즈음이면 긴장하게 하는 뉴스 자락이 있다. 대학입시. 대학에 들어가는 방법이 다양해져 정시 비중이 줄었지만, 학생을 기다리는 대학의 관점으로는 여전히 중요한 입시시즌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극소수의 수도권 대학들을 제외한 대학들의 정시경쟁률에 비상이 걸렸다. 특히, 지방대 경쟁률은 미달을 감수해야 할 만큼 심각하다고 한다. 문제는 어디서 왔으며, 대학은 어찌해야 하는가.힘든 경제환경과 각박한 사회현상은 젊은 부모들에게 아이들을 낳기 힘들게 하였다. 2000년에 330만이었던 학령인구수가 2020년에는 240만명이 되었다. 학령인구가 거의 30퍼센트나 줄어든 셈이다. 올해 대입정원을 모두 합치면 55만명이라는데, 입시에 응하는 수험생수는 53만명이라고 한다. 수험생이 더 적다. 학령인구가 빠르게 감소하고 대입수험생이 줄어들면서 대학들은 정원을 채우기가 어렵게 되었다. 상아탑을 자처하며 고학력 졸업생들을 배출해 내던 대학들은 이제 사활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성과 재능을 대학이 지속적으로 배출해 낼 수 있을까.대학교육이 끝이 아니다. 디지털문명이 심화되고 4차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대학에서 배운 것으로 평생을 살기는 어렵게 되었다. 20대초반에 좁은 한 분야를 전공삼아 획득한 학사학위는 긴 시효와 효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드러내고 존재이유를 증명하려면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나때는 말이야’는 통하지 않는다. ‘내가 다 해본 것’도 이제는 없다. 학문영역의 경계도 무너지는가 하면 전공분야의 구분도 선명하지 않다. 대학생들은 이미 ‘자유전공’을 만들어 스스로 여러 학과의 과목들을 혼합하여 학위를 취득하곤 한다. 문과와 이과의 구분처럼 뒤떨어진 발상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젊은 이십대를 가르쳤던 대학은 이제 모든 세대를 교육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새롭게 배울 것들을 세상의 손에만 맡겨둘 수가 없다. 대학이 거두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지식이 윤리적 기준과 제도적 타당성을 유지하면서 사회에 이롭게 기여하도록 대학이 나서야 한다. 사회적 책임성이 결여된 지식의 오류를 수정하는 일도 대학이 맡아야 한다. 책임있는 ‘평생교육’이 대학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대학은 이제 모든 세대가 함께 호흡하며 끊임없이 나누는 ‘배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세대 간의 나눔과 다양한 집단 간의 토론도 아우르는 ‘소통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배움과 소통이 일어나면 대학의 내일은 오히려 밝다. 갈등과 분열을 해소하는 공론의 장을 대학이 만들어 낼 가능성에도 기대를 건다.어제 대학이 젊은이를 기르는데 까닭을 걸었다면, 내일 대학은 사회가 책임있게 움직이도록 이끄는 마당이 되어야 한다. 대학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1-01-13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장규열 한동대 교수해를 넘기며 가슴 아픈 뉴스가 들려왔다. 입양한 어린아이를 때려죽인 양부모. 세상이 무너진대도 그럴 수는 없다. 그럴 만한 까닭은 도무지 안 보인다. 대학까지 나온 부부는 둘 다 목사님 자녀라고 했다. 교육과 종교는 어디까지 무너져야 하는가.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르치지 못하는 학교와 교회는 어찌 입을 다물었는가. 개인의 잘못이라 비난하며 성찰없이 혀만 차고 말 터인가. 안타깝고 불쌍한 건 정인이의 어린 생명뿐일 것인가. 언론이 다루는 수다한 이슈들처럼 짧은 동안만 후루룩거리고 말지는 않을까. 피어나 보지도 못하고 한 아이의 온 세상이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아동학대. 보건복지부의 통계에 따르면, 아동보호전문기관에 신고접수된 사례들이 2001년에 2천105건이었다가 2018년에는 2만4천604건에 이른다고 한다. 열 배도 넘게 증가한 셈이다. 신체학대, 정서학대, 성학대, 방임과 유기 등으로 구분되지만 정인이의 경우는 매우 복합적인 학대를 겪은 일이다. 부모가 아이들을 대하고 어른이 어린이를 바라보는 시선에 문제는 없을까. 아동학대 경우의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데이터는 우리 안의 인식이 나아지기 보다 부정적인 방향을 흐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 그러는 것일까.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 일일까. 폭력의 모습에 경악함을 넘어 아동학대를 근절하기 위하여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닐까.스페인 교육자 프란시스코 페레르(Francisco Ferrer)는 ‘권위에 의한 어떠한 억압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모든 폭력에 반대하였다. 그 어떤 선한 명분을 가진다 해도 아이에 대한 폭력은 나쁜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권위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인 교육을 주창하였으며, ‘폭력의 배제’가 교육의 방법이자 목표여야 한다고 했다. 우등생과 열등생이 존재하지 않으며, 수학을 잘 하거나 미술을 잘 할 뿐이라고 했다. 경쟁으로 휘몰아가는 교육에서 협력으로 함께 일어나는 교육을 선언하였다. 교육의 장에 서 보기도 전에 폭력으로 스러져간 생명 앞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언론이 ‘아동학대’ 이슈를 붙들고 있는 데서 한 자락 희망을 본다.해결책언론(Solutions Journalism). 뉴스는 선정적, 충격적, 부정적이어야 한다고 인식하여, 보여주고 드러내는 데만 집중하는 언론행위는 독자를 피곤하게 한다. 2008년 미국 AP(Associated Press)의 발표에 따르면, 젊은 독자들이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고 휘발성이 높은 언론보도를 회피한다고 하였다. 오늘 독자들은 여러 이슈들에 대하여 시민 독자들이 어떻게 반응할 수 있는지, 사회가 제시할 접근방법은 무엇인지, 구체적이며 실증적인 솔루션을 향한 지향점을 제안하는 언론행위를 기다린다.어린 생명의 희생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한다. 아동폭력만큼 비열한 행위도 드물다. 교육과 종교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법과 제도는 어떻게 정비해야 하는지, 사회와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지혜를 모아야 한다.

2021-01-06

이야기에 내일을 건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포항은 어떤 도시일까. 포항을 떠올리면 사람들은 어떤 상상을 할까. 거친 바다, 딱딱한 철강, 투박한 말씨, 거친 느낌 등이 아니었을까. 그랬던 포항이 바뀌어 간다. ‘문화도시’로 지정되었으며 ‘축제도시’로 풍성한 이야기를 담는다. 폐철도를 따라 만들어낸 철길숲은 도시에 숨길을 트이게 하였다. 바다와 육지, 도시와 사람이 함께 호흡하는 지역으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의 배경이 되어 전국적인 관심도 자아낸다. 포항은 산업경제도시에 더하여 문화관광도시로 변모해 간다.‘철강 다음은 무엇일까.’ 도시는 같은 질문을 십 년도 넘게 던지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나라의 기간산업을 일으키는 토대를 만들며 분주했던 도시는 새로운 도약대를 찾느라 상상력과 창의를 모은다. 지역이 이제는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 철강을 모티프로 사람을 모았다면 앞으로는 무엇을 테마로 흥미를 끌고 모여들게 할 터인가. 어떤 이야기가 있어 청년들에게 가슴이 뛰는 기회의 문을 열어줄 것인가. 문화를 주제로 노력을 기울인 끝에, 포항은 ‘경북콘텐츠기업 육성센터’를 유치하였다. 지역문화와 콘텐츠를 기르면서 안정적인 창업환경을 만들라는 명제를 짊어지게 되었다.숲길과 함께 물길도 트인다. 육지와 바다를 잇는다. 포항시는 도시하천의 복개 구간을 걷어내 생태하천을 만들 계획이다. 학산천, 두호천, 양학천과 칠성천의 옛 모습을 회복하여 이미 조성된 도시숲과 함께 시냇물과 숲이 도시에 어우러지는 자연환경을 되찾을 것이다. 천혜의 자연과 사람의 이야기가 더할 나위 없이 버무려지는 흔하지 않은 지역이 되어갈 모양이다. 포항뿐 아니라 경북 전역에 이런 트렌드를 나눌 거점이 되어 나라의 문화지형에도 기여하게 될 터이다. 지나온 길이 가지는 의미가 깊을 뿐 아니라 미래지향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지역의 내일에 높은 기대가 걸린다.보이는 물건에 승부를 거는 시절은 저물어 간다. 보이지 않는 이야기에 내일을 거는 방향이 보이지 않는가. 끝내 손에 쥐는 물건이 있다고 해도 그를 움직이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콘텐츠기업을 기르겠다는 뜻은 이야기를 찾아내어 영향력과 경제성을 함께 만들어가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포항은 이제 상상력에 미래를 걸게 되었다. 바닷사람들의 거친 숨소리에서 이야기를 찾아야 한다. 철강을 다듬던 기억에서 이야기를 드러내야 한다. 고을마다 배어있는 옛날이야기의 가치를 다시 발견해야 한다. 센터를 세우지만, 이야기를 찾는 일은 사람들의 몫이 아닌가.콘텐츠에 기대를 걸지만, 문화로만 승부하지 않는다. 산과 바다, 사람과 이야기, 문화와 기술이 어우러지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나아가야 한다. 힘들여 잡은 기회로부터 구체적인 성과가 일어나도록 필요한 사람도 잘 찾아야 한다. 콘텐츠가 살아나는 길목에는 글로벌시장을 겨냥하는 열린 안목도 갖추어야 한다. 포항과 경북은 소프트파워를 창작해내는 거점이 되어 세계로 다가가는 중이다.

2020-12-30

늘 그래야 했던 연말은 없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12월은 늘 그랬다. 가까이 어울렸던 사람들과 떠나가는 한 해를 아쉬워하며 모이느라 바빴다. 오래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도 새해에는 자주 보자고 한 잔 기울이며 따뜻했다. 망년회와 송년모임이 줄을 이었고, 도시의 불야성은 아쉬움과 희망을 번갈아 목격하였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뜻을 담았다지만, 왠지 언제나 피곤한 뒤끝을 남기는 연례행사였다. 마음을 가다듬고 보면 새해 첫 달의 절반쯤이 지나고 있었다.둥둥 뜬 느낌으로 지나가는 한 달. 가까워도 서먹해도 한자리에 모이면 들썩이는 분위기에 해가 저물어가는 한 달. 마지막 한 달은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도 했다. 이 땅에서 버티려면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였다. 들뜨고 설레며 즐길 만도 했다. 그러는 사이, 마음으로는 가장 가깝다면서 어쩔 수 없이 소외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족. 연말연시 지치고 피곤한 몸과 마음을 겨우 추스르며 돌아보게 되는 가족. 으레 그곳에 있거니 해서일까 흥분도 기대도 별로 없는 가족. 아니 진짜로 바쁜 사람들은 새해 아침에도 돌아보지 않는 가족. 그랬던 가족과 함께할 기회가 왔다.코로나19. 모두를 ‘힘들게’ 하는 이 녀석이 희한하게도 ‘선물’도 한 자락 가지고 왔다. 근데 우선, 힘들다. 감염될까 아슬하슬하여 힘들다. 함부로 나다니지 못해서 힘들다. 정겹게 만나지 못하여 힘들다. 동네 가게들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힘들다. 학교를 가지 못하는 학생들이 힘들다. 맨 앞에 서 있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힘들다. 그 틈에 정치가 끼어드는 것도 힘들다. 백신과 치료약은 어디쯤 오는지 살피면서 힘들다. 멀리멀리 떠나고 싶은 역마살이 힘들다. 힘들고 힘들어 코로나19가 얼른 지나갔으면 하지만, 애틋하게 돌아볼 식구들이 있어 따뜻하지 않은가.우리의 뉴노멀에는 ‘가족’이 들어가야 한다. 밖에서 바쁘다고 안을 돌보지 않았던 공허함을 없애야 한다. 말로는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라면서도 한없이 쫓기며 아내와 가족에게 무심했던 과오를 되짚어야 한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야 한다. 코로나19 탓에 아니 덕에 가족과 마주 설 시간이 길어지게 생겼다. 잃어버린 망년회와 송년모임을 투덜거릴 게 아니다.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겨울엔 접었으면 한다. 더 많이 만날 가족들에 집중하는 세모(歲暮)가 되었으면 싶다.스위스의 사상가 힐티(Carl Hilty)는 ‘바다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풍이 몰아쳐야 하는 것처럼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병의 홍수와 태풍같은 어려움을 이겨내야 한다’고 했다. 인간다운 인간은 누구일까. 저 넓은 밖을 헤아리며 선한 일을 펼치는 인간다움도 귀하지만, 날마다 삶을 나누는 가족과 따뜻한 가슴을 함께 하는 인간다움이 먼저가 아닐까. 병을 통해 인간의 무지와 한계를 깨닫는다면, 이제는 가족과 함께 마음과 생각을 나누는 연말을 누려야 하지 않을까. 2020년의 세모는 가족의 소중함을 새롭게 새기는 따뜻한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코로나19가 지나간 다음에도 가족은 오래오래 남아야 한다.

2020-12-23

코로나블루

장규열 한동대 교수한 해가 저문다. 이제 곧 10대뉴스를 간추릴 터이다. 단연 1위는 코로나19가 아닐까. 설 명절 즈음에 찾아온 바이러스는 모든 뉴스를 삼켜버렸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보이지 않는 힘에 먹히고 말았다. 누구의 탓이냐 묻는 손가락질이 끊이지 않는다. 병걸려 죽으나 굶어 죽으나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절규마저 들리지 않는가. 만나고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관계와 소통이 낯설고 힘들다. 어렵고 고단한 언덕을 넘게 하는 즐거움을 이제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개인도 사회도 무섭게 가라앉은 한 해가 아닌가.국민의 건강은 정치가 아니다. 겨울로 들어서며 코로나19 상황이 더욱 어렵다. 최선을 던지며 막아내려는 의료진과 보건당국이 있다. 확진자 숫자에 흔들리기보다 일상의 안정을 유지하며 방역에 힘을 보태야 할 터이다. 정치와 이념이 간섭할 자리가 아니다. 우리는 인구대비 확진자수와 사망자수에서 OECD 평균을 현저히 밑돌며 뉴질랜드 바로 다음으로 우수한 성과를 보이는 중이다. OECD 평균으로 보자면, 한국은 지금보다 수십 배의 확진과 사망기록을 가졌어야 한다는 게 아닌가.당장 오르는 숫자에만 주목하여 비난의 화살을 던지면, 국민과 사회를 불안하게만 하지 않을까. 자료와 통계를 기반으로 우리 방역의 토대를 보다 견실하게 구축하도록 주문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라와 국민이 더욱 안정적으로 위기를 관리하도록 견제하며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언론도 사실에 입각한 분석과 보도를 통해 국민들 간의 소통과 이해의 범주를 넓혀가야 한다.방역의 어려움은 경제도 흔든다.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 격상이 당장이라도 필요해 보이지만, 서민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생각하면 신중해야 한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경제적 타격을 보듬고 위로하며 어려움을 이겨낼 슬기를 발휘해야 한다. 소상공인과 밑바닥 경제를 위한 적극적인 정책 지원이 필요하며 개인도 그 어느 때보다 사회적 난관을 이겨내는 지혜와 용기를 발휘해야 할 때이다.짧지 않은 기간을 두고 진행되면서 지속적인 어려움이 정서적으로도 영향을 미쳐 우울에 이르는 코로나블루(Corona Blue)현상이 보고된다고 한다. 힘든 일에 버겁다 못해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거나 부적절한 결정에 이르는 가족이나 이웃이 없도록 살펴야 한다. 사회적 공동체에 있어야 할 상생과 협력의 안전망이 오히려 든든해지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2020년은 이렇듯 허망하게 저무는가 싶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다투느라 왠지 중요한 가닥들을 놓치지 않았을까도 걱정이다. 하지만 국민의 건강만큼 중요한 게 다시 있을까. 세상의 모든 영화를 눈앞에 두고도 건강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개인이든 국가든 건강을 지키는 일만큼 기본이 없다. 정치와 사회와 문화와 경제에도 건강한 의식과 건강한 소통이 생명이 아닌가. 나라다운 나라를 세워가는 일도 건강이 받쳐줘야 가능하다.나라경영의 모든 가닥에서 건강하지 않은 구석들을 두루 살펴 회복에 이르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한다. 코로나블루는 가라.

2020-12-16

큰 다리 놓는 법

장규열 한동대 교수영일만대교는 들어설 수 있을까? 십 년도 넘게 논의하고 검토하며 지역에 필요한 일로 확인하였다. 중앙정부의 30대 프로젝트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하였던 일이 이제는 예산의 문제로 주춤거린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교통정체를 해소할 방안이면서 관광효과도 기대된다는 게 아닌가. 산업도시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영일만항 물류의 흐름을 확충하고, 글로벌도시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터이다. 동해안고속도로가 연결되면 국토의 동쪽 허리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핵심통로의 역할도 기대된다. 지역 내 교통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나라의 도로환경에도 기여할 대목이다. 관광자원의 확보는 물론 국제적으로 자랑할만한 글로벌 미래자산 가치마저 느껴지지 않는가.내년도 국가예산으로 영일만대교 설계를 위한 20억원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예상되는 소요경비에 비하여 턱없이 적은 금액으로 보이지만, 국가가 일의 필요성을 다소라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한다. 지역에서 이와 관련하여 책임있는 인사들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언론을 통하여 듣는 것처럼, 주로 같은 정당 소속 인사들과 접촉하며 호소하는 일은 효과 면에서 제한적이지 않을까. 정치권과 재계 일반에 접촉의 폭을 획기적으로 넓혀야 하는 게 아닐까. 실질적인 영향력이 확인되는 정치권 인사들과 재정과 국토관리을 다루는 정부 기관을 두루 아우르는 소구력도 발휘해야 할 터이다. 필요한 민자(民資)를 유치하기 위한 노력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가.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재계와 기업들을 설득하여 참여를 유도하는 노력도 함께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큰 계획의 틀을 다시 잡아야 한다. 영일만대교가 지역과 나라에 왜 필요한지 그 타당성을 보다 분명하게 확인해야 한다. 다리를 놓은 다음 누리게 될 기대효과와 미래가치도 다시 살펴 확정하여야 한다. 지역이 우선 확신을 가져야 누구를 상대해도 설득이 가능할 것이 아닌가. 영일만대교는 시위와 데모로 인정받을 규모가 아니다. 조사와 분석, 기획과 설득의 모든 과정에 보다 신중하고 치밀한 접근과 대응이 있어야 할 터이다. 프로젝트의 규모와 지역에 미칠 영향과 효과를 생각하면, 다른 그 어떤 과제에 비하여 매우 의미있는 족적을 남길 수 있는 ‘큰 다리’가 아닐까. ‘글로벌포항’의 지향성을 고려하면, 국제적인 맥락에서 참여와 투자를 유치해 보면 어떨까.도시의 위상과 지역의 문화가 새발전의 기틀을 찾아야 한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기대하기보다 우리 안에서 긍지와 희망을 찾아야 한다. 내연산에서 솟아올라 구룡포로 흐르는 지역의 기운을 시민들의 삶에 잘 연결해야 한다. 영일만대교는 외형으로 훌륭한 자원이 될 뿐 아니라 지역의 자긍심을 한층 솟구치게 하는 모멘텀이 되어야 한다. 바다와 길을 잇는 ‘큰 다리를 짓는 일’에 지역의 관심과 기대가 더욱 모아야 한다.윈스턴 처칠이 이렇게 말했다는 게 아닌가. ‘비관적인 사람은 모든 기회에서 문제에 매달리지만, 낙관적인 사람은 모든 문제에서 기회를 발견한다.’ 영일만대교는 우리의 기회가 아닌가.

2020-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