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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비무장지대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삶은 어렵다.’ 심리학자 스캇펙(Scott Peck) 교수의 저서 ‘아직도 가야 할 길(The Road Less Traveled)’의 첫 문장이다. 힘들고 거칠고 고생스러운 길이 싫기는 해도, 살아가는 일이란 누구나에게 어렵다. 이 한 문장은 저자가 ‘진리’라고 표현했을 만큼, 삶은 예외없이 어렵다. 모두에게 어렵다는 확인은 우리를 차라리 안심하게 한다. 내가 힘든 만큼 남도 힘들다는 게 아닌가. 생업에 지치고 입시에 시달리느라 일상이 팍팍하다. 가파른 경쟁의 언덕은 언제나 낮아지려는지. 비좁은 취업의 관문은 혹 열릴 날이 있을까. 다투고 헐뜯으며 끌어내릴 게 아니라, 사실은 모두 서로서로 다독여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어려운 삶은 가히 ‘전쟁’이 아닌가.비무장지대. 살육과 포화의 기억으로 가득한 한반도의 허리춤. 대통령은 유엔연설에서 비무장지대를 ‘국제평화지대’로 만들어보자고 제안하였다. 전쟁의 기억을 평화의 기대로 바꾸어보자는 생각. 분단의 현장을 화합의 들판으로 바꾸어 보자는 요청에 세계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지난 세월 나뉘어 살았던 길을 돌아보면서 앞으로는 어울려 살 희망을 지어보자는 제언이 아니었을까. 그 옛날, 국제연합 유엔(United Nations)을 세우면서 전쟁을 극복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지구를 꿈꾸었던 이들의 원대한 소망을 다시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한반도를 언제까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나 모색하는 처량한 신세로만 여길 것인가. 세계가 한반도에서 평화와 소통을 배우는 ‘다리’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꿈이 그렇게 있어도 현실은 이렇게 어렵지 않은가. 비무장지대가 반도의 허리를 가르듯, 국민의 마음은 절반으로 나뉘었다. 생각은 ‘비무장지대’인데 현실은 ‘무장지대’인 셈이다. 겉으로는 웃는 낯인데 속으로는 칼을 품는다. 무기보다 마음이 더 무서운 것일까, 좀처럼 다가설 줄 모른다. 21세기에도 이념은 작동하는지, 끊임없이 너는 어느 쪽이냐 묻지 않는가. 편갈라 줄세우고 내 편 아니면 귀를 닫는다. 확증편향의 무한반복이라 겨레의 마음은 편할 날이 없다. 팩트를 놓고 상식으로 답하면 될 일도 좌우를 가르고 나면 의미가 없다. 언제쯤 우리는 이념으로 갈등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유엔의 무대에서도 국익을 다투기는 해도 더 이상 이념으로는 경쟁하지 않는다. 비무장지대가 참으로 평화의 무대가 되려면 이념에 붙들린 우리의 모습부터 살펴야 한다.한반도에서 갈등은 분단 탓이라 한다. 세계가 이념을 걷어내는 만큼, 시대가 요청하는 가치에 답해야 한다. 경쟁을 극복하고 상생하며, 다툼을 넘어 공존하고, 이념의 갈등을 딛고 함께 나아가는 한반도를 만들어야 한다.오늘 당장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라도, 이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삶이 어차피 어려운 것이었다면, 오늘 힘든 한반도와 우리의 운명도 날마다 이겨내야 할 숙제가 아닌가. 삶이라는 전쟁터에도 비무장지대와 평화의 마당을 만들 수 있을까.전쟁보다는 평화가 낫지 않은가.다툼보다는 화합이 낫지 않은가.

2019-09-25

민주가 문제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한 달의 소동. 장관 한 사람을 살펴 임명하기 위하여 어지러웠다. 결과를 놓고도 편갈린 마음들이 혼란스럽다. 보수와 진보, 이념 성향을 기준으로 딱 절반으로 나뉘었다. 틀린 사람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확신범이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무엇을 향하고 있을까. 그게 혹 민주주의가 아닐까.민주주의(民主主義). 어원을 찾으면, ‘국민이 다스리는’ 정체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군주나 독재자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스스로’ 다스리는 사회를 만들어 간다는 지향성. 이를 구현해 가는 길에 ‘어떻게’를 놓고 보수와 진보가 갈린다. 그래서 우리 국회는 국민의 손으로 선출한 의원들이 국민을 대신하여 법을 만든다. 그 법을 역시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국민을 대신하여 이끄는 행정부가 시행한다. 이 모든 일들이 국민을 위하여 정의롭게 진행되는지 판단하기 위하여 사법부가 존재한다. 각료의 자격과 도덕성을 살피기 위하여 국회에서 열리는 청문의 과정은 ‘국민’이 따져보는 일이 아닌가. 한 달의 진통과 청문회를 굳이 가진 뜻도 ‘국민의 검증’을 확보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국회는 이념을 놓고 갈리었을지언정, 청문 중이었다. 청문 대상 후보자를 놓고 검증하던 말미에 이르러 돌발변수가 발생하였다. ‘검찰’의 개입. 일단의 국민은 불편하였으며, 다른 쪽은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국민을 대표하여 국회가 청문을 진행하는 중에, 행정부에 속한 ‘검찰’이 재단자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일은 민주주의를 돕는 일일까 아니면 해가 되는 것일까. 국민을 대표하여 국정을 살피는 국회의원들은 이 일이 부끄러울까 아니면 자랑스러울까. 국민의 손으로 선출된 당신의 마당이 국민이 선출하지 않은 이들의 판단에 어지러워진 모습이 아니었던가. 이념을 내려놓고 생각해도 이는 ‘국민이 스스로 다스리는 민주주의’를 간섭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 아닌가. 앞으로 언젠가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 땐 또 어찌할 것인가.개혁(改革)은 누구를 위하여 하는가. 특정 이념에 복무하는 개혁은 개혁이 아니다. 개혁이야말로 모든 국민에 공평해야 하며 누구나 인정하는 새로움을 지향해야 한다. 보수나 진보에만 유리한 개혁은 정권이 바뀌면 반드시 도루묵이 된다. 오늘 정부가 의도하는 개혁에도 ‘국민을 마음에 담은’ 구상이 실렸기를 기대한다. 오늘 국회는 ‘국민을 위한 청문’이 국민의 기대를 담아 끝까지 정리되지 못한 일을 돌아보아야 한다. 검찰의 권력이 도를 넘었는지 판단도 국민을 위하여 내려야 한다.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도 국회는 진지하게 살펴야 한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가 되기 위하여 국회의 본질을 회복하여야 한다.문제는 이념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국민이다. 국민이 스스로 다스리는 민주주의를 정의롭게 구현해야 한다. 이념에도 휘둘리지 않을 개혁을 당겨내야 한다. 믿음과 소신에 따라 정당한 주장도 펼쳐야 하고 필요한 타협에도 나서야 한다. 완성판 민주주의는 없다. 끊임없이 만들어 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국민이 마침내 스스로 다스리기 위하여. 문제는 민주주의다.

2019-09-10

교육이 정치인가

장규열 한동대 교수온 나라가 한 뉴스로 몸살을 앓는다. 각료 한 사람 임명을 놓고 이렇게 시끄럽기도 처음이지만, 그 탓에 꾸준히 오명을 뒤집어쓰는 집단이 하나 있다.대학. 대학은 어쩌다 이 일에 이렇게 깊이 끼어들게 되었는지. 세상을 둘러보아 우리만큼 대학과 대학입시에 초미의 관심을 쏟는 나라가 흔하지 않다. 우리에겐 어쩌다 대학이 모두의 역린이 되어 버렸을까. 그러나 들여다보면, 대학이 무엇을 하는지 대학생은 무엇을 배우는지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대학의 문을 어떻게 뚫고 들어갈 것인지에만 모두의 촉각이 곤두서 있다. 대학에는 무관심하고 대학입시에만 온 신경을 기울인다. 입시만 통과하면 모든 게 끝이 나는가. 이게 정상일까.대학은 왜 정치에 소환되는가. 어째서 대학은 온갖 비리와 거짓말에 물이 든 것처럼 보이는가. 빛의 속도로 변화해 가는 세상에 역설적으로 가장 천천히 적응해 가는 대학에 우선 책임이 크다. 융합과 소통을 통한 변화를 외치기만 하고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대학의 비역동성(非力動性)을 돌아보아야 한다. 스스로 일어서 움직여 가기보다 정부의 지원에 기대는 대학의 의존성(依存性)을 반성하여야 한다. 대학이 창의로운 역동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미래가 없고 자기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생존력을 만들지 못하면 누누이 누구에겐가 기댈 수 밖에 없다. 대학이 변화를 예측하여 주도하지 못하면 이미 생명이 없고, 스스로 대학의 자리를 만들지 못하면 자신있게 가르칠 수 없다. 역동성을 잃어버린 대학은 정치에 휘둘릴 것이며 자생력을 상실한 대학은 권력의 하수(下手)일 수 밖에 없다.공정한 입시제도를 만들기 위하여 정부가 고심해 온 흔적에는 박수를 보낸다. 그렇다 하여, 대학을 모두 같은 모양으로만 몰아온 궤적에는 찬성하기 어렵다. 다중(多衆)을 대상으로 한 정치의 논리가 대학에도 수정없이 적용되는 일은 대학의 발전에 덕이 되었을까 해가 되었을까. 인구절벽을 눈앞에 두고도 여전히 치열한 대입경쟁은 무슨 조화인가. 대학의 서열화를 없애기 위하여 대학은 무엇을 했는가. 대학간판이면 만사형통이 되는 인식은 어떻게 바꿀 것인가. 글로벌대학환경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대학입시가 문제인가 대학교육이 문제인가. 생각거리가 한가득인데, 우리 대학은 무엇을 하는가. 사회비평가 로저 킴벌(Roger Kimball)은 ‘정치가 대학의 본질과 소명을 심대하게 오염시킬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지 않는가.초중등교육에 아무리 좋은 정책을 펼쳐도, 대학과 대학입시가 그대로이면 아무 소용이 없다. 대학의 교육과 연구는 나라와 겨레의 내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터이다. 대학은 어떻게 자존감과 생명력을 회복하려는지 고심해야 하고, 정부는 우리 대학이 대학답게 변화해 가도록 도와야 한다. 분명하게 새로운 대학 모델도 만나보고 싶고 대학과 함께 숨쉬는 사회에서 살아보고 싶다. 정치와 교육이 서로 돕기를 바라지만, 정부의 그늘에 대학이 머무는 모습은 그만 보고 싶다. 교육은 정치가 아니므로.

2019-09-04

이게 대학인가

장규열 한동대 교수온 나라가 한 가지 사안에 묶여버렸다. 대통령의 인사가 중요하지만 이처럼 모든 다른 뉴스들을 묻어가며 국민의 마음이 힘들어야 하는지. 정부의 3권 밖에서 감시와 견제, 취재와 보도를 균형있게 해야 할 언론은 어디 갔는가. 이 와중에 급속도로 국민의 믿음을 잃어가는 집단이 있다. 대학. 사회에서 대학은 무엇인가. 전공지식의 심화를 위하여 연구하고 개발하여 발전의 토대와 가능성의 지평을 넓혀가는 곳이 아니었던가. 다음 세대와 함께 호흡하며 연구성과와 학습역량을 쌓아 학생들의 개인적인 발전에도 기여하는 곳이 대학이 아니었던가.젊은이들이 드넓은 학문의 세계와 치열한 담론의 지평을 만나며 학습과 연구로 견주고 연마하여 이전보다 성숙하고 독립적인 인격체로 성장하는 곳이 대학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자란 인격체는 성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너끈히 책임지고 주변을 돌아보며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여 가도록 이끌어 내는 곳이 대학이 아닌가. 그래야 할 대학은 그 소명을 다하고 있는가. 대학에 어떻게 등수가 매겨지며 더 나은 대학이 따로 있을 수 있는가. 우리 대학은 언제부터 취업준비의 마당이 되어버렸는가. 부정이라도 저지르며 들어가고 싶은 대학은 대학인가 아닌가. 그런 줄 온 나라가 아는 터에 대학은 이에 대하여 한마디 언급도 없으며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다짐도 보이지 않는다.누구보다 대학이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이 나라 교육을 누가 잘못하여 여기까지 왔는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어도, ‘대학과 대학입시’가 지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철학자 게리거팅(Gary Gutting)은 “대학이 과학과 인문학 그리고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지성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개발하며 전수하는 마당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지성적인 문화’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잘 읽고 바로 쓰며 발견하고 개발하며 나누고 표현하는 능력을 대학에서 배우고, 이를 기반으로 우리 사회가 능동적이며 민주적으로 움직여 가는 바탕을 대학이 만들어야 한다. 그런 결과, 학생들은 선택에 따라 취업을 할 수도 있고 창업을 할 수도 있으며 세상과 더불어 든든하게 이웃과 함께 살아내는 건강한 인격체로 태어날 터이다.대학은 각자의 정체성에 따라 다양한 교육과 연구 활동을 이어가야 한다. 교육부가 대학을 지원하겠다는 선의에 따라 대학의 운영과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일도 이제는 없어야 한다. 어려운 대학을 정부가 도울 수는 있어도 간섭과 제한이 적용되는 일은 사라져야 한다. 대학이 창의적이며 긍정적인 지향성을 가져 자율적으로 학풍을 만들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대학이 더 이상 입시부정과 같은 부끄러운 의혹과 혐의에 시달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대학의 이름을 간판삼는 허망한 기대도 사라져야 한다. 대학이 좋아도 개인은 노력해야 세상이 바뀐다. 나라와 나라의 교육을 살리기 위해서 대학이 그 본질부터 회복하여야 한다.대학이 세상을 바꿔야 하므로.

2019-08-28

기대

장규열 한동대 교수계절이 건너간다. 이른 아침 바깥공기에 가을이 묻어있다. 연일 폭염 경보에 시달렸던 몸은 한여름을 아직 기억하지만 들뜬 마음은 이미 천고마비의 새 계절을 기다린다. 염천을 지나면서 겪고 쌓여온 생각거리들은 몸과 마음을 언제나 쉬게 할 것인지 그 끄트머리가 보이지 않는다. 바다 건너 일본이 힘들게 하지만 궂은 소리는 나라 안에서 더 많이 들린다. 겨레의 힘을 모아 전화위복을 꾀하려 했건만, 북한은 쓴소리 악다구니만 토해내고 있다. 한국과 일본이 문제인가 했더니 미국과 중국도 못지않은 씨름에 시달리는 중이다. 남북 팔천만의 소원인 통일이 관건인가 했더니, 고작 한 사람 장관 후보의 거취에 온 나라가 쩔쩔매고 있다. 무더위가 가시듯 벗어날 방법이 혹 어디 없을까.생각 밖으로 궂은일을 당할 때 늘 듣는 소리가 있다. 국민의 눈높이. 관련된 개인의 의도가 어디에 있든 국민의 시선은 늘 빈 마음을 바라는 낮은 자리에 머문다. 사사로운 처지에서 더 나은 열매를 위하여 수고로이 달려가는 일도 집단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욕심만 커다랗게 떠오르곤 한다. 들켜버린 사욕이 모든 이들에게 전염되면 공동체는 필시 불건강한 길로 접어들지 않을까. 가족과 친지들 사이에서 이해되던 융통성이 집단과 사회의 눈에 탐욕으로 비칠 때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를 생각하였던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가 이제는 비도덕적인 개인과 도덕적인 사회를 걱정해야 하는가. 개인의 우수함이 사회의 집단지성과 부딪힐 때, 우리는 어느 켠에서 지혜를 구할 것인가.나라의 국민은 위대하였다. 부조리와 비리에 휩싸인 권력을 국민의 힘으로 물러나게 했으며 기대를 한껏 실어 새로운 리더십을 출범시켰다. 그런 일을 해보지 못한 일본과 지금 막 진통을 겪고 있는 홍콩의 시민들은 우리를 부러워한다는 것이 아닌가. 국민의 힘과 지혜가 나라와 겨레가 가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 아닌가. 법치와 삼권분립이 제도의 틀이라면, 국민의 집단지성은 그 모든 민주역량의 기본임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혹 부족한 게 아직 있다면, 다른 생각을 거뜬히 수용하여 견주며 나아가는 일이 아닐까. 내가 옳은 만큼 남도 같은 무게의 선의를 가졌음을 인정하여야 한다. 비웃거나 경멸하여 패대기치는 만큼, 상대는 내 생각을 가벼이 여길 터이다. 이만큼 키워온 민주의 바탕 위에 더 높은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높이 걸었던 기대가 사뭇 아깝다. 많은 부분 그의 생각이 함께 하였음도 국민은 안다. 역량도 출중하고 의지가 충분함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나라가 바라보아야 하는 지향점은 그보다 훨씬 높은 곳을 향하여야 한다. 발표한 정책이 매우 소중한 가치를 담았음에도 국민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국민은 혹 기대보다 깊은 상처를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성의 힘과 인성의 덕으로 물러서는 용기와 비켜서는 지혜를 발휘하여 주시라. 실력과 혜안으로 막후에서 돕는 손길을 더욱 펼쳐 주시라. 팔천만의 소망이 걸린 일들이 수두룩한데, 한 건 인사로 혹 그르치면 안 되지 않겠나. 안 그래도 흔들리는 촛불을 불어 꺼버리면 누가 손해인가. 모두가 바라는 ‘나라다운 나라’는 당신의 결정에 달린 것으로 보인다.우리는 당신의 진심을 믿는다.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나라가 잘 되고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고 싶었음을. 나라는 나라대로, 한 사람에게 나라의 운명을 거는 일은 없어야 한다. 촛불이 걸었던 기대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일본을 이겨야 하고 북한을 아울러야 한다. 외교가 버겁고 국방도 어렵다. 경제가 힘들고 민생이 흔들린다. 사람은 폭넓게 찾아 든든하게 세워야 한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어 주시라. 높은 기대를 다시 건다.

2019-08-21

가을을 기다리며

장규열 한동대 교수입추(立秋). 장마와 폭염 그리고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입추를 맞는다. 여름의 끄트머리는 몇 자락 무더위를 남기고 있겠지만 다가오는 계절을 막을 길은 없다. 뜨거운 날들을 지나면서 빚어진 일본과의 갈등은 모두의 생각을 무겁게 한다. 한낮의 더위는 몸을 지치게 하지만, 이웃이 던진 불씨는 마음을 힘들게 한다. 두 나라의 역사 가운데 오래 쌓여온 불화는 이번에는 해소할 것인지 한 자락 기대도 얹어 보지만, 불편함의 빌미만 한 차례 더하는 게 아닐까 걱정부터 생긴다. 남들은 혹 모른다 해도, 두 나라 백성들은 이 다툼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통상과 무역이 문제이지만, 속으로 멍든 까닭은 오랜 세월을 두고 쌓여온 탐심과 반목이 아닌가.전쟁이 시작되었다. 역사가 빌미인데 애꿎은 경제가 힘들 모양이지만, 따질 겨를도 없이 우리 기업과 경제가 흔들리고 있다. 글로벌경제가 지향하는 자유무역과 개방경제에 제동이 가해진 터에, 새로운 출구와 해결책을 찾아서 온 나라의 지혜를 모아야 할 모양이다. 나라 간 비교우위에 따라 국제적 분업의 균형과 흐름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일본이 그에 차단과 교란을 초래한 일은 세계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한국을 공격하기 위한 일본의 선택이라 해도, 글로벌시장에서 일본은 무엇을 얻을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미국과 중국도 금융과 경제로 갈등의 소용돌이에 있어 한일 간의 문제는 국제적인 관심도 모아지지 않는다. 후텁지근한 기후만큼 답답한 실타래를 두 나라는 지혜롭게 풀어낼 수 있을까.전쟁은 이겨야 한다. 이기려면 모아야 한다. 지혜를 모아야 할 때에 생각을 흩어놓지 말아야 한다. 생각도 모으고 전략도 모으며 이기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여 싸워야 한다. 나라도 기업도 개인도 역량과 지혜를 한점에 모아 뚫고 나아가야 한다. 상대 앞에서 우리끼리 흩어지는 일은 우리를 얕잡아보게 할 치명적인 실책을 스스로 만들게 한다. 현명하고 치밀하게 대응하여야 하며, 이성적인 판단에 실수가 없어야 한다. 당면한 과제에 집중하여 정연한 논리와 협상의 포인트를 만들어야 한다. 일본이 우리를 힘들게 한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옛일에 사무쳐 감정으로 흐르지도 말아야 한다. 통상과 외교에서 승부수를 만들어야 하며, 스포츠나 문화로 확산하지 않아야 한다. 글로벌환경도 염두에 두어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에는 오히려 점수를 올리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일본이 솔직해져야 한다. 경제가 문제인가 역사가 숙제인가. 한국경제를 욕보인 끝에 국제통상의 가치사슬(value chain)이 무너진다면 일본이 얻을 실익은 무엇인가. 사라질 고객들을 어떻게 다시 불러온 것인가. 나라가 빚은 역사의 상처 앞에 겸허하게 태도를 밝히고 분명하게 실천하여야 한다. 식민지 국민을 힘들게 하였던 굴곡진 기억을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국이 원한다면 수없이도 돌이키겠다는 독일의 마음도 다시 보아야 한다. 일본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가 21세기에 적절한 것인지도 살펴야 한다. 전쟁을 다시 하겠다는 야욕이 실재한다면, 일본 국민은 이를 분명히 판단하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전쟁은 74년 전에 끝이 났지만, 우리가 진정한 독립을 누리고 있었는지도 돌아보아야 한다. 아직도 남아 있을 미묘한 열등감이나 패배의식은 이 기회에 분명히 벗어야 한다.한국과 일본은 글로벌환경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웃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선린관계를 다시 지어야 한다. 이념과 욕심을 앞세워, 성실하게 일하는 기업과 국민을 어렵게 하지 말아야 한다. 시원한 가을을 기다리듯이, 평화롭고 화합하는 한일관계를 기대해 본다. 갈 길이 멀다.

2019-08-07

폭염

장규열 한동대 교수아, 덥다. 길지 않은 장마가 후딱 지나가더니, 푹푹 찌는 공기에 숨이 막힌다. 주룩주룩 내리던 장맛비도 야속하더니만, 염천 무더위에는 짜증마저 겹친다. 섭리에 따라 들판 곡식을 익히는 손길이겠거니 차라리 기대를 건다. 이 여름을 힘들게 하는 또 하나 심통받이가 있다. 국민의 답답한 심정은 아랑곳이나 하는지 백날도 훨씬 넘게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세금도둑들이 있다. 국회라 이름하는 이 나라 입법부는 하마터면 개점휴업 상태로 달을 또 넘길 뻔하였다. 그러다 불현듯 새 달을 맞으며 모여 앉겠다고 하니, 그나마 기대를 걸면서도 안심하는 국민은 많지 않아 보인다. 추가경정예산을 정말로 처리할 건지, 진실로 국가안보를 걱정이나 하는지, 일본이든 북한이든 문제해결에 진정성은 실린 거인지 의심부터 드는 것은 더위 탓일까.모양만 갖추고 또 헛발질로 눈가림할 양이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말길 바란다. 지진으로 무너진 포항의 이웃은 어느새 일곱 번째 계절을 천막에서 맞는다. 속초 산불이 할퀴고 간 산하에는 이미 초록이 무성한데, 무너진 백성들은 나라의 도움 그 냄새도 맡은 적이 없다. 지역을 대표하는 의원들은 지역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지 돌아보길 바란다. 대표한다는 일. 지역을 보살핀다는 생각. 공수표에 공염불이었는가. 몇십만씩 되는 표를 모아 당신을 밀어준 유권자들에게 아직도 세울 낯이 있는지 누군가는 물어야 한다. 부끄러운 역사에 엉뚱하게 경제로 시비를 거는 저들의 공격에도 한 목소리를 못 내지 않는가. 뜨거운 햇볕에 살갗을 태우다가도 당신들만 생각하면 솟아오르는 짜증이 곱절을 넘긴다. 이글거리는 땡볕보다 뜨거운 기대가 그래도 당신들에게 걸려있음은 가련한 백성의 운명인가.일본. 질긴 악연이며 징한 이웃이다. 가까이에서 자극이 되고 도전이 되어 감사해야 하는가. 역사를 부끄러워 아니하는 그 마수가 언뜻 보일 때면, 강점기 기억이 송두리째 다시 돋는 일본의 심장. 21세기에도 도로 전쟁이 가능한 국가가 되어 남의 땅을 기웃거리겠다는 후안무치한 국가. 침략이 아니라 확장이었으며 수탈이 아니라 도와주었다고 강변하는 질긴 도둑의 마음. 상상하기도 싫지만 경계하는 마음은 도저히 놓을 수 없는 이웃 섬나라. 나라의 국격과 자존심 쯤이야 돈으로 너끈히 사고팔 수 있다는 약삭빠른 계산 속. 경술국치(庚戌國恥)도 뜨거운 여름 날 자행되었었지. 그럼에도, 한 마음이 되지 못하는 우리네 마음은 또 무슨 조화일까. 이게 이념의 문제인가, 좌와 우가 다를 일인가. 척을 지며 나뉠 일이 더러 있을 손, 일본의 공격 앞에는 아니지 않은가.우리는 백년 전 우리가 아니다. 그들도 그때 그들이 아니다. 세상도 그 세상이 아니며, 이웃들도 모두 다른 모습이다. 디지털환경과 글로벌시장이 펼쳐진 오늘, 호락호락 힘에 넘어갈 일이 없어는 보인다. 힘도 그 때 힘이 아니라, 돈이 더 무서운 힘이 된 세상에 역사를 경제로 밀고 들어오니 다짐도 새로워야 한다. 논리도 분명해야 하고 뒷심도 넉넉해야 한다. 아마도 다음 목표는 독도가 되려는지. 즐비할 언덕과 구비를 힘겹게 넘으면서 그 모든 기억을 간직해야 한다. 가는 길이 더디더라도 탄탄하게 다지며 걸어내야 한다.여름 한 가운데 땀을 닦으며 다짐하는 오늘의 각오가, 허세와 허명으로 나라를 잃었던 그 날의 수치를 씻고도 남아야 한다. 그래서, 해방 전 윤동주(尹東柱)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기도하였으며, 나라를 찾은 한참 후 신동엽(申東曄)은 아직도 ‘껍데기는 가라’고 노래하였을까. 폭염에 지친 오늘도 문제지만, 어느 계절을 닮은 나라를 물려줄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다음 세대에게 넘겨줄 나라는 당신의 마음에 달려 있으므로.

2019-07-31

새옹지마(塞翁之馬)

장규열 한동대 교수옛 중국 한 노인에게 아끼는 말 한 마리가 있었다. 도둑이 들어 그 말이 없어졌는데도 노인은 오히려 ‘이게 좋은 일이 될지 누가 아느냐’며 태연하였다. 노인을 잊지 못한 그 말이 좋은 말 하나를 더 끌고 돌아왔다. 기뻐하는 이웃들에게 노인은 ‘이게 나쁜 일이 될지 누가 아느냐’며 경계하였다. 말타기를 즐기던 아들이 그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노인은 이번에도 ‘이게 좋은 일이 될지 누가 아느냐’며 안타까워하는 이웃을 오히려 달래주었다. 나라가 전쟁에 휘말려 젊은이들이 싸움터에서 죽어갔지만, 그 아들은 곁에서 노인을 보살펴 주었다. 시골 노인의 그 한 마리 말. 새옹지마(塞翁之馬).한국과 일본. 갈등이 깊다. 해외 언론마저 사설로 다룰 만큼, 이번 한일통상마찰 사태에는 무역 관계 외에도 깊은 골이 함께 보인다. 두 나라 역사의 흔적과 경제 논리뿐 아니라 국민의 자존심마저 함께 걸려있어, 스스로 헤어나오기는 어려울 모양이다. LA타임즈(LA Times)는 ‘한일무역갈등은 역사의 아픔을 품고 있다’고 하였다. 블룸버그(Bloomberg)통신은 ‘양국은 각자의 관점에 포획되었다’고 적었다. 특단의 해법이 필요하고 특별한 다짐이 요청된다. 일제강점기의 그림자가 아직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일이라서, 우리는 어쩌다 이처럼 집요하고 사나운 이웃을 만났을까 안타까운 마음이다.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지혜를 모아야 할 터이지만, 이후에 일본과 또 어떤 관계를 만들어 갈 것인지 귀추에 국민의 관심이 쏠린다. 우리에게 일본은 어떤 이웃인가.일본이 우리에게 수출하지 않겠다는 품목들은 오히려 그들도 다시 수입해 갈 완제품들의 원재료가 되는 물품들이라고 한다. 제한되는 원료들을 우리의 기술로 만들어 내는 날에는 일본이 오히려 어려운 처지에 처하게 될 터이다. 실제로 우리 정부와 업계는 연구와 개발에 심혈을 기울여 이들 품목에 대하여도 일본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또한, 일본이 무역에 있어 호혜적인 특혜를 허용하고 있는 국가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겠다는 발상도 분명한 사실과 논리에 근거한 설명이 부족한 상태라고 한다. 세계무역기구(WTO) 등 국제무대에서 일본이 오히려 설명과 설득에 노력을 기울여야 할 터이다. 뉴욕타임즈(NYT)는 ‘G20회의에서 자유롭고 공개적인 통상이 평화와 번영의 기초라고 천명했던 아베 수상이 이틀 만에 모호하고 불특정한 근거를 토대로 한국과의 교역에 제한을 가하였다’고 하였다. 이 어려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2차대전은 74년 전에 끝났지만, 일제강점이 남긴 그림자는 아직도 길다. 물리적인 조건들이야 전후 태반이 복구되고 개선되었지만 한국민들의 마음 속에 드리워진 상처와 아픔은 여전히 길고 어둡게 여러 갈래로 작동하고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일본의 적극적인 노력이 부족하여 안타깝다. 전후 독일이 유럽에서 보여주는 참회와 회복의 노력에 비하면 못 미쳐도 한참 못 미친다. 우리에게도 일본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인식 가운데 부적절한 앙금을 혹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피해의식이나 패배의식은 물론 혹 일본이 우리보다 낫다는 식의 열등감은 이제야말로 말끔히 씻어내야 한다. 역사와 문화뿐 아니라 경제와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나으면 나았지 손톱만큼도 모자란 부분이 이제는 없다. 글로벌시장에서 우리 상품이 절대우위를 더러 가지고 있으며 기술력과 정보력으로도 뒤질 바가 아니다.세계와 씨름하던 중에, 뜻밖에 일본의 일격을 만난 셈이다. 지혜롭게 대처하여 슬기롭게 이겨내야 하며, 이후에는 오히려 더욱 믿음직한 이웃으로 만들어 갈 아량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이 위기는 기회가 될 확률이 높다. 새옹지마이며 전화위복이므로.

2019-07-24

중도가 살아야

장규열 한동대 교수아까운 정치인이 떠났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지만, 그가 보여주었던 열정과 치열함에 비해 너무나 빨리 끝나버린 삶이었다. 정치뿐 아니라 가수와 요식업 등 여러 색다른 시도를 함께 하였던 그의 다채로운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애석할 터이다.세상을 살아가는 모습들은 실로 다양하다. 그 가운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모습들을 경험하는 것일까. 한 가지 일에만 매이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 우물을 파서 전문가가 되는 일이 물론 귀하지만, 누구나 그 외의 일들에 대하여 궁금하고 도전하고픈 마음이 일기도 한다. 21세기는 송곳같은 전문인 보다는 두루두루 섭렵하는 인간이 성공에 이를 확률이 높다고도 한다. 더 넓게 보다 다채로운 삶을 열어보았으면 한다.일찍 떠난 그는 생각의 폭이 넓었다고 한다. 보수 정권에 참여했고 보수 논객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의 시선과 담론은 언제나 보수와 진보 두 진영 모두의 관심을 끌었다. 양 켠 모두 그의 비판적 논평의 대상이 되었으며 함께 긴장하며 그의 평가를 들어야 했다. 이름하여 중도보수. 오늘 우리 정치에는 그와 같은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있어야 한다. 대상이 누구이든 치우치지 않으면서 상식적으로 판단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하며 주저함 없이 그 생각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진영의 깃발에 휘둘려 당신의 생각만 옳다고 고집하느라, 우리 정치는 아직도 큰 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게 아닌가. 정치인이 케케묵은 이념과 진영논리를 벗고 상식을 기준으로 이성으로 판단하며 담론과 토론을 이어갈 때 국민의 박수를 받을 것이다. 생각의 틀을 넓게 펼쳐 주시라.국민은 정치를 언론을 통해 바라보면서, 배우고 나누며 생각하고 판단한다. 정치권이 사용하는 언어에 물들고 당신이 구사하는 행위에 동화된다. 품격 잃은 정치인의 막말은 시민들의 사고방식마저 치졸하게 만들고, 감정에 휘둘린 정치권의 행태는 시민들의 일상을 병들게 한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변해 국민은 정치에 휘둘리기만 하지는 않는다.이 땅의 민주화는 보통사람들이 불러오지 않았는가. 불러온 민주적 토대를 정치권이 잘 유지하지 못한 기억은 혹 있어도, 보통 사람들이 이 땅의 정치를 망친 기록은 한 줄도 없다.오바마(Barack Obama) 전 미국 대통령은 ‘진정한 변화는 보통 사람들이 특별한 일들을 해 낼 때 찾아온다’고 했으며, ‘정치권의 변화는 안으로부터가 아니라 밖에서부터 만들어진다’고 했다.자각한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만들 것이라는 믿음이 아닐까.정치가 정치를 바꿀 수 있을까. 나라와 국민이 잘 되는 일보다 정당의 욕심에 머무르는 한, 우리 정치는 바뀌지 않는다. 밖으로부터의 변화가 밀려들기 전에 우리 정치는 안을 잘 살펴야 한다. 당신들보다 국민들이 먼저 깨어 있음을 우리 정치는 알아야 한다. 혹 아까운 정치인들이 남들보다 빨리 생을 마감하지만, 그들이 남긴 기억 속에 이 모든 것을 한 계단 높이는 무언가가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 나라가 더 나은 자리로 나아가기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의 폭을 넓혀 주시라. 이념과 진영을 넘는 당신의 시도와 도전을 기대한다. 막말과 일탈은 일하지 않을 것임을 명심하여 상식에 맞고 균형잡힌 결정을 이끌어 주시라.보다 나은 정치가 펼쳐지기를 기대하면서 그를 기억해야 한다. 생각의 폭이 그보다 넓은 사람이 더 많이 나타나야 한다. 중도가 넓어지는 정치가 살아나야 한다. 사심없이 공익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안에서도 바꾸고 밖에서 살피는 정치가 피어올라야 한다.정치가 나라를 살려야 하므로.국민이 정치를 살필 것이므로.

2019-07-17

다문화는 다른 문화인가

장규열 한동대 교수세상이 바뀌었다. 시간이 그저 흐르는가 싶어도 세월이 흘러가면서 많은 것들이 변화해 간다. 한때 우리는 스스로 ‘단일민족’이라 여기며 하나의 뿌리를 가진 민족적 순수성을 우리 문화의 독특한 자랑거리로 삼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 우리에겐 자연스럽게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경계하고 차별적으로 생각하는가 하면 배타적인 경향성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우리와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일 뿐인데, 왠지 모르게 함께 어울리기 어려운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21세기 글로벌화된 세상을 맞아 나라들 사이에 벽이 없는 교류가 많아지고 문화적 경제적으로 더불어 섞이며 살아가는 지구가 되었다. 다양한 배경과 출신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삶을 나누는 세상이 된 것이다. 다문화사회로 나아가는 새 지평이 이미 열렸다.대한민국 인구의 10% 정도를 이른바 다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앞으로는 모든 사람이 일상에서 다문화를 만나며 함께 호흡해야 할 터이다. 이미 펼쳐지고 있는 다문화사회에 우리가 적절하게 준비되어 있는지 살펴야 한다. 예멘 난민들에 대한 우리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다. 정치적 망명이 인정될 것인지는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그들과 함께 같은 장소에 존재하는 일이 그리 편치 않았다. 어느 지방자치단체장은 다문화 가정을 비하하는 표현을 사용했다가 홍역을 치렀다. ‘잡종’이라든지 ‘튀기’라는 표현은 그가 가진 다문화인식의 낮은 수준을 보여준다. 베트남 출신 신부를 맞은 남편이 아이가 보는 앞에서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러 조사를 받고 있다. 그가 저지른 행위가 공분을 자아내지만 우리는 과연 다문화 현상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야 하지 않을까.‘다문화’도 과제이지만 우리에겐 ‘지방색’도 있다. 영남과 호남, TK와 PK, 수도권과 비수도권, 이북과 이남…. 손바닥만한 나라에서 아마도 산과 강으로 나누었을 것으로 보이는 단절과 분단의 그림자. 조선의 임금들이 때때로 탕평과 대동을 시도했지만 그 효과는 신통치 않았다. 세상의 지평이 탁 트이고 시야가 넓어져야 하는 세상에 이제는 인식도 새로워 져야 하지 않을까. 혹 다른 이들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이 거기 있었다면, 이제는 이해와 소통으로 영역과 지경을 넓혀가야 하지 않을까. 모든 지역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어느 인종이든 품을 수 있는 널푼수가 우리 문화와 습성에도 생겨야 하지 않을까. 글로벌환경을 시대가 허락한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서도 우리와 다른 이들이 이 땅을 찾는 일을 반겨야 하지 않을까.글로벌 환경이 저 멀리 있는 것 같아도, 다문화를 적극 포용하고 우리의 문화로 만들면 글로벌 환경이 우리 안에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단절과 차별로 반응하기 보다 환대와 화합으로 받아들이면 다문화사회의 모범사례를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익숙하지 않아 먼저 내밀어지지 않는 손길도 더욱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용기로 극복해야 하지 않을까. 더욱 열린 나라를 지향하고 보다 개방된 사회를 열어가기 위해서 국가도 다문화정책에 전향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터이다. 다문화 이웃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과 따뜻한 배려가 보통 사람들의 태도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다문화는 다른 문화가 아니다. 다문화는 우리 문화로 들어오고 있다. 보다 다양하고 풍성한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는 중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다채롭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배타적으로 물리쳐 무채색 문화에 만족할 것인지. 선택은 자명해 보인다. 다문화가 우리 문화의 또 하나의 힘이 되도록 환영하여야 한다. 다문화사회가 글로벌환경을 이끌어 내도록 적극 안아주어야 한다. 21세기 다문화사회는 나로부터 열려갈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다문화는 우리 문화이므로.

2019-07-10

메멘토모리

장규열 한동대 교수큰 별이 졌다. 한동대학교 초대총장이었던 김영길 박사가 돌아가셨다. 불꽃같이 걸어온 발자취를 뒤로 하고, 수많은 제자들과 동지들에게 안타까움을 남기면서 이 땅에서의 소중하고 값진 삶을 마감하였다. 수다한 고난과 역경을 지치지 않는 믿음과 소망으로 뛰어넘으면서, 대학을 세우고 제자를 길러내었다. 대학이 지역과 나라,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든든한 자리를 잡도록 만들었을 뿐 아니라, 나라의 대학교육이 보다 높은 지표를 향하도록 그 길을 닦아 놓았다. 자신이 그러했듯이, 제자들을 향하여 ‘배워서 남주라’고 때마다 강조하였다. 가르치는 일이 ‘세상을 바꾸는 일’임을 몸으로 보여 주었으며, 배우는 일이 ‘Why not change the world?’를 지향하도록 북돋웠다.그를 보내는 자리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제자들과 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그가 바꾸어 내라고 가르쳤던 그 세상에서 오늘도 땀흘려 일하다가, 그가 떠나셨다는 소식에는 세상이 무너져 내린 마음이 되어 모여 들었다. 그가 가르친 대로, 나 하나 잘 살기 위하여 살 것이 아니라 병들고 힘든 세상을 바꾸고 구하기 위하여 살아낼 것을 다짐하면서 스승을 보내드렸다. 생각을 같이 하였던 동지들과 교수들은 대학을 열면서 함께 하였던 다짐을 새롭게 하면서 그를 보내드렸다. 황량한 벌판에 학교를 세우면서 바르게 가르쳐 세상을 바꾸리라는 그 날의 각오를 그를 보내면서 다시 세웠다. 또 하나의 대학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대학’을 일으킨다는 그 처음 생각을 그의 영정을 마주하며 일깨우고 있었다.높은 뜻을 세우고 실천하였을 뿐 아니라, 그는 더할 나위없이 따뜻한 스승이었다. 시험 때면, 몰래 도서관을 돌며 학생들의 힘든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어려운 학생들의 이야기를 낱낱이 들어주며 손을 붙들고 기도하여 주었다. 학생들과 만나는 일을 가장 즐기는 총장이었으며 학생들의 하루하루가 늘 안타까운 선생이었다. 병든 세상을 향한 관심이 깊었던 만큼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세심함도 한 가득이었다. 누구보다 우수한 과학자였지만 마음에는 역사와 사회 걱정을 담고 살았다. 지역과 끊임없이 함께 호흡하고자 하였으며 세계의 맥박도 놓치지 않았다. 유엔과 유네스코 등 국제기구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글로벌교육’의 새 지평을 열었다. 경쟁에 몰두해 있는 대학들 간에도 협력과 연합을 강조하여 함께 만들어 가는 대학교육을 꿈꾸기도 하였다.‘메멘토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이 생각은 누구나 죽을 운명임을 명심하고 살아야 함을 이야기했을 터.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지, 어떤 의미를 남길 것인지, 무엇을 뒤로 하고 사라질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인생을 꽉 채워 산 사람은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가신 어른 만큼 평생을 꾹꾹 채우며 살아낼 수 있을까. 당신은 오늘을 충분히 채우며 살아가고 있는가. 죽음을 기억하라는 저 생각과 함께 오늘을 채우며 살아가라는 지혜를 담은 ‘카르페디엠(Carpe Diem).’ 이 순간을 잡아라, 즉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인 바, 메멘토모리와 카르페디엠을 묶으면 죽음이 찾아올 것임을 잊지 말고 오늘을 채우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인 아닌가. 작가 오그만디노(Og Mandino)는 ‘영원히 살 것처럼 일하고, 오늘 죽을 것처럼 살라’고 하였다. 즉, 최선을 던지며 일하되 마음을 다하여 살아낼 것을 권한 게 아닌가. 한동대는 복받은 학교다. 저렇듯 뛰어난 지도자가 이끌었으며 그 뜻을 또 선명히 남기었으니, 앞으로도 무궁한 가능성을 담고 있을 터이다. 남기신 의미를 교육에 담아 세상을 바꾸어 내는 모두가 되길 기대해본다.

2019-07-03

당신의 자리

장규열 한동대 교수69년 전 오늘, 대한민국은 꺼져가는 호롱불이었다. 북의 기습남침이 개시된 지 이틀 만에 대통령은 이렇게 방송하였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일선에서도 충용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이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 거짓말이었다. 이를 듣고 안심한 피난민들이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대통령과 각료들은 이미 서울 이남으로 피신한 후였던 데다, 한강 다리마저 폭격으로 끊어진 서울에는 시민들이 독 안의 쥐가 되어 이후 힘든 석 달을 지냈다고 한다. ‘대통령은 자신의 자리를 그렇게 버려야 했을까?’떠올리고 싶지 않은 또 한 자락 기억이 있다. 사백도 훨씬 넘는 승객들을 태운 배가 기울어 침몰하고 있는 가운데, 속옷 바람으로 탈출하는 선장의 모습을 담았던 영상. 많은 승객들이 구조되지 못하고 스러져 간 세월호 침몰사고와 관련하여 수다한 문제와 어려움이 제기되었지만, 필자를 가장 힘들게 한 질문에는 아직도 그 답을 듣지 못하였다. ‘선장은 자신의 위치를 그렇게 버려야 했는가?’ 선장에게는 ‘여객의 승선이 개시될 때부터 여객의 하선이 완료될 때까지 그 선박에서 떠나지 못한다’는 재선의무가 있고, ‘급박한 위험이 닥치면 구조에 필요한 수단을 다하여야 한다’는 조치의무가 있다. 공직을 맡은 모든 이들에게는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할 의무와 함께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수고해야 할 책임이 있다.국회는 노는 중인가. 한껏 기대하며 표를 모아 국회로 보냈더니 우리를 대신하여 국사를 맡은 이들이 국회에 없다. 학생들에게 제 자리가 교실이며 회사원들에게 사무실이 제 자리이듯이 국회의원에게는 국회가 자신의 자리가 아닌가. 수다하게 많은 나라의 법과 제도, 그리고 하나같이 어려운 과제들에 열심히 지혜를 모아서 만들고 풀어내라며 국민이 쉽지 않은 표심을 보태어 보내준 자리가 아닌가. 포항 지진과 속초 산불로 거처가 무너지고 생계가 위태롭다는데, 당신들은 당연히 있어야 할 그 자리를 그냥 저렇게 비워둘 심산인가. 경제가 어렵고 사회는 병이 깊은데 당신들은 고작 다음 공천에나 관심을 두고 오늘 나랏일은 뒷전이란 말인가. 투쟁을 하든 논의를 하든, 당신의 소중한 그 자리 국회로 돌아가 실력과 기량을 발휘해 주시라.사회학자이며 정치평론가인 스토크스 (DaShanne Stokes)는 ‘국민의 어려움을 돕지 않는 지도자는 국민이 퇴출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국회의원이 혹 권력에 취하여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해야 할 책임을 방기한다면 국민에게는 당연히 당신을 물러가게 해야 할 또 다른 책임이 있다. 미국 대통령이었던 레이건(Ronald Reagan)은 ‘(국회)의원들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그들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국민이 어렵다. 어려움에 처한 국민을 돌아보아 주시라. 당신들이 마음쓰는 명분과 실리도 국민을 생각하면 답이 보인다. 국민을 위하는 명분 말고 당신에게 더 어울리는 명분이 어디 있는가. 국민이 행복해지는 실리 외에 당신은 또 다른 어떤 실리를 꾀하는가.나라를 경영하는 대통령의 자리도, 여객선을 운항하는 선장의 자리도,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의 자리도 모두 있어야 할 오늘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섬길 때 빛이 나는 법이다. 나는 오늘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를 분명히 지키고 있는가. 내가 섬겨야 할 책임과 의무에 충실하게 복무하는가. 내일을 향한 꿈도 오늘 꾸어야 하겠지만, ‘당신의 자리’에서 오늘 기울이는 섬김과 성취가 그 내일도 열어줄 터이다.

2019-06-26

그만들 좀 하십시다

장규열한동대 교수놀라운 일이다. 어느 틈에 세계수준에 가 있는 한국인들이 있다. 손흥민과 이강인 선수가 그렇고 류현진 투수는 물론 BTS 일곱 청년들이 그렇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전에도 한국인들은 문화와 예술, 그리고 스포츠 분야에서는 이미 빼어난 기량을 표출해 왔다. 비디오아트 백남준은 앞선 감각으로 미술의 판을 흔들었으며, 정경화, 정명화, 정명훈 남매는 클래식 음악계를 한동안 쥐락펴락하였다. 분데스리가는 차범근 선수의 흔적을 기억하며 박지성 선수의 후광도 눈이 부시다. 김연아, 박찬호, 황영조, 조수미, 싸이 등을 거쳐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에 이르러 만개하고 있다. 반면, 우리 사회와 정치는 1990년대 초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저물어 간 이념의 잣대에 아직도 서슬이 퍼렇다. 왜 그러는 것일까? 정치와 사회도 문화나 예술처럼 변화와 발전을 보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수와 진보 또는 우와 좌로 갈라서 대결을 벌이던 이념의 분단 현상은 사실상 지구상에서 한반도 이외의 지역에서는 그리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지난 세기 냉전의 소용돌이만큼 첨예하게 대치하는 일은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우리에게 그럴 까닭이 있다면,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분단의 현실이 아프게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까. 오천 년을 함께 살았고 (겨우) 칠십 년을 나뉘어 살았다는 대통령의 표현이 있었지만, 그 칠십 년 단절의 세월이 이처럼 뛰어넘기 힘든 철벽을 가져다주지 않았는가. 분단의 벽을 우리가 넘을 수 있을 것인지는 우리가 이를 넘기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살피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우리는 정녕 분단을 해소하고 싶은 것일까? 닳아버린 표현, ‘통일’은 아직도 우리에게 소원이 맞는가? 질문은 각자에게 가능하다. 나는 통일을 바라고 있는가. 남과 북은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등 돌린 사람들이 다시 함께 하려면, 아무리 힘들어도 만나야 한다. 어색하고 거북하며 비위가 틀려고 셈법이 맞지 않아도, 꾸준히 만나 겨루고 맞추며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끝내 밀어붙여 이루어내기가 어렵고 힘들기는 운동과 음악, 미술과 문화에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가무에 능한 민족이어서 그런 분야에 일가를 이루어 왔다면, 21세기에는 소통과 화합에도 새 역사를 써 내릴 수 없을까. 예술과 문화가 주로 ‘개인’의 기량에 달린 일이었다면, 이제는 ‘집단’으로 민족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함께 모으는 기량을 발휘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한다면서, 정치인들은 명분과 실리를 따진다고 한다. 포항지진으로 집을 잃은 백성은 아직도 천막에 머문 지가 550일이 훌쩍 넘겼다. 속초를 산불이 매섭게 쓸고 간 기억도 계절을 넘긴다. 어려운 경제는 날이 갈수록 국민의 삶을 어렵게 한다. 이제 그쯤 했으면 함께 할 명분도 서로 만들어 주고 각 당의 실리도 적절히 챙길 만하지 않은가. 남북이 만나야 하듯이 당신들도 나라를 위하여 만나야 한다. 국민이 당신들을, ‘나라야 산으로 가도 철밥통 지키며 싸움만 하는 이상한 사람들’로 보기 시작했다는 걸 알고는 계시는가. 문제를 풀기 위해서 남북도 만나야 하고 여야도 만나야 한다. 해결의 가닥은 만나야 잡힌다.운동선수가 훈련에 땀을 흘리고 예술가가 혼을 불사르며 최고의 작품에 도전하듯이, 이제는 우리 정치가 걸작을 낳아주기 바랄 뿐이다. 이 땅의 백성이 가무에만 능하겠는가. 편 가르기와 패거리 정치에 능했던 만큼, 바른 정치와 선한 펼침에 몰두해 주시라. 믿고 맡긴 국민이 옛날과는 다르다. 당신의 모습에 진정이 실려있는지 국민이 알고 있다. 얼른 만나고 당장 섬겨 주시라. 국민은 오늘보다 나은 정치를 만나볼 자격이 있다.

2019-06-19

대학은 어쩌나

장규열 한동대 교수대학이 많다. 급격한 인구 고령화와 함께 저조한 출산율이 지속적으로 진행되면서 그 여파는 대학의 위기로 연결되고 있다. 인구 감소에 따라 고등학교 졸업자 숫자가 가파르게 줄어들면서, 2018년부터 이미 대학모집인원에 비해 졸업생 숫자가 적게 되어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대학들이 늘어날 것으로 예견되어 왔다. 최근 국가 교육통계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2021년 대학입시에서 대입정원이 고졸자 수를 9만 명이나 초과할 것이라고 한다. 어림잡아 거의 백 개쯤 되는 대학들이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경상북도는 특히 심각하여, 입학정원이 고졸자 숫자의 거의 두 배에 달할 것이라 한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인구감소 현상이야 어찌할 수 없겠지만, 대학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대학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우리 정부는 대학을 국가교육체계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아 교육부가 대학의 교육과정과 재정운영에 깊이 관여해 왔다. 대학으로 보면 정부가 간섭도 하고 모니터링도 하지만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으므로 이를 감수하면서 교육에 임해오고 있다. 그러는 사이, 개별 대학의 존재 이유와 독특한 개성들은 사라지고 학문의 전당이어야 하는 대학들이 거의 모두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대학들이 제각기 특수한 교육이념과 철학, 개성있는 학문적 특성을 살려 가면서 대학마다 완전히 다른 분위기와 학풍, 전통과 긍지를 만들어 내는 다른 나라의 대학들과는 매우 다른 ‘대학가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추격과 모방’을 기저로 하는 개발모형에는 매우 효율적인 접근이었겠으나, 21세기 ‘창의와 혁신’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 지식정보사회에는 매우 어색한 대학 분위기인 것이다. 정부가 대학을 잊어야 한다. 이제는 손을 떼어야 한다.대학은 어찌해야 하는가. 가장 추운 겨울을 맞을 것으로 기대되는 대학의 미래는 대학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교육, 연구, 봉사 모든 면에서 다 잘 해야 하고 하나같이 평가하는 일률적 대학평가모델을 벗어내고 각자 무엇에 강한 대학이 될 것인지 결정하여야 한다. 교육에 강한 대학과 연구에 튼실한 대학은 분명히 달라야 한다. 지역사회와 호흡하겠다는 대학이 있어야 하고 평생교육에 능수능란한 대학도 만나보고 싶다. 한 가지 잣대로 모든 대학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 대학(大學)이 ‘큰 배움’인 까닭은 총체적으로 볼 때 그만큼 다양하고 풍성한 배움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인문사회와 자연이공계, 그리고 예술문화 분야에 각각 튼실하고 강한 대학들이 나와야 하고, 지역마다 그곳의 분위기에 걸맞는 대학들이 일어나야 한다. 정부의 결정에 그 운명이 좌우되는 대학은 대학이 아니다. 대학이 기댈 언덕은 없다.그 같은 변화가 하루아침에는 어려울 터이다. 하지만 정부도 대학도 이제는 변해야 하는 조짐을 읽고 이제라도 과감히 새로운 대학교육의 장을 열어가야 한다. 대학마다 핵심역량에 집중해야 하고 각자의 대학브랜딩(University Branding)에도 나서야 한다. 교육소비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잘 살펴야 하며 어떻게 특화할 것인지도 찾아내어야 한다. 대학마다 느껴지는 품격과 분위기가 달라야 하며 사회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해석도 모두 달랐으면 한다. 그런 곳을 통과한 젊은이들이 제각기 갈고닦은 식견과 소신으로 미래 사회에서 만날 때에 진정한 겨룸과 속 깊은 나눔으로 우리 사회를 움직여 갈 역동성이 솟아나지 않을까. 획일성은 이제 추구할 가치가 아니다. 다양성의 늪에서 진주를 건져낼 다짐으로 우리 대학을 키워가야 한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모두 다른 듯 하여도, 사회 전체를 놓고 보면 역시 이끌고 움직여 가는 그 ‘한마당’이 대학이 되어야 한다.

2019-06-12

노잼이다 노잼

장규열 한동대 교수외국인들이 한국인들에 대하여 놀라는 한 가닥이 ‘한국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다’는 발견이라고 한다. 정치가 보통 사람들을 대신하여 여러 가닥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소통과 연결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국민이 관심을 가지는 일이 자연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에 대하여 높은 수준의 개인적인 흥미를 가지고 집단적인 호기심을 발휘하곤 한다. 선거를 통해 던진 나의 그 한 표가 국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끊임없이 살피는 일은 그 자체로서 소중하다. 뽑힌 이에게 잘 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면, 뽑은 이에겐 부릅뜨고 감시할 책임이 있다. 놀랍다는 외국인에게는 당신 나라 백성에게도 그 책임이 있음을 알려주어야 한다.관심과 흥미를 한껏 모은 반면, 정치에 나선 이들이 정작 무엇을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중학생들에게는 꿈의 직업이 국회의원이란다. 하는 일이 없어서. 호기심을 모아 궁금하다 했더니, 돌아오는 게 끝없는 비난과 막말이라면 국민은 허망하다. 뭐라도 돕는 손길을 발휘하는가 기대했더니, 몇 달 째 논의도 아니 했다면 국민은 허탈하다. ‘경제가 문제’라고 문제를 제기했다더니, 무릎을 맞대고 토론하는 정치인은 본 기억도 아련하다. 평화로 승부한다는 쪽은 ‘우리의 소원’으로 얼마나 다가섰는지 언제 보여 줄 것인가. 지면을 새카맣게 채웠던 뜨거운 뉴스들의 끝자락이 대개 흐지부지 맺는 걸 보는 국민은 ‘혹시했다가 역시가 되는’일에 익숙할 뿐이다. 우리는 왜 맨날 똑같은 모습을 거듭 보면서도 미련인가 습관인가, 정치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까. 정치에는 하염없이 속기만 하는 국민의 처지가 처연하기 이를 데 없다. 얼마나 식상한가 우리 정치는.얼마나 신선한가. 다른 한 켠에는 우와,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마저 ‘다르고 또는 새롭고 싶어하는 몸부림이 있다’고 한다. 무엇을 해도 남들과 다르고 어제와 다르게 하겠다는 일상의 의지가 오늘의 그를 만들어 내었다. 함께 일하는 배우와 스탭을 살피고 챙기는 눈길에도 다르게 보려는 시선이 보이지 않는가. 완전히 다른 배우 송강호에게 진심을 보이며 무릎을 꿇는 그의 모습이 다르지 않은가. 어린 시절 다짐을 끝까지 밀어내어 끝내 저 자리를 차지하고 만 그의 성실과 노력에 저절로 박수가 돌아가지 않는가. 수다한 정치인들 가운데 국민과 국가를 위하여 저만큼의 한결같음을 보여주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아직도 만나보지 못했는지. 그럼에도, 봉감독은 ‘이제 시작이다’고 하였다.이제라도 정말 시작하는 마음으로 국회로 돌아가고 다시 초심을 되새겨 한반도 문제를 풀어내길 바란다. 경제도 어렵고 사회는 어지러우며 문화도 병이 들었다. 어느 틈에 마약에 물들고 성매매로 얼룩진 나라가 되어 가는가. 사정이 이런데도 말꼬리나 잡아가며 서로에게 비난 성명만 일삼는 정치집단은 국민에게 무슨 득이 될 수 있을까. 당신들 끼리 치고받는 말싸움인 줄 눈치챈 국민은 이제 재미가 없다. 노잼이다 노잼! 입으로만 국민을 섬기는 척 하는 그 언사도 이제는 모두 들켜버렸다. 다가올 선거에 던지는 또 한자락 욕심만 보일 뿐, 국민이 어떤 처지인지 당신들은 모른다.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나 계시는가. 세상은 어떻게 변해 가는지 생각이나 하느냐 묻고 싶다. 상상 속에라도 진심으로 나라와 국민을 향하여 일해주길 바란다.봉 감독이 보여 주었듯이, 우리 국민은 뛰어나다. 세상 어디에 내어 놓아 손색이 없을 이 백성을 정치가 쪼그라들게 하는 일은, 보기에도 안타깝고 듣기에도 민망하다. 초심으로 돌아가고 첫 페이지를 다시 새겨 주시라.정치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재미있는 정치를 돌려주시라.

2019-05-29

성공하여 무엇하는가

장규열 한동대 교수놀랍고 반가운 일이 벌어졌다. 애틀란타의 작은 사립대학 모어하우스칼리지(Morehouse College)에서 졸업축하 연설을 하던 로버트 스미스(Robert F. Smith)가 올해 졸업생들의 학자금대출을 모두 갚아주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를 들은 졸업생들과 교수들은 물론 단상에 앉아있던 총장마저도 처음 듣는 이 경이로운 소식에 놀랄 뿐이었다. 약 400명에 달하는 졸업생들은 이제 졸업하면 거친 사회에 나가 바로 그 대출금을 갚아야 할 처지에 놓였던 터에, 이 소식은 그야말로 크나큰 해방감을 가지게 하였을 것이다. 그가 대신 갚아 줄 대출금은 줄잡아 5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부호라서 후배들을 위하여 선뜻 좋은 뜻을 발휘한 일이지만,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 정도의 후의를 발휘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언론은 그가 거액을 내어놓았다는 점에만 주목하고 있지만, 그 발표 바로 앞뒤에 그가 무엇이라고 하였는지 주목하여 보자. 발표 직전에 그는 ‘졸업생 여러분에게 한 가지 도전하고 싶다’고 하였다. 졸업생들을 위하여 거액을 희사하겠다고 발표할 것이면서, 바로 그 기부행위가 당신들에게 구체적인 도전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어떤 도전이었을까. 대출금상환을 위한 기부를 실현하겠다고 말하고 나서, 그는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 꼭 같은 일을 다시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던지며 열심히 살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졸업생들은 물론 함성과 함께 박수로 반응하였다.오늘날 대학교육비가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있음을 생각할 때, 학생들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을 대출금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웠을까. 한 순간에 이를 갚아 주겠다는 선배는 얼마나 감사한 천사였을까. 기부와 함께 선배가 던진 도전의 의미를 그들은 얼마나 무겁게 받았을까.모어하우스칼리지는 미국 인권운동의 상징격인 마틴루터킹(Martin Luther King, Jr.)목사를 배출한 대학이다. 1948년에 졸업한 그가 그 유명한 ‘내게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연설을 통하여 미국흑인 인권역사를 바꿔내기까지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대학에서 가르친 ‘삶을 함께 나누는’ 기준이었다고 한다.‘모든 이들이 누릴 수 있는 세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신념과 소신을 가지고 노력하되, 그 모든 소득과 이익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실현하며 살아라.’ 졸업식 연설을 맺으며 그는 이 생각을 졸업생들과 함께 다시 힘주어 다짐했을 것이다. 학교와 공동체의 전통이 만들어지고 세대를 타고 흐르는 모습을 세계가 목격한 것이다. 이를 언론이 보도함에 있어 ‘돈의 크기’에만 집중한 것은 사뭇 아쉬운 부분이다.우리는 어떠한가. 자본주의의 본산인 미국에서 오히려 의미있는 기부와 뜻을 새긴 다짐이 일어나고 있는 때에 우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경제와 재정은 돈보다 높은 가치의 발현을 위하여 얼마나 수고하고 있는가. 재력이 소중한 디딤돌이 되어 도처에서 선하고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도록 우리는 가르치고 있는가. 수고와 노력을 기울여 쌓아올린 경제력을 이웃과 사회에 희망이 되도록 후하게 내어놓는 부자들을 더 자주 만나보고 싶다. 욕심으로만 쌓으면 남을 위하여 쓸 준비를 할 겨를이 없을 터이다. 벌기 전에 다짐하는 훈련도 필요하지 않을까. 자본주의에 충실한 시스템을 신뢰하되, 어려운 이웃이 가진 가능성과 미래를 향한 도전에 믿음과 기회를 제공할 줄도 아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졸업식 연설을 마치면서, 선배 연사는 졸업생들을 모두 일으켜 세우고 서로 포옹할 것을 요청하였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내기 위하여 누구보다 열심히 살되, 성공의 결실은 반드시 당신이 속한 공동체와 함께 나누는 사람이 되라’고 힘주어 강조하였다.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 당신의 성공은 누구와 어떻게 나눌 것인가.

2019-05-22

벽(壁), 허물어야 하는

장규열 한동대 교수의사이며 미생물학자인 소크(Jonas Salk) 박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50년 후에 곤충들이 사라진다면 지구가 멸망할 것이지만, 50년 후에 인간이 사라진다면 지구는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 될 것입니다.’ 왜 그렇게 이야기하였을까. 인간이 살아가는 이 땅을 살리기 보다 망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 아니었을까. 지구와 환경을 망치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람이 모여 사는 공동체와 사회 구조마저 혼탁과 오염을 거듭하게 하여 황폐하게 만드는 실패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대로 가다가는 지구가 망가질 뿐 아니라 함께 살아가지도 못하는 더럽고 누추한 세상을 만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지구와 인류에 해가 되기보다 도움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공부는 왜 하는가. 개인이 성공에 이르는 데 물론 힘이 되겠지만 더 배우는 까닭은 배움의 총량이 궁극적으로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함이 아니었을까. 전문가와 학자들은 분야마다 차고 넘치는데, 실질적인 개선과 회복에 어떤 기여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Noam Chomsky)가 ‘존경받는 지성인들은 그저 권력의 이해에만 복무하는 사람들이다’라며 빈정거린 것은 지식인들이 정말로 해야 할 일들을 덜 하고 있다는 따끔한 지적이 아닌가. 개선과 변화, 진보와 혁신에 도움이 될 만한 비판과 제언에 더욱 적극적이어야 함을 꼬집은 것이다. 언론이 문제라는데, 살피며 대안을 이야기하는 학자가 보이지 않는다. 사회가 병들었는데, 몰아세우며 다그치는 전문가는 어디 갔는가. 교회와 사찰이 저 모양인데 신학교와 현인들은 무엇 하는가.전문가 집단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보통 사람들이야 바람에 휘둘릴 밖에. 이 말을 들으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고 저 말을 들으면 그 소리도 틀리지 않는다. 사회와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이 온통 혼동스럽고 안개 속이다. 이웃과 대화가 없는가 했더니 이젠 가족과도 소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개인은 보다 똑똑해 졌는가 싶지만 사회는 보이지 않는 벽들로 한 가득이다. 진영논리에 갇힌 사람들, 세대격차에 함몰된 사람들, 빈부양극에 짓눌린 사람들, 양성차별에 억울한 사람들, 학벌과 지연, 격차와 차별, 혐오와 차단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모두가 서로에게 적이 되어 우리 사회에는 집단적 자폐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세월이 가면 나아져야 할 터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수렁에 처박히는 느낌은 어찌해야 하는가.드러나는 생각도 덜 깊어 보이는데, 사용하는 언어마저 저열하고 비속하다. 벽을 허물어야 하는데, 표현이 거칠면 본질에서 멀어져 감정만 상할 뿐이다. 감정이 상하면 이성으로 사고하고 판단할 가능성은 희박해 질 수 밖에. 저속한 한 마디를 뱉고 돌아서 ‘속이 시원하다’면 국민이 믿고 맡길 공복(公僕)의 자격이 있는 것일까. 동서냉전의 막바지에 미국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부시(George Bush)는 ‘보다 친절하고 보다 부드러운 나라’가 되자고 미국인들에게 제의하였다. 악다구니 끝에 상처투성이가 되면, 이기든 지든 남는 게 없다. 선거철이 되면 똑같은 아귀다툼에 사회는 멍든 질곡을 반복할 뿐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사회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잃고 부유(浮遊)할 것이 아닌가.소통이 바뀌어야 한다. 담론의 장이 넓어져야 하며 보통 사람들이 더 많이 참여해야 한다. 학자와 전문가들이 토론과 담론을 이끌어 조절과 조정에 나서야 하며, 생각과 의견이 조화롭게 적극 개진되도록 부추겨야 한다. 대화와 나눔이 활발해져야 하며, 사용하는 언어는 절제와 균형을 갖춘 격을 회복하여야 한다. 친절하고 부드러워야 막힘없는 소통이 가능해질 것이므로.

2019-05-15

공감백배

장규열 한동대 교수편을 가르기 좋아하는 세상이다. 어쩌면 그렇게 다른 것을 집요하리만치 틀린 것으로 확신하는지 때로는 안타깝기가 도를 넘는다. 오른쪽과 왼쪽은 절대로 섞일 수가 없으며 남성과 여성도 우리 사회에서 평등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국경이 거의 의미가 없어져 간다는 21세기에 한반도 만큼 동과 서가 어울리지 못하는 나라가 또 어디 있을까. 어느 작가의 날카로운 눈은 세상이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고 하였다. 존재의 가치가 내 생각을 드러나기도 전에 나의 조건으로 이미 판단되기 일쑤인 것이다. 어느 동네에서 났거나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벌써 어느 편인 것이고, 나의 성별은 나의 능력과 상관없이 나의 위치를 대개 결정하고 있다. 그런 부조리를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세상이 또 웃기는 것일까.편을 가르는 잣대에 무서운 게 또 하나 있다. 나이. 어른에게 청년은 언제나 불안하고 젊은이에게 노인은 늘 어렵다. 끼워주지 못하고 어울리지 않는다. 함께 나누는 기회를 스스로 가로막고 생각을 견주기를 항상 꺼린다. 웬만하면 섞이지 않으려 하고 끼리끼리 서로를 탓하기만 한다. 온갖 사회적 담론도 같은 색깔의 무리들 안에서만 나누고 확인하며 규정하고 성토한다. 그 같은 공론의 장에서 담론은 제자리를 맴돌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벽을 허물지 않고는 다시 세울 방법이 없다. 폭 넓은 아량이 필요하고 속 깊은 배려가 절실하다. 스스로들 세운 벽 속에 갇힌 21세기 한국사회를 구출해야 한다. 이념, 성별, 지역, 나이, 아 그리고 종교. 이들 기준을 모두 동원하면 우리는 또 얼마나 좁디좁은 울타리에 갇힐 것인가.가정의 달 5월에도 가슴아픈 뉴스로 한가득이다. 마침 어린이날 새벽에 생활고에 시달린 젊은 부부가 두 아이들과 생을 마감하였다. 하필 어버이날을 앞두고 부모 앞에서 분신자살을 한 젊은이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였다고 한다. 다리에서 투신하려던 모녀를 설득 끝에 가까스로 구했다는 소식도 있다. 스승의날과 부부의날을 눈 앞에 두고도 아슬아슬할 뿐.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대립과 갈등, 반목과 질시를 거듭한 나머지 대화와 타협, 화합과 상생을 정말로 망각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어려운 젊은이들의 처지를 듣고 도울 방법이 그렇게 없을까. 힘든 가정들의 상황을 헤아려 세워줄 장치가 정말로 불가능한 것일까. 울타리 밖 남들의 삶을 이해하고 배려할 널푼수를 우리는 가질 수 없는 것일까.‘세대공감’ 한 방송프로그램의 이름이지만 세대 간 생각과 해석의 차이를 짚어보고 공감대를 넓혀가려는 의도로 읽힌다. 앞으로 세대 뿐 아니라 지역들 사이에는 다른 느낌들이 어떻게 도사리고 있는지 드러내 보았으면 한다. 같은 주제를 놓고도 혹 남성과 여성 간에는 어떤 다른 생각이 흐르고 있는지 살펴보았으면 한다. 종교들 간에 그리고 신학적 해석들 가운데 존재하는 갈등과 마찰은 무엇 때문일까. 다른 흐름과 느낌을 어떻게 조화롭게 어울리게 할 것인가. 우리는 이들 다른 생각과 느낌을 안고 어떻게 함께 잘 살아갈 것인가. 반목이 무관심을 키우고 무관심은 자칫 혐오를 일으킨다. 혐오와 무관심은 고립과 절망을 초래할 터이다. 극단적인 선택이 뉴스가 되는 일은 이제 그만 보았으면 한다.함께 나누고 서로 도우며 더불어 고심하면서 마음을 모으는 사회. 고립과 절망으로 무너져 내리는 이웃을 소통과 대화로 건져 올리는 공동체. 공감하는 나 하나로부터 시작할 일이 아닌가. 남에게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는 탓은 그만 하여야 한다. 당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 내 안의 공감능력을 백배로 끌어올려 이웃과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시라. 5월을 다시 눈부신 계절로 만들기 위하여.

2019-05-08

쓰기혁명

장규열 한동대 교수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인간의 문화와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중세의 암흑시대를 건너오고 있었던 유럽인들에게 아직도 문맹률이 95%에 달하였다. 성경을 비롯한 글로 적힌 문건들은 교회와 권력자들에게만 허용되었을 것이니, 보통 사람들이 글을 대할 필요조차 없었을 터이다. 인쇄술은 이후 르네상스 이성의 시대와 계몽의 새벽을 밝힌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성경이 누구에게나 주어졌으며 종교개혁을 통하여 신의 말씀을 직접 읽고 스스로 해석할 수도 있게 되었다. 데카르트가 인간이 ‘생각하므로 존재하는’ 이유를 분명히 했으며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하였다. 읽을 수 있어 알게 되었고 더 알게 되므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생각을 이어 가면서 문명이 눈부신 궤도에 들어서게 되었다.지구상에 문맹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읽을 줄 안다는 것은 쓸 줄도 안다는 것이 아닌가. 모두 읽지만 모두 쓰지는 않는다. 왜 그랬을까. 까닭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매체 즉 미디어가 사용할 수는 있되 주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들을 대신하여 기자, PD, 작가, 감독 등 생각과 이야기, 의견과 생각을 글로 적고 콘텐츠로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인 역량이 출중하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특별한 훈련과 교육, 노력과 경쟁의 산업적 구도와 제약이 있었다. 아무나 기자가 될 수 없고 누구나 언론사 또는 제작사를 경영할 수 없었다. 모두가 공평하게 누려야 할 ‘표현’의 자유는 사실상 많지 않은 전문인들이 누리는 ‘언론’의 자유로 대리되었다.세상이 다시 바뀌었다. 디지털의 습격은 상상을 넘는다. 가시적으로 늘어난 정보의 양이 우선 놀랍다. 온라인에 없는 게 없고 모든 게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 더 이상 공부와 노력이 필요없어 보인다. 읽을 줄 알지만 더 이상 읽지 않는다. 읽지도 않는데 쓸 필요는 이제 정말로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누군가 온라인의 바다를 채우고 있기에 저렇게 콘텐츠들이 있을 터이다. 그게 누굴까. 이전의 전문인들 뿐 아니라 이제는 누구나 적을 수 있다. 전할 수 있고 퍼뜨릴 수 있다. 남의 글을 퍼 올리는 게 가능할 뿐 아니라 나의 글을 바로 올릴 수 있다. 세상이 바뀐 또 하나의 대목은 바로 여기가 아닌가. 대신 만족하던 ‘언론의 자유’를 넘어 스스로 충족하는 ‘표현의 자유’가 가능해 졌다. 이를 나는 충분히 사용하고 있는가.위험은 있다. 글쓰기 훈련이 아직 모자라는가도 싶고 무엇부터 적어야 하는지 막막하기도 하다. 혹 지켜야 하는 무엇이 없는가도 궁금하고 아무나 쓰는 일이 적절한가 의문스럽기도 하다. 가짜뉴스의 위험은 이미 보이고, 시민언론의 가능성이 펼쳐지고는 있다. 15세기 인쇄술이 많은 사람을 긴장하게 했듯이, 21세기 디지털문명은 소통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가고 있다. 그 시절 더 많이 알게 된 용기있는 사람들이 개혁의 시대를 확장했듯이,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 이야기와 담론의 단초를 드러내어야 한다. 누군가 나를 대신하여 적어내길 기다리는 일은, 빛의 속도로 변화해 가는 오늘의 흐름에 어울리지 않는다. 어설프고 어색한 표현과 문장들도 거듭 두드리며 시도하노라면 다듬어 지고 나아질 터이다.인쇄술이 읽기혁명을 가져왔다면 디지털은 쓰기혁명을 당겨주었다. 더 많이 읽는 일이 가능해 졌지만 내 손으로 쓰고 다듬어 세상을 직접 상대하며 소통하는 창문이 넓게 열렸다. 세상과 어떤 글로 나누며 소통할 것인지 오늘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남이 만들어 주는 문명을 여기까지 따라왔다면 이제는 당신이 콘텐츠로 주도하는 세상을 열어주시라. 기회는 당신 손에 있으니.

2019-05-01

책맹

장규열 한동대 교수주식으로 거부가 된 워렌 버핏(Warren Buffett)이 성공에 이른 열쇠는 ‘책읽기’였다고 한다. 디지털문명의 한 가운데인 21세기, 거의 모든 정보를 온라인으로 찾아볼 수 있으며 손가락 하나로 세상의 온갖 지식을 검색할 수 있다. 그럼에도 버핏은 ‘의미있는 지식과 뜻깊은 정보는 책을 읽지 않고는 얻어 챙길 방법이 없다’고 고집하며 독서를 통하여 평생 배우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9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세상과 너끈히 겨루며 싱싱함을 유지하는 비결 또한 책읽기라고 하였다. 하루 500페이지에 달할 정도의 독서량으로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섭렵하며 최첨단 정보를 기준으로 최우량 기업의 가능성을 판단하는 그만의 비법을 유지한다고 한다.양날의 칼. ‘지식정보시대’로 일컫는 오늘. 디지털문명이 안겨준 정보의 총량은 어마어마하다.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온라인은 정보로 이미 차고 넘친다. 정보의 양이 많기도 하지만 정보가 진화해 가는 속도를 따라잡기도 버거울 판이다. 사이버공간의 ‘초연결사회’는 인간에게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손쉽게 획득할 수 있게 하였다.그러나 과연 충분할 것인가. 컴퓨터와 영상모니터에만 심취하고 몰두하는 현대인은 생존과 성장에 필요한 만큼 정보와 지식을 챙기고 있는 것일까. 놀랍게도 이렇게 풍성한 정보습득이 간편해진 세상에 온라인검색만으로 얻지 못하는 정보가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상태를 문맹(Illiteracy)이라 불렀었지만, 디지털시대 현대인은 문맹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름하여 책맹(Aliteracy). 글을 읽을 줄은 물론 알지만 책을 읽지 않는 상태를 일컫는 표현이다.디지털정보와 영상전달에만 의존하는 사이 굳이 책을 읽을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는 일이야말로 사람을 위험한 상태에 빠뜨리게 된다. 글을 따라 읽으며 자연스럽게 체득하였던 집중력과 판단력의 저하를 초래하여 급기야는 디지털로 정보를 습득하면서도 점점 더 조급해 지고 산만해 지며 인내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그런 결과, 지식듭득과 상관이 없을 평소에도 주의력에 손상이 발생하여 균형있는 인성을 유지하는 일마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한다. 디지털중독이 가져오는 책맹현상은 위험하다. 유튜브와 게임과 SNS는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는 하였지만, 그 내용과 시야를 협소하게 하고 축소해 가는 경향성을 지닌다. 디지털의 모든 특장점을 충분히 활용할 줄도 알아야 하지만, 책읽기를 통하여 개발되는 집중력과 분석력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을 터이다.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Bill Gates)도 소문난 독서광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따금씩 좋은 책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알리바바의 마윈(馬雲)은 성공에 이르는 동안에는 몰라도, 그 성공을 유지하려면 독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였다. 빛의 속도로 바뀌어 가는 세상에 간편한 도구인 온라인 접속에 더하여 지루하고 답답하기 할 독서에 몰입하는 일은 비효율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인간의 문명은 독서를 통하여 사고력과 분석력을 진전시키고 통합과 협력을 위한 인성의 개발도 지식을 넘는 지혜로 가득한 책을 읽음으로 구현하여 왔다.지난 세기 초반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아직 문맹이 존재하던 시절에 이미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인터넷과 온라인에 중독된 나머지 인간의 소중한 능력을 잃어버리는 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디지털문명을 더욱 꽃피우게 하기 위하여도 책의 가치를 다시 새겨야 하며, 읽는 일의 수고로움을 지켜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제대로 알기 위하여 읽어야 한다.

2019-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