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신 객원 논설위원
소백산 기슭 산마을 부석 오일장 날, 그 흔했던 산나물을 보기가 쉽지 않다.
봄 가뭄이 심하기도 했었지만 산을 찾는 백수 사오정들이 산나물을 뜯는 것이 아니라 뿌리 채 뽑아 훼손시키기 때문이란다.
연초부터 구조조정 칼바람이 불면서 숨 막히도록 바쁘게 헉헉거리는 도시 생활에 쫓긴 사이 산마다 산나물이 돋아나고 야생화가 형형색색의 요란한 꽃을 지천으로 피었다. 우리나라 초여름은 꽃보다 아름다운 계절이어서 계절의 여왕이라는 찬사가 늘 따라 붙는다.
이런 땅위를 걷는 것을 기적이라고 표현한다. 어떻게 기적일 수 있을까. 자유 때문이다.
고민과 두려움·외로움·그리고 모든 사고나 삶의 현장에서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오는 계획으로부터 자유이기 때문이다.
떠난 이는 돌아와서 보슬보슬한 흙이 되고 아이의 웃음이 되고 연초록빛으로 볼록볼록 부풀어 오르는 나뭇잎이 되도록 빗물이 되어 덮인다. 그 길을 무심코 걸어보니 세상이 보이고 희망과 용기가 나오게 만든다.
고갯길을 오르는 재미는 더 쏠쏠하다. 고개를 넘는다는 것은 새 삶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빨리 빨리’를 쓸어버리고 내가 풍경이 되어서 긴 고갯길을 느릿느릿 걸어보자. 아리랑을 흥얼거리면 걸음이 더 편안해진다.
아리아리는 실체는 없지만 정신세계를 부르는 간절한 염원이다. 아리의 끝말 ‘랑’은 공 개념이다.
우리는 분별없이 빠르게 살아왔다. 얼마나 빠르게 살았던지 초년에 보았던 것들이 장년에 가면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다.
1999년 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슬로시티(Slow city)’운동처럼 우리도 가족과 함께 흙냄새·꽃냄새 맡으면서 산과 들을 걸어보면 새로운 힘이 몸속에서 치솟아 올라올 것 같다.
올 봄 도시를 보라. ‘짧다. 누디하다. 로맨틱하다.’ 거리를 누비는 여성들의 옷차림을 집약한 말이다.
허벅지 중간에 간신히 닿는 초미니 원피스, 누드 톤의 하늘거리는 원피스 색감의 물결은 불황의 그늘을 밀어내고 얇아진 지갑의 우울한 마음을 애써 털어내기 위해서라 하지만 한번 갇혀버린 마음이 쉽게 열리지 않는다.
여전히 ‘빨리 빨리’만 외치는 게 현실이니 5월에서 6월로 옮기는 이순간만이라도 도시를 탈피해서 걸으면서 생각해보자.
걷는 것도 코스가 있다. 지금 같은 계절은 나무가 우거진 숲 속 길을 걷는 것이 좋고 오르막 내리막이 적당히 반복되는 길이 더 좋다.
이맘 때 산길은 형형색색으로 피어난 야생화 보는 재미가 솔솔 하고 송진 냄새, 연초록 새순에서 풍기는 나무 냄새로 인해 생기마저 느낀다.
우리나라에서 이름난 걷기코스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 금대나 최치원의 전설이 얽힌 마적대 등 지리산 팔대(八臺), 월정사∼ 상원사를 잇는 전나무 숲 8.8km도 주변 환경이 빼어나다.
문경새재 고갯길이나 울진 바닷길, 죽장 상옥리 수목원도 나무로 우거졌다. 숲은 적막하다. 햇살은 나무 어깨 틈새로 비켜드는 사이 가끔 바람을 맞을 때면 초여름나무 냄새가 향긋하다.
우리나라 사람은 차를 즐겨 탄다. 교통안전공단이 자가용 승용차의 하루 주행거리를 처음 조사했던 1985년의 68.1km에서 매년 조금씩 줄어들긴 했었지만 여전히 하루 평균 45.9km나 되며 영업용 차량 등을 모두 합친 자동차 전체의 하루 주행거리는 57.3km다.
이에 비해 이탈리아는 하루 40km, 영국 44km, 독일 35km다. 일본은 27km로 비교대상국들 중 가장 낮았다.
우리는 일본인들보다 1.7배를 더 차에 의존하는 셈이다. 승용차 주행거리가 긴 나라는 미국(52km)이었다.
걸으며 생각하자. “신은 인간이 이겨내지 못할 시련은 주지 않는데” 실타래처럼 얽힌 현실공간을 벗어나려면 걷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