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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의 딸 구하기, SNS는 뭐하나?

관리자 기자
등록일 2011-11-07 23:38 게재일 2011-11-07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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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환 `ASIA`발행인·작가
1986년 11월22일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 평양에서 날아온 세 사내가 입국 심사대로 걸어가 일렬로 선다. 맨 앞은 덴마크 주재 북한 대사, 다음이 조선로동당 지도원, 그리고 오길남 박사. 오길남이 누구인가? 현재 통영시민이 북한에서 송환하려는 `통영의 딸 신숙자`의 남편이며 이들 부부의 두 딸 혜원과 규원의 아버지다.

25년 전 그날 오길남은 코펜하겐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탈북을 시도한다. 창구로 밀어 넣는 여권 위에 감쪽같이 쪽지를 얹는다. 독일어와 영어로 “제발, 제발 나를 도와 달라!”고 적은 것이다. 쪽지만으로 못 미더워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독일 박사학위논문까지 잽싸게 밀어 넣고는 눈을 감는다. 억센 손아귀가 진땀에 젖은 그의 몸을 당긴다. 순간적으로 대기실로 끌려간 그는 탈북에 성공한다.

위 장면은 오길남 자서전에 나오는 묘사다. 그의 입북 결정 장면에 이르러 나는 “이런 바보같은 박사가 있었어!”라고 탄식했다. 가족을 거느린 그가 독일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평양으로 들어간 때는 60년대나 70년대도 아니고 1985년 11월 29일이었던 것이다. 북한체제가 주체사상의 유일독재체제로 굳어진 그때, 그는 마치 취업이민을 택한 것처럼 삶을 송두리째 평양으로 옮겨갔다. 내 오독(誤讀)인지 몰라도, 그는 순진해서 어리석었고 먹물답게 겁이 많았다.

1942년 경북 의성의 궁핍한 농촌에서 태어난 오길남은 어린 시절에 좌익 집안 출신의 어머니가 고초 당하는 광경을 목격했고 부산 달동네에서 성장한 뒤 서울대 문리대 독어독문과를 졸업하고 1970년 10월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의 장학생으로 독일 유학의 장도에 올랐다. 이미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을 공부한 그는 1985년 7월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과 생산가격론을 현대 경제학의 관점에서 재조명한 논문으로 박사학위 최종심을 통과했다,

가난한 유학생이 독일 병원의 자그맣고 야무진 `통영 출신`의 간호사 신숙자와 결혼한 때는 1972년 11월로 조국에는 막 유신체제가 들어서 있었다. 그즈음부터 오길남은 유신반대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것은 5공 반대로 이어졌다. 박사학위를 받은 그가 먼저 고려한 것은 귀국으로, 한국 대학의 지인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교수 자리를 잡을 테니 귀국하라는 답장도 받는다. 그러나 그는 반국가단체 활동에 대한 구금과 재판을 두려워했다.

그러한 시기에 오길남은 통영 출신 작곡가 윤이상의 편지를 받는다. 그 거물의 편지는 박사학위취득 축하와 북한에 대한 자랑, 그리고 `민족통일운동과 동포를 위해 지식을 써라`는 입북 권유였다. 그의 입북 과정에는 독일 한인사회에 침투한 북한 공작원이 끼어들고 사회학자 송두율의 이름도 오르내린다. 그러나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인물은, 평양에는 여러 차례 다녀왔으나 고향(통영)에는 눈을 감을 때까지 끝내 다녀가지 못한 윤이상이었다. 물론 가장 큰 책임은 그때까지도 주체사상과 사회주의를 신봉한 지식인으로서 아내의 완강한 반대마저 윽박질러 뿌리친 오길남 자신에게 있었다.

평양에서 겨우 `대남방송` 요원으로 동원되다가 독일의 한국 유학생을 포섭하라는 지령을 받고 대사와 지도원을 따라 코펜하겐 공항에 내린 오길남. 그에게 탈북 용기를 불어넣은 이는 두 딸과 함께 볼모로 평양에 남은 신숙자였다. “내 사랑하는 딸들이 여기서 짐승처럼 박해받을망정, 파렴치하고 가증스럽고 저열한 범죄(이것은 유학생 포섭을 말함) 공모자의 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나와 혜원이와 규원이는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우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세요”

탈북에는 성공했으나 가족을 못 구해서 통한에 시달리는 오길남에게 1991년 1월 윤이상은 `통영의 모녀`를 담은 사진과 `다시 월북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 사진의 배경이 저 악명 높은 요덕수용소라는 사실을 알려준 것은 그 지옥을 버텨냈던 북한이탈주민들이었다. 그들은 가장(家長)의 찢긴 가슴을 더 찢어놓는 증언도 했다. 한 번은 아주머니(신숙자) 혼자서 목매어 죽으려 했고, 한 번은 세 모녀가 같이 죽으려고 방에 불을 질렀다는 것.

윤이상 음악제를 마련한 통영시민이 통영의 딸 `신숙자와 두 딸`을 구하려는 10만 서명운동을 마쳤다. 그것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국제인권기구에 전달된다. 오길남은 `가족 송환과 북한 정치범수용소 해체`를 촉구하러 베를린으로 날아가 강연도 하고 독일 주재 북한대사관 앞에서 시위도 한다. 아, 이렇게 야만적인 비극과 이산을 아직도 누가 강요하고 조장하는가? 그 잘난 한국의 `젊은 트위터며 SNS`는 선거때만 날뛰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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