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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박태준, 위대한 만남

등록일 2012-12-27 00:24 게재일 2012-12-2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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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환 작가

서애 류성룡과 충무공 이순신은 16세기 중반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해낸 영웅이다. 반드시 주목할 점은, 모함과 시기의 덫에 걸려 죽음으로 내몰리는 이순신을 살려낸 이가 류성룡이란 사실이다. 그래서 류성룡 없는 이순신은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순신 없는 류성룡은 있을 수 있었을까? 이순신이 없었다면 영의정 류성룡은 있었겠으나 구국의 영웅 류성룡은 있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을 환하게 밝혀낸 송복(연세대 명예교수)은 두 사람의 만남에 `위대한 만남`이란 말을 헌사하고, 같은 제목의 책을 썼다.

그로부터 400여년이 지난 20세기 중반, 우리 역사는 또 하나의`위대한 만남`을 낳았다. 박태준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박정희와 박태준의 만남이 근대화 역사에서 `위대한 만남`으로 기록될 것이라 한다. 포항제철(포스코)은 한국 산업화의 기반이 되고 견인차가 됐는데, 박정희 없는 포항제철의 박태준은 있을 수 없었고, 박태준 없는 포스코의 성공은 있을 수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내가 쓴`박태준 평전`에 이런 문장이 있다.“박정희는 박태준의 순수하고 뜨거운 애국적 사명감만은 범할 수 없는 처녀성처럼 옹호했다. 정치권력의 방면으로 기웃거리지 않고 당겨도 단호히 뿌리친 그의 기개를 높이 보았다. 여기엔 한 인간과 인간으로서, 한 사내와 사내로서 오직 두 사람만이 온전히 알아차릴 수 있는 서로의 빛깔과 향기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박정희와 박태준의 독특한 인간관계는 박태준이 자신의 리더십과 사명감을 신명나게 발현할 수 있는 양호한 정치적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박태준이 정치적 방면으로 기웃거리지 않고 당겨도 뿌리쳤다는 것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박정희에게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은 그가 미국으로 유학 가겠다고 고집한 사실을 가리킨다. 1948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강의실에서 사제지간처럼 맺어진 두 사람의 인연에서 그것은 `한국 산업화 역사`에서 새로운 전환점으로 기록될 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박정희가 박태준을 경제 방면에 투입하기로 결심하는 계기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 앞서 박정희는 5·16 군정에서 박태준을 상공담당 최고위원으로 활용하면서 경제적 인재로서의 박태준의 능력과 잠재적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러나 박태준이 국회의원 출마를 거부하는 지점에 이르러 박정희는 그를 장기간 일본에 파견해 근대화 일본을 체험하게 만든 데 이어서 1964년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하고, 드디어 1967년에는 공식적으로 종합제철소 책임자로 발탁했다. 박태준 개인으로서는 박정희의 정치적 과오의 자리로 동행하지 않게 되는 새 출발이기도 했다.

박정희가 포항제철의 박태준을 결정적으로 도와준 것은 무엇보다도`완전히 믿고 맡겼으며 정치적 외풍을 막아줬다`는 사실이다. 박정희가 믿은 것은 박태준의 탁월한 능력만이 아닐 것이다. 아니, 그의 순수하고 뜨거운 애국적 사명감을 믿었기에 능력도 믿었을 것이다. 전폭적 신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종이마패`였다. 정치인들이 그럴싸한 명분과 힘을 앞세워 포철의 설비구매를 통한 정치자금 조달을 압박해 왔을 때, 박태준이 박정희에게 어려움을 털어놓자 박정희는 즉석에서 설비구매의 전권을 그에게 맡기는 메모에 사인을 해줬다. 박태준의 답례는 약속이었다. “각하께서는 저한테 해주실 것은 다 해주셨습니다. 이젠 제가 해드릴 차례입니다. 반드시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20여년이 흘렀다. 1992년 개천절, 박태준은 박정희 묘소 앞에 서 있었다. 종이마패, 실제로 한 번도 내민 적이 없었던 종이마패를 받은 자리에서 거듭 다짐한 그 약속을 완전히 실현했다는 보고를 올린 것이었다.

이미 한국은 근대화에 성공한 샴페인을 터뜨린 나라가 돼있었다. 박정희와 박태준, 두 사내의 위대한 만남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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