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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배운다

등록일 2013-05-31 00:32 게재일 2013-05-31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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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욱 시인

올해는 3학년 친구들과 학급을 꾸렸다. 딱, 열 살. 아직 2학년 티를 벗지 못한 귀여운 아이들이다. 그간 고학년만 도맡아오다 오래간만에 어린 친구들을 만났더니 당황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를테면, 교과서 23쪽을 펴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여기저기서 똘똘한 눈으로 묻는다. “선생님, 교과서 몇 쪽 펴요?” 신청서 제출하라고 얘기하는 도중에 “선생님, 신청서 언제 내요?”라고 코밑까지 다가와 묻는데 그저 헛웃음만 나온다.

그렇다고 무조건 어리게만 봐서는 안 된다. 지난 3월부터 써온 글기지개를 봤더니 고학년보다 오히려 관찰이 날카롭고 생각이 깊다. 그중 몇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오늘 밤에 아빠가 나에게 재판을 내려달라고 했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아빠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 보았다. 엄마가 스티커 복권을 사오라고 했다. 아빠는 담배랑 다른 복권을 사왔다. 아빠는 그 정도론 화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었고 엄마는 스티커 복권을 사오라고 했는데 그거 하나 못 사왔으니 아빠가 잘못했다고 한다. 나는 재판을 내렸다. 바로 아빠가 잘못했다. 왜냐면 아빠는 그 말을 안 들은 것 같다, 잘. 그리고 엄마의 마음속은 답답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작은 것도 사람한테 챙겨주는 것이 예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빠가 잘못했다. 오늘 재판의 결론은 가까울수록 작은 것도 챙겨주는 것이 엄마가 말하는 매너다. 사람은 매너가 있어야 한다”

조은이가 쓴 글기지개다. 처음에 읽고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작고 사소한 것으로부터 가까워지거나 멀어진다는 이치를 조은이는 잘 아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사람은 매너가 있어야 한다”라고 못 박았다. 스티커 복권을 사오라고 했는데 다른 복권을 사온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아빠가 엄마의 말을 잘 안 들었기 때문에 잘못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청이다. 조은이는 그걸 `매너`라는 말로 썼다. 앞으로 조은이가 쓸 글이 무척 기대된다.

“어제 할머니의 생일이 4월8일이었단 사실을 엄마가 알고 재빨리 전화했다. 잠시 후, 내 방으로 들어왔더니 엄마가 울고 있었다. 나는 왜 우는지 궁금했다. 내가 왜 우냐고 물어봤더니 엄마는 말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나는 너무 궁금했다. 엄마가 전화를 끊고 나에게 말했다. “너는 엄마처럼 부모님 생일 잘 모르면 안 돼” 엄마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엄마를 위해서 할머니에게 전화를 해드려야겠다”

규민이가 쓴 글기지개다. 아침에 이 글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께 매일 전화 한 통 드리지 못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글이었다. 평소 부모님과 형을 생각하는 마음이 기특한 규민이는 영화감독이 꿈이다. “좋은 영화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다”는 포부를 3학년 아이가 글기지개에 썼다. 그 꿈이 꼭 이뤄지길 고대한다.

“오늘도 역시 예헌이가 안 왔다. 많이 걱정이 된다. 어젯밤에 전화를 해보았는데 예헌이가 입원을 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예헌이가 빨리 나으면 좋겠다. “예헌아, 빨리 나아!” (다음날) 어제 엄마와 나는 예헌이가 치료받는 병원에 가보았다. 예헌이는 궁금해하는 게 너무 많았다. 체육에 대해 물어보았다. 나는 “꼬리잡기를 해, 예헌아”라고 했다. “와, 재미있겠다” 했다. 예헌이의 얼굴은 아직도 아픈 얼굴이었다. 그래도 빨리 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다. 또 예헌이에게 4번째 암송 시 `죽은 새`를 얘기해주었다. 그러자 예헌이가 “와, 쉽다”라고 했다. 예헌이가 일요일에 퇴원하면 월요일은 학교에 온다고 했다. 예헌이를 만나서 재미있는 학교이야기를 해서 좋았다”

이틀에 걸쳐 관우가 쓴 글기지개다. 폐렴으로 입원한 친구 예헌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하다. 병문안까지 갔다니 대견하다. 올해 딱, 열 살이 되는 아이들이지만 글기지개를 보면 참 배울 게 많다. 아이들에게 배운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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