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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

등록일 2013-08-23 00:24 게재일 2013-08-2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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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명 시인

선풍기가 멈추어 섰다. 바람이 뚝 그치고 그 특유의 날개소리도 자취를 감췄다. 수명을 다한 것이다. 한 20년쯤 됐으니 그럴 만도 하다. 물론 오래전부터이지만 어제 저녁에 소음이 심하고 고개를 자꾸 숙이는 게 이거하나 바꿔야겠다며 낮에 새것을 하나 장만해뒀는데 바로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수명을 다했다. `나의 목숨도 저럴 것이다`라고 생각하니 안쓰럽고 쓸쓸했지만 감정도 없고 생각도 없는 저 기계를 사랑할 일 없으니 그저 내다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마트에서 새 선풍기를 사면서 이미 구선풍기용 폐기물 딱지를 사두었던 것인데 곧바로 쓸 줄이야 생각하진 못했다.

최초의 선풍기는 부채를 닮았다. 1600년대 천장에 매달아 놓은 추의 무게를 이용하여 한 장으로 된 커다란 부채를 시계추 모양으로 흔들어 바람을 일으켰다. 이어 1850년대에 탁상선풍기가 발명됐는데 태엽을 감아 사용하는 것이었다. 전기를 이용한 선풍기는 에디슨이 발명했으며, 점차 발달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 보호망을 씌운 선풍기가 만들어졌고 현재 선풍기처럼 아름답고 정교한 것으로 발전해왔다. 심지어 날개 없는 선풍기 까지 만들어져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처음 선풍기가 나왔을 때 얼마나 사람들 사이에 신통한 기계로 여겨졌을까. 그런데 이젠 날개가 없이 바람을 일으킨다니 참 신통방통한 일이다.

어릴 때, 할아버지가 선풍기를 틀어놓고 주무시는 것을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일이 있다. 술이 취하셔서 더우신지 잠꼬대를 하시며 선풍기 바람을 얼굴에다 대고 낮잠을 주무셨다. 그래도 끄떡없이 몇 시간 후에 일어나셔서 내게 냉수를 달라고 하신 것이 기억난다. 그때 선풍기들은 대체로 `골드스타`같은 상표를 달고 있었는데 선풍기 날개에 손가락을 다치는 경우가 많아 얇은 그물 망을 씌어놓기도 했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 이 선풍기가 더운 여름을 나는 가장 훌륭한 일등 공신이었는데 이젠 보조용 기계에 불과해졌다. `골드스타` 상표를 단 선풍기가 아직도 있다면 그것은 골동품 가게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박태훈의 `해학이 있는 아침`에는 다음 같은 옛날 선풍기에 얽힌 풋풋한 이야기가 나온다.

1969년에만 해도 서민들은 선풍기 구경을 하지 못했다. 당시 월남에서 근무했던 친구가 현지 제대하면서 한국에서 선풍기를 살 수 있는 쿠폰을 받아 맡겼다. 어디 선물 할 거라는 14인치 `골드스타` 선풍기 쿠폰이었다. 그때가 봄이라 판매점에서 수령 해와 보관했다. 여름은 무척 더웠다. 부채로 넘기던 시절인데 더워도 참을 수 밖에 없었다. 하도 더워 아내가 보관중인 선풍기를 뜯었다. 걱정하면서 시원한 바람에 즐거워했다. 하지만 남의 물건인데 딱 한 시간만 써 보고 원상태로 했다. 시험 가동을 한 셈이다. “선풍기란 게 요런것이야. 정말 덥네! 정말 더워!” 그래도 나와 아내는 `사람은 신용이 제일`이라고 생각 했다. 그래서 선풍기를 원상태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바보스러운가? 더위와 싸우는 아이와 엄마를 생각해서 선풍기를 써도 됐지만 그해 여름, 더위와 맨몸으로 싸우며 보냈다. 다음해 봄, 친구가 귀국해서 선풍기를 찾아갔다. 아내는 친구에게 한 번 썼다는 사과를 했다. 친구는 말없이 선풍기를 받았다.

1970년 여름에는 큰 마음먹고 선풍기를 장만 했다. 우리 집 가보 2호가 됐다. TV가 1호 였으니 말이다. 더운 여름이면 생각나는 지난 모습이 우습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에어컨을 켤 때마다 그 시절 생각이 나 마음을 조린다. 가끔씩 켜는 에어컨은 손님 올 때만 쓰고 평소에는 선풍기를 켜고 지낸다. 금년 여름이 아무리 덥다고 해도 전기요금을 생각하니 아껴야겠다.

왜일까? 그래도 선풍기 바람이 없을 때 사람들 마음은 더 따뜻하고 시원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선풍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현대 사람들 생각 또한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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