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 아들이 학원에 새로 등록했다. 아무래도 영어과목이 좀 부진하다 싶어 보충을 해야겠다는 것이다. 그래라 하고 보니 마치는 시간이 늦어 기다려주지 못했는데 하루는 작정하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새벽 1시를 넘겨도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마칠 시간이 지났는데` 아들에게 전화해도 받질 않고, 이 시간에 학원으로 전화하기도 그렇고 졸리지만 애쓰며 참고 기다렸다.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야 이제 마쳤다며 들어온다.“다음부턴 좀 빨리 다녀라”한마디 하고 잠에 들었지만 편칠 않아 잠에 잘 들 수가 없었다. 다음날 하루가 다 멍멍하고 잠이 쏟아지고 무기력한 하루였는데 녀석은 어떨까.
이건 기형도의 `엄마걱정`을 바꾸어서 자식걱정이다.“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한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가족이 돌아오지 않아 기다리는 걱정은 닮았지만 기형도의 쓸쓸함에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자식걱정은 그래도 아비로서 깊은 정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아침 밥상머리에 “녀석아 아빠가 기다렸다”라고 하니 웃으면서 “시험기간이라 좀 더 늦는데 앞으로 그러실 필요 없어요”라고 말한다. 아버지 노릇하기도 몸이 좀 고달프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시절 다니던 교회 청년부 회지에서 읽은 아버지에 대한 글이 문득 생각난다. 회지를 잃어버려서 본문은 싣기 어렵고 요약해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농번기에는 학교에 가지도 못하고 농사를 도왔던 적이 있었다. 휴일에는 당연히 농사를 도와야했다. 가을 즈음에 참새들이 나락을 까먹을까봐 허수아비도 세워놓고 깡통도 두드리고 하던 때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학교 마치고 돌아온 토요일 오후 깡통과 막대기를 들고 논에 나가 새들을 쫓고 있었다. 그러다 지루하고 재미없고 힘겨운 그 일을 그만두고 놀 마음이 생겼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마당에 가서 그만 어울렸다. 구슬치기를 한 참 집중해서 하고 있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낮은 담장 너머로 아버지의 얼굴이 지나간 것 같았다. 아버지는 매우 완고하시고 무서운 분이셨다. 이제 큰일 났구나. 겁이 덜컥 나서 구슬을 내려놓고 도망 나왔다. 갈 데는 없고 오리쯤 떨어진 읍내로 가서 저녁이 되어 어둑어둑 할 때까지 돌아다니다가 배고파 허기져서 참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올 생각이 났다. 어두워져 새벽 2시나 되었을 것 같은데 아버지가 불을 켜놓으시고 마루에 앉아 계셨다. 아버지는 이후에도 그날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안하셨다.
가부장적인 가치가 매우 중요했던 시절 그래도 엄한 아버지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친(親)자가 말해주는 친한 사람이다. 즉 사랑으로 자식을 기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지금 시대에도 이런 가치는 유효해서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으로 가르치지 못하면 온갖 문제가 발생한다. 최근 존속 살해사건이 많아진 것에서도 그 결과를 볼 수 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부재하면 자녀들이 올바로 클 수가 없다. 그것은 결국 더 큰 사회문제로 확대 재생산되어질 것이기 때문에 시급히 고쳐야 할 문제이다. 나는 오래전 아버지학교를 수료했다. 거기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조선시대 `사주당(師朱堂) 이씨`가 쓴 태교에 관한 책`태교신기`1장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고 한다. `가르침 중의 가장 근본이 되는 가르침은 태교이며, 태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기를 가질 때의 아비의 올바른 마음이다` 아버지의 마음가짐이 아기에게 이미 씨로서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생겨날 때부터 영향을 미친다는 놀라운 이야기다. 이처럼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영향력은 작지 않다. 그 마음 속 깊이에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많지는 않겠지만 자꾸 늘 약한 듯해서 안타깝다. 아들이 어렸을 때, 그 작은 놈이 아파서 열병이 났을 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되었던 것이 생각난다. 내속에 자녀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는 것은 쉽다. 그 녀석이 넘어지거나 아플 때, 쓰러질 때, 내 팔이 필요할 때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