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째다. 한 달에 한 번은 어김없이 화투판이 벌어진다. 질리지도 않는가. 볼거리 먹을거리가 널린 세상에 우리의 문화생활은 좀처럼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네 집이 돌아가면서 음식을 준비하고 집으로 초대를 한다. 엉뚱한 생각인지 몰라도 일 년이면 한 집에서 세 번, 22년을 곱하면 66번이다. 무시로 모이는 횟수까지 합하면 머잖아 한 가정 100회 특집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남편이 처음 대구에 와서 알고 지내던 친구들과 부부 모임을 한다. 남편을 제외한 세 친구는 그때 교제하던 아가씨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다. 그래선지 지금도 그 시절 이야기만 나오면 금새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나만 모르는`그때를 아시나요`가 재방송 된다. 낡은 125CC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누비고 다녔던 이야기, 누군가는 양다리 걸쳤다가 지금의 아내에게 들통 난 이야기, 쌍쌍이 데이트하러 가는 곳마다 남편이 눈치 없이 따라 다녔던 이야기로 배꼽을 잡는다. 노총각이었던 남편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도 그들은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기뻐하고 축하해 준 죽마고우 같은 친구들이다.
비산동의 어느 한옥 집 문간방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그들을 초대했다. 단칸방에 소꿉놀이 같은 살림살이였지만 창문을 열면 주인집 꽃밭은 온전히 우리 차지였다. 팔달시장에서 채소 도매를 하는 주인 부부와 아이들이 나가고 나면 팔십 노모는 종일 꽃밭에서 살았다. 라일락이 한창인 마당에 야외용 가스렌지를 놓고 삼계탕을 끓였다. 비좁은 단칸방은 교대로 밥을 먹어야 했다. 남편들이 식사를 마치고 마당에 나가있는 동안 나는 부인들과 뜨거운 삼계탕을 먹으며 낯을 익혔다. 혼수로 해온, 비닐도 벗기지 않은 새 담요를 깔고 고스톱 신고식을 치렀다.
아이들까지 북적이던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수월한 편이다. 그렇더라도 내 집에 오는 손님이고 모임이다. 청소하고 시장 봐서 음식 장만하다보면 어느새 현관 앞이 떠들썩하다. 저녁상을 물리기 바쁘게 화투판이 등장한다. 원활한 현금 유통을 위해 잔돈을 준비하는 것도 유사가 할 일이다. 일전을 앞둔 남편들의 표정이 호기롭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는 심사인가. 변화를 외치던 아내들까지 팔을 걷어 부친다. 부부라고 봐 줄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지난달에 거금을 잃었다는 최 사장이 오늘은 기필코 만회를 하겠다며 큰소리친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결혼할 당시에 남편은 조그마한 공장을 하고 있었다. 말이 공장이지 손바닥만 한 자리에 중고 선반 몇 대에 직원은 한두 명이었다. 신경 쓰고 노력한 것에 비하면 한 달 성적표는 초라했다. 그런 남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공장에 간식을 챙겨가는 것이 전부였다. 틈틈이 부침개도 구워가고 감자도 삶아 갔다. 겨울이면 붕어빵이 식을세라 종종걸음을 치기도 했다.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기름때에 절은 공장은 여름이면 그야말로 찜통이었다. 생각 끝에 냉동실에 물수건을 얼렸다가 직원들에게 돌렸다.
다른 모임에서는 문화생활도 하고 레저 활동도 하는 그들이 유독 우리 모임 때는 고스톱을 고집하는 이유가 뭘까. 모르긴 해도 그들만의 정체성과 끈끈한 우정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돈도 시간적 여유도 없던 시절, 만나면 소주잔에 고스톱이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 아니었을까. 낡은 유물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놀이라고 치부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지나온 세월과 우정이 담긴 의식적 행위가 아니겠는가. 나이와 체면을 던져 버리고 잠시나마 순수하고 자유롭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열망 같은 것 말이다. 청춘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지만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있는 한 화투판의 열기는 식지 않을 것 같다. 한 끼 먹자고 시장을 보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음식을 장만하는 것이 어찌 보면 낭비고 번거로운 일일 수도 있다. 맛집이 지천이다. 전화 한 통이면 예약도 가능하다.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모임이라도 밖에서 하자던 아내들이 언제부턴가 고스톱 판에 끼기 시작했다. 무용담처럼 반복되는 젊은 날의 순수와 열정을 상기시키는 그 자리가 그들이 세상을 헤쳐 나가는 또 하나의 힘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변화와 반란을 포기하고 함께 동화되는 것, 그 또한 아내의 역할이고 내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