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부석사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25-12-10 16:30 게재일 2025-12-11 17면
스크랩버튼
Second alt text
배문경 수필가

들어간 병실에는 그녀를 덮고 있던 이불의 끝자락이 그녀의 흐느낌만큼이나 들썩였다. 그녀의 병실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에는 약봉지가 그녀처럼 구겨진 채 놓여 있었다. 일어나 앉은 그녀의 부은 얼굴은 몇 년 전 행복해하던 그녀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없게끔 하였다. 남편의 폭력과 유산.

부석사로 가는 길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실컷 울었다는 듯이 이불을 밀치고 일어나 푸석한 얼굴로 부석사에 가고 싶다고 했다. 젊은 그녀가 이렇게 털고 일어나 준 것이 고마워 아무 말 없이 길동무로 따라나섰다.

오르는 길목엔 젖은 연초록의 잎들이 비에 젖어 싱싱해 보였고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사과들이 빗속에서도 달짝지근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내린 비로 사과밭 앞에는 작은 도랑이 생겨 물은 무심히 흐르고 있었고 빗물은 흘러갈 뿐 본래의 것을 변화시키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와 내가 우산을 쓴 채 오르막을 거쳐 천왕문을 지났다. 천천히 걸어도 그녀는 힘들어 보인다. 삶의 모든 희망을 상실한 채 모든 것을 두 손에서 내려놓은 것처럼 텅 비어 버린 표정이다. 지금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다고 그녀는 느낌으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 그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인지, 그로 인한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 때문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에게 모든 것을 주었는데 돌아온 것은 고통뿐인 지금, 그녀는 어떤 마음일까. 지금 그녀가 그에게 측은지심(惻隱之心) 을 느낀다면 그녀는 성불(成佛)할 지도 모를 일이다.

타인에게 마음을 다 주지도 못하고, 이해타산(利害打算)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는 것은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느껴진다. 그녀가 부석사를 오르며 스스로 마음을 다독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자문자답하다 긴 계단 앞에 서서 숨을 고른다.

“선묘가 의상을 위해 목숨을 바쳐 용이 되었다면 의상 대사는 그녀를 사랑했을까, 사랑하지 않았을까?” 뜬금없는 소리에 그녀를 바라본다. 아마도 이해(理解)를 바라지 않고 한 남자에게 목숨 걸고 사랑한 것이 스스로 선묘와 자신이 비슷하다고 생각한 것처럼 느껴졌다. 선묘와 의상조사와의 사랑 이야기는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부석사에 남아 있을지 궁금해졌다. 사랑하는 이의 안전을 염려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던 선묘의 행동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어리석은 이를 일깨우고자 하더라도 긴 세월 속에 묻혀 사라진 것에 로맨틱한 이야기 한 토막을 덧붙인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자신을 생각하지도 않고 단지 누군가에게 몽땅 주기만 한 것이 사랑이라면 받는 누군가는 얼마나 부담스러울 것인가.’ 혼자 생각에 젖어 계단을 오르자 목어와 북이 소리 내어 울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생겨나서 괴롭고, 존재해서 괴롭고, 존재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괴로우며, 사라지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데 나는 저 목어와 북을 쳐서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다. 아니 나 자신만이라도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기를 바라며 내 속의 북을 울리고 싶다.

내린 비로 웅덩이 가득 물이 차인 곳에 연꽃이 환하게 피어 있다. 연꽃 가까이 손을 가져가던 그녀가 무슨 생각에서일까.

“기다려 볼래. 그러다 보면 그의 마음이 다시 나에게 돌아올지도 몰라.” 가늘디가는 바람 소리같이 그녀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간다. 의상을 사랑했던 선묘가 용으로 변해 사모하는 임을 위해 드러누워 있다는 대웅전 계단 어느 곳에도 그들은 존재하지 않고, 멈추었던 비는 다시 내려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무량수전 기와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큰 강을 이룰 것처럼 느껴졌다.

대웅전 뒤 곁엔 땅에조차 내려앉지 못하는 큰 바위가 있으니 선묘의 사랑이 의상조사의 가슴을 사랑으로 감화시키지 못하여 아직도 좌불안석(坐不安席)인가?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혼잣소리로 중얼거린다.

“사는 것이 부석(浮石)인 것을.”

/배문경 수필가

Essay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