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集安)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강계(江界)와 접해 있는 인구 23만의 도시다. 그곳은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遷都)할 때까지 400년 넘는 세월 고구려의 수도였다. 동명성왕 주몽은 수도를 오늘날 요령성 환인(桓仁)으로 비정(比定)되는 졸본(卒本)에서 고구려를 건국한다. 주몽의 아들 유리왕은 서기 3년에 수도를 집안으로 옮긴다.
2012년 7월에 발견된 고구려비 때문에 집안은 뜨거운 감자로 부각됐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진행하던 중국과 그것에 반대하는 한국 사이에 역사논쟁이 촉발됐던 것이다. 집안 고구려비는 아직도 논쟁의 한가운데 있지만, 요즘은 소강상태(小康狀態)다. 그럼에도 중국정부는 집안에 고구려 전문 박물관을 개장해 동북공정의 마지막 단계를 마무리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집안 박물관에서는 사진촬영을 금하고 있어서 무거운 분위기다. 나는 박물관 1층에 양각으로 부조된 대형조형물 앞에서 망연해진다.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태호 복희와 여와, 신농씨가 사신(四神)의 호위를 받는 모습 때문이었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이 그들을 옹위하는 것 같은 모습에서 놀라움과 기이함이 찾아들었다.
중국의 신화시대를 대표하는 복희는 8괘와 문자를 만들고, 어업과 목축을 시작했다는 황제다. 그의 아내로 간주되는 여와는 토지창조의 신이며 생황이란 악기를 만들었다 한다. 신농씨는 쟁기를 만들고 농경을 가르친 신이다. 중국의 천지창조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고구려 사신들을 호위무사로 두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고구려 벽화의 대표격인 수렵도와 무용도, 삼족오(三足烏)까지 부조되어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 `태왕사신기`에 등장하여 고구려의 표상처럼 휘날렸던 삼족오 깃발이 눈에 밟히는 것이다. 우리가 흠모하는 고대의 제왕 광개토대왕의 전가의 보도였던 삼족오가 집안박물관 부조에 장식처럼 자리하고 있는 정경이라니!
혼란스러운 심사를 안고 장춘(長春)으로 향하는 길에서 바라본 지형(地形)과 산세(山勢)는 전형적인 한반도의 모습이었다. 삐죽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온유한 등성이를 가진 산들과 그 안에 포근하게 안겨 있는 분지와 크고 작은 물줄기는 여기가 중국인가, 하는 의구심(疑懼心)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눈 때문에 미끄러운 도로를 여덟 시간 넘도록 달려야 했던 집안에서 장춘 가는 길에서 동북아 역사논쟁을 떠올린다. 한국과 중국은 고대사 (古代史) 논쟁을 진행 중이고, 한국과 일본은 위안부 문제를 중심에 둔 현대사 (現代史) 논쟁이 한창이다.
많은 나라가 고대사는 팽창의 역사로, 현대사는 수난(受難)의 역사로 기록한다. 한중일 세 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광개토대왕의 정복사업을 자랑스레 가르친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면 일제의 가혹한 수탈과 착취와 억압을 강조한다. 이것은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다. 사태가 이렇게 진행되기 때문에 역사논쟁과 정치적 갈등이 정리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첫 번째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 그것은 각자의 주장을 최대강령으로 삼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한국과 중국, 한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이 각자의 주장을 상호 정리하고 충분히 숙고하고 토론하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2005년 4월 대구에서 열렸던 `한일역사공통교재`라는 부제(副題)가 딸린 <조선통신사> 출판기념회는 좋은 선례(先例)가 될 것이다. 전교조 대구지부와 히로시마 교원노조가 상호대화와 토론을 거쳐 만들어낸 한일 최초의 역사공통교재 `조선통신사`! 어느 일방의 주장이나 기록을 우선하지 않고, 상호방문과 대화에 기초해 쉽고 다채로운 내용으로 설득력을 얻은 `조선통신사`!
그럼에도 우리에게 여전히 문제는 있다. 인문학도들의 취업난(就業難)을 구실로 대학들이 앞 다퉈 인문학 관련학과를 없애려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교육부는 구조조정이라는 미명 아래 대학의 인문학 폐과(廢科)를 선도하고 있다. 역사와 철학, 문학이 부재하는 나라 대한민국을 생각해보시라. 역사전쟁에서 밀려난다면 우리에게 장쾌한 미래나 장밋빛 전망이 있겠는가?!
점차 어둑해지는 집안-장춘 감도(街道)에서 나의 생각은 암담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