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대선 토론회 유감

인간이 여타 생물과 다른 점은 여러 면에서 찾을 수 있지만, 그 근간은 언어에 있다. 언어는 의사소통 수단으로 인간의 기초적인 생존과 문화, 고도로 발전된 문명의 요체(要諦)다. 아울러 언어는 개인과 집단 혹은 종족과 민족의 본질을 드러내는 지표로도 작용한다. 어떤 민족의 언어를 들여다보면 그들의 원형과 지향하는 종착점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대선 토론회를 보고 들으면서 안타깝고 답답한 심정이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네 사람의 식견을 국민이 생중계로 확인하는 면접 형식이 텔레비전 토론회다. 그런 자리에서 후보들의 지적-정신적-인격적 자양분과 밑천이 드러남으로써 많은 국민이 큰 실망감을 느끼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토론회가 진행되었는지, 토론회 자체에 회의가 들기도 한다. 토론(討論)의 핵심은 ‘말’에 있다. 말의 다른 표기가 언어(言語)다. 개인이 활용하는 말과 표현은 그가 살아온 인생행로와 경험, 독서와 사유, 인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런 까닭에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예악사어서수’로 요약되는 ‘육예(六藝)’를 지식인의 기본적인 자질로 여겼다. 중세 유럽에서 문법, 수사, 변증 세 과목을 대학 교양과목으로 설정한 것도 같은 이치다. 토론의 전제는 경청과 인내 그리고 설득이다.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그와 나의 차이가 명백하게 변별된다. 그와 나의 차이를 알아야 나의 견해를 제대로 피력할 수 있다. 이런 작업에는 인내가 수반된다. 남의 말, 그것도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듣는 일은 그야말로 고도의 집중력과 절제된 예의범절이 선행조건이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견해를 가진다. 다수 대중이 지배하는 21세기 현대사회에서 모든 개개인은 고유한 입장과 태도로 견고하게 무장돼 있다. 그런 까닭에 상반된 견해를 가진 사람을 설득함은 매우 어려운 과업이다. 그래서 최고 정치 지도자에게는 일반 대중보다 훨씬 많은 독서와 사색 그리고 고뇌의 경험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어느 대선 후보의 배설에 가까운 ‘젓가락’ 막말을 듣노라니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솟구친다. 툭하면 명문대 나왔다고 떠벌리는 자의 입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언어폭력이 끔찍하게 다가온다. 소크라테스는 말할 때 가져야 할 세 가지를 지적한다. “하려는 말이 사실인가, 그 말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이 필요한가, 필요한 말이라도 그 말이 선한가?!” 대선 토론회에 나선 후보자 가운데 누가 한 권의 시집, 한 편의 연극이나 영화를 진정으로 보았는지, 참 궁금하다. 그들의 빈곤한 언어와 의사 표현 방식과 그것을 강제한 엉성한 토론 규칙이 마음에 걸린다. 청소년들도 함께 본 토론회가 미래 세대의 자양분이 되려면 토론자들의 인격과 품위가 담보되어야 한다. 그것의 첫 번째 전제가 풍성한 독서와 인격이다. 정치 지도자는 분출하는 사적 욕망을 절제된 언어로 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지적-정신적-인격적 능력을 갖춰야 한다. 정치는 무엇보다 먼저 인간이 된 사람만이 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 아닌 자가 저지른 내란으로 치르게 된 대선 토론회를 본 나의 쓰라린 소감이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06-01

남가일몽(南柯一夢)

교양 강의 ‘동서 고전의 만남’을 진행하면서 느끼는 소회가 적잖다. 학생들이 기초적인 한자마저 등한히 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 아프게 다가온다. 한자어는 상당수 한국어의 근간으로 작용하기에 문해력을 늘리려면 한자어 실력 배양이 필수다. 하지만 실상을 살피면, 상황은 정반대임을 알게 된다. 한자어를 영어가 대체하는 요지경이 펼쳐지고 있다.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에는 읽기와 쓰기, 말하기가 있다. 타인이 쓴 글을 올바르게 독서하는 능력이 읽기다. 필자의 생각과 느낌을 적절하게 전달함이 쓰기이며, 말하기는 화자의 생각을 구두(口頭)로 발화하는 것이다. 우리의 언어생활을 자연스럽고 윤택하게 해주는 세 가지 능력의 바탕에는 우리 고유어와 더불어 한자어가 자리하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다. 우리 언어생활에 굳건하게 뿌리내린 한자어를 버리고 영어로 대체함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불필요한 노릇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중고등학교 교육에서 한자어가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그야말로 불 보듯 뻔하다. 예전 세대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썼던 사자성어 혹은 고사성어를 알고 실생활에서 활용하는 청년 세대는 거의 멸종된 것 같다. 그런 연유로 ‘동서 고전의 만남’에서 일주일에 하나 정도 고사성어를 소개하고 있다. ‘남가일몽’도 그런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된 고사성어다. 남가일몽은 당나라 덕종 치세의 선비 순우분이 한바탕 꿈을 꾸고 일어나 확인해 보니 홰나무 남쪽 가지 아래 개미굴이 있었다는 얘기에서 나왔다. 꿈속에서 흘러간 20년 세월이 그야말로 순식간의 일이었던 셈이다. 나는 남가일몽을 고교 국어책에 실린 정비석 선생의 ‘산정무한’에서 만났다. 금강산을 두루 유람하고 소감을 글로 남긴 것이 ‘산정무한’이다. 글 끄트머리에서 선생은 쓴다. “천년 사직이 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던가.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 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愁愁)롭다.” 경순왕 김부(金傅)가 935년 나라를 들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바치고자 할 때 태자가 결연히 반대하지만, 김부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 이에 태자가 베옷(마의)을 걸치고 금강산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신라의 천년 사직도, 태자가 세상을 버린 뒤 흘러간 천년도 영겁의 세월에 비춰보면 잠시의 일 아니겠는가, 하며 선생은 쓸쓸해한다. 남가일몽과 비슷한 뜻을 가진 고사성어가 있으니 ‘한단지몽(邯鄲之夢)’이다. 인간이 영위하는 지상의 삶이 유한함을 가리키는 고사성어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자명하다. 길지 아니한 덧없는 삶을 살면서도 우리는 진실로 가치 있고 아름다운 대상은 놓쳐버리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들에 몸과 마음을 탕진하고 있음은 아닌지, 돌아보라는 게 아닐까. 선거를 앞두고 내란 잔당의 해괴한 언사와 설익은 칼춤이 난무한다. 작은 권력과 돈푼에 육신과 영혼을 팔아넘기는 내란 잔당들을 본다면 지하의 마의태자는 무슨 말을 남길 것인가.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05-25

인간과 시간

날마다 지구촌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으로 80억 인류는 오늘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인터넷에 차고 넘치는 지식과 정보가 인간을 자유롭게도 하지만, 확증편향으로 왜곡된 인간을 강철 족쇄로 압박하기도 한다. 남는 문제는 우리가 선택하는 정보와 지식이 얼마나 올바르고 유용한지, 확인할 정도의 지적-정신적 수준을 확보하는 작업이다. 지구 생명체 가운데 인간보다 더 많은 지적 호기심을 가진 존재는 없다. 알고 싶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인간은 심해(深海)를 탐사하고, 에베레스트에 오르고, 목숨 걸고 남극과 북극을 탐험했다. 사랑과 명예, 돈과 권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호기심을 충족하겠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걸고 장정에 나선 탐험가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언제부턴가 ‘시간의 화살’이라는 자명해 보이는 이론에 대한 회의(懷疑)가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138억 년 전 이른바 ‘대폭발(빅뱅)’이 일어나 시공간이 생겨났고, 그 결과 우리은하와 태양계도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이론. 그것에 기초하여 시간은 공간과 더불어 과거의 어느 시점에 발생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로 질주한다는 것이 ‘시간의 화살’이다. 지질학자들은 시간의 화살 이론을 입증하는 유력한 근거로 지층(地層)을 거명한다. 오래된 지층이 아래쪽에 자리하고, 시간 연대기 순서로 층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논리 전개다. 실제로 이것은 우리가 맨눈(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이기도 하다. 사정이 이런데도 나는 정반대되는 생각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달리는 게 아니라, 미래에서 출발한 시간이 현재를 거쳐 과거로 향하는 게 아닐까?! 영원히 사라져 버린 과거는 되부를 수 없이 완전 소멸했지만, 현재를 향해 달려오는 미래는 오늘의 우리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이란 시점은 내일이나 모레의 미래를 보고 느낄 수 있는 간이역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시간의 뿌리는 과거의 심연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있으며, 그것이 현재라는 중간 정거장을 통과한다는 게 내 생각의 요지다. 이런 생각에 기초한다면, 시간 기계(타임머신)로 갈 수 있는 곳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일 것이다. 영원히 사멸하여 무화(無化)되어 버린 과거가 아니라, 생성되고 있는 미래만이 우리가 도달할 시간대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대면하는 지나간 역사의 근간도 실상은 미래에 기초한 현재를 만드는 과업이다. 현재의 시공간에서 지나간 시간과 사건과 인과율을 들여다보는 일의 함의(含意)는 오지 않은 미래를 예비하고 기획하는 데 있다. 철면피하고 극악무도한 인간 집단의 무수한 악행을 낱낱이 통찰하고, 그것에 유의함으로써 미래세대의 안녕과 복지를 준비하는 것이 역사다. 1980년 5월 18일 광주가 어언 45년 지나갔다. 지나간 45년은 오늘의 우리뿐 아니라, 다가올 세대까지 구원함으로써 시간의 연속성을 확보한다. 과거와 미래의 교차점인 현재에서 양자를 성찰하고, 건강한 미래로 나아가는 위대한 발걸음의 하나로 5·18 광주항쟁을 예찬(禮讚)한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05-18

시와 정치의 상관성에 대하여

‘논어’를 읽다 보면 수긍하기 어려운 대목이 나온다. ‘정사(政事)’에 관한 ‘위정편(爲政篇)’에서 우리가 만나는 대목의 핵심은 기실 정치 행위가 아니라, 정치를 하려는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다. 공자의 생각은 인륜 도덕과 예의범절, 효도와 학문, 말과 행동, 불의와 대면했을 때 응당 가져야 할 태도 같은 인간의 바른 자세에 집중돼 있다. 그 가운데서 내가 주목하는 대목은 두 번째 장에 나오는 짧은 언명(言明)이다. “'시경(詩經'에 들어있는 시 300편을 한 마디로 개괄하면 생각에 사특(邪慝)함이 없다.” 정치인이 지녀야 할 덕목의 핵심 가운데 하나를 ‘시’로 지적한 것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경이로울 따름이다. 여러분은 시를 암송하거나 시를 읽거나 시를 쓰는 정치인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는가? 견문이 턱없이 부족한 탓일 것이나, 나는 우리나라 정치인 가운데 누군가가 아침저녁으로 시를 읽고 시를 생각하고 시를 논한다는 얘기를 아직 들은 바 없다. 그야말로 역동적으로 변모하는 한국의 정치판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우리 정치인들은 마음 편히 혹은 여유롭게 시와 만나고, 시를 음미하고, 시를 기억할 최소한의 여유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자가 정치와 시를 연계한 데에는 까닭이 있을 터! 그것은 ‘논어’ ‘계씨편(季氏篇)’에서 찾을 수 있다. 진항(陳亢)이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에게 아버지한테 특별히 들은 게 없느냐, 하고 묻자, 백어는 아버지 공자를 인용한다. “시를 공부하지 않으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지식인이 자신의 사유와 인식을 올바르게 전달하고자 한다면 시를 공부해야 한다는 말이다. 공자가 엮은 ‘시경’에 포함된 305편의 시를 공부함은 시를 통째로 기억하여 일상적인 대화 수준으로 만들어야 함을 뜻한다. 자연과 세상, 인륜과 풍속, 지난날과 당대의 세태, 각종 예법을 두루 포괄하고 있는 ‘시경’의 모든 시편을 암송함은 작은 백과사전을 머릿속에 내장하고 있음과 전연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공자의 생각을 단출하게 정리하면, 시로써 흥하고, 예의범절로 서고, 음악으로 완성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예악사상의 첫 번째 단추를 공자는 ‘시’에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공자는 정사의 요체로 시를 그토록 중시한 것일까? 정치인의 첫 번째 소양(素養)은 언어 구사 능력이다. 대중에게 자기의 생각과 의도를 설득력 있게 전달함이 무엇보다 긴요하기 때문이다. 잠시만 생각해 보시라! 고급하고 우아하며 세련된 시편(詩篇)에는 인간의 거칠고 우매한 심성과 진창으로 더럽혀진 영혼을 세탁하는 강력한 세척력이 내장돼 있다. 어느 정치인의 언사가 시어(詩語)에 기초한 아름답고 세련되며 고매한 것으로 점철돼 있다면, 그것을 듣는 시민의 마음은 과연 어떨까. 자명한 결과가 여러분의 눈에 선하지 아니한가! 어느 당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흙탕의 개싸움(泥田鬪狗)’과 일장활극(一場活劇)을 보노라니, 빈곤하다 못해 금수(禽獸)의 수준으로 타락한 그들의 언어로 오염되어 가는 우리 시민들과 어린 세대에게 부끄럽고 참혹한 마음 그지없다! 정치인들이여, 제발 시를 공부하시라!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05-11

봄날저녁의 서정

변덕스럽다고들 하지만, 봄날은 분명 매혹적인 구석이 많다. 큰 일교차로 마음에 드는 옷을 갖춰 입기도 어렵고, 느닷없이 불어닥치는 바람으로 정신 사나운 경우도 왕왕 생긴다. 하지만 얼굴을 스치며 지나가는 산들바람 속에서 한겨울 삭풍(朔風)에 담긴 칼날은 이미 찾을 수 없다. 겨우내 굽었던 등줄기와 목덜미에 자연 힘이 들어가니 걸음걸이 또한 발라진다. 밀린 숙제처럼 텃밭에 심을 모종을 사러 나간다. 청상추, 청양고추, 오이고추, 방울토마토, 가지, 오이, 수박, 참외, 옥수수 어린 모종을 한 바구니 담아와 따사로운 햇살 아래 정성껏 심는다. 작년엔 이상기온 때문에 텃밭 가꾸기에 실패를 보았다. 오직 가지 하나만 늦가을 올 때까지 줄기차게 자라나 작은 즐거움을 선사했을 뿐이다. 앞으로 한 달 지나면 텃밭에서 이것저것 거둘 채소가 마당의 초목을 응시할 것이다. 물론 그런 유쾌함을 맛보려면 부지런히 물을 주고, 불원초(不願草)를 뽑아내고, 벌레를 잡아야 한다. 인간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기에, 정성을 다해야 소량의 수확이나마 기대할 수 있다. 모종을 심고 나서 민들레와 달래, 참죽나물을 건사한다.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이른 저녁을 마치고 들로 나간다. 사납게 짖어대는 개들을 우회하는 산책로를 선택한다.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마구잡이로 울부짖는 개를 보노라면 낙후(落後)하고 시대착오적인 언사를 배설하는 일부 정치인이 떠오른다. 시대를 앞서가지는 못할망정 20세기 개발독재 망령에 사로잡혀 구태(舊態)를 반복하는 정치인들은 우리 역사를 질식시키는 맹독(猛毒)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촌길이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덮여 있기에 예전의 논길이나 밭길을 상상한다면 당혹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 길에도 무릎까지 자라난 지칭개와 황새냉이가 병사처럼 우뚝하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밀과 보리가 길손을 반긴다. 화양(華陽) 들판에는 켄 로치(1936-)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보리 대신 어른 만큼이나 키가 자란 밀이 떼 지어 온몸을 우줄대고 있다. 늦은 시각 귀로(歸路)에 오른 오리나 왜가리가 어두운 대기 속을 홀로 날아가며 우짖는 소리는 적이 쓸쓸하다. 다섯 마리 오리가 대열을 이루고 서로 자리를 바꿔 가며 날아가는 풍경과 사뭇 대조적이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도 무리 지어 살아가는 편이 그나마 덜 외롭고 힘든 것이다. 아차 하는 사이, 고라니 어린 녀석이 내 앞을 지나 밀밭 속으로 뛰어든다. 서녘의 불그스레한 빛이 서서히 잿빛으로 바뀌고, 창공에는 흰색 동체(胴體)의 비행기가 아득한 높이에서 날고 있다.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나서, 혹여 있을 올여름 나의 장도(長途)를 잠시 생각한다. 오고 감은 인생길에서 필연의 과제이되, 거기서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의 색깔과 향기는 또 얼마나 다채롭고 상큼하며 통절(痛切)한 것인가?! 분망했던 일과를 돌이키며 걷노라니 어둑한 골목길 끝에 동그마니 자리한 누옥(陋屋)이 나를 반긴다. 10년도 넘는 세월 한결같이 제 자리를 지키고 서서 오가는 세월과 여여(如如)한 인생을 반추하는 집이라니! 기특하고 고마운 상념이 멀리서 찾아온다. 삶은 위대한 축복이다!

2025-04-27

4월의 바다

어떤 글은 사람의 마음을 푹 찌르고, 어떤 글은 따사로운 웃음이 나게 하며, 또 어떤 글은 침묵을 몰고 오기도 한다. 고3 국어책에서 읽은 나도향의 ‘그믐달’은 처연하되 기억에 오래 남는 산뜻함을 지녔다. 학부 1학년 <교양 국어>에 실린 심훈의 ‘5월의 바다’는 식민지 조선을 살아갔던 젊은 엄마의 처절한 가난과 출구 없는 삶을 그려낸 명문(名文)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독자의 영혼과 심장에 비수를 내리꽂는 글을 쓰고 싶을 터.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경험은 쉽지 않다. 2015년 4월 이맘때 나는 먼 길을 향해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하늘은 푸르렀고, 대지엔 연초록 물결이 넘쳤으며, 거리거리엔 생기가 넘실거리던 시절. 하지만 장정(長程)에 오르는 내 마음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다. 대략 300km에 이르는 멀지 않은 길이지만, 쉬지 않고 달려도 5시간이 소요되는 고된 여정이었다. 초행(初行)이었기로 전남 광양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인근에 자리한 식당에서 대충 점심을 마치고 다시 운전대를 잡는다. 출발 여섯 시간 만에 도착한 그곳은 시퍼런 바닷물이 넘실대는, 거친 파도가 일렁이고, 차가운 바닷바람이 몰아닥치는 진도 팽목항이었다. 그곳에는 수많은 노란 리본이 죽은 원혼들처럼 세찬 바람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며 애처롭게 호곡(號哭)하고 있었다. 매서운 바람 속을 걸어 분향소로 걸음을 옮긴다. 별로 크지 않은 곳이었지만, 300여 영정 사진이 빼곡하게 걸린 공간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영정 사진을 본 적이 없었기로 속은 막막하고 콧날은 시큰해지고, 눈물이 핑돈다. 분향소 안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밖으로 나와 높은 파도 일렁이는 먼바다 응시한다. 그래, 작년 이맘때 여기서 너희들이 죽었구나, 혼자 속삭인다. 17살 고교 2년생 어린 철부지들이 영문도 모른 채 불귀의 객이 되어야 했던, 벌건 대낮의 날벼락 같은 죽음들! 차마 발길이 쉽게 돌려지지 않는다.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하릴없이 승용차로 다가간다. 2014년 4월 말 나는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깊이 머리 숙여 사과했다. 나이만 먹은 놈이 세상을 잘못 만들어 어린 넋들을 스러지게 했다고 눈물로 사과했다. 차마 학생들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끝내 돌아서서 벽을 바라보며 숨죽인 채 눈물을 닦아야 했다.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죄스러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리고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2019년 4월 광주는 추모 물결로 넘쳐났다.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하는 현수막이 초중고교는 물론, 서구청사까지 내걸렸다. 아, 여기는 사람 사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같은 시각 대구 어디에도 광주에서 본 현수막은 눈에 띄지 않았다. 대구 8개 구청과 군청 어디에도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현수막은 걸리지 않았다. 세월호 대참사 11주년을 맞이한 지난 16일 조기(弔旗)를 걸다가 10년 전 진도 팽목항을 다녀온 기억이 떠올랐다. 살았다면 28살 청춘들일 텐데, 하는 헛헛한 생각만 떠돌 뿐.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시정과 국정 책임자를 한시바삐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2025-04-20

군맹무상(群盲撫象)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지난 4월 4일 오전 11시 22분 역사적인 판결이 나왔다. 작년 12월 3일 느닷없는 비상계엄으로 초토화된 한국 사회에 단비가 내렸다. 탐욕과 분노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자의 사악한 행위가 몰고 온 파국적인 상황에 최초의 마침표가 찍힌 것이다. 무려 123일 동안 이어진 극심한 분열과 혼란 양상이 어느 정도 진정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신군부가 저지른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야만적인 살육이 있은 지 45년 만에 불시에 터진 비상계엄 사태는 한국 사회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문자 그대로 그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지경까지 진행되었다. 내란 수괴(首魁)를 하늘처럼 떠받드는 정당 대표와 그 수하 국회의원들의 4개월 동안의 기행(奇行)은 필설로 다하기 어렵다. 나는 이번 사태 진행 과정을 청도 촌구석에서 조용히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사태의 출발점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먼저 생겨난다. 나는 그것을 불교 경전인 ‘열반경’에 나오는 고사성어 ‘군맹무상’에서 찾고자 한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라는 우리 속담으로 잘 알려진 고사성어가 군맹무상이다. 고대 인도의 왕이 맹인(盲人) 다섯 사람을 불러서 코끼리를 만지게 했다고 한다. 코끼리를 처음 접한 그들은 각자 다른 부위를 만지고 나서 왕에게 소감을 말한다. 코끼리 다리를 만진 자는 코끼리가 기둥 같다고 했으며, 귀를 만진 사람은 부채 같다고 했다. 코를 만진 자는 뱀과 같다고 했으며, 등을 만진 사람은 벽 같다고 했고, 꼬리를 만진 사람은 밧줄 같다고 했다. 맹인들의 말은 모두 맞지만 동시에 모두 틀린 것이다. 그들은 일정 부분을 정확히 지적했지만,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를 보지 못한 채 부분에 함몰된 맹인들은 각자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다. 그들 모두는 이른바 ‘확증편향’의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부분적 사실과 전체적인 맥락은 상호 보완적일 때에만 의미를 확보할 수 있다. 요즘처럼 지식과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는 균형 잡힌 시각과 안목을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다. 누구에게나 나름의 편향과 호오(好惡)가 있기 때문이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고, 받는 것도 없이 좋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살아온 내력이나 경험 혹은 지역 관계 속에서 자기의 입장을 확립한 사람은 특정 계층이나 집단에 휩쓸리기 쉽다. 더욱이 개인적인 취향과 믿음, 고집에 가까운 소신을 철석같이 가진 사람은 그야말로 요지부동이다. 정보와 지식의 원천을 특정 유튜브에 두고 있었다는 자의 망상과 궤변, 끝없는 거짓말과 자기변명은 21세기 정보사회의 실체와 한계를 여실히 폭로한다.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했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해 온 자의 말로(末路)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선사한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으로 한국 사회를 진단하고 통치했던 무능한 자와 어리석은 추종자들의 행악질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일이다. 부분과 전체, 사실과 진실, 역사와 미래를 두루 통찰하고, 반성적(反省的)인 자세로 우리 시대와 문제와 과제를 깊이 숙고해야 할 시점이다.

2025-04-13

교양과 권력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보스턴과 뉴욕에서 출간된 ‘웹스터 사전’(1995)에 나오는 교양(culture)의 두 가지 정의(274쪽)는 다음과 같다. “교육을 통해 사회적, 도덕적, 지적인 능력을 발전시키는 행위”가 그 하나이고, “지적이고 미학적인 훈련으로 형성된 고도의 세련과 취향”이 그 둘이다. ‘우리말 큰사전’에 나오는 교양의 정의는, 미안한 말이지만, 너무 터무니없기에 도저히 인용할 수 없다. 첫 번째 정의에 따르면, 교양은 가정과 교육기관이 담당하며, 세 가지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에 주안점이 있다. 사회적 능력은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영위 능력을 가리킨다. 나와 내 아내, 자식들만 소중한 게 아니라, 남과 그 가족 역시 같은 정도의 가치와 의미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을 전제해야 사회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능력은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최소한의 양심과 윤리를 소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와 내 아내와 자식들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동물적’ ‘가축적(家畜的)’ 사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나의 지나친 탐욕과 억제할 길 없는 분노(격노)를 자제하여 타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바탕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지적인 능력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21세기는 지식과 정보가 지구촌 전체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로 자리하고 있는 경이로운 시대다. 사유와 독서, 토론과 글쓰기 같은 작업을 일상적으로 유지해야 과학기술이 제공하는 시대의 변화에 뒤처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의미의 지적인 능력이 교양에 속한다. 두 번째 교양의 정의는 각자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것이기에 논외로 한다. 새삼 내가 교양을 운운하는 데에는 분명 까닭이 있을 터다. 지난 4일 오전 11시 22분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인 전원일치로 현직 대통령을 파면했다. 이로써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파면 이후 8년 만에 다시 한국 대통령이 파면되는 우울하고 참담한 헌정사 기록이 남게 되었다. 더욱이 수인번호 503호 박근혜 이전의 이명박은 2018년 각종 비리로 투옥되어 수인번호 716호를 부여받고 감방살이를 하다가 2022년 특사(特赦)로 풀려났다. 이른바 자칭 보수 출신 전직 대통령 2인이 파면당하고, 1인이 징역 17년을 선고받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왜 이들 최고 권력자는 파면과 형사재판 그리고 구속의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일까?! 그들의 공통점은 무교양,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로 무장했다는 사실이다. 권력의 사유화를 통해 물적인 이권을 취하고(이명박), 세월호 대참사로 고교생 딸 유민을 잃어버린 아버지 김영오씨의 대면 요청을 차벽(車壁)으로 막아버리는 냉혹함을 과시하고(박근혜), 입만 벌리면 구라로 일관하면서 검찰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흔든 파렴치한(破廉恥漢)(윤석열). 저급하고 부도덕하며, 불의하고, 역사의식도, 국민을 최우선으로 받드는 공동체주의도 없는 자들을 수장으로 떠받들어 온 타락한 정치세력의 중핵 역시 똑같은 수준의 인간들이다. 이참에 진짜 사회 대개혁을 실행하여 최소한의 교양을 갖춘 이들만을 정치 지도자로 삼았으면 한다.

2025-04-06

객관과 중립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두어 해 무렵부터 가깝게 지낸 사람이 있다. 전공만 다를 뿐, 같은 대학에서 학생들 가르치며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교수다. 예전에도 인사 정도는 하고 지냈지만, 퇴임을 앞두고 자주 만나서 밥도 먹고,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는 관계로 진척된 것이다. 그러나 삶은 결국 인연생(因緣生) 인연멸(因緣滅)이란 작은 깨달음을 일깨운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12·3 내란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2시간짜리 내란 말입니까?” 하는 카톡이 날아왔다. 그 후에 이어지는 내용이 “가난한 한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면 진보와 작별해야 하고, 부자 감세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며, 계엄은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이의 현실 인식이라고 하기엔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나라 경제는 언제나 보수가 견인했고, 현 정권의 종합부동산세 감세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경제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는 데에는 진보와 보수 가리지 않고 온 국민이 노력해서 이룬 성과다. 연금 생활자인 나의 건강보험료가 1년 만에 50% 넘게 인상된 이유를 정부는 아직도 내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더욱이 12·3 비상계엄 선포는 내남없이 위헌-위법한 범죄행위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왜 그런 비상식적인 내란 행위가 우리 모두의 책임이란 말인가?! 우리 국민 대다수는 범죄와 무관하고, 법 없이도 살아가며, 평화를 사랑하고, 이웃을 존중하며 살고 있다.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국회와 선관위, 민간 유튜브 방송을 무력으로 침탈하는데 찬성하지 않는다. 중대 사태가 터지면 나오는 말이 객관과 중립이다. ‘객관’의 사전적 의미는 “개인의 생각이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거나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판단기준과 호오(好惡), 선악의 기준이 있다. 까닭 없이 미운 놈도 있지만, 이유 없이 고운 사람도 있는 법이다. 주관과 객관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상호 침투하면서 자리를 잡아나가는 것이다. 순수객관이나 완전한 주관은 인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적잖은 사람들, 특히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은 “객관적으로 볼 때”라는 말을 숨 쉬듯 편하게 말한다. 그것은 자기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견해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잔재주에 지나지 않는다. 객관의 탈을 쓴 자들이 주장하는 또 다른 가치는 중립이다. ‘중립’의 의미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간적인 입장을 지키는 것”이다. 중립을 내세우는 자들은 진실과 거짓도, 아름다움과 추악함도, 정의와 불의도 문제 삼지 않는다. 그들의 유일 가치는 가족주의다. 알리기에리 단테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자들에게는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공간이 마련돼 있다고 일갈했다. 사회·정치적 위기 국면에서 객관과 중립을 주장하는 자는 가진 자들 편에서 다수의 판단을 호도한다. 인간 세상에는 중립도 객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역사와 후예에게 당당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물려주려면 중립과 객관의 허울을 던져 버려야 한다.

2025-03-30

나무를 심다가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지난 2월 27일, 찬바람이 감돌던 시기에 겹백도화 어린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 그날은 어디 먼 곳을 떠돌던 어린 영혼 하나가 나를 찾아온 날이기도 하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백도화 심는 일이 기념식수 행사처럼 되고 말았다. 나무를 심으려니 땅속에 큰 돌이 있어 그걸 뽑아내는 데만 1시간이 넘게 소요되었다. 적잖은 고역을 치른 셈이다. 문제는 나무 심기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언제부턴가 마당을 풍성하고 화사하게 가꾸고 깊은 마음이 점차 짙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마음에 드는 꽃과 나무가 있으면 하나둘 공책에 이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묘목 가짓수가 자연스레 늘어나게 되었다. 얼마 전에 헤아려 보니 7종 24주 나무를 심은 것으로 드러났다. 3주 동안 겹백도화, 목수국 12주, 홍화 산사나무, 왕보리수, 블루베리 4주, 꽃사과 3주, 말발도리 2주와 원평소국, 은배초 같은 초본식물을 화분에서 마당으로 옮겨 심은 게다. 여러 종류의 꽃씨를 물에 불려 싹을 틔우려 애쓰고 있기도 하다. 왜 이런 마음이 생겨났을까?! ‘금강경’ 제2 사구게(四句偈)의 ‘응무소주 이생기심’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생각을 이어가노라니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1895∼1970)의 아주 짧은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1953)이 떠오른다. 만화영화로도 만들어져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어낸 소설인데, 마치 실화처럼 오해되기도 한 작품이다. 50대 중반 사내 엘제아르 부피에가 30년 넘는 장구한 세월 나무를 심어 황야를 녹지로 만들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핵심 줄거리다. 1차 세계 대전 직전인 1913년에 시작한 이야기가 제2차 대전이 종결된 1945년 이후까지 이어진다. 왜 그럴까?! 그것은 나무의 생태 때문이다. 나무는 풀과 달리 생장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1년생 풀과 8,000년을 산다는 용혈수(龍血樹·dragon’s blood tree)는 그야말로 비교 불가(不可)다. ‘장자’ ‘내편’ 가운데 ‘소요유’ 한 구절이 절로 떠오른다. “아침 버섯은 그믐과 초하루를 알지 못하고, 쓰르라미와 땅강아지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 이것들은 목숨이 짧은 것들이다.” 목숨이 짧은 것들의 이항 대립에 장자가 제시하는 대상은 ‘대춘(大椿)’이다. 팔천 살을 봄으로 삼고, 팔천 살을 가을로 삼은 나무가 대춘이다. 거목은 예로부터 숭배와 존숭의 대상으로 섬겨진 신물(神物)이기도 하다. 불과 한두 달 전 혹은 한두 해 전의 일이 머나먼 과거처럼 여겨지는 전광석화(電光石火)의 시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대춘’ 같은 나무는 상상하기 어려울 터다. 마을마다 등 굽은 소나무 이야기가 전해지고, 서낭당 곳곳에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오랜 전설을 간직했던 아름다운 시간대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그러하되 지나간 것들은 향수를 불러오는 법!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신비를 10년 넘게 경험하면서 한국 사회를 지탱할 동량지재(棟梁之材)의 부재를 절감한다. 넉넉하고 여유롭게 숨 쉬는 일마저 괴로운 기나긴 내란 정국을 지나가면서 울울창창 호호탕탕 독야청청 우뚝하게 커나가는 거목의 생장을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2025-03-23

공자, 정치의 근본을 말하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청도 인문학’에서 ‘논어’를 읽기 시작한 것도 어느새 10회차 두 달을 넘어선다. 그동안 ‘학이편’과 ‘위정편’을 마치고, 이번 주부터 ‘팔일편’에 접어든다. 복잡다단한 국내외 정세로 인해 공부에 마냥 집중할 수는 없었으나, 나름대로 여러모로 애쓴 점은 확실하다. ‘위정편’을 완독하고 나니 머릿속이 조금은 명쾌해지는 느낌이다. 공자가 정치에서 본질적인 요체를 설파한 ‘위정편’은 21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글 첫머리에 ‘시경(詩經)’을 도입한 것이다. “시경에 들어있는 300편의 시를 한 마디로 개괄하면 생각에 사특(邪慝)함이 없다는 것이다.” 현대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상당한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 혹은 문학과 정치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위정’이라 함은 정치 혹은 정사(政事)를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위정편’에서 정치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보다는 정치의 근간 혹은 근본을 설파한다. 공자가 ‘위정편’에서 강조하는 정치의 핵심은 세 가지다. 그것은 학문과 효, 그리고 군자다. 학문은 네 차례, 효는 다섯 차례, 군자는 세 차례 언급되어 모두 12개의 장이 할애돼 ‘위정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공자는 왜 학문과 효 그리고 군자라는 덕목을 강조한 것일까?! 그것은 유가(儒家)의 핵심인 ‘수기치인(修己治人)’에서 기인한다. 선비가 먼저 제 몸과 마음을 닦아 인간이 된 연후에야 백성을 다스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자신을 닦는 행위의 근저에는 효와 학문이 자리한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충이 아니라, 부모를 향한 효를 강조한 공자의 심사가 실로 아득하다. ‘서경(書經)’을 인용하여 효 역시 정치하는 것이라고 역설한 공자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공자는 효와 형제 우애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다. 먼저 인간이 된 후에야 비로소 정치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나아가 그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지식인의 가장 기초적인 자세를 역설한 것이다. 지식인의 개인 수양에서 앎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공자는 ‘학이사(學而思)’라는 공부법을 가르친다. “책만 읽고 생각하지 않으면 남에게 속기 쉽고, 생각만 하고 책을 읽지 않으면 위태롭다.” 책을 읽되 비판적으로 독서해야 하며, 생각하되 망상(妄想)에 빠지지 말고, 근거를 책에서 찾으라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공자의 공부법이다. 효와 학문에 이어 공자는 ‘군자불기(君子不器)’를 역설한다. 특정한 용도와 크기, 형태, 색깔과 무게를 가진 그릇으로 군자를 규정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공자는 친하게 지내되 무리를 짓지 아니한다는 ‘주이불비(周而不比)’로 군자의 본질 가운데 하나를 설명한다. 이것은 화합하되 같지 아니하다는 ‘화이부동(和而不同)’과 같은 맥락이다. 벌써 100일 넘도록 진행된 내란 사태가 종결되지 않고 있다.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다. 이러매 정치와 정치인의 기초적인 덕목을 새삼 돌이켜보는 것이다. 법 기술자들이 권력을 농단하고, 국민을 우롱하는 역겨운 상황이 조속히 종결되어 화평한 날들이 오기를 간절히 희구한다.

2025-03-16

헛되고 헛되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저녁 산책길에 나섰다가 홀연 찾아든 생각이 있다. ‘전도서’ 1장 2절이다. “헛되고 헛되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사노라면 누구나 몇 번씩 겪는 허망함이 불쑥 고개를 내민 것이다. 허망함의 원인은 개별자에게 고유한 것이어서, 그것을 특정 영역이나 대상으로 한정함은 불가능하다. 하기야 아까 낮에 보았던 싸움 장면도 원인 제공자 가운데 하나일 터다. 어제 내가 정리한 옆집 공터에서 두 마리 고양이와 두 자 남짓한 뱀 사이에 치열한 투쟁이 있었던 게다. 어지러운 낙엽과 작은 나뭇가지들 때문에 뱀의 형상은 잘 보이지 않았으되, 고양이가 보여주는 날카롭고 치명적인 발놀림에서 공격 대상이 뱀이라는 사실은 지극히 자명한 것이었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뱀에게 들이닥친 고양이의 급습은 가공(可恐)할 만한 것이었으리라. 이렇다 할 반격도 하지 못한 채 30여 분만에 뱀은 축 늘어져 버렸다. 뱀의 사체를 장난감처럼 들었다 놨다 하면서 고양이는 전리품을 한껏 자랑하는 눈치였다. 경칩 지난 지 사흘 만에 불귀의 객이 된 뱀에게 불시에 찾아든 사신(死神)을 어찌하겠는가?! 지난주 개강한 대학의 교정은 활기에 넘쳤으나, 반갑게 대면한 교수의 전언(傳言)은 우울했다. 2월 한 달 새에 세 분의 집안 어른을 잃었다는 것이다. 친가와 외가의 두 삼촌과 부친을 연이어 멀리 떠나보냈으니, 그 심사를 어찌 가늠할 수 있겠는가! 20대 청춘들의 활기와 명랑한 태도를 노년과 상가(喪家)의 우울하고 처연한 분위기와 병립시키기 자못 어려웠다. 한쪽에는 생을 구가하는 살아남은 자들이 있고, 맞은 편에는 죽음과 대면하는 자들이 있다. 생과 사의 갈림길은 생각보다 멀지 않다. 행운과 불운, 얻음과 잃음, 건강과 질병, 웃음과 눈물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음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단맛만 추구하는 인간의 심사에는 쓰고 거친 맛은 자리하지 못한다. 단선적이고 단편적인 주관에 저 스스로 갇혀버리는 까닭이다. 생각해보면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우리는 타자들과 맺은 관계와 인연 안에서만 존립 근거를 가질 뿐이다. 이탈리아 양자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가 나가르주나(용수)를 인용한 대목을 보자. “사물은 자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 덕분에, 다른 것의 결과로서, 다른 것과 관련하여, 다른 것의 관점에서 존재한다.”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178쪽) 여기서 용수가 말하는 사물의 범주는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것에 확대 적용할 수 있다. 인간이 애지중지하는 자아와 그를 둘러싼 인간들과 그 관계를 들여다보면 사태의 핵심이 분명해진다. ‘나’를 독자적이며 지극히 가치 있는 유일자(唯一者)로 규정할 방도가 어디 있는가?! 내가 존재하도록 원인을 제공해준 부모와 형제와 아내와 남편과 자식을 잠시 돌이켜 보시라! 허망하고 쓸쓸하며 괴로운 지경에 처해 있다면, 그 배후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 대척적인 존재와 가치를 깊이 묵상했으면 한다. 빛과 그림자, 있음과 없음, 길고 짧음, 선과 악의 상호 보완성에 우리의 사유와 인식이 미친다면, 삶은 그렇게 허망하거나 헛되지 않을 것 같다.

2025-03-09

어느 젊은 여성의 가르침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오랜 세월 내가 해온 일이라고는 책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글 쓰고, 여러 사람과 토론한 것이 전부다. 나의 독서 범위는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 영역까지 다채롭다. 특정 분야에 제한된 독서와 작별한 지 오래다. 그것은 나의 지나친 지적(知的) 욕구에서 비롯되거나, 다치바나 다카시 같은 대단한 독서가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다. 40대 후반에 논어를 읽다가 ‘더 일찍 논어를 읽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한 적이 있다. 만약 30대에 논어를 필두로 한 동양 고전과 만났더라면, 인생 항로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 같다. 하지만 러시아문학과 동서양 희곡 연구를 필생의 과제로 여기고 달려온 인생살이는 그런 가능성을 일축해버렸고,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논어를 만났던 게다. 논어를 여러 차례 숙독하면서 경탄한 대목이 여럿 있지만, 나이 들수록 와닿는 구절 하나가 ‘불치하문(不恥下問)’이다.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걸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모르는 것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공자는 모르는 게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걸 감추려 드는 짓이 부끄러운 노릇임을 강조한다. 지난해 12월 11일 부산에서 열린 탄핵 집회에서 울려 퍼진 젊은 여성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선연하다. 자신을 노래방 도우미라고 소개한 그녀는 휴대전화에 기록해온 내용을 차분하되 열렬하게 읽어내려감으로써 수많은 청중의 박수갈채를 한 몸에 받았다. 그이가 조리 있게 전개한 논지의 핵심은 주변의 소외된 시민들과 정치에 대한 우리의 지속적인 관심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20∼30대 남성들과 70대 이상 노인들이 탄핵 국면에서 어째서 내란 세력에 동조하는지를 물으면서, 그녀는 시민교육과 적절한 공동체의 부재를 원인으로 제시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젊은 남성 세대와 70대 이상 고령층의 동조(同調) 현상이 현저하다. 큰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세대와 조카나 손자의 동조 현상은 매우 이례적(異例的)이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으로 표현되는 대한민국 현실에서 여성 우대정책과 남성의 군 가산점 폐지가 맞물리면서 양성 대결로 번진 기억이 새롭다. 껍데기만 남은 여성가족부의 심란한 현주소와 군 가산점 제도를 부활하려는 일부 정치인들의 시도로 양자의 대립 양상은 날로 심해지고 있다. 이런 문제가 슬기롭게 해결되지 않는다면, 젊은 양성의 공존은 쉽지 않아 보인다. 날이면 날마다 청춘과 그 육신을 찬미하는 우리 사회의 상업적인 풍토 역시 고령층의 소외와 고립을 심화하는 주범 가운데 하나다. 평생교육이라는 국가과제는 뒷전이고, 가진 자들만을 위한 부자 감세와 각종 혜택으로 밀려난 도시빈민과 농어촌 거주 노인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을 문화와 예술 그리고 교육 공동체로 끌어들이려는 의지는 어디서고 찾기 어렵다. 이런 까닭에 그녀는 정치와 소외된 계층을 향한 관심을 아프도록 촉구한 것이다. 그녀의 경이로운 연설을 들으며 깨우치는 바 있었다. 나이 든 내가 생각지 못한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통찰하고, 대안을 제시한 그녀에게 ‘불치하문’의 교훈을 얻은 게다. 고마운 인사 전한다.

2025-02-23

화(禍)와 허물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봄날처럼 화사하고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비친다고 좋아했더니, 어느 사품엔가 구름장이 몰려와 습기를 머금은 무거운 눈발이 거세게 날린다. 지구 곳곳을 급습하는 자연의 엄혹한 섭리에 놀라는 나날이 이어진다. 벌써 두 달이 넘도록 청도 화양읍에는 영상의 아침을 맞은 기억이 내게는 없다. 난잡한 시절과 냉혹한 절후(節候)로 인한 한숨과 스산함이 이어지고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잦은 심부름 다닌 기억이 떠오른다. 추운 날이 이어지는 즈음이면 저녁 찬거리 때문에 한숨 쉬던 어머니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벌써 끼니때가 닥쳤구나. 아침 먹고 돌아서면 점심이고, 점심 먹었나 했더니 저녁이구나.” 이런 말과 함께 얇은 지갑을 살피다가 두부 두 모와 덴뿌라 (어묵) 두 장 사 오너라, 하시곤 했다. 우리 살림은 아버지의 근면한 노동에도 4남매 학비와 생활비로 늘 빠듯하다 못해 곤궁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어린 시절 자주 먹었던 것이 두부와 파, 마늘 그리고 어묵을 진한 고추장에 풀어 끓인 국이었다. 연탄 한 장으로 겨울밤을 나야 했기로 그나마 뱃속을 뜨거운 국물로 채워야 했던 게다. 지나간 그 세월을 반추할라치면 더러 깊은 한숨이 토해진다. 언젠가 ‘가난’을 소재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머니가 “넌 가난이 지겹지도 않은 거냐” 하고 묻길래, 그냥 그래요, 하고 대답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머니는 고개를 살래살래 젓고 있었다. 빈곤과 추위와 무더위의 깊고 어두운 기나긴 질곡(桎梏)을 건너온 시련과 아픔의 시절을 어머니는 끔찍하게 여겼지만, 난 그 시절을 심드렁하게 떠올리곤 한다. 4남매를 키워야 했던 안주인의 쓰라린 심사와 철모르던 소년의 치기 어린 당당함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나는 남루하고 배고팠던 추억을 어디서나 숨긴 적 없고, 그것이 이후의 삶에서 귀중한 자양분이 되었다고 여긴다. 나이 들어서도 물적인 빈곤을 부끄럽게 여긴 적도 별로 없고, 가난으로 생겨난 난감함을 경험한 적도 기억에 별로 없다. 그래선지 물질과 권력과 부를 향한 욕망을 강렬하게 작동시킨 일도 나는 없다. 내게 허여(許與)된 것에 만족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베풀고 살아온 인생살이였다. 요즘 다시 책장을 넘기고 있는 ‘도덕경’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화(禍)는 없고, 얻고자 하는 것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 (46장) ‘도덕경’ 곳곳에서 노자는 만족할 줄 알라고 가르친다. 물질 만능과 승자독식이 지배하는 21세기 20년대 참혹한 한국 사회에서 족함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한다. 각자에게 주어진 만큼의 족함에 만족할 줄 안다면, 우리는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송어 수준의 만족과 고래 수준의 만족이 자연스레 공존하는 그런 사회는 불가능한가?! 만족을 모르는 욕망의 비루한 노예가 초래한 비상계엄과 처참한 궤변, 극우 정치인들의 위헌적인 행악질에 시민들이 경악해야 하는 참람(僭濫)한 시절이다. 소박하지만 남 탓하지 않는 맑고 깨끗한 족함을 아는 사람들이 ‘기적의 나라’ 대한민국에 날로 많아지면 정말 좋겠다.

2025-02-16

그래도 봄은 오리라!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며칠째 입춘 한파가 사납게 몰아치고 있다. 마당에서 장작을 패다가 세차게 몰아닥치는 바람 등쌀에 몸을 움츠리게 된다. 이 많은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 것일까, 생각한다. 크고 작은 낙엽과 비닐 쪼가리, 몸통 잃은 감꼭지까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동쪽과 서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무리가 힘에 겨운 듯 구슬픈 울음소리를 터트리곤 한다.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가장 추운 시기를 설 이후라 여겼다. ‘논어’에서는 이것을 ‘세한(歲寒)’이라 기록한다. “한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겠노라. (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1840년 안동 김씨의 득세로 졸지에 제주 대정으로 유배 가야 했던 추사 김정희는 이 구절에 착안하여 1844년 ‘세한도’를 그려 이상적(李尙迪)에게 선물한다. 풍양조씨가 조정을 주물렀을 때 추사는 이조판서로 재직하여 문전성시를 경험한다. 하되 세상인심은 아침저녁으로 달라지는 법. 대정에서 위리안치(圍籬安置) 귀양살이로 고초를 겪자 그를 찾아오는 개미 한 마리 없었다. 그러던 차 중인(中人) 출신 역관이자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이 책을 바리바리 챙겨 천릿길을 달려오자 그에 감읍한 추사가 완성한 명화가 ‘세한도’다. 입춘 한파를 겪으면서 날짜를 헤아리니 1월 29일 설 지난 지 어언 열이틀 지났다. 그래서 세한 추위라 말한다 해도 그다지 그르지 않을 성싶다. 이번 추위가 닥치기 전에 썩어 내려앉은 마루를 수리하고, 너덜너덜해진 담장을 고치고, 지저분한 뒷마당을 산뜻하게 단장했다. 설맞이 행사로 생각하여 지출과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말끔한 2월과 만난 것이다. 어느 틈엔가 히아신스 초록초록한 새싹이 고개 내밀고 있기로 적잖게 놀랐다. 아니, 이런 무지막지한 날씨에 봄맞이를 이렇게 서두르다니, 한탄이 절로 나온다. 히아신스를 사진에 담고, 작년에 잘라낸 잔디로 녀석을 덮어주었다. 그런 와중에도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앞에 자리한 홍매(紅梅)에는 어느새 몇몇 꽃망울이 하늘을 향해 몸을 열었다고 한다. 지난 12월 3일 이후 지금까지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다. 청통 와촌에 사는 선배 교수가 집안일을 도와달라 청했기로 유쾌한 노동과 흐뭇한 점심 밥상 앞에서도 그리 유쾌하지 않다. 가슴 깊은 곳에 무엇인가 묵직하고 답답하게 터를 잡고 앉아서 24시간 내내 찍어 누르는 기분이다. 그런 연유로 누구와 만나더라도 흔쾌하거나 상큼하지 않고 뭔가 엉키는 것이다. 인간 내면에 견고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탐욕과 어리석음, 비루함과 난잡함, 끈적거림과 추잡함 같은 것이 우리 국민을 공격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무엇이 저 인간을 저토록 추악한 타락과 방종의 나락으로 인도하고 있을까, 생각한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고 들은 그 날밤의 날벼락 같은 ‘비상계엄’과 ‘포고령’을 낱낱이 기억한다. 얼마나 많은 시민이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매서운 추위와 칼바람과 눈더미를 견디며 탄핵과 구속을 외쳤는가?! 그자는 재판정에서 치사하고 비루한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구명도생을 꿈꾸지만, 우리는 화사하고 아름다운 봄을 기다리고 있다. 봄은 끝내 오고야 말리라!

2025-02-09

역사교육 어쩔 것인가?!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년 1월이 휙 하는 소리 내며 지나간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닐진대 서둘러 사라지는 시간을 생각하노라면 인생살이가 매우 덧없어 보인다. 영생불사하는 존재도 아닌 인간군상이 만들어내는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의 근저에 자리하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독성을 새삼 반추한다. 비상계엄으로 초래된 내란 사태가 어언 두 달을 넘어가고 있다. 지난 두 달 동안 거의 모든 것에 손과 마음을 놓고 사태 추이를 따라가는 자신을 보면서 무력감과 안타까움을 느끼곤 한다. 나의 빈약한 상상력을 총동원해도 계엄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식민지의 빈곤과 무지의 상황을 이겨내고 경제 번영과 민주 제도를 안착시킨 최초의 나라. 문학과 예술로 세계를 경탄하게 하는 문화강국 대한민국에서 비상계엄이라니?!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은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했을까. 민주주의는 싫든 좋든 다수결이 지배하는 정치구조에 기초한다. 문제가 생겨나면 총칼이나 공권력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해결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렇기에 최고 행정 권력을 틀어쥔 자가 그릇된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국회를 무력화하려 했다는 사실은 묵과할 수 없는 범죄 행위다. 사태가 진행되는 가운데 서부지법에 대통령을 지지하는 폭도들이 난입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국민 저항권’이란 미명으로 저질러진 폭도들의 만행은 평균적인 한국인의 의식 수준을 한참 뛰어넘는 것이었다. 피비린내 진동했던 1980년 5월 광주에서 전두환의 계엄군에 목숨 걸고 저항했던 광주 시민들은 단 하나의 방화나 난동도 저지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서부지법에 난입한 다수의 폭도가 2∼30대 ‘루저’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사실보다 더 주목할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포기하다시피 한 역사교육이다. 수학능력 시험이 끝나면 수험생 전원이 까마득한 망각의 강으로 내팽개치는 역사교육. 공무원 시험을 볼 때나 다시 달달 외우는 역사교육이 문제다. 국가의 역사에는 숨기고 싶은 것과 드러내고 싶은 것이 있기 마련이다. 빛과 그림자처럼, 인간의 장단점처럼, 긍정과 부정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그러하되 우리는 긍정과 자긍심, 자랑과 자부로 넘치는 역사보다 부정과 열패감, 우울과 패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기 마련이다. 치욕적인 임진왜란을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기에 굴욕적인 병자호란을 당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60년 남짓한 시간대에 물질적인 풍요와 제도적 민주화에 성공했지만, 놓치고 빼먹고 눈감아버린 것 또한 부지기수다. 물질 만능과 승자독식, 지역주의와 학벌 중심주의, 이기적인 가족주의가 우리가 전통적으로 고수해온 공동체 의식과 정신의 숨통을 조여온 것이다. 이런 상황의 근저에 자리하는 것이 입시 위주의 역사교육과 불철저한 역사의식이다. 잊어서는 안 되는 패배한 역사, 치욕적인 사건과 인물, 처절한 피의 살육과 정권 장악 같은 역사의 아수라판을 생생하게 교육해야 한다. 그리하여 ‘부패-무능-타락-패거리주의’로 무장한 자들이 다시는 득세하지 못하도록 철제관에 그자들을 묻고 ‘쾅쾅’ 대못질을 해야 할 때다.

2025-02-02

시대의 도끼질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1904년 1월 17일 초연된 안톤 체호프(1860∼1904)의 장막극 ‘벚나무 동산’의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다. ‘86세 먹은 늙고 병든 하인 피르스가 벤치에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다. 마치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멀리서 소리가, 끊어진 현(絃)의 구슬픈 소리가 들린다. 정적이 다가온다. 그리고 동산 먼 곳에서 도끼로 나무 패는 소리만 들려온다.’ 살아있지만, 물화(物化)돼 버린 늙은이는 미동도 없어서 무대는 텅 비어버린 것 같다. 인간이 사라진 무대를 채우는 것은 소리뿐이다. 현악기의 줄이 끊어진 듯한 소리를 뒤이어 정적이 찾아들고, 정적을 이어서 나무를 베어내는 도끼질 소리가 들린다. 무대는 점차 어두워지고, 서서히 막이 내린다. 극작가 체호프의 최후 대작 ‘벚나무 동산’은 그렇게 끝난다. 백과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거대한 벚나무 동산을 장사꾼 로파힌에게 팔아넘긴 귀족 여성 류보피 안드레예브나는 도망치듯 파리로 떠난다.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지만, 그녀에게는 동산을 지킬 능력도 그럴 의지도 없다. 한시바삐 이곳을 떠나 애인이 기다리는 파리로 가려는 마음뿐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충성스러운 하인 피르스마저 잊어버린 것이다. 그녀가 자랑스러워했던 벚나무 동산은 다차로 만들어질 것이어서 속물적인 로파힌은 서둘러서 벚나무를 베어내고자 한다. 여기서 도끼질 소리는 귀족이 대표하는 토지 자본이 상인이 대표하는 상업자본으로 이동하는 상징적 기호다. 19세기 러시아 귀족 사회가 몰락하고, 신흥 부르주아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는 의미도 도끼질 소리에 담겨 있다. 시대와 체제의 변화 양상을 체호프는 소리 하나로 단출하게 표현하는 놀라운 능력의 극작가다. 이 장면에서 연구자들은 부조리극의 단서를 찾아낸다. 인간과 인간의 언어가 소멸하고, 오직 사물의 소리가 지배하는 공간. 인간의 갈등과 대립이 완전히 사라짐으로써 무대의 본질이 소멸한 그곳에 도끼질 소리만 들리는 부조리한 상황을 포착한 것이다. 그렇게 하나의 시대는 생명을 다하고, 전혀 이질적인 시대가 다가온다. 해마다 겨울이면 나는 장작을 만들 요량으로 도끼질을 한다. 3∼40분 도끼질을 하노라면 온몸이 땀에 젖는다. 물성(物性)이 다른 까닭에 숱한 도끼질에도 끝까지 저항하는 끈질긴 나무도 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우리 속담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임을 확인한다. 공든 탑도 때로 무너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의 집념으로 묵직한 쇠도끼로 질긴 등걸을 내리친다. 어떤 나무는 끝까지 버티며 자신의 모양새를 끝내 유지한다. 이런 때에는 도끼질을 멈추고 나무에 축하 인사를 건넨다. ‘그래, 네가 이겼구나.’ 50일 가까이 진행되는 내란 사태를 보면서 민주주의의 도끼질이 어설픈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총력을 다해 저항하는 내란 수괴와 졸개들의 저급하고 추악한 행악질에 우리가 너무 관대한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악의 본산과 잔당은 뿌리까지 뽑아 척결해야 하는데, 우리 도끼날이 무딘 것은 아닌지 성찰하는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다. 맵고도 통렬한 도끼질을 염원한다.

2025-01-19

대중과 지식인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 19세기 후반 유럽에는 이른바 ‘프티부르주아’가 대대적으로 늘어난다. 그들은 지적(知的)으로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신문과 잡지를 읽을 줄 알고, 일부는 부유층으로 편입된다. 그들은 문화-예술적으로 고도한 수준의 귀족이 향유(享有)한 것들을 싸구려로 변용한 키치(Kitsch) 문화가 20세기 초에 널리 유행하는데 앞장선 계층이기도 하다. 어느 날 갑자기 호텔, 미술관, 박물관, 카페, 극장 등지를 점령한 일군의 프티부르주아를 가리켜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대중(mass)이라 명명한다. 스페인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그는 1929년 출간한 ‘대중의 반역’에서 대중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는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철부지이자 의무는 팽개치고 권리만 주장하는 응석받이로 대중을 규정한다. 대중과 대척적인 위치에 자리하는 지식인을 그는 상층권위나 세습 귀족이라 부른다. 20세기 이전에 그들은 사회와 국가를 주도했지만, 20세기 20년대 이후 대중은 그들의 지도와 편달을 거부하기 시작했다고 그는 진단한다. 그리하여 대중은 지식인에게 반기를 들면서 반역을 시도하고 있으며, 상층권위를 소유한 지식인들은 대중에게서 탈주(脫走)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대중의 폭주로 인해 사회와 국가 혹은 대륙 전체가 동요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는 항상적(恒常的)인 국민투표’라는 아나톨 프랑스의 지적처럼 다수를 차지하는 대중의 반역이 역사와 문화의 광범위한 후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이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지적이다. 그는 이런 논의를 유럽 연합 출범의 당위성과 필연성으로 귀결한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펼쳐지는 고통스러운 내란 상황을 보면서 지식인과 대중 사이의 되먹임 구조가 아프게 다가온다. 일부 극우 유튜버와 그들을 지지하고 옹위하는 소위 ‘보수’를 자처하는 대중 사이의 관계가 상호 의존적인 공생과 먹이 사슬 구조를 구현한다. 제한적이지만 지식과 정보를 소유한 유튜버들은 왜곡된 정보를 생산하고, 무비판적인 대중은 그것을 유통하고 소비한다. 그리고 유튜버들은 그 대가로 소위 유명세와 경제적 반대급부를 보장받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 멈추지 않는다. 그들과 결탁하거나 의지하는 일부 국회의원들은 앞장서서 극우의 정치-경제적 터전을 마련해주고 그 대가로 정치적 입지를 보장받으려 한다. 그리하여 정보와 지식 면에서 취약한 70대 이상 노인 계층과 정치적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일부 청년세대가 그들의 적극적인 포섭대상으로 노출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엊그제 국회에 등장한 ‘백골단’은 이런 양태가 가장 조악하고 사악하며 야만적으로 구현된 형식이다. 1980년 5월 광주 학살로 등장한 전두환 학살 군부의 극악한 조력자로 노동자와 대학생, 시민을 폭력적으로 제압하고 고문한 자들이 백골단 소속 사복(私服)이었다. 민주주의를 압살함으로써 우리의 정치와 역사를 왜곡하고 타락시킨 백골단이 2025년에 다시 나타나다니?! 돈과 권력이 보장된다면, 조국과 민족과 역사는 언제든 팔아먹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대중에게 빌붙는 지식인들은 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살 자격이 전혀 없음을 꼭 명심했으면 한다.

2025-01-12

말 말 말

▲ 김규종경북대 교수·인문대학 답답하고 혼란한 정국이 연말을 지나 새해까지 이어지고 있다. 분노와 탐욕에서 시작된 권력자의 독단이 온 나라를 통분(痛忿)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울려 퍼지는 탄식과 한숨의 물결이 끊이지 않는다. 엄동설한에 거리로 나서야 하는 이 나라 민초(民草)들의 꽉 막힌 가슴을 어떻게 풀어줄 수 있을지 숙고해봐도 뾰족한 수가 없다. 요즘 새삼스레 한나 아렌트(H. Arendt)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유대인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여성 철학자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서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주창한다. 숱한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아돌프 아이히만은 악마가 아니라, 자상한 가장이자 성실한 공무원이었다는 것이다. 사악한 인간이 평범한 얼굴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쓸쓸한 괴담(怪談).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가 주장한 핵심은 생각하지 못하는 인간이 불러일으키는 파괴적이고 궤멸적인 결과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서명 하나가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음으로 인도하는지 전혀 사유하지 않았다. 그는 국가가 시키는 대로,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공무원으로서 자신의 직분을 다했을 따름이라고 겸손하게 강변했다. 생각은 말을 낳고, 말은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아렌트는 설파한다. 온전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은 올바르게 행동하지 못한다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깊은 사유와 숙고 없이 내던져지는 언어는 저급한 수준의 행동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말과 행동은 그 인간의 사유와 인식 수준의 명징한 지표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행동의 일치를 보이는 사람들은 고도의 인식과 사유의 소유자라는 공통분모를 가진다.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터져 나오는 말은 그 사람의 일상적인 생각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아무 근거 없이 발화되는 언어는 없으며,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순간에 드러나는 인간의 행동은 그가 가진 사유와 인식의 모든 것을 가감 없이 재연(再演)한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평소 의식하지 않고 뇌까리는 말은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우리의 정신세계를 담고 있다. 언론을 통해 날마다 까발려지는 권력자와 그 부역자들의 언어를 들으며 떠올리는 것은 그들의 빈곤하고 구차한 사유와 인식의 수준이다. 이순(耳順)을 넘긴 자들의 언어가 저토록 천박하고 어처구니없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호모사피엔스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인간은 육체적으로 보면 맹금류는 물론 어류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면이 많지만, 지적이고 정신적인 면에서는 최상위에 자리한다. 그래서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심화-확장하는 방편 가운데 하나가 독서와 사색이다. 이런 작업에 기초하여 인간은 사회의 지도적인 지위에 오르게 된다. 시중에 떠도는 말과 말에서 들어보거나 생각해볼 만한 문장 하나 만나기 어려운 현실에 아연실색한다. 아, 저런 자들이 나와 내 어린 것들의 ‘지금과 여기’는 물론 앞날까지 감당했구나, 하는 깊은 절망과 쓰라린 자책이 나의 가슴을 통렬하게 후벼파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2025-01-05

계엄군

▲ 김규종경북대 교수·인문대학 12월 3일 비상계엄 당시 국회에 진입한 707특임대 소속 사병들이 뇌리(腦裏)에 오래도록 남아있다. 707특임대는 대한민국 최정예 특수부대로 대테러 작전, 인질 구출, 특수작전처럼 국가적으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주요한 임무다. 707특임대는 테러 위협에서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는 최후의 방패로 불리며, 뛰어난 전투 능력과 고도의 훈련을 자랑한다. 그런데 707특임대 사병들이 12월 3일 밤에 보여준 모습은 아주 특이한 것이었다. 국회 유리창을 느릿느릿한 속도로 힘겹게 부수는 장면, 화분을 조심스럽게 옮기고 난 다음에 국회 사무실 유리창을 넘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소화기를 뿌리며 저항하는 국회의원 보좌관에게 대단히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장면 또한 신선하게 다가왔다.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전혀 서둘지 않고, 뒤로 물러나면서 폭력행사 자체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경이로운 것이었다. 소화기를 핑계 삼아 이리저리 서성이는 장면에서 나는 707특임대 사병들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우리 부대는 잘못된 시각에 잘못된 장소에 투입되어 잘못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러니 태업(怠業)해야 한다.’ 나처럼 나이 먹은 세대에게 ‘계엄군’은 곧바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무한폭력을 행사하여 학살 만행을 자행한 잔인무도(殘忍無道)한 사병과 장교들을 의미한다. 한강이 ‘소년이 온다’에서 그려낸 것처럼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어린 학생들을 죽여버리는 잔혹성이 그 당시 비상계엄을 겪은 2-30대 청춘들에게 각인된 계엄군의 모습이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을 빌미로 이승만은 첫 번째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곧바로 11월에 제주 4·3사건을 빌미로 2차 비상계엄을 발동한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비상계엄을 발판으로 ‘보도연맹’ 사건을 일으켜 2∼30만에 이르는 국민을 처참하게 학살(虐殺)한다. 학살극에 동원된 경찰과 군인들이 훗날 장교로 베트남에 파병되었다가 광주로 투입된 것이다. 한국 사회의 피비린내 진동하는 폭력의 변주(變奏)는 이승만에서 시작되어 박정희를 거쳐 전두환에게 이어진 것이다. 문화와 예술, 여성의 시대인 21세기 대명천지 문화강국 대한민국에 참담한 비상계엄이 발동되었다. 그런데 이번 12월 3일 비상계엄에 동원된 계엄군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과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상부 지시대로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살해했던 광기(狂氣)의 계엄군이 완벽하게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21세기 계엄군이 출현한 것이다. 그들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교양인이자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을 받고 자란 신세대 사병이었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이미 가슴으로 알고 있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후배 민주 시민이었다. 한강은 “과거가 현재를,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 나는 신세대 계엄군을 보면서 죽은 자는 산자를 구했고, 과거는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구원했다고 생각한다. 젊은 계엄군들의 놀라운 자제력과 정확한 판단 능력, 뛰어난 도덕성에 큰 박수를 보낸다.

2024-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