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싶을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이르는 장쾌(壯快)한 여정(旅程).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복안으로 1891년 착공되어 1901년 1차 완성을 본 시베리아 횡단열차. 1905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제정(帝政) 러시아는 만주를 통과하지 않고 러시아 영내(領內)만 지나가는 제2의 횡단열차 공사에 착수한다. 1916년 마침내 9천288km에 달하는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토크 전 구간의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완공되기에 이른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두 개의 러시아어가 합성돼서 만들어진 말이다. `블라디치`는 `지배하다`라는 동사고, `보스토크`는 동쪽을 의미하는 명사다. 따라서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東方)을 지배하다`는 뜻을 가진 다소 섬뜩한 도시다. 유럽 열강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병탄(倂呑)하려는 제국주의 정책을 앞 다투어 실행하던 각축(角逐)의 19세기. 일본과 도이칠란트, 이탈리아 등과 후발주자로 제국주의를 도입한 러시아의 의지가 한껏 담겨진 도시 블라디보스토크.
제정 러시아의 동방정책 전진기지이자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발역(始發驛) 블라디보스토크. 지난 2일 블라디보스토크의 바람은 매서웠다. 산뜻하게 단장된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을 벗어난 택시가 안내하는 시내의 전경은 상상 이상으로 정갈했다. 미국과 유럽연합의 공세에 반 토막 난 루블화와 전년 대비 3분의 1로 하락한 석유 가격에도 불구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활기가 넘쳐났다.
마중 나온 듯 불어대는 칼바람을 뚫고 블라디보스토크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독수리 전망대`에는 러시아어의 창제자 동상이 있었다. 키릴과 메포지 신부(神父) 두 사람의 동상! 서기 988년 무렵 그리스어 소문자를 가지고 키릴문자를 만든 두 사람의 신부가 시퍼런 태평양과 부서지는 파도와 눈부신 햇살을 마주하며 서 있는 정경이라니! 모스크바에서 거의 1만km나 떨어진 이 도시의 고대(高臺)에서 자랑스레 하계(下界)를 굽어보는 장면은 엇박자이되 성스러웠다.
하기야 러시아는 자원의 나라이자 문화대국 아닌가. 해마다 6월 6일이 되면 9시간 시차를 가진 나라 전역에서 개최되는 푸쉬킨 축제가 있는 러시아! 오페라와 발레, 연극을 상연하는 극장마다 10대부터 80대까지 객석을 메우는 공연문화의 나라 러시아!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에는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노인들까지 시집을 읽는 나라가 러시아였다. 그 나라의 동방을 대표하는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 러시아어의 창시자 동상이 서 있는 것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일지도 모른다.
1860년 러시아의 군사 전초기지로 삶을 시작한 블라디보스토크에 생명을 한껏 불어넣은 것이 시베리아 횡단열차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하여 하바로프스크와 치타, 그리고 울란우데를 거쳐 이르쿠츠크까지 3박4일 여정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기로 한다. 러시아 동방의 거점도시를 살피고, 횡단열차를 경험하고 시베리아의 진주(珍珠)라 불리는 이르쿠츠크를 방문하는 일정이다. 일정의 끝에는 물의 왕국(王國) 바이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토크를 개척하기 전에 이미 조선인들은 그곳에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가렴주구(苛斂誅求)의 학정(虐政)을 피해 신세계로 이주한 선각자들의 신산했을 삶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조국을 등지고 정착한 동토(凍土)의 땅에서 그들이 마주했을 엄동설한의 냉기와 이역(異域)의 풍광은 어떤 것이었을까?! 고대사에 따르면 고구려와 멀지 않고, 발해의 강역(疆域)이었을 블라디보스토크.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이 고토(故土)라 여기는 지역이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토크다.
이틀을 보낸 블라디보스토크의 인상은 강렬하게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여유 있고 기품 있는 시민들의 자세와 걸음걸이는 21세기 강국으로 비상하는 러시아의 기상과 상통해 보였다. 국립 블라디보스토크 경제 경영대학 학생들의 잰걸음과 활달함은 유쾌한 것이었다. 장춘과 길림 등지에서 러시아어를 배우러 온 중국 학생들의 열기 또한 즐거웠다. 한류와 한국어만이 아니라 동북아의 거인 러시아와 러시아어 그리고 러시아 문화와 경제, 예술을 익히는 청춘들의 자태는 흐뭇한 것이었다. 국적과 무관하게!
짧은 블라디보스토크 여정을 마치고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르면서 나의 흉중(胸中)은 자못 복잡해진다. 어떤 여정과 풍광이 나를 맞이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