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거기서 화장품 가게를 한다. 그러니 일을 끝내고 충분히 우리 둘만의 시간을 가지려면 적어도 밤 열시는 넘어야 한다. 친구는 가게 문을 닫고는 늘 내게 전화를 했다. “내일 올래? 그럼 모레는 올 수 있어?”
그녀의 간청에 어렵사리 남편에게서 1박2일의 휴가를 얻었다. 몸이 멀면 마음도 멀어질까봐 십 수 년이나 되는 지나간 세월을 곱씹으며 그녀에게 가려고 집을 나선다. 서둘러 나왔는데도 간발의 차로 4시33분 기차를 놓쳤다. 다음 기차는 밤 8시33분에 있다. 4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집에 가서 쉬었다 나와도 시간은 충분하다. 하지만 가슴 조이면서 나온 외출인지라 괜히 들어갔다가 발목이라도 잡히면 어쩌나 싶어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간 보내기에는 그곳만큼 좋은 곳이 없다. 도립도서관 간행물 열람실 문을 밀었다. 형광등 불빛이 하얗게 쏟아져 내린다. 딱히 할일 없어 얼쩡거리고 있는 내 속을 들킬세라 에세이집도 들춰보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잡지도 뒤적인다. 벽시계의 분침은 멈춘 듯하다. 시간이 이렇게 더디 갈 수도 있는 모양이다. 내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가슴이 조여든다. 건성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내 모습을 남들이 눈치 챌까봐 숨죽여 도서관을 빠져나온다. 땅거미가 스멀스멀 밀려들고 있다. 시내 2번도로로 발길을 옮긴다. 꼭 봐야할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또박또박 걷는다.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지만 시간은 짙어가는 어둠에 눌린 듯하다. 자꾸만 진이 빠진다.
오래전 이 거리에 우리들의 아지트였던 로즈라는 레스토랑이 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뭉크라는 현란한 간판이 붙어있다. 그래도 나는 로즈에 잠긴다. 발끝만 내디뎌도 쿵덕쿵덕 소리를 내는 컴컴한 나무계단을 몇 굽이 올라가야 로즈가 나왔다. 요즈음의 매끄러운 자동문과는 사뭇 달랐다. 뻑뻑하고 무거운 통나무 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거기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감미로운 음률이 흔들리는 조명아래 가득히 흘렀다. 성적인 매력이 온몸을 감고 도는 `Love Me Tender` 이나 `Let Me` 의 비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포퓰러 뮤직이라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열정을 다 쏟아서 좋아했던 시절이었다. 잡다한 추억에서 벗어난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치고 배도 고프다. 자꾸만 쓸쓸해진다. 로즈의 추억도 잠시 나는 어둑한 거리에서 자꾸만 우울하다. 갑자기 흙먼지를 흠뻑 실은 바람이 등을 떠민다. 지루한 시간 줄이기를 끝내고 기차역을 향해 뛴다.
대합실 안에는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으슥한 구석 의자에 앉아서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본다. 거세진 바람이 굵은 비를 몰고 오더니 갑자기 장대비로 변했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노루 몰이꾼에게 쫒기 듯 뛰고 있다. 우산을 준비해 왔다는 사실에 살짝 쾌감을 느낀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나는 얼마나 얄팍한가. 친구와 나는 오늘처럼 을씨년스러운 날에는 금오시장 골목에 있는 포장마차에 가곤했다. 회포를 담아 기울이는 술잔들이 분주한 곳. 안주 감으로는 산낙지가 제일이었다. 말짱한 정신으로는 먹기가 징그러워서 쓴 소주 한잔을 꼴깍 마셨다. 목젖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맛. 점점 초점이 흔들릴 쯤 안주감에 젓가락이 갔다. 온 몸이 토막 난 채로 있는 힘을 다해 꿈틀대는 산낙지를 굵은 소금장에 꾹 찍었다. 자잘하게 잘린 낙지는 미꾸라지에 소금 뿌려 놓은 것처럼 몸부림쳤다. 엉겨 붙은 살점을 떼어내어 간신히 입에 넣었다. 입천장에 달라붙은 살점들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 나도 뒤질세라 혼신을 다해 혀를 굴렸다. 목구멍으로 넘어가기까지 낙지와 나의 싸움. 오늘도 역시 나의 승리로 끝났다. 그 맛에 포장마차를 찾았던 것 같다.
머무르고 싶은 세월의 끈을 놓고 주위를 둘러본다. 북적대던 대합실의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정지되었던 시간은 껑충 두 세 시간을 뛰어 넘었다. 영주 행 기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안내방송에 가슴은 겉잡을 수없이 두근거린다. 어느새 비는 가랑비로 잦아들어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사위는 온통 뿌연 안개, 플랫폼 건너 가로등 밑에서 친구가 살포시 웃음 짓고 서 있다. 우산 펴들 겨를도 없이 빗속을 뛴다. 어둑했던 마음이 차가운 빗물에 말끔히 씻겨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