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잊혀져선 안될 4·19

등록일 2015-04-23 02:01 게재일 2015-04-23 18면
스크랩버튼
▲ 서의호 포스텍 교수·산업경영공학과

“3·15 부정선거 다시 하라! 일인 독재 물러가라! 이 대통령은 하야하라!“

젊은 사람들을 비롯하여 많은 국민들에게 4·19가 잊혀져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4·19는 잊어서도 잊혀져서도 안될 역사적인 사건이다.

4·19혁명의 최초의 도화선은 1960년 2월 28일 대구경북지역, 즉 대구로 알려져 있다. 야당탄압의 일환으로, 민주당 대구 유세일인 28일은 일요일이었는데 대구시내 모든 초중고 학생은 당국의 지시로 등교를 강요당했고 야당의 선거유세장에 학생들이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대구지역 고교생들은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시위를 벌였고 학생시위는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3월 15일 선거 당일에는 경남 마산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고, 자유당의 부정선거를 목격한 시민들도 선거포기선언을 한 민주당 당사 주변에 모여 “협잡선거 물리치자”고 외치면서 학생 시위에 합류하였다. 경찰과 자유당 정치폭력배들의 무자비한 제지로 많은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하였으며, 이러한 분위기 속에 4월 11일, 행방불명 됐던 고교생 김주열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신으로 바다에서 발견되자, 전국의 학생들과 국민들의 흥분은 고조되기 시작했다.

4·19의 커다란 의의는 한국 국민의 민주의식의 발전을 의미하며 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불가피한 진통이었다. 공권력의 횡포에 대한 민권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리를 그대로 입증한 것이었다.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받지 못하는 정권은 결코 존립할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결정적인 도화선이 된 마산 사건 이후, 4월 18일 고려대학생 수천여 명이 의사당 앞에서 연좌 시위를 한 후 귀교하는 길에 정치폭력배들의 습격을 받아 다수의 학생이 부상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청년학도여! 총궐기하자”라고 외친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4·18시위는 역사적인 4·19 학생들의 총궐기를 이끌어 내었다.

4월 19일 서울 시내 각 대학 학생들이 미리 약속했던 계획에 따라 각 대학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중앙청을 향해 행진하였다. 그 선언문도 4·18 고려대 선언문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학생들은 더이상 현실을 좌시할 수만은 없으며 정의와 민주수호를 위해 궐기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수많은 고등학생들과 일반인들도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는 20세기 후반 전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이른바 학생들의 힘, 즉, `스튜던트 파워(student power)`의 한국적 표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4·19혁명은 그러한 전통적 저항의식이나 애국심의 발로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경찰이 효자동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이승만과의 면담을 원하는 학생들의 요구를 무시한 채 무차별 발포를 하여 사상자가 늘어가자, 시위 군중은 더욱 흥분하여 전쟁터 같은 혼란이 시작되었다. 서울 시내는 완전히 무정부상태였고, 모든 질서는 회복할 수 없는 수라장이 되었다. 이날 서울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에 의해 100여 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서울의 각 대학 교수 수백명이 “대통령 이하 3부요인들은 3·15부정선거와 4·19사태의 책임을 지고 즉시 물러나는 동시에 정부통령선거를 다시 하라”는 내용의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구속학생의 즉시석방을 요구하면서 교수들도 시위에 나섰다. 교수들의 시위는 자유당정권 퇴진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승만은 하야 하고 하와이 망명길에 올랐으며,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다.

4·19혁명의 민주이념은 비록 정권담당세력의 무능과 경제·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으로 미완의 상태로 좌절되고 5·16 혁명을 불러 일으켰지만 독재에 맨 주먹으로 일어선 한국민의 커다란 민주의식의 승리였다. 그 민주의식의 승리는 오늘 한국의 민주와 번영의 뿌리가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서의호칼럼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