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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공포증

등록일 2015-08-28 02:01 게재일 2015-08-2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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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영국 태생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스릴러 장르로 호가 난 사람이다.

`현기증`(1958)이 그의 영화 가운데 하나다.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하는 스코티 형사를 둘러싼 치정(癡情)과 돈을 줄거리로 삼은 멜로 스릴러다. 자신의 키 높이조차 극복하지 못하고 졸도(卒倒)하는 그의 고소공포증(高所恐怖症)은 유별난 데가 있다. 하지만 고소공포증은 꽤 많은 사람들이 겪는 증상(症狀)이다.

나도 높은 곳을 즐기지 못하는 인간이다. 언젠가 영암 월출산에 갔다가 절벽 양쪽을 연결하는 현수교(懸垂橋)를 왕복해야 하는 곤욕(困辱)을 치른 일이 있었다.

강고한 철물 구조물로 이루어진 다리는 탄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바람도 없고, 날씨도 청명했다. 큰맘 먹고 다리를 건너기는 했는데, 정상으로 가려니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급경사를 이룬 철제 계단들이 머리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이었다.

여름날 해가 길다지만 오후 5시를 넘긴 산은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했다. 정상까지 올랐다가 하산하려면 세 시간은 넉넉히 걸릴 듯했다. 이쯤해서 물러서는 것이 상책(上策)이란 판단이 들었다. 문제는 방금 전에 건넜던 철제 구름다리를 다시 건너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상까지 무리해서 갈 것이냐, 아니면 두렵더라도 다리를 다시 건널 것이냐, 양자택일(兩者擇一)의 순간이 다가왔다.

판단은 짧고 신속했다. 목전(目前)에 화사하고 장려(壯麗)하게 펼쳐진 철제 계단들의 아득한 행렬이 훨씬 두려웠기 때문이다. 철제다리 건너 하산하는 마음이 그다지 무겁지 않았음을 기억한다.

하지만 고소공포증에 억눌린 심신과 영혼(靈魂)은 심히 낯 뜨거운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고백하기도 언짢고, 아쉬움을 토로(吐露)하기도 마땅치 않은 상황의 수인(囚人)이 되어버린 느낌은 상당기간 지속되었다.

높은 곳에 오르는 일은 현대생활에서 다반사(茶飯事)다. 고층아파트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든지,

비행기를 탄다든지, 등산하다 낭떠러지를 지나가야 한다든지, 그야말로 숱한 경험이 고소(高所)와 대면하는 일이다. 문제는 고소공포증이 쉽게 극복되는 증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마다 증상도 각양각색이다. 비행기 타는 것은 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13층 이상 아파트 베란다는 끔찍하다.

4-50층 고층 아파트에 아무 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경스러운 까닭은 그래서다. 그 아스라한 높이에서 먹고 마시고 잠자고 대화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인간이 저토록 높은 곳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침팬지와 갈려나온 것이 500만 년 전인데, 인간에게 진화 이전단계의 공통 유전자가 아직도 강력하게 살아남아 있다는 얘긴가?!

베를린 유학시절 30m 높이의 지붕에서 노동(動)하는 시간제 일자리를 구한 적이 있었다.

사흘 만에 그 자리를 그만둔 데에는 십장(什長)과 나의 불화가 결정적이었지만, 고소공포증도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상사혐오증과 고소공포증이 결합하여 시간당 급여(給與)가 비교적 괜찮은 일자리를 포기한 셈이다. 그 덕인지 몰라도 `게오르크 렘케`공장에서 5주 연속으로 중노동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 나쁜 현상만은 아니다. 공포로 인해 우리는 많은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과속하면서, 급경사와 대면하면서, 옆 차와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운전한다.

우리가 독버섯에 중독되지 않고, 과식으로 위장을 혹사(酷使)시키지 않는 것도 공포 때문이다. 적절한 수준의 공포는 인간관계나 사회관계에서 필수적인 덕목이다. 공포가 없다면 약육강식의 세상이 될 것이다.

`현기증`에서 스코티는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고소공포증을 극복한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사랑으로 인해 발생한다. 도저히 고쳐질 것 같지 않던 공포마저 극복하도록 인도하는 사랑의 위대한 힘이라니! 나는 우리 사회의 고관대작들과 정치 권력자와 돈 많은 자들과 문화 권력자들의 공포를 기대한다. 국민과 가난한 자와 문화 수용자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그들이 조속(早速)히 회복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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