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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산을 옮길 것인가?!

등록일 2015-10-02 02:01 게재일 2015-10-0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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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산이 내게로 오지 않으면, 내가 산으로 가겠다!” 무하마드의 명언이다. 깨달은 자 무하마드의 능력을 의심하는 자가 말한다.“저산이 당신에게 온다면 당신을 따르겠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에 무하마드는 그렇게 응수(應手)한다. 산이 움직일 리 만무하다. 하지만 공간이동 측면에서 본다면 산이 이쪽으로 오는 것이나, 내가 산 쪽으로 가는 것이나 큰 차이 없다. 믿음은 신통력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주인공 우공은 문자 그대로 어리석은 인간이다. 미력(微力)한 인간의 힘으로 산의 돌을 깨고 흙을 옮겨 산을 평지로 만들고자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믿은 우공의 자신감은 근거가 있었다. 대대손손 산 옮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땐가 대사를 도모할 수 있으리라는 심산이었다. 결국 상제(上帝)가 손을 들고 산을 옮겨주기에 이르렀다는 이야기가 `열자(列子)` `탕문`에 실려 있다.

무하마드 이야기는 진취적인 적극성을, 우공 이야기는 연면 부절하게 이어지는 끈기와 대물림을 설파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도록 인도하는 동력(動力)은 인식과 사유의 전환에서 출발한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에 도전하려는 의지와 자신감이 동행하면 성사 가능성은 한결 높아진다. 역사는 적잖은 성공사례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문제는 우리 내부에 똬리 틀고 있는 실패에 대한 불안감이다.

추석명절에 큰아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요즘 청춘들의 염량세태(炎凉世態)에 귀를 열게 됐다. 가능하면 안전하고 실패할 확률이 적은 영역에 몰리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한다.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원인 하나가 거기서 발원(發源)한다고 아들은 꼬집는다.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라는 부모의 성화도 성화지만, 젊은이들 스스로도 도전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승(勝)하다는 것이다. 쌍방과실 아닐까, 생각한다.

젊은이들의 오만에 가까운 패기와 거듭되는 실패를 기성세대가 용인하고 격려함은 `청춘은 외상`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물론이려니와 국가의 명운(命運)을 담당하게 될 청춘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음은 기성세대의 의무사항이다. 젊은 거지를 박대(薄待)하지 않는 풍습은 고금동서 마찬가지다. 청춘의 무모한 도전과 끝 모를 좌절(挫折)을 보듬고 전진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나이든 축들의 당연한 의무가 아닐 수 없다.

2015년 추분을 지난 한국의 가을은 음산(陰散)하다. `헬조선`으로 명명되는 이 나라의 현재는 20~30대 청춘의 도살장(屠殺場)이자 지옥(地獄)으로 표현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신분제로 억압된 대다수 청춘들에게 한국은 기회의 땅도 미래의 나라도 아닌 지옥이 돼버렸다. 그런 지옥을 만든 자들은 필자를 포함한 기성세대다. 기성세대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아 넘어간 청춘들은 지옥 타파에 무관심하다.

지옥을 무너뜨리고 천국을 만들려는 의지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만든 것 역시 우리 기성세대다. “가만히 있어라!”하는 말이 절대적인 명제가 되어버린 동토(凍土)의 나라.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행동하지 않는 청춘들의 소굴(巢窟). 남들처럼 숨죽이며 대세에 편승(便乘)하는 허다한 청춘들의 행렬. 그들에게 마취제를 투약하는 보수언론과 정치인들의 넘쳐나는 허언(虛言).

옥황상제가 산을 옮겨주는 시대는 오래전에 지나갔다. 산은 언제나 의연(毅然)하게 그 자리를 지킬 것이며, 결코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 우리가 산으로 가거나, 산을 옮기는 방도(方途)만 남은 셈이다. 이제라도 청춘들에게 적나라한 `헬조선`의 지금과 여기를 까발리고, “가만히 있으면 다 죽는다!”는 진실을 알려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기성세대가 청춘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호의(好意)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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