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3일이 `학생의 날`, 정확히 말하면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학생들 자신이든 기성세대든 마찬가지다. `학생의 날`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에서 촉발된 항일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53년 국회가 국가기념일로 제정했다. 6·25 한국동란의 피어린 상흔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학생의 날`을 제정해 기념했다는 것은 기억할 만한 행적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학생운동과 줄기차게 대면한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를 둘러싼 대립이 본보기다. 1972년 `10월 유신` 직후 학생운동이 격화하자 1973년 대통령령으로 `학생의 날`을 폐지해 버린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이 유화정책으로 `학생의 날`을 부활시킨다. 그 후 1999년 김대중 정권은 성대하게 `학생의 날` 행사를 개최한다. 2006년 노무현 정권은 `학생의 날`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개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국가기념일마저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는 모양새를 보노라면 허망하기 짝이 없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초기에는 항일과 독립운동, 애국정신 같은 의미가 강조됐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학생의 날의 주안점은 1945년 일어난 `신의주학생의거`에서 제기된 반공이었다. 하나의 정권 아래 두 개의 학생의 날이 있었던 셈이다. 폐지되었던 `학생의 날`은 1984년 근근이 부활되었으나 방치된 것과 다름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학생의 날`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바뀌었지만 그 의미를 반추하는 학생이나 교사가 얼마나 있는가?! 오늘날 중고등학생은 대학입시의 노예가 되어 부모의 기대와 과중한 공부에 억눌려 살아간다. `헬조선`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출구인 대학입시에 모든 것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학생들에게 예전의 패기와 공론장의 참여를 촉구하는 일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그들은 취업전선에 발 벗고 나서야 할 지경이기 때문이다.
`스카이`를 졸업해도 취업이 만만치 않다. 다른 대학이나 지방대 출신자의 취업은 총성 없는 전쟁과 다르지않다. 청년실업과 고학력실업은 기실 신자유주의가 잉태한 세계적인 현상이다. 고용 없는 성장이 안개처럼 소리 소문 없이 세계전역을 휘감아버린 것이다. 이런 판국에 청년들에게 `최대강령주의`를 내세워 거대담론 추구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21세기 10년대 중반 세계는 자본의 무차별적인 지배가 일상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어디서고 문제는 돈과 경제로 환원된다. 세상 모든 것이 돈으로 계산되고 지불되는 우울한 현실 앞에서 피 끓는 청년 학도들도 속수무책이다. 에셀이 강조한 문제의식의 공유와 연대 그리고 평화적인 봉기는 우주 어디에서나 가능할 법한 동화처럼 들리는 것이 요즘 현실이다. 그래도 에셀은 문제의식과 연대와 봉기를 큰소리로 외친다. 광야의 고독한 선지자처럼.
세상과 무관하게 오로지 나와 아내와 자식에게 모든 것을 거는 40, 50대 가장의 훈육을 받은 한국 청년들의 상황은 훨씬 좋지 않다. `흙수저` 물고 태어난 청년은 백수 되기 안성맞춤이다. 그러다보니 주위사람들과 지역사회, 국가와 세계의 동향 따위는 아랑곳하기조차 어렵다. 하지만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 매어 못 쓰는 법” 아닌가. 차분히 돌아보고 살피면서 황소걸음으로 당당하고 자신 있게 나아가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학생의 날`에는 학생의 사명과 의의를 생각하는 여유와 배짱을 가졌으면 한다. 어차피 100세 시대 아닌가! 조금 늦거나 빠른 것이 무슨 대수인가! 각자에게 허여된 본분과 소명을 찾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 시급하지 않겠는가?! 무슨 길을 어떻게 갈 것인지, 그것부터 결정하고 움직여도 늦지 않다.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1천300리 유장하게 흘러 난바다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