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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5-11-20 02:01 게재일 2015-11-2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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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오래 전 일이다.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을 본 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이다. `로드무비` 형식으로 엇갈린 사랑 혹은 깨달음을 다룬 영화 `길`. 순진무구한 젤소미나의 사랑과 헌신을 알지 못하고 떠도는 마초적인 잠파노. 바보 천치처럼 잠파노 주변을 서성대면서 결코 그를 떠나지 못하는 젤소미나. 젤소미나가 죽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깨닫는 어리석은 인간 잠파노.

사랑을 잃고 나서야 사랑을 깨닫는다는 평범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 `길`. 여기서 길이 인생행로를 가리킴은 자명(自明)하다. 길든 짧든 인생길에서 우리는 허다한 사람과 만난다. 만남으로 관계가 성립하고, 관계가 사건을 인도(引導)하며, 결국에는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우리 운명은 사람을 만나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에 따라서 인생항로(人生航路)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은 `도(道)`다. 도에는 추상적인 도와 구체적인 도가 있다. 공자가 일갈한 “조문도 석사가의!”에서 도는 추상적인 의미의 도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말한 공자의 배포와 간구(懇求)에 나는 전율한다. 그는 평생 자신의 `도`를 찾아 세상을 떠돌았지만, 갈망한 도를 그가 구했는지 나는 모른다. 도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아서 손으로 움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도`의 절정은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에서 만날 수 있을 터.

공자가 구하고자 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도가 훗날 `동도서기(東道西器)`로 회자된다. 동양의 도와 서양의 그릇을 일컫는 말이다. 영혼과 정신은 동양에 바탕을 두면서, 서양의 선진적인 과학기술을 가져다 쓰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21세기 현대사회에서 동도는 일본을 빼놓으면 거의 맥을 놓고 있는 듯하다. 한국이든 중국이든 이런 형편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지 않은가?! 일상에서도 우리는 동도를 알지 못하고, 불편함 또한 감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길에 이르면 우리는 피부로 그것을 감촉한다. 출근길에서 우리는 차량대열의 홍수와 대면한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는 의지와 욕망이 다른 운전자의 그것들과 충돌한다. 적정선(適正線)에서 욕망이 충돌하고 해소되면 좋으련만 더러 보복운전으로 이어진다. 보복운전에 대한 강력한 법적 제재가 이뤄질 것이라 한다. 사소한 욕망마저 법으로 제약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지경에 이른 우리 염량세태(炎凉世態)가 우울하다.

내가 가고 있는 길과 내가 지나온 길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길과 만난다. 소중하지 않은 길 하나 사람 하나 없다. 각자에게 부여된 길과 인생의 여정(旅程)에서 잠시 스치며 지나가는 인연들의 총체(總體)가 출근길 풍경의 요체(要諦)다. 가능하면 그들의 길과 인생행로를 위협하거나 방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의 속도와 나의 향방이 귀한 만큼 그들의 그것들 역시 존중받아야 마땅하니까 말이다.

논어 `위령공 편`에 “도부동 불상위모(道不同 不相僞謀)”라는 구절이 나온다. “길이 같지 않은 사람과는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유가는 유가와 도가는 도가와 불가는 불가와 묵가(墨家)는 묵가와 법가(法家)는 법가와 함께 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나와 다른 길에 있는 사람을 그대로 두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의 방식과 사유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출근길에 만나는 타인들처럼!

잠파노의 길과 젤소미나의 길은 같은 듯 달랐다. 잠파노는 자신의 생존욕망에 충실한 사내였고, 젤소미나는 잠파노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다. 그들은 함께였지만, 따로 존재했고, 따로 살아가지만 함께한 사람들이다. 젤소미나의 죽음 이후 잠파노가 도달하는 `카르페 디엠`과 `메멘토 모리`가 아프게 다가온다. 하여, 우리 곁을 떠도는 영혼들 역시 인생항로의 동반자라는 사실을 길에서 확인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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