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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향성에 대하여

등록일 2015-12-11 02:01 게재일 2015-12-1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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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페이스북을 접은 지 오래다. 한때는 꽤나 열중했는데, 문득 허망(虛妄)해진 탓이다. 자신의 내면세계와 소회(所懷)를 시시콜콜 털어놓는다는 것은 적잖게 번다한 노릇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에 몰두하는 현상은 현대사회에 만연(漫然)한 인간소외의 물증(物證)이다. 내면토로는 관뒀지만 가끔 페북에 접속하여 훑어본다. 더러 유익한 정보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인간에게 고유한 `편향성`이다.

`편향(偏向)`이라는 것은 특정한 방향으로 치우치는 것을 뜻한다. 고로 `편향성`은 특정한 방향으로 치우치는 성질을 의미한다.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편향성을 가지는 인간은 없다. 모든 것에 열려 있는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성장에 개입하는 시간과 환경적 요인이 편향성을 가지게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 양육되며, 양육기간에 작동하는 시대정신의 요체가 무엇인가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시공간을 배제(排除)한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페북에서 제시(提示)한 편향성 실험은 간단하다. 자전거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자전거가 왼쪽으로 가고,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리면 자전거가 오른쪽으로 가도록 설정한다. 당신은 과연 이 자전거를 탈 수 있겠는가?! 이것이 실험(實驗)의 전부다. 우리에게 익숙한 자전거 타기와 작별하고 새로운 방식의 자전거에 친숙(親熟)해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실험의 고갱이다. 뭐,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실험결과는 우리의 상상을 넘는다. 상당히 긴 시간을 투자하고 넘어지고 자빠져야 비로소 새로운 방식에 적응(適應)할 수 있다. 실험자는 그렇게 자전거를 타다가 어느 날 예전방식의 자전거 타기에 도전(挑戰)한다.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 되풀이 된다. 상당히 긴장된 노력과 시간투자를 하고 난 연후에 예전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어린아이가 어른보다 훨씬 빨리 새로운 방식에 적응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두 가지 결론이 도출(導出) 가능하다. 모든 인간에게는 나름의 편향성이 있다는 것과 어른보다 어린이의 편향성 극복(克服)이 훨씬 쉽다는 것이다. 편향성이 비단 자전거 타는 것에 국한되겠는가?! 보고 생각하고 결정하며 실행하는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편향성의 인도(引導)를 받는다.

어린이의 편향성이 어른보다 우심하지 않음은 그들의 뇌와 육신이 그만큼 유연(柔軟)하다는 의미다. 자아 주관성의 영역이 어른보다 좁고, 판단과 실천방식의 수정보완이 어른보다 신속(迅速)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린이도 시간과 더불어 편향성의 압력에 굴복하게 되고, 그것은 나이 들수록 강화되기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노자는 “부드럽고 약한 것이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긴다”고 설파했다. 일컬어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이라 한다.

사정이 이럴진대, 스스로를 돌아보기에 이른다. 내게도 예외 없이 편향성은 있다. 나름의 근거에 따라 아름다움과 추함, 옳은 것과 그른 것,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구분이 확연하다. 미추(美醜)와 선악 그리고 호오(好惡)의 분별이 확연하다 함은 그만큼 포용과 관용(寬容)의 폭이 좁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나고 현저한 피아 구별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와 반대에 직면하기 쉽다는 얘기다. 최악을 피하는 것만으로 이미 세상은 살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내재하는 편향성을 지적하면서 옳으니 그르니 하는 식의 편 가르기는 정당하지 않다. 편향성에서 파생(派生)하는 차이를 인정하고 적정 지점에서 화해(和解)하고 악수하는 편이 현명하리라 믿는다. 페북과 작별했지만 그것이 제공하는 이로움을 새삼 깨닫는다. 나이를 먹어간다 해도 여전히 세상에는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많다. 생의 마지막 날까지 지적 호기심(好奇心)을 내려놓지 않음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것이 어쩌면 또 다른 편향성일지 모르지만, 편향성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의 개성과 인격도 형성되는 법이다. 그러니 남들을 비난하는 당신의 손가락을 거두고 그대의 편향적인 내면부터 고요히 응시(凝視)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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