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유쾌한 일이다. 미지(未知)의 곳을 다녀오는 일은 더욱 그러하다. 얼마 전 경북대와 하북대가 공동으로 주관한 국제학술대회 참석차 중국을 다녀왔다. 백두산이 있는 동북(東北)과 상해 소주 항주로 이어지는 강남(江南)은 다녀온 일이 있지만, 북경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불과 1박2일 체류였지만, 적잖은 상념이 동반했다. 스모그로 자욱한 보정(保定)과 청명한 북경의 하늘의 대비는 오늘날 중국이 처한 극한(極限)의 대비(對比)로 다가왔다.
김해공항에 내리면서 동지사(冬至使) 혹은 연행사(燕行使) 생각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었을까?! 1636년 삼전도의 굴욕을 경험한 인조는 심양으로 해마다 네 차례 조공사절을 보냈다. 청이 도읍을 연경(북경)으로 옮긴 1645년 이후에는 연1회 동지사를 파견한다.
기록에 따르면, 1637년부터 1894년 청일전쟁까지 조선이 청에 보낸 연행사는 모두 507회였고, 청이 조선에 보낸 칙사(勅使)는 169회다. 조선이 세 번 사신을 보내면, 청나라는 1회 사신을 보냈다는 얘기다. 조공관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통계다. 하지만 이것은 정기적인 사행(使行)이며, 부정기적인 사행이 무시로 이뤄졌다. 조공(朝貢)이란 적게 주고 많이 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으로서는 이문(利文)이 남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조선사절은 청의 문물을 배우고 서적을 구하는 등 학술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동지사 사절은 아니었지만, 연암 박지원이 그런 경우다. 1780년 정조 4년 삼종형 박명원이 청의 고종 70세 진하사절 정사(正使)로 북경에 가게 되자, 수행하여 압록강을 거쳐 북경과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이때의 견문을 정리한 책이 `열하일기`이며, 여기서 평소의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구88고속도로 함양 휴게소에 가면 물레방아에 대한 안내 표지판이 있다. 1792년 안의 현감으로 부임한 연암이 조선 최초로 물레방아를 설치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수력(水力)을 이용한 동력기구가 조선에 처음 설치된 해가 1792년이란 얘기다. 마음이 아득해지는 기록이다. `프린키피아`에서 뉴턴이 만유인력과 천체운항의 법칙을 밝힌 것이 1687년 일이었다. 그로부터 105년이 지나서야 조선에 설치된 물레방아라니!
그렇게 속절없이 세월이 흐르고 청일전쟁의 마당이 된 조선은 열강(列强)의 사냥감으로 전락한다. 물론 동지사 파견도 중단된다. 겉으로는 청을 섬기면서 안으로는 소중화(小中華)를 자처(自處)한 조선의 몰락은 예견된 것이 아니었을까?! 국가 정체성에 대한 최종심급에 대한 성찰 없이 큰 나라만 바라보았던 조선. 대국이 망하고, 아라사(러시아)가 무너지고, 일본이 들이닥쳤을 때 속수무책이었던 조선. 그것이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였다.
다시 105년이 흐른 2015년 설한풍(雪寒風)을 뚫고 경북대 학문 사절단이 하북대와 공동으로 학술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한중문화의 인지(認知)와 대화`를 주제로 양국의 교수와 대학원 석·박사들이 1박 2일 동안 참가한 대규모 학술대회였다. 한국어와 중국어 통역을 대동하면서 진행된 학술대회 기간 동안 하북대 한국어학과 학생들이 보여준 열기는 인상적이었다. 숙명여대에서 어학연수 목적으로 나온 학생들의 열의도 아름다웠다.
2천년 넘도록 중국을 바라보고 살았던 한국이라는 의식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학문적 동반자 의식이라고 할까?! 하지만 나는 서둘러 덧붙인다. 아직도 한국에는 고유한 독창적 이론이나 학문체계가 없다. 우리가 말하는 학문은 여전히 외부에서 도입되고 보급된 것이 주종이다. 이제는 우리도 세상과 역사와 학문을 바라보는 나름의 관점을 가질 때도 되었다. 그것이 학문 사절단 일원으로 중국을 다녀온 나의 소회(所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