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흰 눈이 뒤덮인 고즈넉한 시골의 교회당이 안개 속에서 걸어 나온다.
마치 내가 살았던 시골의 예배당을 옮겨놓은 듯한 풍경이 옛 추억들을 하나둘 깨운다.
불심이 강했던 할머니의 호통 때문에 우리 남매는 교회를 다니지 못했다.
그럼에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삼 남매는 묘한 설렘과 흥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평소에는 교회 근처에도 가지 않다가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팥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열심히 교회에 다니며 “아멘”을 외쳤다. 아마 넉넉지 못한 시대를 사는 할머니는 손주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지 못해 어쩔 수 없이그때만큼은 교회에 드나드는 것을 눈감아 주었으리라.
“거기서 나쁜 거 가르치지는 않더라.” 하며 종교에 관한 당신의 완곡한 신념도 마지막 남은 한 장의 달력 앞에서는 꺾이곤 했다.
온갖 색깔의 꼬마전구로 불 밝힌 트리로 꾸며진 이국적인 교회 안 풍경은 시골 아이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집에서는 맛보지 못한 여러 종류의 과자와 사탕들이 있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관심은 온통 트리 밑에 수북이 쌓인 선물 상자들과 단내를 풍기는 간식거리에 곁눈질하던 까까머리와 단발머리의 아이들이었다. 풍족한 물질문명 속의 요즘 세대들은 그때의 동심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전깃불이 꺼지면 별빛만이 시골 마을을 비추고 차가운 고요가 감돌았다.
새벽녘에 밖에서 들리는 언니 오빠들의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성가 소리는 잠결에 들어도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도시에서는 밤새도록 들리는 자동차 소음 때문인지 성가를 듣기 힘들었다. 비록 무신론자이지만 고요한 시골 길 밤하늘에 퍼지는 그 성가만큼은 아직도 그립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아침. 불교인 우리 집에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루돌프 사슴들을 이끌고 썰매를 타고 온 흔적이 있었다. 그 해는 산야가 온통 흰 색으로 뒤덮인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머리맡에 놓인 아버지의 늘어진 양말 안에는 뭔가 불룩한 것이 들어 있었다. 자식들의 환호성에 부모님은 야릇한 미소를 지었으며 우리는 세 개의 양말 안에 들어 있던 선물을 꺼냈다. 갈색 얼굴에 흰 눈물이 그려진 그 당시 유행하던 `못난이 삼 형제 인형`이 우리 삼 남매 선물이었다. 낙향해서 농사를 짓던 아버지였지만 한때는 배우를 꿈꾸며 도시의 변두리에서나마 문명을 접했던 젊은 날이 있었다. 그랬기에 아마도 산타클로스의 의미를 시골서 키우는 자식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으리라.
맏이인 난 부모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 나이였지만, 두 동생의 환한 웃음을 보며 부모님이 보내는 무언의 눈빛에 장단을 맞춰야 했다. 절대 가난의 그 시절 아이들에 비해, 요즘은 선물의 무게도 무거워져야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을 짓게 할 수 있다. 요즘 산타가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아마도 신용불량자가 되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못난이 인형의 뺨에 그려진 흰색 눈물이 닳고 닳아 그냥 눈물 모형만 남아 있을 정도로 간직하며, 작은 것 하나에도 오래도록 기뻐했던 그 시절이 이제 내게는 없는 것 같다. 세속적인 욕심이 비교적 적은 편이라고 자랑스레 말하고 다니지만, 그 욕심을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반대급부의 이득에 흐뭇해하는 영악함에 씁쓸해질 때가 있다. 그 옛날 인형 세트를 다 받은 것도 아니고, 세 개 중 하나만 달랑 받았음에도 가슴속엔 행복감으로 충만했던 그 마음들을 다시금 느낄 날이 올까. 어른들에게도 크리스마스의 축복이 주어진다면 그 시골에서의 단발머리 작은 여자애가 느꼈던 작은 행복과 동심 속으로 다시 한 번 발 디뎌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