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버리셨다. 모질게 추운 날 아버지를 영원히 보내드렸다. 그래서인지 아버지 기일(忌日)이 오면 어김없이 추위가 동반한다. 슈퍼 엘니뇨가 기승을 부리는 탓에 이번 겨울은 이상 난동(暖冬)이라는 얘기가 떠돌곤 했다. 그런데 아버지 기일이 되자 한반도에 북극한파가 찾아왔다. 우랄산맥 이동(以東)에 자리한 강력한 고기압 때문에 제트기류가 맴돌면서 북극에 갇혀 있던 찬바람을 몰고 한반도 상공까지 내려왔다는 것이다.
`어허, 참?!`고개가 끄덕여진다. 올해도 아버지는 예외 없이 매서운 동장군(冬將軍)을 선사하신 게다.
맵짠 겨울 냉기 속에서 신영복 선생이 눈을 감으셨다. 20년 20일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그곳의 경험을 대학생활로 비유하신 선생이 영면(永眠)하신 게다. 43년 10개월로 세계 최장기수 기록을 가진 김선명씨의 기록에 견줄 바 아니로되, 20년 세월 옥살이는 결코 짧지 않다. 거기서 보고 느낀 기록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하 `감옥`)으로 남겨졌다.
1988년 겨울 쾰른에서 유학생활 하던 나는 서울의 벗에게서 두 권의 책을 받는다. 그 하나가 이태의 `남부군`이고, 그 둘이 신영복 선생의 `감옥`이다.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이 전국적인 반향(反響)을 얻고, 한국사회 전반에 과거사 성찰의 기운이 차고 넘치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1988년은 나에게 그런 서책들로 기억된다.
`남부군`을 읽으면서 가슴 시렸던 것은 이념 하나로 `맞아죽고, 굶어죽고, 얼어죽은` 청춘 남녀들의 사연이었다. `산 자가 먹은 죽은 자의 밥`이란 대목은 그냥 읽어 넘길 수 없을 만큼 참혹한 것이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쫓기던 빨치산이 죽은 동료의 입가에 남아있던 밥알을 핥아먹는 장면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영혼을 쥐고 흔들던 `남부군`과 달리 `감옥`은 잔잔하다 못해 밋밋한 느낌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편지글 형식으로 엮어진 간명하고 응축된 문체가 인상적이었다. `이런 분이 어째서 스무 해나 감옥에 계셨던 것일까`하는 의문도 적잖게 들었다. 나중에 알려진 것이지만, 선생은 사형까지 언도받았다가 무기수로 감형(減刑)된 분이었다. 참형을 받을 정도도 아니었는데, 독재의 행악질은 무소불위(無所不爲), 그 자체였으니 두말할 나위 없다.
어떤 편지에서 목수가 집을 그리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는 집을 그릴 때 대개 지붕부터 그리고 그 다음 벽체(壁體)와 창문을 그린다. 하지만 선생과 함께 옥살이하던 목수는 주춧돌과 기둥을 먼저 그렸다고 한다. 거기서 선생은 삶에 대한 성찰에 커다란 전기(轉機)를 얻었다고 한다. 그저 지나갈 법한 작은 사건에서 인생의 비의(秘義) 하나를 깨우친 것이다.
유학생활을 하면서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이야기들을 깊이 생각하곤 했다. 여순사건과 제주 4·3항쟁을 거쳐 6·25 한국동란과 4·19 혁명, 5·16 군사쿠데타와 10월 유신, 10·26과 12·12 그리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 87년 평화대행진과 노동자 대투쟁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 굽이굽이에 흐르고 넘쳤던 함성과 선연(鮮然)한 핏자국을 기억하곤 했다. 그분들이 흘렸던 희생의 제단(祭壇) 위에 건설된 2016년 한국의 민주주의는 얼마나 안녕한지,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최소한도의 절차적 민주주의와 형식적 대의제도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8·15 해방처럼 도둑처럼 느닷없이 우리를 찾아온 것도 아니다. 이런 정도의 민주주의나마 우리가 향수(享受)할 수 있는 것은 정말 많은 분들의 고귀한 희생 덕분이다. 하지만 우리는 잊고 산다. 공기나 물처럼 애초부터 주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수도 서울 한복판에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랄산맥의 고기압이 자리를 비우면 북극한파도 슬며시 우리 곁을 떠날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입춘이 코앞일 터. 이제 추위도 절반은 지나가고 있다. 떠나는 것이 있으면 돌아오는 것도 있는 법이다. 겨울이 가면 따사로운 봄이 올 것이다. 겨울 한복판에 아버지 기일을 맞으면서 다가올 봄날의 향연(饗宴)과 만물의 생동을 감촉한다. 조만간 슈퍼 엘니뇨도 시나브로 우리를 뒤로 하고 멀리 떠날 것이다. 오늘따라 저녁햇살이 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