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봄이면 학교는 소음과 환락의 광장이 된다. 신입생 환영회, 동아리 모임, 고등학교 동창회 같은 행사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예전에 만연(漫然)했던 신입생 길들이기는 많이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교내 도처에서 술과 이야기로 늦은 시각까지 청춘을 노래한다.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통과의례일 것이다. 초중등 장장 12년 동안 억눌린 육신과 영혼의 해방을 향수(享受)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한국의 입시제도가 낳은 기형적인 풍경이다.
대학생들이 해방과 자유를 노래하며 어지럽힌 캠퍼스를 말없이 치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 청소를 담당한 분들이다. 분수가 딸린 `일청담` 호수에서, 녹지(地)가 살아남은 학내 곳곳에서 그이들은 오늘도 청소한다. 오로지 입시 하나만 보고 자라온 청춘들은 가정교육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다. “공부만 잘 하면 모든 게 용서된다!” 이기적이고 무질서하며 소란스러운 어린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한국의 대학생들!
그들은 거리낌 없이 강의실과 연구실 앞에서 소리치고, 전화 받으며, 떠들어댄다. 그들이 머물면서 생겨난 쓰레기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가능성은 매우 적다. 그들은 당연한 권리나 되는 것처럼 아무데나 쓰레기와 오물(汚物)을 버린다. 목련과 명자꽃, 매화와 산수유가 흐드러진 대학은 쓰레기장이 되어간다. 벚꽃이 만개(滿開)하는 시점이면 여기에 대구 시민들이 가세한다. 학교는 완전한 유희공간이자 쓰레기장으로 변한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에서 진리나 정의 혹은 자유를 추구하는 학생은 전멸했다. 한국 대학생들은 부모가 원하는 직장을 얻기 위해서 모여든 예비 직장인들이다. 직장인 양성소인 대학은 자유, 정의, 진리 같은 추상적인 가치(價値)를 버리도록 강요받는다. 응용학문을 가르치는 경영대학과 공과대학, 정보통신대학 등에 소속된 교수들은 교양 교과목 폐지를 부르짖는다. 취업에 아무짝에 쓸모없다는 것이 그들 주장의 요체다.
가파르게 상승하는 청년실업과 심각한 대졸실업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대학은 학생들을 취업시키는 기관만은 아니다. 대학에 부여된 기본적인 책무 가운데 하나는 학문 후속세대를 양성하는 것이며, 그 둘은 민주적인 시민의 소양(素養)을 길러주는 것이고, 그 셋은 인간의 본원적인 가치와 의미를 사유하도록 인도(引導)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한국의 황색언론들은 취업률을 대학평가의 중요한 잣대로 들이댄다.
언론사의 평가기준에 맞춰서 교육부도 뒤질세라 칼춤을 춘다. 1995년에 있은 규제완화의 일환으로 대학설립준칙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둔갑한다. 그 사품에 허다한 대학들이 난립하고, 2년제 대학들이 4년제로 승격돼 학력저하를 불렀다. 그것이 결과한 쓰라린 폐해를 감당하는 교육부 관료나 정치가는 하나도 없다.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구호는 허울 만으로만 존재한다. 코앞의 몇 년 세월도 내다보지 못하는 탁상행정이라니!
대학생들이 만들어낸 쓰레기를 며칠만 방치하면 학교는 그야말로 아수라판이 된다. 그래서다. 우리가 청소하는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그런 연유(緣由)에서다. 남들이 버린 오물을 묵묵히 치우는 그분들이 없다면 우리는 하루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쓰레기는 그렇게 치우면 된다. 하지만 앞선 세대가 만들어낸 시대의 쓰레기는 어찌할 것인가?! 대학 자율화 이름으로 양산(量産)된 허울만의 대학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버리는 자 따로 있고 치우는 자 따로 있는 세상은 혼탁하다. 권력을 누리는 자 따로 있고, 그로 인한 폐해를 감당해야 하는 자 따로 있는 세상은 황음무도(荒淫無道)하다. 21세기 대명천지를 살면서 여전히 낙후(後)한 관료제와 행정 서비스와 무너져가는 대학을 바라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시대의 쓰레기, 세대의 쓰레기, 무지와 이기와 탐욕의 쓰레기는 이제 그만 만들었으면 한다. 천지가 약동하는 봄에 이런 소박한 바람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