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가정(假定)을 해보자. 이 세상에서 어느날 갑자기 숫자가 모조리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사실 숫자는 물이나 공기처럼 생활 깊숙이 밀착되어 있어서 그 종요로움을 잊고 사는 경우가 다반사(茶飯事)다. 생물학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생명유지 활동에 필수적인 것이 물과 공기다. 사회-경제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정신적-지적 활동에서 그런 구실을 하는 것이 숫자다. 숫자를 빼놓고는 우리는 하루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없다.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는다고 하자. 의사의 모든 소견(所見)은 숫자로 기록된다. 키와 몸무게, 시력과 청력, 혈당과 콜레스테롤 수치, 혈압과 심전도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항목들이 숫자로 빼곡하게 정리되어 의사의 판단을 기다린다. 알프레드 크로스비는 `수량화혁명`에서 유럽이 근대를 열어젖힌 원동력을 `수`와 `양`에서 보았다. 고대와 중세의 질적(質的)인 세계관에서 근대의 양적(量的)인 세계로 빠르게 전환한 유럽의 승리를 포착한다.
대학을 필두로 그는 근대로 이행하는 전제조건으로 시간을 가시적(可視的)인 현상으로 확립한 기계시계, 기억력에 의지했던 음악을 오선악보로 혁신한 아르스 노바, 채무와 이익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복식부기, 인쇄술을 통한 인체해부도와 해도(海圖)의 광범한 보급 등을 거명한다. 그 모든 것의 세계 저류(低流)를 관통한 것이 수량화혁명이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의 논지에서 `오리엔탈리즘`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착목 자체는 설득력 있다.
한국인들은 어릴 적에는 수학도사라 불리지만, 대학에만 들어가면 쩔쩔 맨다. 초중고교에서 한국인이 배우는 수학이란 거의 계산능력에 지나지 않는다. 공식(公式)을 암기(暗記)하고 적절한 수준에서 계산을 반복하는 방식이 개선되지 않는다. 0(零)을 비롯한 수의 본질을 알지 못한 채 계산에만 몰두한다. 당연히 암산은(속셈은) 빠르지만 수의 본령(本領)에는 이르지 못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본보기를 들어보자.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수를 생각해낸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는지?! 고타마 싯다르타, 즉 붓다다! 그이는 `무량대수(無量大數)`라는 개념을 생각해냈다고 한다. 무량대수는 문자 그대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수`를 의미한다. 하지만 필자는 무량대수보다 더 큰 수를 알고 있다. 정말이다. 그것은 무량대수에 1을 더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어느 학생이 무량대수에 2를 더하겠다고 해서 필자에게 군밤을 맞은 일이 있다. 콜럼버스의 달걀이다.
붓다는 수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큰 수에 1을 더하면 더 큰 수가 되고 이것은 무한반복 가능하다는 수의 기본적인 속성(屬性)! 그래서 그런지 우리가 알고 있는 아라비아 숫자의 본향(本鄕)은 아라비아가 아니라 인도(印度)다. 기원전 3세기 무렵 발명된 숫자가 기원후 458년 무렵 `명수법(命數法)`과 동반(同伴)하여 아라비아와 중동, 북아프리카의 무어를 거쳐 에스파냐에 도달하는데 무려 800년이 소요(所要)됐다고 한다.
요즘엔 아라비아 숫자 대신 인도-아라비아 숫자라는 용어가 선호(選好)된다. 수의 나라답게 인도 출신 수학자도 많고, 수학분야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 수상자도 적잖게 배출하는 나라가 인도다. 숫자는 피타고라스학파의 경우에는 수비학과 결부되어 밀교 (密敎) 수준까지 진척되었다. 그것은 숫자에 담긴 의미가 철학과 사상을 넘어 종교의 영역까지 침투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첫머리의 `피보나치수열`을 상기하시라.
조금만 신경 쓰면 재미나고도 유쾌하게 숫자와 수학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을 터인데, 입시만 보고 달리는 한국교육은 여전히 죽만 쑨다. 숫자와 관련한 허다(許多)한 서적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출간되고, 영화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건만 표피적(表皮的)인 드라마와 노래와 춤에 빠져든 이 나라에서는 고급한 취향의 지적 (知的) 오락 개발에는 무능하고 무심하다. 언젠가 숫자와 수학과 생활을 결합하는 한국형 문학과 예술과 철학이 나오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