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작가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유수(有數)의 문학상을 받았다. 노벨 문학상과 프랑스 공쿠르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으로 불리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것이다. 영연방 작가에게는 `맨부커상`을, 비영연방 작가와 역자에게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여하는데, 한국 작가로는 한강이 첫 번째 수상의 영예를 얻었다. `채식주의자`는 읽지 못했으나, `몽고반점`을 읽고 그녀의 글쓰기에 적잖게 매료(魅了)된 적이 있었다.
권위 있는 문학상을 받는 것은 자못 유쾌하고 행복한 일이다. 연말만 되면 혹여 고은 시인이 노벨 문학상을 받지나 않을까, 노심초사(心焦思)하는 한국인들이 적잖고 보면 더욱 기쁜 일이다. 그런데 시인과 소설가 그리고 극작가는 어떻게 글을 쓰는 것일까. 핵심(核心)을 말하자면 어떻게 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인다. 한강의 수상소감과 남편 홍용희 문학평론가의 말에서 해답의 단서(端緖)를 찾을 수 있다.
첫째 가는 덕목(德目)은 글을 쓰는 작가의 문제의식일 것이다. 어떤 글을 써서 자신과 독자에게 내놓을 것인지, 그것을 고민하는 작가의 심도(深度) 있는 사유와 인식 그리고 차원 높은 문제제기가 1차적인 관건(關鍵)이라 믿는다. 한강은 `채식주의자`를 “인간의 폭력성과 인간이 과연 완전히 결백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본 작품”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의 두 가지 문제의식을 추출(抽出)한다.
그 하나는 인간의 폭력성이 어디까지 가능한가, 하는 것이며, 그 둘은 인간존재의 결백성(潔白性)이 얼마나 완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양자 공히 상당히 추상적이고 난삽(難澁)하여 쉽지 않은 사유와 인식론적 노력을 전제로 하는 듯하다. 나는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긴다. 소설의 재미는 있지만 깊이가 턱없이 부족한 소설이 넘쳐나는 시대에 이런 진지한 문제제기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 있기 때문이다.
좋은 글을 쓰는 두 번째 미덕은 퇴고(推敲)에 퇴고를 거듭하는 작가의 장인정신이라 생각한다. 한강의 글쓰기에 대해 홍용희는 말한다. “한강은 한 줄 한 줄 혼신(渾身)을 다해서 몸이 아플 만큼 쓰는 체질이다. 그렇게 열심히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고 고치는 과정은 옆에서 보기에 굉장히 존경스럽고 경이로운 느낌이 든다” 글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장인정신, 끝없는 반성과 수정의 되풀이를 보여주는 헌신성은 시시포스를 연상케 한다.
시시포스가 `도로(徒勞)`의 헛된 수고로움을 지금도 반복하고 있다면, 한강은 다듬고 또 다듬어 벽옥(碧玉)을 갈무리하는 장인을 닮았다. 서둘러 쓰지 않되, 그런 글마저 이리 보고 다시 살피는 인내와 자기결벽의 도저(到底)한 결과가 비평가와 독자를 사로잡은 비결이라 생각한다. 어느 글이고 고치고 다시 손을 보면 최초의 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지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우리는 백거이나 밀턴의 좋은 선례를 가지고 있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이 `혼불` 10권을 썼다는 작가 최명희나, 근면하고 정직하게 글을 쓰는 김훈 소설가나 좋은 글을 남기려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이 있기에 한국어도 세계적인 문학어로 재탄생하는 계기(繼起)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돈과 명예와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의 글쓰기가 아니라 자아와 세계와 인간을 천착(穿鑿)하는 느리고도 진지한 성찰이 한국문학의 깊이와 폭을 심화 확대하기를 기대한다.
한강은 `맨부커상`을 받음으로써 나처럼 글로 살아가는 인간을 경계하는 종요로운 구실을 하지 않았는가 한다. 문제의식도 치열하지 않고, 글쓰기 형식도 신통치 않으며, 퇴고의 수고로움을 마다하는 어쭙잖은 글쟁이를 깨우치는 죽비(竹扉)가 된 듯하다. 이로써 나는 재삼재사 숙고하고 살피며 바지런한 글쓰기로 `후생가외`의 기여를 능동적으로 수용하고자 한다. 역시 글이란 작가의 열렬함과 고단함을 먹고 사는 것이다. 한강의 수상을 새삼 축하한다!